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관리자 201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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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에 대하여2 MONTHS AGO BY 무영 정 IN 다시 개벽이다 TAGGED: 개벽, 개벽신문, 개벽신문 63호, 개벽하는 사람들, 원광대학교, 콜로키움
* 이 글은 개벽신문 6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제5회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
야규 마코토(柳生眞)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3월 17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제5회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는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文化內開花)의 시도>라는 제목으로 일본 난잔대학(南山大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김승철(金承哲) 교수를 발표자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이찬수 HK연구 교수를 토론자로 모시고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 학파인 교토학파(京都學派)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일본에서의 토착화, 일본 문화와 기독교 사상과의 조화·융합 시도, 기독교와 불교사상 혹은 자연과학과의 대화에 대해 논의했다.
교토학파(京都學派)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활약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와 그의 제자들로 서양의 사상·철학·종교와 동양(혹 일본)의 융합을 시도한 학파로 잘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는 크게 그 내용이 다양하고 종교색이 강한 우파(右派)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한 좌파(左派)로 나뉘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교토학파 우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상의 일본 토착화,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철학적 융합 시도에 대해 다루어졌다. 김승철 교수가 발표에서 문화 내 ‘개화(開花)’라고 쓴 것은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바깥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씨앗’을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고 키우고 꽃피우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 기독교의 특수성
일본의 기독교 포교는 1549년 성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전국시대 일본에 와서 로마가톨릭 선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금교령을 내린 이래로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국가와의 외교·통상 관계를 전면 금지시키고 철저한 기독교 탄압정책을 취했다.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의 내항으로 인해 도쿠가와 일본이 개국했다. 그 이후 일본에 오는 서양인이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믿거나 서양인끼리 성당·교회를 가지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일본인이 기독교를 믿거나 일본인에게 포교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다.
심지어 유신 초기의 메이지정부(明治政府)도 애당초 기독교 탄압 정책을 계승했고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기독교신자. 몰래 가톨릭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서양 각국의 압력과 비판을 받고 메이지정부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한 후에도, 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공포, 1890년 시행)으로 신앙의 자유(제국헌법제28조)가 보장된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는 늘 반일본적이고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이유로 사회 지도층,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기독교에 입신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일본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의 패전 후 일본국헌법에서는 “국가의 안녕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규정이 없어지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일본국헌법 제20조 제1~3항). 그 후 옛날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시기와 적대감, 경계감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기독교(가톨릭, 성공회 등도 포함해서) 신자 수는 일본 인구 약 1억2천만 명 중 불과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혼합적인 일본의 풍토를 가리켜 흔히 “일본인은 연초에 신사(神社)에 참배하고, 기독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절에서 장례식을 지낸다.”고 농담처럼 말해진다. 기독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대학, 병원도 많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기독교 유래의 연중행사가 정착된 지도 오래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는 표면적, 주변적, 부수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가장 핵심적인 유일신(唯一神) 신앙, 혹은 하나님과 1대1로 맞서는 강렬한 자아의 개념은 여전히 서양적인 것, 또는 비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계 내에서는 다수파의 일본인에게 어떻게 유일신 신앙을 수용시키느냐가 계속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일본을 거울삼아 기독교 스스로를 보았을 때,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너무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이어서 다른 문명·문화·종교와에 갈등, 대립을 빚지 않았을까, 다종교·비기독교문화에 대해 너무 억압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으로 임하지 않았을까, 너무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특히 불교와의 대화는 그러한 기독교의 자기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기독교와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추진해 온 신학자인 얀 반 브라흐트(Jan Van Bragt)는 기독교가 불교와 대화해야 할 동기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는 토착화의 동기, 즉 너무 서구 기독교를 직수입한 일본 기독교를 “일본인의 마음의 금선(琴線)에 와 닿는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알리게 한다는 동기이다. 가톨릭 문학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인 기독교도로서 영성, 죄와 구원, 그리고 “예수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려 했다. 최근에 영화화된 『침묵(沈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 탄압을 견디지 못해 후미에(踏畵)1를 밟고 기교(棄敎)하려 한 선교사로 도리고 신부 앞에 예수가 나타나 “밟아라. 너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왔다.”고 말한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에는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대화의 동기, 즉 소수파로서의 기독교인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불교도와 대화하고 신학적 통로와 중계를 마련하려는 동기이다.
세 번째는 탈 서양적 형이상학의 동기이다. 이것은 지상적 존재를 정초(定礎)하려고 형성된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종교적 사실, 특히 셈족(유태)적 사고방식에 그 근원을 둔 기독교를 표현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과 함께 그 희랍적 범주나 논리를 가지고 표현된 신학(과 그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적 기독교 신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신앙과 자유와의 갈등, 대립을 불교철학의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풀고자 하는 것이다.
혼다 마사아키(本多正昭)는 기독교인으로서 불교의 “즉(卽)의 논리”와 만나면서 기독교에의 입신이 단순한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신뢰와 사귐은 가역성의 지평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에 저 불가역성이 이러한 가역성의 인(因)이라고 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노데라 이사오(小野寺功)는 가톨릭 신학과교토학파의 총수인 니시다 기타로 철학의 “장(場)의 논리” “절대무(絶對無)의 장소”를 접목시킴으로써 일본적 영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니시다의 ‘장소’론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가 거기에 있는 장소’(三位一體のおいてある場所)로서 파악할때, 실로 의미 깊은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적 영성의 실존적 자각의 논리인 ‘절대무의 장소’의 사상과, 성서와 교회의 신앙적이고 계시진리의 근본적인 논리 구조를 나타내는 삼위일체론은 가장 깊이 상접(相接)하는 하나의 진실의 사태가 된다.”고 말했다.
