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5

나의소개 -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인터뷰 기사

나의소개 - 은총과 진실과 자비가 삶의 실재로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인터뷰 기사



은총과 진실과 자비가 삶의 실재로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인터뷰 기사조회 수 1526 추천 수 0 2012.05.27 07: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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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진실과 자비가 삶의 실재로

 

사진ㆍ박숙영 / 인터뷰ㆍ문경민

 (잡지 "좋은교사" /2012.6월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회복적 정의, 평화, 비폭력 대화, 회복적 생활지도, 회복적 써클.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한 좋은교사운동의 대안에 주로 오르내리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이 오고가는 상황의 중심에 있지는 않지만, 그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바둑돌 놓듯 고요히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뭐...배꼽에 있는 거 다 꺼내야지.” 준비되지 않은 인터뷰 요청에 박성용 목사님은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왜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셨나요?



저희 집은 힘든 가정이었습니다. 6.25로 인한 상처는 아버지를 30여 년의 알콜 중독으로 끌어들였고, 저는 그 상황 속에서 염세주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못 느꼈죠. 하지만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나의 내면은, 살아가야할 의미를 치열하게 찾고 있었습니다. 그 방황의 끝에 교회를 만나게 됐죠. 교회는 저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었습니다. 그게 중학교 때였어요.

상업 고등학교를 나온 뒤에 은행에 취직을 했습니다. 정말 즐겁게 직장생활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결핵에 걸렸어요. 각혈을 하는 상황이었죠. 그런 것들이 연결이 되어서 야간신학교에 간 후 다시 감신대를 가게 됐어요. 신학대학생에게 목사 외에 특별히 다른 길은 잘 보이지 않았죠. 조령 관문에 고사리 마을이라고 있어요. 거기에 처음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 데, 주변 사람들이 그곳은 목회가 될 곳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게 더 맘에 들었어요.

‘오호라... 목회가 안 되면 나는 학자의 길을 가겠다. 공부하겠다.'했죠. 그런데 거기에서 7년 반을 보내게 됐어요. 잘한 목회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도시화물결속에 버틴 목회였죠.



목사님은 좀 특별한 삶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가정에 대해 궁금한데요. 좀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 당시에 ‘고사리에서 띄우는 편지’라는 묵상 편지를 여기 저기 보냈는데, 그걸 본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맞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어요. 세 번 정도 만난 다음에 계룡산에 텐트를 가지고 올라갔죠. 산장 뜰에서 촛불 켜놓고 밤새도록 서로의 인생을 다 털었어요. 그러고 나서 결혼하기로 했죠. 딸이 둘(대학생, 고등학생)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아갔으면 좋겠다 싶어서 대안학교로 보냈어요. 알아서 행하게 하니까 일찌감치 성장하더라고요. 스스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진짜 그냥 뒀어요. 하지만 저는 애들이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제가 새벽에 일어서나 책 붙들고 있는 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거, 애들한테 도시락 만들어 주고 아침 챙겨주는 거... 그런 것들을 우리 애들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애들한테 말로 가르치려 드는 것은 잘 안 했어요. 그냥 보여줬죠. 제가 보는 책의 제목들이 아이들에게 암시를 줄 거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주로 애들한테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애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퀘이커들의 영성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애들이 저 퇴근하면 와서 안기고 뽀뽀하고 그래요. 그러면 저는 애들에게 ‘너 이거, 지금 이러는 거 폭력이야. 나는 지금 자발적으로 너랑 뽀뽀하고 싶지 않다고. 징그럽다야.’ 그러죠. (웃음)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지만,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어요. 스승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었지요. 내게 있어서 스승이란 힘을 갖지 않았던, 그러니까 카리스마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그런 것들이었어요. 음... 동물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어떤 토끼였어요.(웃음)

