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1

'성경'의 성립ㅡ 김진호 박사 (신학자, 목사) 강연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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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교발전포럼


'성경'의 성립ㅡ 김진호 박사 (신학자, 목사) 강연

이하 이만식

2019. 2. 2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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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종교발전포럼에 참석하였습니다. 서울대암연구동 이건희홀 로비, 새벽 6시 30분에 포럼을 이끄시는 #박재갑 박사님은 어김없이 맨 먼저 회원들을 맞이하십니다.








오늘 주제는 '성경'으로 신학자이자 목사님이신 김진호 박사님 강연입니다. 지난번 주제인 '불경'과 같이 알고 싶었던 종교 경서 성립에 대한 내용이라 찬바람 새벽길도 설렘으로 녹입니다.

https://youtu.be/xf4US4Ln5XQ





강연 에필로그, 가슴에 담고 귀교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ㅡ갈라디아서"














https://m.blog.naver.com/iha2006/221260181685






<한국종교발전포럼>

http://www.koref.org/sub/forum_catalog.php?CatNo=33박재갑 박사님(서울대 석좌교수, 초대 국립암센타...

m.blog.naver.com



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기억의 신앙사

성서는 역사의 기억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림1] king josiah hears law / 2kings22,10

성전 깊은 곳에서 오래된 법전이 발견되었다. 왕명에 따라 성전 정비 사업에 여념이 없던 대사제 힐기야 그는 유다 왕국 말기의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아버지다.

는 즉각 왕의 최측근인 서기관 사반에게 보고한다. 당연히 그것은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그 문건 내용에 접하자 옷을 찢는다. 왕이 자신의 어의를 찢는다는 것은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는 신호다. 왕실과 예루살렘, 그리고 전국 곳곳에 왕명이 전달된다.

바야흐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다. 불순한 것을 척결하여 야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지방 성소들을 훼파하였고, 제관들을 처형하거나 축출하였다. 이렇게 지방의 제의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왕실 이외의 세력에게 독자적인 정당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종교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몰수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 대중 공동번역은 이들을 ‘지방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는 ‘암하아레츠’ 곧 ‘땅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회적 실체에 대하여, 최근의 정교한 문헌학적 연구들은 ‘농민 대중’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는 견해를 도출해낸다.

은 신앙적으로 지방 성소보다는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에 귀속되게 될 것이 기대되었다.

이 정풍운동의 다른 차원은 일련의 사회적인 조치들을 통해서 시행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법전을 확대하여 법률을 반포한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신명기〉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이 조치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한 가문의 재산이 보다 강한 다른 가문에게 복속되는 것을 억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몰락하거나 몰락 위기에 있는 가문을 보호하는 복지적 체계를 강화한 것이다. 농민 대중의 왕실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대지주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역사 편찬 작업이 활발히 전개된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이른바 ‘토라’ 묶음이 편찬되고, 또 〈판관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 학자들이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사서 묶음의 최초 버전이 구성된다. 창조 때부터 왕조사에 이르는 일련의 파노라마적 선민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제1성서(=구약성서)의 역사틀은 이렇게 구축된다.

이 정풍운동은 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요시야 개혁’이라고 불리게 된다. 빈약하나마 고고학적 증거나 문헌적 증거에 의존해 본다면, 그것이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고, 몸속 뿌리 깊게 박힌 대중의 습속도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 요새에서 갑작스레 서거한 이후, 유다 왕국은 급속히 쇠락했고, 이후 30년이 못 돼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하지만 요시야 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운동은 유다 왕국 멸망 이후까지도 계속되어, 제1성서에 수록된 ‘토라’의 최종 형태에까지 이들의 시선은 깊이 새겨졌다. 또 ‘신명기적 역사서들’의 최종 형태는 거의 이들의 관점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제1성서에 포함된 위대한 예언자들의 담화집들이 묶인 것도 주로 이 운동의 소산이었다. 이들 신명기적 역사서와 예언집들은 훗날 정전(canon) 형성 과정에서 제1성서의 두 번째 요소인 ‘예언’으로 분류된다. 정경을 형성한 유대인들은 제1성서를 다음 세 요소로 분류하였다. ‘토라’(율법서), ‘예언’(예언서), ‘책들’(성문서).

