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SNU Open Repository and Archive: 『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과 그 의미

SNU Open Repository and Archive: 『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과 그 의미


『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과 그 의미
Content and Meaning of 「 The Truth Meaning of Lord of Heav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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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송영배
Issue Date
1995
Publisher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Citation
철학사상, Vol.05, pp. 213-241
Keywords
마테오 리치; 아퀴나스; 인간론; 윤리학; 천주실의 평가
Abstract
『천주실의』의 저자는 명말(明末)에 중국에 와서 중국문화에 적응하여 로마의 카톨릭교회[天主敎]의 도리를 본격적으로 전교하여 최초로 성공한 이탈리아의 마체레타(Macereta)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이다. 이런 그의 중국전교의 시발점은 예수회의 동방전교의 시발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베리오는 1541년에 인도의 폴투갈 식민지인 고아(Goa)에 왔으며 인도의 토착민들에게 열심히 기독교를 전교하였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진 그는, 당시 폴투갈 상인들로 부터 얻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정보에 따라서, 우선 일본의 전교에 직접 나섰다.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한 이래 그는 많은 전교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도착에서부터 그를 늘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음과 같은 일본인들의 반박이였다. 기독교의 교리는 참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중국인들이 분명히 오늘날까지도 모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중국문화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베리오는, 이들 "서양의 구도승들과 상인들이 13세기 중엽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이래 계속 꿈꾸어 온 기독교 전세계군주국(Universal Monarch)이나 천년왕국(Millennial Kingdom)의 추구"의 마지막 완성은, 결국 이들 중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전교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같은 고급문화를 상대로 하는 전교사업에는 높은 학식과 인덕이 겸비된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1552년 중국대륙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후임이 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는 그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어 우선, 고아로부터 루지에리(Michele 꼏햗갸 1543-1607)를 1579년 마카오로 불렀다. 그로 하여금 삼년여에 걸쳐서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배우게 하면서 중국인들과의 몇가지 예비적인 접촉시도를 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마침 당시 고아에 와있던 젊은 마테오 리치신부를 마카오로 불러서(1582.8.7), 이 둘로 하여금 중국전교사업을 맡게 하였다. 이런 교섭의 결과, 루지에리와 리치는 기독교 사상을 전교하기 위하여 중국의 광동(廣東)성 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1583.9.10).
ISSN
1226-7007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0990
Files in This Item:
PDFphil_thought_v05_213.pdf
4.80 MB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Philosophy (철학과)철학사상철학사상 05호 (1995)


『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과 그 의미
Content and Meaning of 「 The Truth Meaning of Lord of Heaven 」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송영배Issue Date1995Publisher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Citation철학사상, Vol.05, pp. 213-241Keywords마테오 리치; 아퀴나스; 인간론; 윤리학; 천주실의 평가Abstract『천주실의』의 저자는 명말(明末)에 중국에 와서 중국문화에 적응하여 로마의 카톨릭교회[天主敎]의 도리를 본격적으로 전교하여 최초로 성공한 이탈리아의 마체레타(Macereta)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이다. 이런 그의 중국전교의 시발점은 예수회의 동방전교의 시발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베리오는 1541년에 인도의 폴투갈 식민지인 고아(Goa)에 왔으며 인도의 토착민들에게 열심히 기독교를 전교하였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진 그는, 당시 폴투갈 상인들로 부터 얻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정보에 따라서, 우선 일본의 전교에 직접 나섰다.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한 이래 그는 많은 전교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도착에서부터 그를 늘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음과 같은 일본인들의 반박이였다. 기독교의 교리는 참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중국인들이 분명히 오늘날까지도 모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중국문화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베리오는, 이들 "서양의 구도승들과 상인들이 13세기 중엽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이래 계속 꿈꾸어 온 기독교 전세계군주국(Universal Monarch)이나 천년왕국(Millennial Kingdom)의 추구"의 마지막 완성은, 결국 이들 중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전교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같은 고급문화를 상대로 하는 전교사업에는 높은 학식과 인덕이 겸비된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1552년 중국대륙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후임이 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는 그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어 우선, 고아로부터 루지에리(Michele 꼏햗갸 1543-1607)를 1579년 마카오로 불렀다. 그로 하여금 삼년여에 걸쳐서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배우게 하면서 중국인들과의 몇가지 예비적인 접촉시도를 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마침 당시 고아에 와있던 젊은 마테오 리치신부를 마카오로 불러서(1582.8.7), 이 둘로 하여금 중국전교사업을 맡게 하였다. 이런 교섭의 결과, 루지에리와 리치는 기독교 사상을 전교하기 위하여 중국의 광동(廣東)성 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1583.9.10).ISSN1226-7007LanguageKoreanURIhttps://hdl.handle.net/10371/10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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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Philosophy (철학과)철학사상철학사상 05호 (1995)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아퀴나스의 목적인과 능동인의 관계를 중심으로-*1)
양 명 수
【주제분류】윤리학, 형이상학
【주요어】리, 천주, 능동인, 목적인, 초월, 내재
【요약문】아퀴나스나 주희는 존재의 이유가 존재보다 앞선다고 하는 중세
의 사유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천주나
리는 모두 목적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도덕적 자기완성을 인간
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목적을 실현하는 힘이 어디서 오느
냐에 따라서 천주와 리가 달라진다. 능동인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봐
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창조론과 도덕에서의 은총론을 결정짓는 것은
능동인이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는 이념으로 통치할 뿐 아니라 개별 현상에
직접 개입함으로 통치한다. 그처럼 능동인이 사물 밖의 초월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천주는 기본적으로 초월자다. 초월자이지만, 형상인으로 또는 능력
으로 내재한다. 반면에 성리학에서 리는 보편적 표준으로 초월적이지만, 각
구일극(各具一極)으로 내재해 있으며, 능동인은 리의 몫이 아니라 기의 몫
이다. 그래서 리는 이념으로 또는 천명으로 통치할 뿐이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론적 실체가 아니다. 천주는 목적이지만 목표가 될 수 없다
면, 성리학의 리는 성인관(聖人觀)에 기초해서 목적이자 목표가 된다.
* 이 논문은 철학 사상 28호에 발표한 글, 천주실의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리와 천주의 개념을 중심으로 의 후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216 논문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네 가지를 사물의 생성 변화의
원인으로 본다. 그 원인이란 질료인(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능동인
(能動因), 목적인(目的因)이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원인’이라고 하면
‘까닭’이 먼저 생각난다. 생성의 원인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
성되는 까닭을 말하는 것 같다. 생성의 ‘까닭’이란 말하자면 존재의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원인보다도 목적인이 우선한다
면, 목적이 있어야 존재가 있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 명제는 아퀴
나스 신학의 기본 구조를 잘 보여준다.
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 신학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의 천주를 중
국인에게 설득하려고 했다.1) 그는 천주실의 에서 천주가 모든 피조
물의 덕성을 빼어나게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분이요, 가장 완전하고
돈독해서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2) 이는 기독교의 하느님이 ‘최고선’
으로 이해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 개념과 선이라는 도덕적
개념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실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하느님은
하느님이 된다고 봐야 한다. 도덕적 완전성이란 중세 철학에서 인간
의 목적이기도 한데, 바로 그 도덕성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목적이 만물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면
선하신 하느님은 우주 전체의 목적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
고 주재하는 천주의 능력도, 세상의 존재 이유가 되시는 하느님의 덕
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생성론인 창조론은 독
1) 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가 아퀴나스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는 점에 일치한다. 다만 천주실의 의 바탕이 된 토미즘이 전통적 토미즘
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선교지에 대한 개방적 신학의 필요성과 르네상
스 인문주의 영향을 입은 스페인 토미즘 또는 제 2의 토미즘이라는 연구
가 있다. 김상근,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나타난 16세기 후반 예수회
교과과정과 예수회 토미즘의 영향 , 한국기독교신학논총 40집(서울: 한국
기독교학회, 2005). 그러나 제 2의 토미즘이라는 것도 결국 아퀴나스 사상
에 들어 있던 자연계시의 주장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며, 여전히 아퀴나스
신학 안에 있는 것임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어느 것은 아랫것의 덕성을 빼어나게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천주께서
만물의 본성을 자기 속에 자지고 계시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2-12, 송영배 외 역(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p.9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17
특한 도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마테오 리치는 만반의 이치가 하느님
의 덕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함으로써,3) 세상의 조화와 운행이 도
덕적 선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창조와 주
재의 능력이 도덕성의 문제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천주와 성리학의 리는 만물의 목적인으로서 세상의
조화와 운행의 주재자다.4) 그런데 주재의 핵심은 도덕 행위의 주체
문제다. 우주론의 핵심은 도덕론이다. 그런데 목적이 직접 주재하느냐에
따라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되는지가 결정된다. 논란이 많은 리의
능동성 문제도 결국 그 문제다.
