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6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벌레이야기'전문 옮깁니다 읽어보세요 - 시와 소설, 그리고... - 글벗 문학회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벌레이야기'전문 옮깁니다 읽어보세요 - 시와 소설, 그리고... - 글벗 문학회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벌레이야기'전문 옮깁니다 읽어보세요작성자토끼(송숙)|작성시간07.06.06|조회수10,600목록댓글 3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벌레이야기>



1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어쩌면 행여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과, 녀석에게 마지막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지 놈을 다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어미로서의 강인한 의지와 기원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해 5월 초. 어느 날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각이 훨씬 지나도록 귀가를 안 했다.
달포 전에 갓 초등학교 4학년을 올라간 녀석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다시 동네 상가에 있는 주산 학원을 나가야 했다. 우리가 부러 시킨 일이 아니라 녀석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곳이었다.
다리가 한 쪽 불편한 때문이었을까. 제 어미 마흔 가까이에 얻어난 녀석이 어릴 적부터 성미가 남달리 유순했다. 유순한 정도를 지나 내숭스러워 보일 만큼 나약하고 조용했다. 어려서부터 통 집 밖엘 나가 노는 일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도 어울리려 하질 않았다. 집 안에서만 혼자 하얗게 자라갔다. 혼자서 무슨 특별한 놀이를 탐구하는 일도 없었다. 무슨 일에도 취미를 못 붙이고 애어른처럼 그저 방 안에만 틀어박혀 적막스런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녀석의 몸짓이나 말투까지도 그렇게 조용조용 조심스럽기만 하였다.
초등학교엘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의 불구에 이력이 붙은 우리 부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녀석의 담임 반 선생님까지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살폈지만, 녀석에겐 전혀 별다른 변화의 기색이 나타나질 않았다. 친구를 가까이 사귀는 일이나, 어떤 학과목에 특별히 취미를 붙여가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특별한 취미는 없어 하면서도 학과목 성적만은 또 전체적으로 고루 상급에 속할 만큼 제 할 일은 제대로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낸해 봄, 녀석이 4학년엘 올라가고 나서였다. 이때까지 전혀 어떤 특별 활동 시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녀석이 이번엔 누가 권하지 않았는데도 제물에 새로 생긴 주산반엘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 어떻게 적성이 맞았던지 나름대론 꽤나 열성을 쏟는 눈치였다. 학교를 파하고 오면 집에서까지 늘상 주판을 끼고 살더니, 나중엔 아예 가까운 상가 거기의 주산 학원 수강 등록을 시켜 달랬다. 그리고 한 두어 달 학교에서 돌아오면 점심이나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서 그 길로 곧장 다시 학원엘 쫓아가곤 하였다.
우리는 어쨌거나 다행이라 싶었다. 아이가 주산이 뛰어나고 아니고는 문제 바깥이었다. 소질의 여부도 따질 바가 아니었다. 녀석이 거기나마 취미를 붙여 다니는 것이 더없이 다행스럽고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전에 없이 녀석의 귀가가 늦고 있었다. 학원 갈 시각이 지났는데도 녀석이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약국에서 함께 일을 보던 아내가 안채를 몇 번 들어갔다 왔지만 그쪽으로도 아무 연락이 없더라 하였다. 늦게 돌아온다는 전화 연락 같은 것도 없었다. 하긴 학원 가는 시간을 미루고 어디서 다른 일에 어울려 놀고 있을 아이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학교에서 무슨 늦을 일이 생겼나?
-아니면 시간이 좀 급해져서 학원부터 먼저 다녀오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일도 물론 전에는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엘 가기까지는 원래 한 시간 가량의 여유가 있었고, 귀가가 아무리 늦을 때라도 알암인 그 한 시간을 넘겨 온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학원이 있었지만, 녀석이 그곳부터 들러 올 일도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끝내 학원 시작 시각까지 소식이 없다 보니 우리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생겨 시간이 급하다 보니 학원부터 먼저 들러 오려는 것이겠거니……. 불안한 속에서도 설마 싶은 마음으로 우리는 어서 학원 시간이나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건 너무도 사정을 알지 못한 어이없는 기대였다.
학원이 끝날 때가 지나고 나서도 알암이는 깜깜 소식이 없었다.
학원 쪽에서 오히려 가게로 알암이의 결석을 물어왔다.
-전 알암이를 맡아 지도하는 주산 학원 원장입니다……. 전에는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었는데, 오늘 알암이가 보이질 않아서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이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곧장 학교로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다른 일이 없었다 하였다. 여느 때처럼 정시에 수업이 끝났고,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종례 시간 때도 자리를 비운 아이가 눈에 띄지 ㅇ낳았어요. 그러니까 알암이는 종례를 마치고 곧 집으로 갔을 텐데요.
그때까지 퇴근을 기다리고 있던 담임 선생님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 집에라도 좀 알아보겠노라며 시간을 잠시 더 기다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한참 뒤에 다시 걸려온 그 담임 선생님의 전화는 불길한 예감만 점점 더해 오는 소리뿐이었다.
-알암인 역시 아직 가까이 어울려 지내는 아이가 없군요. 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교문을 나선 건 분명한데, 그 다음은 알암일 눈여겨본 아이가 없어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알암이의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서 그새 혼자서 은밀스런 취미를 숨겨오고 있었거나 남모르는 친구라도 어디다 사귀어두고 있었을지 모르니 시간을 좀더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설마 하면 무슨 나쁜 일이야 있겠느냐고. 다음날까지도 정 소식이 없으면 반 아이들에게 다시 알아보도록 하자고 어정쩡한 소리 끝에 전화를 끊고 말았다.
하고 보니 일은 분명 학교와 집 사이에 일어난 변고였다. 그것도 아이의 담임 선생 말처럼 막연히 시간만 기다리고 앉아 잇는 것으로는 실마리가 풀릴 수 없는 변고였다.
아이는 아닌 게 아니라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일찍 약국 문을 닫아걸고 파출소에 아이의 실종 사실을 신고했다.
하지만 파출소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방책이 있을 리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나 되는 아이라면 쉽사리 유괴를 당해 갔을리도 없겠고…… 혹시 동네 불량배들한테라도 붙잡혀 있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뭐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불량배 녀석들의 장난이라면 금품이나 빼앗고 돌려보낼 테니까요.
학교와 동네 일대의 불량배들을 단속해 나설 테니 하룻밤이나 두고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젠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는 불안 속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밤새도록 뜬눈으로 기다리며 하룻밤을 지샜다.
밤이 새고 나도 아이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상학 시간에 맞춰 학교로 달려갔으나 거기에도 아이는 나타날 리가 없었다. 반 아이들 가운데서도 알암이의 일을 알 만한 애가 없었다…….

