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한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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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야 참 신이다 /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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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0.10.10 16:58
감리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쫒아내야 한다는데 그러면 그 사람 자기가 나가야한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 자체가 1930년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이다. 족보도 없는 사람들이 설치는데 나는 감리교인이 아니니까 다행이다.
감리교가 1930년 교리적 선언을 하면서 예수와 우리의 관계를 ‘대속자가 되시며 스승이 되시는’ 이라는 두 가지를 정리를 했다. 전통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큰 두 개의 흐름은 진보적인 성향, 실천가들의 성향에서는 선생님이고 가르침을 받아서 내가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 용어가 더 쉽다고 생각된다. 불교는 자력구원이라고 한다. 대속론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타력구원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특공대이고 우리는 인질이다. 인질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바깥에서 구조대가 와야 한다.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돼서 돌아가셨다. 우리를 대신해서 이것이 대속론인데, 먼저 말할 것은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구원이 무엇인지 토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행히도 그래서 우리가 아무 이야기라도 해도 된다. 반센 노블스라는 체인점 책방이 책은 매상의 30%이고 다른 것을 판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묶으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냐 메시아냐는 전통적으로는 대속자가 된다는 타력구원 쪽이 있고 선생이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가야 된다는 자력구원 쪽이 있다. 한국 감리교는 두 가지를 다 표방했지만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로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대속의 교리가 왜 문제냐, 인간을 무책임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살인자고 아들을 죽이는, 목적이 있다면 자신의 외아들도 죽이는 입장에서 본다면 대속의 교리는 말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의 교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준다. 저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장애인을 만나면 대속론을 이야기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다. 죽을 사람에게 네 인생 책임져 라고 한다면 너무 잔인하다. 청년들에게는 네 인생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스승의 입장, 예수를 추종해야 되는 모델로 보는 것이 마땅히 우리가 가르쳐야 될 일이지만 힘들고 지치면 대속론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줄 것이다. 기도 좀 하면 하나님께서 갑절로 갚아주실 것이다.
내가 클레어몬트 옆에 사는데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흘려듣는다. 나는 조직신학이 전공이기에 성서는 몰라도 불편은 없는데 최근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 잘못 알았다는 부분이 바울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이 해놓은 것이 내가 평소에 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별문제가 없다. 바울 이야기는 지금 한창 진행 중인데 옆에서 들어보면 바울 이야기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엄청나게 다르더라. 많은 사람들의 대속론 입장이 바울에게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런 말을 쓰지만 문맥으로 보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그래서 바울은 만약에 우리가 따진다면 자력구원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졌고 그래서 나도 지고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세상과 더불어 싸우는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을 쓴다. 거기서부터 대속이란 말이 나왔는데 우리를 위하여, 사랑의 수양관 이거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는가. 우리가 푼돈 좀 내고 우리가 쓰니까 이거 우리를 위해서 지어주었다.
교회에서는 교리문제를 아무도 질문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LA를 관통하고 있는 고속도로 누가 만들었나? 내가 잘 엔조이하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쓴다. 얼마나 좋으냐. 대속의 교리의 바탕에 있는 종교적인 체험은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리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선물이다. 이것이 있으면 대속의 교리는 늘 유효한 거라 본다. 그러나 아까 말한 노인네들, 한계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체험이 바탕이 되는 대속론이 아니라 종교적인, 언어적인 트릭을 쓰는 것이다. 희망을 가져라. 그래서 대속의 교리는 종교적인 체험으로 본다면 그 바탕에 내 삶이 내가 수고하지 않은 그 누군가로부터 오는 은총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기독교인이 이 경험이 없이는 기독교인일 수가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노인네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너 자신을 구원하려 애쓰지 마라’왜냐면 너무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진다.’ 어거스틴 말로 믿음은 뭐냐? 은총을 받아들이는 거다. 하나님이 너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이는 거다. 폴 틸리히가 설명했다.
대속의 교리는 바울의 언어에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속’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것도 비유적으로 나온다. 마가복음의 11장인가 12장인가에 나오는데, 문맥으로 보면 섬김을 위한 일반적인 것이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직접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찾으려면 히브리서에 있는 정도다. 교리사적으로는 언제부터 자리 잡았느냐면 어거스틴에게 책임을 돌려야 되는데 그의 잘못은 아니다. 기원후 400년 전후에서 살았는데 예수 믿은 지 6년 만에 비숍이 되었다. 갑자기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고 그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쓴 도구가 바로 ‘원죄’라는 것인데, 그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가 왜 아이들까지 세례를 주냐, 어른은 죄가 많으니까 세례를 받아야 천당 간다는 것은 말이 되는데 100일도 안되어 죽은 아이가 왜 지옥을 가야하냐, 거기에서 나온 것이 ‘원죄’이다. 물론 13살밖에 안된 자신의 사생아가 죽은 것도 관련이 된다. 그래서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 ‘명부’를 만든다.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옥에 간 건 아니다.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연옥에 가서 잠시만 기다리면 천국에 간다. 우리가 죽어 뜨거우면 천당일 가능성이 많다. 연옥은 불로 연단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희미하면 지옥에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원죄’라는 가상적인 논리이고, 유대인들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타락도 믿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렇게 넘어갔다. 중세가 되면서 안셀름이 왜 예수가 세상에 왔느냐, 라틴교부들이 법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점차적으로 대속의 교리가 고정되었다.
성서는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 다 라는 것을 매우 다양하게 설명한다. 어느 것 하나에 메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유형으로 보면 불교용어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두 개의 유형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체험을 설명하는 두 가지 언어, 그렇게 보고 목회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주워졌으며 선물이니까, 그러나 은총이, 장로교에서는 ‘시너지’를 최악의 죄악이라고 가르치는데 장로교인들 중에 운동권이 많다. 운동권은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기에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공동으로 이루어나가는 시너지즘이지, 소위 단독, 하나님이 혼자서 역사한다 그런 것은 이미 아니다. 감리교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장로교에서도 옳다고 본다. 은총은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 때문에 인간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이거냐 저거냐 일수가 없는데, 장로교 같은 경우, 도르트문트 회의에서 high Calvinism이 선택되고 그것이 교리화 되면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겁을 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갔다.
어거스틴이 비즈니스를 위해서 원죄교리를 만들었고 장로교가 알비니아니즘과 싸우다보니까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나갔고, 이건 모두가 교회의 장사꾼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만든 것이다. 교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대속의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타력적인 구원이 내 삶을 은총으로 경험하는 것이 밑바탕에 있는거다 라고, 그 점을 안다면 대속의 교리 때문에 불편함이 없을 거다.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지 면제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가 할 만큼 책임을 져야 자존심이 산다. 볼테르가 천당가기 싫은 이유는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기에 죽은 다음에 예수만나면 내가 기죽어서 못살텐데, 그곳은 천당이 아니다.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 인간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리면 그건 구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을 갈등관계로 본 것은 교회가 교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가톨릭의 역사를 보아도 자력구원 쪽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한다. 불교의 자력구원은 아니다. 한스 큉이 칼 바르트 밑에서 쓴 논문이 장로교 칼 바르트가 말하는 ‘이신득의’와 가톨릭의 교리는 같은 거다 고 하여 절반의 파문을 받았다. 너는 신부이기는 하지만 가짜 교수다. 그래서 한스 큉 밑에서 배운 학자는 가톨릭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일리가 있다. 가톨릭에서는 은총을 말하고 그 은총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게 해준다. 가톨릭에서는 ‘칭의’라고 하지 않고 ‘의화’라고 번역을 한다. justify가 justification, 실제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은 옳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돼야지 하나님이 나를 봐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닌데도 의로운 사람으로 봐준다. 이것이 내가 배운 감리교나 장로교 개신교 전통에서 배운 ‘칭의’인데, 거기서부터 기독교들이 봐주는 것 사기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에 들어와 있다고 본다. 가톨릭 쪽의 글을 보고서야 개신교가 가톨릭과 차별화하려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너무 극단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와 언어를 담고 있는 밑바닥의 종교체험 그것이 뭘까를 생각해 보면 교리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다. 예수님 덕분에 내가 사는 것이 내 노력이 아니고 이 삶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경험했으면 이것이 대속의 교리이다. 앞서 가신 예수님이 나의 삶, 영생인지 뭐든지 간에 삶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건 내가 닦은 것이 아니다. 선물이다. 그러니까 대속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내 죄를 졌다’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건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나오는 잘못된 것이다. 아담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에만 다녀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실제 인물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놓은 죄 때문에 우리가 죽고 그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대속의 교리의 핵심인데 그런 이야기 자꾸만 하면 사람들 교회 안다닌다. 그렇지만 대속이 가르치려고 했던 ‘경험’ 그것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가 간직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구원’ ‘타력구원’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 홍정수 박사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며 한국교회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안명준 겨자씨와누룩
2009-02-16 오전 00:27:28 © seednyea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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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3.12.27 22:18
나의 예수 목회세미나
홍정수목사> 2013.02.18.
저는 질문이 있으면 잘 떠드는데 질문이 없으면 할 말이 없어요.
