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5

Namgok Lee | Facebook 리링(李零)을 읽고 있다.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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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링(李零)의 ‘논어, 세 번 찢다’는 서문부터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주눅을 준다.
진짜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절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혼잣말을 하며 ’오버‘하다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답을 찾아주어서는 안 된다. 공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듣지 않고, 말하지 않은 것도 그의 입을 빌려 우리를 대신해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나는 향을 피우고 혼잣말로 ‘오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입을 빌려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게’ 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찔끔.
나는 공자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채 오랫동안 비난 배격해 온 반동(反動)으로 약간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있다. 

‘역사적으로 공자를 떠받드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정치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한나라 유자들이 취한 방법이었다.
둘째는 도통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송나라 유자들이 취한 방법이었다.
셋째는 유학을 종교로 삼는 것으로, 이는 근대 이후 기독교의 자극을 받아 형성된 구세(救世)설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는 모두 이데올로기로 공자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공자를 해치는 짓이다. 나는 이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간다. 공자를 정치화하고 도덕화하고 종교화하는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셋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우매하다 하겠다. 백성을 우매하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백성을 위해 우매해진다.‘
나는 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역사의 격변을 실제로 경험한 현대 중국의 학자가 공산당 정권 아래에서 어떻게 논어를 읽고 있는가하는 것을 아는 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경험이다.
아마도 학자가 아닌 내가 이 책을 읽다가 부딪치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지만, 특히 내가 논어에서 발견한 공자의 무지(無知)에 바탕을 둔 탐구와 인식 그리고 실사구시의 실천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나는 나름의 판단으로 공자의 사상은 그 생존 당시의 정치체제에서 살려지기 힘든 것은 물론, 지금도 전체주의나 독재 체제에서는 살려질 수 없다고 보고 있는데, 현대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배격 또는 찬양 등을 거치며 공자가 평가되고 있는지 다소라도 그 편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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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4 m  · 
리링(李零)을 읽고 있다.
몇 곳을 옮긴다.

<공자는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17-25)고 했다. 원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하지만 최근 사람들은 대단히 시끄럽게 떠들어대곤 한다. 공자가 성인인데 어찌 부녀자를 무시하여 위대한 여성과 덕이 부족한 소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겠느냐, 설마 그에게 어머니가 없었겠느냐며 공자를 대신하여 서둘러 ‘여자(女子)’를 ‘여자(汝子)’로 읽고 ‘소인’을 어린 아이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것이 바로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공자의 변명’이라는 제호로 칼럼을 쓰고 있지만, 이런 식의 왜곡된 변호는 단호히 거부한다.
시대의 한계인 동시에 공자 자신의 명백한 한계라고 본다.

<공자의 일생은 매우 불행했다. 어릴 때도 그는 불행한 아이였으며,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도 눈물로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중략)
공자를 연구한다면 이들 ‘성적도’를 봐두는 것이, 송(宋) 이후로 공자를 논하면서 그가 어떻게 신비화되었는지를 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략)
사마천의 붓 끝에 묘사된 공자가 아무래도 비교적 믿을 만한 것이다. 
때를 잘 못 만나고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참된 모습이다.>

공자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때를 잘 만났는가! ㅎㅎ

<공자가 사진을 남기지도 않았으니 진짜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만약 새로 조각을 한다고 하면 조각가의 상상에 맡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으므로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에 유자들은 마침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브랜트 식의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전부’란 다 있다는 뜻, 즉 마음대로 그린다는 뜻이고, ‘전무’란 아예 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것이든 모두 당신의 ‘상상’에 맡긴다는 것이다. 
상상을 하면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따르고 지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면 멍청이 아닌가?>

나는 공자가 태어난 취푸(曲阜)를 가본적도 없고, 별로 가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 책에서 리링의 안내로 돌아보았다.
역사를 통해서 치권력이나 숭배자들에 의해 우상화나 신비화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흔적을 보느니, 논어를 통해 25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내 상상도 허(許)하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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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t5000a5l13chn1su70972i  · 
쾌청.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한 번  써보고 싶은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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