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진보의 매력이 원래 이런 거 아니었어?
-마이클 셀렌버거,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읽고
이 책이야말로 내 인생의 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이런 운명적 설레임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첫 눈에 반했지만 내 책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라, 다시 읽고 또 고쳐보며 찬찬히 음미하고 싶다.
이 책의 뛰어난 매력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현실적이고 진취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제시해준다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이토록 인류의 밝은 가능성을 노래하고 희망과 영감과 힘을 준 책이 별로 없다.
독서시장이나 사람들이나 다 우는 소리, 비관론, 누가누가 더 현실을 가슴아프게 받아들이는지, 감성적 도덕성 경쟁이 판을 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시대를 횡행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과 환경종말론적 경향에 대한 새롭고도 강력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2030년쯤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비가역적 연쇄작용으로 인해 문명이 종말로 향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환경운동의 아이콘 그레타튠베리의 2019년 연설이다.
어제자 한겨레신문은 문명사가 제레드다이아몬드의 인터뷰를 “2050년, 우리 문명은 이제 30년 남았다”라는 표제를 붙여 실었다.
종말을 실제로 믿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충격요법으로 주장하는 경향도 있겠지만 극단적 종말론은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다.
나만 해도 인류의 일원이자 도시거주자로서의 내 자신이 지구어머니 배를 찢고 살아가는 살모사적인 존재로 느껴온 것이 오래다. 그러니 어린시절부터 잘못된 환경교육을 받아온 다음세대 아이들의 현실자각과 자기이해가 어떻게 뒤틀려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하에 극단적환경주의자들이 벌이는 여러 가지 행각들은 오히려 인류의 발전과 지구의 미래를 좀먹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환경종말론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보다는 선취한 환경이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환경문제를 과장하고 경고를 남발하는 것이 지구에 이롭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인간의 경제발전 노력을 자연과 우주질서에 반하는 원죄적 행위로 바라보고 죄책감을 조장하며 파국을 예언하는 사상과 행동방식이 환경종말론이다.
이러한 지구생태시스템붕괴론, 10년기한, 30년기한 종말론에 맞서 저자는 요한계시록적 종말론은 절대 없다고(이 책의 원제는 Apocalypse Never이다) 한다. 우리가 직면한 환경문제는 ‘중요하지만 관리가능하다’고 실증적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세계적 환경운동가인 마이클셀렌버거는 지난 50여년간의 환경운동사를 회고하면서 환경운동의 목표는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보편적 풍요를 누리는 데에도 도움이 돼야한다고 주장한다.
환경종말론의 교의와는 달리 현실세계에서 환경, 에너지, 경제발전은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선진제국에서는 경제발전으로 인한 도시화, 산업화, 농업생산성향상으로 먹고사는 것을 해결함에 따라 자연은 덜 착취되고 교육수준이 높아져 인구가 조절되어왔다.
이 길이야말로 인류가 근본적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길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을 들끓게 하는 세계 각국의 자연재해상황은 자연재해 자체가 심각해져서가 아니라 인력과 자원이 유익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용되어서 피해규모가 커지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1940년 이래 미국에 상륙한 허리케인은 총 118개이고 그로 인한 사망자는 3322명이다. 하지만 2004년 12월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강타하자 그 한번에 22만5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가장 극심한 기후변화가 닥쳐온다해도 홍수관리체계, 사회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피해규모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환경주의자들은 환경보호를 위해 댐건설 등과 같은 기반시설건설을 반대하고 경제발전을 막고 있다.
저개발국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앞으로 발생할 기후변화만이 아니라 지금 눈 앞에 닥치는 기상재해와 자연재해인 것이다.
그럼에도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거쳐온 길을 부인하고 저개발국에게는 원시농경에서 곧바로 고도산업사회로의 이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바이오매스에서 곧바로 친환경에너지로 점프할 수있다고 에너지점프를 강권하고 있다.
