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4

오강남 - 함석헌 무교회에서 퀘이커교로



함석헌기념사업회



신천 함석헌 / 오강남
작성자 바보새 16-07-19 10:54 조회1,039회 댓글0건


신천 함석헌
민주화에 앞장섰던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법보신문 2011.03.26 11:42 입력 발행호수 : 1089 호 / 발행일 : 2011년 3월 23일


한국역사를 고난의 견지에서 재해석
종교개혁은 동양고전을 통해서 가능
‘씨알의 소리’창간 군부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1974년 윤보선(왼쪽에서 세번째), 김대중(왼쪽에서 네번째)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 고문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다.






다석 류영모가 가장 아꼈던 제자가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고 함석헌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 또한 류영모였다.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고 수염을 길렀다. 근본 사상도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스승 류영모에 비해 키도 크고 외모가 출중했다. 류영모는 삶이 은둔적이고 금욕적이라면 함석헌은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신비주의 전통의 용어를 빌리자면 함석헌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황해 바다가 용천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6세 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댕기머리를 잘랐다. 그는 사립초등학교에서 ‘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16세에는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1901년 평북에서 출생

함석헌은 평양고보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 소학교 선생으로 일해야 했다. 21세가 되던 해 다시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집안의 형님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 정주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 할 수 있었다. 그는 그해 늦여름 류영모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됐다. 그는 이때 류영모를 통해 기독교뿐만 아니라 노자와 같은 동양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부터의 믿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교조주의로 흘러가는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가지게 됐다.

그는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스승 류영모에 의해 익히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 모임은 별도의 예배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했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아가 영광의 메시아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다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 역사의 기조(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해 낸 것이다. 후에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이 귀국해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다. 이 책은 나중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 영문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는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무교회 신자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갔다. 또 우치무라에 대해서도 개인숭배 현상마저 일어나자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오산학교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정점에 달하면서 오산학교 관계자들도 점차 총독부와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송산농사학교로 옮겨갔으나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덩달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해방 전에 4차례, 그 이후로도 3차례 옥고를 치렀다. 비록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사상적으로 심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고 노장 사상을 숙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 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함석헌은 “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무교회에서 퀘이커교로

함석헌은 해방 후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위원회 회장이 되고, 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는 수난을 겪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는 월남 이후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 기도하지 않고,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 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했다. 또 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에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 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 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형세는 돌변했다. 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 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이별인가.”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 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교가 나타났다. 퀘이커교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교도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교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교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교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 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교 세계 대회에서 결국 퀘이커교 정회원이 되었다.

간디 존경…씨알농장 열어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씨의 소리’를 창간했다. 그의 ‘씨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 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 1974년 윤보선,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교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는 1989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산학교장으로 치러진 그의 몸은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 그러다가 2002년 8월15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면서 대전 국립 현충원에 이장됐다.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 평화, 민주, 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였으며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 그는 류영모의 제자이지만, 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