알암이는 그렇게 어느 날 학교 길에 수수께끼처럼 갑자기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집이나 학교에서 소동이 한바탕 회오리쳐 올랐을 것은 말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동으로 해결이 날 일이 아니었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과 근심과 절망이 뒤섞인 지옥 같은 기다림도 며칠이 지나고 나자 우리는 새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이를 찾는 데에 필요한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신중하고 세밀하게 녀석의 종적을 뒤쫓아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예 약국 문을 닫아걸고 아이의 발길이 닿을 만한 곳들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 반 아이들의 주변은 물론 멀고 가까운 친척집들까지도 빠짐없이 모두 연락을 취해 보고, 학교 근처와 동네 일대에도 몇 차례씩 광고를 내가며 애타게 아이의 귀가를 기다렸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알암이 찾기’ 운동을 벌이고 나섰고, 그 바람에 처음에는 좀더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미지근하게 시일을 끌어가던 경찰도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해 들어갔다. 심지어는 이때까지 알암이가 다니던 주산 학원에서까지 아이를 찾는 일에 앞장을 서고 나섰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의 노력에도 알암이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가도 어떤 실마리 하나 잡혀오지 않았다. 제 발로 가출을 해나간 아이라면 그만 지쳐서 돌아올 때가 됐는데도 녀석에게선 끝내 종무소식이었다. 자의로 집을 나간 아이이기가 어려웠다. 녀석이 워낙 내숭스럽기는 했지만 도대체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고, 배짱이 그만큼 큰 아이도 아니었다. 어떤 식의 유괴나 납치의 가능성이 점점 더 짙어갔다. 주위에 특별히 원한 같은 걸 살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금품 따위를 요구하기 위한 납치엔 원한의 유무가 상관될 리 없었다.
약국이 제법 잘 되는 편이었고, 그것이 동네에 알려져 있는 것이 표적거리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걸 염두에 두고 은밀히 어떤 연락일 기다려보기도 하였다. 아이를 찾는 일에도 그 가상의 범인(그것이 정말 우리들의 상서롭지 못한 가상으로 끝났더라면!)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몹시 주위를 기울였다. 한두번은 아예 그 가상의 범인을 향해 ‘요구’를 유도하는 신문 광고를 내보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일이 너무 알려진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이쪽이 좀 조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예 모든 걸 단념해 버리고 꼬리를 거둬 숨겨 들어간 것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그 가상의 범인에게서는 전혀 어떤 연락이나 요구가 없었다. 그거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범인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몰라도 아예 일을 단념하고 만 상태라면 결말에 대한 상상이 더욱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견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불길스러움이나 절망감을 견디고서라도 우리는 기어코 아이를 찾아내야 하였다. 그리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였다. 바로 그 희망과 기원, 어떻게든지 아이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우리의 끈질긴 희망과 기원이야말로 아내(이제와서 굳이 나는 말해 무엇하랴)에겐 무엇보다 크고 소중한 힘이 되고 있었다. 그것이 그 참담스러운 심사 속에서도 아내가 지쳐 쓰러지지 않고 비극을 견뎌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아내는 그 희망과 기원 때문에 그 엄청난 일을 당하고서도 그렇게 의연히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알암이의 일에서 차츰 세상의 관심이 사라져간 다음에도 조금도 실망하는 기색이 없이 더욱더 끈질긴 의지력을 발휘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니라 알암이는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소식이 깜깜이었다. 그러자 세상사가 으레 그렇듯이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알암이의 일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경찰 수사도 시들해져 가는 눈치였고, 학교 쪽 아이들도 이젠 할 일을 다한 듯 잠잠해져 가고 있었다. 그새 한두 번 기사를 취급해 준 신문이나 방송들도 더 이상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알암이의 유괴를 불행스런 미제 사건을 기정사실화해 가고 있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러거나 말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아내 그럴수록 아내는 자신의 삶을 온통 그 일에 걸다시피 각오를 새로이 하여 아이를 ㅊ자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약국 문을 계속 닫아건 채 밤낮없이 사방을 뛰어다녔다. 수단 방법을 가리려 하지 않았다. 아내는 여기저기 계속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하고, 방송국의 안내 프로그램 같은 델 쫓아나가선 그 가상의 범인을 향해 어떤 요구도 감수할 각오이니 아이만 제발 무사히 돌려보내 달라고, 아이의 안전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각급 학교의 교문 근처에서 알암이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 적힌 전단을 나눠주기도 했고 , 역이나 버스 정류소 혹은 사람들이 붐비는 네거리 같은 데선 아이를 찾는 피켓을 만들어 들고 서서 사람들의 눈길을 애걸하기도 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일이 점점 오리무중으로 어려워져 보이자 아내는 흔히 우리 여인네들이 해온 방식으로 절간을 찾아가, 아이의 앞길을 밝혀 지켜주십사 촛불을 켜고 공양을 바치고 오기도 하였다. 절간뿐 만 아니라 아무 곳이나 교회당을 찾아가 (아내는 원래 교인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한 교회 헌금도 아끼질 않았다.
어쨌거나 아내는 그런 저런 방법으로 아이를 위해 모든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 그것은 아이의 아비가 되는 나까지도 놀라움과 감동 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언제부턴가 최악의 사태를 각오해 두고 있었다. 시일이 흐를수록 일은 비관적이었고, 육신과 정성은 지쳐날 대로 지쳐났다. 나는 마지막 절망 속에서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두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 앞에서 그것을 조금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집념과 희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찾게 되든 못 찾게 되든 아내를 위해서도 그런 기미를 조금이라도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아내의 그런 초인적인 노력은 그것으로 끝내 아이를 못 찾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내 자신을 위해 다행스럽고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쓰러지지 않고 자신을 버텨 나가는 것은 그 희망과 집념의 덕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아이의 건재를 믿으며 희망과 용기를 계속 북돋아 나가야 하였다.
그러나 아내의 그 끈질긴 집념과 노력도 끝내는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내가 어슴푸레 미리 짐작해 온 대로 일은 마침내 최악의 결과로 판명이 나고 만 것이었다. 알암이가 사라진지 꼭 두달 스무 날째가 되던 7월 22일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알암이는 이날 집에서 멀지 않은 그 주산 학원 근처의 한 2층 건물 지하실 바닥에 서 참혹스런 시체로 발견되어 나온 것이다.

2

아이의 육신은 이미 부패가 심하여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손발이 뒤로 묶인 채 입에는 수건까지 물려 암매장을 당해 있는 몰골이 유괴 피살을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남은 일은 이제 가상의 범인이 아닌 진짜 유괴범을 잡아내는 것 뿐이었다. 그것도 이제는 사건의 윤곽이 밝혀진 마당에 범인의 색출 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 그 장소가 범인의 윤곽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 건물 일대는 새해 들어서부터 도시 재개발 사업이 시작된 곳이었다. 하여 일대에선 이른 봄부터 한두 사람씩 집을 비우고 나간 곳이 생겨났다. 범행 현장이랄 수 있는 2층 건물은 4월 말쯤(나중 조사에서 확인된 일이지만 그것은 알암이의 실종 직전이었다)에 이미 사람이 나간 곳이었다. 범인은 알암이를 납치해다 그곳에 숨겨두고 얼마 동안 낌새를 살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다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아이를 살해하여 암매장한 것이 분명했다. 범인의 단념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처음의 설마 싶은 심사에다, 일대에 이미 그런 빈집들이 많아서 우리의 주의가 미처 소홀한 때문이었을까. 경찰 수사 과정에서나 우리들이 몇 차례나 그런 곳을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으면서도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상스러울 뿐이었다.
