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2

자료실 -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읽는 순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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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2008.12.03 22:27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읽는 순서 추천
한기연
조회 수 179390 추천 수 0 댓글 4

첨부 '1'
하나님의 뜻_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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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인 회의에 시달리다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먼 길을 걸어오신 여러분들이 앞으로 더욱 진실을 통해 자유롭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신앙에 많은 충격을 받기 쉽습니다.
영혼이 성숙하는 길이란 항상 낡은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는 일이기에
남들이 가르쳐준 진실을 때로 벗어버려야 하며 스스로 새로운 옷을 만들어야 하는 일처럼
또는 그동안 익숙하던 지도를 고쳐가면서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는 일처럼
진리에 헌신한다는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해 씨름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한 피붙이라는 확신에서 이 땅에 지배와 착취가 없으며, 이웃과 원수, 죄인과 의인 사이에 차별이 없는 사랑과 나눔과 섬김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 했지만, 제자들은 이 세상에 교회를 건설했지요. 예수님은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삶을 경축하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나라(바실레이아 = 제국)을 대안적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 이후 시대의 철저한 사랑 중심의 공동체운동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위계적이며 차별적인 로마제국과 종교귀족들에 의해 처형 당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을 계승한 초기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과 무차별적인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예수님이 '살과 피로' 부활한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손규태 교수가 잘 요약한 것처럼("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한국의 현실" 신학비평 50호, 2013 가을), 예수님의 직계제자들인 베드로, 야곱, 요한이 예루살렘에 세운 유대적 기독교는 역사에서 소멸되고, 사도 바울이 지중해 지역의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들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방인들을 위해 세운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의 원조가 되었지요. 당시 이방인들은 헬레니즘 사상, 특히 그리스의 본체 형이상학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상을 갖고 예수님을 설명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대의 역사의 예수님은 사라지고, 그리스적인 신앙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지요.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초대교회의 공의회 문서들인데, 그리스도론을 다룬 니케아 신조(325년)이며 삼위일체론을 다룬 콘스탄티노플 신조(481)입니다. 이런 문서들을 해석하고 신학화한 것이 소위 교부들의 신학이며, 이 과정에서 지상의 역사적 예수는 증발되고 천상의 형이상학적 그리스도만 남게 되었지요. 중세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기초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철학이며, 중세교회의 표준적 신학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기초로 한 것이지요.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역시 자본주의 초기시대의 심리적 불안과 소외 가운데서 하늘 법정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예수님은 실종되고 대신에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혼인한 신자들의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교리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상의 하나님 나라는 교회라는 자기정당화를 이어갔을 뿐입니다.



이처럼 전통적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전은 사라지고, 그리스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민중들, 여성들, 제3세계 민중들, 자연세계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성직자 중심의 기독교는 결국 "민중의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빈 마이어스의 책 표지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입을 봉해버린 셈이며,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님을 교회로부터 구출해서 예수님의 입을 통해 직접 가르침을 받으려는 노력인 셈입니다.




따라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에서 배웠던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른 예수님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충격을 덜 받으면서 책을 읽는 순서를 현재까지 저희 연구소가 발행한 책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단계별로 추천합니다.


I. 내 영혼의 성숙을 위한 여행을 하기 위해 마음 준비하는 단계

1. 레슬리 웨더헤드 목사의 <하나님의 뜻>

2. 월터 윙크의 <예수와 비폭력 저항>

3. 존 디어 신부의 <예수의 평화영성>

4. 홍정수 박사의 <베짜는 하느님> <사도신경 살아내기>

5. 리처드 로어 신부의 <불멸의 다이아몬드: 우리의 진짜 자기를 찾아서><물밑에서 숨 쉬기>




II.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내가 가진 지도가 틀림없고 쓸만한지를 확인하는 단계

1. 윌리엄 슬로언 코핀 목사의 <나는 믿나이다>,

2. 존 쉘비 스퐁 & 잭 스피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와 날개>

3. 로빈 마이어스,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 <언더그라운드 교회>

4. 존 캅의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교회 다시 살리기>

5.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 <새로 만난 하느님> <예수의 의미>

6. 리처드 호슬리 편,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신실한 저항의 역사로서 성서 새로보기>
7. 존 도미닉 크로산 & 조나단 리드의 <예수의 역사: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8. 잭 넬슨-폴마이어, 한성수 역,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9. 김경재, 송기득, 오강남, 장회익, 최만자 외 <내게 찾아온 은총: 깨달음을 통한 주체적 신앙>


