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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2010.02.19 10:52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홍정수
한기연
조회 수 168193 추천 수 1 댓글 13
첨부 '1'
예수목회란 무엇인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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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오늘날처럼 세계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기후가 붕괴할 정도로 인류문명 전체가 짙은 어둠과 절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때에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은 차치하고라도 감독회장 선거 문제처럼 사소한 문제조차 신앙적으로, 최소한 세상적인 기준의 합리성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국감리교 사태의 근본 원인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오늘날처럼 전세계적으로 기독교가 가장 급속도로 몰락하는 이유는, 1) 기독교의 교리들이 목회자 자신들에게만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으며, 2) 기독교의 교리들이 살아낼 수 없는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자 로널드 사이더가 미국의 "중생한 복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들을 인용한 것에서 여실히 나타나듯이, 거듭났으며 성령충만하다는 사람들이 결코 비기독교인들보다 도덕적이지 못하며, 이혼, 아내구타, 헌금, 인종차별에서 훨씬 더 심하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몰락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교회성장을 주도해왔던 오순절교단들의 "성공과 번영의 복음"은 이제 세계경제가 고용없는 성장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그 수명이 다했으며, 최근 보도된 것과 같이 크리스탈 처치의 부동산 매각사태가 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한국의 기독교인 대다수를 사로잡고 있는 기독교 가치는 1) 4영리 교리에 바탕을 둔 저 세상 천국, 혹은 2) 부와 귀(성공), 그리고 건강이라는 3복이다.
기독교인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이런 신앙 안에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부재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오늘날 비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4영리 목회나 3복 목회는 공포의 심리학 혹은 욕심의 전술일 뿐,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입각한 기독교 본래의 복음은 아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목회(예수 목회)의 본은 공포가 아니라 자유에서, 그리고 경쟁적 욕심보다는 섬김과 연대에서 오는 큰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다음에서, 간단히, 목회의 3 패러다임을 비교해 본다.
구분 4영리 목회 3복 목회 예수 목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목표(구원) 죽음 이후의 영생 물질적 축복 잔치에서 오는 기쁨
경쟁에서 이김
적수 죽음의 공포, 사탄 이해 엇갈리는 모든 사람들 지배자 세상(가치기준)
무기 순수한 믿음 열성적 믿음 예수 살아내기와 친구
신학 원죄와 대속의 보혈 적극적 사고 예수가 앞서 가신 삶
영성 순수성(배타성)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 세상 넘기
소망 중의 인내 (가끔씩은 때를 기다리는 마음 다스리기) 주체성, 전우애
하나님 의로운 하늘 심판자 복덕방망이 예수의 길 끝에서 만난다
예수 죽으러 오신 신의 아들 이름뿐 & 주술적 도구 기득권 없는 자들에게 보인
"사람됨의 길"
성령받음 관심(미래의 보장) "나도.."의 외형적 확인장치 예수의 말씀에 대한 충성
교회상 구원의 방주 축복의 통로 잔치집
장애물 죽음에 대한 공포 상실 기도응답은 상위 8%뿐. "세상" 유혹이 너무 크고
저 세상에 대한 관심의 축소 이것이 허상임을 알아차리기 앞서 사는 자가 소수자
시작했다.
목회자 본을 보일 필요 없음 부자, 큰 교회라야 함. 예수의 삶의 본을 보여야 함
예수에 대한 믿음과 교리 강조
예수목회는 무엇보다 목회자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지향한다.
둘째로 예수목회는 예수의 복음이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1) 말이 되는 복음, 2)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낼 수 있는 복음을 추구한다.
홍정수 박사는 2014년 가을의 어느 주일 설교에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새마을 목회"와 "복지 목회"의 모델과 완전히 다른 "예수 목회"에 대해 언급했다. 새마을 목회란 예수 믿으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에 초점을 맞춘 목회이며 복지 목회란 교회가 곧 사회복지 시설인 것처럼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는 목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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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인숙 2010.12.06 07:15
예수목회에서 하나님을 "예수의 길 위에서 만난다" 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에수의 길 끝에서만 만나지는 것은 아닌데...길 위에 올라선 초기에 만나지는 사람도 있고 중도에서 만나지는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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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인숙 2010.12.06 07:36
그럼요. 예수를 만난 순간 그 예수가 바라본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따스한 사랑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감히 예수를 만난 순간 그의 길 위에 덥썩 올라타게 되었고 그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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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0.12.11 08:46
홍정수 교수 에세이 보기
http://cafe.daum.net/GALILEECHURCH 에서 Mentor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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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1.10.06 09:24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77#
한국기독교연구소 20주년 기념 축하 행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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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1.11.29 16:01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7/01/021003000200701120643058.html
신사참배와 사탄의 탄생 /한겨레 21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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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1.27 03:5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14301.html
인류 운명의 날 시계, 멸망 5분 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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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1.30 09:09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16520.html
한국의 멸종 위기종 245종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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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2.17 20:58
http://www.historicaljesus.co.kr/xe/media/111496
목회자 바울의 예수 믿는 기쁨 / 홍정수 교수 강의 동영상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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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3.07 11:05
http://www.hanarumchurch.com/
말되는 사영리 강의 (강릉옥토교회) - 홍정수 교수 음성파일 / 한아름교회 신학공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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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3.07 11:24
http://idlseminary.com/moodle/mod/page/view.php?id=77