하여튼 알암이는 그렇게 석 달 가까이나 그 건물의 컴컴한 지하실 콘크리트 바닥 속에 암매장되어 있다가 건물의 철거 작업이 시작 되고 나서야 가엾은 모습을 드러내고 나온 것이었다. 6월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주민의 퇴거가 완료되어 건물 철거 작업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인의 예상(아마도 지하실이 그냥 매립되고 말리라는)에 반하여 어떤 고지식한 포크레인 기사 하나가 지하실 콘크리트 바닥까지를 파 올려놓은 때문이었다.
범인 추적 수사는 자연히 건물을 중심으로 한 재개발 구역 상가와 이웃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건물주나 그 이웃 사람들은 물론 일대 상가를 맴도는 사람들은 모두 한차례씩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가 다니던 주산 학원 원장(김도섭 선생)에겐 가장 유력한 혐의의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범행은 어차피 금품을 노리는 유괴 살인의 혐의가 짙었고, 금품을 노라고 저지른 유괴극이었다면, 범인은 어느 만큼 우리 집안 사정을 알고 있었거나, 초등학교 4학년짜리의 사리 분별력으로 보아 알암이가 안심하고 뒤를 따라나설 만큼 안면이 가까운 면식범의 소행일 공산이 컸다. 주산 학원 선생은 그런 용의점들을 모조리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데다 그 주산 학원 역시도 재개발 사업 지역 안의 한 건물을 세들고 있어서 일대의 사정에 그 가 눈이 밝았을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알암이가 실종되던 날 녀석의 결석을 물어온 전화도 의심을 하자면 전혀 우연스런 것으로만 볼 수가 없었고, 제물에 한동안 아이의 종적을 찾아 돌아다닌 열성도 어딘지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유력한 용의자의 혐의를 피할 수가 없었다. 경찰도 그쪽으로 심증이 굳은 듯 그를 집요하게 추궁해 나갔다. 문제는 거의 그의 결심에 달린 듯 싶어 보였다. 그가 결심만 하고 나선다면 진상은 곧바로 밝혀질 전망이었다.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부터 수사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경찰 쪽에서나 우리들(아내와 나 그리고 가까운 이웃 친척들까지도)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오직 그가 모든 걸 단념하고 사실을 털어놓고 나서기만을 기다렸다.
한데 그것은 우리들의 무고한 속단이 아니었다. 사건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예상대로 해결이 지어진 것이었다. 김도섭 - 치밀하고 집요한 경찰의 추궁에 못 견뎌 그 학원 원장이 란 자가 마침내는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고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건의 시말은 이쯤에서 그만 이야기를 마무려두는 것이 좋으리라. 이 이야기는 애초 아이가 희생된 무참스런 사건의 전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어느 무디고 잔인스런 아비가 그 자식의 애처로운 희생을 이런 식으로 머리에 되떠올리고 싶어하겠는가. 그것은 내게서 아이가 또 한번 죽어 나가는 아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알암이에 뒤이은 또 다른 희생자 아내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때문이다. 범인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다음에도 나의 아내에겐 그것으로 사건이 마감되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내의 희생에는 어떤 아픔이나 저주를 각오하고서라도 나의 증언이 있어야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인이 밝혀지고 나서 아내는 과연 어떻게 되었던가. 아니 그보다도 아이가 끝내 그런 처참스런 주검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아내는 아이와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던가. 말할 것도 없이 알암이의 참사는 아내에겐 세상이 끝난 것 한가지였다.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이었다. 아내는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로 며칠을 지냈다. 몇 차례나 깜박깜박 의식을 잃기도 하였고, 깨어 있을 때도 실성한 사람처럼 넋을 놓고 혼자 울다 웃다 하면서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절망과 자학은 다행히도 그 며칠 동안뿐이었다. 아내는 그 절망의 수렁에서 며칠 만에 다시 자신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그리고 처음 아이의 실종을 당했을 때처럼 자신을 꿋꿋이 지탱해 나가며 무서운 의지력을 발휘해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희망과 기원에서가 아니라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으로 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사실을 말하자면, 알암이의 실종이 확실해진 때부터 아내가 그토록 자신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이웃 김 집사 아주머니의 도움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우리 약국과는 두어 집 건너에서 이불 집을 내고 있는 김 집사 아주머니 - 애초의 동기는 서로 달랐을망정 그 김 집사 아주머니의 권유가 이상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시 절망에서 번쩍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 우리 구세주 예수님 앞으로 나오세요. 그래서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도록 하세요. 주님께선 모든 힘든 이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상처 받은 영혼들의 아픔을 함께해 주시며, 그것을 사랑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알암이 엄마는 지금 혼자서 는 도저히 감당해 갈 수 없는 크나큰 영혼의 상처를 입고 있어요. 애 엄마 혼자서는 그 짐을 절대로 감내해 나갈 수가 없어요…….
김 집사 아주머니의 위로와 권유는 대개 그런 뜻의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내에겐 뜻밖에도 신통한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야 집사님이 아내의 믿음을 권유해 온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불 가게 못지 않게 교회 일에도 늘 열심인 김 집사 아주머니는 알암이의 일이 있기 전부터도 자주 가게를 찾아와 서 아내의 입교를 간독히 권유해 오곤 했었다.
- 알암이 엄마, 알암이 엄마도 신앙을 갖도록 하세요. 사람 사는 데 믿음을 갖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어요. 믿음이 없는 생활은 거 짓 허수아비 삶에 불과하다구요. 신앙을 가지면 사람과 생활이 모두 새롭게달라져요.
하지만 아내는 어찌 된 일인지 번번이 귀조차 기울이려 들질 않았다.
나이가 아내보다 5년쯤 연상인 김 집사는 그래도 전혀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이 끈질기게 다시 아내를 찾아오곤 하였다.
- 두고 보세요 . 내 언제고 알암이 엄마를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고 말 테니까. 알암이 엄마라고 어렵고 마음 아픈 일이 안 생길 수 있겠어요. 애 엄마한테도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때가 찾아오게 될 거예요. 내 그땐 반드시…….
그럴 만한 어떤 계기라도 기다리듯 계속해서 뜸을 들이고 기곤 하였다. 별반 악의가 깃들지 않은 소리들이어서 아내도 그저 무심히 들어 넘기곤 해오던 처지였다.
한데 과연 그녀의 예언처럼 아이의 사고 가 생기고 만 것이었다.
김 집사는 마치 그거 보라는 듯, 혹은 기다리던 때라도 찾아온 듯 아이의 실종사고가 생기자 금세 다시 아내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이런 저런 걱정의 말끝에 다시 아내의 믿음을 권해 왔다.
