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6

[eBook] 작별 일기 -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 최현숙

알라딘: [전자책] 작별 일기

[eBook] 작별 일기 -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
최현숙 (지은이)후마니타스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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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정가
12,600원

편집장의 선택
"삶의 끝에 선 치매 노모와 함께한 천 일의 기록"
<할배의 탄생>, <할매의 탄생>을 쓴 저자이자, 요양보호사와 사회복지사로서 독거노인을 돌보던 최현숙의 에세이 <작별 일기>는 실버타운에 입주하게 된 부모 곁에서 써 내려간 천 일의 기록이다.

2015년 가을부터 알츠하이머와 조울 증상이 깊어져 점차 '해체'되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더 이상 기록하는 일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저자는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엄마와의 시간을 가지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작별 일기>는 부모의 늙어 감과 병든 노모의 변화 및 죽음을 한 가운데에서 관찰하며 가감 없이 적은 저자의 일기와, 다섯 남매의 솔직한 방문 보고서를 바탕으로 구성된 책이다.

돌봄노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한 여성이 늙고 병들어 결국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긴 과정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세세히 기록하면서, 병든 노모의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역할과 의미를 진지하게 짚고, 인간의 존엄과 의료 윤리에 대해 되묻는다. 자신이 돌보던 가난한 노인들의 이야기와 실버타운 노인들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 하의 실버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 돌봄노동의 현실에 대한 분석도 더한다. <작별 일기>는 한 개인의 사적인 기록을 넘어, 나이 든 부모를 둔 이들에게나 결국엔 노년을 향해 나아갈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들과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 에세이 MD 송진경 (2019.10.18)


기본정보

제공 파일 : ePub(51.16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380쪽, 

책소개
요양보호사이자 사회복지사로서 쪽방촌 독거 노인들을 돌보던 저자가 삶의 끝자락에 선 자신의 치매 노모 곁에서 하루하루 써내려간 천일 간의 일기를 모았다. 저자는 '독한' 관찰자를 자처한 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에서 한 여성이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들어가는 기나긴 과정을 세세히 그려낸다.

자신과 상반된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엄마에게서 이제는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어린 시절 불화했던 아버지와 천천히 거리를 좁혀 가며 조금씩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들은 우리 모두의 부모와 나 자신의 늙어감을 돌아보게 한다. 또 실버산업 속에서 돈의 있고없음이 죽음 과정에 미치는 영향, 돌봄 노동자들의 애환 등에 대한 단단한 성찰들도 담았다.


목차


들어가며 011
2016년 일기 / 엄마의 습 015
2017년 일기 / 가차 없이 다가오는 것들 131
2018년 일기 / 삶의 가장자리에서 213
나오며 367
[부록] 부모 돌봄 일지 376


책속에서


첫문장
"셋째가 하라고 했냐?" 아침부터 엄마 방에 있는 냉장고를 뒤져 대기 시작한 내게 엄마가 물었다.




엄마의 일기에는 한 여자의 열정과 절망과 갈증과 절박이 가득했다. 그 나이쯤의 나 같기도 했다. 상반된 선택을 한 두 여자의 내면은 고스란히 닮아 있다. 갈등과 불만과 미움으로 속이 바글바글하면서도, 온갖 돈벌이와 살림을 해대면서도 일기를 썼구나. 그래야 살 수 있었구나. 구로공단 근처 벌집 단칸방에서 새벽이면 부엌 부뚜막에 둥그런 양은 밥상을 펴고 쪼그려 앉아 무엇이든 끄적거려야 했던, 그러지 않고는 나를 놓쳐 버릴 것 같았던 내 시절이 떠올랐다.- 2017년 12월 8일 일기 중에서 접기
엄마는 ‘독한 불행’ 속에 있었다. 되돌아보면 아마 남은 집착을 떨구는 시기였던 것 같다. 이제는 집착도 분노도 놓쳐 버리고 점점 더 빠르게 망가져 가는 자신의 몸을 무방비 상태로 놔두고 있다. 나는 아직 그녀의 남은 기능들과 만나 보려고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녀도 내 손길의 의미를 아는 듯 따뜻하다느니 부드럽다느니 차다느니 아직 답을 해주고 있다. 독한 관찰자를 자처했지만 계획에 없는 눈물이 때로 응시를 가린다.
- 2018년 9월 9일 일기 중에서 접기
나는 엄마와 입을 맞췄다. 차지 않았다. 얼굴과 목 뒤를 쓰다듬었다. 따스했다. 생애 어느 때인들 그녀가 이토록 편안히 잠들어 봤을까? 이토록 걱정 없이 하늘을 마주해 봤을까? 엄마, 잘 가요. 수고 많으셨어요.
막내가 모두에게 알렸다. “할머니는 2018년 11월 5일 02시 13분, 모든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 2018년 11월 5일 일기 중에서 접기
나는 비참하고 슬픈 의미로 쓰이는 ‘자살‘ 이라는 단어보다 결단의 의미를 담은 ‘자결‘이라는 말을 쓰려 한다. 물론 그 죽음을 내 나름대로 상상해서 쓰는 말이다. 삶의 존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원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주로 극빈 노인의 자결을 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죽음 곁에 다다른 노인이라면 빈부를떠나 같은 심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 살아야 하는가?‘
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철학적인 질문이자 과제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과 역할이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수긍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적 쓸모‘를 장차 내 자발적 죽음의 가장 중요한 기준점으로삼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라면 사회적 쓸모의 한계점에서 자결을 선택하느냐 자연사를 기다리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 한계점‘
이후의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쓸모’란 것의 구체적 내역에 대해서는 나도 살아가면서 판단할 갓이다. 그 판단력이 늘 살아 있기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작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더 진지해지는 것을 말한다. 접기 - 씩씩한