아퀴나스 신학이나 성리학이나 모두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철학
적 노력으로서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론이란 헤
겔식의 역사적이고 수평적인 텔로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자
기완성의 목적을 의미한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하느님은 만물의 목적
인으로 설명되고, 성리학의 리(理)도 만물의 궁극적 표준으로서 목적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뒤에서 보듯이 리는 목적이기 보다는
목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리학은 뒤에서 보듯이5)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 목적
인의 모습이 있다고 할 때, 그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되느냐는 문
제에서 아퀴나스 신학과 성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퀴나
스에게서는 만물의 형상인이자 목적인인 하느님이 동시에 능동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능동인이나 운동인의 문제가 자연학에서 제기되었지만,
그것이 목적인과 연결되면 도덕 실현의 원동력에 관한 문제가 된다.
3) “천주의 본성은…그 정묘한 덕성 안에 만반의 이치를 내포하고 모든 만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 능력은 온갖 것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天主性…以其精德 包萬般之理 含衆物之性 其能無所不備也) 천주실의 2-12, p.96.
4) 정이(程頤)가 상제라는 이름을 주재하는 태극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리한 이
후에, 주희나 퇴계 이후 조선 성리학자들은 태극이나 리가 주재한다는 표현
를 받아들인다. 참조. 이광호, 상제관을 중심으로 본 유학과 기독교의 만남 ,
유학사상연구 제 19집(서울: 한국유교학회, 2003).
5) 주 25의 본문.
218 논문
다시 말해서 선의 실현을 주재하는 주체가 누구냐의 문제가 된다. 아
퀴나스의 자연학은 형이상학을 말하기 위한 것이요, 생성의 운동인이
란 실제로는 선 실현의 능동인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Ⅰ. 목적인의 우선성과 능동인과의 관계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인이란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를 가리킨다. 다
시 말하면, ‘왜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존재 이유는 존재의 원인 중에
서 가장 높은 위치에 속한다. 이미 자연의 원리 에서 아퀴나스는 목
적인(causa finalis)을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했다.6) 작용자(operans)
또는 능동자(effeciens)는 목적 없이 행위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점은
신학대전 에서 다시 확인된다. “목적인의 원인성은 제일 먼저 것(prima)
이다. 그 이유는 능동자가 작용하는 것은 목적 때문이 아니면 작용하
지 않으며, 능동자에 의해 질료는 형상에로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따
라서 목적은 원인들의 원인(causa causarum)이라고 불리운다.”7) 모든
존재는 존재 이유로서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목적이란 무
엇인가? 그것은 ‘선’이다.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이란 모든 사물이 욕구
하는 것인데, 그것은 선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8) 선이란
좋음을 말하는 데, 모든 사물은 좋은 것을 바라게 되어 있다. 좋은
것은 쾌락을 주는 것(delectabilia)이 있고, 유익한 것(utile)이 있고, 그
자체로 선한 것(honestum)이 있다.9) 그런데 모든 욕구 운동의 종점은
6)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김율 옮김(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5), p.71.
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 , Part1, Question 5, article 2 (앞으로는 1, 5,
2로 표기한다), 정의채 역(서울: 성 바오로 출판사, 1989), p.99. 신학대전 1
은 한국어 번역본의 권수를 가리킨다.
8) 아퀴나스에서 선이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하고(desiralble) 옳고(right) 아름다운(beautiful) 것을 통틀어 말한
다. 말하자면 존재의 완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류지황, 선과 악의
주체는 누구인가-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론 비교분석 ,
신앙과 학문 12권 1호(서울: 기독교학문연구소, 2007), p.126.
9) 신학대전 1 , 1, 5, 6, p.11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19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거기서 운동은 쉼(quies)을 얻는다. 그 자체
로 선한 것이란 덕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10) 물론 이것을
아퀴나스는 ‘완전’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도덕이란 하느님의 선하
심을 닮아 자기 완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
이 참사람이 되는 것이 도덕이다.
그리하여 아퀴나스의 신학은 도덕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이 그러
난다. 선이 존재의 목적이다. 그것은 천지 만물은 물론이고 하느님에게
도 적용된다. 창조자인 하느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
물을 창조했다.11) 그리고 천지 만물의 목적은 하느님의 선성이다.12)
흔히 신학에서 만물의 목적을 하느님이라고 할 때, 그 하느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최고선으로서 만물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의 자기완성과 연관된다. 만물은 하느님의 선하신 완전성을
목적으로 삼음으로 그의 유사(similitudo)인 자기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의도한다.13) 만물의 목적은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자기완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이 자기완성에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중세의 신학자 아
퀴나스에게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기의 고유한 완성을 욕구함으로써
하느님 자신을 욕구한다.”14) 그는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연 사
물들도 하느님을 목적으로 하여 욕구한다고 본다.15) 물론 인간이나 다른
10)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렇게 말한다. “덕이란…인간적 선 가운데 절정을 이
룬다.”( 신국론 , 19, 4, 3. 성염 역, 분도출판사, 2004, p.2151) 아퀴나스가
선을 욕구의 대상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임을 암
시하는 것이며, 자연신학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죄를 강조하는 개신교
전통에서 선은 좀처럼 욕구의 대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개신교 전통에
서 나온 칸트의 윤리에서 선은 그런 욕구로부터의 단절에서 발생한다. 그
리고 욕구의 대상이 선이면 선이란 주체 밖에 있게 되는 것인데, 칸트에
게서 선이란 주체의 의지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칸트가 중세의 존재론에
서 벗어난 근대적인 주체 철학자임을 말해준다.
11)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6 , 1, 44, 4, 정의채 역(서울: 바오로 딸, 1999), p.79.
12) 신학대전 6 , 1, 44, 4, p.79.
13) 같은 곳.
14) 신학대전 1 , 1, 6, 1, p.113.
15) 참조. 신학대전 6 , 1, 44, 4, pp.75, 79. 신학대전 16 , 2, 1, 2, 정의채 역(서울:
220 논문
피조물의 자기완성이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때, 하느님
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란 도달할 목표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
로서, 모든 사물이 그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
에서 목적인을 ‘爲者’로 표현한 것16)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목적이요, 인간의 자기완성은 목표다.17)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 도덕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그가 능동인을
선의 능동성으로 파악하는 데서 분명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원인
주는 데 있어서는 첫째로 능동자를 움직이는 선과 목적이 발견되고
둘째로는 형상에로 움직이는 능동자의 행동이, 셋째로는 형상이 이루어
진다.”18) 목적인이 능동인보다 앞선다는 것은, “능동자를 움직이는 선”
을 가리킨다. 이것은 만물의 목적인 선이 자기 확산적이라고 믿는 것
이며, 능동자의 운동도 선의 자기확산의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것을 가리켜 아퀴나스는 “목적이 움직여준다는 것”19)이라고 한다. 하
느님은 제일 능동인이요 운동인으로서 세상 만물을 만들어냈지만, 하
느님으로 하여금 제일 능동인이 되게 한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이다.
선함을 전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목적이 창조 행위를 일으켰다. 하
느님은 모든 사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분으로서 첫 행동자(primum agens)
다. “목적이 움직여준다”는 것은 그 말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이유가
존재에 앞선다. 그것을 아퀴나스는 “원인 주는 데 있어서(in causando)
선은 유(有, ens)에 선행한다”20)고 한다.
물론 존재 또는 유는 개념상 선에 앞선다. 다시 말해 처음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존재다. “그 자체로 확실한 것”이 아닌 “우리에게 확
바오로 딸, 2000), p.69.
16) 천주실의 , 1-6, p.58.
17)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2-1부에서 인생의 목적을 행복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행복은 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자기완성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런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 유래한다.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탁월성
(덕)에 따르는 활동이고, 그 반대의 활동은 불행에 결정적이다.”(아리스토텔
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이창우 외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8), p.40.
18) 신학대전 1 , 1, 5, 4, pp.103, 104.
19) 신학대전 1 , 1, 5, 5, p.104.