-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은 알암이 엄마처럼 근심 걱정으로 마음을 앓는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그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 사랑으로 이 땅엘 오셨던 분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주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품속에 슬픈 영혼을 의지하도록 해야해요.
한데 아내는 그토록 심정이 절박했기 때문이었을까.
- 그분은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모든 일을 뜻대로 행하실 수가 있는 분이시지요?
아내가 모처럼 귀가 솔깃해져서 애원하듯 김 집사에게 묻고 들었다. 하니까 김 집사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 하느님은 전지전능, 우주 만물을 섭리하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독생자이십니다.
- 그럼 그분은 우리 아이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 것도 알고 계신 걸까요?
-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알암이는 지금 그분께서 사랑으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런 건 너무 걱정 마시고 우선 먼저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께 의지할 결심부터 하세요.
- 그분이 우리 아일 무사히 되돌려 보내주실까요?
-그분의 뜻이 계시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걸 바라기 전에 당신의 믿음을 먼저 그분께 바쳐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당신의 믿음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아내의 안타깝고 초조한 심사 앞에 김 집사의 대답은 단언에 가까웠다.
하니까 아내는 끝내 마음이 움직이고 만 모양이었다. 아이만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지옥의 불길 속에라도 뛰어들어갈 아내였다. 하느님 아니라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려 의지를 구해야 할 아내의 처지였다. 그러지 않아도 절간까지 찾아가 촛불 공양을 바치고 다닌 아내였다.
아내는 드디어 결심이 선 듯 김 집사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서너 주일 예배 시간을 맞춰 가서 기도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왔다. 절간을 찾아가 춧불 공양을 할 때처럼 무작정 액수를 높여 바친 헌금이었다.
하지만 그건 물론 아내가 지속적으로 신앙을 가지려는 결단의 표시는 아니었다. 보다도 그것은 아이를 찾으려는 간절스런 소망의 표현일 뿐이었다. 절간을 찾아가 빌 때 한가지로 아이를 찾고 보자는 기복 행위에 불과했다.
하느님도 아내의 그것을 아셨던지 그녀의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았다. 아내의 아낌없는 헌금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끝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엄청난 비극으로 아이의 종말이 밝혀지고 말았다.
아내는 더 이상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신용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원망뿐이었다. 아니 이제는 사랑이고 원망이고 ‘주님’ 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아이의 참혹스런 시신을 보고 나자 아내는 한동안 모든 것을 잃고 만 듯 자신마저 지옥의 어둠 속을 헤매었다.
김 집사도 아내의 그런 사정을 짐작한 듯 한동안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더니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 한 주일 남 짓 지난 어느 날 그녀가 다시 집으로 아내를 찾아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의 주님을 빌려 아내의 아픔을 위로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날따라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 있던 아내에게 김 집사의 그런 위로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내는 처음 김 집사가 오는 것조차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누가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거나 그저 멀거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김 집사도 굳이 그런 아내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심 어린 위로의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 알암이 엄마의 아프고 저린 마음은 알고도 남아요.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맡기고 의지를 삼을 데가 있어야지 않아요. 지금의 처지로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럴수록 부드럽게 마음의 문을 열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래서 그 아픈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참되고 새롭게 영접하도록 해보세요 마음이 한결 편해지실 거예요…….
그런데 그 김 집사의 설득이 너무도 참되고 간곡했던 탓인가, 그리하여 굳게 닫혀버린 아내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한 것이었을까. 무 슨 소리에도 그저 넋이 나간 듯 천장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아내의 눈에 이유고 영문 모를 눈물기가 가득 고여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처럼 제정신이 돌아온 듯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 모두가 다 부질없는 노릇이에요. 하느님의 사랑도 거짓말이구요. 하느님이 정말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 알암일 왜 그렇게 만들었 겠어요. 그 어린 것에게 무슨 죄가 있다구……. 하느님의 사랑이 정말 크시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게 했어야지요.
체념과 원망에 사무친 애소였다. 그나마도 아내에게선 근자에 제정신이 되살아난 소리였다.
거기에 김 집사는 용기를 얻은 뒤 아내를 계속 설득해 나갔다.
- 알암이 엄마 , 그렇게 주님을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다 원망을 지니면 자신만 더욱 고난스러워져요. 그야 지금의 알암이 엄마한텐 무리한 주문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애 엄만 그럴수록 마음을 부드럽게 지녀서 주님의 사랑을 맞아들이도록 하셔야 해요. 주님의 사랑과 오묘한 섭리는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어요. 이번에 알암이가 당한 일만 해도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슬픔 뿐이지만, 거기에 어떤 주님의 섭리가 임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주님의 사랑과 섭리와 권능을 믿으시면 거기서 알암인 구원을 받을 거예요. 알암이가 이번에 당한 일이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사랑을 베푸시려는 주님의 뜻인지도 모르니까요. 그 왜, 있지 않아요. 주님께선 그 당신의 사랑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알암일 당신 곁으로 부르셨을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내에겐 그 김집사의 위로가 좀 지나쳤었던지 모른다. 혹은 아내로선 마음속에 사무친 원망과 저주를 죽어도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 아내가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마치 눈앞의 하느님에게 대들기라도 하듯이 김 집사를 향해 외쳐대기 시작했다.
- 아니, 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느님이 그토록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알암이를 그렇게 만든 살인귀 악마를 아직까지 숨겨 두고 계실 리가 없어요. 알암인 이렇게 죽고 말았는데, 범인은 아직 붙잡히질 않고 있지 않아요. 하느님이 정말 모든 걸 아신다면 어째서 그놈을 아직 가르쳐주지 않는 거예요. 알고도 부러 숨겨두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놈과 한패거리와 다를 게 무어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걸 아시고도 아이를 그 꼴로 만들어 보내신 건가요 . 처음부터 그놈과 한패거리로 일을 그렇게 꾸며가지고 말이에요.
아내의 원망이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사실 아내로선 나무랄 수 없는 원망과 분노의 토로이기도 하였다. 아이의 주검이 발견되었을 뿐 이때까지도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절망과 슬픔은 무엇보다도 그 범인의 얼굴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아내의 사무친 원망과 복수심은 그쯤 폭발로 가라앉은 것이 아니었다.
- 하느님은 몰라요. 살인귀를 가리켜 보여주지 못하는 하느님, 사랑도 섭리도 다 헛소리예요. 하느님보다 내가 잡을 거예요. 내가 지옥의 불 속까지라도 쫓아가서 그놈의 모가지를 끌고 올 거예요.
아내는 그 하느님에 대한 원망 끝에 범인에 대한 불 같은 복수심으로 며칠간의 절망과 비탄의 수렁에서 다시 자신을 추슬러 일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람이 달라진 듯 범인의 추적에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김 집사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 김 집사의 도움으로 아내는 다시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고 보면 이번엔 그 분노와 저주와 복수심이야말로 아내가 자신을 견디는 데 무엇보다 소중한, 어쩌면 그 하느님의 사랑이나 섭리보다도 더욱 힘차고 고마운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3

아내는 한동안 그런 식으로 무서운 복수심을 불태우며 범인을 잡는 일에 열을 올리고 다녔다.
