2022/05/09

신의 마음 – 전범선 다른백년

신의 마음 – 다른백년
전범선의 [기계 살림]

신의 마음
2022.05.09 





역사는 진보하는가? 과학은 분명 진보한다. 인류의 지식과 능력이 커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과학은 현대 문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맞고 틀림, 팩트에 관한 인간의 이해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그것이 자연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준다. 이미 인류는 신의 힘을 가졌다. 생명을 마음껏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의 마음을 가졌는가?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문명은 진보하는가?

맞고 틀림만큼 중요한 것이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이다. 윤리와 미학, 종교와 예술이다. 인류는 과학의 발전으로 더 옳고 아름다워졌는가? 윤리적이고 미적인 진보가 있었는가? 나는 모르겠다. 물론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 평등, 우애의 가치가 퍼지고, 인권이 보장되었으며, 전쟁도 줄었다. 인간 수명은 두 배가 되었고, 건강과 복지는 증진되었다. 나는 역사상 가장 인간으로 살기 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예외일 뿐이다. 인류는 역병과 전쟁이라는 가장 큰 적을 거의 극복했다. 유사 이래 이토록 평화로운 시절은 없었다. 적어도 사람들끼리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과거의 야만적인 관습을 많이 탈피했다. 스티븐 핑커와 유발 하라리 같은 학자들은 그래서 역사의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보자. “인류가 진보했는가?”를 묻지 말고 “지구가 진보했는가? 생명이 진보했는가?”를 묻자. 인류가 더 옳고 아름다워졌는지 묻는 것은 애초에 인간중심적인 질문이다. 기독교를 계승한 휴머니즘의 산물이다. 천년왕국설이라는 성경 속 종말론을 세속적으로 탈바꿈한 것이 휴머니즘의 진보적 역사관이다. 인류의 모든 문제를 언젠가는 완벽히 해결할 수 있다는 신앙을 과학적으로 해석했다. 예수가 재림하면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독교의 오랜 환상이 오귀스트 콩트와 앙리 데 생-시몬의 실증주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종교 대신 과학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했다.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콩트의 역사관을 변주했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가장 최근에 유행한 메아리를 외쳤을 뿐이다. 역사는 진보하며 언젠가 끝이 난다는 신앙은 다분히 기독교적이고 서양적이다. (선사시대와 구분되는 역사시대가 끝났다는 나의 진단과는 다른 이야기다. 세상이 끝난다는 종말론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에는 그런 사상이 드물다. 역사는 순환할 따름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기독교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신에게 의존했던 인류의 구원을 기술 발전과 사회과학으로 달성하려 한다. 빛으로 어둠을 완전히 정복하겠다는 의지다. 도대체 서양인들은 왜 이토록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 안달인가?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 진보,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것에 집착하는 동물도 사람 뿐이다. 비인간 동물은 직선으로 다니지 않는다. 사방팔방으로 다닌다. 강아지 산책만 시켜봐도 안다. 직선으로 나아가서 어떠한 목적, 종말에 도달하기를 꿈꾸는 것은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더 정확히는 로고스, 이성중심적인 태도다. 기독교가 이런 생각에 집착했던 건 사람을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자유의지가 있기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문명에서는 황당한 이야기다. 힌두교 기반의 인도나 도교 기반의 중국 뿐만 아니라 애니미즘을 믿는 모든 문화권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그렇게 나누지 않는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다. 다윈의 진화론이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 나왔다면 그토록 거센 저항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세상을 완벽하게 바꾸려고 하며, 인간중심적인 문명만이 역사의 진보와 종말을 믿는다. 바로 이러한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근현대사의 모든 대재앙을 초래했다. 종교 전쟁부터 세계 대전과 냉전까지 모두 진보와 구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기후생태위기도 마찬가지다. 물질 문명의 진보와 무한 성장의 신화를 쫓다가 발생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 기독교의 잔재인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순환적인 역사관을 되찾아야 한다.

