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의 길-구산선사
승인 1997.12.02
구산스님은 수행자들의 정신적 귀의처이자 지주적 좌표로 널리 추앙받는선지식이다. 속명은 鎬 법명은 秀蓮 법호는 九山이다.
27세때 우연히 병을얻어 신음하던 중, 진주에 사는 한거사를 만났는데 "본래 청정한 自性 자리인데 어디에 병이 붙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정신이 아찔해지며 발심을 하게 되었다.그길로 지리산 꼭대기의 영원사를 찾아 백일동안 본래 청정한 자성을 찾기로 하고 천수기도를 하여 몸의 병을 고치고 불법에 비로소 눈을 떴다.
1937년 29세때 부처님 오신날에 효봉스님을 은사로 축발한 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의 정각토굴에서 생사를 건 정진에 들어갔다.
1946년 은사이신 효봉스님이 해인사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자 스님을 시봉하며 가야산 중턱에 법왕대를 짓고 참선안거를 시작했다.
스님의 수행은 의.식.주를 잊으지가 오래였다. 생쌀 솔잎만 먹으며 3년간 장좌불사를 했으며"절구통수좌"라는 은사 효봉스님의 엄격한 지도로 평생은 따뜻한 방에 한번누워보지를 못했다.또한 한벌의 납의로 평생을 지내셨으며 열반하기 직전까지 자신에 대해서는 무서우리만큼 용맹정진을 했고 수행 남자들에 대해서는 부단한 가르침과자비를 베푸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생쌀과 솔잎으로 차가운 토굴에서눕지않고 3년간을 수행한 스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수행을하는것을 본 선방수좌들은 스님에게 見處가 있을 알고 법문을 청했다.처음으로 법상에 오른 스님은 "달이 일천강에 비치고 파도는 달을 비추니/하늘은 만물을 안고 나는 하늘을 안았도다/일체의 名相이 그대로 진리이거늘/어찌 장엄법계가 말이 없으랴"하고 이내 법상에서 내려와 토굴로 발길을돌렸다.
법왕대 토굴에 돌아온 스님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일체 식음을 끊고 생사를 건 정진에 들어갔다. 이렇게 7일동안 수행을 하던 어느날 밤새차게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스님의 귀전에 메아리쳤다.귀전에 시원히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그동안 가슴에 응어리졌던 그 무엇이 눈녹듯이 녹아내렸고 "이뭣꼬"화두를 들고 수행을 하던 스님은 토굴문을 열어 젖히며 새차게 부는 바람소리에 맞춰 기쁨에 찬 깨달음의 노래 <悟道頌>를 불렀다.
深入普賢毛孔裡 捉敗文殊大地閑冬地陽生松自綠 石人駕鶴過靑山
"깊이 보현의 터럭속에 들어가/문수를 불잡으니 대지가 한가롭네/동지날에 소나무 스스로 푸르르니/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간다"
6.25사변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지자 진주 응석사에 가서 보림을 위한 정진을 하던중 부산 금정선원에서 수행중인 은사 효봉스님에게 게송을 지어 올렸다.
大地色相本自空 以手指空猜有情 枯木立岩無寒署 春來花發秋成實
"이세상 온갖 물질적인 것들은 본래 실체가 없는것/손으로 허공을 가리킴이 어찌 그곳에 마음이 있어서랴/마른나무, 선 바위에는 춥고 더움없고/봄이 오면 꽃 픽가을에는 열매 이룬다"
효봉스님은 게송을 받아 보고 흡족한 미소로 보이시고는 전법게송을 내렸다.
贈九山法子 栽得一珠梅 古風花巳開 汝見應結實 還我種子來구산 법자에게내린다.
"한 그루 배화를 심었더니/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그대 열매를 보았으리니/내게 그 종자를 가져 오너라"
스님의 수도처인 법왕대는 호랑이굴옆이었다.
그것은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정진을 방해하는 睡魔도 쫓고 잡념을 제거,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의지의 선택이었다.
생쌀과 솔잎으로 1천여일의 세월을 장자불와하며 모든 것을 자체 해결하는억척(?)을 보였다. 토굴 근처에 콩을 심어 가꾸어 식량을 삼았다.
그런데한철 땀흘려 가꾼 양식들을 산짐승들이 자주 출현 마구 파헤치고 양식들을먹어 치웠다.
