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3

손원영 - 내가 꿈꾸는 교회(56): 화해의 공동체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3) 손원영 - 내가 꿈꾸는 교회(56): 화해의 공동체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손원영
23 January at 08:08 ·



내가 꿈꾸는 교회(56): 화해의 공동체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부흥회를 많이 하던 70~80년대에 생긴 속담으로 생각된다. 보통 부흥회에서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정작 부흥회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와서는 전혀 성령 충만한 사람답지 않게 이웃과 잘 싸우고, 게다가 화해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한번 싸우면 절대로 화해하는 법이 없다는 말도 여전히 들려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종종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은 정작 어떤가? 그들은 오히려 문제가 생기면 소주 한 잔 따라 놓고 화해를 청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할 때마다 심심치 않게 ‘성령’(하나님)이란 말을 종종 들먹이지만, 실제 일상 속에서 잘 화해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한 이야기이다.

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장자권 문제로 서로 원수가 되었던 형제 에서와 야곱이 거의 15년 만에 다시 만나 서로 포옹하는 장면을 꼽고 싶다.(창 32-33장) 형 에서가 야곱을 반갑게 맞아주자 야곱이 한 말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창 33:10b)

이처럼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장면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형을 속인 야곱이 그에게 용서받고 또 화해하기 위해 먼저 선물을 보내고, 다음에는 하녀들과 종들을 보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부인들과 자녀들을 보낸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이 홀로 얍복강 가에 남아서 밤새워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리고 야곱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형을 찾아가고 일곱 번이나 머리를 땅에 대면서 용서를 청한다. 그러자 형은 야곱에게 달려가서 ‘두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울면서 화해를 하는 장면이다.(창 33:1-4) 과연 이보다 더 이름다운 장면이 또 있을까 싶다.

모름지기 우리의 교회가 이런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리라. 화해의 공동체는 성령이 소주 한 잔보다 못한 무능력한 공동체가 아니라, 화해의 능력이 있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그것은 야곱처럼 잘못한 사람이 먼저 용서를 빌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용기 있는 자들의 모임이며, 동시에 용서를 청한 사람에게 에서처럼 기꺼이 관용을 베풀고 그를 다시 형제애로 맞이하는 포용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화해의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모두가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평화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화해의 공동체 일구기, 곧 용서 청하기와 관용하기 그리고 더불어 살기는 결코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화해가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과 에서가 보여준 ‘포옹’(embrace)의 과정, 곧 두 팔을 벌리며 화해하는 장면은 우리가 화해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실제로 이것은 기독교윤리학자인 볼프(Miraslav Volf)가 그의 책 『배제와 포용』에서 화해의 방식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포옹의 과정을 토대로 하여 화해의 네 단계를 제시하였다. 제1단계는 마음으로 용서하며 팔을 뻗는 ‘팔벌림의 단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보통 우리가 상대방을 껴안기 위해 팔을 벌릴 때, 자신의 주먹을 그대로 쥐고 팔을 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팔을 벌릴 때에는 모두가 손바닥을 펴고 팔을 벌린다. 말하자면, 용서의 첫 단계는 손바닥을 펴듯이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가해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을 갖는 것이요 피해자도 손해를 감수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특히 피해자는 피해의식에 오랫동안 집착해 있는 한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런 피해에 따른 고통의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가해자는 고통을 준 것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밤새워 천사와 씨름하듯이 말이다.

제2단계는 손을 내민 채 상대방도 같은 자세로 나 자신에게 다가오기까지 기다리는 ‘기다림의 단계’이다. 이 기다림의 기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 될런지 아무도 모른다. 예컨대 에서와 야곱은 15년을 기다렸고, 남한과 북한은 70년이 넘도록 서로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 기다림의 과정은 지나난 고통의 과정이다. 실제로 한번 팔을 벌린 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한 3분이든 혹은 30분이든 그대로 있어 보라. 얼마나 큰 고통인가? 그러나 그 긴 인내의 과정이 없이는 결코 화해에 이를 수 없다.

그 인내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제3단계인 ‘포옹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3단계에서 서로는 드디어 만나 화해를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수였던 에서와 야곱이 다시 만나 포옹하는 단계요, 또 예수께서 소개한 소위 탕자의 비유(눅15장)에서 잘 보여주듯이, 되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 용서를 청하며 그와 다시 만나 서로 얼싸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2018년 4월 서로 원수였던 남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이 다시 만나 서로의 손을 잡고 포옹한 것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는 한 단계 더 나가야 한다. 그것은 제4단계로써 상대방을 다시 풀어주는 ‘팔펴기의 단계’이다. 우리는 포옹한 채 살 수 없다. 다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껴안고 있던 팔을 다시 풀고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왜냐면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는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비대칭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의 다름을 나의 것과 일치시키려는 동일성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화해의 마지막 단계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미움이 가득한 이 땅에서 진심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수용하며, 더 나아가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진정한 화해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2호』 (2018/08/28)




96Chee Youn Hwang, Byeong Hee Kang and 9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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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역시 목사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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