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6

어둠 속에 갇힌 불꽃 |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 - 정지석 - Daum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 - 정지석 - Daum 카페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





정 지 석

평화연구 박사, 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1. 생애

우치무라 간조 (Uchimura Kanzo 1861 ~ 1930)는 일본 무교회 운동의 창시자이며, 근대 일본 사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상가이다. 기독교 신앙 양심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던 그는 일본 국가가 벌린 전쟁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했고, 이는 후에 일본 근대 사상사에서 반전 평화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우치무라 간조는 에도(현재의 동경)에서 하급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가문의 신분 상승을 희망했고, 당시 일본에 새롭게 들어오던 강대국 서구 문명에서 그 길을 찾고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똑똑한 아들 우치무라 간조는 동경 외국어 학교(동경대학 전신)에서 공부하고, 다시 미국 선교사가 세우고 가르치는 삿뽀로 농업학교에서 주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그곳으로 갔다. 섯뽀로 농업학교는 우치무라 간조가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되고 그후 그의 일생을 결정짓는 전환기와 같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당시 삿뽀로 농업학교 교장은 윌리엄 클라크라는 유명한 선교사였는데,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are ambitious!'라는 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통해 갱생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었고, 삿뽀로 농업학교 학생들은 그의 영향아래서 졸업할 즈음에는 대다수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 우치무라 간조가 쓴 자서전 회심기인 <나는 왜 크리스챤이 되었는가>라는 책에 보면, 그는 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온다. 그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선배들은 열정적인 학생 전도자들이었고, 후배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기위해 온갖 애를 썼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우치무라는 일본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매우 완고한 소년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1877년 12월 11일 일기에 그는 ’야소교(기독교)의 문으로 들어가다‘라고 적고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어느 누구보다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으로 나온다. 요나단이란 크리스챤 이름을 가진 것이라든가,부모와 가족을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시키려고 노력했던 일이라든가, 신자로서 기도와 예배의 삶에 정성을 다했던 것을 미뤄볼 때 우치무라 간조는 자신이 새로이 받아들인 신앙 진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회심기에 적은 이 말은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영원히 루비콘을 건너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주님에게 우리으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하여 십자가가 우리의 이마에 새겨졌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과 스승에 대하여 표명하도록 배워 온 충성심으로 그에게 봉사하며 여러나라를 정복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자아가 강하고, 일본적인 전통에 보수적이면서, 매사에 진지하게 생각하는 성품의 사람으로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구도자적인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농상무성의 관리가 되었지만, 그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진리를 찾고 살려는데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전념한 사람이었다. 기독교 신앙 진리를 더 깊고 넓게 알고자했던 그의 진리 추구의 열정은 후에 그로 하여금 안정된 직장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하도록 했다. 또 다시 귀국한 후 교사로 일할 때 천황의 칙어에 절하지 않는 불경사건을 일으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일단 자신이 선택한 길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열심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리의 삶을 끊임없이 찾고 실천으로 살고자 했던 구도자였던 우치무라 간조, 그의 평화사상은 이런 진리 구도의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런 사상적 결실이라 볼 수 있다.

2.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의 기초: 기독교 신앙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독교 신앙을 이해해야한다. 기독교신앙은 그의 삶과 사상, 사회적 실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인이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무교회 신앙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무교회 신앙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무교회라는 말은 1901년 우치무라 자신이 인도하는 성서연구 모임의 회원들을 위해 ‘무교회 (Non-church)' 라는 이름의 회보를 발행한데서 비롯된다. 일본의 제도교회들, 특히 선교사들은 교회 밖에서 하는 성서연구와 신앙을 사교로 비난했고, 이에 대해 우치무라는 신앙은 교회 제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성서연구 모임을 지속했고, 이런 우치무라의 신앙 운동은 ’무교회 운동‘이라 불리워지게 됐다. 일본의 제도교회를 선교했던 선교사들로부터 비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영적 자유를 주장하며 나온 무교회 신앙 운동은 일본적인 기독교 신앙운동으로 내외에 소개되었다.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는 영적 기독교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신봉하는 십자가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제자도 신앙이 무교회 신앙이 추구하는 핵심 내용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 신앙은 십자가의 구속 신앙을 신봉하는 루터교 복음주의 신앙과 유사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을 통한 순수한 영적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교회 운동은 영국 퀘이커리즘과 독일 경건주의와 유사하다. 개인의 영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무교회 신앙은 사회 개혁보다는 개인의 영적 변화를 우선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구조 개혁에 앞서 부패한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참된 인간으로 변화됨으로서 사회변화는 일어난다고 믿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는 전쟁은 불평등한 사회 경제체제에서 기인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탐욕에 우선적인 요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평화는 개인이 영적으로 변화되는데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다.