저자 및 역자소개
최현숙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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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작가. 저서로 『작별 일기』 『할매의 탄생』 『할배의 탄생』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가 있고, 공저로 『이번 생은 망원시장』 등이 있다.
천주교로 인해 사회운동을 시작했고,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과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요양보호사와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서 노인 돌봄노동에 몸담아왔다.
노인들을 만나면서 구술생애사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2020년부터 홈리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홈리스에 관해 다양한... 더보기


최근작 :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억척의 기원>,<에픽 #02>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이 가장 사회적이고 공적인 기록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탁월한 사례_노명우
○ 그녀의 글을 읽고 나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강력한 질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_김일란
○ 똥오줌을 받아내느라 애쓰는, 또 많은 병원비를 대느라 고통스러운 많은 이들을 위해 지금 우리 모두가 곰곰이 읽어 봐야 할 책_천정환

쪽방촌 독거노인들을 돌보던 요양보호사이자 『할매의 탄생』, 『할배의 탄생』을 통해 가난한 노인들의 목소리를 기록해 온 저자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여든여섯 치매 노모 곁에서 매일매일 써내려간 천 일간의 일기를 모았다. 저자는 돌봄노동자이자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에서 한 여성이 늙고 병들어 죽음으로 들어가는 기나긴 과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낱낱이 기록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가족과 실버산업, 그리고 인간의 존엄까지도 냉정하게 되묻고 쪼개봄으로써 이 독특한 애도 일기를 완성해 냈다. 한 여성이 자신과는 상반된 삶을 살았던 엄마를 이해하고, 오랜 시간 불화했던 아버지와 서서히 거리를 좁혀 가며 상처를 치유해 가는 모습은 한 편의 성장소설을 읽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이 돌보던 가난한 노인들의 이야기, 엄마가 몸담은 실버타운 노인들의 삶, 그리고 가부장적 자본주의하에서 늙어죽어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밀한 상처와 치부를 노련한 필치로 담담히 써내려간 최현숙은 이 책을 통해 구술기록자가 아닌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 현대 사회에서 ‘늙어 죽어감’을 공평치 않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쪽방촌 요양보호사의 눈으로 본 실버타운

- 노인 하나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어 가는가는 지극히 사적이면서 또한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 정치 안에는 계급과 젠더, 가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들과, 사회복지, 과학 및 산업, 생명 윤리(그 과잉으로서의 생명 연장), 고령화, 효, 신앙 등 많은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뒤엉켜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런 항목들을 괴물처럼 빨아들여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가해와 피해로 뒤엉키게 한다. (370쪽)

- 그들은 누추하게 늙어 가고 있었다. 마포구 대흥동 4층 쪽방 건물의 좁고 가파른 계단, 곰팡이가 번지고 있는 벽면, ... 옥탑방 할아버지와 그의 작고 굽은 몸, 누런 눈, 지린내와 똥내가 가시지 않는 방, 그리고 그가 견뎌 낸 지독한 여름과 겨울들. 그에 반해 실버타운 노인들은 예외적 존재였다. (13쪽)

- 200만 원도 넘는다는 옥침대 위에, 걸레로도 못 쓸 내복을 입고 좋다고 웃고 있는 할망구라니. 둘이 맞장구를 치며 웃다 말고 내 웃음이 또 미웠다. 이런 옷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가난한 할머니들이 떠올라서다. 빈곤은 구멍 난 내복이 아니라, 구멍 난 내복이 쪽팔리는 거다.(47쪽)

- 모든 것을 돈과 효율의 타산에 넘긴 세상에서, ‘생명’이나 ‘효’ 등 지극히 사적이고 ‘천부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영역에 대해서는 그토록 신봉하는 효율성의 기준조차 폐기한 채 돈을 지불하겠다는 부자 노인들과 자식들이 있고, 그들의 품위와 교양스러움과 연명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친절 노동을 끌어와 돈을 챙기는 실버산업과 의료 산업이 있다. 그 건너편 ‘다른 세상’에는 돈이 없어 고생하다 죽음으로 떠밀리거나 죽음을 집어 드는 노인과 중장년, 청년과 청소년, 동반 자살 당하는 어린애들이 있다. .... 가난한 노인들의 복지 현장에서 9년간 밥을 벌며 관찰해 온 내게, 그 거리는 너무 까마득해 아예 다른 세상처럼 여겨진다. (288쪽)

애도일기(세간의 규정으로는 간병일기)로서 이 책이 가진 독특한 점은, 자신의 엄마와 자기 가족, 그리고 엄마를 포함한 ‘부자 노인들’에 대한 저자의 거리두기에 있다. 저자는 실버타운의 부자 노인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돌보던 가난한 노인들의 삶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운 질문들을 던진다. 아낌없이 쓸 줄 아는 소비자로서 쓸모를 갖춘 실버타운의 노인들의 삶과 고령화사회에서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는 가난한 노인들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누추하고 신속한 가난한 이들의 늙어감, 자식들로부터 고립된 쪽방촌 노인들의 외로움, 부모 돌봄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형제들간에 불화하는 보통의 가족들에 비해, 실버타운의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느리고 우아하게 늙어가며,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을 가능성도 적고, 가족은 ‘돈 덕’으로 가족애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이러한 불평등한 늙어죽어감 속에서, ‘기껏 움켜쥐었던’ 그들의 돈이 초고령 노후의 삶을 연장하는 비용으로 지불되는 것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효율의 기준에 맞는 것인지, 또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지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다른 노인들의 똥기저귀를 갈았고, 그녀들은 내 엄마의 똥기저귀를 갈고 있구나!” (372쪽)