20) 신학대전 1 , 1, 5, 2, p.9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1
실한 것”은 존재다. 그렇게 보면 능동인이 목적인에 앞선다. 현실적
존재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을 이끄는 작용 또는 운동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학의 영역에서 볼 때 그렇다.21) 그러나 형이상
학의 관점에서 보면 선이 존재에 앞선다. 이 말은 존재의 목적이 존재
에 앞선다는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이 중세의 목적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존재자는 선을 실현하기 위
해 있다. 최고선은 존재 자체인 하느님이므로, 결국 존재는 하느님을
위해 있다는 말로 귀결된다. 아퀴나스에게서 존재의 문제는 이 땅의
존재자들 곧 제일 실체로부터 시작되지만, 선의 문제는 궁극적인 것
곧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일 실체는 단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
만 단적으로 선하지는 않다. “선은 욕구될 만한 것인 완전의 이유
(ratio perfecti)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궁극의 이유(ratio ultimi)를 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완전한 것이 단적으로 선(bonum
ultimi)이라 불리운다.”22) 궁극적으로 완전한 것 곧 초월자로부터 세상
만물이 생겼다고 함으로써, 선에서 존재가 생긴 것으로 말하려는 것이
다. 물론 하느님에게서는 존재와 선은 완벽히 일치하지만, 피조물의
존재는 그 존재 이유 곧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23)는 유명한 선언도 그처럼 선에서 존재
가 나왔다는 것 또는 존재의 목적이 존재에 앞선다는 관념을 반영하
는 명제다.
만물의 생성 변화를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을 생각한다면 능동인 또
는 운동인을 찾게 된다. 만물의 생성 변화란 변화요 운동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변화의 운동을 관찰하는 데서 생긴 것이 아니
라, 아퀴나스의 신학이나 성리학이나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까닭을 묻
21) 이 문제를 자연의 원리들 에서는, 능동자는 생성의 방식에서 앞서고 목적
은 실체와 완성의 방식에서 앞선다고 한다. 목적이 없는 운동은 없다. 형상
과 질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어서, 형상은 질료보다 완성에서 앞서고, 질
료는 형상보다 생성과 시간에서 앞선다고 말한다. 자연의 원리들 , p.75.
22) 신학대전 1 , 1, 5, 1, p.96.
23) “어떤 것이 유인한 그것은 선인 것이 명백하다.” 신학대전 1 , 1, 5, 1, p.95.
222 논문
는 데서 생긴 것이다. 거기서는 목적인이 중요시 된다. 재미있는 것은
아퀴나스와 무관하게 퇴계 사상을 연구한 윤사순 교수가 태극의 근원
됨을 두고 ‘원인’과 ‘이유’를 구분해서 생각한다는 점이다. 윤 교수의
의도를 볼 때 원인은 생성 원인과 관련된 우주론적 개념이고, 이유는
당위와 관련된 도덕론적 개념이다.24) 그러한 구분을 아퀴나스가 사용
하는 네 가지 원인과 관련시켜 보면, 능동인과 목적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리학의 태극은 궁극적인 것으로서, 인과 관계를 따
른 ‘원인’이라기보다는 만물이 존재하는 의미를 정해주는 ‘이유’이며,
따라서 능동인이 아니라 목적인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25)
주희나 퇴계가, 이치로 볼 때 사물이 없어도 사물의 리는 있었다고
하는 것이나, 리가 기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존재보다 존재의 이유가
먼저 있었다는 목적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사유 방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리는 순선(純善)이요 완전한 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결국
아퀴나스의 하느님이 최고선으로서 사물의 목적이 되듯이, 리 역시
최고선으로 사물의 목적인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주희나 퇴계가
리를 인의예지의 덕이라고 볼 때, 만물은 인의예지의 덕을 실현하기
위해 있다. 인(仁)이란 생의(生意)이니, 리가 만물의 목적이라는 것은
만물이 생생하게 살기 위해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것은 리를 만
물의 목적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과는
다름을 암시한다.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인은 사물 밖의 하느님으로서,
피조물은 그 하느님을 위해 있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리는 사물 안에
24) 원인은 필연 법칙에 적용되는 개념이고, 이유는 당위에 적용되는 개념이
라고 본다. 윤사순, 퇴계의 태극생양의관 , 아세아 연구 , (서울: 고려대
학교 아세아문제 연구소, 1969), 12권 3호, p.231 주11. 태극이나 리는 우
주론적이고 도덕적인 두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윤사순 교수가 말하는 원
인은 우주론적인 근원을 가리키고 이유는 가치론적이고 도덕적인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5) 윤사순 교수가 지적하는 퇴계의 태극생양의 해석의 문제점은, 퇴계의 태
극이 목적인일 뿐 아니라 동시에 능동인도 되는 데 따르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위의 글). 바로 그것이 퇴계 학설의 독창성인데, 그렇다고 태
극이 아퀴나스적인 의미에서의 능동인일 수는 없다. 여기서는 더 이상 논
하지 않겠다.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3
있으므로, 사물들이 그 밖의 누구를 위해 사는 그런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존재의 목적이라는 개념이 성리학에 썩 어울린
다고 할 수는 없다.26) 그러나 태극이 표준으로서 만물이 바라보는 궁
극이요, 기준점이 된다는 점에서 목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아퀴나스의 목적인은 사물의 욕구의 대상으로 설
명되고, 성리학의 목적인인 리는 천명(天命) 또는 당위 법칙으로 설명
되는 점도 다르다. 그것은 아퀴나스의 신학이 자연신학으로서 인간
욕구의 타락을 그리 강조하지 않기 때문인데, 만일 인간의 악의 성향
에 좀 더 주목한다면 인간이 바라보는 선이라는 목적은 당위의 측면
이 더 부각될 것이다. 아퀴나스에게서도 하느님은 욕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당위이고, 성리학에서도 태극은 당위이지만 동시에 욕구의 대
상이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의 하느님과 성리학의 리는 모두 인간
이 바라는 것이지만 도달하지 못해 당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윤 교수는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태극(各具一極) 또는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리(所具事物之理)는 표준으로서 사물의 생성 형식 또
는 본질을 뜻한다고 본다.27) 생성 형식이나 본질은 정확히 아퀴나스
가 말하는 형상인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리는 곧 형상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리는 목적인이면서 형상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이나 리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선으로서 되어야할 바의 기준이요,
도덕적 행위와 마음씀씀이의 표준이 된다. 사실 이데아론을 말한 플
라톤 이후 사물의 형상의 궁극은 선의 형상이므로, 그렇게 보아도 형
상인과 목적인은 일치한다. 풍우란(馮友蘭) 역시 리를 형상인과 목적
인으로 본다.28) 성리학은 도덕 형이상학으로서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중심으로 우주론을 전개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태극이나 리는 목적
인이나 형상인으로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
26) 송영배 교수는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
구심을 품는다. 송영배, 동서철학의 교섭과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 , p.28.
27) 윤사순, 위의 글, p.232.
28) 풍우란, 중국철학사 하 , (서울: 까치, 1999), p.541. 주26. 그는 질료인과
능동인을 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224 논문
그러나 리를 목적인과 형상인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능동인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리가 아퀴나스의 목적인이나 형상인과 꼭 일치하
는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와 성리학의 결정적인 차이는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된다면 목적인이 선의
실현의 주체가 된다. 흔히 능동인을 우주론적인 생성의 문제와 관련해
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선의 실현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기독교 신학
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하느
님은 능동인으로서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 직접 관여한다.29) 그런데 앞
에서 본대로 그 능동인을 능동인 되게 하는 것은 목적인이므로, 하느
님의 직접 섭리란 피조물에 선의 질서를 부여하고 그 생성 변화가 선의
원리를 따라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때 능동인은 선의 실현을 이끌
고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선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
간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주체적으로 선을 실현하
지만, 모든 선의 실현은 하느님의 직접 섭리에 따라 발생한다. “자유의지
의 행위 자체는 원인으로서의 하느님께 환원되는 것”30)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리학의 리는 사물의 존재 이유가 되지만, 능동인이 아니기 때
문에, 그 존재 이유대로 실행하는 원동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도덕의 실현에서 인간의 마음의 주재를 확고하게 지킨다.
퇴계의 성리학에서 논쟁점이 된 문제 곧 리동(理動)의 문제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리학은 리의 무조작(無造作)과 무정의(無
情意), 무위(無爲)를 주장함으로 리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말했
다. 물론 리를 소이연(所以然)이라고 할 때 리의 능동성을 완전히 배
29) 아퀴나스에게서 생성이란 질료가 새로운 형상을 입는 것이요, 잠재태가
현실태가 되는 것인데, “잠재태로 있는 것은 그 스스로 현실태로 옮겨갈
수 없다”( 자연의 원리들 , p.47). 이것이 아퀴나스 자연학의 가장 큰 전
제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모든 사물의 생성에는 어떤 사물의 형상을 잠
재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가는 작용자(operans)가 필요하다. 아퀴나스가
만물의 근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은 초월자다. 초월자 하느님은 사
물의 생성 변화 밖에서 그 변화의 능동인이 된다.