필라델피아에 있을 때였어요. 아침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책을 하는데, 야생 토끼 한 마리가 뭔가를 먹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어요. 토끼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요. 나는 토끼의 눈을 보면서 나의 존재 자체가 상대방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것은... 뭐랄까요, 울림, 울림 그 자체였죠. 2,3분동안 우리는 미동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지요. 저에게는 그것이 계시적 사건이었어요. 상대방의 안전이 나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 상대방의 약함이 나의 폭력성을 노출시키는 것을 보았던 것이죠. 그 사건은 제가 특권을 경계하는 삶의 스타일을 갖추는 계기가 됐어요. 저는 미국에 있을 때에도 목회자 넥타이를 하지 않았어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눈에 보이는 차별을 받았지만 목회자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대접을 잘 받았거든요. 그게 싫었어요.저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들의 삶도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작 제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자기 타이틀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종종 저를 소스라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교인들도 거의 없는 고사리에서 7년 반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약한 존재들로부터 힘을 얻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것을 통해서 저의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치유되기도 했어요. 그것이 나에게 은총이었지요.



운동가의 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저는 제가 운동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 생활을 하면서 운동가로서의 삶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제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모두 세 개 정도 되는데...



첫 번째는 LA로드니 킹 사건이었어요. 한인 점포들이 불타는 걸 많이 봤죠. 2000개 정도 탔으니까요.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었죠. 로드니 킹과 한인들의 연결고리는 로드니 킹이 현대 엑셀 승용차를 탔다는 것 밖에 없었는데 말이죠.



두 번째는 우리나라의 IMF였어요. 미국에서 내 조국이 부도가 난 걸 알게 됐어요. 아빠는 거리에서 자고, 아이는 먼 곳으로 보내고... 그 장면들이 정말 참담했어요. 그걸 보면서 영성을 공부하러 갔던 것은 다 집어 치우게 됐어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보는 공부를 하는 걸로 방향을 바꾸게 됐지요. 그렇게 해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됐죠.



그러다가 911사태가 났어요. 그 사건이 저에게 결정적이었죠. 온갖 인종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던 템플 대학이 911사태이후 섬뜩한 분위기가 됐어요. 성조기를 밖에 내걸지 않은 집들은 종종 보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그런 분위기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새로운 인간들을 봤어요. ‘펜들힐’ 라는 퀘이커 영성 센터는 911사태가 일어난 그 다음 주에 자신들의 공개강좌 제목을 즉각 바꾸어 이슬람 사람들을 불러들였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달라고 했죠. 울분으로 꽉 차 있는 미국 상황에서 그런 공개강좌를 연다는 건요, 정말... 목숨을 걸고 한 거나 다름없었어요. 저는 거기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그렇게 퀘이커를 알게 됐지요.



그런 일들을 겪고 난 뒤 한국에 들어오게 될 때 한가지 결심했어요. ‘나는 내 문제를 가지고, 내게 어떤 불행이 닥쳐오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겠다.’ 그런 결심이었죠. 그리고 오자마자 유네스코에서 아시아의 빈곤과 종교의 무능력, 종교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필리핀과 스리랑카의 분쟁지역을 돌아보고, 반군 사령부까지 들어가서 인터뷰를 했어요. 종교가 그 분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종교에 어떤 희망이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거기에서 아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보았고,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됐어요. 대농장에서 붙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상황...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주는 의미... 그것들을 직면하는 것은 제게도 아픔이었죠. 기독교는 그곳에서 침략의 도구로 쓰이고 있었어요. 자기 성찰에 집중하는 기독교의 무능력, 기독교가 정치권력과의 타협하는 현실. 그리고 새롭게 솟아나오는 대안의 힘들을 보았어요. 그런 것들은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었죠.

한국 기독교는 곪아있는 상태이죠. 저는 교단에 대해서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름에서도 싹은 나니까요.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문화적 크리스천이 아닌, 실천적 의지를 갖고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저는 여전히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환경운동 등, 여기저기 선한 일들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면 많은 크리스천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크리스천들이 하고 있는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 활동하고 계신 비폭력평와물결이라는 단체와 활동에 대해 자세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유네스코 일을 매듭짓고 비폭력 평화 물결이라고 하는 단체에 오게 됐죠. 처음에 저는 헤맸어요. 비폭력, 평화. 이게 뭔지 몰랐으니까요. 간디를 읽고, 퀘이커 등 기독교내 평화전통을 확인하면서 저의 중심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어요.