한편으로 저자의 시선은 이런 부자 노인들의 별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간병노동자들에게로 향한다. 9년간 가난한 노인들의 똥기저귀를 갈며 “똥걸레나 빠는 여자” 취급을 당하며 살았던 저자는 자신의 이 일기를 간병일기나 시병일기로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실제 자신의 엄마의 똥을 치우고 간병한 것은 바로 자신의 가족이 고용한 간병인과 타운에 고용된 간호사들이기 때문. 저자는 고작 시급 8천원에 자기 가족들을 돌봄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엄마 방에서 나던 냄새로부터 해방시켜 준 간병 노동자들이 실은 밥 먹을 장소도 시간도 없어 지하철 화장실에서, 길거리에서 주전부리로 허기를 채우고, 노인들을 들고 옮기고 목욕시키느라 자신들의 몸도 무너져 가지만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며, 도둑 누명을 쓰거나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자 한 통에 당일 해고되기도 하고, 연차와 숙련도에 상관없이 늘 최저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 있음을 고발한다.

#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과연 존엄한가

-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과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수긍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 죽음 곁에 다다른 노인이라면 빈부를 떠나 같은 심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 살아야 하는가?’는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질문이다. ....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작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더 진지해지는 것을 말한다. (88쪽)
- “죽고 싶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약이라도 먹고 죽어야겠다. 약 좀 구해 와.”
“그럼 나랑 같이 죽자. 나는 엄마가 있어서 죽을 생각을 안 하는데, 엄마가 죽을 거면 우리 같이 죽으면 되지 뭐.”
“니가 왜 죽냐? 아직도 팔팔한데.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여기 갇혀만 있으니 죽겠다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죽고 싶어.” (258쪽)

한편으로 이 책은 부자든 가난하든 오래 살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느리게 죽음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섬뜩하리만치 세세히 묘사한다. 특히 가난한 노인들과 일상을 함께해 온 저자는 실버타운에서 다섯 남매의 돌봄을 받으며 죽어가는 엄마 역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자식으로서 느끼는 슬픔보다는 실버타운이라는 시설에서 갇혀 사는 생활과 그 속에서 느끼는 엄마의 감정을 세세히 쪼개 본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엄마는 “갇혀 있다, 다시 관짝으로 들어왔다, 예비 납골당이야” 같은 감정을 토로하는데, (거동이 불편한 마지막 단계의 노인들이 머무는) 케어홈으로 자리를 옮기고 휠체어에 갇히면서 이는 더 심해진다. 저자는 이런 엄마를 바라보며 “집도 동네도 사회도 아닌” 시설에서의 생활은 설사 그 시설이 아무리 고급시설이라 할지라도 “안 좋은 것”임을 확인한다. 현대사회는 노인이든 중증 장애인이든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구성원을 가족 안에서 돌보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이고, 그 돌봄 부담이 가족에게만 지워지는 것도 맞지 않지만, 시설이 답일 수는 없으며 실버타운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라고 말한다.

# 엄마의 죽음을 겪어 냄으로써 맞이한 한 인간의 성장기
: 부모와 자기자신과의 화해의 시간들

- 노부모가 함께 늙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느끼고 추론하고 해석하며 기록한 4년여의 시간은, 큰딸인 나의 그들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뒤집는 경험이었다. 특히 일흔 중반까지 갈등이 심했던 부부가 어느 시점 이후 눈에 띄게 친밀한 관계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그 갈등 때문에 내가 어릴 적 겪었던 상처를 위로할 수 있었고, 관계에 관한 인식도 확장할 수 있었다. (370쪽)

- 쉰 중반 넘어서까지 내 젊은 시절의 도벽에 대해 누구와도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5만 원은 나를 늘 그 생각으로 돌아가게 하고, 마치 ‘그때 네게 그럴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라는 의미로 다가와 내 안의 트라우마를 감싸 준다. 그 5만 원에는 그 시절 딸에게 주고 싶었던 그의 마음과 주지 못했던 자격지심, 열등감, 분노, 그리고 미안함과 화해의 제안까지 담겨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105쪽)

- 그는 나를 돌보고 싶어 했는데, 나는 그 돌봄이 싫었다. 내가 그걸 깨달은 건 오십 중반이 넘어서다. ...... 미워하는 동안은 떠오르지 않았던, 꾹꾹 눌러둔 기억들이다. 그와 나는 서로 그런 곁이 되지 못하고 늘 엇갈렸다. ....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엄마와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던 어느 귀퉁이에서, 마흔 중반 그 서생의 등짝이 쑤욱 올라왔다. 내 나이 오십 줄에 들었을 때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시간 차. 애비가 젊고 자식이 어릴 때 자식은 애비를 죽였고, 애비가 늙고 자식이 따라 늙으면서야 죽인 애비를 내 안에서 다시, 아니 새롭게 살려 내는 중이다. (106쪽)

