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7

친절한 불교학, 그리고 불교학의 리더십 -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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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불교학, 그리고 불교학의 리더십
  •  윤남진 소장
  •  승인 2010.04.21 15:17
  •  댓글 2

[서평] 윤남진(NGO리서치 소장)
『불교학과 불교』(권오민 지음, 민족사, 2009)를 읽고
 ‘소승적ː시야가 좁아 개인적 욕심에 얽매이며 옹졸한. 또는 그런 것’
‘소승적’이란 말에 대한 국어사전의 풀이다. 이 뜻풀이는 대체로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일을 좀스러운것으로 경멸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역사’로서의 소승(小乘)도 과연 그런가?

권오민 교수가 쓴『불교학과 불교』(민족사, 2009)는 이 질문의 일단에 대해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게 응답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소승적인 것들’을 위한 변론이며, 모든(!) 대승적인 것의 총체적 우월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그런 류의 언술들의 급소를 향한 절제된 일격이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만약 현실불교와 현실불교학에 대한 약간의 불만이 있고 그 불만의 뿌리는 무엇이며, 나아가 그 불만은 어떻게 극복 가능한 것인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의지가 있다면, 과감히 우리의 사고구조나 패턴을 시급히 ‘소승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소승적인, 온전히 소승적인
왜냐하면 이 책은 한마디로 오늘의 현실불교학에 대해 다수가 느끼고 있는 알 수 없는 불만의 혐의가 ‘의심과 탐구’의 학문적 풍토가 결핍된 상황에 있는 것임을 파죽(破竹)의 문체로 주장하고, 설명하고,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교강원의 교과과정에 대한 분석,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인도불교학 연구의 현실에 대한 자기비판적 점검, 불타의 깨달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상투적 결론에 도전하는 경전적 증명논문 등을 통해 ‘의심과 탐구’라고 하는 ‘소승 아비달마적’ 태도가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를 확인시키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아비달마라고 하는 고정적·번쇄적·전문적인 훈고해석에 빠져버려 중생제도(衆生濟度)라는 불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위키백과 한국어판의 ‘대승불교’에 대한 설명 중 일부)하였다고 하는 부파시대의 불교(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더불어 ‘대승불교’에 대한 막연한 선호가, 혹시 중생구제라고 하는 당위명제의 방패 뒤에 숨어 탐구의 치열성을 소실하고, ‘구호와 선전’에 안주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 온상이 되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여러 질문들
그렇지 않다면, 독자들이 진정한 대승예찬론자라고 한다면, 저자가 던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소승적인 방식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넘어서는 대승적인, 나아가 선적인 방식으로 명쾌하게 논증해야 할 것이다.

_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왜 깨닫고자 하는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_불타의 깨달음은 연기법인가, 아니면 사성제(혹은 3明)인가?
_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거짓이라면, 진실은 무엇이며, 거짓된 현실세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런 진실을 어
떻게 하면 실현할(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_찰나생멸하는 세계가 어떻게 인과상속의 지속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_어떻게 진실의 무위가 허망의 유위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_성문은 보살로 전향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_도대체 그(부파?)들 사이에 무엇이 문제였던가? 무엇이 문제였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그토록 많은 학파(종파)들과 사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던가?
_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그 같은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논거를 제출하였는가?
_이른바 교상판석으로 일컬어진 문헌 비평은 수당시대는 물론이고 위진시대에도 존재하였거늘 하물며 오늘날에야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저자가 글의 곳곳에서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그에 대해 정연하게 논증한 바에 대해 열심히 읽기는 했다. 그러나 검은 것이 글씨이고 흰 것이 종이임을 알 뿐임을 통탄해야 할 형편인지라 일독을 하고 나서도 위의 질문에 답할 수준은 못된다.

이 서평을 통해 독자들이 직접 확인해 보시라 권유하는 것으로서 저자의 노고에 대해 보답할 따름이다. 다만,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또 서평을 통해 공개적으로 일독을 권고하는 것은 저자에게 다소 ‘비학문적인 작업에 대한 공개적인 프러포즈’라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일단에 대해 고백해야 하겠다.

친절한 불교학

권오민 교수는 이 책 제9장 <불타의 깨달음은 연기법인가?(2)>라는 논문에서 ‘다문의 성제자는 이러한 인연법(즉 연기법)과 연생법(즉 연이생법)을 바로 알고 관찰하여, ... “지금의 나(중생)는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지금 존재하게 된 것이며, .... 나는 어디서 왔으며,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의심하지도 않는다.’라는 경설을 인용하여, 불타는 이와 같은 ‘유정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12연기를 설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통섭』제12장(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p464)에서 에드워드 윌슨은, 고등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 새로운 활력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특이한 열정적 활동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제에 대해 ‘스스로 오랫동안 무언가를 주장해온 신학’이 오히려 문제를 망쳐놓았고, 아직도 ‘석기 시대의 상식에 기반을 둔 규칙들에 저당 잡혀 있는 신학’은 이제 탐구의 문이 활짝 열린 실재 세계에 대한 위대한 노력들을 흡수 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물론 불타가 의심할 바 없이 밝게 알아 제거한 ‘유정의 의혹’과 윌슨이 제기하고 있는 ‘인간 존재의 근본 물음들’이 꼭 들어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교학의 이 근본 물음들과 그에 대한 논증의 방식이 서구의 신학처럼 ‘석기 시대의 상식에 기반을 둔 규칙’들의 한계에 매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저자의 초지일관된 주장인 ‘구호와 선전의 불교학’에 대한 경계가, 저자가 일종의 헤어나야 할 ‘주박呪縛’이라고 칭하는 것이, 현실불교학이 ‘석기 시대의 상식에 기반을 둔규칙’으로 퇴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어떤 ‘불교학의 사명선언’처럼 들린다.

