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0

일본군/조선인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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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조선인

최근 수정 시각: 2019-11-17 21: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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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조선인



일본군
旧日本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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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한반도 출신자를 가리키는 표현. 그 특성상 대다수, 특히 장교는 거의 전원이 육군이고 해군은 드물다.


1. 개요2. 조선지원병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4.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5. 알려진 사람들
5.1. 조선군인5.2. 일본 육군5.3. 일본 해군6.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
6.1. 문학작품6.2. 드라마6.3. 영화6.4. 논픽션
1. 개요[편집]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일본 육해군을 조선에 진주시켰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은 조선을 지배하겠단 야욕을 드러냈고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엔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일으켰다. 그 후 1910년에 강제 병합을 했다. 총독부 산하의 행정기관에도 조선인을 배치하였으나, 일본군에 조선인이 입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군에 있는 경우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일본에게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군인들이 일본 육군으로 들어온 경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 밖에 없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인은 조선 왕족 출신이거나[1] 친일파들뿐이었다. 그나마 해군은 장교는커녕 말단 수병조차 조선인을 받지 않고 있었다.[2] 1930년대 이후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가 만주군이나 관동군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 본토 출신들이거나 조선이나 대만에서 자란 일본인이었다.

강제병합 이후 치안을 유지한단 핑계로 경찰 조직 대신에 헌병을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헌병보조원으로 일부의 조선인을 뽑았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그랬지만 식민지의 사람들은 아주 하급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조선인이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공직이었기에 상당히 엘리트들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일본제국 경찰로 대신하고 조선인들을 보다 많이 채용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미국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군은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군에 끌고 가거나 군속(군무원)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과 일본인과 대만인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3] 실제로는 군 복무에서 철저히 분리하여 관리했으며 조선인들은 전장에서도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다.[4] 그리고 일본은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들의 친족도 징병에서 제외하였다. 전후에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조선인은 129명이었고 이들 중 14명은 사형되었다. 도쿄 재판에 오른 A급 전범은 당연하지만 없다. 차별 등으로 조선인이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외교관 도고 시게노리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아니라 임진왜란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다. 일본군 고위급에 오른 조선인의 대다수는 대한제국군에서 편입한 친일파나 왕공족이었다. 홍사익만이 예외적인데 일본군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조선 이름을 유지하는 그를 진급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전시용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이와는 별개로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 중에 자위대 직원이 있을 것이다. 2011년 일본 방위성 정보 본부에서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계 일본인 정보원이 한국에서 사찰하다가 추방된 적이 있다. 프랑스 기사

육군병의 경우 94,978명이 징집되어 5,870명이 전사하고 89,108명이 귀환했다 (생존률 93.8%). 중국에 배치된 조선인 육군병 15,941명 중 15,287명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어서, 사망률이 높았던 필리핀 전역에 배치된 육군병은 3,107명 중 951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생존률 30.6%). 뉴기니 등도 마찬가지였다 (2,877명 중 1,014명 귀환, 생존률 35.2%).[5]

2. 조선지원병[편집]

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편집]

4.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편집]
약간 표현에서 기술적인 차이가 있는데 조선군인은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편입한 친일파나 1938년 지원병을 받기 전에 일본 정부의 특례로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을 말한다. 아래는 1910년 9월 1일에 일본군으로 편입한 대한제국군 인원이다. 전원이 육군 장교이다. 총원이 25명이다.