III. 나에게 익숙했던 옛 지도를 수정하기 위해 대가들에게서 한 수 배우는 단계

1.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가장 위대한 기도: '주님의 기도'의 혁명적인 메시지>,

2.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크리스마스>와 <첫번째 바울의 복음>(마커스 보그와 공저),
3. 로버트 펑크의 <예수에게 솔직히>
4. 리처드 호슬리의 <예수와 제국>와 버튼 맥의 <잃어버린 복음서 Q>
5. 존 쉘비 스퐁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성경을 해방시켜라> <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 <예수를 해방시켜라> <성경과 폭력>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6. 로이드 기링의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7. 리처드 루벤슈타인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IV. 고쳐진 지도가 현실과 나에게 잘 맞는지를 확인하며 더욱 넓은 신앙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단계

1. 버나드 브랜든 스캇의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2.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
3. 그레고리 라일리의 <하느님의 강>

4. 존 도미닉 크로산의 <비유의 위력: 예수에 의한 픽션이 어떻게 예수에 관한 픽션이 되었는가?>

5. 존 도미닉 크로산의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6. 돈 큐핏의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떠나보낸 하느님>


V. 개인주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과 열정에 철저하게 헌신했던 예수의 삶과 정신을 오늘의 현실에서 계승하기 위한 단계

1. 김준우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 토마스 베리 신부의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황혼의 사색>

3. 샐리 맥페이그의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4. 고든 카우프만,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 <예수와 창조성>














그리고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책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누가 사람이냐>, <하느님을 찾는 사람>, 토마스 핸드의 <동양적 그리스도교 영성>, 존 웰치의 <영혼의 순례자들>을 추천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선구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는 드폴대학교 명예교수로서, 미국 성서학회 역사적 예수 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탁월한 예수 연구가로 평가받는 그는 1985년에 로버트 펑크 박사와 함께 “예수 세미나”를 창설하여, 200여 명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를 통해 “예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저자의 책들 가운데 번역된 책들은 <예수는 누구인가> 이외에도 『어두운 간격』, 『역사적 예수』,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예수의 역사』(조나단 리드와 공저), 『하나님과 제국』, 『가장 위대한 기도』, 『비유의 위력』, 마커스 보그와 함께 공동 저술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첫 번째 크리스마스』,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등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그의 치밀한 연구를 통해 기독교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중심의 신앙에서부터 예수의 생애와 비전 중심의 신앙으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로부터 예수를 삶의 모델로 따르는 기독교로, “무조건 믿어라!”의 종교에서부터 “이해를 통한 믿음”의 종교로, 후대 제자들의 “예수에 관한 종교”에서부터 본래의 “예수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게 되었다. 특히 예수 당시에 로마의 식민지 지배와 착취, 학살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제국 신학”에 대항하는 예수의 저항방식과 대안적 비전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동정녀 탄생, 부활과 재림에 관한 그의 폭넓은 연구는 “대속신앙” 중심의 개인주의적이며 초자연적이며 일방적인 기적 중심의 기독교를 벗어나 분배정의에 기초한 공동체적이며 참여적이며 철저하게 비폭력 불복종의 평등주의적 기독교로 나아가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목회 현장이 너무 분주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너무 없으므로,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을 매우 간략하게 다이제스트 해서 한두 시간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오래 전부터 받았다. 존 웨슬리 목사가 수많은 고전들을 간략하게 다이제스트 해서 평신도 설교자들을 속성으로 교육시켰던 방법이 오늘날에도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을 것이다. 물론 웨슬리 목사는 하루에 세 시간씩 독서하지 않는 설교자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문을 닫게 되기를 원했었다.
좌우간 크로산의 <예수는 누구인가>는 매우 짧은 책으로서 <역사적 예수>(1991)과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1994)를 출판한 후에 일반 독자들을 위해 쓴 책(1996)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해 단 1권만 추천하라면, 나로서는 그 이후에 쓴 <가장 위대한 기도: 주님의 기도의 혁명적인 메시지>(2010)를 추천하고 싶고, 만일에 이 책 한 권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면, 4장,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와 5장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를 정독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신학의 핵심과 대속신앙에 대한 크로산의 비판적 입장과 성서적 근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 르네상스 1

https://youtu.be/NzR3NbwPmhg?t=2





역사적 예수, 아직도 충분히 알 수 없는가?















