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4
13 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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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함석헌 평전
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2 08:00 김삼웅
1964년 신촌 종교친우회(퀘이커) 모임집 앞마당에서
함석헌은 1967년 7월 21일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했다. LA에서 퀘이커 집회에 강연을 초청받은 것이다. 6개월여 간 미국에 머물면서 퀘이커들과 함께 생활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하면서 퀘이커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퀘이커에 관심을 갖고, 미주 여러 나라의 퀘이커 지도자들과 서신 교류를 하였다. 무교회주의를 떠나면서 퀘이커는 그의 정신적 구원의 종교가 되었다.
함석헌이 입문한 퀘이커교(Quaker)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여전히 낯설다.
기독교의 한 유파이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크게 다른 퀘이커교는 예배 때에 찬송가나 기도, 성례의식과 같은 일체의 행사가 없이 진행된다. 기독교처럼 목사나 가톨릭처럼 신부가 있어서 설교를 하거나 성례를 주관하는 일도 없다. 기록된 교리도 없고 교회나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 장소도 없다. 선교(mission)란 말을 선호한다. 한국에는 현재 신촌의 퀘이커교 모임 등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임이 있다. 전 세계의 교도는 20만 명 정도이다.
퀘이커교는 “지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사람”을 뜻하며 17세기 중반 영국의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특정 교파라기보다는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cis)'라고 부르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퀘이커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되고 모임이 시작된 것은 함석헌에 의해서였다. 함석헌은 1962년 미국 국무성과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여행 중에 퀘이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왈링포드에 세워진 학교 펜들 힐과 영국 퀘이커대학이 있는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퀘이커신앙에 접하고 그곳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함석헌은 퀘이커에 입문한 것 이 아니었다.
함석헌이 한국최초의 퀘이커 교도인 이윤구의 소개로 퀘이커교도인 아서 미첼을 만난 것은 6.25 한국전쟁 시기였다.
“나중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이윤구는 당시 군산도립병원 복구사업을 하던 미국 퀘이커 봉사회를 만나 한국인 최초의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그때가 한국에서 퀘이커 모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는 이단자가 된 함석헌의 모임에 계속 나왔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을 느껴서 그들 사이에 중개역을 했다. 그들 덕분에 함석헌의 전쟁반대와 평화사상은 한층 깊어졌을 것이다.” (주석 1)
함석헌 이전에 퀘이커는 이미 한국에 전래되고 있었지만 퀘이커가 한국의 식자층에 깊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함석헌의 역할이 컸다. 5.16 군사쿠데타 이래 강력한 저항운동을 펴온 함석헌의 위상은 퀘이커의 홍보에도 일역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1983년 월간 <마당> 5월호에서 퀘이커와 관련 특별 대담을 갖고 자신이 퀘이커가 된 과정과 퀘이커사상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함석헌이 퀘이커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월간 <마당>은 “함석헌은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장로교ㆍ무교회주의를 거쳐 현재 퀘이커교 한국 대표로 있으면서 최근에는 노장 철학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심취되어 모든 종교사상을 통합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터뷰 내용 중 퀘이커 관련 부문을 발췌한다.
문 : 함 선생님이 퀘이커교도이신 줄 아는데 퀘이커교 교리가 무교회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답 : 우리(퀘이커교도)는 교리가 없고 제도도 없어요. 전연 없을수야 없지만, 가능한 한 그것 없이 하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한번 제도나 교리가 결정이 되어 놓으면 변경이 잘 안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달라지고 시대도 달라지는데….
문 : 사실 제도나 교회 때문에 본래의 기독교 정신이 구애를 받거나 생명력이 제약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렇지요. 퀘이커는 원래 대단히 개방적이야요. 극단적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고 있으니까니, 종교적인 생각에 대해 가능한 한 ‘가타’ ‘그르다’ 그러지 않지요.
문 : 퀘이커교는 가장 규모가 작은 기독교파 가운데 하나로 압니다. 어떻게 이 교단과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까?
답 : 6.25 직후라 우리나라 복구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ㆍ미 합작으로 수십여 명의 사람을 보내 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을 복구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그 다음 유엔에서 한국부흥단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퀘이커 사람이 서너 명 있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1962년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 : 퀘이커교는 제도나 교리가 없다는 것이 곧 교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교회나 예배 형식도 없는지요?
답 : 예배도 형식 없이 하자는 것이나, 전연 없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교회란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모임(meeting)이라고 하지요. 성직자라는 것도 없고 목사 신부라는 이름도 없으며 조직 자체가 없지요. 예배 시간에는 강단이 있어서 격식을 차려 앉는 법도 없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명상과 침묵하는 거야요.
문 : 설교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답 : 성경공부는 다른 시간에 하지요. 예배는 명상으로 하다가 감동을 받은 사람은 자기 맘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를 수 있으며, 성경을 읽고 싶으면 읽을 수도 있고 감동ㆍ감화를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문 : 남녀동등권 문제가 제일 먼저 퀘이커교에서 나오는 등 앞질러 가는 운동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
답 : 남녀동등 문제도 퀘이커에서 나왔고, 노예 해방문제도 제일 먼저 제안했었지요. 그 다음 퀘이커교도들이 감옥에 많이 드나들면서 인간 대접을 아니 한다고 항의하고 감옥제도를 개선하자는 발언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들에게도 너무 인간대접을 아니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책을 부르짖는 등 이런 착상을 먼저 해왔지요.
문 : 평화운동과 반전운동도 퀘이커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답 : 퀘이커 수가 많지 않은데 이 운동을 굉장히 진지하게 벌이고 있어요. 그중에서도‘평화증언’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 때에도 크게 활동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적국에도 모금을 해 보내고 적국의 부상자들을 위해 의약품을 보내지요.
문 : 조지 폭스를 창사자로 봐야겠군요?
답 : 그렇지요. 그러나 제일먼저 시작한 사람은 아니야요. 농민들 사이에 자연히 일어났는데 이들은 대개 무식한 사람들이었지. 폭스도 남의 집 구두수선공이었고, 그러나 솔직하고 정직하게 생긴 사람인데 장점이 있었나 봐요. 폭스는 상당히 번민을 했다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종교가 본래 뜻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이렇게 타락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래서 회의를 크게 느끼고 캠브리지, 옥스퍼드에 찾아가 신학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신통한 대답 안 해주고 그래서 내 문제 해결해 줄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야요. (주석 2)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464쪽.
2> <퀘이커와 평화사상>, <월간 마당>, 1983년 5월호, 인터뷰어 한용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