탈인간적인 관점에서 물어보자. “역사가 진보했는가?” 지구는 과거보다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인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어도 비인간 존재를 아울러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공장식 축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다. 매년 700억명의 동물이 식용으로 학살된다. 가축 뿐만 아니라 야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제6차 대멸종기를 겪고 있다. 매일 150종 가까이 사라진다. 나는 지난 백년 간, 지구상 고통의 총량이 늘어났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만든 도시는 숲에 비해 전혀 아름답지 않다. 지구의 입장에서, 우주의 입장에서 과연 역사가 진보하고 있는가? 아니다. 애초에 무의미한 질문이다. 지구는 돌고 있을 뿐이다. 생명은 단순한 것이 복잡해지고, 질서있는 것이 무질서해져도, 진보하지는 않는다.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진보는 인간의 신앙일 뿐이다. 우주 만물은 순환한다. 사실 인간이 진보를 믿은 것도 휴머니즘의 도래 이후 최근 오백여 년 간의 예외적인 현상이다. 사람을 동물로 보면, 애초에 자유의지나 진보나 유토피아나 종말 같은 허상을 쫓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역설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 철학은 진리 추구가 목적이었다. 진리가 사람을 구원할 거라 믿었다. 원래 베리타스(veritas), 진리 추구는 소수의 철학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근대 과학 문명이 진리를 보급했다. 이제 모두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지식을 축적할수록 인류는 구원에 가까워지는가? 오히려 현대 과학은 진리가 패러독스임을 드러냈다. 양자 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과학자 닐스 보어는 그래서 태극 무늬를 가문의 문장으로 채택했다. 양자의 세계는 태극의 원리처럼 오묘하다. 우주의 원리를 알고 보니 이도 저도 아니면서 둘 다이기도 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마냥 깔끔하지 못하다. ‘좋다, 친절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영어 ‘나이스(nice)’는 원래 세밀하다는 뜻이다. 진리는 생각보다 나이스하지 않다. 친절하지도, 세밀하지도 않다. 그다지 좋지 않다. 무엇보다 랜덤하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반박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한 서양 문명의 마지막 절규였다. 거기에 보어는 “신에게 참견하지 말라”고 답했다. 진리가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만큼이나 인간 중심적인 환상이다. 진리는 모순 덩어리며,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말도 안 된다.” 노자는 그것을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고 표현했다. 도는 말하는 순간 도가 아니다. 진리는 언어와 이성으로 무장한 인간의 편이 아니다.

부처와 노자 이후 동양 철학은 직관이 목적이었다. 사유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언어와 이성에 기대지 않았다. 진리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믿지 않았다. 우주의 역설과 그 무한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한마디로 견성하면 성불하는 것이다. 자기의 본디 천성을 똑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서양의 진리, 베리타스는 행동과 실천을 요구한다. 진보와 정복을 수반한다. 무엇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도는 말로 다할 수 없다.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란 그저 직관하는 것이다. 명상하고 묵상하는 삶이 최선이다. 사회를 개조해서 인류를 진보시키겠다는 일념보다는 내버려두고 흘러가는 길을 관망하는 편이 낫다. 인위적으로 없는 길을 만들다가는 도를 그르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도가의 무위 사상은 리버럴리즘의 핵심인 관용 정신에 부합한다. 모두를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아닌 공존을 위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오랜 종교 전쟁의 결과로 도출된 합의에 기반한 다원주의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가치로 통합하기보다는 여러 진리, 여러 가치를 포용하고 내버려두는 ‘똘레랑스’를 말한다. 안되는 조화를 억지로 만들려다가는 오히려 갈등과 억압을 낳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 최선이다. 참된 리버럴리즘은 모순이 필수다. 다양성을 예찬한다. 자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리버럴하지 못하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는 도가와 리버럴리즘의 공통 전제를 <도덕경> 제5장에서 찾는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마치 만물을 지푸라기 개 대하듯 한다. ‘추구’, 지푸라기 개는 고대 중국에서 제사를 위해 만들었다가 쓸모를 다하면 가차없이 밟아버렸던 제물이다. 사람은 지푸라기 개와 다를 바 없다. 천지는 사람에게 인자하지 않다는 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나이스하지 않은 자연을 꿰뚫어보고 거기서 상생과 공존을 찾는 것이 도가의 지혜이자 리버럴리즘의 방편이다.