신학교육개혁 - 홍정수 교수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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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4.11 10:09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홍정수(전 감신대교수, 현 LA 한아름교회 담임목사)
1. “하나님이 계셔요?” 하고 묻는 사람들
철학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진지하게 묻는 이들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대개 이래도 저래도 좋은 한가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진지하게 묻는 이들은 무신론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린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진지하게 묻는 이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 오던 이들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무겁고, 그 대답 또한 간단하지가 않다. 필자는 L.A.에서 지난 2 년 반 동안 목회를 한답시고 이런저런 여러 사람들을 직접, 간접으로 만나다 보니, “하나님, 계셔요?”하는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절실하게 하는 훌륭한 신앙인들을 꽤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신학적 그림 하나를 꾸며 보려 한다.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 계셔요?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목사인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우선 우리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 열심히 교회 생활을 잘해 오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연유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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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저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다른 하나는 중학교에 다닙니다. 우리는 미국으로 이민 온 지 16 년이 되었지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이제는 L.A.의 사우스 센트랄 지역에 가지고 있는 리쿼 가게 덕분으로 집도 장만하고, 조금은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말이면 가끔씩 팜스프링이나 산페드로 해변에서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갖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지난여름 밤 권총 강도가 우리 집 아빠를 저 세상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강도를 기쁘게 할 만한 현금이 가게 안에 없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습니다. 밤늦도록 가게 안에 현금을 두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매일 오후 6시에는 현금을 별도로 맡기어 왔거든요.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막일이나 청소로 연명하다가 겨우 살만해졌는데, 우리들은 갑자기 남편과 아빠를 잃었습니다. 이별의 정을 나눌 여유도 없이 그 사람은 가버렸습니다. 남은 세 식구는 갑자기 하늘이 꺼지고 땅이 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도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부 싸움을 하였다고 교회에 못나오기도 한다지만, 우리는 그게 마냥 부러울 뿐입니다. 부부 싸움도 행복한 이들의 일이라고요. 물론 아빠, 엄마,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웃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함께 억누르기 힘든 은근한 질투심에 빠지게도 됩니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하였기에, 우리 아빠가 뭘 그리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에.... 남들은 모두 저렇게 웃으며 잘들 사는데, 우리들은 왜? 왜 하루아침에 우리 집안에서는 웃음이 사라져야 했나요?
하나님이 계시다고요? 우리도 옛날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아빠 장례식 때 교회에서 너무나 잘들 해 주셨기 때문에 교회에 여전히 나오고는 있지만, 주말이 되면 우리들은 우울해진답니다. 게다가 우리 가족은 지난 여름 이후로 말을 잃었습니다. 아무도 집안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절반쯤은 유령의 집 같은 형편입니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다니는 큰 딸 아이는 일체의 친구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 때문에 힘든 체도 하지 못하고 꿋꿋하게 일어서려 하지만, 저도 사람이에요. 너무나 힘들어요. 물론 이렇게 아직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지요. 과부가 되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지더군요(물론 제 느낌입니다만). 정말이지 아이들이 아니면, 저도 그 이가 간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요? 옛날엔 우리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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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 형제가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추며 나직이 말을 늘어놓는다.
“그 여자는 너무나 불쌍해요. 저는 하나님 안 믿습니다. 본래도 잘 안 믿었지만, 이제는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제 처는 미국 오기를 정말로 싫어했지요. 한국에서는 작은 옷가게를 하며 그런대로 기쁘게 살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 저를 만난 게 병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저는 신혼 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유학’ 운운하였고, 결국 처는 사랑하는 남자가 한을 품고 일생을 살게 할 수는 없다면서 이민 보따리를 쌌던 거지요. 그런데 작년 이른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물건을 사오던 길에 5번 프리웨이에서 빗길에 미끄러지는 트럭과 충돌하여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끝내 가버리고 말았답니다.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습니다. 욕심이었어요. 저는 미국 온 지 4 년 만에, 공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업을 한답시고 이 일 저 일 손대다가 지금은 자바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지요. 이미 대학생이 된 아들 하나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딸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내년쯤에는 돈을 좀 덜 벌더라도 주말에 편히 쉴 수 있는 장사를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만....
하나님이 계시다고요? 데려가려면 저를 데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본래 교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처는 정말 예수 잘 믿었지요. 목사님들한테도 끔찍이 했고요. 저는 그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왜 미국을 왔던가? 혹은 왜 진작 사업을 바꾸지 못하였던가? 그 날 물건 운반은 내가 하는 건데.... 수없는 후회로 밤을 새우게 됩니다. 아들은 동부에 가 혼자 공부하고 있지만, 딸아이도 어미가 죽은 이후로는 아무 말이 없어요. 우리는 나무나 무서워 그 아픔에 대하여는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모두가 시치미 떼고 살고 있지요. 그저 그 사람이 그립고, 그 사람이 열심히 하던 일이라 교회에 계속 다니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겠어요, 목사님,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착한 그 여자를, 그것도 호강 한 번 못해 본 그런 시절에 데려간답니까? 말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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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한 남자 분이 들어왔다. 병실에서 아내를 돌아보다가 왔다고 한다. 그는 겨우 말을 이어간다.
“저는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산다는 게 뭐고, 우리가 왜 이민을 왔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는 한 참을 쉬었다가 다시 억지로 말을 잇는다.
“작년 성탄절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아들을 잃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갔다가 차 사고를 당한 거지요. 공부를 잘한다고 귀여워하며 차를 일찍 사 준 게 못내 후회스럽습니다. 그런데 97년 새해맞이 예배를 드리고 오다가 아내와 둘째 아들이 또 다시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아내는 아직 병실에 누워 있지만, 둘째 녀석은 자기 형 곁으로 갔지요. 이번에는 우리 식구들의 실수가 아니라 상대방 차의 운전사가 송구영신 파티를 하면서 마신 술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습니다.