3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3 , 1, 22, 2, 정의채 역(서울: 바오로 딸, 2000), p.13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5
제하지는 않은 듯이 보이는 부분이 있어서 논란이 많다. 그러나 성리
학에서 능동성은 기본적으로 기(氣)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물리적
으로 운동은 기가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태극이나 리가 아퀴나스적인
의미의 능동인이 될 수 없다. 다만 소당연과 소이연이 일치한다고 함
으로써, 도덕적 당위를 우주의 운행 원리에서 끌어내려고 했으며, 그
래서 우주론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만물의 생성 조화와 세상사가
필연적인 도덕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함으로써, 도덕의 실현을 격려
하고 설득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퇴계 같은 경우에 소이연(所
以然)보다는 소당연(所當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데, 31)
그것은 주역의 자연의 원리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맹자의 인의예지
로 본 주희도 마찬가지다. 성리학이 도덕 형이상학일 뿐, 아퀴나스적
인 존재론에 관심이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성리학의
‘소이연’이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causa)과는 다른데,32) 그것은 결국
소이연이 결코 능동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리동(理動)에 앞서 고봉과의 논쟁에서 리발(理
發)을 말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리발은 도덕 실현에서 인간
의 주재를 약화시키고 리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여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가장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퇴계의 리발은 결국 율곡이
말한 대로 리의 무위성을 깨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고봉이 말한
대로 리가 정의(情意)가 있고 조작(造作)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
다. 그럴 경우의 문제점은 성리학이 신학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이
다. 리가 초월적 인격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퇴계는 도덕론
에 있어서의 리발 이후에 우주발생에서의 리동(理動) 그리고 일종의
인식론에서의 리도(理到)를 말함으로 리의 능동성을 일관되게 주장해
나갔다. 리의 능동성은 순선(順善)의 능동성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순
31) “궁극적으로 논한다면 소당연을 이치라고 하는 말이 보다 좋을 듯합니
다”(窮極論之 當然者 爲理之說 爲長) 이황, 국역 퇴계전서 7 (서울: 퇴계
학연구원, 2003), p.82. 退溪先生文集 25, 7. 鄭子中與奇明彦論學 有不合 以
書來問 考訂前言以答如左 .
32) 참조, 양명수, 천주실의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 철학사상 28호(서울: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2008), p.184.
226 논문
선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고(理發), 우주적 자기확산의 힘을 가지고 있
으며(理動), 진리 인식을 주도한다는 것(理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런데, 여기서 핵심은 리발 곧 도덕론이다. 리의 능동성이 도덕론에서
이해되면, 실제로는 인간 안의 도덕법이 마치 인간을 넘어 인간을 주
재하는 듯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의 악의 성향을 심각하게 인식할
때, 선을 이루는 것이 마치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으
로서, 칸트가 실천이성비판 에서 도덕법이 마치 인간을 끌고 가는 것
처럼 말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퇴계나 칸트에게서 그 도덕법은 인간
안의 것이며, 바깥의 초월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래서 칸트는 선의 실
현을 이성의 자기 동의라고 했고, 33) 퇴계는 리발을 인간이 도덕 주체
로서 참다운 주재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34) 그러므로 퇴계는 순선의
능동성을 통해 도덕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며, 우주 발생에서 아
퀴나스의 하느님과 같은 능동인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천지 창조를 주재하는 능동인 곧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모든 것
을 움직이는 제일 능동인의 개념이 없다. 물론 그가 태극을 가리켜 ‘고
요하나 움직이고 움직이나 고요하다’(靜而動 動而靜)고 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 면모를 태극에 부여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그것은 역시 우
주 발생론적 관심이 아니라 도덕적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퇴계의 철학에서 리는 목적인이나 형상인이 될 수는
있지만, 아퀴나스적인 의미에서의 능동인은 아니라는 얘기다.
퇴계나 주희의 성리학에서 목적인이 동시에 능동인이 될 수 없다
는 것은, 선의 실현의 주체가 결국 인간이라는 말이다. 퇴계의 리발
이나 리동은 선의 실현이 인간 자신을 넘어선 우주적 선의 힘에 의
해 이루어지는 측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리발이나 리동의 리
가 능동인이 될 수 없으므로 결국 선의 실현의 주체는 인간으로 귀
결된다. 그러나 아퀴나스에게서 목적인은 능동인이므로 목적인인 하
느님이 그 목적 달성을 스스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의 실현을 하느
33) I. Kant, 실천이성비판 , 백종현 옮김, (서울: 아카넷, 2004), p.183.
34)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참조. 양명수, 칸트의 동기론에 비추어 본 퇴계의 리발 ,
퇴계학보 123집(서울: 퇴계학연구원, 2008).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7
님이 주도한다. 능동인의 개념은 이처럼 도덕 실현의 주체 문제와 긴
밀하게 관련이 있으며, 제일 능동인이 제이 능동인을 창조하는 창조
론도 결국 인간의 선의 의지를 하느님이 주관하고 있음을 말하는 문
제로 연결된다. 그리고 창조론은 오히려 그러한 도덕론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Ⅱ. 내재(內在)의 차이
목적인과 능동인의 관계의 차이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성리학의 리
의 초월성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바로 내재의 차이를 가
져온다. 초월을 말하면 반드시 내재를 말하여야 하는데, 어떤 모습으
로든 내재 없는 초월자는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내재의 문제는 천주나 리라고 하는 초월자가 어떻게 만물
과 함께 하는지 또는 어떤 방식으로 만물 속에 있는지의 문제다.
천주실의 4권에는 이와 관련하여 중국선비와 마테오 리치의 깊이
있는 토론이 나온다. 초월자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 선비는 중국의 옛날 선비들이 “우주 만물의 본성은
모두 선하며 큰 이치를 가지고 있어서 다시는 바꿀 수 없음을 분명
하게 살폈습니다.”고 한다.35) 이것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이 선
한 본성을 갖고 있고 그것을 리(理)라고 한다는 얘기다. 즉 리는 만
물이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물
들이 크거나 극미한 차이는 있어도, 그것들의 본체는 하나의 몸이라
고 생각하였습니다.”고 한다.36) 수많은 사물들에 각각 들어 있는 성
(性)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럿이면서 하나인
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여럿은 하나고, 거꾸로 그 하나가 여럿을
낳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태극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가 여럿을 품고
35) 천주실의 4-7, p.190.
36) “物有巨微 其性一體”, 천주실의 4-7, p.190.
228 논문
있는 것이지만, 각구일극(各具一極)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여럿의 극이
각각 하나의 태극이다.
여럿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나 자연 사물이나 같은 리를 품
고 있다는 것으로서, 마테오 리치가 주장하는 존재의 위계질서를 사
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피조물들은 그 종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같은 성(性)을 지
니고 있을 수 없다. 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를 따라 식물과 동물을
각각 생혼(生魂)과 각혼(覺魂)이라고 하고, 사람은 그들과 달리 추리
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영혼(靈魂)이라고 분류하였다.37) 그러한
존재의 계층은 모든 피조물이 같은 리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성리학
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성리학도 인문주의로서 존재의 계층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아퀴나스 신학과 달리 모두 피조물이 동일한 리를 지
니고 있는데 서로 기질이 달라 리가 통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
것은 동식물과 인간의 본질(essentia)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서, 아퀴나스 신학과 다르다. 성리학에서 모든 피조물이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리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사실 앞에서 말했듯이 여럿에서 하나를 본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물에 들어 있는 본성이 모두 같다고 하면서
하나의 본성론이 나오는 것이고, 그 하나의 본성이 수많은 사물 속에
들어가 사물을 주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분수(分殊)에서 리일
(理一)을 보는 것이요, 하나의 리라는 보편자 또는 초월자를 말하더라
도 그 초월자가 철저하게 내재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말이다. 그 점
이 아퀴나스나 마테오 리치의 기독교 신학과 다르다.
리가 하나이면서 여럿인 것은 성리학의 특징이며 기독교의 천주와
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것은 초월적 리가 사물 속에 일일이 내
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래서 중국 선비는 이렇게 말한다.