하지만 1800년대 전반기 런던부터 1970년 한국, 1990년 중국, 2010년 에디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세계역사 어디를 봐도 생산력점프는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나 옷과 신발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을 시작으로 초기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를 통해 상하수도나, 고속도로, 댐 등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면서 다음 단계 중공업이나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룬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저개발농업이나 소규모 유기농 농업에 묶어 두는 것은 해결방안이 되지 못한다. 석유나 천연가스나 수력발전을 통해 저렴한 전기를 공급해야 한다. 그리하여 도시화 산업화로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고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것만이 숲과 자연의 영역을 증가시킬 수 있다.
저개발국에 불가능한 생산력점프, 에너지점프를 ‘지속가능한발전’의 개념으로 포장하여 강요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마치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제국을 건설한 전전세기 식민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 이번에는 기독교의 예수천국불신지옥이 아니라 환경종말론을 앞세웠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모든 지구적 문제를 기후위기로 돌리고 환경주의활동을 구원책으로 제시하는 환경종말론자들의 기본적 귀인오류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북극곰의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북극곰의 생육과 기후변화에 대한 인과관계도 일반적 추론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극단적 환경주의자들은 그것을 전제사실로 해서 극적인 사진을 찍고 홍보에 열을 올린 결과 사람들은 북극곰의 멸종을 기후변화의 자명한 귀결로 받아들이고 있다. [?]
지구의 허파가 불타고 있다며 아마존열대우림에 손대는 것에 극도로 몸서리를 치는 환경주의자들의 헛소리 역시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아마존열대우림은 실상은 광합성으로 생산되는 산소가 자체생태계 내에서다 순환되어 소비되므로 세계산소에 기여하는 양은 사실상 제로에 수렴된다. 이는 모든 생태계가 다 마찬가지지만 환경주의자들은 아마존열대우림이 망가지면 지구의 허파가 망가져 산소공급이 막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린피스의 대대적 홍보와는 달리 고래의 멸종을 막아낸 것 역시 환경운동가들의 활동 때문이 아니다. 고래기름을 대체할 수 있는 팜유의 개발과 고래수염을 대체할 수 있는 플라스틱소재의 발명이 고래의 남획을 멈추게 한 것이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종-면적 모델로 생물다양성을 측정하여 여섯 번째 멸종위기가 다가왔다고 경고하는 소리는 이미 실패한 모델에 근거한 헛소리로 과학계에서는 판명이 났다.
이처럼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환경운동이 아니라 자연물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물의 발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인 것이다.
선진국의 탄소배출량은 1970년대에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는 데 이는 환경주의자들의 활약때문이 아니라 석탄에서 천연가스와 원자력으로 에너지전환을 이룬 덕분이다. 기후활동가들이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기술의 힘으로 우리는 기후변화를 막아내고 있다.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불안을 설파하고 원전사고의 위험성을 끝도 없이 과장해 선전해대는 조류도 실증적 기반이 없는 이념형 환경종말론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기후종말론과 반원전운동은 적대모순적 진영이다. 탄소배출로 인한 지구종말이 곧 온다는데 그깟 사고가 무서워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하고 깨끗한 에너지해법을 무시하다니? 그런데도 굳건히 손을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두 진영은 공히 관념적 비현실적 이념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반핵운동가들은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반대운동에 교묘하게 이용해왔다. 핵폭발의 낙진처럼 원자력발전소 주위가 방사능으로 오염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도 함께 였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는 전혀 다른 기전을 이용하기 때문에 핵폭탄처럼 터질 위험성은 전혀 없고 누출사고가 설령 발생한다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원자력에너지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에너지산업분야(역사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원유시추현장이나 천연가스파이프라인의 폭발사고, 수력발전을 담당하는 댐붕괴)에 비하면 황당하리만치 사고가 적고 사망자도 적다. 원자력발전소는 지금까지 발견된 에너지원 중 에너지밀도가 가장 높은데, 에너지밀도가 높을수록 안전하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낮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자로가 폭발한 체르노빌사태나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방사능유출사태는 반원전진영에 의해 구체적 수치없이 ‘암발생률이 치솟았다’ 등으로 철저하게 위험이 과장되어 전해졌다.이를 헐리우드 영화산업(1970년대에 제인폰다주연의 영화 차이나신드롬의 계보를 우리는 2010년대 판도라라는 영화로 받았다.)이 이용함으로써 대중들에게 그 공포는 상식처럼 전파되었다.