사고 당시 아들은 일 년 전에 먼저 간 형의 사진을 품속에 안고 있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 믿어지지 않아요. 무엇보다 속 쓰린 것은 교회의 잡무를 뒤로 미뤄 두고 제가 식구들과 함께 운전을 하고 오기만 하였어도 이런 날벼락은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냥 저의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 우리 식구들은 큰아들이 쓰던 방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작은 아이의 방을 함께 정리해야 되는군요. 저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더 이상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죄가 많이 있지요. 죄 많은 사람을 데려가시려면 저를 데려가시지 왜 우리 아이들입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저는 ‘하나님, 어서 저도 데려가 주세요!’ 하고 많이 기도드렸습니다.”
4.
목사인 나는 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서 그 고통의 무서움을 그저 짐작만 하고 있다.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 차에 담담한 말로 한 노인이 말을 꺼낸다. 그분은 칠순이 넘었지만 아직 정정한 청년 같은 분이시다.
“목사님, 저는요, 30 년 전에 제 아내와 큰아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제가 서산에 살 때였지요. 그 때도 먹고살기가 어려워, 어디 막노동이라도 하여 돈을 좀 벌어 볼까 하고 다른 지역으로 잠시 가 있을 때였지요. 우리 동네에 물난리가 난 게지요.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빗물이 쏟아져 마을에 있던 작은 개울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와 아이는 비탈 밭에 물길을 틀러 나갔다가 그만 다리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함께 익사하고 말았답니다.
처음에는 하늘을 많이 원망해 봤지요. 우리는 한국 개신교 초기부터 예수를 믿어 오던 집안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 죽일 놈은 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나님 문제도 천재지변도 사실상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속을 잘 할 수가 있었거든요. 제가 집에만 있었어도 그까짓 물난리쯤은 어떻게든 이겨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30 년이 지난 지금도 저를 용서할 수가 없군요.
지금도 소주 힘을 빌어서야 잠을 청할 수 있는 밤이 많답니다. 아마 죽어야 저를 용납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제 처와 아들을 한꺼번에 데려갔다고요? 저를 교육시키려고?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게 제 아내와 아이를 데려가셨다면, 저는 그런 하나님은 ‘사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요. 단지 제가 고통스러운 것은 사내 녀석이 가족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괴감이지요. 이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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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말이 생각난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 30 년의 세월이 갔어도 낡아 없어지지 않는 무겁고 무서운 게 아내와 자식을 한 날 한 시에 잃은 한 남자의 자괴감이란 말인가? 죽어야 없어진다는 말인가? 과연?
그런데 이 모든 아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아무 말을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닫고 있던 한 중년 남자가 마지막으로, 마지못해, 말을 시작한다.
“벌써 4 년이 지났군요. 작년에서야 겨우 현실을 인정하고, 아이의 짐들을 정리하였지요. 사실은 제가 한 게 아니고 평소에 나약해 보이던 제 아내가 다 했지요. 저는 아이의 짐을 정리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23 년 전에 미국 땅에서 결혼하여, 둘이서 그냥 열심히 돈을 벌었지요. 집도 샀고, 가게도 커졌고, 작은 빌딩도 하나 마련하였지요. 그러는 동안에 큰 아이인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애는 서투르지만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사내 녀석은 중학교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더니 그게 점점 더 심해져 마침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되더군요. 그러나 저희는 그게 얼마나 그 녀석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한 번쯤 그런 홍역을 앓아야 하거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녀석은 그만 권총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말을 공개 석상에서는 처음으로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그 후에는 세상이 온통 변해 버렸습니다. 시집을 가야 할 딸이 있지만,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죽은 아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동안은 그와 함께 가던 햄버거 집이 있는 웨스턴과 7가 거리를 지나다니는 것조차 힘들어, 그 모퉁이를 피해 다녔습니다.
제 아내는 이런 사실을 모르겠지요. 저희 부부는 그 후 우리를 두고 먼저 가버린 녀석에 대하여 마주 앉아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지요. 어떻게 그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을 원망한다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귀여운 아들을 주셨는데, 부모인 저희가 잘못 키워, 아이가 참다못해 죽어 버렸는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30 년이 지났어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어르신네 심정을 저는 알지요. 죽을 놈이 있다면 저이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저 같은 죽일 놈이 아직껏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제가 그 녀석을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그러나 그 녀석 스포일시킬까봐 늘 겉으론 안 그런 척하며, 아비의 권위를 부린 적도 많았지요. 정말이지, 저는 아직도 그 녀석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죽은 그 녀석이 제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업이 되겠어요? 남들은 캘리포니아의 불황 때문에 저 사람 사업이 최근 들어 망했구나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식을 먼저 보낸 녀석이 사업이나 잘하면, 그건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던 거지요. 돈이 뭡니까? 자식이 세상 살기가 힘들다 하여 세상을 하직하는 마당에, 사업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 아내도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한 동안은 한국으로 나가서 혼자 살다가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가정을 버리고 간 아내를 참을 수 없었겠지만, 자식을 앞세우고 난 다음이라,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자식을 앞세우는 일도 참아야 할 놈이라면, 아내가 집을 뛰쳐나가는 일이야 얼마나 작은 일이랴! 견디자. 견디자. 아내를 더욱 사랑하자. 하늘이 맺어 준 운명이 아닌가?’ 물론 지금 저희는 사이가 좋아졌지요. 그러나 아직도 저희는 깊은 속을 털어놓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답니다. 혹 조용히 가라앉고 있는 자책감에 불을 지르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공연히 서로 엉뚱한 말다툼만 자주 하게 되지요. 물론 교회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그건 하나님 운운하는 얘기를 들으러 가는 건 아니에요. 억지로라도 사람의 체면을 지켜야 되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예전과 같이 보이려고,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죽을 놈이지요.... 정말 사랑했는데....”