1.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동안 많은 학문적 결실을 내었지만, 아직도 역사적 예수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예수가 살았던 시대상황, 예수가 대결해야 했던 문제들, 예수의 믿음, 예수의 전략 등등에 관해 이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지혜의 아들로 고백되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2. 우리가 예수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알아야만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예수가 정말로 요셉의 아들인지 아니면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사생아인지, 목수 일을 했는지 아니면 농사일을 했는지, 세포리스나 티베리아스에서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을 했는지, 인도에 갔었는지, 결혼을 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학자들이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밝힐 수 있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도대체 이런 문제들이 우리의 삶과 관련해서 무엇이 그리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3. 그런 문제들이 매우 중요하기에, 혹은 결정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에 아직 풀리지 않아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실제로는 “역사적 예수를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4. 내 생각에는 역사적 예수를 알게 되면 될수록, 나에게 개인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혼자서 다 감당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생각되거나, 혹은 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이지만, 역사적 예수는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 예수의 제자로서 살기를 요구한다. 그 요구에 따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핑계로 내세우는 것은 아닐까?

5. 예수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렛 촌놈이라고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권력을 가진 부자들과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위험인물로 보고 잡아 죽일 생각만 했다. 세 번째로 열심당이나 시카리파와 같은 반제국주의, 반귀족주의 폭력혁명가들 역시 예수를 혁명에 대한 훼방꾼으로 간주하여 제거할 수만 있다면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새로운 세상이 오지 않으면 아무런 삶의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존재방식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구현한 그를 구원자로 믿고 따랐다.

6. 그래서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성경 말씀을 영적인 해석이나 도덕적인 해석으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마태복음 1장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다윗 가문 출신의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huios theou)임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를 영적인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분이지,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는 해석이 정말로 옳은 해석인가? 아니면 이런 영적인 해석은 권력의 시녀가 된 서구 부르주아 신학자들의 해석일 따름인가?


7.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이 쓴 <첫 번째 크리스마스>(2007)를 보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신의 아들(huios theou), 구세주, 평화의 왕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였다.그는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전 27년,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제국을 세워 41년 동안 통치하다가 기원후 14년에 죽자 로마제국의 원로원은 그가 승천한 것으로 발표했다. 1세기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족보는 천 년이 넘는 세대들에 걸친 족보였다. 그 족보는 쥬피터 신에서부터 출발하여, 그의 딸 비너스와 트로이의 영웅 안치세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애네아스였으며, 그의 아들이 율루스로서 율리우스 가문으로 이어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예수의 족보는 바로 로마제국의 신학이 만든 이 찬란한 족보를 정확하게 겨냥하여 한 방에 날려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성경 전체와 마찬가지로 복음서들 역시 인간의 구원, 그 온전함과 평화를 위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인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정치적인 저항, 특별히 제국에 대한 저항과 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8. 성경을 탈정치화시키고 영적인 의미로만 축소시키는 이유는 성경 해석자들이 결국 권력자들의 하수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유레카! 예수는 안티-메시아(anti-Messiah)였다.(201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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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예수는 안티-메시아(anti-Messiah)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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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해왔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해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는 다윗 왕과 같은 영웅적인 전사로서 강권적이며 폭력적이며 일방적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인물로서, 사람들의 복수심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켜줄 수는 있어도, 세상의 문제들은 전혀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예수는 메시아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며 비주체적이며 무책임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세상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강권적이며 기적적인 해결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되어 자유롭게 되어 두 팔을 걷어붙이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로버트 펑크), 오직 친밀하며 비폭력적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나눔과 섬김을 통한 평등공동체를 세우고 확대하는 방법뿐이라는 것을 예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품었던 것과 같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현재의 사랑과 분배정의구현을 통해 이루어나가는 길을 찾았다(토마스 쉬한, 도미닉 크로산). 예수가 제자들의 투사를 매우 경계한 대신에 모든 이들에게 참사람의 길을 가도록 힘을 실어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월터 윙크). 이런 점에서 나는 예수가 꿈꾸었던 후천개벽은 세례요한이 기다렸던 기적적인 미륵하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인간의 철저한 변화를 통해 공동체의 변화에 이르는 미륵상생의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전통의 가부장제도와 묵시론, 그리스전통의 플라톤적 이원론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 기독교는 육체에 대한 멸시, 성차별, 자연파괴의 길로 치달았으며 정복자들과 지배자들, 제국주의자들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길과는 전혀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로버트 펑크가 <예수에게 솔직히>에서 비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암시했으며, 버나드 브랜든 스캇이 그 뒤를 이어 좀더 강하게 암시했고, 존 쉘비 스퐁 주교가 "메시아 비밀" 문제로 씨름했으나 "영 기독론"의 관점에서 시도했을 뿐이지만,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는 평생 비폭력적인 하나님과 분배정의라는 관점에서 예수를 강조했으며, 월터 윙크가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에서 묵시론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함축적 의미였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결정적으로 깨닫게 해준 이는 로즈마리 류터 교수(2014)와 리차드 로어 신부님(2009, 2013, 2014)이다.
아직도 재림 예수가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해주리라 기대하는 신화적인 기독교인들은 단적으로 말해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일 따름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만든 장본인들은 예수의 상식적이며 주체적인 가르침을 왜곡한 어용 신학자들과 권력자들이었다는 말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근거하여 기독교 핵심 메시지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재구성을 거치지 않고는 개신교 500년 역사에 희망이 별로 없을 거 같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가 기쁘고 자유로워야 하며 작은 그리스도가 되기까지 성장할 우리의 책임이 그만큼 무겁고 우리의 수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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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08.12.04 14:11