중장(부장)
2

소장(참장)
2

대령(정령)
1

중령(부령/2등군의장[6])
4

소령(참령)
4

대위(정위)
8

중위(부위)
1

소위(참위/삼등사[7])
3


이들 외의 조선군인으로는 특례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홍사익이나 영친왕 등이 있다. 188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육사에 입학한 인원은 141명이었다. 이중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의 인원은 85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육군무관학교가 폐쇄할 때 편입한 33명이다.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육사 출신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자를 포함해 다섯이다. 조선인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없고 일본 내지인 호적으로 들어가 입학한 경우는 일부 있다고 하나 정확한 출처는 없는 상태다.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 및 고급 장교 가운데 일본 해군 출신은 없으며,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등 소수의 만주군 인맥이 있으나 대부분 해병대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부족한 조종사 충원을 위해 해군 예과 연습생(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약칭 예과련.) 일부를 조선인에게도 개방했으나, 종전까지 임관한 사람은 없다. 예과련 출신 중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김재규가 유명한데, 그 역시 후보생으로만 있다 광복으로 임관 못하고 귀국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에는 일부 입학자가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중에도 두 명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군속 신분으로 일하던 헌병보조원도 군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들은 일등병과 이등병 사이의 대우를 받았다. 1910년 당시에 헌병경찰의 숫자는 2,019명이었는데 이중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1,012명이었다. 헌병을 합친 전체 경찰의 숫자는 7,712명이며 이중 조선인의 숫자는 4,440명이었다. 1919년엔 헌병 대신 조선총독부경찰이 업무를 맡았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제국 경찰의 순사가 되었다.

조선인 일본병은 1938년부터 시작된 지원병, 1943년 시작된 학병, 1944년 시작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육군의 경우 1938년부터 특별지원병 제도를 시작했고 해군은 1943년부터 육전대(해병대)와 지상근무자를 중심으로 조선인을 받았다. 고졸 이상으로서 간부를 임용하는 제도의 경우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병사의 경우 보통학교 4년 졸 이상이면 일본어, 산수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조선인을 징병할 때[8] 일본 육군에서는 주로 보병 (약 2/3)으로 데려갔다. 그 외에는 치중병, 비행병, 공병, 고사포병, 산포병, 야포병으로 각각 1~5%씩 데려갔지만, 전차병, 야전중포병, 철도병, 통신병, 선박병, 항기병, 병기병으로 복무한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 해군 역시 주로 수병과 공작병 (각각 1/3)으로 데려갔다. 나머지는 정비병, 기관병, 목공병, 위생병, 주계병으로 복무했다.

5. 알려진 사람들[편집]

5.1. 조선군인[편집]

홍사익: 한국인 평민출신으로 유일하게 일본군 장군(중장)까지 오른 인물. 중일전쟁 시기 중국팔로군과 조선의용군과 교전(태항산 전투)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필리핀전선에서 연합군포로 수용소장 지냈다. 종전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대가 해산되자 일본의 육사로 유학갔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명의로 유학을 간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같이 유학을 간 친구들은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였으나 그는 그대로 남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아일랜드인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며 거절했으며 탈영한 조선인 일본군을 숨겨주는 등 묘한 행동을 많이 했다. 일본군 장군에 있었다는점과 중일전쟁시기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교전 지휘했다는점, 그리고 2차대전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다. 최종계급 일본군 육군 중장.

조동윤: 1871-1923. 조선군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 중장에 이르렀다. 다만 이는 실적 등으로 진급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한제국군의 고위 장교였고 친일 행적 등으로 받은 계급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남작 직위를 받기도 했다.


이병무: 1864-1926. 조동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편입됐다. 정미칠적,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병 토벌에 진압에 앞장서기까지 했음. 경술국치 후 귀족작위 받아 떵떵거렸다. 친일파로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

조성근: 1876-1938. 조동윤, 이병무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들어간 친일파. 최종 계급 일본군 중장.

어담: 1881-1943. 위의 조성근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 중장을 지낸 친일파.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일본 참의원을 지냈으며 지원병 제도가 생기자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은: 1897-1970. 영친왕. 왕공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에 연대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도쿄에 주둔하기도 했다. 최종계급은 일본군 중장. 다만 자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잘 분류되지는 않는다.[9][10]

이희두: 1869-1925.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넘어간 친일파.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할 수 있게 도왔다.

김응선: 1881-1932.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우츠노미야 타로에게 발탁되어 일본 육사로 유학했다. 그후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대한제국군으로 다시 파견되어 열심히 친일질 했다.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왕유식: 1870-1930. 이름과 달리 존나 무식했던 모양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친일파가 된 대한제국군의 군인. 원래는 대한제국군 대위로 박영효가 임명한 친일파 장교를 견제하려고 고종이 일본으로 유학보냈는데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

5.2. 일본 육군[편집]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郎): 본명은 김영길로 평양 출신으로 일본 도야마 대학교를 나온 뒤에 일본군 병(군악부)으로 입대했다. 음악가로 테너로 활동했다. 일본군을 독려하는 음반 등을 발표했다. 전후에 갑산파성향을 띄다 재일교포 북송에 참여해 북한으로 갔다. 친일반민족행위자빨갱이로, 친일 종북 월북 그랜드슬램 그거 심영(...) 그러나 북한 공연에서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자로 몰려 가택연금 등을 당하다가 풀려난 뒤에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내는 일본인인데 자녀들은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친다고. 이 자가 부른 노래는 한 곡이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만들어져 있는데 일본 군가 정복하자 런던이다.