복음서나 신학에 대해서 혹시 질문 있으세요? (강의를 듣고 질문하십시다.)
성경 요한복음 3장16절 뭔지 다 아시죠? 그거 하고 마가복음 1장을 지금 읽어보세요. 저는 구약성서도 신약성경도 다 안 필요하고 마가복음 1장만 있으면 제가 목회하고 제 영혼이 구원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한번 읽어보세요. 거기에 예수님이 뭘 하셨나? activity의 종류를 한번 적당히 적어보세요.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할 숙제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 그건 잊어버리세요. 십자가? 그건 없으면 좋은 거니까 잊어버리고. 여러분 죽지 않을 거잖아요. 우리끼리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요.
십자가는 없으면 좋은 거니까 때려 치우고.
부활?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거 징그럽지요. 산 사람들은 재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우리에게 덕이 안 되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금 여기서 서울에서 아산에서 혹은 포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기독교의 핵심을 풀자구요. 넌센스 퀴즈 그만하고.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유인물을 보면 예수! 하나님도 돈도 권력도 없이 어떻게 나에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이게 숙제입니다.
저는 예수 믿어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어요.
제가 반지하에 개척교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 아버님이 중풍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마가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되지요.
성경에는 계속 기적이 일어나지만 저에게는 기적이 안 일어나지요. 그래서 성경을 깨닫게 되지요. 여러분이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여러분이 비극을 당할 때 예수님이 많은 환자에게 기적을 행하였듯이 나에게 기적을 베풀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나의 신앙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 불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조직신학을 했으므로 성서신학은 잘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신앙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본 훼퍼가 히틀러를 죽이려고 하는 일에 가담을 했고 감옥에 2년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처음 1년 동안에도 본 훼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조직들이 계속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베르넨교수가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독일에서 공부한 그 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를 들면 6월21일날 장교회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계획대로 본 훼퍼 일당이 한 계획한 대로 장교가 가지고 간 수류탄은 터졌습니다. 그랬데요. 본 훼퍼는 그것이 성공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 쓴 초기 자료들은 희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그 시각이 되어서 폭탄은 터졌는데, 연합군이 쳐들어오고 독일군은 교착 상태에 빠져서 아무리 참모회의를 해도 희망이 없어서 히틀러는 창밖을 내다보고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은행나무로 된 원탁 테이블이 터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때부터 본 훼퍼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지요. 본 훼퍼는 몸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지요. 여러분은 목회현장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나요? 저는 하나님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데는 하나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그거는 필요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본 훼퍼가 몸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쓰는 거를 반대를 안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쓰는 게 커뮤니케이션이 빨리 됩니다. 우리의 인연은 전생의 인연입니다.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습니다 그러면 빨리 알아듣잖아요. 뭐 족보 따져보자 그럴 필요는 없어요. 부부는 전생에 악연이다.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다 그거 무슨 말인지 빨리 알아듣는다. 말은 통하면 됐지 이 말이 사실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서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이야기를 하는 데는 신은 전혀 해당이 없고 써도 좋지만 그거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거 본 훼퍼가 몸으로 경험해서 알고 이야기했는데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서 빨리 잊어버린 거지요. 저는 늘 마음속에 본 훼퍼를 생각하고 본 훼퍼의 숙제, 본 훼퍼는 뭔 말인지도 모르고 떠들었지요.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그것은 신없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겠느냐? 저는 그렇게 풉니다. 물론 본 훼퍼가 그렇게 해석했다는 건 아니에요. 본 훼퍼는 감옥에서 낙서만 몇 장하고 죽었지요.
그 다음, 조용기는 예수 믿으면 돈 번다고 자꾸 그러는데...
하버드 mba(경영학) 74학번 졸업생들 조사해보니까 MBA니까 아침마다 돈벌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경영학, 하버드생이니까 세계에 겁나는 게 없지요. 하버드 74 학번 입학생들 미국에서는 졸업으로 치겠지요. 졸업생들을 조사를 했어요. 아침마다 구체적으로 목표를 생각하고 교회로 말하면 새벽기도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돈 벌어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나가는 사람보다 능률이 8배나 낫다는 사회학적인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돈돈돈 하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확실하지요.
장로교에서는 돈 많이 버는 것이 구원의 확실한 징표라고 그러니까 장로교 장로가 돈 더 많이 벌고 제대로 된 감리교에서는 돈은 써야 된다고 가르치고 배우니까 감리교 장로들이 가난하지요. 돈독이 든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당연해요.
그건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봐도 욕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요. 좋든 싫든.
따라서 기도해서 돈이 생긴다? 조용기목사와 맥을 같이 하는 로버트 슐러가 무너졌으므로 이젠 기도하면 된다는 그런 개소리는 미국에서는 못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 박정희 복음하고 예수 복음하고는 같았는데 이젠 하면 된다는 말을 하면 안 되니까 이젠 뭐 하지? LA 에서는 젊은이들이 고민을 한다. 뭐 하지?
예수 이야기하면 되지. 그런데 예수 이야기는 끝이 십자가잖아요?
그거는 기독교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거지요. 예수의 십자가는 비극이다는 말은 완전히 넌센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십자가는 상징이라는 겁니다. 날마다 어떻게 죽어요? 한번 지고 부활한다면 질 만한데 날마다 진다면 재미있겠네? 예수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런 이야기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만 읽고 나머지는 사고로 불타서 없어졌거나 물어 떠내려갔다고 생각하고 2박3일동안 여러분이 뭐하는지를 생각하라.
돈 번 사람도 여기 안 왔을 것이고 기도 응답받은 사람도 여기 안 왔을 것이고.
예수 이야기를 하는데 신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되고 하나님이란 단어가 불필요하지만 교회가서 써도 좋지만 여기서는 불필요하고. 이거해서 돈 번다? 이거 해서 출세한다? 성공한다? 그런 말도 쓰지 마시고 그런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려는 그 당시도 쌈박질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이름을 초대교회라고 그러는데 정말로 무식한 거지요. 초대교회가 지금과 똑같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권력투쟁하고 서로 분쟁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고.... 지금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라고 특별히 사랑하고 지금은 안 사랑했다?
무식한 요한 웨슬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넌센스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부흥사지 신학자는 아니니깐요.
따라서 예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이거 해 가지고 돈도 못 벌고 출세도 못한다. 이게 백날 해 봐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처럼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대전제로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예수가 저의 영혼을 살렸고 저에게 복음이 되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봐요. 저는 속된 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죽어도 좋다 그렇게 된다고 봐요.
여러분 자녀들이 컴퓨터에 빠져 있으면 엄마 아빠 말이 하나도 안 들려요. 너 내일 학교 못간다. 집에 가서 텔레비전 못 본다. 상관없어요. 그게 딱 예수라고요. 부모가 뭐라 그래, 하나님이 뭐라 그래, 제자들이 뭐라 그래, 저기가면 죽는다. 못 말려요. 못 말려. 오늘도 그런 일은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부터도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도처에서 우리는 예수 현상을 볼 수 있는 거라고요. 이 예수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가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빠질 수 있는데 컴퓨터에 빠져서는 패가망신이고 인생을 낭비하지만 예수에 빠져 중독돼서 재미를 보면 그게 거창한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거고 작게 말하면 주변에 물든 사람들이 함께 재미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게 마가복음 1장의 언어로 보면 복음이고 복음이란 단어는 바울이 퍼뜨린 단어일텐데 왜냐하면 이게 로마지배권 문화권에서만 선포되는 건데 황제만 선포하는 거니까.
요한복음에는 복음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희랍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에도 복음이란 단어는 안 나오는데 요한복음이 왜 복음인지 모르겠어요.
신약성서의 대부분의 말은 바울이 만들어 냈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라성같은 예루살렘의 기둥들이 유대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가 복음 전달자라는 것은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건데 예수를 황제와 같은 위치에 놓고 복음전달자라는 이상한 착상은, 율법교사라는 말이라면 모를까 그건 바울에서나 나올만한 말이지 예수의 동생 야고보나 예수의 직계제자 베드로에게서는 나와야할 이유가 없는 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요한 개념은 바울의 사전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지금은 논쟁이 많이 있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래요. 바울의 문서가 복음서의 문서보다 15년 20년 30년 앞섰기 때문에 바울을 몰랐을 리 없다고요. 사도행전만 봐도 바울을 알고 있었고 바울을 욕하고 변질시키잖아요.