“천주이신 상제는 바로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여, 만물들과 더불어 하
나가 된다.”38) 이것은 기독교의 천주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말하는
37) 천주실의 5-4, p.24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29
유학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만일 천주라는 초월자를 인정한다 하더라
도, 그것은 철저하게 사물 안에서 그 사물과 하나가 되는 존재일 수밖
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성리학이 상제
라는 개념을 통해 주재하는 초월자를 말하더라도, 내재를 근거로 해서
초월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선한 덕성, 그 덕성이 나
를 주재하고 세상사를 주재해 나가는 것이요, 그 덕성은 나뿐 아니라
만물에 똑같이 들어 있는 덕성이요, 만물에 들어 있는 같은 덕성이므
로 하나의 보편적인 덕성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별자
를 넘어선 초월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덕성이 온 우
주를 지배하고 주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 선비의 주장
은, 천주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상당한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
한 것 같다. 그래서 이어 말하길, 타자를 해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한다.39) 만일 마테오 리치를 따라 인격신
을 인정하되, 그 초월성을 삭감하고 그것이 만물 안에 들어 있다고 하
면, 타자를 귀하게 여기고 선을 베풀도록 권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
다. 그러나 천주의 초월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선을 베푸는 일이 여전
히 인간의 당위로 남아 인간이 수행해야할 일로 남아 있을 뿐이고, 선
의 실행에 천주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마
테오 리치의 천주와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초월자의 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초월자의 초월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직
결되고, 그 초월은 결국 도덕 실행의 능동성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중국 선비의 주장을 반박한다. 천주가 사물
에 내재해서 사물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물주와 사물을 동등하게
보는 것으로써 교만이라고 본다. 땅위의 백성을 하늘의 상제와 동등
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40) 그는 천주와 사람이 한 몸이 아니라고
한다.41) 천주와 사물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 그는 천주의 성(性)
38) “天主上帝 卽在各物之內, 以與物爲一”, 천주실의 4-7, p.190.
39) “勿害物 以侮其內心之上帝焉”, 천주실의 4-7, p.190.
40) 천주실의 4-7, p.192.
41) “吾於天主 非共爲一體”, 천주실의 4-9, p.201.
230 논문
과 사물의 성(性)이 다르다고 본다.42) 마테오 리치로서는 만물이 존재
한다는 것은 그 만물보다 뛰어난 초월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피조물
의 선한 본성은 조물주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피조물은 또한 서로 해
치고 죽이는 일도 있다. 그러나 천주에게는 해치는 이치가 없으니,43)
피조물의 덕과 천주의 덕을 비교할 수 없다. 아퀴나스 식으로 말하자
면 서로 다른 천주와 사물의 성(性)은 형상을 가리키는것으로서, 천주
의 성(性)은 “본질에 의해”(per essentiam) 있는 것이고, 사물의 성은
그 본질에 참여함으로 있는 “참여된 형상”(forma participata)이다.44)
본질과 그 본질에 참여하는 자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거리가 있다. 완
전함과 불완전함의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마테오 리치는 천주와
사물이 한 몸일 수 없다고 한 것이요, 천주의 성과 사물의 성은 다르
다고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테오 리치가 볼 때, 만일 천주가 사
람 속에 있어 한 몸이 되었다면, 악이 없어야 한다. 사람이 천주와
한 몸이라면, 천주가 온전히 “한 몸의 주인”(一身之主)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선하신 천주의 뜻대로 되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사람이 사
욕(私欲)에 빠져 사행(邪行)을 저지르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이다.45) 그처럼 한 몸이 되었다고 하면,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악에 대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만물의 행동은
그 사물들에 달려 있지 않고 모두 천주가 한 일들”46)이 되기 때문이
다. 그는 묻는다. “소인들이 벽을 뚫고 담을 뛰어넘고 들에서 행인들
을 못 가게 막는 것도 그들의 죄가 아니고, 또한 천주들로 하여금 그
러한 죄를 짓게 한 것입니까?”47) 이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
님의 직접 섭리를 어떻게 양립시키느냐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 신학
에서도 논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생성 변화와 인간 의지의
42) 천주실의 4-9, p.202.
43) 천주실의 4-9, p.203.
44) 신학대전 1 , 1, 3, 8, p.82.
45) 천주실의 4-9, p.204.
46) 천주실의 4-9, p.205.
47) 천주실의 4-9, p.20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1
능동인이라면, 악한 행위까지도 하느님이 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주장은 고대 이래의 범신론이나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 이르기까
지 내재주의의 위험으로 여겨져 왔다. 선은 하느님이 한 것이지만,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이
후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반적 공식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하느님의
보편적 통치에는 저항할 수 없으나, 특수한 것에 의한 하느님의 통치
에는 저항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정리했다.48) 그것은 더
크게 보면 악의 문제에 대한 신정론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하
느님이 사물 안에 들어 있다는 내재주의의 표현을 꺼려온 것이 그리
스도교 전통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내재주의를 꺼려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과 사물이 모두 실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의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 속에 들어 있다면 둘 중의 하나는 그 실체성을 잃
게 된다.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와 거리를 두고 그 마음이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실체적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천
주가 사물 속에 들어 있어 사물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천주가 사물
의 성분이 되든지, 아니면 사물이 그 실체성을 잃고 천주의 실체성만
살아 있든지 하게 될 것이다. 마테오 리치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천주의 개념상 모순이다. 만물의 주인이 만물의 구성 성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에 천주의 실체성만 살아 있다는 것은
천주가 만물 속에서 “높으신 주님이 되어 한 몸의 권력을 마음대로
장악하고 있다”49)거나 또는 “만물은 껍데기와 같은 것이며 천주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마치 장인이 자기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50)과
같이 된다. 이처럼 천주와 사물의 관계를 장인과 도구의 관계로 보면,
그것은 천주의 주인됨을 한껏 높이는 것 같지만, 앞에서 본대로 사람
이 저지르는 악도 모두 하느님이 하는 것이 되어 선하신 하느님의
본성과 모순이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섭리하는 보편적 능동인
48) 장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서울: 동과서, 2003), p.89.
49) “如爲尊主而專握一身之柄”, 천주실의 4-9, p.204.
50) “物如軀殼, 天主使用之, 若匠者使用其器械”, 천주실의 4-9, p.205.
232 논문
으로서의 하느님이라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
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했을 때, 무엇보다도 악의 문제를 설명
할 수 없다. 마테오 리치의 주장을 보건대 대체로 그런 각도에서 설
명을 펼치는 것 같다. 악의 문제는 이 정도에서 논의를 마치자.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의 내재를 부인하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내재가 없는 초월자는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성리
학과 달리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내재성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는가? 마테오 리치는 먼저 하느님은 사물 밖의 존재
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물의 소이연을 말하는 방식에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음양은 사물 속에 있는 소이연이지만(在物之內分), 천주는 무엇
보다도 만물을 만든 운동인(causa efficiens)으로서 사물 밖에 있는 것
(在物之外分)이라고 한다.51) 앞에서 우리는 목적인과 운동인은 사물 밖
에 있는 것으로서 천주의 초월성을 밝히는 데 사용된 개념임을 보았다.
그러므로 초월자 천주가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집에 있
는 것처럼 사물의 장소에 있는 것일 수 없고, 손발이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천주가 사물의 부분일 수도 없으며, 흰 말 속의 흰 색처럼 천주
가 실체의 속성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52) 그렇다면 천주는 어떤 방식으
로 사물과 관계를 맺는가?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천주께서)
사물 속에 계신다는 것은 원인이 그 결과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것은 마치 햇빛이 그것에 의해 비추어진 수정 속에 있음이나, 불이 그
것에 의해 달구어진 발간 쇠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53) 아퀴나스는
불과 불타는 것의 비유를 들어 원인이 결과에 내재하는 예로 삼았다.54)
원인이 결과에 내재하는 것이란 천주가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원인으로
서 만물 안에 존재한다”55)는 말이다. 만물의 존재와 행위는 하느님의
51) “天主作物 爲其公作者 則在物之外分矣”, 천주실의 4-9, p.209.
52) 천주실의 4-9, p.209.
53) “惑在物 如所以然之在其已然 若日光之在其所照水晶焉 火在其所燒紅鐵焉”,
천주실의 4-9, p.209.
54) 신학대전 1 , 1, 8, 1, p.135.
55) 신학대전 1 , 1, 8, 1, p.13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3
작용이며, 존재와 행위의 원인으로서 하느님은, 존재하고 행위하는 만물
안에 존재한다. 아퀴나스는 말한다. “만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는 것은 하느님의 가장 큰 능력에 속한다. 따라서 자체 안에 하느님을
갖지 않을 만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56)
그러므로 만물의 생성 변화에 직접 개입하는, “다른 것 속의 작용의 근
원”57)이라는 의미에서 “그 능력으로” 만물 안에 있다. “능동자는 능력
에 의해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58)
앞에서 우리는 능동인이 사물 밖의 것이라고 했다. 성리학의 소이
연은 기본적으로 내재이지만,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사
물 밖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했다. 그것은 만물이 스스로 생성
변화하지 않고, 무에서 유를 만든 하느님의 영원한 창조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에서 기독교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능동인이 사물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
닭인가? 그것은, 만물의 능동인으로서의 하느님이 사물 안에서 모든
작용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초월자는 내재한다. 그러나 ‘초월자’가
내재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는 원인으로서 모든 존재에 공통되는 것
(communissium)이다. 그런 점에서 초월자는 사물에 내재하는데, 그것
은 원인으로서 그렇다. 피조물 밖의 존재가 피조물 안까지 영향과 작
용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이 작용인 또는 능동인이다. 그것을 가리켜
아퀴나스는 ‘능력에 의해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
의 능력이 사물들 속속들이 미친다는 의미다. 하느님은 자신의 지성
과 의지에 의해 피조물에게 내적으로 관여한다.59) 그래서 피조물들
맘대로 되는 것은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내재란 하느님
의 전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능동자가 능력으로 다른 것 ‘안
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밖에서 떠밀어 생성변화를 일으키
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작용은 타율이
56) 신학대전 1 , 1, 8, 1, p.136.
