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역사적 예수
2010.02.24 17:02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한기연
조회 수 153838 추천 수 0 댓글 5
?가
한겨레 기사: 예수학당 이끄는 한인철 목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586539.html
한인철 교수 Real Jesus 강의 10회 (2015년) 동영상
https://vimeo.com/121112841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aIgIfE0gc_w
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四靈理)
한 인 철 박사 연세대학교 교목실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삶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는 본래 예수의 가르침과 삶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의 가르침이나 삶에 관심하지도 않고, 더욱이 이를 계승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그 동안 한국 기독교의 신앙체계를 대변해 온 사영리가 그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이번 강의는,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사영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길치 인간
2.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참 삶의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시다: 길잡이 하나님
3. 예수는 우리가 가야할 참 삶의 길을 앞 서 가신 분이시다: 선생 예수
4. 기독교인은 예수를 벗 삼아 예수와 같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 길벗 기독교인
I. 우리는 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길치 인간
1. 사람들은, 그 차이를 무론하고, 어느 정도 공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2.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로 재물, 권력, 명예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가치이다.
3.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성공했다고 하고, 또한 행복하다고 한다. 최근 한국인의 최고의 덕담은 ‘부자되세요’라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한국 사람들 누구나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가치 전체가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4. 사람들이 재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한, 그것들은 필요하고 그것 없이 살기는 어렵다.
5. 그러나 재물, 권력, 명예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을 짓밟고, 자연을 파괴하게 되면, 재물, 권력, 명예는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고, 참 삶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이 될 수 있다.
6.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결국은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대개 재물을 택하고, 하나님은 포기한다.
7. 두 주인을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한국의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수를 믿으려는 경향이 있고,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요구를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자각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시다--길잡이 하나님
1.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다.
2.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이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에 이상한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이다.
3. 사람들의 눈에 덮혀 있는 비늘은 다름 아닌,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이다.
4.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발견하려면, 먼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5. 그런데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경험이 있고나서야, 비로소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이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6. 그러나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사이에는 또 한 번 건너야 하는 큰 강이 있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궁극에 가서는 재물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고, 결국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지금까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도 인간도 자연도 모두 저버렸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포기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철저히 변화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III. 예수는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을 앞 서 가신 분이시다--선생 예수
1.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따라 앞 서 사신 분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대로, 자신이 앞장서서 그렇게 살았다. 특별히 생명의 위협이 있는 순간에도, 예수는 자신의 삶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살았다. 예수는 참다운 의미에서 선생(先生)이었다.
3. 그러면 예수는 하나님과 같다는 삼위일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수는 최소한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만약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면, 예수가 선생이라는 말과는 모순이 되지 않겠는가?
4.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삼위일체의 성서적 근거는 오직 요한복음의 두 구절, 즉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과, 14장 9절의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라는 구절뿐이다.
5. 이 두 구절이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과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같은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6.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었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매순간 그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었다. 예수와 하나님은 예수의 삶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본 사람은, 예수의 삶 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를 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본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적 고백은,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 삶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이 고백은 예수가 참 삶의 길을 앞 서 살아내셨다는 고백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예수는 선생이라는 고백은 동일한 고백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기독교인은 예수를 벗 삼아 예수와 같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길벗 기독교인
1.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앞 서 살아낸 삶을 우리도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대답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2. 기독교인은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라는 교리적 이유를 갖고, 우리가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 그 저변에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적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올바른 삶이었고, 또 그러한 예수의 삶을 우리가 살아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솔직히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사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3. 이제 우리는 안다. 예수가 앞서 살아낸 삶은 우리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삶이지만, 우리는 솔직히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딜렘마가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수와 우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4.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예수를 평생의 벗으로 삼아,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인은 근본적으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 때에는 언제든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5. 이러한 기독교인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대개 이 질문은 기독교인으로서 제 길을 가고 있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이 예측하는 대답과는 달리, 세상에는 이미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예수의 길벗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의 길벗으로 사는 순간, 그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의 길벗으로, 평생 예수와 같은 길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기에 기꺼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히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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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2.17 21:00
http://www.historicaljesus.co.kr/xe/media/111590
사영리와 사생리 / 한인철 교수 강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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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3.07 11:21
http://idlseminary.com/moodle/mod/richmedia/view.php?id=35
캠퍼스의 예수 / 한인철 교수 갈릴리신학대학원 강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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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5.28 07:24
Top Ten Signs
You're a Fundamentalist Christian
당신이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는 10가지 증거(펌)
10. 그는 다른 종교의 신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
누가 야훼를 부정하면 맹렬한 분노를 느낀다.