베드로 전서인가 후서에 베드로가 쓴 거는 아니지만 바울이 너무 어렵고 바울을 따라가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이 영적으로 많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바울이 문제의 인물이였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두 개의 노선, 예루살렘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는 노선이 개념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선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족보상으로는 아니지만 예루살렘 기독교이다. 이건 제도적인 기독교이고 순 엉터리 기독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경상도도 아니고 전라도도 아닌 강원도 촌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지배권자이기 때문에 이 지배세력 속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이명박처럼 축복받은 거에요. 저의 어머니는 강원도 계시지만 사상적으로는 소망교회 교인이지요. 엄마가 기도를 열심히 잘 해서 대통령이 됐다는데 나는 기도를 못해서 내 아들은 쫓겨다니고 그래서 내 어머니는 더 많이 기도하려고 노력하지요,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잘못됐다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고 출세만 하려고 하는 것이 경상도 신학이지요. 가치관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배 아프다 뒤집어엎자는 것이 전라도신학이고 민중신학입니다. 이게 해방신학이다. 저기 강원도 사람이 볼 때는 잘 해 봐라. 그게 그거지요. 요한계시록은 뒤집어엎자는 것이잖아요. 자기네들이 한번 다스려 보자. 그렇지만 어디도 못 끼는 강원도 사람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아이 우리는 관심없어.
강원도에서는 서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미국에 갔을 때는 충격을 안 받았어요. 왜냐하면 공부를 하고 갔기 때문에. 그런데 시골에서 서울 왔을 때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서울 한 복판을 다닐 수 있어?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요? 머리 속에서 없었던 나라에요, 강원도에서는 불필요한 나라엿어요, 중학교때 처음으로 서울놈을 만났는데 얼굴이 하애요. 수돗물 먹어서 하얀가 보다. 처음 서울 오자마자 깜짝 놀랐는데 저처럼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지고. 서울놈을 한 놈 봤는데 얼굴이 하얘. 너 왜 그러냐? 수돗물 먹어서 그렇대. 그래서 수돗물 먹으면 다 하얘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서울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강원도에서는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권력을 차지할 생각이나 뒤집어엎을 생각도 안 해요.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거에요.
몰트만이 탈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그건 다 가진 자들의 장난이에요.
저는 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저의 간증만.
오늘 저녁에도 자신의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너 틀렸다가 없다. 정죄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나는 예수 때문에 이렇게 재미있다는 말을 하면 됩니다.
마가복음1장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이 다 들어있습니다. 동어반복입니다. 같은 비디오 또 보는 거예요. 그건 아무 필요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전부다 예수의 핵심이 십자가라고 그러고 부활은 나중에 붙여진 거라고 그러는데 신학자들은 돈주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지요.
저는 그렇게 안 봐요. 신학자로 온 게 아니고 20년간 목회한 목회자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성공할 수도 없고 서울 가서 한판 할 수도 없고 미국 유배지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치신학은 저에게 의미가 없는 거에요. 처음에는 저도 민중신학 해방신학의 분위기였기에 LA에 가 가지고 지역사회를 민주화하자. 지역사회를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많이 해 봤는데 저보다 이민 연령이 높으신 분들은 저의 잠꼬대를 귀엽게 봐 줬지요. 관심이 전혀 없는 거예요. LA에서 한국사람 데리고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그러면 미국을 개혁하는 건데 미국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겠어요. 저거 미친 놈 아냐? 여기서 월남사람이나 태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는가? 연극 무대에 올려 연출을 할 수 있으려는지는 모르지만 게네들이 귀담아 듣겠어요? 전혀 아니예요. 똑같은 거에요.
어?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겁니다. 아는 거는 예수 이야기밖에 없고 돈 벌어 보려고 저도 경영학책을 좀 봤어요. 피터 트루커의 책을 좀 봤는데 1번 아는 걸로 돈 벌어라. 다른 일을 알고 싶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하라. 전문가를 고용할 길은 없고 아는 이야기는 예수밖에 없고... 예수 이야기로 어떻게 먹고 사느냐? 예수 이야기가 아무 생각없이 써버이벌, 신분 해결, 취업, 애들 대학 보내는 거, 노후대책, 이런 짐승같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 사람에게 예수이야기를 어떻게 하냐? 이건 정말로 어려운 숙제예요. 이건 책에도 없는거에요. 고민을 좀 했지요. 내가 이 사람들에게 뭘 해 줄까? 그 사람들은 내가 서울에서 쫓겨왔다는 거는 다 알아서 불쌍히 여겨 밥은 먹여 주는데 밥값을 해야지. 곰이 거저 얻어먹으려면 재주를 부려야 할 것 아닌가. 사실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사람들에게 어떤 예수를 어떻게 전할까?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뭔가를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뭐냐? 여자들은 잘 모르겠고 흑인신학의 언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민사회에 있는 남자들은 nobody. 정체성이 없는 거예요, 막말로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마가복음 1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개같은 놈들에게 너도 사람이다. 사람 취급을 느낌으로 줬다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신학교 다니지요. 선생님 만나서 공부해서 졸업장 받고 대학원까지 가지요. 광야생활 40년 40일. 다 같은 거지요. 성령께서 스카웃해서 사단이라는 특수훈련을 통해서 짐승들도 같이 있었고 천사들도 도왔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이 신학교 안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예요. 예수님은 두 개나 학교를 나왔지요. 세례요한에게서 배웠고 광야 대학을 나왔고. 거기서 합격해서 목회를 했지요.
예수님은 저보다 똑똑해서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처음부터 자기가 죽을 줄 알고 계승자 후계자를 세웠어요. 저는 그걸 배운 적이 없어요, 신학교에서. 왜 예수가 제자들을 키웠는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요. 20년 목회하다가 문 닫으려고 보니 재미보다가 사생아를 낳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제 어떻게 하나? 어디 가서 입양을 시켜야 하는데 입양할 교단이 없는 거예요. 교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없는 교단은 교회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뒷감당이 대책이 없는 거예요. 아직도 고민 중에 있어요. 목사 없는 교회를 해야 하나? 맨날 고민하고 있고, 몰몬교도 알아보려고 했고 일본의 무교회주의도 알아보려고 그러는데 아직은 대안이 없어요.
목회를 직업적으로 생각하고 목회로 돈 벌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순수한 신앙공동체이면서 성경해석에 대해서 유지되는 저질교회가 아닌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까? 노하우가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저는 고민 중에 있어요. 그 사람들이 nobody에서 나도 잘 했다! 로. 그걸 열심히 잘 했고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짓밟고 넘어가더라. 가슴은 아프지만 잘 됐어요. 자식이 크면 아버지를 밟고 시집 가고 장가가지요. 그런 것처럼 그들은 저를 잔인하게 짓밟고 갔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수준에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식이 성공하면 떠나야 되고 독자적인 노선을 가야됩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고마운 거는 나가서 한기연 책을 보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망하려고 작정한 사람 아니고는 한기연 책을 자주 안 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저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니 잘났다는 소리를 계속 했고, 기죽어 지내던 그 사람들이 어 우리도 해야지. 그런데 유감스러운 거는 저랑 같이 끝까지 목회를 했으면 좋은데 제가 교회를 하다가 사임을 하고 거기 목사들이 많았어요. 평신도보다 목사 가족이 더 많았는데 왜냐하면 신학공부를 자꾸 하니깐. 너희들끼리 하라고 하니까 니가 있으면 우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니가 나갈래 우리가 나갈까? 그 당시는 정치적인 감각이 없어서 몰랐어요. 그 사람들이 나가고 저만 남아서 뒷감당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한 이야기는 너 잘났다는 것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하나도 안 합니다. 그거 외에는 그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없어요.
바울은 예수를 그렇게 봤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마가복음 1장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원래는 거기 없었던 거라고 그래요. 예수는 메시야다. 희랍 컨셉. 단어는 희랍 컨셉이지만 그리스 히브리 컨셉. 예수는 메시야다. 못 알아들으니까 나중에 마가는 첨가를 했어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바울에 보면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딸이다.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치적인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나라는 세금만 거둬가는 나쁜 단어다. 세금은 안 거둬가는 게 좋아요. 하나님나라라도 나라라는 개념은 저에게는 아니예요. 여러분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에게는 이게 강원도 사람들의 특징이예요. 나라? 그건 서울 사람이나 하는 거지요. 저 태백산맥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거고 필요한 거지 강원도 사는 사람은 바다와 하늘만 있으면 됐지 그거 뭐하는 거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나라는. 하나님 나라든지 임금님 나라든지 저는 안 좋아해요.
예수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개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야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고, 요한복음은 아니예요. 예수가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전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라는 것은 해석입니다. 저는 바울에게서 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흑인신학이나 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다. 그거는 우리가 학자들에 의해 속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아니에요. 예수님의 진리를 가르친 거예요. 물론 하나님 나라이야기도 물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은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에이 이건 3대1이잖아 뭐 그럴텐데 3복음서는 예수님이 목회 1년 했어요. 유대인 학자 말에 의하면 6개월밖에 안 했다고 그래요. 가서 금방 죽은 거예요. 3년 못 끌어요. 그렇게 지독하게 살려면. 그런데 요한복음에만 예루살렘에 서너 번 갔다고요. 그럴 때는 3대1인데도 지가 유리한대로 예수님이 3년 목회했다고 믿어요.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목사님들이 전문가인데도 근거없는 짓을 막 한다고요. 근거 따지지 않고 나한테 좋으면 좋은 거에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이.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안 통해요. 강원도 사람들더러 서울에 쳐들어가서 한양 수도권을 장악하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저는 예수님이 그런 말은 안 했다고 봐요. 아마 했더라도 다른 말을 했을 거라고 봐요. 그건 중요하지 않고.