2. 무능하고 나약한 목사의 기도
오, 하나님, 이런 이들에게 목사는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리고 전능하신 줄 알았던 당신은 또 무슨 소용이 있나요? 목사는 이런 이들에게 이제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버리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하나요? 아니면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라고 말해야 하나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희생당한 넋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하나님, 가르쳐 주세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신다면, 저들 가족들끼리 서로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혹은 이민 생활이 너무 고달픈 나머지, 혹은 잘 되는 사업이 전부인 줄 안 나머지 거룩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엄성을 망각할까 봐, 혹은 그렇게 되고 말 것을 미리 아시고 “질투의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비로운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사랑하는 신앙의 자녀들을 징책한 것이라고 말할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 가지고 왜 하나님까지 들먹이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먼저 그 좋은 하늘 나라로 데려 가셨으며,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이제 더 큰 복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너희는 왜 믿음이 없는가?” 이렇게 말할까요? 혹은 이들에게 일어난 모든 재앙은 “가면을 쓰고 찾아온 위장된 (사실은) 축복”인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이 되는데, 단지 인간이 눈 어두워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을 알지 못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나님, 이제라도 희생당한 이들의 넋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또 살아남은 이들에게 당신의 얼굴을 비추소서. 그리하여 저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게 잘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특히 “내 탓이야, 내가 죽일 놈이었지”라고 느끼면서 아직도 통곡하는 살아남아 있는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주소서. 살아남은 이들로 하여금 앞서간 이들도 하나님의 품안에 평안히 살아 있음을 믿게 하시고, 자신들을 용서할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3. 어느 하나님의 뜻?
위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의 가슴 깊은 상처를 보았다. 어떤 이들은 30 년의 긴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도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이들에게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신 거지요. 이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주실 겁니다”하고 신명기 28장에 등장하는 전능하신 하나님(혹은 “자식을 바치라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물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얘기는 첫째로, 성경적이며(성경에 있다는 의미에서), 둘째로 목회적 배려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살아남으려는 본능적 의지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잊어버리려 하기 때문에, “미래 지향적인 축복” 이야기는 당사자들에게 참회와 새 희망의 계기를 줄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성경을 믿지만, 예수를 더욱 믿기 때문이다. 즉 예수가 걸어갔던 삶과 그의 설교에 비추어 성경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성경 속의 예수님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찾아가서, 욥의 친구들처럼, 권선징악의 상투적 논리와 세상만사를 경영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전통적 하나님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는 일도 아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예수의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웃들이 할 일은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하고 묻는 게 아니라 “고통을 치료해 주는 방책”을 강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참조 눅13:4 이하; 요9:2 이하).
그뿐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히브리 성경(구약성서)도, 비록 하나님께서 전능하시어 능히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만사를 하나님 뜻대로 일방적으로 통치하시지는 못하며, 그래서 가끔씩은 후회도 하시며, 탄식도 하시며, 그 뜻을 수정하시기도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창세기, 민수기 참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밖에 안 되는지, 즉 왜 완전하신 신께서 세상을 불완전한 채 내버려두시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신학교 신학은 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 이상의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재난을 당하고 통곡하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가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위장된) 축복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도 예수적인 것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둘째, 그것은 목회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본능적인 혹은 이기적인 사람들일 경우, “이것은 더 큰 축복의 기회입니다”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자”를 아직도 사랑하는 경우, 그런 위로는 차라리 저주일 수 있을 뿐이다. 사업이 망한 경우나 직장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은 경우라면, 그것은 “더 큰 축복”의 기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까짓 재물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까짓 지위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의 생명,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의 생명을 두고,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행위이다. 불교 신자가 혹 이 글을 읽으면서 “생사여일(生死如一)하거늘 죽음과 삶에 왜 그리 집착들 하시오”라고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생명을 비웃으라는 게 부처님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집착하지 말고 “잘 살라”는 말씀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4. 목회자의 고통스런 사명
그렇다면, 아무 특별한 능력도 없는 목회자가 이들에게 해 줄 일/말은 무엇인가? 무슨 말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말 전부는, 우선,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도 또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이다.
먼저, 자연 재해에 의한 죽음이든 인위적인 사고로 인한 죽음이든 타살인 경우라면, 목회자가 해 줄 말은 하나님이나 그 사람들(가해자들)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이나 사람들(가해자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인간이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연유로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 먼 훗날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고” 만나 뵙게 될 때 물어 보기로 하고, 우리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자연이나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지는 말자. 특히 가해자가 사람들인 경우, 그리고 비록 그들이 권총을 들고 고의로 사람을 해친 경우라고 할지라도, 참으로 그들이 원하였던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 자체가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필요한 몇 푼의 돈이었을 뿐이다.
아무도 악을 계획적으로 의도하지는 못한다. 불완전한 피조물들의 행동에는 많은 경우, 아주 많은 경우 본래 일차적으로 목적하였던 것과는 상관없이 “부작용”이 발생한다. 즉 그들이 우리 남편이나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은 그들이 저지른 행동에서 일어난 “부작용”이었다는 말이다.