예수천국 불신지옥? 사랑은 어디에
‘예수 없는 예수교회’ 책 펴낸 한완상 전 부총리


조현 기자





































» 한완상(72·사진)



30년 만에 교회 독선·배타 재비판
“역사적 예수 봐야 열린 평화 가능”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한완상(72·사진) 박사가 이번엔 <예수 없는 예수교회>(김영사 펴냄)를 통해 교회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한국방송통신대와 상지대 총장,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다양한 공직을 거쳤던 그는 2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념 간담회에선 ‘교회 장로’로서 나섰다.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의 본질은 ‘역사적인 예수’가 없다는 점이다.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예수는 없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살아가는 얘기가 없다. 만약 역사적 예수를 통해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안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았을 것이다.”


한 박사는 “기독교가 세계 대제국이던 로마, 그것도 유일한 신으로 군림한 로마 황제에 의해 ‘하나의 제국에 하나의 교회만 군림’하게 된 뒤 지배 이념으로 고착된 교리만이 예수를 대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중과 지식인> 등 대표적인 사회과학서의 저자이기도 한 그가 교회 비판 책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무려 30년 전인 1978년 <저 낮은 곳을 향하여>에서도 교회를 깨운 적이 있다. 그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한 지 6개월 만에 큰 화상을 입어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는데, ‘예수를 믿으라’는 권유를 받고, ‘내가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극적으로 회생했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훗날 그가 신학대에 가서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한 박사는 비록 목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평생 ‘진짜 예수’와 ‘제대로 된 교회와 신앙인’을 위한 여정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87년엔 서강대 길희성 명예교수 등과 함께 목사와 교회 건물, 교단 등 세 가지가 없는 새길교회를 세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 실험을 해오고 있다.


그가 말만이 아니라 교회 현장에서 운동에 나선 것은 ‘하나님 나라가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이, 고통받는 이가 없이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 받는 새질서 운동’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보세요.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이 복 받는다고 했나요. 아닙니다. 가난하고, 온유하고, 핍박 받는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했지요. 예수님 자신도 기적을 행사하는 신적인 능력으로 세상적인 권세를 얻고 승리하기를 바라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철저히 사랑을 실천하다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웃 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는 전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다”라고 본다. 역사적 예수를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열린 자세와 철저한 평화의 정신이 불을 보듯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기사등록 : 2008-12-02 오후 06:31:30

ⓒ 한겨레 (htt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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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08.12.04 14:17





































▲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자료사진)
ⓒ 권우성




한완상








김영삼 정부 시절 통일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을 지낸 한완상 전 부총리는 "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예수처럼 북한을 껴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교회 장로인 한 전 부총리는 2일 저서 <예수없는 예수교회>(김영사 펴냄) 출판 기념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같이 말하면서 대결·압박 위주의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적극적인 대북포용정책을 주문했다.





"부총리 시절 YS에게 '대북정책은 예수님답게 하자'고 조언"





한완상 전 부총리는 이날 위기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와 관련된 질문을 받은 뒤 "부총리나 장관을 지낸 사람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한 사람으로 얘기하겠다"며 김영삼 정부 시절에 있었던 일화를 언급했다.