바울의 단어가 매우 정치적인데 하나님나라라는 말도 그렇고 복음이란 단어도 그렇고. 그것이 강원도나 한인 촌놈들이 백악관에 쳐들어가서 놓은 사람 될 생각은 안 해요. 그런 변두리에 있는, 구조적으로 변두리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예수가 복음이 되려면 바울의 이야기, 복음이라는 단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이란 단어를 바꾸면 뭐가 되겠느냐? 너 잘났다 이거지요. 그런데 감정적으로 너 잘났다는 하루 이틀이면 되는데 근거가 없으면 무너져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 하는 말이 너무 맘에 안 드는데 교수들 붙잡고 물어보면 답이 없어요. 그래서 교수들 실력이 없는 줄 알았지요. 그 사람들 괴롭힐 수는 없고 수요일 저녁에 조용기목사 교회가서 위로 받고 온 적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서 코드가 조금 맞았어요. 그러나 신학교에서 배우고 나니까 이건 순 장난하는 거였어요. 갈 데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면 명동에 나가서 별 볼 일없는 처녀 총각들이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에이! 저 놈들도 잘 낫는데 나도 잘났다고 그러고 오곤 했는데 정말로 나도 잘났다고 말하고 싶은데 근거가 없으면 쉽게 무너지더라고요. 친구가 있어 서로 자화자찬을 하면 괜찮은데 시골에서 온 놈이. 친구가 없어 굉장히 힘들더라. 사람들이 못 말리도록 나는 잘났다 너는 잘났다 그럴 수 있으면 구원받은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할 게 없어요.
구약성서에는 충분히 나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70이었어요. 세계나라가 70이었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가 야훼 하나님이지요. 야훼 하나님 나라. 야훼 하나님은 아직 나라를 형성하지 않아서 밑에 부하가 없었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야 나도 하나님 노릇 좀 해 봐야 하는데 백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브라함은 그 주변 나라의 신을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신 같은 거는 내가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삭의 부인이 신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가지고 와요. 거기 보면 똑같은 단어지요. 드라빔이라는데 원어로 보면 하나님이다. 하나님 그런 거다 별 거 아니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내가 집안에서 만들 수도 있는데 니가 뭐야?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다는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이 그래요. 너 뭐 줄 거야? 딜합니다. 이 하나님이 신 노릇 처음 해 보니까 뭘 모르는 거다. 뭐뭐뭐뭐 준다. 엑스. 또 하나님이 공부 좀 해 가지고 와서 또 나타나서 뭐뭐뭐뭐 준다 또 엑스. 세 번째로 와서 요즘 말로 고종명, 잘 죽게 해 줄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내일이 불안했고 죽는 거는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빵도 자식도 당연한 거고 그건 신 도움 없이도 되는 거예요.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까 잘 죽는 거가 최고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잘 죽게 해 줄게. 그러니까 당첨! 그런데 뭐 아브라함이 한 두 살 먹은 앤가요? 하나님 말 안 듣지요. 하나님이 뭐 준다 줘 준다 했어도 기근이 들고 어려우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고 아내도 팔아버리고 이삭도 똑같은 짓 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안 믿는다는 걸 안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니면 백성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끝까지 쫓아가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딜하지요. 그게 시험입니다. 성경에 그대로 되어 있어요.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번에는 시험해 봅니다. 그 전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요. 그렇게 해야 할 거 아닌가요? 딜하려면 검증을 해 봐야 할 거 아니예요.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은 당첨이 됐고 이제 아브라함하고 딜해야겠다고 동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못 믿는 거에요. 그래서 니 아들 바쳐라. 여러분, 자녀가 있으면 이 성경으로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믿음이 좋다구요? 자식한테 맞아 죽지요.
거기서는 완전히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딜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오케이. 그래, 니 마음만 읽었으면 됐다. 이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는 거거든요.
거기에 하나님이 등장하지만 이건 완전히 세속적인 거라구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해 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준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성경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이 달라요. 신학자들이 신학을 많이 만들어낸 거지요. 거짓말로. 저는 어떤 신학책보다는 성경이 훨씬 보다 정직하고 우리들에게 주는 영감이 많다고 봐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대등해지는 거지요. 성경은 참 멋있는 이야기라고 봐요.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뭘 했는가?
신학교 대학원까지 나오고 자기가 언제가는 끝났 줄 알고 제자들을 빨리 양성했고요 제자들하고 귀신 쫓아내고 베드로 장모 병 고치고 문둥병 고치고 그게 다예요. 완전히 무당하는 거 다 한 거지요.
그래서 질문한 거는 예수 목회한다는 것은 이거 하는 거예요. 자기 준비 잘하고 자기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고 후임 잘 결정하고 역사를 잘 이어갈 수 있게 준비하고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어느 정도로 하느냐? 법의 한계를 잔인하게 넘어서. 이건데 아브라함이야기를 왜 했냐면 유대인들의 시각은 뭔가? 한인타운과 유대인 타운이 붙어있어서 유대인들을 자주 보는데 저 사람들은 뭐야? 이런 생각 자주 듭니다. 그래서 미워하지만 그 사람들 책을 보고 엄청나게 많은 거를 깨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안 믿어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으면 히틀러에게 진 하나님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히틀러에게 떼죽음을 당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고 믿겠어요? 전지전능했기에 여러분의 자녀를 천국으로 데려갔다면 여러분 자살해야지요. 교인들이 멍청해서 질문 안 하니까 다행이지만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뼈아픈 아픔이기에 질문 안 할 수 없지요.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유대인들 불러다 물어봤어요. 미워하지만 배우려고 진짜로 물어봤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문신이 있는 유대인 부부 데려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너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어요. 아픈 거 건드리면 안 되는데 물어봤어요. 그 사람이 저를 한참을 쳐다보더라고요. 어이가 없는가 봐요.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이 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 어이가 없나 봐요. 성경이 책상에 놓여 있었는데.... 이게 하나님 이래. 율법주의. 율법은 토라라는 건데. 이게 하나님이래. 그래서 또 가만 있었지요. 이거대로 살면 되는 거래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게 아니래요. 이거대로 살면 된다고. 싫으면 관두는 거래요. 그런데 새로운 하나님 만나려고 뜻을 알려고 기도하는 사람 많지요. 이런 도둑놈들 어디 있어요? 재림예수 왜 기다려요? 예수님 여기다 할 말은 다 했는데! 그거 보면 수상한 거예요. 성경 안 믿는 사람들이예요. 보수주의자들 기도 더 많이 하지요? 기도는 왜 해? 여기 다 있는데? action 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왜 방황해요? 여기 다 있는데! 유대인들 만나서 저는 충격받았어요. 그러면서 유대인들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냐? 그들은 자기네들의 하나님이 절대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요. 그러면 히틀러에게 진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설명해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세상의 하나님은 둘이다. 강한 하나님과 연약한 하나님, 강한 하나님은 나쁜 새끼야. 인간을 잔인하게 짓밟아. 꼭 누구 누구 같애. 죄를 더 많이 짓고도 시람을 더 많이 죽이고도 노벨 평화상을 받는 누구같애!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은 안 믿어. 없어서도 아니야. 약해서도 아니야. 그거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성이 없기 때문에 그 신은 안 믿어. 그러면 우리 하나님? 비실비실하고 약하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그 신을 오늘도 예배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글을 쓰는 거예요. 저는 설교할 거리가 없으면 유대인들의 설교집을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설교집은 하면 된다는 거예요. 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너무 가벼운 거예요. 유대인들의 설교를 보면서 아 정말 이렇게 하는 거구나. 고난이 인간의 영혼의 깊이에 들어가는구나. 감동받고 유대인들의 책을 꽤 많이 봤어요.
여기 혹시 목회하는 사람들 교회에서 기도 가르치나요? 저는 교회에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래도 기도하고 싶으면 유대인들처럼 하라고 하지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기 전에는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래요. 성경을 읽고 그 성경과 가까이 가려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는 안 하면 좋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으면 고거만큼, 우리 아들 공부 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기도가 응답이 되느냐 안 되느냐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신학책에 많이 나오는데 이건 신학자들이 기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뭐 기도를 심심해서 해요? 아프니깐,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기도가 응답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어요? 지금 내 아들이 울고 있는데 죽어가고 있는데... 기도 응답? 그건 날라리 신학이다. 혼동하지 마세요.
유대인들은 내가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으면 그만큼 나와 같은 아픔을 세상에서 누군가가 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이즈는 작을지 몰라요. 나한테는 만원이 필요한데 내 옆에는 100원이 없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창조과정 속에 있는 아직도 혼돈과 흑암속에 있는 세상이라고 봐요. 이직도 메시야가 안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고통이 해석되고 그게 나의 기도거리가 되고 나에게도 하나님의 고통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했으면 나도 하나님을 돕는 거예요. 이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생명을 치료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 히브리 단어가 있어요. REPAIR THE WORLD, HEALING THE WORLD 같은 단어예요. 이 세상을 치료하는데 하나님하고 동업자가 되어 참여하는 거예요. 이게 삼박자 영성이예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기도한 만큼 액션하고. 다시 성경읽고. 이게 삼박자의 영성생활이예요.