- 엄마는 나더러 자신의 침대 한쪽에 앉으라고는 하지만, 침대 위 이불에는 내 몸이 닿지 않도록 신경 쓴다. 오줌 냄새가 밴다는 거다. 내게 이부자리를 내줄 때마다 당신이 쓰던 게 아니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침대에서 엄마랑 안고 누워 있자고 하면, “냄새나”라고 말한다. “괜찮아” 하며 일부러 엄마를 더 끌어안으면서 나는 혼자 울컥한다. “냄새나”라는 말은 어린 시절 내가 많이 듣던 말이다. 나는 엄마를 뒤에서 안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 나이 스물넷, 배가 만삭이었을 때, 엄마가 내 단칸방에 와서 나란히 누웠던 게 생각났다. 가출과 결혼과 임신 과정에서 처음으로 내가 사는 독산동 벌집 단칸방에 엄마가 온 날이었다. 엄마는 내 결혼과 임신에 대해 걱정이 잔뜩 담긴 잔소리를 했고, 나는 등을 보인 채 소리 죽여 울었다. 엄마도 그때 울었을까. 작년에 여동생이 해준 말로는, 그 시절이 엄마에게는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때였고, 자신은 대학 입시 원서 비용도 타내기 어려웠단다. (115쪽)

- 일기에는 한 여자의 열정과 절망과 갈증과 절박이 가득했다. 나는 느리게 읽어 내려갔다. 상반된 선택을 한 두 여자의 내면은 고스란히 닮아 있다. 그 나이쯤의 나 같기도 했다. 갈등과 불만과 미움으로 속이 바글바글하면서도, 온갖 돈벌이와 살림을 해대면서도, 일기를 썼구나. 그래야 살 수 있었구나. 구로공단 근처 벌집 단칸방에서 새벽이면 부엌 부뚜막에 둥그런 양은 밥상을 펴고 쪼그려 앉아 무엇이든 끄적거려야 했던, 그러지 않고는 나를 놓쳐 버릴 것 같았던 내 시절이 떠올랐다. (119쪽)

- 딸의 액취증을 모르쇠한 엄마, 초등학교 2학년부터 일숫돈을 걷게 하면서도 학용품 살 돈이나 용돈을 주지 않아 나를 도벽의 수렁에 빠지게 한 엄마, 자기도 남편을 미워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엔 그의 뒤에 숨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여자. 그 시절 내게 집은 아버지의 집이었고, 엄마는 아버지의 여자였고, 남매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다. 그래서 내 독한 혼돈과 방황과 상처에 대해 가족 중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 ‘현숙아, 너 지금 뭐하는 거니?’ 거울 속 나를 바라봤다. 눈물을 머금고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면서 혼자 낄낄거리다 세수나 하고 나왔다. ...... 나를 낳은 그녀도 외롭게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그녀 뱃속에서 나온 나도 외롭게 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안의 어린아이가 불쑥 올라와, 말귀도 못 알아듣는 늙어 빠진 엄마를 붙잡고 혼자 울고 있었다. (204쪽)

저자는 노부모의 늙어 감을 기록한 4년여의 시간이 “그들에 대한 이해”의 시간이자 “자기 자신을 뒤집는 경험”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일기라는 장르답게 액취증과 도벽, 가출 등에 대한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그 어떤 것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한편, 한 인간이 부모의 늙어감을 경험하며 동시에 자신도 늙어가는, 즉 성장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과거에는 다르다고만 생각했던 엄마의 삶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엄마의 늙어감을 24년 늦게 뒤쫓아가며 그녀가 먼저 겪은 통증과 노쇠를 고스란히 따라 겪은 딸은 86년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모습과 화해하는 데 성공한다. 또 지독한 불화로 서로 마주할 순간조차 없었던 아버지와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가며 자신을 조금씩 확장해 가는 과정은 가부장의 폭력으로부터 입은 내상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노화에 따른 아버지의 변화와 넉넉한 시선이 된 딸이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모습들이 따듯한 힘과 용기를 준다.

# 혼자 힘들게 부모를 보내고 있는 자식들에게

- 엄마의 증상에 속상해 하거나 잔소리하거나 잘하도록 독려하는 것보다, 남은 기능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매개로 엄마와 소통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남매들과 다시 확인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어려운 질문을 자꾸 하거나 문제 행동을 지적하면, 노인은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돌발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우울감이 깊어진다. (155쪽)

- 모든 부담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무슨 문제든 함께 논의하고 서로 보고하고 실천한다는 원칙과 경제적 부담은 경제력의 순서대로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 우리 남매들의 중요한 장점이라면, 돈에 관해서는 일단 서로 돕는다는 점이다. 특히 가장 가난한 나로서는 이런저런 경제적 도움을 주로 받는 편이다. 또 돈에 관해서는 명확히 하자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된 견해이기 때문에 부모님 돌봄 비용에 대해서는 특히 함께 원칙을 정하고 지불 내역을 꼼꼼히 정리해 공유하고 있다. 만에 하나 돈 문제로 남매간 의가 상하는 것을 예방하자는 큰아들의 철저함에 모두 동의해서다. 물론 나는 공동 경비도 거의 내지 않거나, 때에 따라 전체의 1퍼센트를 지불하는 정도다. ‘돈 많은 사람 우선’이다 보니 나는 납부에서 예외적 존재다. 월 생활비 등 정기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돈은 총무인 막내가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고 있고, 병원비나 3만 원 이상의 물품비 등 비정기적 지출은 별도의 공금 통장을 만들어 셋째가 관리하며, 둘 다 정기적으로 결산 보고를 하고 있다. (141쪽)

- 혼자 혹은 너무 힘들게 부모를 보내고 있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이 책의 출간이 많이 조심스럽다. 돈이 없고 남매간 우애가 없어 많이 지쳐 있을 당신에게, 외람되지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고 말하고 싶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373쪽)