토라도 그렇지만, 특히 ‘예언’ 파트는 야훼신앙의 역사관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제1성서 ‘예언’의 편찬 정신의 핵심에는 요시야 개혁이 자리잡고 있다.

요시야 개혁이 시작되던 당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전 깊숙한 곳에서 법전이 발견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느 과자와 같이, 이 기억의 단자는 깊숙한 곳에 망각된 채 방치돼 있던 과거를 현재의 시공간 속으로 이끌어낸다. 왕은 옷을 찢는다. 아니 망각, 그 변조된 기억으로 직조되어 온 왕조 전통을 찢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을 굴절시키고 변형되게 한 체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요시야 개혁의 주체들은 개혁의 이유를 이렇게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그릇된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기억을 처벌해야 한다. 지방 성소들을 불 지르고 그 사제들을 처벌한 것은, 그리하여 지방 성소를 완전히 폐쇄시킨 것은 바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기억의 코드를 단절시키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위해서 다른 기억을 망각의 창고 속에 가둬야 한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청산될 역사의 처벌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 요시야의 조부였던 히스기야 왕 시절 만들어졌던 각종의 개혁적 제도들은 친아시리아적인 므낫세 정권 치하에서 불온한 기억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기억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이때 개혁 정책의 토대가 됐던 ‘법전’이 성전 깊은 곳에 처박혔다. 요시야 왕은 이 처벌된 기억을 다시 망각의 창고에서 꺼내어 개혁의 실마리 기억으로 삼은 것이다.

그때마다 역사를 주도하면서 기억을 관장했던 세력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처벌될 기억을 그릇되고 사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역사 청산은 사악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치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기억의 전쟁은 언제나 ‘과거의 진실’을 들이댐으로써 현재적 존재의 부당성 혹은 정당성을 판별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현재의 권력 투쟁과 맞물린다. 요컨대 과거의 진실이라는 것은, 그때 실제로 그랬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호출한 이들의 시각에서 편집된 기억이다. 다만 기억을 둘러싼 전쟁의 ‘게임의 법칙’은 그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이들이 그것이 편집된 것임을 알지 못해야 한다. 기억의 전쟁 당사자는 자신의 기억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가운데 싸움에 임한다.

왕을 포함한 요시야 개혁의 주체 세력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억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그것이 개혁 세력의 시각에서 무의식적으로 편집된 기억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야훼신앙의 역사관에 대해 질문하려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시야 개혁이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신앙적 기조에 있다.

요시야 개혁의 실마리 기억을 제공해 준 법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농민 대중의 재산 보호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 26장에는 의미심장하게도 ‘회복’된 땅(재산)에서 햇곡식을 드리는 제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햇곡식의 봉헌례는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시간’에 관한 제의를 함축한다. 물론 그것은 낡은 시간들에 속하는 제의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전제된다. 새로운 기억은 낡은 기억을 배제한다.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된 땅’에 돌아와 불하받은 토지에서 얻은 소출에 관한 것이지만, 요시야 개혁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대지주들에 의해 몰수당한 땅을 개혁 사업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 상황을 암시한다. 아마도 개혁 주체 세력은 이 정풍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미래에는 땅을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농민 대중에게 선포하였을 것이다. 과거에 선조들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농민 대중에게 ‘미래의 꿈’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 과거는 미래를 생산하며, 현재를 조직한다.

그런 점에서 햇곡식을 드리며 고백하라는 다음의 ‘역사적 신조’는 요시야 개혁이 추구하는 ‘기억의 정치’의 핵이 담겨 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 26장 5~9절