야, 이렇게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좋아하는데 이런 기도라면 괜찮겠다 싶어요.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글을 써요. 참 무서운 사람들이예요.
그들은 타락 안 믿고 천당도 안 믿어요. 사람들이 너무 천당을 좋아하니까 랍비가 믿고 싶으면 믿어라 그렇지만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냥 요 정도 이거든요. 유대인들 이야기를 왜 하냐면 유대인들은 오늘 마가복음 1장의 이야기를 알고 뭐라 그러냐 면 예수가 병을 고쳤어? 병을 안 고치면 오늘 죽을 건데 고쳤기 때문에 10년 후에 죽어. 그럼 말짱 도로묵이야? 기독교인들 너희들 그런 거야? 예수라는 선생이 메시야라는 예수가 고작 그런 거 하는 거야? 그런 거지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그럴 거예요? 병 낫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멍청한 거라고 해요. 언젠가는 하나님한테 배신을 당한다는 거지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써요. 여기 신유의 은사받은 목사님들 설명해 보세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뭘 기도하냐? DIVAIN PRESENCE. 내가 병에 걸렸어. 영적인 문제는 뭐냐? 아픔이 문제가 아니고 죽음이 문제가 아니예요. 사람은 죽게 되어 있고 아플 수도 있는 거라고요. 문제는 내 영혼이 아픈데 하나님이 나를 버린 건지 안 버린 건지 세상에 히틀러가 있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거다. 피할 수 없다. 고통은 OK 그런데 하나님이 날 버렸느냐? 안 버렸느냐? 유대인들은 그거다. 하나님이 날 버렸는가? 마사다 항쟁때도 70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도, 드라마에도 나오는데 마사다항쟁때 마지막 순간에 투사들이 마지막 드리고 기도하는 말이 우리 후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해 달라.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직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고 가는 것이고 우리가 패한 것이 아니다.
열왕기 상하도 정신맥락에서 보면 똑같은 거다. 아들 6명이 즉시 처형되지요. 어머니가 똑같은 기도를 하는 거예요. 다 같은 겁니다.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 깊은 곳에서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내 심정으로부터 이 고난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만 선다면 그 다음에는 죽어도 좋다는 거지요. 죽어도 좋다.
기독교인들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도 김영주! 김동환이 똘만이처럼 열심히 따라다니다가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돈 주니까 이상한 짓하고 wcc가 뭔지 알게 뭐에요? 그가 공부 안 했는데 뭘 하는지 모르지요. 개인을 욕할 게 아니예요.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 했으니 wcc가 뭔지 모르는 거다. 거기 가 있어도 뭐가 뭔지 모른다. 저는 개인을 비방하는 게 아니예요. 큰 교회가 무너진다. 김영주가 무너진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로 생각하면 안 되요. 목사들이 공부를 안 해서 문제라고요. 개인의 문제는 그의 임기가 끝나면 끝나는 거예요. 이건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요. 기독교 역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돈 주고 이거 도장 찍자 그러면 그냥 찍는 거에요. 10년도 더 됐지요? 조용기 목사 그룹을 ncc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다 죄를 진 거고 김영주는 죄가 없는 거예요. 이미 오래 전에 선배들이 했는데 왜 김영주가 욕을 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때 여러분은 가만있다가 이제 싹이 자라 열매를 맺으니까 으으! 깜짝 놀라가지고 지금 그러는데. ncc 계통의 진보세력들은 난리가 났는데 그거는 잘못이지요. 지금 와 가지고. 그래서 지도자들은 공부를 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정체성 예수의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모르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계급적으로 보면 배부르고 한가한 사람들이예요. 여기 두 사람이 신학자라고 그래요. 신학자들은 한 박사가 뭐라 그랬냐? 김박사가 뭐라 그랬냐?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Real 피플들이 리얼 스토리 리얼 아픔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문제를 알아도 풀 수가 없어요.
78년 미국에 처음 가서 교수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때는 인권운둥이 아직도 있었던 때고 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때거든요. 혁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데 혁명의 반대세력인 tv 에반젤리스트들이 TV 에 나와서 종말이 온다고 엄청나게 있었어요. 그래서 교수들 만나 물어봤어요. 나는 한국 같은 촌동네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문명국가 미국에서 인권운동의 본산지같은 미국에서 저녁마다 tv에 나와서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서 설치는데 신학자인 너희들 뭐하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교수들의 답변이 뭔 줄 아느냐? 우리들은 진흙탕에 들어갈 장화가 없어. 그거 안 들어가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 여러분, 신학자 무시하진 마세요. 그러나 존중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신학자들에게 신학을 배우는 시대는 지나갔어요 그건 아니예요.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풀어야 해요. 대학원까지 나오셨잖아요. 여러분이 문제를 내놓고 공동으로 풀어가면 풀린다고요. 신학은 지네들끼리 하는 거예요. 다른 신학자가 뭐라고 그랬느냐 그거예요. 지금 최첨단의 신학성서학이 뭔지 아세요? 클레아몬트나 하버드에서 마가복음은 호우머와 일리야드와 플라톤을 베꼈다. 사실이라고 쳐요.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신학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여기 희랍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쳐요. 기독교로 개종하려고 마음먹고 여기 왔다고 쳐요. 클레아몬트와 하버드에서 이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희랍의 원조 상 호우머와 플라톤을 베낀 겁니다라고 하면 기독교로 개종하겠어요? 우리는 지금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최첨단의 신약학자들이 이거한단 말이예요. 이게 틀렸다는 게 아니예요. 그것만 해서는, 거기서 졸업해서는 목회자가 죽었다 깨나도 못 하는 거고 그래서 클레아몬트신학교가 이슬람대학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건 장난이 아닌 거예요. 기독교는 몰락해 가고 있고 이 몰락은 피할 수 없는 거라고요.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풀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마가복음 1장에 있는 이 일이 요한복음 3장16절로 말하면 수혜자 입장에서 이게 영생이다.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냐는 거에요.
영생은 시간적인 영생이 아니지요. full life 영생이다. fulling fumain fuman life 내가 정말로 인간대접을 받는구나. 정말로 내가 사람 취급을 받는구나. 그러면 죽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뭘 더 바랄 게 있나요?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은 아닙니다. 대중들에게 예수는 희망이 아니었어요. 안병무선생님은 다 좋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친하고 존경해요. 군중이 민중이다. no way. 군중은 이거예요. 쓰레기들이예요. 단물만 빼먹고 다 도망갔습니다. 제가 읽은 성경은 그래요. 또 다른 성경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대중은 역사창조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대중이 아니고.
수혜자들 중에 예수의 일을 계승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 수혜자 입장에서 보면 예수 이야기가 복음이고 정치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그 수혜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거는 황제처럼 되는 거고 그거는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의 회복이지요. 나도 인간이구나! 그걸 회복하는 것이고 속된 말로 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못 말리는 거지요. 그런 경험을 한 거라고 봐요. 예수가 병을 고쳤느냐? 그거는 하나의 툴이라고요. 조용기 목사의 수요 집회를 가면 광고를 해요. 내일은 앉은뱅이 그 다음 주는 호흡기 질환..... 그 사람들이 딱 오면 방언으로 막 기도하지요, 저도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방언으로 기도해서 병도 낫고 귀신도 좇아낸 경험도 있어요. 그거 없었으면 아직도 제가 감신대 있었을 거예요. 곽전태 똘만이가 와서 신앙고백서를 쓰면 살려준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선생들이 그거 많이 했는데 고생 많이 했지만 나는 그거 못한다. 내가 신학적인 글을 쓰는 거는 신앙 고백의 행위다. 너희들이 한강을 넘을 수 있냐? 나도 한다. 니네들이 죽은 자를 살리냐? 나도 한다 나도 경험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치사하게는 못 살아남는다. 그런 거는 못한다. 그러니까 곧바로 가서 일러서 곽전태가 일을 저지른 거지요. 무식한 놈에게 성경을 읽어줬더니 감독실에서 성경이 틀렸느냐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대목이냐 하면 부활, 여러분 부활을 믿어요? 아니 믿어져요 머리로? 죽은 파리가 살아나면 그게 부활이예요? 하나님의 행위가 읽혀지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게 부활이 아니예요. 부활은 바울이 만든 거예요. 바울은 졸업장이 없거든요. 졸업장을 받아야 사도인데 졸업장을 못 받았어요. 그런데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봤다는 거예요. 언제 봤냐? 부활한 예수 봤다. 그래서 부활 부활 그러는 거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이 쫙 줄 세우지요. 베드로 인정해 주고 야고보도 인정해주고 그 똑같은 경험을 자기도 했다는 거예요. 질적으로 똑같은 거고 시간 차이는 최소한 3년이 되요 길게는 5년. 며칠이라도 상관없어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는 40일 후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40일 지나면 예수를 경험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40일이 지났는데 바울이 예수를 만난 거예요. 영적인 예수지요. 뭐라든 예수를 만났는데 바울의 고집은 베드로가 본 부활한 예수나 자기가 본 부활한 예수나 동질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의 핵심이예요. 읽어줬더니 성경이 틀렸다고 해요. 박준태 지가 성경 위에 있는 거예요. 지가 틀렸지 성경이 틀렸나? 무식한 것들이 감리교 감독한다고!