이 책은 혼자만의 일기가 아니다. ‘이상하리만치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다섯 남매는 주1회 방문을 정례화하면서 각자가 그날 한 돌봄 활동과 부모의 몸과 마음 상태를 기록해 대화방에 공유하기로 하는데, 이 책은 이런 방문보고서와 대화방의 대화 기록들을 중요한 한 축으로 한다. 어느 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형태로 돌봄노동을 부담하지 않고, 각자의 능력만큼 부담을 배분하며, 세세한 규칙들을 제정해 돌봄내용을 공유해 가며 어려운 고비들을 돌파해 가는 다섯 남매의 이야기를 저자는 “가족애”와 “돈”이 있어 가능했던 작별 준비였지만 늙어 가는 부모를 남매들이 함께 돌보는 과정이 큰 위로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자는 가족애도 돈도 없는 수많은 딸아들들을 위해 가족(특히 여성)에게만 노인 돌봄이 떠맡겨지지 않는 사회”, “늙음과 죽음이 돈으로만 거래되지 않는 사회”, “돌봄 노동이 가장 싼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잊지 않는다. 이런 작별 과정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치매 노인을 돌보는 방법들에 대한 저자의 식견은 부모와 작별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 접기


분포

9.7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너무나도 진지한 관찰자의 기록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최현숙님이 계셔 다행입니다.
h5c5h2 2019-10-17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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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감상적인 책이라 섣불리 예상한 안일함이 부끄러울 만큼 값진 책이다. 한없이 성찰적인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 과정에서 나이 듦과 죽음, 돌봄, 사망과 환자, 시설 등 연결된 이야기들을 유려하고 감탄이 절로 나오게 썼다. 읽다 여러 번 멈출 수밖에 없었고, 어떤 문장에선 숨이 막혔다.
2021-06-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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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sukjimin 2020-01-2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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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 도서좀 내주세요 ㅠㅠ
포도 2020-08-1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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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만남은 순간이고 작별은 영원하다.

이별이 만들어진다. 이게 작별이다. 인생에는 많은 만남에서 예외 없이 이별을 거친다. 만남에서 이별까지 이 절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 인생 자체가 만남에서 이별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단번의 타임라인이다. 작별 일기라니 시작부터 먹먹하고 한편으로 홀가분할 것만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 뒤섞인다. 이 책은 작가의 모친과의 이별 과정을 표현한 감정의 내밀한 서사이다. 누구나 다 이별을 하지만 아무나 이별의 글은 쓰지 않는다. 어떻게 이별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지, 어떻게 기록으로 개인의 모친과 이별에 따른 상념의 서정을 공유할 것인지, 이런 기록으로써 우리는 공감하고 교감하며 장차 자신의 이별과 타자와의 작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나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이젠 오래되다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이별이 확정적이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 길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언제까지인지 알 수도 없다. 당장 오늘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몇년 더 지나야 할지는 모친의 천명에 달려 있다. 준비 없는 이별도 슬픈 감정을 생산한다. 반대로 이별의 준비가 너무 길어도 지친다. 치매의 고통은 이별의 준비를 너무 길게 끈다. 병원에 한 번 다녀가면 화약이 터져 일시에 산화하는 것같이 진이 일시에 빠져나가 탈진 느낌이 매번 들었다. 인간적인 고뇌가 없을 수가 없다. 서너 해 정도였더라면 적당한 이별의 준비기간이었다고는 하나 너무 빨리도 허탈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너무 길다. 이제는 가족들이 모두가 지쳐간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한다. 나도 진이 빠지고 빠지다가 이제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더 이상 이별의 격정이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치매는 이렇게 무서운 고통을 만드는 작별의 기록이 책으로 나오니 이왕 하는 김에 가족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도 현재의 당사자가 안고 있는 고민들의 공유라 생각하게 된다.

치매란 그런 거다. 관계의 철저한 단절. 심지어 자신과 세계의 무기력한 단절이다. 뇌세포는 점점 죽어가며 인지력조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데 몸은 의식만 제거된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흡사 로봇이 명령 프로그램 프롬프트를 점진적으로 잃어버린 채 쓰러져 있는 상태와 같은 몸뚱어리가 된 거나 비슷하다. 최소한의 본능은 살아 있으니 생리적인 현상은 유지하나 무의식으로 흡사 깊은 잠을 자듯이 모든 감각이 차단되어 버린다. 느낄수 없음의 상태. 본능적 상태를 말한다. 그런 치매 병으로 사람은 서서히 시간의 고갈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지켜보고 있으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흡사, 부팅 프로그램은 남아 있으되, 응용프로그램이 하나 둘 지워져 버려 폐기된 채 우두커니 한자리만 차지하는 낡은 컴퓨터와 같다.

모친이 어느 해 한 여름에 탈진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의식에 낌새가 이상함을 느껴 뇌 사진을 찍었고, 중병으로 확정되었던 그때부터 마음은 항상 스탠바이 상태였다. 스탠바이 상태는 늘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안정을 하고 싶은 충동이 강렬할수록 조마조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긴장도가 높아감으로써 따라오는 심리적인 피로감도 등달아 후발 주자로 따라 붓듯이 기생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조바심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젠 언제 떠나더라도 더 이상은 조바심을 낼 것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나 보일 마음의 자세는 갖춰진 셈이다. 모친은 중증 치매로 병원 입원했고 첫해와 둘째 해가 제일 힘들어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귀도 닫아 버렸고 눈도 감아 더 이상 뜨지도 않고 의식도 사라져 버렸다. 식물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간헐적인 고통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말에도 정상적인 대꾸가 없었다. 대화도 전혀 할 수 없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늘어진 육신만 마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의식의 임계점은 이미 저 멀리 넘어가버렸다.