스님은 가끔 이를 목격하고 몽둥이라도 들고 쫓을라치면 큼직한 멧돼지는 힐끗 돌아볼 뿐 움직이지도 않았다.그런데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토굴곁에 호랑이굴에서 커다란 호랑이 한마리가 크게 성난 모양으로 으르렁거리며 달려가 멧돼지를 겁주어 쫓아보낸것이었다.
3년여 동안 호랑이는 스님의 정진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 깨달음을얻도록 하는데 도움을 줬다.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서 5백자 혈서를 쓰기로 했으며 "佛日會"를 창립 대규모전법활동을 했으며 스님의 주도로 개원한 불일국제선원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스리랑카등의 승려 지망자가 한국승려와 똑같이 한국불교를배우고 포교활동을 하는등 한국 불교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중의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들려주며 일생을 수행과 교화에만 진력하던 구산스님은 자신은 물론 후배 제자들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했고 법을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늘 자비와 미소와 함께 자상한법문을 내렸다.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백장(百장)의 청규를 몸소 실천해 70노구에도 불구하고 손수 밭을 매는 등 일손을 놓지 않아
"일밖에 모르는 스님"이란 말을 듣기까지 했다.
근대 한국불교에서는 구산스님을 "효행의 제1인자"로 꼽고 있다.
은사 효봉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빨래는 물론, 대소변 수발까지 모두 스님이 들었다.
조계총림의 최고 어른이었으면서도 송광사 화장실 청소를 손수 할 정도로가림이 없었다. 생전의 九山스님은 자신을 돌사자(石獅子)라고 했다.
"나는조계산 숲 속에서 채마밭이나 매다가 오가는 운수객들의 묻는 말에 응답이나 하고 동서양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인간의 행로를 물으면 방향을가리키며 맞고 보내는 <네거리의 돌사자>다."스님은 평소 공부하는 사람을 몹시 좋아했는데 상좌 한 사람이 스님 법문을 흉내 냈다가 크게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다.
스님의 외출중에 많은 신도들이 스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는데 한 상좌가 신도들에게 평소 스님의 법문을 전달하고 있었다.외출에서 돌아온 구산스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주장자를 내리쳤다.
"이놈아 네가 앵무새냐. 못된 짓을 하지 말고 네 공부나 열심히 하거라."
효봉 스님의 법상좌로서, 조계종의 개조인 고려 보조국사의 선풍을 이은 九山스님은 우리 불교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 세계 도처에 한국 불교의 꽃을 피웠다.스님은 해외포교를 위해 세 차례나 미국을 다녀오는등 잦은 해외 나들이를 사양치 않았으며 미국에 慧明, 불란서에 慧行등 39명의 외국인 상좌를비롯, 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가르쳤다.九山스님은 열반 1년전 자신의 생신을 맞아 문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년생일을 못보고 열반에 들 것"이라고 예언한 뒤 송광사가 공원화함에 따라수도도량으로서 수행 분위기가 상실되어 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1983년 12월 15일 스님은 제자들을 모이게 하고 사후의 일을 당부했다.
"내몸에 주사하지 말라 좌선의 자세로 열반할 것이니 좌관을 쓰고 좌장을하라, 화합 단결하고 선풍에 누를 끼치지 말라, 자기 자신을 속이는 중노릇하지말고 실답게 수행에 임하라"
"스님 한말씀 해 주셔야지요""내가 이제옷을 갈아 입어야겠다"그리고는 열반송을 읊었다.
滿山霜葉이 紅於二月花하니物物頭頭가 大機全彰이로다生也空兮 死也空하니能仁海印 三昧中에 微笑而逝라온산의 단풍이 봄의 꽃보다 붉으니/삼라만상이 큰 기틀을 온통 드러내도다/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하니/부처의 해인삼매중에 미소지으며 가노라.
1983년 12월 16일 6시25분 저녁예불을 마치고난 스님은 "이제 옷 갈아 입어야겠다"고 말을 했다.문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봉하는 스님이 새옷을 준비하여 스님이 처음출가하여 5계를 받은 방으로 들어가니 좌선하는 듯 앉은 채 坐脫入忘했으니세수 75세 법납 45세였다.
<林秉禾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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