9. 그는, ‘/유/인/원으로부터 인류가 진화하였다’고 과학자들이 말하면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에 대해선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않는다.
8. 그는, 범신론자나 다신론자를 보면 조롱하고 비웃지만,
자신이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 것은 문제없다 생각한다.
7. 그는, 알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테러행위에 대하여 분노한다.
그러나 야훼가 이집트 탈출 때 모든 아기들을 학살하게 명령한 것이나,
여호수아가 여자, 어린이, 심지어 나무까지를 포함해
인종청소를 명령한 것에 대해선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6. 그는, 인격신을 믿는 힌두교를 비웃고,
여자와 동침하는 그리스 신들을 비웃지만,
성령이 마리아를 임신시켜 출산한 인간이자 신이
죽임을 당해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믿는다.
5. 그는, 지구나이가 수십억년이라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을 믿지 못하지만,
청동기시대 사람이 천막에 앉아 기록한 것에 따라,
지구나이가 6000년쯤이라고 믿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4. 그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빼고선(어쩔땐, 다른 종파도 뺀다.)
모든 사람들이 죽어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가장 관용적이고
자비롭고 사랑으로 가득차있다고 생각한다.
3. 그는, 현대 과학, 역사, 지질학, 생물학, 그리고 물리학으론
결코 설득당하지 않지만,
마루에 뒹굴며 방언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2. 그는, 기도해서
0.01%정도 응답을 받았으면 높은 성공률이라고 인정하고,
기도가 아주 효험이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머지 99.99%의 응답없는 기도는 단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1. 그는,
성서(Bible)나 기독교,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많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이 아는 것보다
적게 알지만,
그래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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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10.13 10:02
나는 지금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한 인 철
1. 나는 현상적으로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실질적으로는 ‘못해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보니, 그렇게는 못살고 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 과정과, ‘못해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2. 중학교 3학년 때, 조금 철이 들자, 나의 사는 것이 ‘먹고 자고 싸고’의 삼박자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이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이제는 탈출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어느 날 느닷없이 성경책을 펴들고, 3개월 동안 침묵 속에 신구약 성경을 3번 통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화두를 얻게 되었다. “여러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롬 14:22)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입학금 낼 형편도 못되고, 가고 싶은 대학을 갈 성적도 못되었다. 대학을 포기해야겠다고 할 즈음, 다니던 장로교회(금호중앙교회)의 교육목사님(백승진 목사님)이 신학교를 가면 납부금도 적고, 입학하기도 쉽고, 거기에 철학도 공부할 수 있다며, 감리교신학대학을 추천해주셨다. 대학가고 싶은 욕심에 불순한 동기로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다니는 첫 3년 동안은 언제 이 신학교를 그만 두고 내 길을 찾을까 고민하다가,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이것도 나의 길일지 모르겠다 싶어 일단 신학에 정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3. 신학대학 4학년 때, 나는 신약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신약학 교수이신 김용옥 선생님과 한참 열심히 희랍어도 익히고 신약학 공부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4학년 2학기 때 변선환 선생님이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교수로 오셨다. 유효사거리 5미터에 족히 달하는 침을 튀기며 열강하시는 선생님에 반해, 갑자기 조직신학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불트만을 신약학으로 다루어 졸업논문을 준비하려던 나는 불트만을 조직신학 입장에서 다루게 되었다. 죽도 밥도 아닌 논문을 쓰게 되었다.