어느덧 또래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모두 부모 세대를 보내야 할 나이가 되었다. 모친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장례식장으로 문상을 다녀온 것도 전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몇 번인지 횟수가 잦았다. 이렇게 저렇게 알고 업무차 관계하는 관계자들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지 헤아릴 것도 없이, 죽음이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될 나이라는 거다. 이렇게 죽음은 자신에겐 단 한번 거치는 특별한 통과 과정의 의례이지만 타자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지켜보는 일상이라는 것.

이런 일상적인 죽음에 대해서 제일 서럽게 통곡한 적이 있었다. 모친의 여동생, 즉 이모님의 별세였다. 언니는 병원에서 누운지 몇 해이고, 하나 있는 여동생은 긴 치매로 감금당하다시피 갇힌 채로 몇 해를 지났고 그렇게 이모님은 별세했는데 언니는 여전히 병원에 누워 아픔의 짧은 탄성의 단발성 소리만 내지르니 어찌 가슴이 먹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서로의 의식이 없으니 만난들 무슨 소용도 없는, 무감각의 두 자매의 기막힌 비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모님의 아들, 나에겐 이종사촌 형님은 나를 보고 같은 심정이라는 걸 대번에 느끼고도 남았다. "고생이 많지?" 이 한마디로 다음의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손만 잡고 울먹일 뿐이었다. 그간의 관계의 조바심과 피로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고 회한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간병으로 모시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떠올리고도 남았다. 그렇게 무언가 억울한 거 같기도 하는 그런 존재론적인 서러움이 복받쳐서 장례식장에서 실컷 울었다. 동생을 떠나보내는 것조차 알지를 못하는 인지력이 차츰차츰 사라져 가는 병이 무서운 증상을 동반했다.



의학적으로 육체의 사망진단서를 받아 들고서 나서야 우리들은 흔히 "운명하셨습니다"라거나,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한다. 운명하셨다는 것은 단 한번의 과정. 즉,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그게 모든 이들의 가진 운명의 절대성이다. 또한 돌아가셨다는 것도, 반드시 내가 없었던 상태로 환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탄생은 실로 우연적이고 죽음은 절대적인 필연이다. 삶이란 운명이 우연에서 필연으로, 그리고 다시 필연에서 우연의 상태로 회귀를 의미하며,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나라는 객체의 무의미"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필연의 유의미에서 다시 무의미의 우연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치매는 의학적으로 정신의 사망진단서나 마찬가지이다. 몸은 살아 있으되, 마음은 벌써 죽어 버린 운명.



치매 노인의 방치는 간단하나, 병이 길수록 간병도 길고 심리적 슬픔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지쳐감과 체념의 영향이 환자를 포기하게 만들어진다. 더욱이 경제적인 문제까지 연결된다. 오늘날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갈수록 요양병원 혹은 노인전문 요양소가 늘어나는 수요가 발생하며 이게 다 돈을 들여야 하는 비용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른바 실버케어 산업이며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영리적 장사이다. 나 또한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는 않았다. 자칫 그런 모친의 간병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위축되는 알게 모르게 받는 일종의 불경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 아픈데 어떻게 돈 계산부터 하냐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간병 비용을 부담하는 압박감 또한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자본적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죽는 거도 다 돈이 들어간다는 건 누구나 닥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보장적 측면의 복지 비용의 투자는 투자로서의 경제성의 가치가 없다. 허나 사람이 살아가는 윤리성이 따르는 필수이기도 하다. 이별의 준비는 심리적인 준비도 아울러야 하는 등의 경제적인 준비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나이 또래의 세대가 부모를 봉양하고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투자해도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을 틀리지 않았음을 느껴 가는 중이다. 나의 세대에 부모는 자신의 노후에 대해 크게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인지도 모른다. 윗 세대의 노인들이 대부분 자식에게 위탁하고 노년을 보냈던 것에 비추어 자신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으나, 나의 세대는 자식에게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다. 자식으로써의 의무와 부모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할 첫 번째 세대가 된 거다. 인생의 재무적 대차대조표를 짜보면 늘 적자 상태를 자신의 땀으로써 커버해야만 하는 울증의 세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준비된 상태, 대비되어 있는 상태가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식과 방법론의 문제로 귀결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다 떠날 것인지에 대한 동격이며 여기서 삶의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물질적인 준비도 물론이고 아울러 심리적인 대비 또한 반드시 포함해야 할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은퇴 시기가 다가옴을 점치고 은퇴 후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구체적인 계획서를 조금씩 체계적으로 조립되어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삶을 무방비로 방치할 때 찾아오는 준비 없는 이별에 대해, 그때 가서야 알아차리면 늦는다. 늦어서 후회스럽지 말아야 함은 곧 계획서의 작성과 스케줄의 이행, 혹은 스케줄의 오류나 형편에 따른 피드백일 것이다. 은퇴시기에는 꾸준히 수립한 계획을 실천할 단계이지 계획서를 작성할 단계는 지났다는 말과도 같다. 이마저도 안되면 임기응변으로 되는 대로 살다 무계획으로 인한 준비 없음에 대한 후회를 늘어놓게 된다는 것. 불행은 어떤 상황과 선택의 교집합에서 나오는 아주 고역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기도 하다. 지나온 삶의 상황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선택은 그래서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심사와 숙고를 거쳐서 나와야 할 인생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는 거다.