우리의 헌법 전문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이라고 시작하는 데 반해, 요시야 개혁은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역사적 신조를 시작한다. 곧 개혁 주체가 선사한 약속은 ‘강대국에의 꿈’이 아니라 ‘구원에의 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강력해지면 모든 백성의 구원 소망이 실현되리라는 비전보다는, 모든 백성이 꿈꾸는 구원의 세계가 실현됨으로써 국가는 존재 의의가 확인되고, 그럼으로써 야훼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된다는 주장이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도식화해본다면 전자가 위로부터의 시선에서 본 꿈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꿈이다. 요컨대 요시야 개혁의 종교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래로부터의 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정치적 자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성서의 역사관은 바로 이러한 소망의 코드와 연계되어 있다. 곧 대중의 꿈에서 과거와 미래의 기억의 실마리가 추적된다. 위대한 영웅의 뿌리에서 혹은 신의 혈통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 아니라, 강자들에 의해 ‘괴롭힘당하고 사정없이 부림당하는 착취의 대상들’이 품는 구원의 소망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다. 머물 곳도 연명할 것도 없는 약한 자들을 선조로 둔 이들, 그러한 조상에 관한 기억을 역사의식으로 간직한 이들, 그러한 기억 속에 구원에의 꿈을 품으며 사는 ‘우리’가 바로 야훼 백성의 자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민족주의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래서 “야훼께서 오신다 / 사막에 길을 내어라 /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 벌판에 ‘큰 길’을 내어라.”(〈이사야서〉 40,3)는, 바벨론에 유배당한 이들의 귀향에의 꿈을 실은 신탁을 선포한 익명의 예언자의 목소리는, 실제로 귀향한 유대인들의 자폐적 종족주의(민족주의)의 ‘큰 길’ 신학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대로’(大路)를 통해 야만적 학대를 받으며 끌려갔던, 거할 곳도 연명할 것도 모두 상실하게 된 이들이, 귀향한 이후 새로 구축한 체제의 비전을 제국의 ‘대로’를 모방하여 설계한 것이다. 예언자가 제국의 ‘대로주의’를 빗대어 역설적으로 말한, 사막을 뚫고 개설된다는 길, 그 불임의 시공간에 던져진 대중의 고통을 가로지르는 절절한 소망의 길이 제국적 성공을 꿈꾸는 민족주의적 꿈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러한 변질된 꿈에 기반을 두고 그들은 순수 혈통주의를 추구했다. ‘오염된’ 타자를 가려내고, 그들을 마음껏 저주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물론 배제될 타자에 대한 폭력은 항상 보복할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을 향했다. 그러한 증오를 통한 자기 재생산의 장치로 발전한 것이 바로 ‘율법’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한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의 제도는 훌륭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많이 담고 있음에도 오염된 것과 정결한 것을 가르려는 혈통주의적이고 종족주의적인 강박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강박증은 과거의 기억을 편집한다.

약한 자들의 꿈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수난당하는 민족의 꿈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되고, 떠돌며 사는 조상들에 관한 기억은 영토에 대한 민족주의적 집착으로 해석되었다. 바로 이러한 야훼 신앙의 율법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훼손된 대중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역사의 집행관들에 의해 처벌당했다. 그와 함께 그런 이들에 관한 기억도 처벌됐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예수에 관한 기억은 살아남았다. 알다시피 제2성서(=신약성서)는 예수를 통한 야훼 신앙의 훼손된 기억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예수를 통한 기억에서 초점은 대중의 아픔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시야 개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예수의 특징은 더 철저하고 더 구체적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라고 들었으나”라는 〈마태복음〉의 율법 비판의 말은 예수에게서 진정한 말의 권위는 율법의 기억(전통)이 아니라 그 말과 관련된 상황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의 상처에 관한 기억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수에게서 대중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기억은 없다. 모든 것은 대중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하느님의 구원의 품에 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율법도 민족도 심지어는 하느님 자신도, 모든 숭고한 기억의 단자들도 상처 입은 이들을 감싸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

in 김진호 / 가톨릭 월간지 《성서와 함께》(2005 01)에 실린 글



◇ ◇ ◇



맺음글_





가톨릭의 아우구스투스나 프로테스탄트의 마르틴 루터, 그리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그리스도교 신학의 제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세 사람의 신학은 바울 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것은 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바울의 해석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주 일찍부터 나타났는데, 제2성서(신약성서) 27개 텍스트 가운데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라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울의 서신들이 1세기 말경에 이미 그리스도의 공동체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서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역사적 횡포에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도 바울을 특별히 주목하게 했다. 니체가 그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바울이 예수를 교회의 도그마로 왜곡, 전락시킨 장본인이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심지어 비판적 신학자들에게도 나타났는데, 자유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바울이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정통주의의 원흉이라고 생각했고, 여성신학자 루이제 쇼트로프(Luise Schottroff)는 그를 남성 쇼비니스트(male-Chauvinist)라고 비판했으며, 김창락의 바울 연구를 접하기 이전의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바울이 왜곡시키기 이전의 신앙을 찾고자 역사의 예수에 주목했다.