오노데라는 일본적 영성(靈性)을 “대지적 영성”, “대지성(大地性)”이라고 설파한 불교학자이자 일본 선불교와 선문화를 영어로 외국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우리들의 이성에 있어서 절대무인 근원은 기독교적인 신앙 의식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절대와 상대가 교류하는 장소, 또는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이 탄생하는 ‘장소’인 어떤 대지적(大地的) 영성(靈性)의 이념화의 시도이고, 성경의 ‘거기에 있어서 있는 장소’로써 절대자의 자기사영점(自己射映點)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절대무의 근원이 기독교적인 신앙의식으로는 삼위일체론이 되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대지적 영성의 이념화임과 동시에 절대자가 스스로를 투영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가톨릭 신학과 니시다 철학, 스즈키 다이세츠의 철학을 아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자인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도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배우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의 개인적·사회적인 본래성, 전체성의 회복이고, 그 중심은 원래 자기·자아인 인간이 자기·자아로써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지만, 이 ‘자각’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중심임과 동시에 불교적 깨달음(覺)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또 야기는 “… 예수는 사람이 어떠한 교단에 속하는 어떠한 교의를 받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방식이 사실상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가가 문제라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했다.
교토학파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신학자·사상가들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접목 시도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 반 브라흐트나 종교다원 주의를 주장한 존 힉(John Hick)과 같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배타성에 반대한 종교 철학자·신학자와도 호응하면서 니시다의 “절대무의 장소”,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覺)의 논리 등을 통해 기독교 신학과 불교와의 접목, 서구기독교의 배타성(排他性)·독선성(獨善性) 배제, 그리고 일본의 지적 풍토에의 기독교 토착화를 시도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보는 교토학파와 기독교와의 대화
일본이 근대화한 이래로 기독교 또는 서양문명·철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응·대결할 때에는 불교사상 중에서는 특히 선불교(그리고 그것에 유래하는 니시다의 장소론,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론)를 내세웠다. (유교사상을 내세울 때는 양명학(陽明學)을 내세워 기독교나 독일관념론과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김승철 교수는그 배후에 서구 근대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근대적 자아에 대한 일본 지식층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한다.
다만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적 전통과 시도는 일본만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던 범아시아적인 사상적 맥이다.
동서양의 사상적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어떤 사상이 주로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를 맞이할 “호스트” 역을 맡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승철 교수는 불교의 경우 한국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내세웠고, 중국에서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찬수 교수는 “김 교수님의 발제 내용은 한국적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논평하면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했다. 하나는 교토학파의 니시다의 수제자이자 니시다철학의 비판자인 타나베 하지메(田邊元)의 사상이다. 타나베는 니시다의 “즉(卽)”의 논리에게는 “매개”가 결여되고 있어서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적에 공(空)을 색(色)과 “즉(卽)”하게 해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식의 근저에서 “인식하려는 의지(Willezur Erkenntsis)”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인간적 오성과 신적 직관을 연결하는 매개로 적용한다고 지적했다.
타나베는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사상을 들어서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그 본원(本願), 중생의 신심(信心)의 세 가지를 중요한 요소로 요약할 때 “신심”은 바로 매개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극락정토에 인도하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본원을 세우셨고, 아미타불의 은총과 중생의 신심은 별개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심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을 구체화시켜주는 매개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신심이 없는 중생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없다). 타다베는 신란의 사상에서 니시다가 보지 못했던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뒤 이것을 진리 체험의 타력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교토학파이면서 니시다적인 “절대무의장”이론에 부족한 “매개”에 주목하여 독특한 구제론(救濟論)을 전개한 것이다.
또 이찬수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서 양자 사이에는 서로 겹치는 공통성의 겹치지 않는 문화적 차이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역시 일종의 도그마성이 있고, 또 불교 자체가 기독교나 서양철학과 만나서 변화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문화내(文化內)”가 아니라 서로가 문화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할 거라고 덧붙였다.
남은 과제들
종합토론에서는 “왜 한국 사람으로서 종교다원주의라고 말하고 종교회통주의(宗敎會通主義)라고 말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나왔다.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하나의 신성(神性)이 다양한 모습(종교)으로 표현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다원(多元)”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것보다 오히려 원효(元曉)의 화쟁회통(和諍會通) 이래 흔히 쓰여 온 “회통”이라는 말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조선 시대에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에서 많은 서학(西學) 서적들을 가져와 동서 회통을 시도한 적이 있고, 19세기의 최한기(崔漢綺)와 같이 자타(自他)의 통(通), 동양전통의 기철학과 서양과학과의 통, 정치의 통, 사회경제의 통, 심지어는 교(敎)와 교 사이의 통까지 포괄적으로 논리화한 사상가도 있었다. 그리고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는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하는 기독교와도 불교, 또는 유교와도 완전히 다른 영성론을 주장했다. 이렇듯 한국에는 깊고 오래된 사상적 전통이 있고 서구 기독교와의 대화도 충분히 가능한 역량과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이번 회의에 청중으로 참석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26년간 교토포럼을 주재해 온 경험에서 “대화할 때 대화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가장 일본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일본과 대화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내 개화”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일본은 외부의 문화·사상을 받아들여서 자기 토양 속에 끌어들여서 “개화”시키는 것은 잘 해왔기 때문에 이제 문화의 문화 사이의 “문화 간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토포럼을 하면서 교토학파의 학자들과 늘 논쟁을 벌여온 것이 바로 니시다 철학의 “절대모순(絶對矛盾)의 자기동일(自己同一)”의 논리였다고 한다. 이 논리는 필경 동화(同化)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은 한사상·한철학이 지니는 “절대모순의 자타상생(自他相生)”의 논리, 즉 자기와 타자가 모순이 있어야 오히려 서로, 함께 산다는 논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석
1 후미에는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를 부조한 동판을 가리킨다. 에도시대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