57) 신학대전 1 , 1, 8, 3, p.143.
58) 신학대전 1 , 1, 8, 3, p.143.
59) 장욱, 위의 책, p.88.
234 논문
아니라 자율적인 행위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인간의 자율을 희생시키
지 않고 일어나는 하느님의 작용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는 거꾸로 말
하면 인간이 자율적으로 하는 일도 알고 보면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한 행위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점은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60)
한편 능동자가 ‘능력으로’ 안에 있다는 것은, 안에 있다고 서로 실
체가 섞여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자기 실
체”(sua substantia)로서 만물 안에 있다.61) 또는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현존(praesentiam)을 가리키기 위해, “국왕이 실제로 모든 곳에 현존
하지 않을지라도 그 능력에 의해 전국에 있다고 한다”62)는 예를 든
다. 마테오 리치 역시 빛나는 수정이나 불붙은 쇠의 비유를 통해서
그 점을 말한다고 봐야 한다. 빛과 빛을 받아 빛나는 수정은 별개의
실체다. 그리고 불과 그 불이 달군 붉은 쇠는 별개의 실체다. 마테오
리치가 이 비유를 통해 말하려고 한 것은, 천주가 사물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천주와 사물은 별개라는 것이다. 내재를 말하더라도 천주와
사물 각각의 실체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각각의 실체성이 유지되어야
됨으로 각각의 본성도 따로따로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도 말한다. “빛
이 비록 수정에 있고 불이 비록 쇠 속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각
사물이나 각 물체는 본성이 뒤섞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63)
이처럼 천주와 사물의 각각의 실체성을 유지함으로 각각의 본성을
유지하는 까닭은, 하느님의 선한 본성과 현실의 악을 만드는 피조물
의 본성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인간에게 집중되
어 있는 문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을 닮아 본
래 선하다고 하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그 본래성을 잃고 타락했다고
60)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좋은 점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천주의 좋으심에 있는 것이지, 사람의 좋은 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愛
人之善緣 在天主之善 非在人之善). 천주실의 7-11, p.372. 사람의 선함은
그 사람의 선함이 아니라 천주의 선함이라는 얘기다.
61) 신학대전 1 , 1, 8, 3, p.143.
62) 신학대전 1 , 1, 8, 3, p.142.
63) ”如: 光雖在水晶 火雖在鐵 然而各物各體 本性不雜”, 천주실의 4-9, p.21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5
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가리켜 제 2의 본성이라고 한다. 본
래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모습과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그럼
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본성의 차이를 확대시켰는데, 그런 신학은
좀 변형되긴 했지만 아퀴나스와 마테오 리치에게도 이어졌다.64) 그래
서 마테오 리치는 인간이 물질성(形性)과 정신성(神性)이라고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수심(獸心)과 인심(人心) 두 마음을 지닌다고
한다.65) 신성은 하느님을 닮은 본래의 선한 모습이지만, 수성은 타락
하여 또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테오 리치는 1아
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람이 “물려받은 잘못에 따라서 본성의 온전함
을 계승할 수 없고 태어나면서 결함을 지닌 것”66)이라고 한다. 그것
을 제 2의 본성이라고 한다.67)
인간의 본래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성리학에
도 없지 않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분한다.
마치 두 개의 성이 있는 것처럼 되고, 그 점은 퇴계 같은 경우에 두드
러진다. 그렇지만 성리학에서 인간의 본성이라면 역시 본연지성을 가
리킬 뿐이고, 기질지성은 세상에 살면서 생긴 악습으로서 경계의 대상
이 되지만 인간의 선한 본성을 완전히 없앨 정도로 여겨지지는 않는
다. 그래서 선한 초월자를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천주실의
에서 중국선비가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들 역시 지극한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 것이나,68) 성인관을 내세워 “하느님 혼자서 스스로 짓고 스
스로 세워서 지극한 통치에 이르렀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69)고 하면서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천주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
64) 인간의 타락에 관해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완전한 타락을 말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보다는 타락의 심각성을 인정한다
고 봐야한다.
65) “그렇다면 사람은 또한 두 가지 본성을 지닌 것입니다. 그 하나는 물질성
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성입니다.”(則亦有二性 一乃形性 一乃神性也) 천주
실의 3-5, p.130.
66) “則爲其子孫者 沿其遺累 不淂承性之全 生而帶疵”, 천주실의 8-6, p.421.
67) “人所已習 可謂第二性”, 천주실의 8-6, p.422.
68) “하느님의 덕은 진실로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 역시 지극한 덕을 갖
추고 있는 것입니다.”(上帝之德固厚 而吾人亦具有至德) 천주실의 4-8, p.193.
236 논문
으로 보려는 태도70)는 그러한 성리학적 인간관에서 나온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와 사물의 본성이 섞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
주가 만물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고 한다.71) 여기서 말하는 천주와
사물간의 불상잡 불상리(不相雜 不相離)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와
기의 불상잡 불상리와는 다르다. 리는 기본적으로 기를 떠나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리가 기 속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만, 천주가
사물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천주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리의 무정의 무조작(無情意 無造作)은 천주에게서 부정된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의지로 사물을 내고 보존한다.72) 그래서 은총이
다. “은총만이 사물 안에 하느님을 존재케 하는 독특한 양식을 이룬
다.”73) 천주는 무에서 유를 만든 창조주로 믿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사물 밖의 천주가 사물을 떠나지 않는 것일
뿐이며, 사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떠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74)
그리고 리는 리일분수(理一分殊)로서 모든 사물에 들어 있는 본성이
지만, 천주는 오직 한 분으로서 모든 사물의 본성이 아니며, 사물의
본성과 별개의 본성을 가진다. 다만 사물들이 천주의 본성에 참여할
뿐이다. 그 본성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만물 안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은 그 본성의 탁월성으로 말미암아 만물 위에 있다.”75) “만물
위에 있음”, 그것은 초월성을 가리킨다.
69) “未聞 蔑先聖 而上帝自作自樹 以臻至治”, 천주실의 4-8, p.193.
70) “方寸間 儼居天主”, 천주실의 4-8, p.194.
71) “但光可離水晶 天主不可離物”, 천주실의 4-9, p.210.
72) 마테오 리치는 리에는 의지가 없고, 하느님은 만물을 내고자 하는 의욕과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천주실의 2-8, p.89). 천주의 주재는 그처럼 의지
문제와 연결된다. “발생하는 모든 일들의 작용인들치고 의지적 원인들로
귀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5, 9, 4, p.553.
73) 신학대전 1 , 1, 8, 3, p.143.
74) 이처럼 하느님의 자유의지와 은총을 강조하면, 세계의 존재는 우연이 된다. 참
조. 서병창, 신 안에서 자립적인 인간 (서울: 동과서, 2002), p.164 이하. 양태
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다섯 가지 길과 그것의 형이상학적
구조 ,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35집(서울: 한국현상학회, 2007), pp.123, 124. 현
대 신학은 이 점을 수정하려고 했다.
75) 신학대전 1 , 1, 8, 1, p.136.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7
그러므로 하느님의 초월성이란 선하신 하느님과 그렇지 못한 피조
물 특히 인간의 차이를 염두에 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존재 자체라고 해서 완전한 존재로 보는 까닭도, 그 덕의 완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을 최고의 개체(maximum
individium)로 봄으로,76) 피조물과 별개의 실체로 보는 것 역시 마찬
가지 발상이다. 하느님을 개체요 실체로 보는 것은 실체인 피조물과
근본적인 거리를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그 거리란 바로 덕성의 거리
다. 하느님의 능력이 피조물 속속들이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면 하느
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사물이 하느
님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함은 본성과 은총의 비유사성 때문에 그런 것
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그 본성의 탁월성 때문에 만물 위에 있는
것과 같다.”77) 하느님과 피조물은 그 덕성이 다르고, 그 다름이 둘 사
이의 떨어져 있음을 만들고, 떨어져 있음이 개체 곧 실체 개념을 만드
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다름과 떨어져 있음은 결
국 위에 있음이다. 마테오 리치가 하느님이 사물 안에서 사물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까닭도 바로 그 하느님의 덕성의 탁월성에 있다.