"제가 14년 전인가 15년 전인가 통일부총리 할 때 각료로서 처음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를 했다. 아침 먹자고 해서 (청와대에) 갔더니 대통령이 '우리 정부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언론 등이 노태우 정부와 다름없다면서 6.5공화국이라고 비꼴 때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사뭇 진지한 질문을 받은 한 전 부총리는 "이제 숫자로 정부를 지칭하는 일은 끝내야 한다"며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는 김영삼 정부다. 미국을 보라. 아이젠하워 정부, 케네디 정부라고 하지 않나. 7공화국이니 8공화국이니 필요없다."





이어 김영삼 대통령이 한 전 부총리에게 대북정책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 물었다. 한 전 부총리의 답변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저도 교회 장로이고, 대통령도 교회 장로니까 대북정책은 예수님답게 하자.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자.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나. 북한이 우리의 주적으로 돼 있지만 북한을 껴안아야 한다.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은 14배나 차이난다. 우리에게 북한을 껴안을 수 있는 힘이 있다."






























▲ 한완상 전 부총리의 새 책 <예수없는 예수교회>.
ⓒ 김영사




한완상





이런 일화를 소개한 뒤 한 전 부총리는 "김영삼 대통령도 장로이고, 나도 장로이고, 이명박 대통령도 장로"라며 "그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도 지금처럼 북한을 적대하지 말고 적극 껴안으라는 우회적인 주문인 셈이다.








이날 출간된 한 전 부총리의 저서 <예수없는 예수교회>에도 마치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발언으로 들리는 대목이 있다.





"지난 60여년간 한국 개신교는 불행하게도, 너무나 불행하게도 종교적 근본주의라는 속옷에다 냉전 근본주의 신념이라는 겉옷을 덧입고 있습니다. 민족분단에서 비롯된 냉전 대결 상황에서 냉전 근본주의자들로 하여금 더욱 투철한 독선적 확신을 갖게 한 것이 바로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입니다.





그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 가장 불편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주적은 초전박살내야 하는 원수인데 그들을 사랑하라니 언어도단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산상설교는 실천할 수 없는 허튼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93년 취임사 부정한 YS의 발언, 믿을 수 없다"
































▲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자료사진)
ⓒ 권우성




한완상





또한 한 전 부총리는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했던 취임사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후회한 것과 관련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전 부총리는 "당시 제가 취임사 작성팀장을 했다"며 "김 전 대통령이 후회한다고 했던 그 부분이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비전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한 전 부총리는 "취임사를 쓸 때 거의 매일 같이 (취임사 원고를) 읽었다"며 "김 전 대통령도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등의 대목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한 전 부총리는 "그 보도를 듣고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가슴이 무너졌다"며 "오해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출간된 <예수없는 예수교회>에는 '역사적 예수'가 사라진 한국 교회를 향해 던지는 한 전 부총리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30년 전에 출간한 <저 낮은 곳을 향하여>와 <민중과 지식인>을 잇는 책이다.





한 전 부총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한국에 있는 등 양적 성장을 거듭 해왔는데 그렇게 성장한 만큼이나 왜 교회를 향한 비판이 거세게 나오고 있나?"라고 물은 뒤 "역사적 예수인 갈릴리 예수가 한국교회에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역사적 예수'란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공의의 새질서를 몸소 보여주었던 갈릴리 예수"를 가리킨다. 한 전 부총리는 "신화의 옷을 입은 교리의 그리스도"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역사적 예수'란 용어를 쓰고 있다.





한 전 부총리는 "교리의 그리스도만 있고 갈릴리 예수는 없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까워 나를 돌아보는 심정으로 쓴 고백서"라며 "<저 낮은 곳을 향하여>가 분노의 글이었다면 <예수없는 예수교회>는 가슴으로 썼다"고 말했다.





출판사측은 "목회자 없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시작한 새길교회에서 틈틈이 전했던 메시지 가운데 이 시대에 필요한 주제들을 모아 전면 수정하여 엮은 책"이라며 "특히 수많은 책들 가운데 처음으로 인세를 받는 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2008.12.02 19:46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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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1.11.21 11:36


http://www.youtube.com/user/TheJesusSeminar

마커스 보그 Speaking Christian 동영상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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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2.03.14 17:29


Pax Romana와 Pax Christus

(로마서 13:1-7)





2012년 3월 11일 주일예배

한완상 형제









1. 오늘의 카이로스 상황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의 색깔을 보며 자연의 일기변화는 알아보면서도 시대의 징조는 알아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 한 적이 있습니다(마태복음 16:2-3). 오늘의 예수따르미들도 21세기 이 새대의 징조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지배제도들은 세계도처에서 근본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한한 탐욕에 대해 세계인들은 두려움과 불신을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월 가(Wall Street)를 점령하려는 움직임이 전 세계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적하효과(trickling down effect)는 허울뿐일 뿐 실제로 경제적 양극화는 상존하기에 시장체제의 정당성 또한 더 거센 도전을 받고 있고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시장의 탐욕은 커져만 가는데 이 시장을 제대로 공정하게 관리해내지 못하는 국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국민은 국가의 공익성과 공공성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의 정치를 표방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해서도 국민과 시민들은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 않습니다.