한데 나는 이 책에서 바울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도록 전개되었던 기독교의 바울 수용사를 괄호치고, ‘기독교 이전’의 바울, 곧 기독교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실존했던 인물 바울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바울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소환하고자 했다. 이렇게 바울과 오늘의 기독교/교회를 연결하는 단단한 인습적 코드를 해체하고, 바울과 오늘의 사회를 연결짓는 질문 방식은 알랭 바디우, 그리고 어쩌면 조르쥬 아감벤의 문제제기와 비슷하다. 또한 북미의 급진주의적 성서연구자들인 닐 엘리엇이나 리처드 호슬리 등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책은 1세기의 제국 로마와 21세기의 제국 미국 사이에서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바울을 읽어내고자 했던 엘리엇이나 호슬리보다는, 유민과 난민들로 북적되는 1세기와 21세기의 세계에서 난민 혹은 유민들로 구체화된 두 사회의 민중과 함께 했던 바울을 해석하려 한 바디우와 아감벤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다.

내가 보기엔 바디우나 아감벤의 문제의식, 그 배후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 그 세계에서 발생하는 유랑하는 혹은 추방당하는 민중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활동했던 1세기 지중해 세계가 그랬다. 그와 비슷하게 나는 오늘 한국,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97년 이후의 한국을 떠올리며 바울을 물었다.

한데 나는 오늘의 한국을 ‘도시국가 서울’이라고 불렀다. 돌진적 근대화로 치닫던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개념과는 달리, 농촌의 독자성이 거의 괴멸되어 가는, 서울에 귀속된 부속도시들과 촌락들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 그것이 내가 바울을 묻는 나의 시공간이다. 그런 오늘 여기의 시공간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는 바울이 활동한 도시들, 특히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을 살폈다. 도시국가 서울이 ‘21세기적’으로 지구화하고 있는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라면, 바울의 도시들은 ‘1세기적’으로 지구화하던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었다.

이 두 세계는 많은 다른 점이 있지만, 또한 유사성을 갖는다. 그것을 나는 민중신학적 관점에 따라 ‘귀속성’(attribution)의 문제라고 보았다. 즉 시공간의 경계들을 무자비하게 뒤흔들며 무수한 이들의 귀속성을 심각하게 교란시켜버린 지구화되고 있는 세계의 문제가 두 다른 세계의 유사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압박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귀속성을 상실한 채 유랑하는 이들이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으로 유입되고 있는데, 이곳은 중심부메트로폴리탄보다 더 폭력적으로 유랑자들의 생존의 기회들을 짓밟아버리는 공간이다.

한데 바디우나 아감벤은 바울의 현장 해석에서 너무 안이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바울의 세계를 읽어내려는 치밀함의 결핍 때문이다. 그들은 도처에서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비웃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 무지함과 무능함을 넘어서고 있는 새로운 연구 성과물들에 대한 독서의 게으름을 도처에서 들키고 있다. 심지어는 그들이 비판하고 있던 신학과 성서학의 낡은 패러다임의 감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구속시키기도 했다.



반면 그 점에서 민중신학자 김창락의 연구는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디우가 바울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 현장성의 문제를 중요시했지만, 정작 바울의 현장성을 스케치하는 데 가장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이는, 내가 보기엔, 김창락이었다. 그에 의하면 바울의 의인론은 자신의 현장에서 벌인 핵심적 논쟁의 무기로 개발된 것이다. 다시 그의 의인론의 결론을 얘기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차별이 없는 의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창락은 이것을 바울의 인권투쟁이라고 보았다. 즉 주권 없는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신학적 담론이 의인론이라는 얘기다.

나는 김창락이 논한 의인론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하나의 가설을 제시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이 활동하던 기원후 1세기 중반은 해안 지역의 노동자의 거의 30%에 달하던 노예경제가 붕괴되고 무수한 노예들이 방출된 시기였다. 이들 방출 노예들은 대도시들로 유입되어 들어왔고 도시의 하층 노동시장을 크게 교란시켰다. 이것은 이들 방출 노예들에 대한 사회적 증오와 적대를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었고, 이에 방출 노예들은 어떻게 해서든 도시의 ‘콜레기아’들에 속하려는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민자 사회의 자치결사체들이 대다수인 콜레기아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스라엘 교포 사회가 주축이 되는 이스라엘 종교의 자치결사체였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 자치결사체로 유입해 들어왔다. 그중 다수는 방출노예였다. 해서 이 시기에 이스라엘 자치결사체에는 자연증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구의 커다란 증가가 있었다.