예수의 이야기는 수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병고침 받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비난하듯이 병을 고친 게 아니예요. 조금 있으면 병에 또 걸리고 그러다 죽어요. 그게 아니라고요. 예수님이 고친 사람들은 다 천벌을 받은 사람들이예요.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회복된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의 임재를 그 사람들이 자타가 공인하도록 체험한 거예요. 그런데 조용기목사는 신학교 안 나왔으니까 할 말이 없어요. 어느 신학교 나왔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무면허 의료 행위를 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환자는 세브란스로 오라고 하면 되지.... 조용기 목사는 집단으로 고친다. 이걸 보고선 이건 아니다. 예수님은 집단으로 고친 적이 없는 거예요. 한 사람씩 고쳤는데...문둥이는 10명 고쳤지만 그 중에서 한 사람만 고쳤다. 문둥이 10명 고친 것이 집단으로 고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지 모른다. 제일 약오르는 것은 베데스타 연못가에 사람들이 쫙 있는데 온천이 부글부글 끓을 때 들어가야 하는데 기회를 놓쳐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쭉 있는데 일요일날 무슨 예수님이 뭐 할 일이 있겠어요? 거기 와 가지고 몇 사람 고쳤어요? 성경 잘 아시는 분 말해 보세요. 한 사람 고치고 가셨어요. 여러분은 거기서 고침 받은 사람이라고 자꾸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선천적으로 비관적이에요. 저는 거기서 고침을 못 받았지만 거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거에요. 예수 개새끼다. 그렇잖아요. 만일 이게 의료행위였다면, 예수님이 설교하는 거였다면 그 설교를 다 들었을 거 아닌가요? 병이 낫고 안 낫고가 핵심이 아니지요. 이게. 이 병을 고쳤느냐 안 고쳤느냐 이렇게 묻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신 나간 놈들이지요. 지네들이 목회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라고요. 성경을 진지하게 안 읽어봐서 모르는 거에요. 목회를 진지하게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다. 왜 거기에 그런 질문이 들어가요? 그게 아니고 버림받은 사람, 천벌을 받은 사람에게 나아가서 상징적인 설교를 하는 거잖아요. 너도 사람이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박수갈채를 쳤을 거라고 봐요. 아니면 조용기처럼 의료행위를 한 거라면 예수님이 몰매 맞아 죽지요. 안식일날 뭐 할 일이 있다고? 그건 넌센스에요. 안식일날. 많은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충분히 진지하게 안 봐요. 왜냐하면 이건 서양 사람들이 하는 신학이기 때문에.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간 거는 처음부터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고 갔어요. 처음부터. 신학 공부하러 간 게 아니에요. 내 문제를 풀기 위해 유학을 간 거에요. 슈버트 오그덴하고 대형 교실에서는 못 싸우고 페이퍼로 싸웠어요. 내가 중학생때까지 잘 살다가 어느날 예수한테 꼬여가지고 예수 믿으려고 왔고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예수 찾으러 왔는데 슈버트 오그덴이 불트만 제자라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자료가 많아서 아리까리하고. 이미 지네들은 신앙이 있잖아요. 지네들은. 서양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앙이 있는 거다 조상 대대로. 루터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만 있으면 됐지 알 필요가 없다. 이런 거거든요.
지난 주에도 갈릴리 박사원 과정의 학생들하고도 사용했던 거지만 이정배교수도 번역한 밀리오레의 책에 보면 딱 그런 거에요. 예수는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미친 새끼들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어.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의 일생을 투자하라는 얘긴데 제가 슈버트 오그덴에게 우리는 그럴 수는 없다. 너나 잘 해라. 고딕체로 JESUS QUESTION. 니가 해라.
하버드 대학 카프만하고도 제가 똑같은 질문을 했지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으려고 그러는데 너는 예수의 독특한 메시지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잘 모르겠다고 해서 열받아 다시 질문, 너 왜 기독교인이 됐냐? 아니? 그냥 됐어. 말하자면 미국 사람에게 너 왜 미국인이냐? 묻는 거나 똑같은 거지. 그냥 태어난거지. 뻔한 거다. It just happen to me? 어 이게 아니네? 하버드대학 교수한테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라서 그 사람에게서 내가 뭘 배운다? no way. 꿈 깨어야 되요. 지금. 세계가 우리에게서 배워야 된다구요.
제가 감신에 있을 때 제가 박사학위를 못 주니까 디민 프로그램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오스틴장로교신학교에서 우리하고 디민하자고 하니까 그쪽 선생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우리가 너희들에게 한수 배우러 가야지. 당신들이 왜 우리한테서 배우냐? 서양의 기독교는 몰락해 가고 있고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번창하고 있는데 왜 너희가 우리한테 배우냐? 우리가 너희한테 배우러 가야지. 어 우리는 문교부에서 학위를 못 준다고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그러는 거에요. 세계는 달라지고 있어요. 급변하는 한국에 열정도 있고 재정도 있고 머리도 있어요. 정신차려야 되는 거예요. 서양 신학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건 어림도 없어요.
이제 25일에 서대문에서 갈릴리 학교 박사원 입학식을 기념해서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WCC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려고 그럽니다. 저의 스승인 변선환선생님이 계속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했고 그것 때문에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제가 학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나 변선환선생님을 비판을 하면 한국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비난하는 풍토가 되기 때문에 제가 이제까지는 침묵을 했는데 이제는 끝났기 때문에 변선환 선생이 소개하는 서양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 거 배우면 안 되요. 저는 오직 예수라구요. 그래야 비즈니스가 되지요. 안 그래요? 다른 걸로도 구원받으면 거기로 갔지 미쳤다고 여기와 있어요? 기독교에서 제가 한 푼도 얻는 게 없는데?
그거와, 내가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은 그게 예수 정신이예요.
지금까지 종교다원주의는 남들 하고도 문제없이 우리가 잘 사는데 얘네들이 옆집에 왔어. 야금야금 왔어. 얘네들 봐줄까 말까? 어떻게 할까? 그건 개떡같은 신학이예요.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태어났고 다른 종교인이 우리의 가족이예요. 우리가 대답을 해야지 게네들이 뭘 알아요? 게네들이 서양 사람들이 다 똑똑한 줄 아세요? 미국에서 대학원 나오면 미니멈 6만불 받아요. 그런데 신학교 나오면 3만불도 못 받아요. 그래도 오겠다는 사람들은 쓰레기라고요.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 1980년이후 전세계적으로 조직신학자 글이 한 편도 안 나와요. 똑똑한 사람들은 신학 공부 안 해요. 조직신학이 죽으면 성서신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성서를 해석할 툴이 없는 거에요. 개념이. 따라서 조직신학이 죽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끝났다는 걸 의미해요. 그래서 미주오리가 아직도 프린스턴의 신학교의 교수인데 그 친구의 글을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요. 예수는 몰라도 좋다? 지네들끼리는 그래도 되요. 그렇지만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느냐? 다른 방법으로 살지?
예수가 뭘 했냐? 문자 그대로 보면 병을 고친 사람이예요. 귀신을 좇아낸 사람이예요. 그거밖에 한 게 없어요. 그러나 이게 뭘 의미하느냐? 우리가 조용기처럼 병을 고칠 거냐? 문자적으로 보면 조용기신학에 비하면 민중신학이 뒤떨어진다. 문자적으로 보면 민중신학은 할 말이 별로 없어요. 가난한 자에게 뭘 줬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은 그런 거 한 적이 없거든요. 가난한 자는 언제나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 화병을 깬, 보물을 깬 이 여인이 잘한 거라는 이 따위 소리나 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예언서는 읽었지만 실제로 한 게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장만 넘기면 병 고치고 병 고치고....신학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조용기가 훨씬 난 거예요. 제가 민중신학 하는 사람들 보고 이건 정말 유치하다. 조용기가 들었으면 내가 훨씬 더 성서적이다 이렇게 말할 것 같더라고요. 신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예요.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병을 고친 거지만 병을 고친 거는 아니라고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또 죽을 건데...또 병 날 건데 병 고친 게 그게 뭐 메시야거리가 되냐?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대로 그게 뭐 영생씩이나 되냐? 바울의 말대로 그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적들의 비판, 예수를 죽인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의 비판, 예수에게 흥미를 안 가졌던 대중들의 비판은 중요한 거라고요. 왜냐하면 우리의 가족들, 예수 바깥의 사람들은 예수는 흥미없다고 보고 예수의 일이 겨우 고작 그거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 있고 분명히 성경에도 써 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수혜자이고 예수에게서 영생, 충분히 인간대접 받는 삶,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삶을 체험했으니까 지금도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겠느냐? 저는 그런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해 보면 먹혀들어가요. 그 사람들이 제한테 돈은 내지는 않지만 저는 LA에서 20년동안 그 이야기한 거다.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하나도 안 하고 맨날 똑같은 설교한다.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로버트 슐러도 어느 날 고백을 하더라고요. 18년동안 설교 한 편 밖에 안 했다고. 여러분, 설교 이것저것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렉셔너리보고 한다는데 학자들이 쓴 거 따라가지 마세요. 교인들이 아픈 거 여러분이 알지 렉셔너리가 뭘 아느냐? 학자들은 돈 받고 3년치 뺑뺑이 돌리는 거 하는 거에요. 한 가지 설교를 하세요. 그 교회에서는. 교회가 달라지만 아픔이 달라져요. 그 아픔이 치료되면 다른 거 해도 되지만 교인들의 아픔의 focus에 맞는 그 이야기만 하세요. 로버트 술려도 그렇게 하더라. 저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것저것 하면 헷갈릴 수 있어요. 조용기는 삼박자 축복 그것만 한다. 조용기는 신학이 있는데 여러분은 건강한 목회 한다고 이것저것 찝쩍거리면 여러분의 아이덴티티가 없어지는 거예요. 한 가지만 열심히 이야기 하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을 거라고 봐요. 질문있으면 하세요.