쌍방향 통신매체를 자유롭게 활용하여 줄 안(on-line)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합의에 이르게 되면 줄 밖(off-line)에서 신속하게 집단행동을 거침없이 해내는 새로운 21세기 민중이 출현했습니다. 이들은 민주정치과정에 엄청난 힘을 직접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줄씨알입니다.



줄씨알은 20세기의 대중(mass)과 다릅니다. 20세기 대중은 이른바 즉자적 민중이지요. 허나 21세기 줄씨알은 대자적 민중입니다. 그들은 직접 모든 조직의 최상부층에게 창조적 대꾸를 할 수 있고, 줄 안팎에서 그들의 집단적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해냅니다. 이들은 모든 조직(국가에서 교회까지)의 운영을 투명하게 집행하도록 요구하며 감시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중요한 의견이 밑에서부터 민주적으로 위로 올라가도록 요구합니다. 버틈 엎(bottom-up)식 소통을 강조하며 톱 다운(top-down)식 소통과 운영을 거부하고 견제합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사회와 국가의 모든 수준에서 알차게 진행되기를 줄씨알들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나 권력기구의 책임자들이 교체가 되는 해입니다. 시장, 국가, 정당, 의회 모두가 정당성의 위기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터에 정치지도력이 폭넓게 교체될 시점이 바로 2012년입니다. 정말 카이로스(Kairos)의 때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을 지금, 여기에서 펼치려는 예수따르미들은 세상권세와 국가권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특히 지난 이천년간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 라는 로마서 13장 첫 부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 또는 재해석해야 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성서의 이 구절이야 말로 지난 이천년간 독재권력이 그토록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이 편지를 작성했던 사도 바울도 수구보수의 멍에를 그토록 오랫동안 억울하게 목에 매고 곤욕을 치루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편지를 이렇게 쓴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아직도 이 세상에서 힘쓰고 있는 권력자들이 그들의 권력이 정당성을 잃게 될수록, 성서의 이 구절에 더욱 매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바울의 신학적 의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밝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빛, 복음의 참 빛을 찾고 싶습니다.









2. 바울의 신학적 의도





로마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메시지가 어떤 상황(context)에서 쓰여 졌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C.E(common era) 50년 중반에 로마서가 작성된 것 같습니다. 클라우디우스(Claudius, 제위기간 41-54) 황제가 죽고, 10대의 자유분방한 네로(Nero, 제위기간 54-68)가 황제로 등극했지요.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들이 박해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일 베드로와 바울도 네로 폭정과 탄압으로 순교 당했지요.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영향아래 있던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여러 문제들 중) 로마 당국에 조세와 관세를 바치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하기야 이때보다 20여 년 전 거슬러 올라가 갈릴리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도 세금문제로 시험 받으신 적이 있었지요. 로마제국의 권력이 더욱 강팍해지고 황제 신학이 더욱 강요되던 초대교회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일한 그리스도, 유일한 메시아로 확신했던 초대 예수따르미들 (또는 그리스도 따르미들) 중에는 가짜 신인 황제 체제에 조세나 관세를 바치는 것을 꺼려하거나 단호히 거부하려는 열혈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당국에 대해 반세(反稅)운동을 펼치려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문제에 사도 바울도 직면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폭군 네로 지배 하에서 초대교회가 반세운동에 휘말리게 되면 추방이나 순교와 같은 가혹한 징벌을 면키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지혜가 절박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권세에 복종하라> <조세를 바쳐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의 껍데기만 볼 것이 아니라 이 표현 뒤에 있는 바울의 신학적 깊은 배려와 속뜻을 우리는 찾아 밝게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현재 성서에 기록된 로마서의 장과 절이 처음부터 바울이 그렇게 자기 편지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편지의 최초 필사본은 지금의 형태로 나눠지지 않았지요. 편지의 뜻을 중심으로 단락을 나눈다면(파라그래프로 나눈다면), 13장 바로 앞의 12장 14절로부터 13장 10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지 않고 13장 1절에서 7절까지를 따로 떼어서 보게 되면, 사도바울의 깊은 신학적 성찰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수구꼴통 같은 바울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그런데 12장 14절부터 13장 10절까지를 한 파라그래프로 보아 찬찬이 읽고 그 뜻을 되새겨 보세요.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바울은 갈릴리 예수의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음을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주후 50년 중반에 로마 교인들에게 적절하게 필요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적지 않은 성서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이 바울은 역사의 예수에 무관심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4복음서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발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 크게 변화를 겪게 된 예수의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을 토대로 재구성된 모습이라 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는 실물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하나님 아들 곧 그리스도일 뿐이기에 복음서의 예수 활동도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20세기 최고의 성서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영향력이 엄청 컸지요. 심지어 1980년대 중반부터 세계 언론의 각광을 받았던 미국 중심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도 기본적으로는 불트만의 제자들 이라 할 수 있죠. 4복음서에서 역사의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19%도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으니까요. 여하튼 예수와 바울 간에는 건너 뛰어 넘을 수 없는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바울의 복음 메시지 속에 갈릴리 예수의 목소리가 담겨 있음을 지적하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세미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온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과 보그(Marcus Borg, 1942-)가 그러하고, 한국인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신학자 김세윤 교수도 그러한 분 중 한 분이지요. (몇 달 전 김세윤 교수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는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바울의 이신칭의를 전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글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글로 당신의 뜻을 남기신 일이 전혀 없었기에, 대신 그의 육성을 영의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억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전승된 목소리지요. 이제 바울의 로마서신에서 갈릴리 예수님의 그 정다운 목소리를 들어 보기로 합시다.