3. 두 개의 Js(Jesus and Japan)의 합류 - 애국심과 평화사상

그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그의 삶과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일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 것이었다. 일본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사랑하고 또 예수를 사랑하는 기독교 신앙이다. 애국신앙이지만, 비기독교인 일본인의 애국심과는 다른 경우가 있었다. 한 예가 일본 천황 숭배에 대한 태도였다. 일본국가와 일반 사람들은 천황을 신의 자리에 놓고 숭배하는 운동을 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우찌무라 간조는 천황을 하나님과 같이 숭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비애국자로서 박해받기도 했다. 이는 우지무라 생애중에서 불경사건으로 유명한 사건이며, 우찌무라를 일본의 비판적 지성계에 깊이 인정받는데 한 것이었다.

반면에 우리가 또 다시 주목하여 생각할 점이 있다. 우치무라 간조의 가슴을 지배했던 사상은 애국심이었다. 그는 늘 애국자가 되기를 소망했고 기도했다. 앞서 말한대로 기독교 신자로서 충실한 삶을 사는 것과 애국자로서 사는 것을 따로 떼어 놓치 않고자 했다. 그가 기독교 신앙 진리 탐구를 위해 기독교 국가 미국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곳에서 경험과 지식과 관찰을 필요로 하여 온갖 어려움과 곤경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가슴속에서는 두가지 외국행의 목적이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첫째는 사람이 될 것, 둘째는 애국자가 되는 것이었다. 참 사람이 되는 길, 우치무라에게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의미였고, 그와 동시에 예수에게 충성하는 신자가 되는 것이 일본 국가에 충성하는 애국자가 되는 것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일치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려고 했다. 이것이 그의 평화사상을 묘한 것으로 특징짓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청일전쟁에서 그는 애국심을 갖고 일본의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지지하고 승리를 기원했다. 애국심과 그의 신앙 양심이 일치했다. 그러나 전쟁 후 일본정부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전쟁 지지 입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그후로 정당한 전쟁론을 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일본 국가의 잘못을 비판하지 않았다. 애국심이 그만큼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1904년)중에는 전쟁반대를 외치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가짐으로서, 전쟁승리를 위해 열광적인 애국주의에 휩싸였던 일본 국가와 사람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러일 전쟁을 반대하는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는 일본이 승리하기를 내심 바라는 입장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판적으로 우치무라를 평가해보도록 하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나라가 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화를 바라면서도 자기 나라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치무라 간조는 애국적인 평화주의자였다. 이런 입장은 후에 그가 일본의 조선 정복과 식민 정책에 대하여 잘못임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그것을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았던 한계성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실천적인 참된 평화주의는 진정한 애국주의와 불가분리에 있는 것이다.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참된 애국심의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우치무라 간조를 넘어서는 평화사상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숙고하게 하고 더 깊게 추구하도록 한다. 이런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우치무라의 평화사상은 일본 지성인들속에 씨앗이 되어 그후 일본 반전평화주의자들의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다.

4. 정당한 전쟁론자에서 반전 평화사상가로 진보

우치무라 간조는 반전 평화사상가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반전평화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갖고 일본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일본이 전쟁을 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앙인으로서도 일본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믿으면서 지지하고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상적 입장을 정당한 전쟁론자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우치무라 간조는 정당한 전쟁론자였다.