변선환 선생님의 열기에 휩싸인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원에 입학하여, 조직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배운 조직신학은 일종의 케리그마(Kerygma)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조직신학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신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희랍어 케리그마는 ‘선포’라는 뜻이다)한 초기 기독교의 고백을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어떻게 재해석하느냐 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조직신학을 배우기 위해 세미나를 통해 많은 학자들의 글을 읽고 토론했다. 읽어도 쉽게 이해되지가 않았지만,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조직신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1980년 대 초), 내가 알고 있던 조직신학의 기초가 흔들리는 대지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가와 겐조라는 일본 학자가 쓴 『예수라는 사나이―역설적 반항아의 생과 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예수라는 한 인간을 마르크스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적으로 접근한 책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 들었던 이 책이 나의 신학적 관심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접근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크고 감동적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읽은 조직신학 책은 읽으면 머리에 쥐가 났고, 머리를 하얗게 쉬게 만들었고, 또 조금 읽다 보면 잠이 왔다. 그런데 그 책을 읽던 날 밤, 나는 그 책이 너무 재미있어, 손에서 잠시도 놓지 못하고 밤을 새워 한 숨에 다 읽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어느 날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 주책없이 이 경험을 토로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선생님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역사적 예수 연구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셨던 것 같다. 당시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조직신학의 분위기 속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신학적 정당성도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왜냐하면 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재발견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고, 게다가 그리스도로 선포된 예수 말고 역사적 예수 그 자체에 기초를 둔 신학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조직신학의 무언의 전제였기 때문이다. 다가와 겐조의 책은 분명 나의 마음속에 대지진을 일으켰지만, 나는 이것을 마음 속 깊이 잠 재워 둔 채 그냥 지나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미국 동부에 있는 드류대학에 유학을 가서 과정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의 기독론을 공부하게 되었다. 유학 공부의 결산이라 할 수 있는 학위 논문에서는 변선환 선생님의 또 다른 관심사인 종교다원주의에 영향을 받아, 기독론을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에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나는 다가와 겐조의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학위 논문에 반영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케리그마 신학의 큰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내게 신학적 대전환의 시기가 찾아온 것은 1995년의 여름이었다. 그 해 홍정수 교수가 창립한 세계신학연구원을 ‘한국기독교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김준우 교수가 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나는 김준우 소장과 함께 홍정수 교수가 머물고 있는 미국 엘에이를 방문하여, 클레어몬트대학교 책방을 들르게 되었다. 이미 1982년부터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가 창립되어, 역사적 예수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결과물들은 아니 나오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예수 세미나’의 연구 결과들이 한꺼번에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왔다. 나는 금괴를 발견하기나 한 듯, 수십 만원어치의 책을 사들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소장은 ‘예수 세미나’의 연구 결과물들을 미친 듯이(?) 번역해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몇 권의 책을 번역하며,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거들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당시 조직신학의 일반적 흐름을 감히 거스르지 못해 시도하지 못했던 일, 즉 역사적 예수 연구의 빛에서 조직신학을 재조명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신학의 무게중심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서 역사적 예수에로 옮겨지게 되었다.
‘예수 세미나’가 내게 준 가장 큰 영향은 나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직신학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항상 상수(常數)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변수(變數)라고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변하지 않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오늘의 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전히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신학의 근본 과제였다.
그러나 ‘예수 세미나’의 결과물들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신학에 있어 변하지 않는 상수는 역사적 예수이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가 하나의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연구 결과는 다양할 수 있지만,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 자체는 항상 기독교 신학의 변하지 않는 상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예수를 오늘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소개하고 선포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과거 한 때에 유의미했던 하나의 소개, 하나의 선포, 하나의 고백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또 다른 케리그마 형태로 예수를 달리 선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새로운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5. 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기초를 둔 이른바 케리그마 신학은 니케아 신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한국에서는 사영리(四靈理)라는 형태로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니케아 신조(기원후 327년)는 예수를 하나님으로까지 높였고, 사영리는 하나님인 예수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했는지를 교리적으로 설명한다. 사영리는 원래 CCC에서 만들었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 대부분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사영리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한국에서 사영리로 구체화된 케리그마 신학은 나름대로 한국에서 공헌을 했다고 본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인간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했다는 것이다. 사영리는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의식 때문에 생긴 불안에서 해방시켜주고, 죽어서는 내세신앙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다. 실제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서 1997년에 조사하고 1998년에 펴낸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이라는 보고서에 보면, 한국 개신교인의 66.7%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영리 중심의 케리그마 신학은 위의 큰 공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교회 안팎으로 심각한 문제점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나는 ‘기독교의 이해’라는 이름으로 매학기 열리는 연세대학교 기독교개론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크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영리 중심의 케리그마 신학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배타주의의 근원은 이 우주 안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뿐이라는 신앙에서 비롯되지만, 이러한 배타주의는 기독교인의 삶 전반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은 자기와 다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틀렸다고 생각하고, 틀린 것은 자기와 동일하게 만들거나, 여의치 않으면 배척하려 한다.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의 문제인데, 이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인에게 삶이 결핍된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달리 말하면, 사영리의 틀 속에 들어있는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힌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폐가 있는 듯 들리지만, 이것이 사영리 기독교의 비밀이다.