하나님 없이 돈없이 성공없이 예수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다. I am somebody. 저는 예수 때문에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미안하지만 유교문화에서는 선생에게 도전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저는 선생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제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도전을 했던 것이고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제 제자들이 제가 삐딱하니까 역적모의하러 와요. 물으러 오면 저는 언제나 그럽니다. 너 혼자 결단해라. 학원사태던지 크리스천 투쟁이던지 대장부 투쟁이던지 너 혼자 결단해라. 크리스천 양심으로, 개강 예배때 목사님이 좋은 말씀 하셨어요. 너 혼자서도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당연히 해라.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학우들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서 하냐? 그것 때문에 하냐? 그건 크리스천이 아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서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는 크리스천 양심으로서 데모를 어떻게 할 거냐는 것 밖에 충고해 줄 게 없다. 저는 선생님들에게 대든 게 아니예요. 그거는 유교질서에 어긋나는 거지요. 그런데 학자로서 후학들을 기르는 양심으로서 어느 게 옳으냐 그르냐? 그거에 대해서는 제가 타협하고 어물쩡거린다면 내가 내가 아니잖아요? 사람이....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예수를 믿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돈 받으면 좋지요. 돈 얼마나 좋아요? 그거 싫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에요? 종교적인 언어로 말하면 그게 영혼이에요. 영혼이 뭔가? 보수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세속적인 철학으로 말하면 내 삶의 패턴이다. 목회는 삶의 무늬, 패턴, 혹은 심리적인 언어로 성격이 반복되는 거다. 반복되는 내 행위의 동기와 목표, 목적, 그게 늘 무늬처럼 패턴이 되어 크리스천이 되는 거고 그것이 황제가 하듯이 당당하게 세상 죽는 거 겁 안 나고. 저는 그거를 예수님한테서 배웠어요. 그게 군대가서도 도움이 됐고 해외 유학가서도 도움이 됐고 사실은 저한테는 도움이 됐는데 학교에는 혼란만 주어서 사실은 미안해요. 감신을 제대로 갔는데 얼마 후에 후퇴해 가지고 한쪽은 비판 정신이 있고 한쪽은 교회가 엉뚱하게 물량주의로 가는 거는 신학교가 무너졌기 때문에 양쪽이 동시에 무너지는 건데 이건 변선환선생님과 저하고 죽어서라도 굿을 해서라도 갚아야 될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회복되어야 될 문제에요. 이건 잘못입니다. 그러나 아까도 박종천 총장한테도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에 사건을 저지른 한 사람으로서 참회의 글을 쓴다면 물론 소망은 비판적인 정신이 살아나는 건 좋지만 교회에 대한 애정은 엄청나게 부족했다. 그건 제가 20년동안 목회자의 자리에 서 봐서 알아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목회현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요.
이 목회자의 심정을 단적으로 설명해 줄께요.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학공부만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까 저 놈이 밥벌이할 출처가 없으니까 역적모의를 해 가지고 헌금이 오고가는 모양새가 제일 좋은 게 예배예요. 그거 모르셨죠? 알고 있었나요? 성경공부는 백날 해 봐야 돈이 안 생겨요. 예배를 드려서 돈이 오가면 근사해져요. 사랑도 돈이 오가면, 여성신학자 또 난리나겠다 구식 언어니까 양해해요. 똑같은 성경공부라도 돈이 창녀처럼 되요. 성경공부도 돈이 오가면 예배가 돼서 고상해진다. 똑같은 건데도 돈이 오가면. 그래서 성경공부하던 사람들이 역적모의해 가지고 교회를 차린 거예요. 저는 목회에 흥미가 없어 도망가려는데 나뭇꾼과 선녀처럼 어떻게 잡혔지요. 목회를 시작하고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게 예배인데 예배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없어요. 우리 실천신학이 바닥이었기 때문에. 마침 GTU에서 세계적인 대가가 예배에 대해서 3일동안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배웠어요. 역사적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성찬식은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하고 쫙 배웠어요. 다 끝났어요. 목회자에게 예배는 돈 걷는 거예요. 그런 생각은 죽어도 안 해 봤지요? 엉터리 신학자는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목회자에게 예배는 돈 걷는 시간이예요. 목사님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돈 내는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거라고 그러면 되는가요? 내가 안 걷으면 딴 놈이 가져가요. 애쓰고 번 돈 내가 안 거둬가면 딴 놈이 다 거둬가요. 중독에 쓰고 도박하고 다른 데 다 써요. 거룩한 사람들도. 돈 때문에 살인사건이 나고요. 그래서 돈은 소중한 거예요. 목숨처럼. 돈을 잘 쓰도록 가르치고 옳은 명분에다가 쓰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사예요. 그런데 제가 그 돈을 받는 동안에는 못 가르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예배학의 도사들은 어떻게 하는가 가서 배웠는데 화려한 예배의식과 세계적인 성찬의식 다 배웠는데 오고가는 헌금 속에 싹트는 신앙이라고 돈 이야기는 싹 빠진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평신도이지요. 예배가 뭔지 모르는 거에요. 예배가 뭔지... 예배는 구약식으로 말하면 눈에 보여야지요.
no charge는 없지요. 가난하면 비둘기라도 들고와야지요. 그게 예배 아니예요? 제가 틀렸나요? 그래서 한 수 더 떴죠. 이 사람 평신도냐고 물었지요. 그렇대요. 그 사람 교회 가냐? 안 간대. 지금 미국에서 신학자들이 교회에 안 가요. 신학하기 때문에. 이게 미국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냐구요? 예배는 돈이예요. 돈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돈을 어떻게 아름답게 쓰느냐? 돈을 내면서도 어떻게 즐거워하느냐? 그거 관리 잘 하는 게 목사가 예배 보는 시간이예요. 다음 주부터 헌금이 더 나올라나? 아니면 쫓겨날라나? 구약시대부터 예배는 다 no charge가 없는 거잖아요? 제가 목사가 되어보니까 예배가 뭔지 비로서 알겠더라구요. 저도 옛날에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이따위 신학책에 있는 헛소리도 하고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라고도 하고 이런 거 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예배는 돈이에요. 너무 솔직했나요?
여러분의 신학이 서구 학자들에 의해서 배부른 학자들에 의해서 경멸된 거예요. 신학은 재건되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안 하면 세계 기독교는 망해요. 아니면 빨리 몰락합니다. 개신교 중에서 가장 래디컬한 그룹이 성공회입니다. 거기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성공회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아프리카에서만 성공회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성공회측에서 나온 글에 보면 아프리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은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목회를 한다는데 조용기목사처럼 신유 팬타코스타 이쪽으로 가고 있는 건데 이건 아니에요. 조용기목사 교회라면 몰라도 영국 성공회 의 후손으로서는 역사를 이어가는데는 문제가 되는 거에요. 전세계의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몰락하고 있다고요. 저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가 몰락하는 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처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고 기독교처럼 내부의 비판이 왕성한 집단은 없어요. 개신교의 전통이지요. 내부의 비판. 그래서 이 내부의 비판이 없으면 리더십이 망하잖아요. 이런 내부의 비판정신과, 저는 예수님을 비판가라고 보는 거거든요. 이런 비판정신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거는 기독교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지구촌에서 기독교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거에요. 저는 기독교와 이해관계는 하나도 없어요. 저는 어떨 때 기도는 안 하지만 기도할 때 저는 지쳤습니다. 기독교 당신 몫입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투정을 많이 부립니다. 그러나 여기 감신대 총장님도 계시니 다행인데 여기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 장로교인들도 많으니 미안한데 샌프란시스코에서 10여년간 가르쳤어요. 거기 장로교인이지만 문희석박사가 에모리대학 나왔고 여기 박종천총장도 에모리대학 나왔는데 그런 인연으로 제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여러 해 가르쳤어요. 장로교 목사님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왜 장로교에는 저런 학자가 없어요? 감리교 신학자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예요.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통하여 학생들의 신앙의 성숙에 이르려고 하는 교육의 기본적인 자세는 변선환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장로교에는 그런 미친 학자가 없었던 것 같아요. 믿으면 된다는 거는 잘 배워서 교회는 성장하는데 그래도 목회자도 자기 영혼은 구원해야 할 거 아니예요? 목사가 되려는 신학생들에게 묻지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가 다르냐?