마테오 리치는 만물의 본성이 선한 것을 가리켜 천주의 흔적이라
고 한다.78) 이것은 선함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생겼다고 보는
아퀴나스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한 선하며, 모든
존재는 최고선으로 존재 자체인 하느님에게서 유출된 것이다. 그래서
아퀴나스 신학은 피조물의 하느님과의 유사성(smilitudo)을 말한다. 피
조물은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사성은 유비(analogia)에
76) 신학대전 1 , 1, 11, 4, p.185. 주희의 성리학은 아퀴나스의 신학과 유사
한 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밀한 차이를 말하지 않은 채 비슷함
을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태극을 충만한 ‘존재’로 보는
것(소병선, 주자학과 토미즘 , 서울: 동과 서, 2006, p.102)은 옳지 않다.
아퀴나스에게서 신은 존재 자체요, 최고 개별자다. 그러나 성리학의 리는
그런 존재일 수 없고, 세상과 별개의 개별자일 수 없다. 아퀴나스의 형이
상학은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주희는 도덕의 문제를 그런 존재론
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77) 신학대전 1 , 1, 8, 1, p.136.
78) 천주실의 4-9, p.207.
238 논문
따른 닮음이다. 유비라고 하는 것은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지닌 개념
이다. 비슷하지만 어떤 동등함이나 연속성을 거부하는 개념이다. 먼저
비슷한 점을 보자.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한, 존재 자체인 하느님과
비슷하다.79) 일단 이러한 유비를 인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매우 높은 의미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
들은 그것이 아무리 덧없는 피조물이라도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느
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모방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피조물의 원형이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의 형상(forma)이다. 그처
럼 피조물이 하느님의 완전함에 참여하고 있으며, 피조물이 “하느님
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비슷하다.”80) 그 모방을 ‘참여’라고
하는 개념으로도 설명된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다. 원래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한다. 그런데 형상인으로서 내재한다는 것은 되어야 할
목표나 목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참사람이라고 하는 형상은 인간이
도달할 목표이지만, 그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바라고 섬
겨야 한다. 그러므로 참사람을 바라고 욕구하는 인간은 곧 하느님을
바라고 위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고 섬긴
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목적인이기도
하다. 참사람은 인간의 형상이지만 목적인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목적인이자 형상인이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요,
나를 위하는 것이란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위
기지학(爲己之學) 곧 나를 위하는 학문인 유학의 이상은 천주를 위함
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그것은 곧 자기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81)
자기완성이란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하느님은 목적인으로서 바깥이지만, 참사람이라는 형
상을 통해 나의 모방인 곧 형상인이 됨으로 내재한다. 결국 하느님의
79) 신학대전 1 , 1, 4, 3, p.92.
80) 신학대전 1 , 1, 4, 3, p.92.
81) “어찌 자기완성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천주를 위하는 것이 바
로 사람이 자기를 완성하는 소이가 되는 것입니다.”(烏有成己而非爲己者
乎? 其爲天主也 正其所以成也) 천주실의 7-7, p.357.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39
내재는 능동인의 각도에서 설명될 뿐 아니라 형상인의 차원에서도 설
명된다. 마테오 리치는 하느님이야말로 내가 부모보다 더 가깝게 사
랑하는 분으로서, 사람의 밖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 중에 비록 부
모처럼 가깝더라도 천주와 비교하면 오히려 ‘밖’이 됩니다. 하물며 천
주는 항상 사물 속에 존재하고 계시기에, 스스로를 ‘밖’으로 보지 않
습니다.”82) 리가 사물 속에 존재한다(在物內)고 하여 속성이라고 비
판했는데, 여기서 같은 표현을 천주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
님이 형상인으로서 내재하는 것을 말하며, 원형으로서의 형상인은 원
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83) 그런 점에서 능동인의 내재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내재는 하느님이
인간의 자기완성의 원형이 된다고 하는 도덕적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
이고, 그런 도덕의 문제가 하느님의 초월과 내재 모두에 깔려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보면 하느님은 목적인으로 초월적이고, 모방인이
요 형상인으로서 내재한다. 여하튼 모방인의 내재를 통해 이처럼 피
조물과 하느님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것은 플라톤과의 차이를 드러내
는 것이다. 질료를 잠재태로 보는 아퀴나스와 달리 플라톤 학파에서
는 질료를 비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질료의 선함을 무시한다. 그 결과
현상 세계 곧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제일 실체의 실체성을 약화
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유사성이라
는 개념은 기독교적인 세계 긍정으로 플라톤 학파의 이원론을 극복하
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초월자로서 완전하게 모방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느님
과 유사하지 않다. 그렇게 보면 피조물은 “하느님과 유사하며 유사하
지 않다.”84) 모방하더라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농도의 짙고 옅음
82) “人之中 雖親若父母 比于天主者 猶爲外焉. 況天主常在內物 自不當外” 천
주실의 7-7, p.358.
83) 아퀴나스의 자연학에서 목적인과 능동인은 사물 밖이고, 형상인과 질료인
은 사물에 내재한다. 형상인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불완전하게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
240 논문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종적(種的)으로도 류적(類的)
으로도 상통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85) 피조물과 하느님의 유사성
은, 같은 종인 사람과 사람끼리 닮았다거나, 같은 류인 사람과 동물
이 서로 닮았다거나 하는 식이 아니다. ‘상통’(communicatio)할 수 없
는 유사성이란 ‘서로 닮았다’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
람끼리의 유사성을 두고, 또는 사람과 동물의 유사성을 두고 서로 닮
았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하느님과 피조물에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 “어떤 의미로 피조물이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
느님이 피조물과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다.”86) 그것이 아퀴나스가 말
하는 유비에 의한 유사성이다.
사실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보아서 현재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
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개신교 전통에서는 아퀴나스가 말하는 존재의
유비라는 것이 큰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유사성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 또는 자연 인간의 선의 가
능성을 말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87) 그리고 하느님을 모방의
대상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인간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88) 그러나 아퀴나스에게서 하느님은 만물의 목적이지만 목
84) 신학대전 1 , 1, 4, 3, p.92.
85) 같은 곳.
86) 신학대전 1 , 1, 4, 3, p.93.
87) 그런 자연신학적인 경향을 마테오 리치가 물려받았다. “대개 사람들이 도
리를 추론할 수 있으면 양능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이
병들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다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蓋其能推論理
則良能常存 可以認本病 而復治療之) 천주실의 7-1, p.343. 양지(良知) 양
능(良能)은 맹자가 말한 것으로 인간이 선을 알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속죄의 신앙 없는 자연 상태에서도 선의 가능
성이 어느 정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을 반영하
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사상적 기반이 된 예수회 토미즘에서 역시 양
능을 강조했다. 김상근, 위의 글, p.305.
88) 이런 자연신학 때문에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 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얘
기하지 않고 상제를 빌어 천주를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톨릭 안에서도
마테오 리치의 천주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
들이 있었다. 참조. 황종렬, 마테오 리치의 천-상제관에 대한 동아시아의
응답 한국종교연구 제6집(서울: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1999), p.80.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1
표가 될 수 없음을 앞에서 보았다. 아퀴나스의 유비는 유사성을 말하
지만, 하느님의 초월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89) 그는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에 공통된다(communissio)는 것을 인정하지만,
하느님과 피조물의 상통(communicatio) 곧 코뮤니케이션을 부정할 정
도로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최고선으
로서 “류 밖에 있으며 모든 류의 근원인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느
님은 그 초과로 인해(per excessum) 다른 것과 비교된다.”90) 그러므
로 비교란 사실상 비교 불가능을 의미한다. 그래도 비교를 말하는 것
은, 하느님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선이지
만, 최고선이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과 비교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이라는 말이다. 관계(relatio)를 시켜본 것이다. 그런데 그 관계는 피
조물 쪽에서 하느님과 관계하여 말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피조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말해질 때
이런 관계(relatio)는 하느님 안에 실재적으로(realiter) 있는 것이 아니
고 다만 그것은 피조물 안에만 실재적으로 있는 것이다.”91) 하느님과
피조물의 유사성이 일방적이듯이, 관계도 일방적이다. 이것은 하느님
의 선과 피조물의 선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일방성은, 피조물은 하느님과 관계없이 있을 수 없지만, 하느님에게
피조물과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없이도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
총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일방성은 현대 신학에서 비판
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에게는 하느님의 주권
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능동인의 문제는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선의 목적을 달성할 힘을
목적 그 자체가 주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 관점이 자연학
89) 아퀴나스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유비를 사용할 때 특정한 관계를 필
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조, 박승찬,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
개념에 대한 재조명 , 1집(서울: 서강대학교신학연구소, 1999), p.209.