그러나 그녀에겐 끝내 그 복수심을 충족시키고 그것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범인이 붙잡히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법인은 미리 나름대로의 지능적인 보안책을 마련하고 있어서 알암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도 생각처럼 쉽게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주산 학원 원장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가 거의 완벽했고, 더욱이 아이의 실종 후에는 녀석을 찾는 데에 앞장을 서 나설 만큼 교활하고 대담한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얼마 뒤 알암이의 시신이 발견되기 3주일쯤 전인 6월 하순경, 그의 학원이 세들어 있던 건물까지도 시 재개발 사업에 밀려 동네를 떠나게 되고서부터는 범인 김도섭도 그것을 웬만큼까지 자신했을 법하였다. 하지만 앞서도 이미 말했듯이, 원장 김도섭은 처음부터 유력한 혐의자의 한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그가 진짜 범인으로 밝혀진 인물이었다. 그는 아이 어미로서의 아내의 직감력과 집요한 추적이 뒷받침된 경찰의 수사력을 끝끝내 피해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은 그의 범행 자백과 동시에 거기 따른 충분한 물증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범인이 잡힌 것으로 아내의 원한은 풀릴 수가 없었다. 아내는 범인을 붙잡은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깔을 후벼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어하였다. 아이가 당한 것 한가지로 손목을 뒤로 묶어 지하실에 가두고 목을 졸라 땅바닥에 묻고 싶어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당국은 아내에게 아무런 복수의 기회도 용납하지 않았다. 범행을 자백한 그 순간부터 위인은 아내의 보복을 피해 당국의 보호를 받게 된 격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참사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사람들끼리 범행의 목적과 과정을 추궁하고, 재판에서 그의 죽음을 결정지어 튼튼한 벽돌집 속으로 그를 들여보내 버렸다.
아내는 결국 그것으로 원한 어린 복수의 표적을 잃어버리고 만 셈이었다. 아내가 들끓는 복수심을 견디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가능한 데까지 그를 무도한 살인마로 몰아붙이는 일과 공판 과정에서 그를 저주하다 제물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내의 원한이 풀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아내에겐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내는 가슴속에 뜨거운 복수의 불 길이 남아있는 한 자신을 용케 잘 지탱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진짜 마지막 불행은 그 처절스런 가슴속의 복수심이 사라져 간 데서부터 싹이 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로선 물론 그걸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아내 쪽도 사정이 마찬가지였을 게 분명했다.
아내는 계속 복수심을 짓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내로부터 그를 멀리 떼어놓고 있었지만, 아직은 그 복수의 표적이 아주 사라 진 것은 아니었다. 김도섭 스스로도 자기 범행의 죄질을 가늠할 수가 있었던 탓일까. 작자가 그의 죽음을 결정한 l심 판결을 승복하고 2심 공소권을 포기해 버린 바람에 그는 사실상 사형 확정수로 운명의 날만을 기다리게 된 처지였는데, 당국에선 왠지 그의 형 집행을 서두르고 나서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아내에겐 여전히 복수의 표적이 남아 있어준 셈이었다. 그래 아내는 이제 하루빨리 목매달이가 치러져 작자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직접 작자의 육신을 지옥의 불길로 찢어 던지고 싶어 했다. 그럴 때 아내는 작자의 목매달이가 갑자기 치러지는 것을 걱정하기까지 하였다.
아내는 그런 식으로 마치 구경꾼들에 잔뜩 화가 나 있으면서도 철책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우리 속의 맹수처럼 자기 복수심 때문에 안절부절을 못하는 꼴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나마 아내는 아직도 자신을 용케 잘 버텨 나갔다. 한데다 그 아내를 위해서 이기라도 하듯 당국에선 여전히 작자의 목매달이를 서두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계절이 가을철로 바뀌고 난 10월 초순 무렵부터의 일이었다. 아내의 처지가 아무래도 안되어 보였던 지 김 집사 아주머니가 다시 아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으로 진실된 신앙심으로 아내에게 심신의 안정을 호소했다.
- 알암이 엄마, 이젠 마음을 좀 가라앉히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줄여가 보도록 하세요. 알암이 엄만 아무래도 지금 정상이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의 절통한 심사를 나라고 헤아리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다고 애 엄마가 그 사람을 직접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그 사람은 이제 가만히 놔둬도 제 죄값을 치르게 되어 있어요. 원망하고 분해하면 애 엄마 심사만 그만큼 자꾸 더 상할 일 아니에요. 애 엄마까지 사람이 못쓰게 되어가요.
김 집사님은 이제 작자의 죄에 대한 사람의 심판은 끝났다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하느님의 심판뿐이라 하였다. 이 마당에 아내가 할 일은 그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을 되찾아 심신의 안정을 기하는 일이라 하였다. 거기다 가능하면 그를 용서하고 동정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것은 다만 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 사람보다는 알암이 엄마 자신을 위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가엾은 알암이의 영혼을 위하는 일인 거예요. 알암이의 영혼과 애 엄마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너무 깊은 원망을 지니지 않도록 하세요.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하시면 주님께서 반드시 도외주실 거예요.
인간에겐 도대체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역하여 인간이 스스로 남을 원망하고 심판하려 할 때는 그 원망과 심판이 거꾸로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였다.
아내는 이번에도 집사님의 설득에 처음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람에겐 애초에 남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거니 가능하면 그를 용서할 수까지도 있어야 한다는 충고에 이르러서는 바락바락 화를 내고 대들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김 집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아내에겐 자기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확신한 듯 그녀의 설득은 어느 때보다도 끈질기고 진정에 차 있었다. 딴은 내 보기에도 아내에겐 김 집사의 그런 도움이 필요한 처지였다. 원한과 복수심에 가득 찬 아내는 아닌 게 아니라 정상이 아니었다. 알암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부터 그 참담스런 절망감 속에서도 아내가 여태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것은 그 원한과 복수심의 독기 때문이었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아내에겐 필요한 독기요, 본능적인 생존력의 원천이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비정상적인 생존력에 불과했다. 아내가 언제까지나 거기에 삶을 의지해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삶일 수가 없었다. 아내는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하였다. 언젠가는 어차피 아이의 일을 잊고 자기 파괴의 원망과 복수심에서 벗어나야 하였다. 그래서 어려운 대로 자신을 정상의 일상사 속에 견뎌 나가도록 하여야 했다.
김 집사의 충고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간의 권리나 그 한계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아내가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었다. 아내에겐 아무래도 그 김 집사와 그녀가 인도하고자 하는 주님에의 의지가 크게 필요해 보였다. 그래 나 역시 아내에게 진심으로 그것을 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 같이 교회를 나가자는 김 집사의 권유에 나는 우선 먼저 아내부터 좋은 길을 인도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김 집사를 거들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일까. 김 집사의 설득과 나의 권유가 얼마간 계속되자 아내는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뜻밖에 선선히 마음을 고쳐먹고 김 집사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놀라운 열성으로 예배와 기도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내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심은 아니었다. 아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나 자신을 견뎌 나갈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더욱이 범인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고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 갑자기 그렇게 달라질 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아내는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망과 기도가 온통 아이의 내세의 구원에 관한 것뿐이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아마 분명코!) 아이의 영생과 내세 복락만을 외어댔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영혼을 위한 교회 헌금에 마음을 의지하고 지냈다.