네 생활속에서 검증될 수 있는 기독교인 특징 세 가지만 대보라고 그러면 장로교 목사님들은 대체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그래요. 저는 비기독교인인데 저는 만나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요. 장로교가 위험합니다. 언어가 안 통하는 거예요. 장로교인의 언어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안 통한다고요. 미국에서도 미국 목회자들 절반이 그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안 나간다고 그러는데 한국에도 곧 그런 일이 일어날는지 몰라요. 생각하지 않는 설득력이 없는 신앙은 자녀들에게 계승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우리들의 신앙이 내부의 비판이 가능하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 열정이 있는 이 정신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나 신화적이고 거짓에 가득 찬 그런 이야기에 포장되어있는 예수 이야기는 전달이 안 될 거라고 봅니다. 우리 자녀들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영주권 때문에 중학생이 우리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성경공부시간에 그 학생이 제일 똑똑한 거에요. 뒤에 얘기 들어보면 홍해 이야기 사사기 이야기 들으면서 하나님 나쁘다는 거예요. 너무 나쁘다는 거예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게는 영주권 때문에 와 있는 거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빨리 영주권받고 가라고 그랬지요. 선수들끼리는 서로 속이면 안 되잖아요. 영주권 해 주는 거는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 고치는 거와 똑같다고 봐요. 살기 위해서는 법을 조금 어겨도 된다고 보고 미국 이민국에서는 우리가 법을 어기는 줄 다 알아요.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영주권을 받자마자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그랬는데 그 학생이 있는 동안 우리는 배운 거에요. 우리의 언어가 그 중학생에게 이렇게 보이는구나.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한다고 해서 이집트 사람들을 그렇게 떼죽음을 시켜도 되는 거냐? 어떻게 하나님이 줬다고 해서 남의 땅을 쳐들어가면서 아이들까지 싸그리 죽여도 되는 거냐? 이게 찬양거리냐? 아이가 너무 끔찍하게 질문을 ㄹ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냐? 선생들도 당황하는 거예요. 이런 기독교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똑똑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계승될 거라고요? 어림도 없어요. 이건 기독교가 아니에요. 예수가 중요한 거는 이런 기독교가 아닌, 전혀 다른, 비폭력적이고 생명을 품는 비판적인 그런 기독교잖아요? 저는 예수님 그러면 마가복음 7장 13절 14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통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거, 뒤집어엎고 그것에 도전하고 인간을 편든 예수, 저는 비판적인 예수로서의 예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나 그건 마가복음 7장으로 가기 전에 마가복음 1장만 읽어도 다 나오는 거잖아요. 저는 마가복음을 너무너무 좋아해요. 너무나 인간적이고. 그 뒤에 읽어보면 이 예수는, 우리가 목회자이니까 본인이야기하지요. 성경에는 없는 거예요.
예수 본인. 성경에는 없지만 이게 되게 재미있었을 거라고 봐요. 저는 역적모의할 때가 제일 재미있거든요. 진짜! 성공하면 더 재미있지만 도적질도 그렇다고 그래요. 모의할 때 재미있고 담 넘을 때 재미있고 전리품 나눌 때 재미있고...제일 위험한 거는 전리품 나눌 때지만. 목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만났을 때 흥분하고 혼자서는 힘든데 이렇게 역적모의할 때 가슴이 떨리고 실패할지라도 예수님도 실패했는데, 바울도 실패했는데, 바울도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때문에 욕욕하면서 바울이 소수그룹의 대표자거든요. 바울이. 지금은 바울이 문헌을 많이 남겨서 지금은 주류가 되지만 바울은 콤플렉스가 많았어요. 갈라디아서 보세요. 저 기라성같은 저놈들 저주 받아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 놈들 저주 받아라. 그 사람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사랑하는데 착각하지 마세요.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저는 그런 예수와 그런 바울을 보면서 너무나 저와 닮았어요. 미안하지만 지랄스러워요. 성격 나쁘다고 그러는데 예수가 무슨 성격이 좋아요? 바울이 뭐 성격이 좋아요? 좋다 나쁘다는 가진 사람들이 권위주의자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도전자들에게 할 때 쓰는 거예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거는 그걸 이야기해야 하는데 성격 나쁘다고 그러면 도매금로 다 넘어가는 거예요. 박정희때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 박근혜가 다시 쓸 지 모른다. 늘 단골메뉴다.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 일부 소수의 깨어난 용기있는 사람들이지 어떻게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이예요?
예수 이야기에서 본인은 뭘 했겠느냐? 하나님? no way. 예수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을 했다면 저는 예수 안 믿어요. 저는 하나님 안 믿어요. 예수는 이 일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긍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희열을 맛봤을 거라고 봐요. 생명을 볼보는 거. 단 큐핏이라는 신학자를 제일 존경하는데 80점쯤만. 그 사람이 환갑 이전에는 철이 덜나서 자기 손자손녀들을 보면서 그렇게 즐거웠다고 해요. 생명의 신비를. 그런데 말년에 철이 들어 가지고는 지금 80다 되어 가는데 철이 들어서 이제 사람이 된 거에요. 온 세상 생명들이 다 자기를 향하여 웃어주고 거기서 미래를 본다는 거예요. 철이 안 났을 때는 지 새끼들만 좋은 거예요. 지 새끼들 하고만 즐거운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새끼는 없었지만 짓밟힌 생명들을 보고 거기서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죽어도 좋아 그 말을 했을 거라고 봐요. 가까이 가서 안 봤으니까 그렇지. 늙은이들이 sex를 하면서 죽어도 좋다고 그러는데 sex는 즐거움이 모르긴 몰라도 3초밖에 안 갈 거에요. 짓밟힌 한 생명이 웃음으로 꽃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무한히 기뻤을 거라고 봐요 저는. 안 그랬으면 어떻게 예수가 그런 일을 계속 했었을까? 안 그랬으면 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밖에 있는 사람들더러 기뻐하라고 그랬을까? 바울이 정신병자가 아니라고요. 바울의 글에 보면 나는 죽을 뻔 했다고 그래요. 이 사람은 죽고싶은 사람이 아니예요. 죽을 뻔 했다. 매맞아 죽을 뻔 했다. 고생이 심했다.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는 자각, 확신이 있었어요. 그걸 유교적으로 말하면 천명을 알고 그게 자기와 인카네이션해서 일치한 거지요. 공자가 뭐 50에 천명을 알았다고 그러는데 바울은 그 경지를 산 거지요. 외부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가 그 일을 살면서 안으로 넘치는 희열을 맛 본 거에요. 저는 찌그러진 생명이 피 흘리던 생명이 박수를 치고 웃는 걸 보면 모든 사람들이 웃을 거라고 봐요. 아주 유치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 저는 성악설은 안 믿어요. 사람이 독하다는 거는 믿지만. 아주 아주 옛날에는 영화를 보러 가서 보면 쫓기던 사람이 가까스로 철장문을 넘어서 자유를 얻게 되면 영화 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아멘 안 하시네요. 비행기를 처음 타던 사람이 무사히 착륙하면 옛날에는 박수를 쳤답니다. 비행기를 처음 타 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박수칠 때에 가서는 다 같이 박수를 쳤어요 옛날에는. 그러면 저는 그러지요. 분명히 저기 나쁜 놈들 강패들도 있을 텐데 깡패들이 망가지고 간신히 쫓기는 그 사람이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똑같은 장면에서 어떻게 똑같이 박수를 칠까? 너무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여러분들이 예수하고 친해져서 예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체험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안 부러워요. 이기철이라고 김홍도를 멸망시킨 사람이 이메일로 컨텍트되어 또 한 번 뒤엎자고 자기가 옛날 자료 다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저는 살만큼 살았는데 그거 다 우스운 일이야 너나 잘 살아라.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공자님처럼 이야기하면 웃길 것 같고, 공자님도 그런 억울한 일 당했는데 나중에 높은 사람 되어 가지고 뭐 좀 하자고 그랬는데 야 그건 사람이 한 일이 아니야. 하늘이 한 일이야 그러고 넘어 가더라고요. 저도 나이가 드니 조금은 그래 져요. 옛날에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욥기처럼 나는 왜 이래? 별 볼 일없는 애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래?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거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 아픔을 통해서 유배생활을 통해서 제가 발견한 거는 처참하게 신분없이 짓밟히는 한국 사람들과 그들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줄 수 있는 예수의 복음, 예수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발견했기 때문에 신학교에 있을 때에는 관념적으로만 알았는데 여기서 피부로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저는 저 나름대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