한데 이스라엘 자치 결사체에 편입된 비이스라엘계 사람들은 최소한 두 부류가 있다. 하나가 테오세비우스, 즉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가 개종자다. 여기서 전자에 대해서 이스라엘 교포사회는 별반 반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자치결사체를 위해 많은 기부금을 냈고 또한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는 굉장히 논란거리였다. 그들은 기부금을 낼 처지도 못됐고 품격 있는 면모라곤 최소한 만큼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스라엘 자치결사체 내에는 개종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가장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적 성향이 강한 유대주의자들의 말발이 들어 먹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알다시피 바울은 이들 유대주의자들과 정반대의 편에 섰다. 그는 개종자들의 편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웠고, 아무것도, 아무런 품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은혜를 선사하는 신을 설파했다. 바로 그런 주장의 절정에서 유대인도 헬라인도, 자유인도 노예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남자도 여자도 차이가 없다는 말이 덧붙여진 것은, 유대주의자들이 강변한 할례 주장이 가장 보수적인 여성 배제의 논리였기에, 개혁파인 바울이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의인론은 바울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 내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으로 헤게모니를 실현해 가고 있던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방출노예의 편에서 활동한 결과였고 과정이었다. 하여 그는 이들 속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선사하였다.

나는 이러한 바울을 보면서 서울을 본다. 그리고 서울에서 벌어지는 시민의 반민중적, 혹은 민중 혐오적 양상들을 읽어낸다. 나아가 그렇게 사회를 만들어 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헤게모니적 체계들을 주목한다. 한편 이러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바울을 찾기 위해 나는 교회 안과 밖을 두루 살핀다. 아마도 그 바울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며, 교회 밖에서 배척된 이들을 이웃으로 삼는 일에 몸 사리지 않고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바울을 찾아내고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다. □



in 김진호, 《리부팅 바울》(삼인, 2013) 맺음글



◇ ◇ ◇



영들로 세일즈하게 하라!





영성 마케팅

마케팅학계의 구루라고 불리는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의 책 《마켓3.0》은 산업사회의 ‘마켓1.0’과 소비사회의 ‘마켓2.0’에 이어 ‘마켓3.0’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보면서, 각 시대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각각 ‘이성’, ‘감성’, 그리고 ‘영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성’이라고 함은 기능성이나 욕망을 넘어서 가치를 상품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라고 코틀러는 해석한다. 역시 마케팅학계의 구루답게, 현상의 징후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가 그리는 미래의 자본주의는 참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코틀러의 해석은 차라리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영성 마케팅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최근에는 코틀러의 예측처럼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향후 거대한 시대의 대세가 될 것처럼 보인다. 한데 이때 영성 마케팅은 ‘종교적 신비체험의 상품화’라고 하는 게 더 객관적 지적이다. 즉 종교적 신비체험이 하나의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점술가가 복채를 받고 고객의 길흉화복에 대해 조언해주는 것이 가장 일상적인 영성 마케팅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한 스마트폰 회사 경영자는 아이폰의 등장을 스마트폰의 감성화라고 해석하면서 향후의 스마트폰에서 대중은 영성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스마트폰이 추구하는 미래 마케팅 전략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고객이 종교적 신비체험과 같은 종류의 감성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코틀러의 ‘마켓3.0’론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상품화 능력의 탁월성, 아니 전능성일 것이다. 하여 인간의 체험 중 영성까지 상품화한다는 것은 상품이 되지 않고 남은 인간의 체험은 더 이상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하여 우리는 향후에 이런 자기계발의 명령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들로 세일즈하게 하라!”

〈사도행전〉 16장 읽기. 정신의학과 역사학적 비평을 중심으로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주목하게 된다. 이 텍스트는 ‘영성 마켓’에 관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것은 우리 시대의 ‘마켓3.0’의 논점을 비판적으로 읽는 데 훌륭한 전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에는 ‘프뉴마 퓌토나’ 들린 여성이 등장한다. 한글 새번역 성서는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이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그 헬라어 성서본에는 “프뉴마 퓌토나 들린 파이디스케”로 되어 있다. ‘파이디스케’(παιδισκη)는 인신이 타인에게 예속된 어린 여성을 뜻하니 ‘여종’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다만 고대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가능 연령이 12세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는 아마도 12세를 넘지 않은 소녀였을 것이다.