세상 한 번 오는데 이유 없이 올 수 없듯이 죽음 또한 이유 없는 죽음도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타자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는 길을 찾는 것이 오늘날 살 고 있는 사람들의 각자 저마다의 삶을 대하는 자기 임무가 아닐까 한다. 좀 더 근사하게 살았으므로 더 이상 회한이나 미련 없는 상태를 만들어 생을 완성해 가는 것도 앞으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과정의 숙명이 되었으면 한다.



작가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표현했다. 자칫 가족들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어내므로 우리들 모두가 장차 부모를 보내야 할 사람으로서, 혹은 내가 죽어가야 할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저마다의 생의 과정을 복기해보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책의 의도를 충분히 감지하는 민감성을 높인다. 인생의 끝자락에 관한 과정은 누구도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 책을 통하여 각자가 주어진 상황에 따른 교감과 공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성을 피력한다. 삶이란 그런 거다. 출생과 생존 그리고 끝의 마지막 날숨까지의 삶이란 과정을 타자의 관점에서 담담하고 묵묵히 기록한 점에서 삶을 경건함으로 지켜 성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들 살아가느라 고맙다는 마지막 유언 같은 말 한마디에 결국 나는 또 눈물을 찔끔거렸다. 과연 나 또한 나의 마지막을 딸아이에게 어떻게 보여야 할지 내 삶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 계속 고민해야 할 과제를 이 책을 통해 답을 도출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 책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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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9-10-23 공감(58) 댓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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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작별 일기


알츠하이머로 사그라드는 엄마의 삶을 곁에서 기록하는 책.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뿐 아니라 그를 통해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한 생각을 밀고 나가는 책. 고맙게 읽는 중.
씩씩한 2019-10-06 공감(4) 댓글(0)

마이페이퍼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오늘부터는 딱 해야할 일들에만 집중하고, 잘 안 될때만 루틴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도저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서, 페이퍼나 써볼란다. 아, 밥은 먹었다. 오뚜기 돼지국밥에 미니양배추 두 통을 썰어 넣고, 사은품으로 받은 연두 청양 조르륵 넣고, 발아현미 햇반 작은 그릇 넣어서 호로록 호로록




요 몇 달, 수면이 내게 큰 화두였고, 수면 시간을 꽤 늘렸다. 안 해서 못했구나. 나 할 수 있어. 라고 자신감 들기 시작했는데,

지금 잠이 문제가 아니라! 하는 고질적인 내 안의 잠귀신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고, 낮에 괜히 잠이 오기 시작했다. 수면시간이 모자란건 맞지만, 낮잠을 자고 싶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이건 분명 도피성 잠이다. 잘쏘냐. 잠귀신까지는 아니라도 잠도깨비 정도는 될 커피를 마시겠다.




여튼, 잠은 오고, 뭐 한 건 없고, 시간은 벌써 11시고! 며칠 전에 읽은 최현숙의 책에 대해서 끄적여볼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 어젯밤 꿈에,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하며, 시간이 없어서. 라고 변명하고 있더라. 말하면서도 기가 찼다. 시간이 없어? 내가? 돈 받으니깐, 일인가보다 하지. 4시 다 되서 나가서 9시 땡하면 들어오며 주 5일 일하는 내가? 꼴랑 나 하나랑 손 안 가는 고양이 세 마리 키우면서, 집도 제대로 안 치우고 대충 사는 내가? 시~간~이~ 없다고? 기가 차지.




아는 분이 나주 여성 농민 생애사 '억척의 기원' 에 대해 이야기하길래, 아, 최현숙. 하며 책장에서 꺼내서 단숨에 읽었다. 내가 요즘 책을 자꾸 단숨에 읽는 이유는, 단숨에 못 읽는 책은 (프루스트라던가, 프루스트라던가 ) 덜 읽어서 얘기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챕터도 없는 이 강물같은 책. 그리고, 포포바 책도 아직 읽고 있고, 요즘 메인으로 읽고 있는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 필사 하며 읽는지라 속도가 더디다. 아, '눈물점'도 반쯤 읽었다.

여튼, 얇은 책이라고 가벼운건 아니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얇은 책, 마침 또 에세이 모음집이라길래, 앞에만 좀 보려다 '단숨에' 읽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처음에는 날 나간 중국집 칼같은 글이다. 라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너무 오버인거 같아서. 근데, 느낌은 그거에 가깝다. 묵직한 칼인데, 날이 나갔지만, 여전히 칼인. 그런 글이다. 이걸 구구절절 얘기할 수 없으니, '톱날 같은' 글이라고 하겠다. 도끼같은 책이 있다던데, 톱날같은 책도 있는 거.




SNS에서 타오르는 이슈들에 생각이 복잡하던터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원래 세상이 복잡하지. 근데, 그 복잡에 힘을 실어주는건, 지금 당장의 말들보다 시간과 행동, 꾸준함, 갈팡질팡할지언정, 너무 비껴가지는 않는 의지이다.




최근에 무레 요코의 '괜찮게 살고 있습니다' 를 다시 읽었고, 역시 좋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60대의 조각을 챙겨두었는데, 전혀 다른 새로운 60대의 조각들을 최현숙의 책을 읽고 또 챙겨두었다. 어느 정도냐면, 저자의 책 중에 엄마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기록한 '작별 일기'라는 책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주제다. 근데,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다시 담아두었다.

'할매의 탄생', '할배의 탄생'은 글쎄. 후자는 일단 하나도 안 궁금함.