90) 신학대전 1 , 1, 6, 2, p.116.
91) 신학대전 1 , 1, 6, 2, p.115.
242 논문
과 우주 발생설에 영향을 준다. 성리학에서는 목적인이 능동인이 되
지 않는다. 리는 만물의 표준으로 목적인이 되어서 초월성을 띠지만,
능동인은 기의 몫이다. 선의 실현은 철저하게 인간의 주재 하에 일어
나는 일이요, 초월자는 기본적으로 내재한다. 리는 마음 안의 성(性)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또는 마음 밖 사물 안에 내재한다. 사물의
본성이 리다. 그러한 내재성은 성선설에서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본
성이 선하므로 스스로 선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성리학은
인간의 일상적 감정이 타락해 있음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기질의 성
이라고 하는 말을 만들었으며, 그러한 악의 가능성과 악의 현실 때문
에 리라고 하는 초월적 원리에 주재를 맡기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한 본연의 성만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제 2
의 본성론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리의 주재는 다름 아닌 마음의 주
재로 남는다. 그리고 수양론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악
함을 심각하게 보아서 제2의 본성론을 말했다. 그것은 “백성의 착한
본성은 이미 사라졌고, 또한 추악한 것에 습관 들어 쉽게 악에 빠져
들기 때문에 선을 세우기가 어려움”92)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선의 목
적을 달성하는 힘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 수양론만으로는 불충
분하고 은총 곧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유
학의 결함을 수양만 강조하는 데서 찾으며, 의지가 약하여 수양을 할
수 없는 불능의 인간의 상태를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93)
그 불능 때문에 하느님이 능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선의 주재는 하느님의 몫이요,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물 밖의
92) “但民善性旣滅 又習乎醜 所以易溺于惡 難建于善耳” 천주실의 8-6, p.422.
93) “제가 보기에는 선비님의 나라 선비들의 문제점은 바로 이런 것에 있습
니다. 다만 밝은 덕의 수양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가 쉽게 지
쳐서 자기 스스로를 독려해 나가며 수양해 나갈 수 없음을 모릅니다.”(吾
竊視貴邦儒者病正在此 第言明德之修 而不知 人意易疲 不能自勉而修) 천주
실의 7-12, p.376. 리치가 행위논리에 초점을 맞추어 유학과 그리스도교를
연결하고 있으며, 신앙이라는 새로운 행위논리를 제시했다는 주장도 같은
얘기다. 정태식, 마테오 리치의 예수회적 유교 해석에 관한 일고찰-천
주실의를 중심으로 , 철학연구 95집(서울: 대한철학회, 2005), p.379.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3
초월자다. 하느님은 목적인인 동시에 능동인이다. 목적인으로서 사람
과 사물 밖이지만 형상인으로 내재한다. 사람과 사물 밖의 능동인이지
만, 사물 속속들이 능력을 미치는 능동인으로 만물 안에 내재한다. 성
리학의 리가 기본적으로 내재이면서 초월인 것과 달리, 기독교의 하느
님은 기본적으로 초월자로서 내재한다. 리는 목적인과 형상인으로 주
재하지만, 그래서 퇴계처럼 정이동(靜而動)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능동인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주재하는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의 하느님은 목적인과 형상인으로서 뿐 아니라 능동인으로 주재한다.
성리학의 리의 주재도 섭리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아퀴나스는 ‘직접
섭리’라는 말로 하느님이 사물 하나하나의 운동을 주관하고 있음을 표
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인간론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악함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보느냐의 차이다.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
를 말하는 성리학의 우주발생론이나 하느님의 창조를 말하는 기독교
의 창조론 역시 그런 인간론과 도덕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완전히 물리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아퀴나스의 자연학에도 도덕
론이 깊이 배어 있다. 중세는 물리학과 윤리학을 나눈 칸트의 근대와
달리 도덕적 관점으로 온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을 이
어받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에도 그런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만 선의 실천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퀴나스는 존재
자체를 믿고 경배하는 존재론이 형이상학으로 발전했고, 성리학은 도
덕형이상학으로서 인문주의에 충실하였던 것이다.94)
Ⅲ. 맺는 말
아퀴나스나 주희는 존재의 이유가 존재보다 앞선다고 하는 중세의
사유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천주나
94) 학자들은 유학자들이 도덕적 실천을 통해 궁극적인 것을 경험했다는 데 대개 일
치한다. 다시 말해 성리학의 초월경험은 내재적인 도덕성에 있었다. 문석윤, 유
교적 기독교는 가능한가 , 헤겔연구 8집(서울: 한국헤겔학회, 1998), pp.723, 724.
244 논문
리는 모두 목적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나 성리
학의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 같은 우주발생론도 모두 도덕적 관심과
짙게 연결된 것이다.95) 이 세상이 어떻게 생성 변화되느냐는 얘기는
선의 실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의 문제가 된다. 목적의 실현의 힘
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문제다. 그것은 능동인의 문제다. 거기서 그리
스도교와 성리학은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창조론과 도덕
에서의 은총론을 결정짓는 것도 능동인이다. 천주는 이념으로 통치할
뿐 아니라 개별 현상에 직접 개입함으로 통치한다. 그처럼 능동인이
사물 밖의 초월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천주는 기본적으
로 초월자다. 초월자이지만, 형상인으로 또는 능력으로 내재한다. 반
면에 성리학에서 리는 보편적 표준으로 초월적이지만, 각구일극(各具
一極)으로 내재해 있으며, 능동인은 리의 몫이 아니라 기의 몫이다.
그래서 리는 이념으로 또는 천명으로 통치할 뿐이며,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천주는 목적이지만 목표가 될 수 없다면, 성리학의 리는 성
인관(聖人觀)에 기초해서 목적이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된
다. 그렇게 보면 성리학의 소이연(所以然)과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
(causa)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주희가 말한 형이상(形而上)과 아퀴나
스의 메타 피지스(meta-physis)는 다르다. 하나는 도덕형이상학으로
인문주의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신학으로 종교가 된다.
투고일: 2008. 11. 03.
심사완료일: 2009. 01. 12.
게재확정일: 2009. 01. 20.
95)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의 지평을 인간의 양심의 소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
(송영배, 위의 책, p.68)도 결국 도덕의 문제가 핵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양명수
이화여자대학교
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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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의 천주(天主)와 성리학의 리(理)의 차이 247
ABSTRACT
Christian God in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 (T'ien-chu Shih-i) and Neo-Confucian
Li (理) in the Light of the Final Cause and the
Efficient cause of Aquinas
Yang, Myung-Su
Matteo Ricci's T'ien-chu Shih-I (天主實義) is well known for its
historical value regarding the encounter of Eastern and Western
cultures. Its tremendous effect on Korean society in the epoch of
Cho Seon Dynasty has prompted many Korean scholars to question
the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essence of Matteo Ricci's apology
to Christianity. This study is in line with those previous works on
the possible comparison of the Western God and the Confucian
principle known as the Great Ultimate: (太極) or Li: (理). What is
especially of interest to this study is that the position of the
efficient cause in its relation with the final cause may explain
definitely the difference of the Christian God and Neo-Confucian Li.
Following Aquinas, Matteo Ricci regards the Christian God as both
the final cause and the efficient cause of myriad things of this
world, while Li cannot be the efficient cause at all. Li is possibly
the final cause as the ultimate standard, but the efficient cause must
be attributed to Ki: (氣, the material force) in the Neo-Confucian 
248 논문
philosophical system. This seemingly cosmological difference between
God and Li leads us to examine the moral foundation of both
metaphysics. The fact that the Christian God works as both the
final cause and the efficient cause means that God is the ultimate
goal of moral self-accomplishment of human beings and, at the
same time, He moves us toward the goal. It is God who causes
and leads the achievement of moral goodness. On the contrary, the
famous debate on the issue of whether Li is active or not among
Korean Neo-Confucian scholars reflects the fact that moral initiative
in the Neo-Confucian system cannot be found anywhere else than in
the human mind. Li rules only as a moral ideal, while the Christian
God rules as an ideal and by direct involvement in moral
accomplishment. This difference of transcendence of Li and God is
linked to the immanent character of both, and, ultimately, to the
different anthropology regarding moral capability of human beings in
Christian and Neo-Confucian culture.
Keywords: T'ien-chu, Li, the efficient cause, the final cause,
transcendence, imman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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