예를들면 그는 역사 속에는 미국 혁명 전쟁 같은 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었고, 정의를 위한 전쟁은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전쟁에는 반대했으나 의를 위한 전쟁은 동조했다. 이런 입장은 1894년 조선 반도에서 일어났던 청일 전쟁에 개입했던 일본 정부를 지지하면서 쓴 그의 글 ‘조선 전쟁을 위한 정당화’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말하길,

‘우리는 지금 일본과 중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조선 전쟁이 그런 전쟁, 즉 의로운 전쟁이라고 믿는다. 의로움이란 모든 종류의 궤변들이 하드시 만들어 질 수 있는 함법성이란 차원의 법적 의미에서 뿐 만 아니라 도덕적 의미에서의 의로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도덕적 의미의 의로움만이 전쟁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의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그런 전쟁을 의문시 해선 안된다. 의로운 전쟁이 실제에서 정도를 넘어 갈 때는 그런 전쟁은 기독교인보다는 국가에 의해 치러진다. 그런 전쟁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그런 전쟁을 믿고 가르쳤다' (Uchimura 1982: 39).

그러나 전쟁 후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았고, 전쟁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되었다. 즉, 청일 전쟁은 의로운 전쟁이 아니었으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전쟁임을 알았다. 일본 정부의 팽창주의에 의해 야기된 전쟁임을 알게 된 이후부터 우치무라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대신 반전 평화주의 입장을 갖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전쟁을 중대한 악이라고 비판했고, 전쟁의 완전한 폐지를 설교했다. 이런 입장은 1904년 러일 전쟁에서 확실하게 천명되었다. 그는 신약성서 전반에 흐르는 정신은 평화임을 강조했고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진리로 믿는 한 기독교인들은 전쟁을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성서 사상에 기반한 그의 평화사상은 성서적 평화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그의 평생에 더욱 심화되어갔던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좀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5. 무저항주의

우치무라 간조는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저항주의를 취함으로 얻게 된 기쁨을 체험했고 더욱 평화주의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했다. 무저항주의 사상은 절대 반전평화주의 사상의 기반이 되는 사상이다. 역사적으로는 재세례파가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그르치고, 사로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취했던 입장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사상이다.톨스토이가 이 입장을 취했고 반전평화사상을 전개했다. 우치무라는 무저항주의를 예수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전에 전쟁을 지지했던 자신의 입장을 회개했다.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인 스프링필드 리퍼브리칸 (Springfield Republican)의 애독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다. 우치무라 연구자들은 평화주의 신앙에 있어서 우치무라는 초대 퀘이커리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퀘이커 평화주의 신앙은 무저항주의를 취하는 면모도 없지 않치만 보다 면밀하게 말하자면 비폭력주의를 취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특히 20세기에 와서는 더욱 뚜렷하다.

6. 성서적 평화론에 기반한 절대 평화주의 사상

우치무라의 평화 사상은 기본적으론 성서적 평화주의에 근거하며 또한 그 자신의 무저항주의의 체험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러일 전쟁부터 그는 일본에서 평화운동의 선구자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1931년 이후 우치무라의 제자들 가운데 우치무라의 반전 평화주의의 유산을 계승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1931년 만주 전쟁 당시 일본에서 활발한 반전 평화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어서 세계 제 2차 전쟁 당시에도 반전 평화 운동을 전개했다.

우치무라 간조의 반전 평화사상은 성서적 평화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특히 성서적 종말사상에 기반한 평화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나이 58세가 되었던 1918년 2월, <성서지 연구>에서 우치무라 간조는 ‘세계평화는 어떻게 오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이당시에 그가 평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가를 잘 살펴 볼 수 있다. 세계 1차 전쟁이 끝난 후, 세계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재림신앙에 기반한 반전 평화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구약 성서 안에 나타난 예언자의 평화사상은 2700여년 전에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진 평화의 이상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서에 있는 전쟁 폐지 사상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메시야(이사야 9:6-7)라는 사상이다. 성서는 평화의 이상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현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방법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즉, 평화는 인간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매우 신앙적인 입장이다. 반면에 그는 역사 속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인간이 추구해 온 노력을 세가지 방법으로 요약하면서 그것의 한계를 비판한다.