김달삼 : 학병 출신으로 소위 임관. 복무 중 종전을 맞고 귀국하였다. 일본군 복무 경험은 이후 4.3사건에서 김달삼의 유격대 지휘통솔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김석원 :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중일전쟁 전선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다. 신생 한국 육군에도 장성으로 임관해 한국전쟁 때도 일본군도를 패용하고 지휘했다.

김수환 :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징집되어 장교로 교육을 받다가 탈락하고 병으로 끌려가 강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싸웠다.

장준하 : 자원입대하여[11] 중국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7월 탈영한다. 탈영 직후 국민당 유격대에 의탁했으나 그 유격대는 일본군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 게릴라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어찌어찌 빠져나와 김준엽과 다른 조선인 탈영병들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임시정부가 미국 OSS와 합작 기획한 국내 진공 작전 요원으로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편입되지만, 8월 15일 광복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하였다. 이 여정을 함께 했던 광복군 장병 분들이 90대의 춘추로 몇 분 살아계셔서 KBS 역사스페셜에서 증언을 하였다.

김준엽 :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하여 중국에 있던 일본군 자대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 기지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중국군에게 투항해 중국군 기지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광복 후 귀국까지의 행적은 장준하와 거의 동일하다.

탁경현 :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를 조명한 영화가 일본에 나오자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에 추모비가 세워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이 뭐가 자랑이냐고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여 끝내 식이 치뤄지지 못했다.#

이응준

이종찬

이형근

채병덕

5.3. 일본 해군[편집]

김기택: 전 영남대학교 총장. 입대 시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입대 전에 만주흥업은행 본점에서 근무했고 한국전쟁육군종합학교를 거쳐 경리장교로 입대했던 것을 보면 일본 해군에서도 주계과(경리, 보급, 행정을 맡는 병과) 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시 대위였다.
김재규: 일본 해군 예과 연습생 출신으로, 해군 항공소위 임관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아 임관 못 하고 돌아왔다. 대한민국에선 육군 장교가 되었다.

이외에 기관과 등 지원병과 중심으로 출신자가 있다. 심지어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 전투기 조종사도 있었다. 또한 당시 상선학교(도쿄상선, 고베상선학교 등) 출신의 해기사는 의무적으로 해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었으므로 이곳 출신 조선인들 중 군함에 탄 이들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경력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인 매장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으므로 생존자나 후손들도 대개 공개하지 않는다.
6.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편집]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룬 작품에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을 다룬 작품에서 많이 나온다.

6.1. 문학작품[편집]

태백산맥》(조정래, 한국) - 김범우, 심재모

6.2. 드라마[편집]

여명의 눈동자(MBC, 1991, 한국) - 장하림, 최대치
제 3공화국(MBC, 1993, 한국) - 청년기의 박정희 전 대통령


6.3. 영화[편집]

일제 어용영화 지원병(志願兵)(1941, 조선)
일제 어용영화 병정님(兵隊さん)(1944, 조선) - 조선군 보도부의 지원으로 제작된 개소리 모음집선전 영화.
잊혀진 황군(忘れられた皇軍)(1963, 일본) - 일제 침략전쟁에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 병사들의 삶과 이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니혼 TV를 통해 방송된 25분짜리 영화이다. 극중 일본 정부는 조선인 부상자 문제에 대해서 조선은 1945년 이후 외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징병된 이들 역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이 일본군에 부역하는 상황에서 입은 부상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관성과 한국정부의 지원 의무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청구할 것을 못박았다.[12] 감독은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일: 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영:Merry Christmas, Mr. Lawrence)(1983, 일본•영국) - 조선인 병사를 연합군 포로를 성폭행하고 처벌받을 처지에 놓이자 자살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해 국내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갑니다(俺は、君のためにこそ死ににいく)(2007, 일본)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탁경현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마이웨이(2011, 한국) - 주인공이 노몬한 사건에 참전한 조선인이라는 설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한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에서 영화의 모티프를 따왔다.
손님(2015, 한국) - 촌장[13]