왜 사영리의 틀 속에 있는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힌다는 것인가?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예수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본질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이라, 예수처럼 못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그렇게 못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그 예수를 믿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미 구원을 얻은 마당에 우리가 굳이 예수처럼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죽하면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믿는 교만한 생각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처럼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은 율법신앙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예수처럼 살려는 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 기독교인이 지금 말한 이러한 세 가지 이유를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1973년 이후 기독교 안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 안에 사영리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이유에 근거해서, 예수는 믿되 예수를 살지는 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예수처럼 살지 않는 데에는 이러한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 말고도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그분이 가르치시고 앞서 살아내셨던 그 삶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점을 내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살지 않고 세상의 생존 논리를 좇아 살아도 살아남기가 힘들고, 인생이 충분히 피곤하고 힘든데, 이 시대에 예수처럼 살라고 하는 말은 저주나 악담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더러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부정부패도 저지르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도 생존하기가 힘든 판국에, 이 세상에 예수처럼 살라! 이것은 너무 힘들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솔직히 그것이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가 예수를 믿되 예수처럼 살지 않으려는 기독교인들의 근원적인 이유이고, 앞서 말한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교리적인 빌미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6.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인간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살아내고자 했던 그 삶, 인간 예수가 가고자 했던 그 길을 가지 않고 기독교인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길을 따라 예수가 살아내고자 했던 그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도 예수의 길을 피하고 싶고, 나 역시도 예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나도 교리적인 이유들을 핑계 삼아 예수를 우회하고 싶다. 그러나 예수가 갔던 그 길을 가지 않으면서, 어찌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것이며,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가 역사적 예수에 뿌리를 두어야,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를 사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가 살았던 그 삶이 올바른 삶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은 예수의 삶을 나도 살아보겠다는 결의를 내포한다. 케리그마 신학은 이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인간 예수가 동시대를 살면서 어떤 꿈과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고, 그리고 그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내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죽음이 그러한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초와 근거를 마련한다.
혹자는 학문적인 이유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쉽게 결론을 내린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그 인간의 역사적 실체를 모두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한 인간의 역사적 실체를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한 인간의 전기를 쓰는 일이 항상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인간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끊임없이, 때로는 2,000년의 긴 세월을 두고, 노력하고 있고, 이러한 노력은 항상 정당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한계를 이유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포기하거나 그 결과물들을 부정하는 것은, 예수의 삶과 그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내려는 일종의 신학적 제스처는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7. 나 역시도 역사적 예수 연구가 인간 예수의 전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19세기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결론 내렸던 것처럼, 그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최소한 인간 예수가 가지고 있던 꿈과 비전,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 예수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그의 삶이 왜 십자가 처형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정도만 밝혀줄 수 있어도, 역사적 예수 연구는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나는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물들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무엇을 배웠나? 예수가 가르치고 스스로 살아내었던 예수의 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길게 말할 수 있겠지만 압축하자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예수는 매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그 뜻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째, 예수는 그렇게 살 때에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를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히 하나님에게 내어맡겼다. 셋째,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넷째,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예수의 길이다.