이렇듯 환경문제를 떠들며 위기를 부풀려 관심이 쏠리기를 기대하는 이들을 일러 기후양치기(climate alamist)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들의 호들갑과는 달리 경제발전의 결과 세계적으로 숲이 차지하는 면적은 점점 넓어지고 인류는 극빈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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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경험으로 보자면 저자의 세계관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내가 경험한 70년대 농촌풍경, 80년대 도시풍경과 지금현실을 비교해보면 경제발전이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제에 토를 달 수가 없다.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풍요를 전 인류가 같이 누리기를 희망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환경종말론에서 벗어나 저개발국의 산업화에 적극적의지를 가지고 개입해야 하며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7년에 언뜻 본 신선한 봄빛이 생각난다. 그 봄빛들은 대학문화를 형성했던 노래와 책과 여행과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 언뜻 비추이다 사라져갔다. 인간자유의 확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대한 낙관,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한 긍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지혜에 대한 믿음, 보다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역사의 발전경로에 대한 신뢰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지적 문화적 생활적 실천행위를 나는 진보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87년 유월항쟁 이후로 대학가를 필두로 한 진보사상계는 이상한 조류에 물들어갔다. 과학적이고 비판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보다는 감상적 민족주의와 과거회귀적인 역사의식에 기대어 운동이 명맥을 이어갔다.
더 큰 자유와 인생과 역사에 대한 낭만적 꿈이 아니라 흑백의 도덕적 우위와 이념의 권위가 압도하여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환경운동도 인류의 미래를 위한 밝고 활기찬 전망을 잃고 환경종말론적 경향으로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주눅들게 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지나온 세월 내내 나를 사로잡아온 의문점은 이것이었다.
지나간 농경시대를 동경하고 기술발전으로 인한 변화와 생산력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진보인가? 비관적 인간관과 세계관, 정서의 퇴조가 진보인가? 원자력으로 인한 풍요의 가능성을 막아서고 실증적 근거없이 두려움을 조장하는 세력들이 진보인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건전한 낙관론, 현실주의, 휴머니즘이 진보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태도는 에너지 앞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고 가장 좋은 해결방안을 찾아라, 나는 이것이 인간이 핵을 바라보는 진보적인 태도라고 본다. 핵전쟁의 공포가 세계를 휩쓸던 1953년 아이젠하워대통령의 연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살아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이 경이로운 발명이 죽음만이 아니라 삶에도 기여할 수 있게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연설문의 핵심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지금 환경종말론자와 탈원전반핵운동가들은 그로부터 엄청난 지적 영적인 후퇴를 거듭했다.
세상에 국가가 존재하는 한 핵무기가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그러니 맞서기 힘든 '죽음의 핵'은 그대로 두고 그 심리적 불안감을 '삶을 위한 원자력'에 쏟아 해소하고 있는 것은 정말 비겁한 짓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마이클셀런버그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대단한 사람이다. 이 책에 인용된 책은 시기로도 분야면으로도 방대하고 직접 만나 인터뷰한 사람들은 세계 곳곳을 다 뒤덮는다. 문제되는 현장에서 살고 행동하며 얻은 경험이 깊이있는 지식과 인문학적 통찰과 함께 이 책을 어떤 문학작품 못지 않게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보며 나는 진정한 진보주의자의 매력을 느낀다. 살아움직이는 사람이다. 내가 87년 봄에 운동권선배나 책에서 잠시 맛봤던 그리하여 그리워 찾아헤매왔던 그 봄빛, 진보의 매력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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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comments
Paul Shin
환경제국주의자들의 완고한 행동은 특히 기가 막힌 일이지요? 저는 이 책을 읽고나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죄의식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었어요.