이같은 이치는, 둘째로, “자살”인 경우에 더욱 주목해야 할 요소이다. 내 아들의 자살, 그것은 그가 원하였던 일차적 행위가 아니라 이차적인 부작용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내 아들이 원하였던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의 신속하고 확실한 해방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가 원하지도 않은, 때 이른 죽음이 온 것일 뿐이다. 그러니 부모를 두고 먼저 간 아들을 너무 많이 원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남모르는 깊은 고통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의학에 의하면, 자살이란 당뇨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병이라고 한다. 작은 외부의 압력에 대하여도 남달리 크게 반응하며, 그 긴장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적/물리적 질환의 결과라고 한다. 병을 앓다가 결국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일찍 떠나게 되는 많은 경우처럼 자살은 일종의 정신/신체적 질환이라고 한다. 그것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 부족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막을 수 없었던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잘 지켜 주지 못한 부모가 자신들의 못 다한 사랑 때문에 한의 열병을 죽도록 앓는 일만은 중지할 수 있으리라.
셋째,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자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못 다한 사랑, 이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으로 믿자. 그리고 훗날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켜 주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할 마음의 준비를 하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자. 즉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 주지 못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 하나님을 믿고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이에 대하여는 이런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비록 힘이 없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끝까지 지켜 주시지 못하였지만, 우리가 그 하나님을 버리게 되면,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제 와서 하나님을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삶에는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네 인생에서 무엇이 과연 소중할 게 있겠는가?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 인생에 아직도 사명이 있고, 일이 있으며, 수고하고 짐을 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만일 우리가 이제 와서 하나님을 버린다면, 그것이 하나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닐까? 하나님 없이 어떻게 우리네 무거운 인생을 영원한 안식에 이를 때까지 꿋꿋이 이끌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의 세계가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마저 버린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실패가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나는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 낼 수 있을 만큼 인생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렇다면, 형제여, 하나님을 버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너무 늦지 않은 훗날에라도, 필요하다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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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4.17 20:07
홍정수 목사 설교
http://www.hanarum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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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4.30 07:05
근본주의(Fundamentalism)(서강사전 자료 번역+) GST 2012. 제공.
192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개신교의 초교파적 보수주의 운동. 이 신학 사조는 당시의 일체의 비판적 신학 사조들, 예컨대,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학, 특히 각종 진화론에 대하여 조직적이고도 전투적인 자세로 대항하였다. 이 사조는 성서의 무오성과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초자연적 진리를 수호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교리를 재확인하려 했던 일종의 교리수호운동이다. 근본주의는 오늘날도 그 명맥을 뚜럿이 유지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복음주의”(evangelicalism)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따라서 근본주의의 뿌리요 또한 오늘날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개신교 내의 ‘복음주의’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근본주의가 20세기 초에 발생한 특정 신학사조를 지칭하는 반면, 복음주의라는 말은 원래 18세기에 일어난 종교 각성 운동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영미식(英美式)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의 역사적 기원은 유럽의 개신교 일반과 연결되어 있다. 즉 성서의 유일무이한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이고도 개인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종교개혁 사상에 그 연원이 있다. 17세기의 청교도주의는 이같은 종교개혁의 강조점들을 영국의 개신교 전통에 깊게 심어 주었으며, 또한 그 후 특별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대륙에서 등장한 경건주의는 이같은 영국의 청교도주의와 만나게 되는데,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 - 1791)와 모라비안교도들과의 만남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된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각성 운동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을 비롯한 비국교도 사이의 복음주의적 부흥가들, 그리고 영국 교회 내의 여러 분파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결국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이같은 형태의 복음주의 신앙이 영제국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된다.
미국의 경우는 이 복음주의의 영향이 더욱 크다. 그 이유는 이 신천지 미국에는 영국 교회와 같은 잘 조직된 도전 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미 합중국과 복음주의의 발흥은 사실상 동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유사-공식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 이유는 이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자발적인 수용”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의 이상과 잘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복음주의의 성격은 18세기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 기간 중에 그 특성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뉴 잉글랜드 청교도주의, 대륙의 경건주의, 영국인 핏필드(George Whitefield, 1714 - 1770)의 칼빈주의적 부흥운동, 그리고 감리교운동 등 일련의 운동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19세기 초에서 중반까지의 기간 중 미국에서는 이 특정 형태의 복음주의라는 신앙 형태가 곧 개신교의 신앙이라고 이해되고 있었다. 물론 그 내부에는 다양한 교파들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칼빈주의와 감리교 신학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삶으로 증거되는 회심 경험을 강조하였고, 부흥과 선교에 치중했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를 오직 성서의 권위 위에만 근거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연합체로 이해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들은 종파적인 성격을 띄지 않고 단지 “자발적인 단체들”(voluntary societies)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망(network)을 결성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증진시키려 하였다. 또한 선교 활동을 전 세계로 확대하였고, 자선 사업과 사회적 개혁을 지향하여, 노예해방운동, 노예제도폐지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안식일 엄수, 금주 규정 제정, 교도소 개혁 같은 다른 개혁들도 추진하였다. 또한 많은 자선 단체의 설립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급격히 변화된 상황 때문에 그 초점은 개인적 성결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새로운 산업화 현상과 대도시 출현 등으로 개인적, 자발적인 프로그램의 실행이 불가능해진 탓이다. 따라서 이전에 문화를 지배하던 개념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 개인적 성결 등을 강조하게 되는 운동들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사회개혁적 관심은 퇴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에 도덕적 영향을 주려는 열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흥사 무디(Dwight L. Moody, 1837 - 1899)이다. 무디는 피니(Charles Finney, 1792 - 1875)와는 달리 전천년기설(premilliennialism)을 강조하게 되며, 이같은 사상적인 전환은 후에 나타나게 되는 근본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대전에 이르자 복음주의자들은 지적으로 새로운 상황이 도래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윈(Charles Darwin, 1809 - 1882)의 사상이 그 당시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다양한 사상들 가운데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다윈주의에 대한 초기의 논쟁은 “복음주의”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면서, 근대 과학과 성서적 기독교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더 커다란 문제는 “실재와 진리”에 대한 사고의 혁명적인 전환이다. 즉 고정된, 불변하는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인간의 문화적 진화의 변화하는 기능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서구인들은 이 다윈주의 논쟁을 통해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종교란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요, 단지 신과 도덕성에 대한 인간 개념의 변천 기록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은 곧 이어 성서에 적용되었고, 결국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성서의 고등비평은 성서를 그저 히브리인들의 종교 체험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게끔 유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광범위한 복음주의 의 합의점을 그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구원론을 뒷받침하던 성서의 절대적 권위, 그리고 성서에 근거한 도덕적 절대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의문은 교회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19세기 중반에 이룩된 복음주의 동맹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기독교 신앙을 시대의 조류에 맞게 조정해 보려는 일단의 사람들, 소위 ‘현대주의자’로 불리우는 자유주의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문명과 도덕의 성장이라는 자연적인 과정을 속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란 저 세상을 준비키 위한 영원한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말해 주는 신적인 계시일 뿐이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20세기 초반의 진보적 정치학에 근거한 “사회복음”을 옹호하면서, 과거 복음주의 운동의 개인중심적 구원을 사회구원적 구원으로 초점을 바꾸게 하였다.