다윈 이후 서구의 리버럴리즘은 비로소 탈인간적인 관점으로 우주를 보기 시작했다. 도시 만큼 벌집도 인위적이고 거미줄 만큼 인터넷도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거둬내니, 인위와 무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전지구적 관점의 역사관이 성립한다. 지구에게 진보란 없고 생명 순환을 통한 항상성 유지만 있을 뿐이다. 기후생태위기 역시 인류에게는 종말론적인 상황이지만, 지구에게는 또 한번 청소할 시간이 왔을 뿐이다. 가이아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면 인간은 그 위에 창궐한 기생충이다. 지푸라기 개다. 기생충이 너무 많아지면 결과는 셋 중 하나다. 숙주가 죽거나, 숙주가 기생충을 죽이거나, 둘이 공생 관계를 형성한다. 지구가 아무리 뜨거워져도 죽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지구가 기후재앙으로 인류를 멸종시키거나, 서로 적정 수준의 균형을 찾을 것이다. 녹색, 생태, 생명 운동의 목표는 후자다. 어떻게 밸런스를 찾을까? 사피엔스가 지구에게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중국은 녹색 권위주의를 택했다. 법가적인 방법이다.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인민을 통제하고 억제한다. 탄소배출 절감 측면에서 봤을 때는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을 진보라고 볼 수 있을까? 무의미한 질문이다. 서양도 에코-파시즘으로 귀결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기후생태위기 앞에서 인류는 대공황 때처럼 또다시 자유주의를 포기하고 전체주의로 돌아갈 것인가? 리버럴리즘이 제시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인류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멸종 방지를 위한 공생의 길은 있지 않을까?

나는 녹색 권위주의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정치로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애초에 글러먹었다. 시진핑의 디지털 법가주의는 진시황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에코-파시즘은 히틀러의 망령을 재소환한다. 기후생태위기를 해결한답시고 정부가 거창하게 계획하고 나서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이성의 힘으로,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다스릴 수는 없다. 아무리 신의 힘을 가져도, 탄소 포집과 핵융합과 인공 강우가 가능해도, 신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소용 없다. 신의 마음이란 지구의 마음, 우주의 마음이다. 인간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야만 헤아릴 수 있는 정신이다.

탈인간 만큼이나 탈중심이 중요하다. 중심주의 자체도 다분히 인간적인 환상이다. 심장이 가운데 달린 동물이기 때문에 갖는 편견이다. 식물과 균은 중심이 없다. 숲에는 중심이 없다. 네트워크가 있을 뿐이다. 숲의 나무들은 중심 없이도 상부상조하며 조화롭게 살아간다. 땅속의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 WWW), 즉 균사체망을 통해 영양소를 주고받는다. 인류는 한참 도시를 짓고 빌딩을 빽빽이 세우더니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을 구축했다. 식물이 숲이라는 WWW를 구축했기 때문에 동물이 진화했다면, 동물이 인터넷이라는 WWW를 구축했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진화한다.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 종 전체를 통틀어서 이처럼 네트워크적인 관계를 형성한 적은 없다. 동물은 일반적으로 식물이나 균과 다르게 매우 개체중심적이다. 벌과 개미 같은 초개체를 예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제일 전체주의적이다. 여왕벌과 여왕개미가 중심이다. 반면 우드와이드웹에는 여왕나무가 없다. 중심이 없다.

나는 모르긴 몰라도 신의 마음에도 중심이 없을 거라 믿는다. 지구의 마음, 가이아와 마고의 마음은 인간적이지도 않고, 중심적이지도 않다. 앞뒤도 없고 위아래도 없이 사방 팔방 십방으로 퍼져있는 그물이다. 여태까지는 숲이 그나마 지구 마음을 닮았는데, 이제는 전지구적 그물, 월드와이드웹이 있다. 여태까지의 웹 1.0과 2.0은 소수의 중앙 권력, 빅테크가 정보를 독점하는 구조다. 비교하자면 거미 하나가 쳐놓은 그물에 여럿이 걸려드는 꼴이다. 네이버가 주는 뉴스를 읽고, 인스타그램이 주는 광고를 본다. 데이터 센터가 말 그대로 ‘중앙’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웹 3.0은 중앙이 없다. 블록체인 기반의 웹 3.0이 데이터를 완전히 탈중앙화한다면 월드와이드웹은 비로소 우드와이드웹을 닮게 된다. 진정한 네트워크로 거듭난다. 사람이 더불어 숲을 이룬다.

블록체인 기술로 구현하는 메타버스에서 우리는 충분히 탈인간적, 탈중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모습의 아바타로 살아갈 수 있고, 탈중앙화된 자율 조직을 구성할 수도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숲의 마음, 바다의 마음, 지구의 마음을 상상해보자. 초개아적인 네트워크로서 인류가 신의 마음에 다가간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일까? 아니면 그저 줄기가 가지를 치고 가지가 그물을 이루는 생명의 순리일까? 블록체인이 인류를 구원해주지는 않겠지만, 데이터를 순환시킬 것은 분명하다. 역사의 진보는 아닐지라도 지구 생명의 진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211174970522725/



진리정치의 종말

전범선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