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 뉴시안
<함석헌과 한국교회>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박신애 기자
승인 2012.08.17
(19)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1
죄는 참말로는 없다던 함석헌이 이제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떻게 된 일인가? 우선 그가 1960년 9월 30일에 독일에 있는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18-23)를 읽어보자.
“안 형, 편지 받았습니다. 멀리 계신 형께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때 가서는 해야 하지만, 그래도 본국에 돌아오시기나 한 다음 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래서 지난 봄 이래 편지 아니 드렸었는데, 이렇게 자꾸 형께로부터 글을 받으니 회답은 해야 하고, 회답을 하게 되니 이 이상 더 속이고 있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만 들어두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유(영모) 선생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여성문제에서 잘못을 했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가? 이 사람은 이말 하고 저 사람은 저말 하지마는 김용준 교수가 <내가 본 함석헌>에서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내용일 것이다.
함석헌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천안에서 ‘씨알의 농장’을 경영한 일이 있는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이 자진하여 이 농장에 와서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고 있다가 함석헌과 동침을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자기의 은사인 김석묵 교수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 초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고난의 세월을 지나가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당시 심정을 잘 읽을 수 있다.
“미국을 간다 한 것도 이래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낡은 나를 완전히 장사지내고 새로 나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 그러니 외국 간다 하여도 신이 나는 것도 아니요 한낱 연옥(煉獄)걸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가)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잘못했으나 이 이상 더는 할 수 없으니 안면으로 친구 노릇을 할 수는 없고, 정말 용서를 하신다면 친구관계를 계속하지만 만일 형의 마음에 그리 못된다면 차라리 교통 아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시오. 아아!”
이 편지에서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라는 구절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웠을 때 그를 찾아온 이윤구 박사의 권유를 받아드려 퀘이커가 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는 세계적인 퀘이커 지도자가 된다. 1979년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에서, 그리고 1985년에는 세계 퀘이커회에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받는다.
이 편지뿐만 아니고 1960년대 초에 쓴 그의 글들은 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인하여 일어난 그의 처절한 회한과 새로운 다짐으로 가득 차있다. 일례로 1960년 겨울에 그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16-211)를 번역했는데, 그 서문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울부짖으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 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온 모래 탑은 와르르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 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 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고 갔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들은 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그동안 왔대야, 무한의 장변을 헤매어 다니는 거지들이 세상모르고 와서 저희보다 더한 나보고 도와 달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도둑질을 해먹는 것들이 와서 그나마 같은 내 누더기 속에서 뽑아간 것이 있고, 그 남은 모래탑 자국을 다시 한 번 더 짓밟고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낯에 또 한 번 침을 뱉고 간 것뿐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날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지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
그러다가 그는 7년 전에 읽었던 <예언자>를 다시 읽고 그 안에서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시를 만난다. 지브란은 이 시에서 “악인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뿐이니라”고 노래한다. 드디어 그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노래한다.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의 심장의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