이력이 독특하다. 구술생애사 작가. 천주교로 인해 사회운동을 시작했고, 민노당 여성위원장과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요양보호사와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노인 돌봄노동에 몸을 담아왔다.




돌봄노동 하면 생각나는 그런 그림들을 찢어준 책이었다. 톱날 같은 글들로.








'좋은 여자'와 '미친년'

자식을 향해 보이는 엄마들의 모성애, 특히 극단적인 상황에서 보이는 동물적 모성애를 그린 영화나 글을 접할 때마다, 나는 불안감과 이질감과 죄책감이 뒤엉키고 헝클어진 통각에 휩싸인다. 그녀들의 극단적 모성애를 거울삼아, 자식에 대한 내 태도를 비춰보는 것이다. 이는 모성애라는 규범에 관한 부지불식간의 자기감시다. 감성, 감정, 특히 동물적, 본능적 감수성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에 대해, 나는 의심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자기 분열적이 된다. 때로 감성에 치받혀 통곡을 하면서도, 내 통곡의 내용물을 의심한다. '나는 대체 무엇에 대해 왜 울고 있는가?' 모성애라는 타인에 대한 감성에도 그렇지만, 쌍을 이루어 같이 오는 자기 연민에 대해서는 의심의 날을 더 세운다. 울면서, 통곡하면서, 연민하면서, 그러고 있는 내 감성들을 이성으로 응시한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일이다. 죄책감은 훈련되고 학습된(사육된) 수치심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에 충실하면서 내 감성과 이성의 흐름에 나를 담고 그런 나를 주시하면 된다. 울음이 복받치면 울되, 그 울음이 의심될 때는 의심을 이어간다. 울음이든 의심이든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맥도널드 할머니 권하자의 이야기가 몇 번인가 나온다.





나혜석(1896~1948)은 어느 겨울날 행려병자로 거리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최초의 운동가이자 화가이며 작가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자식과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심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가난한 페미니스트들에게 나혜석은 저항하는 여성의 모델이자 자기 미래에 관한 불안한 암시다.

'내 방식대로 남은 삶을 살겠다'던 '맥도널드 할머니' 권하자는 암이 복막까지 퍼져 행려병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73세의 나이로 2013년 죽어 화장되었다.

'정처 없는 삶'에 대한 로망은 독한 삶과 독한 죽음에 대한 불안한 환대다. 정처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마 정처와 떠돌이의 경계에서 살아왔지 싶다.




이 이야기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들리는데, 혼자 떠돌이로 사는 60대의 저자. 중산층 가정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가난을 접한건 결혼을 하면서. 25년간의 결혼생활을 접는 것은 여자와의 바람. 부모님은 억대 보증금의 월 750씩 드는 요양원에 있고, 형제들이 잘 살고, 사이도 좋다. 아버지와 평생 불화했으나, 아버지 말년에 화해? 경제적 자원과 사회문화적 자원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나온다. 50 넘어 글 쓰기 시작했다는데, 이런 배경들을 가지고, 이런 글들을 쓰다니, 그의 다른 글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님. 내가 나이 들어 돈이 많이 없으면, 나도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와 가장 부드러운 햄버거를 시키고, 끼니를 때우며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도서관에도 가고. 얼마전에 도서관에 남성 노인은 많은데, 여성 노인은 없다는 글을 보고, 정말 그러네. 싶었다. 도서관에서 남성 노인과 여성 노인 얼마나 보시나요? 왜 그런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닥쳐보지 않은 미래는 알 수 없고, 짐작하고 준비할 뿐인데, 이렇게 짐작해본다. 1인 여성 노인으로 살게 될 나의 미래를 향한 길에 이런 조각들을 놓아야지. 생각해보고, 조각들을 마련하기 위해 뭐가 필요할까. 생각한다.





내가 노년에 타먹을 연금은 17+30+30(예상기초노령연금) 해서 합이 77만원이다. 혹 운동과 글 현장과 돈을 위해 노인 공공근로를 한다면 30만원 추가. 기초 수급 대상자도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그 덕은 못 볼 것 같다. 살아온 거나 돈이나 이만하면 미풍양속이지 싶다. 사회적인 건 차후고, 개인적으론 이 정도 수입이라면 그럭저럭 살아지려니 싶다. 물론 이건 내가 가진 다른 자원들과 적절한 시기의 자유죽음 의지덕에 누리는, 배부르고 단호한 여유다.




이 부분. " 다른 자원들과 적절한 시기의 자유죽음 의지덕에 누리는, 배부르고 단호한 여유"




아님 말고, 할 수 있는거 하고, 그건 그래서 좋고, 이건 이래서 좋고. 식의 나에게 좀 필요한 것 같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단호할 것 같은 저자인데, 나는 꽤 노력하면, 좀 단호한 맛. 정도는 생기지 않을까 싶고.




제일 좋았던 꼭지.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대비는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를 명확히 해 그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으면 된다. '자급하며 소신을 품고 실천을 나누는 삶'이 예나 지금이나 나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더라. 소박한 일상과 자존감을 다치지 않을 만큼의 물질이, 그 자체로도 단출하고 소신과 실천에도 도움이 되더라. 지금처럼 살고 있으면 나이는 오는 대로 먹어질 테고, 그에 따라 늙음과 질병과 장애도 따라와서 나를 이룰 것이다. 그 끝에 죽음이 오거나 잡을 테고, 그 다음은 이승의 일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차치하고, 이승의 남은 삶도 궁금하지 않다. 오는 대로 최선을 다할 작정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