하지만 나는 그러는 아내를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동기가 무엇이든 아내는 이제 교회를 다시 나다니게 된 것이었다. 아내에겐 우선 그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한동안 교회를 나다니다 보면 마음속에 진짜 신앙심이 자리를 잡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마음의 상처를 씻고 옛날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었다.
김 집사도 내심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여 그녀의 갑작스런 광신기를 그대로 모른 척 감내해 나갔다. 그리고 성실하고 끈질긴 인내로 그녀를 참신앙심으로 이끌어가는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하다보니 과연 우리들의 기대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마침내 서서히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 아이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 것 같았다. 아내에게선 차츰 저주와 원망기가 덜해 가는 기미였다. 그만큼 매사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전날의 자신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는 그 주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겠노라, 스스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과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내 자신도 그런 자신의 변화를 의식한 듯 주님께 대한 감사의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외어대었다. 등골이 빠지게 일을 해서 끼니상을 차려놓으니 그 자식들로부터, 아버지 하느님, 오늘도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하는 식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아비의 심사가 아마 그와 같았을까. 아내의 그런 잦은 감사의 기도는 그동안 아이와 아내 때문에 모든 것을 깡그리 바쳐오다 시피 한 나에겐 어떤 가벼운 배신감마저 느껴져 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기쁨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믿음과 자기 회복은 아내 자신뿐 아니라 나에게까지도 깊은 마음의 상처를 씻고 악몽에서 벗어나게 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아내의 변화에서 그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내의 변화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그녀의 믿음의 인도자가 되고 있는 김 집사의 그것이 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 집사는 아내에게 용기를 얻은 듯 그녀의 신앙심을 한층 더 부추겨 나갔다. 김 집사는 아내에게 이제는 거기서 죄인을 용서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사람에겐 애초 남을 심판할 권리도 없지만, 그보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선 마음을 깨끗이 비워내 놓아야 하며 심중에 원망과 미움을 조금이라도 남겨두고 있으면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임할 자리가 그만큼 좁아지게 마련이라 하였다. 그러니 차제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마음속의 모든 원망과 분노와 미움과 저주의 뿌리를 뽑아내고 주님을 영광되게 영접하라 하였다. 아내에겐 바로 이때가 그래야 할 은혜스런 기회라 하였다.
- 하느님의 깊은 섭리의 역사를 우리 인간으로는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지 않았어요. 알암이의 슬프고 불행스런 사고가 그 어머니에게 주님을 영접케 할 은총의 기회일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건 모두가 이런 영광과 은총을 예비해 두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단련 시켜 맞이하시려는 사랑의 시험에 불과했던 거예요.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감내했어야 할 일들이었지요. 그토록 오묘한 주님의 섭리와 사랑의 역사 앞에 우리가 어찌 알암이의 영혼의 구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어요. 죄인을 아주 용서하도록 하세요. 그게 틀림없이 주님의 뜻이며 기쁨이실 거예요.
김 집사는 알암이의 구원을 단언하며 ‘용서’를 간독히 당부했다. 그것도 그저 한두 번이 아니고 틈이 있는 대로 끈질기게 계속했다. 하니까 아내도 그동안 그만큼 마음의 자리가 생겨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참신앙심이 싹을 트고 성장을 계속해 온 모양이었다.
아내는 갈수록 말씨나 표정이 부드러워져 가고 있었다. 생활도 어느 만큼 제 궤도로 돌아오고(범인의 재판이 끝나갈 무렵부터 나는 혼자 다시 약국 문을 열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는 아내가 이따금씩 그 가게로 나와 앉아 있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아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인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를 입에 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더니 어느 날 아내는 마침내 긴 잠에서나 깨어난 듯한 얼굴로 나에게 조용히 물어왔다.
- 그 사람…… 그 가엾은 사람,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있는거지요…….
아내도 뻔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게 어쩌면 새삼 다행이라는 어조였다.
아내가 마침내 김 집사의 소망대로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미 용서를 하고 있진 않았더라도, 그를 스스로 용서해야 한다고, 용서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저주스런 한 해가 거의 다 저물어가던 12월 중순 무렵-, 알암이의 참사가 있은 지 꼬박 일곱 달여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범인 김도섭의 사형이 확정되고, 아내가 다시 김 집사에게 인도되어 교회를 나다니기 시작한 지는 대충 2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4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아내가 범인 김도섭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구보다도 아내 자신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마음속에서 아내 자신이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아내로선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소망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랬더라면 아내는 적어도 자신의 구원의 길은 얻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내의 마지막 비극을 불렀다. 다름 아니라 아내는 당돌스럽게도 자기 용서의 증거를 원했다. 더욱이 그것을 지금까지의 원망과 복수심의 표적이던 범인을 상대로 구하려 한 것이었다.
- 제가 교도소로 면회를 찾아가서 그 사람을 한번 만나봐야겠어요.
아내가 마음의 용서를 생각하고 나서 다시 열흘쯤 시일이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이젠 날마다 약국을 나와 앉아 있곤 하던 아내가 어느날 내게 문득 그런 말을 해왔다. 아내가 자신의 마음속의 용서에 대해 상당한 확신을 얻고 있는 증거였다. 더욱이 그동안 그 일에 대해선 나름대로 꽤나 생각을 해오고 있었던 어조였다. 이를테면 아내는 그것으로 마음을 깨끗이 정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기를 삼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를 찾아가서 직접 자신의 용서를 확인시켜 주어야 마음이 깨끗하고 편해지겠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에게서 자기 용서의 증거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아내를 위해서나 사형수 김도섭을 위해서나 다 같이 필요한 일일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왠지 거기 대해 선뜻 동의를 하고 나설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내가 어딘지 지나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지나침만큼 아내가 거꾸로 불안스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 글쎄,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으로 그를 용서했으면 그만이지, 당신이 무슨 성자도 아니겠고…….
나는 막연히 아내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번 말을 꺼낸 아내는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그녀가 주님을 옳게 영접할 무슨 불가피한 마음의 빚이기라도 하듯, 그래 반드시 그것을 자신이 감당해 내야만 할 일이듯 날이 갈수록 마음이 그쪽으로 확고하게 굳어갔다. 사실은 아내가 어쩌면 아직도 자신을 옭아맬 스스로의 증거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고 보니 아내에 대한 나의 동의 여부는 처음부터 크게 상관될 일이 아니었다. 아내가 내게 그것을 말한 것도 나와 그 일을 의논하재서가 아니었다. 그런 일에 관한 한 아내의 진짜 의논 상대는 내가 아닌 김 집사였다. 내게 의사를 내비친 바로 그때부터 아내는 김 집사와 계속 그 일을 함께 의논해 온 모양이었다.
