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차정식 (지은이)포이에마2015-04-01
책소개
우리 신학계의 괴물, 근면한 성서학자 차정식의 신약 독법. 신약의 난해 구절, 십중팔구 오해되거나 외면받아온 구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간 왕성한 에너지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묵직한 저작들을 산출해온 차정식 교수가 성서 해석의 길잡이로 나섰다.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저자는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한 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을 찾아간다. “학계의 동의를 거쳐 웬만한 결론이 나와 있는 부분은 좀 더 담대히 주장했고, 무엇이 바른 해석이고 온전한 의미인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보다 설득력 있게 대안을 내놓을 만한 꼭지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암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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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부 복음서 뒤집어 읽기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 _막 14:36; 롬 8:15; 갈 4:6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 _마 5:3
‘예, 예’와 ‘아니오, 아니오’의 역설 _마 5:37
신중한 판단과 공정한 반면교사 _마 7:1-5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내력 _마 7:7-8
‘좋아요’와 황금률 생각 _마 7:12
화평이 아닌 검을 던진 까닭 _마 10:34-39
침노당하는 천국의 실체 _마 11:12
제 논에 물대기하는 ‘이 세대’의 변덕 _마 11:16-17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한 까닭 _마 13:24-30
나무가 된 겨자나물의 비밀 _마 13:31-32
공정한 희생의 샛길 _마 23:29-31
좁은 선교, 넓은 선교 _마 10:5-6, 28:18-20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논쟁 _막 12:13-17
계산하는 믿음, 포기하는 믿음 _눅 14:28-30
‘거듭남’의 본래적 의미 _요 3:1-21
2부 서신서 거꾸로 보기
어떤 믿음이 성서적 믿음인가 _막 10:52; 요 3:16; 롬 10:9; 갈 2:16; 약 2:19 외
초대교회의 빛과 그림자 _행 2:43-47, 4:32-35
변덕의 창의성, 위선의 진보성 _행 10장; 갈 2:11-14
영적인 예배? 합리적 종교! _롬 12:1-2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신 까닭 _롬 13:1-7
하나님의 미련한 것과 인간의 지혜 _고전 1:18-31
미혼의 불안, 비혼의 자유 _고전 7:36-38
바울의 저주, 그 빛과 그림자 _고전 16:22; 갈 1:8-9
연보의 유래, 헌금의 미래 _고후 8-9장
인사말에 담긴 속뜻 _빌 1:1-2
무엇이 덕스러운 것인가 _빌 4:8; 벧전 2:9; 벧후 1:3, 5; 고전 8:1, 10:23 외
상처는 어떻게 권위로 승화되는가 _갈 6:17
해산함으로 얻는 구원? _딤전 2:15
털외투와 가죽책의 사연 _딤후 4:13
그 ‘영’과 ‘옥’은 어떤 영과 옥인가 _벧전 3:18-20
3부 상상하며 바로 읽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_마 7:13-14
하나님의 깊은 속내와 인간의 얕은 심산 _마 13:14-15; 막 4:11-12
천진한 어린이와 몽매한 우민의 역설 _막 10:13-16; 고전 13:11
그 간청함으로 인하여 _눅 11:5-13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_요 8:1-11
더디오 생각 _롬 16:22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_고전 4:6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 _고전 9:19-23
자족과 형통 사이 _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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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6 아무리 성서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녹이 슬고 이끼가 덮인 텍스트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어느 선에서 옳은 해석과 그른 해석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민을 향해 만 가지의 의미를 토해내는 성서 해석의 춘추전국 시대를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해석학적 지식의 공변성公辨性을 높이고 그릇된 관행과 인습의 시장에서 번성하는 온갖 꼼수의 메시지들과 싸워야 하는 윤리적 사명의 당위성도 높아진다. 더구나 무지가 무지인 줄 모르고 오류를 오류로 인지하지 못하는 세태 속에 독버섯처럼 음습한 권위주의가 번성하는 현장을 나 몰라라 방치하는 것은 성서 연구를 업으로 삼는 자의 온당한 도리가 아닐 터이다. 접기
P. 94 요점은 이렇다. 혼인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의 주연을 맡아 왜 따라하지 않느냐고 겁박하고 우기는 아이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를 아전인수의 기준으로 비방하며 욕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나아가 그들로 표상되는 변덕스런 ‘이 세대’ 전체에 해당한다. 반면 제멋대로 겁박하는 자칭 주연들의 공세에 춤추지도 않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도 않는 묵묵부답한 아이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분신이다. 대꾸할 가치가 없으니 침묵으로 응대하는 것이다. 접기
P. 140 이렇듯 동전이라는 가시적 물질의 등장은 경직된 수사학적 상황을 산만하게 흩어버리는 착란 효과를 동반했다. 이와 더불어 예수는 그들이 던진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재치로 그들이 그 동전의 주인공을 응시하게 했다. 이렇게 물러진 수사학적 상황에서 나온 게 바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답변이다. 접기
P. 219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지 선조들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로, 주어진 여건에서 일단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현실주의적 선택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바울의 선택은 주어진 거대 권력체제를 일단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었다.