나는 예수의 이 길이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길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가야 할 제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기독교인인 나도 힘닿는 데까지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8. 그러나 예수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길인가? 나는 매학기 역사적 예수가 걸어간 삶의 길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한다. 강의가 끝나면, 마지막에 학생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 어떻게 사세요?’ 예수의 길이 자신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우회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길은 말하는 선생에게나 듣는 학생에게나 부담이 되기는 매한가지이다.
예수의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과연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 이외에 나의 삶을 결정해온 다른 뜻들, 특별히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로 안내하는 다른 뜻들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한 기본 전제인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내가 한껏 용기를 낸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포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권력에 대한 집착도 포기해야 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분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예에 대한 집착도 포기해야 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해왔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것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어, 거대한 권력이 나를 죽이겠다고 할 경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조차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최악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 최악의 경우는 항상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존한다. 나는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과연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물음은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던져지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 다른 문제들에서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어느 날 홍정수 교수가 감신 재직 시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지만, 한 가지만은 예외이다. 그것은 고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문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주시지 않았다.” 예수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마지막 최고의 난코스는 고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문은 곧 죽음에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의 길을 생각할 때마다, 늘 이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예수의 길을 선택한 것 때문에, 죽음에로 이어질 수 있는 고문을 받게 될 때, 나는 과연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 서명자 33명 중,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불교계의 한용운 선생이라고 한다. 이 판단이 정확히 맞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맞는다고 치고, 이 이야기에 함축된 것은 서명자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중 10명이 목사였는데, 그 열 명이 모두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서명자 중 하나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이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때 가서 생각하지... 지금은 그럴 수 있는 목사가 되도록,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나를 버리는 훈련을 하자, 그러다 보면 더 큰 일에서 나를 버릴 수도 있겠지....
5. 이제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나는 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면,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기독교인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 건설’이 시작되고, 이른바 ‘중단 없는 사정’이 시작되었을 때, 그 때 사정에 걸린 기독교인이 전체 대상자 중 60%쯤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 안의 수많은 목사들의 삶이 예수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나는, 기독교인은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예수가 앞서 간 그 길이 인생의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예수의 길벗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기독교인인가? 솔직히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예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신학대학을 나온 김규항 씨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그래서 기독교를 떠난다고 했는데, 나는 그분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예수의 길이 올바른 인생의 길이라고 믿고, 그래서 예수와 같은 길을 가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기독교인일 수 있다면,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면, 나는 작은 목소리로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하고 말하고 싶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가 과연 나는 예수의 길을 완벽하게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변명이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내가 별로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기독교에는 용서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애써 노력하지만, 가다가 첨벙거리더라도, 그러한 나를 용서해주고, 다음에는 제 길을 잘 가보라고 누가 격려해준다면, 나는 그 격려에 힘입어 기독교인이고 싶다. 그 격려에 힘입어 남은 인생 예수의 길을 잘 가보고 싶다. 적어도 예수는 그러한 나를 보고, ‘그래 다음에는 잘 해봐’라고 말할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놓고, 더 이상 내게 다른 질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준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독교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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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8.10.30 09:49
한국기독교연구소 30주년 감사예배 설교
2018. 10. 14. 일. 순천중앙교회
제목: 그 분을 찾습니다
본문: 요 21:4-13
I. 들어가는 말
오늘 순천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청년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한국기독교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신임 소장 홍인식 목사님의 취임을 축하하는 매우 기쁜 날입니다.