첫째, 전쟁을 통한 평화론이다. 전쟁 폐지를 위한 전쟁, 즉 평화를 위한 전쟁을 세상 사람들은 평화의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우치무라 간조가 보기에 그것은 ‘부질없이 전쟁을 확대시키는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은 허위이며 기만일뿐이다.

둘째, 외교를 통한 평화운동이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외교를 통한 평화의 맹약이 너무도 쉽게 버려진 채 전쟁으로 간 역사적 사례를 들면서 ‘누가 외교에 의해 세계의 평화가 오리라고 믿겠느냐’고 회의한다. 외교를 통한 평화론이란 다만 일시적 완화책에 불과할 뿐이라고그는 주장한다.

셋째, 기독교회를 통한 길이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기독교회가 과연 전쟁을 막을 힘이 있는가고 반문한다. 몇가지 사례를 보면 전쟁 방지 운동에서 기독교회는 사회주의자들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자신도 분열하는 기독교회가 함께 힘을 합쳐 세계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백치의 꿈’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평화의 길은 무엇인가. 평화는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세계에 영원한 평화는 예수가 와서 다스릴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앙의 평화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를 믿지 않고 평화론을 부르짖는 것도, 필경 이것은 하나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의 노력에 의해 세계평화는 오지 않고 그리스도 재림에 의해 평화는 온다고 믿는다. 우치무라는 자신의 이런 입장을 성서의 평화론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재림에서 세계에는 영원한 평화가 이뤄진다는 우치무라의 성서적 평화론은 당시 윌슨이 전쟁방지를 위한 구상으로 제창하고 있던 국제연맹 운동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우치무라는 주장한다. 즉, 국제연맹 사상은 전쟁 방지에 그치나 그리스도 재림 평화사상은 전쟁의 근본적인 폐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전쟁뿐 아니라 군비의 근절도 가져온다고 믿는다. 우치무라의 이런 신앙적 평화사상은 어쩌면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사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세 평화론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현상적으로 포장된 모순의 평화 껍데기를 근본적(radical)하게 비판하게 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현세 평화론의 이중성과 모순성을 그가 노골적으로 폭로하는데는 이런 신앙적 평화사상에 기반한다고 보여진다.

우치무라는 유럽의 전쟁으로 불려지는 세계 1차 전쟁 중에 소위 우방국의 평화를 위한 다는 목적으로 무기 사업으로 돈을 번 미국을 비판한다. 미국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한다. 군수품 제조회사의 주주로 이익을 챙긴 기독교 신자들과 그 돈으로 펼친 전도 사업과 해외선교 사업,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하는 것은 유럽 사람의 피의 댓가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세계에 참되고 영원한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 재림에서 온다고 믿는다. 이런 입장은 현세 평화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세속 사회에서 영원한 평화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만 가능하다는 어거스틴 이래의 정통 신학이 주창하는 평화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나는 우치무라의 이런 재림 신앙에 근거한 평화사상을 종말론적 평화사상이라고 부른다.

7. 신앙적 절대 평화주의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갖는 의미

종말론적 평화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부정적, 긍정적인 면에서 생각해본다.

우선 종말론적 평화사상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의미로서, 첫째, 현실 속에서 평화를 위한 현실적 노력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서 현실 사회에서 하는 평화운동을 회의적으로 만들며, 둘째,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 재림을 손 놓고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조장할 수 있다. 셋째, 그럼으로써 현실 악과 전쟁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대처 방안도 없이, 희생자들의 고통과 곤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넷째, 결과적으로 현실 문제로부터 외면하고 무시하는 비현실적 태도를 낳는 평화사상이라 할 수 있다.