반면에 이같은 세속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성서의 초자연적 기적 사건들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교리들을 계속 지켜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근본주의 운동이었다. 1890년에 소위 말하는 ‘브릭스 사건’이 일어났다. 북장로교회 산하에 있었던 뉴욕시 소재 유니온 신학교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브릭스(Chrales A. Briggs)가 교수로 취임하면서 “성서의 권위”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그 때에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성서의 영감(靈感)을 부인하고, 성서의 고등비판을 수락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북장로교회는 1892년 고등비평적 성서관을 정식으로 정죄하고, 브릭스 교수와 그를 동조하는 몇몇 교수를 신학교 교수직으로부터 해임시키게 된다. 이로 인해 보수계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성서의 무오설을 지키기 위해 대 단합을 꾀하게 되는데, 이것이 근본주의 운동을 가시화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이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 고등비평에 위기를 느낀 보수 지도자들은 수모받은 성서를 들고 대중 전도에 나선 무디와 함께 교인들을 모아 ‘사경회’(Bible Conference)를 열었다. 이 사경회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1895년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모인 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사경회 운동은 자유주의 신학 운동의 여파로 추락된 성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독교 근본 교리를 확립․수호하기 위한 초교파적인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5 가지” 근본 교리를 선정하였다(5 가지 교리 : 성서 무오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1909-1915년 어간에는 근본주의 총서인 ������근본 : 진리 증언������(Fundamentals : A Testimony to the Truth)이라는 소책자 12 권을 발간하여, 문서 사업을 통한 근본주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아갔다. 이 총서의 집필진은 교파를 초월한 여러 부류의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시의 보수 대연합이 연합전선적인 움직임이었음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자는 와이만(Wyman)과 스튜어트(M . Stewart)라는 평신도의 출자에 의해 300만 부 이상이 무료로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나온 근본주의 책자들은 질적으로 이 총서를 능가하지 못했고, 근본주의자들은 감정적이고 적개심으로만 불타 있어서, 자신들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말았다.
1910년에 개회된 북장로교회 총회도 “기독교의 5대 근본 교리”를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나이아가라 회합의 5대 교리와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그리스도의 이적(異蹟)으로 대치한 것이다. 이것은 ‘천년기’ 시기에 관한 개혁주의자와 ‘세대(경륜)주의자’ 사이의 이견 조정 때문이었다. 즉 말썽의 소지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아예 다른 것으로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근본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자체 내의 분열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1919년에도 근본주의자 대회가 시카고의 무디성서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열렸다.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25 편의 논문을 수록한 ������신언������("God has Spoken")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해 “수비에서 공격으로 자세를 전환”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여기서 하나의 기구가 조직되는데, 이는 후에 “세계기독교 근본주의연합회”(the 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920년 미국 침례교 신학자인 로우스(Curtis Lee Laws)는 침례교 기관지인 Watchman-Examiner에서 보수주의 그룹을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이같은 이름은 위에서 지적한 그 소책자들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후 저들을 가리키는 공식적인 용어처럼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토록 맹렬하게 전개되던 근본주의 운동도 다음 중요한 두 자유주의 사상과의 논쟁 사건 이후로는 점점 그 세력이 약화되어, 급기야는 완전히 주요 교단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고립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 첫번째 사건은 1922년의 “포스딕(H. Emersion Fosdik)의 설교 사건이다. 뉴욕시의 제일장로교회에서 시무하던 자유주의계 침례교 목사 포스딕은 “근본주의자들은 이길 것인가?” 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그 교회의 리(Ivy Lee)라는 평신도가 그것을 인쇄하여 교계에 배포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읽히던 설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근본주의가 자유를 억제하며 관용심이 없다고 공격하면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과 성서의 영감, 그리스도의 재림 등을 절대적 교리로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온 세계가 무지와 빈곤과 전쟁 등 사회악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 “나는 근본주의자들이 성공하리라고는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에 맞서서 필라델피아의 장로교회 목사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불신앙은 이길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상반성”을 강조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하여 그 주관성과 비성서적 이론 전개를 비난하였다. 또한 필라델피아 노회가 열렸을 때, 매카트니는 이 문제를 제기하여 뉴욕시 제일장로교회의 설교가 전통적인 장로교회교 교리에 부합한 설교가 되도록 조처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북장로교회 총회는 뉴욕 노회에 포스딕이 장로교회 교리에 맞는 설교를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포스딕은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반발하여 결국 목사직을 사임하였고, 이 사건은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두번째 사건은 1925년 테네시의 데이튼에서 열린 “스콥스 재판”(the Scopes Trial) 또는 “원숭이 재판”(Monkey-Trial)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근본주의 운동은 사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사건은 죤 스콥스(J. T. Scopes)라는 한 공립학교 교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진화론을 가르침으로써 발생하였다. 당시는 다윈의 진화론이 교회의 큰 위협으로 등장하게 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교회 인사들이 공립학교에서 생물과목을 가르칠 때는 진화론을 소개하지 못하도록 주의 법으로 제정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던 터였다. 당시 이미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진화론 소개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법정에서는 근본주의의 이름난 대변자인 브라이언(W. J. Bryan) 목사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법률가 다로우(Clarence Darrow) 사이에 열띤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브라이언 목사는 창조론의 입장을 변호하기는 했지만 횡설수설하며 오히려 무지를 폭로하는 듯 보였으나, 다로우는 브라이언을 명석한 이론과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궁지에 몰아 넣었다. 종국에는 스콥스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100 불 벌금형)을 받았지만, 그 당시 사회 여론은 다로우 편으로 기울었고, 근본주의는 “사멸하는 현상”이라는 결론을 사람들로 하여금 내리게 하였다. 이후로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부흥사경회 개최, 성서학교 설립, 해외선교사 파송 등을 벌이면서 개교회 성장에 주력하는 한편, 자유주의로부터의 분리와 독립교회 설립을 꾀하였다.