P. 284~285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에 ‘은혜’라는 말과 함께 ‘덕’이라는 어휘가 기묘한 의미의 자장을 형성하면서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은혜스럽다’라는 형용사는 ‘덕스럽다’라는 또 다른 형용사와 짝을 이루면서 교회 안팎의 모든 세상사를 주물러대고 모든 문제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처럼 그 언어의 권위적 후광을 발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이 언어의 이면에 스민 무의식적 기계장치가 짐짓 수상하다. 어떤 사안에 대한 세밀한 논의와 검증, 비판과 성찰이라는, 피곤하지만 절박한 과정을 생략한 채,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그 이해 당사자들이 제 편한 대로 대강 눙치며 무마하고 봉합하며 흐지부지하는 걸 ‘은혜’와 ‘덕’이란 말을 앞세워 정당화하는 현상이 너무도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심각한 기만이고 우민화의 덫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차정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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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글쓰기로 성서신학을 일상과 사회, 문학의 영역과 연계시켜 크로스오버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신학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B.A.)와 미국 맥코믹 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하고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향연』『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시인들이 만난 하나님』『바울 신학 탐구』 등 50여 권 (공저 포함)의 저술을 내놓고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상·하)를 번역한 것 외에도 1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꾸준한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신학성서의 환생 모티프와 그 신학적 변용』으로 제1회 한국기독교학회 소망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가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화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성서문예학 연구>,<신약성서와 창의적 설교>,<예수 인문학> … 총 4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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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큰글자책]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2 >,<[큰글자책] 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큰글자책] 탕자의 귀향 >등 총 154종
대표분야 : 기독교(개신교) 18위 (브랜드 지수 263,81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약의 난해 구절, 오해되고 외면받아온 본문에 대한 창의적이고, 설득력 있고, 올바른 해석!
인습과 관행에 매인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우리 신학계의 괴물, 차정식의 신약 독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는 전투적일 만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무리를 놀라게 했던 세금 논쟁의 진실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께서 옥에 갇힌 영들을 찾아가셨다고 하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은 대체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는 구절은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구원론을 설파하는 것인가?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성서학자 차정식 교수가 40편의 글에서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세밀하게 검토한 뒤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간다.
인습과 관행을 넘어서는 치열한 성경 읽기
우리 신학계의 괴물, 근면한 성서학자 차정식의 신약 독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 구절은 전투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무리를 놀라게 했던 세금 논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께서 옥에 갇힌 영들을 찾아가셨다고 하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은 대체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는 구절은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구원론을 설파하는 것인가?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는 이 같은 신약의 난해 구절, 십중팔구 오해되거나 외면받아온 구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간 왕성한 에너지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묵직한 저작들을 산출해온 차정식 교수가 성서 해석의 길잡이로 나섰다.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저자는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한 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을 찾아간다. “학계의 동의를 거쳐 웬만한 결론이 나와 있는 부분은 좀 더 담대히 주장했고, 무엇이 바른 해석이고 온전한 의미인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보다 설득력 있게 대안을 내놓을 만한 꼭지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암시하기도” 했다.