3. 바울의 글에서 예수님의 육성을





먼저 바울은 로마서 12장 14절에서 이렇게 로마 교인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여러분들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2:14)





바울의 이 편지글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다음과 같은 외침과 견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사랑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여기서 여러분은 바울의 편지 글에서 갈릴리 예수, 특히 산 위에서 외치시는 예수의 육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절규야 말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아니던가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신학에 대한 근본적 대안으로서의 예수의 하나님나라 신학이 아니던가요!

무시무시한 무력으로 모든 원수들을 섬멸시키고 난 뒤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마당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바로 Pax Romana 깃발이 아니었던가요!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외침은 바로 이 같은 피 묻은 깃발을 내리게 하면서 인간과 구조를 함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대안적 복음의 소리가 아니던가요!

이런 기쁜 소식의 외침이야말로 뿌리로 부터의 변화를 호소하는 Radical한 기쁜 소리가 아니던가요!



예수에게는 원수란 사람일 뿐이요, 이웃일 뿐이지요. 그래서 원수란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웃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원수 사랑의 외침은 바보의 넋두리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수준 높은 바보의 넋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동적이지요. 나는 상상해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4절의 말씀을 편지에 쓸 때 20여 년 전 갈릴리 호수가 언덕에서 “그러나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라는 예수님의 육성을 그의 영의 귀를 활짝 열고서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눈앞에 네로 황제의 폭압적 박해를 느끼면서 말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12장 7절의 글과 13장 2절의 글을 예수님의 명령(마태복음 5:39)과 연결시켜 봅시다. 바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로마서 12:17)



그리고 바울은 13장 2절에서 권세에 거역한다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하나님 나라는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설파하시면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정말 바보같은 권고 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마태복음 5:29)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의 <거역한다>는 말과 예수님의 <맞서다>는 말입니다. 같은 명령의 뜻입니다. 바울의 <거역한다> 라는 단어의 그리스어는 tasso인데, 이것은 군대의 전투 행위와 연관된 동작을 뜻합니다. 즉 싸우기 위해 전투대형을 이룬다 라든지, 전투를 위한 군인의 배치와 포진을 해낸다는 뜻이지요. 이 그리스어가 영어의 <tactics>의 어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거역> 이란 뜻은 단순한 반대나 반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력을 사용하는 군대식 반항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13장 2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야 될 것 같습니다.