문제는 ‘퓌토나’(πνευμα πυθωνα)인데, 인접어인 ‘퓌톤’(πυθον)이 ‘점쟁이’를 뜻하고 ‘퓌토네스’(πυθωνες)가 복화술사를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뉴마 퓌토나’는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는 점술사, 그 안에 들어가 점술을 하게 하는 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입을 열지 않고 소리를 내는 방식의 점술행위를 하는 노예소녀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점술은 일종의 예지능력이다. 그것을 고대인들은 현상세계 이면의 세계와 대화하는 능력으로 보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예지능력자가 현상세계 밖의 존재, 즉 영과 접신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하여 이 소녀는 접신자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녀 속에 프뉴마 퓌토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도행전〉 16장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바울을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면서 그의 사역을 방해한 모양이다. 이제까지 바울은 아라비아와 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다. 특히 시리아 북부와 소아시아 동부는 바울의 활동 본거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서부 해안에도 활발히 활동한 결과 바울의 주요 거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서쪽, 이오니아 해를 건너, 생면부지의 땅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으로 길을 떠났다.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니 많이 설렜겠다. 그렇게 떠난 길의 첫 목적지가 바로 빌립보다. 과거 알렉산드로스가 난 곳, 어쩌면 바울은 이 도시가 한때 세계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게 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다. 한데 이곳엔 야훼의 회당(쉬나고그)이 없다. 단지 성밖으로 흐르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 한 곳에 기도처(프로슈케, προσευκη)가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 교포사회가 형성되지 않았고 소규모의 비공식적 예배 모임 정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잠잘 곳, 먹을 곳, 만날 사람 등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러다 프로슈케에서 루디아(소아시아 서부 지역) 출신의 한 여성 사업가를 만났고, 그녀로 인해 비로소 기식할 곳이 생겼으며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에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거리에서 겨우겨우 뭔가를 말하려 하는데, 그때마다 한 소녀가 따라다니면서 그의 말을 방해한다. 그녀가 말한 ‘내용’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바울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녀의 말이 상황에 부적합한 것이라는 데 있다. 일종의 ‘경계선 장애’ 증상이 바울과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로막았던 것 같다. 바울은 부아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하여 그녀를 향해, 아니 일반적인 통념처럼 이 점술가의 몸속에 들어가서 그녀를 지배하는 영, 본문이 말하는 바로는 ‘프뉴마 퓌토나’를 향해 버럭 소리 지른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한데 이 축귀 발언 직전의 그의 심사를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귀찮게 여겨서”(디아포네떼이스. διαπονηθεὶς). 여러 영어 성서본들은 이 단어를 훨씬 더 강한 불쾌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단어인 annoy로 표현한다. 그녀에 대한 애틋함이 전혀 없이,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도로서의 소명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분노가 축귀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성서의 축귀 장면들에서 이처럼 인간애가 결여된 텍스트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텍스트에서 소녀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이 사건 이후에 소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텍스트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텍스트가 관심 갖고 있는 것은 그녀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이 복수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필경 그녀가 점술사 길드에 속한 노예였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길드(guild)란 동직조합을 의미하는데, 고대로마 사회에서 사용된 용어로는 콜레기아(collegia)다. 콜레기아(collegia)는 지중해 해안 지역 도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데, 인구 혼합이 크게 진척되면서 스스로의 안전과 이해를 위해 형성된 일종의 자체결사체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종족적, 종교적 콜레기아다. 하지만 국제무역이 발달하면서 동직조합 성격의 콜레기아도 무수히 만들어졌고 그것이 일종의 길드인 셈이다. 그리고 빌립보에서는 점술사 콜레기아들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소녀는 그중 한 점술사 콜레기아에 속한 노예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점술 능력이 무력화된 소녀에게 일어난 일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무능력해진 많은 노예들의 운명처럼, 그녀는 죽임을 당했거나 매춘업자에게 팔려갔거나 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렇다면 바울의 축귀 행위는 소녀를 둘러싼 저간의 사정, 나아가 이 도시의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섣부른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좀더 이 도시의 사정을 살펴보자. 바울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텍스트가 주목하는 것은, 말했듯이, 소녀의 주인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당국에 고발한다. 그 이유는 그녀로 인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그 이후 사태의 전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그 소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행동은 고작 영업 방해일 텐데, 그들은 “우리 도시를 소란스럽게 했다.”고, 일종의 소요죄로 고발했다. 일단의 도시주민들이 그들의 주장에 따라 동조시위를 했다고 하니,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과장이 주민들에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국도 그 황당한 고발을 받아들여 바울 일행에게 체형을 가한 뒤에 구금해 버렸다. 체형이란 사람들에게 당국의 지엄함을 과시하기 위한 체벌이고, 고대로마 도시들에서 이는 죽을 만큼 혹독한 매질을 의미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거의 초죽음이 된 몸으로 감옥에 갇혔다.