· Reply · 1 d
박정미
신평 와! 읽으셨군요. 저는 처음에 이 책을 선전하는 문구로 <침묵의봄>이후로 환경분야 최대의 문제작이라고 할 때 너무 과장되었다고 약간 비위가 상했어요. 근데 다 읽고나서는 그 문구가 조금 약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 Reply · 1 d
Kwango Shin
귀한 지성의 글 참으로 감사합니다
더운 날씨 강녕하십시요
· Reply · 1 d
박정미
신광조 너무 길어서 죄송한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당.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너무나 길고 긴 글을 썼답니다. 삼분의 일 정도를 줄인게 그나마 이 정도랍니다.
신선생님도 이 열섬의 고비를 잘 넘기시길 기원합니다.
· Reply · 1 d · Edited
Kwango Shin
박정미 제가 좀 아는 잡지가 있는데 에너지와 지구라는 데에 한번 싣고 싶습니다.
주선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글 전체를 펴서 한번 준비를 해 두십시요.
· Reply · 1 d
박정미
신광조 아이고! 영광입니다. 쑥스럽지만 펴고 다리고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Reply · 1 d
Jeong-Woo Lee
이 무더운 날씨에 긴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졌다는게 이 책의 선물인데요. 지구가 망할거라면 걱정해도 소용없겠고. 지금 할 수 있는 일 차자 하는게 중요하지요.
· Reply · 1 d
박정미
Jeong-Woo Lee 이 책을 읽고 (논리적연관성은 희박하지만) 에어컨 사용을 더 쉽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별로 안더웠지요. ㅎㅎㅎ
· Reply · 1 d
김석수
ㅎㅎ
· Reply · 1 d
Byung Cheol Lee
좋은 책을 잘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Reply · 1 d
박인성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 Reply · 1 d
박태순
책 읽기 모임 해산합시다. 토론할 때는 별 얘기 하지 않더니, 이후 이렇게 속을 속속들이 드러내니 , 모임을 하는 사람들은 헛깨비에 지나지 않던가 예비 연습용에 불과했군요. 해산합시다! ㅋ
· Reply · 1 d
박정미
박태순 아무리 칭찬이라도 이런 말 무섭습니당! 해산해버리면 게으른 저는 어디에 등을 비비고 책을 읽는답니까. 엉엉엉.
그리고 제가 말재주가 없어서 버벅거려서 그렇지 할 말은 다 했는디요! 엉엉엉
· Reply · 1 d
박태순
박정미 말재주가 없어서 그랬다니 말재주 좋아질 때 까지만 기다려봅시다.. 한 10년이면 돠겠죠?
· Reply · 1 d
박정미
박태순 한 10년만 더 얹어주시죠^^
· Reply · 23 h
Kwango Shin
제가 2년여 고민하는 사항을 정확히 찍어주었습니다.
셀렌버거가 한국에 왔었고 명함도 주고 받았는데 언어문제로 교류는 잘 안되고 있습니다.
굉장히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입니다.
대단히 유연합니다.
· Reply · 1 d
Lee Wonyoung
읽어보겠습니다. 북극곰 개체수가 늘었다고 하던데요.
· Reply · 1 d
정중규
저는 오래 전부터 서방세계에서 벌어지는 환경운동을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이 경제발전으로 선진국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질문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들이 국내 관련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제가 반드시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공해를 유발하는 굴뚝산업을 먼저 시작한 것도 이른바 서구 선진국들이고 그들은 그렇게 해서 경제발전을 이뤄 선진국이 되었으면서, 개도국들에는 과도한 환경규제 그 틀을 만들어 경제발전 자체에 속도를 못 내게 합니다. 탈원전 대체 에너지를 강조하는 흐름도 그러합니다. 물론 환경운동 자체를 매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음모론까지는 아닐지라도 거기 깔려있을 그들의 의도는 알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