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우리역사넷 천주실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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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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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의 시문집 『성호전집(星湖全集)』권55에 수록된 천주교와 관련된 「발천주실의(跋天主實意)」의 내용이다. 「발천주실의」는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대해 이익이 연구한 글이다. 『천주실의』는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은 천주 교리서로, 17세기 초에 이미 북경에서 간행되었고 곧 이어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리면서 조선에도 전래되었다.

『천주실의』는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에 걸쳐 서사(西士)와 중사(中士)가 대화를 통해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 교리서이며 호교서(護敎書)이다. 중사는 중국 사람을 대변하는 박학다식한 학자이고, 서사는 가톨릭 사상과 스콜라 철학을 겸비한 서양 학자로 저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자의 입을 빌려 유학 사상과 불교⋅도교를 논하도록 하고, 후자가 스콜라 철학과 선진공맹(先秦孔孟)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 형식을 빌려 진술된 문장은 사서육경(四書六經)과 그 밖의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천주 교리서에 대해 당시 유학자들은 일면 호기심을 가지고 탐독하는가 하면 일면 이를 비판하였다. 이익의 「발천주실의」는 그 대표적인 글이라 하겠다.

이익은 천주교가 유교와는 흡사하고 불교⋅도교와는 다르다는 마테오 리치의 ‘신유배불론(新儒排佛論)’에 반대하였다. 그는 오히려 천주교가 불교와 같은 성격을 가진 종교이고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현혹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익은 천주교의 교리에도 일리가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함으로써 이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글이 발표 된 후 『천주실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서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익의 학문을 따르던 신후담(愼後聃, 1702~1761)⋅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헌경(李獻慶, 1719~1791) 등이 『천주실의』와 그 밖의 서교서(西敎書)를 읽고 각기 『서학변(西學辯])』⋅『천학고(天學考)』⋅『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을 엮어 유학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논평하였다.

18세기 후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때에 이르러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 부근의 남인 학자들은 유교의 고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하늘의 의미를 주희(朱憙, 1130~1200)와 달리 해석하면서 천주교의 천주(天主)를 옛 경전의 하늘과 접합시켜 받아들였다. 즉 자신의 유학을 천주교를 통해 보완하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남인들은 서울과 아산⋅전주 등지에 신앙 조직을 만들고 포교에 들어갔는데, 불우한 처지의 양반이나 중인, 그리고 일부 유식한 평민들이 입교하였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천주교가 퍼진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전래의 경천(敬天) 신앙이 천주교 전파를 쉽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도가 늘어갈수록 유교식 제사를 무시하는 행위가 불효와 패륜으로 비쳐졌다. 제사는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효행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인들과 연결된 행위가 국법을 어기는 일이 많아 국가의 금압(禁壓)을 받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