<조세와 관세를 요구하는 로마권세에 대해 군대식 무력 전술로 대항하지 말라.>





이런 바울의 권고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라는 예수님의 육성을 영적으로 듣고 한 권고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바울은 한결같이 제도 폭력 또는 폭력적 제도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전술을 거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피 흘리는 폭력대응 자체가 이미 악한 세력에 굴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단코 악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악순환만 거칠게 작동하게 되고 억울한 피흘림은 계속 될 뿐이지요. 진실로 악을 이기려면 선함으로만 이겨야 합니다. 곧 사랑의 힘, 질 수 밖에 없더라도 그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이겨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처절한 패배와 부활의 승리 사이의 긴장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과 바울의 만남 한 가지만 더 언급해 봅시다.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명령이 바울의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까지에서 아름답게 정리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바울의 평범한 표현인 <남을 사랑하는 사람>을 좀 더 명백하게 드러내어 이렇게 옮기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되는 평화야 말로 바로 하나님의 평화요, Pax Christus의 진실입니다.

여기서 가짜 평화인 Pax Romana와 진정한 평화인 Pax Christus 간의 본질적 차이가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바울의 로마서 서신에서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향기, 그것도 산상수훈의 고결한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만 바울의 속 뜻, 바울의 radical한 신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 향기는 바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향기요 Pax Romana를 대치 할 수 있는 변혁의 향기입니다.





이제 말씀증거를 정리하면서 네 가지 진실에 새삼 주목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긴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독재자들이 가장 애용했던 성서 구절이 바로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치적 고초를 겪었을 때 군사정부가 이 구절로 여러 번 괴롭혔습니다. 해방 후 오늘까지 우리의 역사를 보면 국가권력이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청와대나 조찬 기도회로 초청하면, 이들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독재 권력을 주님의 이름으로, 성서의 여러 말씀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특히 로마서 13장의 일부 말씀으로 권력을 정당화 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우리 한국 교회현실에 대해 사도 바울께서 지금 살아 계신다면 심히 불쾌해 하리라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사도 바울의 목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메어둔 무거운 권력 축복이라는 멍에를 우리는 벗겨 주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의 미명아래 높은 보수주의 감옥에 가둬둔 사도 바울을 이제 해방시켜야 합니다.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곧 사랑 나라(Love-dom)의 신학이기도 한데 이 신학을 보수주의 신학의 감옥에 그렇게 오랫동안 가둬두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바울이 오해받기 쉬운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편지글을 쓰게 된 동기를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이해해야 합니다. 천방지축처럼 놀았던 네로 황제의 탄압 속에서 로마교회의 반세운동이 자칫 피비린내 나는 순교의 참상으로 비화될 것을 바울은 심히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반세 운동이 초대 교인들이 목숨을 걸만한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지요. 정말 목숨을 걸 주요한 사안이 따로 있다고 믿었지요. 그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가 1940년에 겪었던 경험에서 다시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1940년 6월 17일 그는 카페에서 프랑스 항복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카페 안에 히틀러 정권의 하수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 항복 소식에 독일인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데 카페 안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이때 본 훼퍼 목사는 이렇게 외쳤답니다. “여러분, 당신의 팔을 들어 올리시오… 당신들은 제 정신이요. 우리는 지금 매우 다른 중요한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지 그딴 경례 따위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경례거부 행위로 순교당하는 어리석은 짓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 훼퍼 목사는 1세기의 사도 바울과 역지사지 하고 역지감지 한듯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바울사도의 더 깊은 속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반세운동으로 순교당하는 것도 바울에겐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를 더욱 더 가슴 아프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로마체제에 대해 군대식 무력대응을 함으로써 피살되는 아픔도 바울에게는 컸지만, 그를 더 아프게 한 것은 상대방을 살해하는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악을 악으로 대응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끝장난 것이지요. 다만 보복적 악순환이 거칠게 작동하면서 사랑은 증오로 대치되고, 정의는 보복으로 추악하게 변질 되고 말지요. Pax Christus는 사라지게 되고 Pax Romana는 피비린내 나는 승리주의 깃발아래 더욱 극성을 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더 걱정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골고다로 우아하게 십자가 지시고 처참한 패배의 길로 한 발짝 한 발짝 씩 나아가신 예수님을 가슴 깊이 모시면서 바울의 편지를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Pax Romana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Pax Christus의 승리를 뜻한다는 진실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괴로워하는 예수님에게 무자비하게 창을 던진 로마의 권력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기도를 드렸지요. 그런데 이 기도의 순간 Pax Romana는 그 뿌리로부터 흔들리게 되고 무너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부활로 Pax Christus는 참 평화의 빛을 세상과 역사 속에서 영원히 비추게 되지요.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밝아 올 부활의 빛을 바라면서, 더욱 용기를 내어 Pax Christus의 빛과 그 영광을 2012년 우리 국민과 민족 그리고 온 세계인들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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