1925년의 프린스톤 신학교 사건은 바로 이같은 ‘분리’ 운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812년에 설립된 프린스톤 신학교는 설립 이래로 미국 보수신학과 “성서 영감설”의 본거지로서 군림해 왔다. 그러나 1914년 스티븐슨(J. Ross Stevenson)이 교장으로 취임한 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은 보수신학자이지만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는 중용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 당시 교단 내에서는 “어번 선언”( the Auburn Affirmation)이라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보수주의적인 프린스톤 신학 노선을 비판하면서, ‘진보성’을 띈 새 신학 사상과 교리 해석에 “관용”을 베풀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1만 명의 교단 목사 가운데 1,293 명이었고, 이들은 1910년 교단이 정한 5 가지 교리를 목사 안수의 필수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여러가지 학설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제안을 교장은 받아들여 이 어번 선언 동조자에게 신학교 운영의 참여를 허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교장의 학교 운영에 대해 메이첸(J. Gresham Machen), 알리스(Allis), 윌슨(Wilson), 반 틸(Van Til) 등 보수적 교수들은 자유주의 신학 사조가 학교 안에 침투하였다고 교장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사표를 던지고 인근 필라델피아 시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이들은 후에 미국 북장로교회 전체가 자유주의자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자, 동지들과 교회들을 규합하여 1936년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설립함으로써 교단 분열을 감행하였다. 이후 ‘이탈과 분리’가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단 분열을 감행하여 갈라져 나온 정통장로교회 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심해졌고, 종말론과 신자의 경건 생활에 관한 문제 때문에 자체 내에 긴장이 생기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대부분의 교수들은 종말론에 있어서는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쪽이었고, 주초(酒草)와 극장 출입 문제 같은 것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를 규범화하는 일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더 엄격한 윤리를 주장하였던 강경파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 하여 결국에는 맥킨타이어(Carl McIntire)를 중심으로 성서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와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enary)를 세우며, 또 다시 교단 분열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20 년이 채 못되어 이 페이스 신학교는 행정 문제로 분리되어, 결국 버스웰(J. O. Buswell)을 중심으로 세인트루이스에 카비넌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enary)와 복음장로교회가 생겨났다.
이같은 분리 현상은 근본주의자들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일어났다. 그리하여 분리로 인해 “분산된 힘”의 결속을 위해 조직적인 연합체의 구성이 필요하게 되었고, 1941년에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1948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국제 기독교교회 협의회(ICCC: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각각 맥킨타이어의 주도 아래 조직되었다. 이들은 완전 분리주의를 주장하여 WCC 계에 참여하는 목사들과 연관된 그 어떠한 회의나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것도 거부하고, 더 나아가 같은 근본주의자들이라도 WCC나 그 밖의 자유주의자들과 연합 사업을 벌이는 빌리 그래함이나 풀러 신학교 및 Christianity Today 誌까지도 정죄하고 나섰다. 이들을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 부른다.