시발점은 지난 2012년 10월 저자의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이를 보완해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람어 ‘아바abba’가 우리말의 ‘아빠’에 해당한다는 통념이 서구의 한 유명 신학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친밀하게 ‘아빠’로 부르고 싶은 감상주의를 부추겼고 미성숙한 자아를 감성 일변도의 신앙 취향으로 땜질하려는 경향을 낳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네티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의 말씀에 대한 갈증과 함께 그것을 바로 해석하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허기”가 심하다는 점을 확인한 이 일 이후, 2년여에 걸쳐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현대종교〉에 글을 연재했고, 그 40편의 글을 엮어 책으로 펴냈다.
편의주의와 아전인수식 해석을 넘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와 오늘의 독자 사이에는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문화적 차이라는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어 원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성서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마 10:5-6,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과, 부활 사건 이후 주신 당부(마 28:18-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앞에서 독자들은 예수께서 이방인 선교를 명령한 것인지 금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성서 해석과 관련한 이러한 문제는, 특히 대체로 지성적 탐구보다는 화끈한 ‘믿음’을 강조해온 한국 교회에서 더 심각하다. 성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치밀하고 끈질긴 정공법으로 돌파하기보다는, 편의적으로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왜곡된 이해를 유통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구절로 흔히 사용되고 있고, 고린도전서 13장 등지에서 가져온 ‘덕스러울’ 것에 대한 강조는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일을 넘기고 마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의 ‘거꾸로 읽는’은 ‘전복적으로 읽기’에 앞서 일차적으로는 ‘바로 읽기’를 의미한다. 그간 잘못된 해석이 워낙 광범위하게 유통되어온 터라, 제대로 읽는 것은 기존의 해석의 문제를 바로잡으며 거꾸로 읽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성서의 독자들을 무지와 맹목에서 벗어나도록 계몽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일차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이단의 빈약한 성서 해석을 넘어서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이런 무지와 맹목이 이단 사이비의 모판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잘 알려진 천국 비유 중 가라지의 비유(마 13장)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주인의 말은 때로 기성 교회에서 “개혁이니 변화니 하는 구호로 교회의 내부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잘못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단 종파에서는 “이 세상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현상 자체에 착안하여 자신들의 선택받은 위상을 ‘알곡’으로 치부하고 나머지 기성교단의 사람들은 타락한 가라지 세력이라며 공격을 일삼는”(97쪽)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들은 다양하고 풍성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비유조차 자기 종파의 교리적 틀에 때려 맞춘 모범답안을 강요하기 일쑤인데,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런 빈약한 모범답안에 쉽게 현혹된다.
“이단자들은 간단명료한 틀로써 교주가 제시하고 승인한 해답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해온 것만 늘 되풀이하고 그 되풀이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강박적 신앙의 포로로 산다. 그러나 강박과 신앙이 어찌 행복하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이단자들의 신앙 패턴과 삶을 대하는 기본 태도에 자주 황당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주체적인 질문과 모험적인 탐구의 의욕이 없기 때문이다”(62쪽).
최근 한국 교회는 내부의 타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편, 밖으로부터는 신천지 등 이단 사이비의 침투에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부심하다. 한국 교회의 타락과 이단의 창궐은, 결국 오도되고 빈곤한 성서 해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다시 꼼꼼하게 성서를 읽고 비판적으로 신앙을 점검하는 데서 안팎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 설교자들을 포함, 성서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나아가 성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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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을 다시 읽으면서 복음에 대한 새로움에 목말라 하는 이 때에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고 반갑다. 이 책은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읽혔던, 읽었던 신약성서를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성서 본래의 의미로 현장 속에서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구매
antibaal 2015-06-0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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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기 전에 성찰부터
동료 신학자 목회자들의 국어실력을 걱정하면서 정작 본인의 문장은 난잡하다.
표현력의 문제는 차치하고 유의미한 내용이라도 있으면 일독하는 의미가 있겠는데 챕터마다 시작의 문제제기는 거창하고 결론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맥아리가 없다.
양희송님의 페북을 팔로우 하다가 차교수의 덧글들이 눈에 띄어 설교도 찾아 들어보고 통찰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 책을 구입했는데 매우 실망스럽다.
책을 구매한 후 벌어진, 최근의 표절논란을 보면 다른 이들의 단점을 지적하는데는 단호하고 자기성찰에는 유연한 듯 보인다.
다른 이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저자에게서 통찰이나 영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 접기
Viewfinder 2016-07-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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