먼저 신임 소장으로 취임하시는 홍인식 목사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울러 교우 여러분에게도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독교인에게 복된 일이 몇 가지 있는 데, 그 중 가장 큰 복은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축하는 한국기독교연구소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가 30주년을 맞아 홍인식 목사님을 새로운 소장으로 모시게 된 것은 이 또한 아주 큰 축복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복된 날 ‘그 분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연세대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 개론을 가르치던 중,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두 가지 점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배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결핍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가 가르친대로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지적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가지 문제의 저변에는 보다 근본적인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나/ 많은 경우 예수가 그 중심에서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배타주의나 삶의 결핍 현상도 궁극적으로 그 뿌리를 찾아보면, 기독교인들의 삶이 예수에게 기초를 두지 않기 때문에 생긴/ 부수적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으로 다소 생소한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잃어버린 예수, 바로 그 분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23년 김준우 소장께서 한국기독교연구소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 통계로 본 한국 개신교의 현실
1998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관한 통계는 우리에게 매우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개신교인은 전체 인구 중 20.3%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개신교인이었다가 개신교를 떠난 사람이 21.9%에 이른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떠난 사람이 남아있는 개신교인 숫자보다 1.6%나 많다는 뜻입니다. 만약 개신교를 떠난 사람들이 개신교를 떠나지 않고 그냥 남아 있었다면, 산술적으로는 42.2%가 개신교인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계산은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수치가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계속해서 비종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종교를 선택한다면, 어느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선호도 1위는 불교, 2위는 가톨릭, 3위는 개신교였습니다. 최근에는 불교와 가톨릭의 순위가 바뀐 적도 있지만, 개신교는 여전히 부동의 3위입니다. 앞의 통계와 이 통계를 합하면, 우리는 매우 슬픈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개신교인들도 싫어하고, 비종교인들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이것입니다. 개신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개신교의 종교적 정체성과 어느 정도 상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번 더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통계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개신교인들에게 왜 기독교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전체 개신교인 중 66.8%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12%가 복을 받기 위해, 또 다른 12%가 죽은 다음 천당 가기 위해, 그리고 6.9%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고, 복을 받고, 또 천당을 가고자 하는 기대가 크게 잘못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에 비해, 삶의 의미를 찾고,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개신교인들이 전체 교인의 6.9%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의 정체성에 뭔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이러한 통계 역시, 기독교인들의 삶이 예수에게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예수의 길, 피하고 싶은 길
예수에게 삶의 중심을 둔 기독교인, 이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점을 암시하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자 합니다.
교회에 아주 열심히 다니는, 누가 보아도 신앙심 깊어 보이는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 그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높은 점수가 아니면 선택하기 어려운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졸업 후 높은 연봉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졸업을 하자,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시골 오지에 가서 가난한 환자들을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여 자식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네가 돈을 많이 번 후에 해도 늦지 않고, 돈을 많이 번 후에 도와야 더 많이 도울 수 있지 않겠니? 그러니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돈을 많이 벌도록 해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나름대로 예수처럼 살고 싶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는 그만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야! 내가 너보고 예수 믿으라고 그랬지, 예수처럼 살라고 그랬냐?”
만약 이 아들이 텔레비전의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남의 집 아들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권사님은 그 아들의 말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참 좋은 아들이라고 칭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막상 자기 아들이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가 가신 길, 그 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올바른 길이지만, 만약 내 배우자나 내 자식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극구 말리고 싶은 것이 바로 예수의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4. 성서의 이야기
오늘 성서 본문인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자, 절망한 제자들이 각기 본업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밤새 그물질을 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날이 밝습니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하니, 배 오른쪽에 던져보라고 했고, 말한 대로 해보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게 됩니다. 이 때 비로소 베드로는 이 낯선 사람이 예수인 줄 감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육지로 올라와/ 빵을 쪼개고 생선을 나누는 모습을 보자, 그 낯선 사람이 예수인 줄 확신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낯선 사람이 예수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얼굴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동이 텄지만, 베드로는 그가 예수인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예수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깊은 곳에 던지라고 했던 이 낯선 이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전의 예수처럼 빵과 생선을 나누며 했던 그 말과 행동이/ 그 분이 예수였음을 알게 하는 단서였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물이나 빵과 생선은 살아 생전 예수의 말과 행동을 기억나게 하는 상징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베드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얼굴은 예수의 얼굴과 다르다 하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다시 살아난 예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사신 그 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5. 나가는 말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많지만, 어떤 기독교인에게서는, 아무리 그가 기독교인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예수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생각과 말과 행동,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기독교인에게서는, 그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그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하는 것이 마치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난 예수를 본 듯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분을 찾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서 사라진, 그리고 교회에서 사라진 그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교회에서 사라졌던 그 예수를 우리 순천중앙교회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인에게서 실종되었던 그 예수를 우리 순천중앙교회 교우들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수많은 순천 주민들이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아니 그 분이 되기 위해 이 순천중앙교회 안으로 모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모쪼록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순천중앙교회와 교우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