이런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보기엔, 이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가능성은 이 도시 주민들이 그 천한 소녀에 덧씌워 있는 ‘퓌토나 프뉴마’에 대한 공격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하는 ‘무의식적 과민증상’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직전까지의 이 도시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그러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도시가 겪은 역사적 체험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이 도시에 나타난 때로부터 90년쯤 전 이곳에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카시우스(Caius Longinus Cassius)가 이끄는 10만 명의 대군과 이들을 궤멸하려고 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만 명의 대군 사이의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 정규군 전사자만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치열한 전투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하나하나가 살인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로마제국의 정예병사 20여만 명이 맞붙었다. 《풀루타르쿠스 영웅전》의 묘사를 분석하면 이 전투는 전략이 부재한 대군이 단순 충돌한 전투였다. 그만큼 치열했고 피해는 막심했다.

1세기 중반 빌립보 시의 인구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전투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전투의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 못지않은 혹독함이 뒤따랐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이 도시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절대1인이 되기 위한 정치적 격변이 세 번이나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층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고, 그들과 얽힌 서민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자신들의 의지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닥쳐온 재앙, 그것에 대항할만한 아무런 수단도 가질 수 없었던 철저한 무력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체험, 이러한 상황에 놓였던 이들 가운데 나타나는 신체와 정신의 장애 현상으로 대표적인 것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다. 아마도 기원전 42년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경험했던 빌립보의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한 PTSD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PTSD의 전형적 증상의 하나는 과거의 특정한 기억이 때로는 언어적 이미지(가령 특정 진술이나 상황)로 또 대로는 비언어적 이미지(가령 특정 색깔, 냄새 등)로 끊임없이 현재의 삶 속에 침입해 들어와(침습기억, intrusive memory) 안정된 생각과 행동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증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이(transference)되곤 하는데, 전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의식적 동일화’(unconsciousness identification)다. 예컨대 1980년 광주사건을 겪지 못한 광주의 후예들이 부모나 이웃 어른의 트라우마적 불안 증상을 접하면서 그것에 무의식적 동일화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때로는 간접체험자 가운데 병증적으로 감정이 전이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는 그러한 병증적 전이로 인해 90여 년 전의 트라우마, 그것의 기억에 끊임없이 침습되는 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속인들의 자기 진술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나 가족, 혹은 타인의 트라우마적 기억에 대한 무의식적 동일화 체험이 영계의 언어를 읽어내는 ‘무(巫)의 감수성’을 갖게 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의 ‘무의 감수성’에 의해 접신한 이가 발설하는 언어는 그 사회의 대중, 그들의 집단적 기억이 투사된 영적 언어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그 접신자를 매개로 사회와 프뉴마 사이의 무의식적인 감정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트라우마적 집단기억은 침습기억처럼 그때의 기억조각을 불쑥불쑥 드러내곤 하지만 그것은 파편적(fragmented)이어서 서사성(narrativity)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PTSD를 겪고 있는 이들의 일반적 증상의 하나는 서사화(narratization)의 붕괴 현상이다. 이것은 특정 사건을 이야기로 풀지 못하는 데서부터 그런 상태가 점점 확대되어 모든 말을 횡설수설하는 식의 언어 장애를 나타내는 데까지 다양하다. 전자에서 후자로 증상은 점점 악화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한데 ‘무’의 감수성을 가진 접신자의 영적 언어를 사람들은 자신들의 단절된 기억과 동일시되는 다른 언어, 즉 환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의 말이 도시주민들의 억제된 기억의 환유로 여겨졌다면, 그녀의 영적 언어 능력을 무력화시킨 바울의 호령에서 사람들은 과거 그들의 부모와 이웃어른들에게 덮쳐와 언어 능력을 무력화시킨 사건들과 무의식적인 동일화를 체감했을 수 있다. 하여 바울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은 그의 언행이 그들의 무의식적 상처를 도지게 했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이 도시 주민들에게 점술에 대한 친근감과 의존성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는 점술산업의 비약적 확대를 가져왔다. 점술자 길드가 속속 만들어졌고, 노예든 자유인이든 점술자들이 고용되었다. 요컨대 영성 마켓이 활성화된 것이다.