제가 했던 일은 평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해주고, 재충전할 수 있게 도와주고, 거대한 악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새 힘을 얻을 수 있는지 에너지를 공급 해주는 것이었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이 일어날 수 있는 현장을 방어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그 현장을 돌보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훈련 모델이 필요해요. 연구자로 살아온 내 사명은 이들을 훈련시키는 게 내 적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유네스코 관련 교육기관에 있었을 때 지구촌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모델에 대한 감각이 지금의 활동에 도움이 됐습니다. 거대한 구조악과 맞서 싸우는 어느 누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투쟁의 모델이 있는지 안내해주고 설명해줄 수 있는 연구 경험과 지식을 좀 갖고 있었거든요.

비폭력 평화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종교성을 앞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방이 고통가운데 있으면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섬기는 역할을 하죠. 저에게는 그 섬김(service)이 곧 예배(service), 신을 향해 나가는 거룩한 길입니다. 그래서 나는 훈련하는 워크숍(workshop)을 진행을 할 때 이를 거의 예배(worship)하는 자세로 임하곤 해요. 훈련하여 평화의 일꾼을 만드는 것은 바로 ‘샬롬의 통치’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한국에 도입되어 훈련커뮤니티로 성장하고 있는 모델이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어린이청소년평화지킴이(HIPP)” “회복적서클” 등이었고, 타 단체들과 함께 처음으로 꾸려나가고 있는 것이 “회복적정의네트워크” “비폭력대화에 기초한 중재모임” 그리고 “사회적·감정적 배움(SEL)”입니다. 이 모두가 처음 시도되어 배움과 돌봄의 커뮤니티로 성장하고 있지요.



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안전한 곳에서만 추앙을 하고 어둠과 폭력이 있는 곳에서는 그분의 역사하심을 못보는 것일까요? 낮과 밤의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밤, 곧 폭력과 아픔이 있는 곳에서 그분의 주권성을 세워드려야 합니다. 가장 힘든 곳에서 그분의 현존하심을 가장 잘 계시하도록 우리가 증언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속그리스도인의 할 일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분노의 힘이 아닌, 성찰과 섬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런 방식으로 구조악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사람들을 세우고, 연대하는 세력으로 키우고, 스스로 굴러가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이 제 사역의 방향이에요. 새로운 에클레시아를 만드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평등, 섬김, 같이 가는 사랑의 힘. 이런 것이 실제로 우리 사회에 통용되고 삶에서 소통이 되고 원리가 되고 가치가 되는 것... 저는 그것이 에클레시아라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 폭력이 나쁜 이유에 대하여 좀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파괴와 죽임과 혼돈과 부패를 몰고 오는 것, 그것이 폭력이죠. 폭력은 하나님의 ‘생명, 은총과 평화’라는 본성과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해요. 심지어 폭력에 대적하기 위해 쓰는 ‘구원하는 폭력’은 우리가 원치않는 악을 우리도 은연히 닮아가게 되기 때문에 이것도 허락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기를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고, 또 이어 더욱 확실하게 정의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대적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이것이 핵심이죠.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시고 십자가 지심은 바로 원수된 것을 자신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화해를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복음서의 핵심이자 산상수훈의 핵심이 이것이고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에베소서를 통해 사도바울이 영으로 만난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이 이것입니다. 제자직이란 평화와 화해를 위한 섬김에 있다는 것이 나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것은 상대방을 쳐서 없애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을 틀어잡고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기독교사들에게 꼭 당부학 싶은 말슴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기독교사가 쫓아야할 모델은 둘이예요.



하나는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삶의 실천적인 문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미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죠. 산상수훈과 식탁교제, 그리고 치유를 통해 보여주신 샬롬(평화)의 통치, 이것이 첫 번째 모델이죠.



또 다른 하나는 성령님이세요. 성령의 역사나 열매는 부자로 살게 되는 게 아니라, ‘평화’입니다. 기독교사는 이 두 모델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앙은 차치하고 배움의 본성에 대해서만 얘기해 봅시다. 애들에게 폭력과 강제가 효과가 있다는 말은요, 애들이 움찔하고 겁을 먹게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상대방이 변화되길 기대합니다. 여기에서는 모두가 “예”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 그런 태도, 습관은 그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을 해볼까요? 상대방이 바꾸어질 때, 그 행동을 안 할 때, 어떤 동기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할까요?