우치무라 간조의 종말론적 평화사상이 갖는 적극적인 의미를 세가지 관점에서 살펴 보자. 첫째, 세계 안의 전쟁과 평화 문제에 대해 보다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를 갖게한다. 래디칼한 평화사상은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며, 문제해결의 안목을 길게하며신념을 굳게하도록 한다. 둘째, 상대적인 것의 절대화에 빠지는 오류를 피하게 한다.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절대화하고자하는 유혹에 직면하곤한다. 상황성과 유한성으로 인하여 가변적인 것을 무시하고 절대주의로 가는 것을 상대적인 것의 절대주의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평화를 만든다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시킨다. 그리고 이 정당화를 절대화시킬킨다. 이럴 때 가공할만한 악폐를 초래한다. 히틀러, 킬링필드, 탈냉전 시대 인종청소 전쟁과 대학살등은 이런 오류가 낳은 결과이다. 최근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종교적으로 절대화된 것도 비슷한 사례이다. 합리성이 사라지고 광기만이 지배하는 악이 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모든 시도와 방법들을 궁극적으로는 유한한 것이며 한계가 있는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종말론적 평화론이 갖는 큰 의미라 할 수 평가할 수 있다. 절대적인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신앙이 인간을 오만에 이르지 않게 하고 늘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의미와 같다. 셋째, 종말론적 평화사상이 갖는 실천성이다. 종말론적 입장이 비현실적이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도피적 삶을 초래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봐야할 점이 있다. 우치무라 간조의 삶을 보면 그가 종말론적 사상을 신봉하면서도 세계 속에서 매우 실천적으로 행동하고 증언하면서 반전 평화운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일본의 전쟁행위를 비판하면서 실천했던 점을 보면, 과연 종말론적 사상이 이론적으로 보기에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도피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현실속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불굴의 실천을 밑받침하는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과 실천의 불가분리성을 볼 수 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가운데는 물론 속세를 떠나 내세지향의 은둔적인 삶이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보드시, 그리고 이후 깊은 신비주의 신앙을 체험하며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평화 운동에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퀘이커와 재세례파 신자들, 현대에 와서는 톨스토이와 간디,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존 머튼 신부를 비롯한 많은 평화운동가들은 개인의 내밀한 영성을 깊게 추구하면서 사회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면서 참여적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석헌과 문익환등은 이런 류의 전통과 깊게 맞닿아 있는 사람들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평화사상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점에서 그의 무교회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정당한 전쟁사상가에서 반전 평화론자로 변모했다. 정당한 전쟁론은 전통적으로 기독교회가 신봉하는 정치 현실주의적인 평화사상이다. 이에 반해 평화주의는 기독교의 영적 전통에서 지켜 온 평화사상이다. 우치무라는 그의 기독교 신앙에서 정통주의 신앙과 함께 소종파적인 영적 신앙을 두루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평화주의 사상가로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는 애국자였다. 기독교 애국주의자였다. 이 점은 그가 평화주의 사상을 가지면서도 전쟁 와중에서는 자신의 나라가 승리하길 기원하는 애국자로 나타나게 한 요인이다. 애국적 평화주의자였다. 이 점은 우리가 지구촌화되어가는 오늘의 시대에서 우치무라의 평화사상을 비판적으로 넘어서 가야 할 점을 제공해주는 토론점이다. 평화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애국심에 대해 더 깊고 전향적으로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사상적 가치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계주의에 대해 좀더 숙고해야 할 것이다.

신앙적 종말론적 평화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평화에 대해 보다 근본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대개 신앙에 기반하여 평화를 말할 때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점은 내가 변하고나서야 사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전적으로 나의 내밀한 개인사이기에 평화를 구하고자 한다면 우선 나부터 평화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우치무라의 평화사상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보여준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도전임에 틀림없다. 평화라는 아주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낯선, 마치 오래된 새길같은 삶의 가치요 삶의 길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살려고 할 때 ‘나 자신부터’라는 깨달음은 값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앙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자신의 사람의 변화를 꾀한다. 매우 의미있는 변화이다. 자신의 각성을 도모하고자, 또 세속과 거리를 두고자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가 인식해야 할 일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평화는 나의 평화가 이웃 그리고 사회의 평화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치무라는 분명했고, 그런까닭에 그의 평화사상은 종말론적이면서도 현실 참여적이었다. 이를 가르켜 변혁적 종말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나와 세계의 유기적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증거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점에서 YMCA 평화사상과 운동은 나와 이웃, 세계와 사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유기적 연관의식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에 기반한 것임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