어느 날 김 집사가 아내 몰래 약국으로 나를 조용히 찾아왔다. 그녀가 전에 없이 나를 따로 찾아온 것은, 이번에는 김 집사도 내심 그 일에 자신이 썩 덜하다는 증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김 집사 역시 아내가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하였다.
- 이 일은 아무래도 알암이 아빠하고도 의논을 해봐야 할 일 같아서요. 애 엄마 마음이 어딘지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예기찮은 충격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나 김 집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답게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더라도 그것이 아내에겐 어차피 필요한 고비가 아니겠느냐고 나의 동의를 구해 오는 것이었다.
- 알암이 엄마에겐 그런 자기 확신의 계기가 필요한 점도 있지만, 무슨 다른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도 함께 따라가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제가 가서 곁에 함께 있어주면 별다른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새삼스런 충격만 안 받는다면, 자기 용서에 대한 확신까지는 몰라도 손해를 볼 일도 없을 테니까요. 선생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면 제가 한번 기회를 만들어보겠어요. 제 힘으로 일이 어려우면 저희 목사님의 힘을 빌릴 수도 있으니까요.
나로선 그저 기분으로 막연히 반대를 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아내를 거기까지 인도해 온 데는 누구보다 김 집사의 도움이 컸을 뿐 아니라, 아내에게 그것이 어차피 필요한 고비라면 이번 일도 모든 걸 그 김 집사에게 맡겨두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 아무쪼록 집사님만 믿겠습니다.
여전히 한 가닥 불안스런 의구심을 금할 수가 없으면서도 나는 그쯤 일을 결정짓고 말았다. 아내의 일에선 어쨌거나 늘 김 집사의 판단이 옳았던 편인데다 이제 와선 그녀에 대한 아내의 믿음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경솔하고 안이한 생각이었다. 아내와 인간 의지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한 무책임한 처사였다. 그녀가 애초 자신이 덜해 보였던 대로 이번에는 그 김 집사의 처결이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만 것이었다. 나의 한 가닥 꺼림칙스런 불안감이 무참스런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었다.
아내의 면회는 의외로 쉽사리 기회가 마련됐다. 김 집사가 한 며칠 자기 교회의 목사님을 앞세우고 이곳저곳 유관 기관들을 쫓아다니는 듯 싶더니 어렵지 않게 기회를 만들어내었다. 그래 아내는 마침내 김 집사의 주선으로 사형수 김도섭의 면회를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마침 성탄절 분위기가 고비에 올라선 12월23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내의 마지막 파국의 발길이었다.
사형수 김도섭의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 아내는 모든 것이 다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면회를 다녀온 그날부터 아내는 다시 열병 환자처럼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리고 멍하니 넋이 나간 눈으로 혼자 고뇌에 시달렸다. 그간의 모든 치유의 효과가 거품이 된 듯 참담스런 절망감이 되살아나 있었다. 그나마 그간의 신앙심의 끈만은 놓아버릴 수 없었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전날처럼 저주 어린 복수심이나 분노의 감정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망연스런 자기 상실감 속에 바닥 모를 절망감만 짓씹고 있었다. 분노도 복수심도 잊어버린 아내는 심신이 온통 절망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나는 도대체 아내가 그를 만나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내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해도 아내는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아내는 아예 말을 하는 것조차도 귀찮고 부질없어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아내는 음식조차 거의 입에 대려지 않았다. 자신과 자기 밖의 모든 걸 포기해 버린 사람의 형국이 분명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김 집사에게서도 까닭을 알아낼 수 가 없었다. 나는 하다 못해 김 집사를 다시 만나 그녀에게 그날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그날의 일에 대해서만은 김 집사도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 그를 만났을 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면회는 일단 무사히 끝났으니까요.
작자가 아직도 아내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뻔뻔하고 포악스럽게 굴고 나섰던 게 아니냐는 나의 물음에 김 집사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였다.
- 흉악스럽기는커녕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고 애 엄마에게 간절한 용서를 빌었어요. 용서를 빌었다기보다 애 엄마의 책벌을 자청하고 나섰지요. 그것으로 애 엄마의 마음의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어떤 책벌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구요. 그게 그 사람의 진심이었던 것이 그 사람도 이미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었거든요.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뿐더러 그는 참회의 증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놓고 있었다 하였다. 그는 그만큼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
- 그것이 그에게는 주님 곁으로 가는 날이니까요.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것으로 그는 주님의 사함을 받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누구보다 깨끗한 영혼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지요.
김 집사는 그러면서 그의 영혼이 이미 주님의 용서를 받은 이상, 그는 아내와도 똑같은 여호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아들딸이 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같은 아버지의 형제자매로서 아내의 어떤 저주나 복수도 용서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더욱이 아내의 용서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목이 말라 있었을 거라 하였다. 그만큼 아내의 마지막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고도 하였다. 그런 데 아내는 막상 그를 만나고 나선 그를 용서하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 전 애 엄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차라리 실망감을 금치 못했지요. 알암이 엄마가 마음속에서 아직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알암이 엄만 아직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 그토록 부족했던 거예요.
김 집사는 아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 믿음이 모자란 때문이라 단정했다. 그리고 이미 주님의 사함을 받고 있는 사람을 용서 하지 못한 아내를 나무랐다. 이미 마음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그래 스스로 용서의 발길을 나섰던 아내가 아직도 숨은 원망을 남기고 있는 것을 김 집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그 김 집사로서도 아내의 새삼스런 절망에 대해선 깊은 내력을 알 수가 없었다. 현장을 함께하고 온 김 집사가 그러니 나로선 더욱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위로할 길이 없었다. 김 집사의 그런 설명을 듣고 나선 아내의 절망이 더욱더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갔다. 아내는 어째서 그를 용서하지 못했을까. 아내는 스스로 그를 용서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갔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이미 자신을 참회하고 아내의 용서를 고대하고 있었다지 않은가. 그런 사내 앞에 아내는 무엇 때문에 저토록 절망을 하고 돌아온 것인가…….
그러나 그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은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 김 집사의 비난 섞인 설명 속에, 그것을 들을 때의 나의 알 수 없는 배신감 어린 기분 속에 이미 분명한 것이 말해지고 있었다. 나는 김 집사의 이야기에서 그녀를 충분히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표적이 불분명한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막연한 배신감 속에 수수께끼의 해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한데도 나는 미몽 속에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한데 며칠 뒤에 나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아내의 절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나는 이날사 비로소 나의 까닭 없는 배신감의 정체를 깨달은 때문이었다.
한편 생각해 보면 그 역시도 김 집사의 덕분인 셈이었다. 김 집사 는 참으로 그 신앙심만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신앙심과 사랑만큼 사명감이 투철하고 끈질긴 사람이었다. 김 집사는 아내를 단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지 아내를 부축하여 그의 믿음을 다시 회복시켜 놓으려 하였다. 그리고 그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자기 사랑의 고비를 감당시키려 하였다.