그것은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가 점술능력이 무력화되는 순간 점술조합의 주인들에게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사회의 고통을 품은 소녀의 몸은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사회의 영성 마켓에서 창출하는 이윤만이 그녀의 가치를 대변할 뿐이다.

하여 점술조합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동기는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도시 주민들과 당국을 설득한 언어는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했듯이 그 도시 주민들의 파괴된 기억, 그럼에도 그들로 하여금 존재가 붕괴되지 않고 살아낼 수 있게 한 하나의 비결이 그들의 봉쇄된 기억을 환유적으로 나타내는 그녀 같은 접신자들의 영적 언어 때문이라고 한다면, 도시 대중은 바울의 소행을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고, 하여 당국도 그를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다.

빌립보의 바울과 오늘의 교회, 실패의 내력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 16장을 읽는다면, 우리는 오늘 시대를 보다 깊게 보는 성찰에 이를 수 있다. 필립 코틀러가 말했듯이 우리 시대는 점점 영성 마켓이 활발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영적 체험들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세일즈에 동원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근대사에서 점술업 단지가 만들어진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맹인 역술가들이 영도다리 밑 노상에서 점술 거리를 만든 데서 유래한다. 이후 우리사회는 거듭된 격변을 거쳤고, 특히 최근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점술산업은 엄청나게 확산되었다. 2012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점술가 50만 명, 그 매출액이 4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 만화 등에서 좀비나 빙의 소재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도 영성 마켓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증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신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들에서 영성운동 혹은 성령운동이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코칭 프로그램, 힐링 프로그램 등이 종교계 안팎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요컨대 영성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거대한 마켓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데 이러한 영들로 세일즈해야 하는 사회, 특히 영성 마켓을 거대하게 창출하는 오늘의 사회는 깊고 구조적인, 개개인으로서는 도무지 대처할 수 없이 다가오는 사회적 고통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영성 마켓의 부름을 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영적 체험까지도 마켓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 우리의 체험들, 결국은 우리의 영적 체험들까지도 그것이 발생시키는 부가가치로만 존재 의의가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처럼 영적 능력이 시장에서 무력화되는 순간 우리의 고용주는 우리를 용도폐기할 것이고, 사회나 국가는 그것을 묵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릴 때 그런 자신을 불러일으키고 자존적 주체가 되도록 일으켜 세울 내적 동력인 영마저도 그렇게 시장적 가치로 환원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소녀의 개인사, 그리고 그 소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은 채 섣불리 그녀의 삶에, 나아가 그녀에게 투사된 그 도시사회에 끼어들었다. 선교사라는 그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방식은 타자의 삶에 끼어들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그 타자가 되었다. 한데 바울은 그녀의 고통과 그 도시의 비극적 역사를 묻지 않은 채 자신의 능력을 과시적으로 드러냈다. 하여 그는 뼈저린 자기 성찰이 필요했고, 〈빌립보서〉 2장의 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는 바로 그 자신의 처절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그 성찰을 간략히 말하면,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도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사회와 개인이 겪고 있는 아픔들과 절망, 그것이 환유적으로 표출된 종교성을 단순히 귀찮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는 너무 큰 소리로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을 부르짖는다. 그러는 사이 자본주의는 영성 마켓을 확대하고 사람들의 삶 곳곳에 끼어든다. 그리고 나아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영적 자원을 판매하는 자가 되라고, 영들로 세일즈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다. 하여 피로사회에서 존재가 고갈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내적 동력이 되어야하는 영조차도 자본주의적 가치의 평가 아래 귀속시키고 있다. 하여 그리스도교 복음의 실패는 결국 사람들의 고통에 다가가지 못하는 종교, 곧 그리스도교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

in 김진호 / 가톨릭 격월간지 《공동선》(2015 09+10)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