그러나 이같은 완전 분리주의자들과는 다른 노선의 근본주의도 생겨났다. 이들의 노선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新복음주의자(Neo-evangelicalism)”로 알려졌다. 이들은 세속 세계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사회 개혁을 시도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분리만이 최선이 아니며, 세속 사회에 기독교적인 원리들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기 위하여 조직과 매스-미디어를 동원하는 선교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이 노선은 1947년 옥켄가(Harold J. Ockenga), 카넬(Edward J. Carnell), 헨리(Carl F. Henry), 해리슨(E. Harrison), 램(Bernard Ramm), 풀러(Charles E. Fuller) 등이 주축이 되어 캘포니아의 파사디나 시에 설립한 풀러신학교(the Fuller Theological Semenary)가 중심이다. 이들은 “정통주의의 새로운 시작” 또는 “근본주의의 부활”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자신들의 선조인 근본주의를 아무런 주저 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이들은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처럼되었던 “분리” 정책이 결국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신앙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신앙이 되어버렸음을 통탄하면서, 뚜렷한 기독교적 문화관과 선교 의식을 부각시켜 정통주의의 신학적 퇴각을 만회하고자 했다. 이같이 다소 유연한 근본주의자들은 ICCC를 대항하여, 194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미국복음주의연합회(NAE :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을 결성하였으며, 1948년에는 스위스의 클라렌스에서 국제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조직은 어느 교파에 속해 있건 상관 없이 개인 자격으로 회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WCC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연합 사업을 펼쳐나갔다. 이들은 오늘날도 특히 TV 방송 등을 이용하여 복음 전도 및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 :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은 한국 교회(주로 장로교회)에서도 있었다. 곧 박형룡(1897 - 1978) 목사를 중심한 평양신학교(후에 장로교신학교로 변경) 측과 김재준(1901 - 1987) 목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 사이의 분리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과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 사이의 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진영 사이의 싸움 배후에는 복잡한 교권 싸움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신학적 견해 차이였다. 당시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모페트(Samuel A. Moffett, 1864 - 1939) 박사의 지적대로, 한국에 와 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보수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한국 교회에 보수 사상, 곧 근본주의 운동을 전파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절에는 그들과는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 곧 자유주의자들은 한국 교회에서는 대체로 용납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이나 구미에서 신학을 연구한 한국인 목사들이 귀국하면서 세계 신학의 다른 흐름들이 교회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 안에도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 사조가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중심적인 인물이 바로 김재준 목사이다. 그는 한국신학 교육의 폐쇄성을 공박하며, 단일하고도 고루한 전통 신학과 고정된 사문(死文)의 교리 항목을 신학교들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데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성서 축자영감설을 반박함과 동시에 한국 교회의 주체 의식을 방해하고 있는 선교사들까지 공격하였다. 김재준 목사 외에도 채필근, 김영주, 김춘배 등도 각각 변증법적 신학을 소개하며,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며, 여권(女權)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 등을 시도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각기 세계의 자유주의적 사상의 커다란 흐름에 동참하고 있었다. 반대로,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 진영측 우두머리 격으로는 박형룡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보수 진영의 거두 메이첸(G. Machen) 박사에게 지접 사사받은 전형적인 근본주의자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신학적 사명을 우리 나름의 신학 ‘창작’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인 정신앙(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강력히 주장하는 반면, 소위 성서의 고등비평을 단호히 단죄하고 나섰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양측은 계속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1952년 4월 대구 서문 교회에서의 제37회 총회를 기점으로 하여 대립이 첨예화되고, 1953년의 제38회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제36회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성서 유오설을 계속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목사직 파면을 결의하자, 김재준 목사 측은 1953년 6월 10일 법통 제38회 총회를 열고 교단 분열을 감행,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에서 총회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바꾸고 새로운 교단의 출발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장로교회의 ‘예장’과 ‘기장’ 사이의 신학적 분열 사건이다.
핵심 사상: 우선적으로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진화론에 대항하여 성서의 무오성과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를 수호하려는 운동이라고 이미 지적하였다. 이제는 이들이 지키려 하는 근본적인 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895년의 나이아가라 사경회가 채택한 기독교의 근본 교리 “다섯 가지”(The Five Points)는 다음과 같다:
1. 성서의 축자 영감설(The verbal inspiration of the Bible)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The subsistutionary atonement of Christ for
the sins of the world)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Christ's bodily resurrection)
5. 그리스도의 재림(Christ's second coming)
위의 다섯 가지 교리의 초점은 두 가지,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문제가 바로 논쟁의 초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을 외친 종교개혁 전통 안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루터와는 입장이 다르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 곧 “복음”을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즉 성서는 “그리스도가 누워 계신 요람”(cradle of Christ)일 뿐이다. 이같은 논리, 곧 “율법”과 “복음”의 구별이라는 논리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들이 성서에 대해 고등(역사적) 비평을 감행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누워 계신 “요람”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별하고자 했을 뿐, 결코 요람 안의 그리스도까지 거부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루터는 성서 자체 내에도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루터와는 달리 단지 성서 전체의 저자는 하느님이심을 주장하면서, 계시의 “객관성”과 “불변성”을 고집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의 이러한 특징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과 자유주의 신학 사조를 가능케 한 근대의 “과학 혁명”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방법을 탄생시킨 주요 요인의 하나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 케플러(1571-1630), 갈릴레오(1564-1642), 그리고 뉴우톤(1643-1727)의 이름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의 “과학 혁명”이다. 근대 자연과학의 업적은 우주에 대한 우리들의 전통적인 생각들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사유 방식 자체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름하여 “계몽주의” 사조이다. 이와 더불어, 지식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 재고가 일어났다. 그 어떠한 진리도 선험적으로 당연시될 수 없으며, 보편타당한 지식이란 권위, 계시가 아니라 엄격한 관찰과 탐구, 또는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도출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 조류에 발 맞추어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그 문헌(성서)을 자연과학(그리고 역사과학)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신학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의 4 가지이다: 1) 신학 외의 다른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귀납적 연구 방법”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며(고등비평), 2) 성서가 아니라 인간 경험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였고, 3)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하느님과 인간, 계시와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였으며, 4) 인간의 전적 타락보다는 도덕적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사회복음운동). 이같은 기준으로 성서를 바라본다면, 성서에 나타난 이야기는 대부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기적, 신화)에 속하게 된다.
이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근본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기독교의 진리의 불변성을 거부하는 반(反)신앙적인 행동이다. 예수가 인간이라면, 그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단순히 도덕적인 교사에 불과한 그가 보여준 삶의 방식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확증되는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 이같은 질문을 던지는 근본주의자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지극히 명료하다. 그것은 곧 자유주의자들이 성서의 권위와 기독교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정한 성서의 권위를 다시 받아들이고(성서의 축자 영감설, 무오설), 그 성서 속에 나오는 전통 교리(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곧 “초자연적 진리”를 그대로 믿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들은 믿었다. 바로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이 지닌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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