김 집사는 매일 아내를 찾아왔다. 그리고 성심껏 아내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아내는 여전히 말을 잃은 상태였고, 위로와 설득은 김 집사 혼자서 일방적인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마침내 그 김 집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모처럼 다시 입을 열고 나섰다. 한데 그게 바로 아내의 절망에 관한 비밀의 열쇠였다.
- 집사님은 모르세요. 집사님처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오히려 몰라요. 나는 집사님처럼 믿음이 깊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히려 인간을 알 수 있고 그 인간 때문에 절망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며칠간은 늘 그래 왔듯이 아내가 이번에는 전혀 김 집사의 설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김 집사를 믿고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힐난하고 나섰다. 아내는 그 기나긴 침묵 속에 어떤 확신을 굳혀오고 있었던 듯 절망적으로 울부짖어대었다.
- 저도 집사님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 교도소까지 그를 찾아갔구요.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제 믿음이 너무 약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너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예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 게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도 들었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이미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것으로 주님의 사함을 얻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 그토록 마음과 얼굴이 평화스러웠던 거예요.
김 집사가 아내의 비뚤린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내는 승복하지 않았다. 자연히 두 사람은 똑같이 언성이 높아지고 심한 말다툼 조가 되어가고 있었다.
-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아내가 이번엔 좀더 깊은 자신의 진실과 원망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김 집사는 그 아내의 아집을 꺾는 데만 정신이 쏠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김 집사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원망스럽도록 하느님의 역사만을 고집했다.
-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그러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섭리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깊으신 뜻을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당신의 뜻을 따라 복종을 해나갈 의무밖에 없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종이 된 우리 인간들의 의무인 거니까요. 알암이 엄마도 그날 똑똑히 들었지만, 그는 애 엄마의 어떤 원망이나 책벌이라도 달게 받을 각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가 이미 주님의 사함 속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혼의 평회를 얻고 있는 증거였어요. 그래서 그는 애 엄마의 어떤 원망이나 증오도 달갑게 감수하고, 그걸 용서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가 나를 용서한다구요? 게다가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하긴 그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질투 때문에 더욱더 절망하고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
아내는 마침내 마지막 절망을 토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김 집사는 이제 그 가엾은 아내 속에서 절식해 죽어가는 인간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의 무참스런 파탄 앞에 끝끝내 주님의 엄숙한 계율만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차라리 주님의 대리자처럼 아내를 강압했다.
- 벌써 몇 번씩 되풀이한 말이지만, 그게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숨은 섭리의 역사이신 거니까요. 주님께선 아마 그를 통하여 알암이와 알암이 엄마의 영혼을 함께 구원하실 뜻이셨을 거예요. 이제 와서 굳이 그를 용서하는 것은 이미 주님의 사함을 받은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알암이와 알암이 엄마 자신을 위해서 자신들의 영혼에 필요한 일일테니 말이에요. 알암이 엄만 무엇보다 그걸 아셔야 해요. 알암이 엄마한텐 그 길밖에 없어요.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씌워진 굴레는 누구도 마음대로 다시 벗어던질 수가 없는 거니까요. 그것은 또 다른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는 일일 뿐이에요.
- 아아…… 그러면 나는, 그러면 나는…….
아내는 마침내 처절스런 탄식 끝에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날의 엉뚱스런(그러나 아내에겐 그의 삶의 마지막 구원과 승패가 걸려 있었을) 논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으로 아내의 그간의 지옥 같은 절망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로소 그 참담스런 절망의 뿌리를 들여다볼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아내는 한마디로 그의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용서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아내에겐 이미 원망뿐 아니라 복수의 표적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녀가 용서를 결심하고 찾아간 사람이 그녀에 앞서서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었다. 아내와 알암이의 가엾은 영혼은 그 사내의 기구(난들 어찌 그것을 용서라고 말할 수 있으랴)를 통하여 주님의 품으로 인도될 수가 있었다. 아내의 배신감은 너무도 분명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5

그러나 아내의 절망감과 파탄은 거기서도 아직 다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더 절망스런 아내의 파탄은, 그렇다고 그녀가 다시 인간의 복수심을 선택해 버릴 수도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물론 김 집사의 강압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는 이미 스스로 용서를 결심하고 그를 찾아갔을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은 스스로도 믿음과 사랑의 계율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참뜻과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내가 그것을 버리는 것은 아내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 속의 ‘인간’을 부인하고 주님의 ‘구원’만을 기구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기엔 주님의 뜻이 너무도 먼 곳에 있었고 더욱이 그녀에겐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아내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김 집사 앞에 거기까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 - 그 허점과 한계를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가 없는 한 김 집사로서도 그것은 불가능할 일이었다.
아내가 지금까지 내게 입을 다물어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무서운 고통과 절망이 입조차 열 수가 없게 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그 아내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아이를 앓은 아비가 아니더라도 다만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그녀의 아픔만은 함께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기로서니 그것이 그 가엾은 아내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그리고 그 절망스런 고통을 덜어주고 아내를 파탄에서 구해내기 위해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었으랴. 나는 그런 아내를 알고서도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질없이 아내를 맴돌면서 안타깝게 마음만 앓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차피 아내가 넘어서야 할 삶과 믿음의 고갯마루라던 김 집사의 조언을 믿은 때문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이 아내 스스로가 이기고 일어서야 할 자기 몫의 고통이라 여긴 때문이었을까……. 아니 물론그것은 아니었다. 김 집사는 아직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도 아내를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섭리와 완벽한 사랑을 설교했다. 그리고 아내의 신앙심의 회복과 주님의 종으로서의 용기를 부추겼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다른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내게는 다만 그 아내의 절망과 아픔을 안타까워하면서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 부질없는 소리들로 그녀의 심사만 어지럽혀댔을뿐 다른 위로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과연 마지막 절망 속에 자신을 힘없이 내맡겨버리고 있었다. 김 집사나 나의 어떤 소리도 도대체 의식에 닿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다시 입을 까맣게 다물어버린 아내는 물 한 모금을 제대로 마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아, 아내의 그 절망과 고통의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차마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아내는 결국 그러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이고 섭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여 절망의 뿌리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람 김도섭의 사형 집행 소식이 아내를 거기까지 자극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고 2월로 접어들어 김도섭은 마침내 교수형이 집행됐고, 그 소식이 라디오에까지 방송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김도섭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몇 마디는 내게까지 어떤 새삼스런 배신감으로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제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제 육신의 일부는 이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맡기고 가니까요. 형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었다.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 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고 살아남아 고통 받는 그 가족 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 주십사고……. 그간에도 거기 늘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내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지내던 아내가 이날따라 하필이면 라디오를 켜놓고 그 몹쓸 뉴스를 모두 들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지난 2월 5일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틀 뒤, 아내도 끝내는 더 견디지를 못하고 제 손으로 혼자 약을 마셔버린 것이었다. 자기를 끝까지 돌보아온 김 집사에게는 물론 내게마저 유서 한 조각 남기지 않은 채였다.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