6.4. 논픽션[편집]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김효순, 한국) - 관동군에 징병되어 만주 작전에 참전했고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 병사들의 애환과 배상 문제를 다룬 책.
궁금한 이야기 Y / 17세 소년은 왜 자살특공대가 되었나(2014.02.28 방송, 한국)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박동훈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이 알고싶다 328회 / 야스쿠니의 神이 된 소년 특공대원(2005.02.26 방송, 한국) - 만주국의 수도였던 장춘의 방송국에서 발견된 박동훈의 유언이 담긴 레코드와 그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우경화와 보통국가화 문제를 지적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1137회 / 화태(樺太)에서 온 편지 - 국가는 왜 날 버렸나?(2018.09.15 방송, 한국)


[1] 당시에 일본은 왕공족으로 이들을 분류하였다.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단 높게. 간단히 줄여 이왕(李王)가라고 불렀다.[2]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감안하면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조선인들의 입대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3] 윤치호 등 친일파는 정말로 이것을 믿고 '드디어 내지인과 조선인이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구나!'하고 기뻐하기도(...)믿으면 곤란하다[4] 단, 일단 입대하고 나면 계급 우선주의에 입각했기에 조선인이라도 하급자 일본인은 그들을 함부로 못 대했다. 괜히 조선인들이 오장 달 때까지만 참자며 버틴 게 아니며, 실제로 오장으로 진급하여 동네로 오면 자신을 괴롭히던 주재소장(오늘날의 파출소장 내지는 지구대장) 싸대기부터 때리고 봤다고 하는 게 아니다. 홍사익 중장의 경우에도 일본인 부하들이 홍 중장이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구름위의 존재 같은 중장이 일본인도 아니고 대한제국 황족도 아닌 평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외경심을 느꼈다 한다.[5] 일본군의 병력동원 규모와 추이[6] 군의관 별도의 계급으로 중령에 상당한다. 3등군의장은 소령.[7] 소위에 상당하는 계급으로 보이는데 아는 위키러의 추가바람.[8] 관련 문헌은 정안기 (pdf 논문 본문) 및 엑셀 보충 자료를 참조할 것.[9] 왕, 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황족과 일본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친왕 이은 경우, 태어나자마자 아주 어린시절부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경우였고...[10] 1950년 전후로 한국내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한 이승만대통령의 입김으로 그는 정상적 입국절차를 받지 못해 결국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일본에 지냈다. 하지만 그는 육군 장교자격으로 2.26사건의 진압부대의 일원이었을 뿐, 단 한차례도 제대로 된 교전, 특히 독립군전선 혹은 중국전선을 밟은 적 조차 없다. 또한 그는 자신의 국적을 계속 잊지 않고 1910 경술국치이후 1945 8.15 광복까지의 35년간 한국어를 잊지 않아 1945년 이후 주변의 한국인들과는 유창한 한국어로 소통했다고 한다. 참고로, 1945년 전까지 그의 주변에는 한국인이 없어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35년간 일본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계속 한국어를 되뇌었다는 것이다.[11] 고향친구 최기일은 말리는거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고 말했고 본인 자서전 돌배게에서도 부모님이 걱정 되었다고 이유를 들면서도 자원했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뒷배경이 있었는데, 그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가 정신대로 징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입대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 돌베개, 고상만 저. p38>[12] 단 영화의 촬영시기는 한일국교정상화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대일청구권등 보상논의 역시 이루어지기 이전이었으며 당시의 한국 경제 역시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실시되기 이전의 참담한 수준이었고 당시의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당시 부상당한 참전 용사들의 복지 문제도 손을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한일기본조약체결 이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13] 영화 속에서 촌장은 나환자촌의 환자들을 배신해 학살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무당마저도 동굴에 가두고 산 채로 태워죽이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지으면서 본인이 부리는 패악을 "살려고 지은 죄는 용서받는다."라는 말로 합리화한다. 주인공 부자와의 약속을 배신한 것도, 한센병 환자들과 무당을 죽여버리고 마을을 차지한 것도, 일본군에 입대한 것도 본인이 살기 위해 한 행동이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