그러면서도, ‘인간 존재의 근본 물음들’을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려 더 쉬운 언어로 다루어야하며, 각 조직 수준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연합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윌슨의 이어지는 목소리가 거역할 수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권오민 교수는 ‘쉬운 불교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고 하지만 필자는 ‘교양 수준의 불자’로서 그 주장에 백퍼센트 동의할 수 없다.

저자 스스로도 과거 경전결집에 대해 거론하면서 그것이 ‘출가수행자를 위한 기초교과서’(28쪽) 역할을 하도록 법수(法數)에 따른 정리 등 일정한 체계를 잡아 편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하고 있기도 한데 이는 가르치는 사람의 초심자를 위한 친절일 것이다.

또한 저자가 인도불교학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점검 하면서 ‘적어도 감이라도 잡을 수 있도록 목차와 역주가 첨부된 불교(혹은 인도철학) 제파의 불교 경론과 이에 근거한 군소리를 뺀 소상한 개론서(비록 ‘세미 학술서’일지라도)를 그들(후학)의 손에쥐어줘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자탄과 다짐을 하고 있듯이, 어쩌면 우리는 ’진정으로 쉬운 불교학‘을 할 수 있는 수준에 있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 필자는 작은 제목으로 필자와 같은 교양수준의 불자에게도 ’친절한 불교학‘이었으면 하고 토를 달아본 것이다.

불교학의 리더십

끝으로 우리가 매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본다. ‘불교학의 리더십’에 관한 문제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학의 학문적, 사회적 기여에 관한 문제다. 필자는 심오한 종교적, 철학적 제문제에 대해서 거론할 처지가 못되며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불교학의 리더십’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구축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설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앞서 저자가 제기하고 있는 다양한 물음들을 열거한 바와 같이, 여기 인류사의 위대한 유산인 주요 불교학파들의 중요 물음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당대의 다양한 학문의 영역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핵심적 물음들이 있다. 물론 이 물음들은 서로 일정한 배경과 목적에 따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 또는 다소 불확실하면서도 위험요소들을 포함하는 어떤 미래의제들이 있다.

자, 이 질문들을, 이 의제들을 어떻게 엮어갈 것인가? 이 질문들은 어로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얼개를 먼저 탐구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당대적인 ‘교상판석’에 대해 언급하였듯이, ‘출가수행자를 위한 기초교과서’로서의 다양한 갈래에 따른 경전 결집을 추론하듯이, 세미학술서를 언급하듯이.

어쩌면 불교와 불교학의 리더십은 팔만대장경(과거)의 물음들을 당대의 현실과 미래의 주체적 기획하에 재조직화함으로써, 현실 학문과 현실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발화시키는 촉매로서의 ‘창의발상지원시스템’을 학문적 혹은 매체(소통)적, 문화적으로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수 있겠다. 불교교학적, 불교사학적, 응용불교학적 성과는 그 다음 문제다.
이런 학문적 성과가 어떻게 다양한 콘텐츠로 의미있게 생성되는가 하는 문제도 그 다음 문제일 것이다.

불교학의 상상력
필자는 종종 구글의 고급검색 초기 화면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떤 정보들을 검색하는 실험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미래연구자들은 조만간에 정확도에서 획기적인 검색법이 구글을 통해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검색. 그렇다 단순한 검색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지금은 30%정도의 쓸모없는 정보가 동시에 끼어들어오는 불충분한 검색의 정확도를 개선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구글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한번 깊이 고민해 볼만한 문제다.

검색 엔진을 고만하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제기한 질문(물음, 의심)의 (방법들의) 갈래와 이의 과거(불교학)-당대-미래적 연결지점들을 탐구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검색엔진이며 당대적 교상판석의 방법이 아닐까?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불교학자와 불교인 스스로의 머리고 생각하고 가장 정확한 답을 찾아가는 방법의 얼개를 짜는 작업을 ‘소승 아비달마 불교학자’(!)인 저자에게 제안하고 싶다.

갈망하자면 올 무더운 여름방학을 통해 그 작업에 어느 정도 희망과 가능성의 싹을 보았으면 한다.

끝으로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한 대목.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불교학은 때로 의심과 탐구이면서도 또한 시적인 상상력이기도 하다. 불교학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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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히망슈 2010-04-24 22:43:28
근데
저 질문이란 것들도 하나같이 밥이되오? 돈이 되겠오?
 

히망슈 2010-04-24 22:41:12
법정 스님의 글을 보면 느낌으로도 오고 그 분이 머무르,ㄴ 시선에 다가 가지기도 하고
혼자 앉아 골똘히 사유했을 그 세계에도 반응해지고... 하여간 편안하게 때롤 잔잔하게
혹은 맑아지기도 같이 깨어나기도 하는 맛이 있는데요.
하여간 무슨 낱말만 잔뜩 나열하는거요??? 글 좀 쉽게 써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