우리는 상대방이 내 진심을 이해해서,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자발적으로 하기를 바라는 것이 맞지 않나요? 상대방이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동기가 나의 말을 존중해주고, 내 말의 뜻을 알고, 진심으로 내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 변화가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애가 일어나지 않아서 지각할 것 같을 때, 딴 짓을 할 때, 성적이 나쁠 때, 우리는 그 아이를 때리거나 혼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 아이가 우리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가요? 아이들의 마음에 움트는 것은 무엇이죠? 수치심? 두려움? 도덕적 강요? 보상에 대한 기대가 아닙니까? 폭력으로 아이를 가르치려 들면 이런 것들이 작동하게 됩니다. 교육자라면 이 문제는 명확해요. 이건 교육이 아니죠. 변화의 동기가 두려움, 수치심, 도덕적 강요, 보상 따위라면 그 변화를 성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아이들은 그냥 길들여질 뿐이고, 안전하게 행동하는 정치를 배울 뿐이에요. 아이들에게 내면적 자율성이 있어야 해요. 이게 없는 상태에서 폭력적인 훈육이 들어오면,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상대방을 다루는 정치술을 배우게 됩니다. 신앙인을 떠나서, 교육자의 양심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배운 성육신 신앙이라는 것은 모범자 되시고 스승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은총, 진정성과 자비로움이 눈에 보이는 바 곧 실재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도 충만할 정도로 실제 삶에서 작동됨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존재의 기반이 되고, 말하고 듣고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회의나 시스템 구축에 있어서... 이 진리와 은총이 눈에 보이는 실재로 보여주지 않으면 과연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원리가 교실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애들을 응보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이 종교 신념에 위배된다고 봅니다. 응보적 처벌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에도 전혀 맞지가 않아요.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고 생각들을 하지만, 기독교의 원리대로 산 것이 아니라 유일한 보편적 종교, 궁극적 종교, 곧 폭력이라는 종교의 신봉자였을 수 있습니다. 무서운 거예요,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 뭔지 다시 한 번 봐야합니다.

기독교의 원리, 예수님의 삶, 성령의 열매, 이런 것들을 다시 살펴보면 회복적 정의, 비폭력 평화교육. 이런 것들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집에 들어왔을 때, 그 아이를 사랑의 눈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얘가 무슨 잘못을 했을지 생각하고, 숙제는 했을지 점검하고 싶어 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 먼저 체크하고 아이들을 대하는 삶의 태도의 이면에는 폭력이라는 유해한 종교에 대한 신봉, 그리고 이것이 효과가 있다는 종교적 신봉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그게 인식이 안 되고 화나는 일이 되지 않고,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지... 저는 그게 놀라워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에요. 지금의 폭력적인 문화가 자연스럽고, 비폭력에 대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긴 설명을 해야 하는 현 상황......(한숨) 제가 하는 이게 비정상, 비상식이 된 것이 저는 섬뜩합니다. 핵심은 거기에 있어요.



회복적 교육이라는 것은 자비롭고, 평화롭고, 서로 돌보는 인성과 관계가 따사로운 교실과 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종교적 언어-샬롬의 통치라는 단어를 ‘회복적’이라는 말로 바꾼 것일 뿐이죠. 내용은 딱 같아요. 참된 기독교성과 전혀 위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비롭고 평화롭고 서로 돌보는 품성을 갖게 하는 일을, 교육을 통해 하는 것일 뿐이죠. 기독교의 진리 개념과 교육학이 전략적으로 제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용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삶의 깊이와 무게가 남다른 한 사람을 만나고 왔다는 것을 느꼈다.



세속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나 몰라라 하고,

높은 목표를 향해 오늘의 한 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이익을 쫓는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 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의 길을 정하게 되는 이야기는

하나 하나 모두 드라마틱하지만,

그 드라마가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름다운 드라마를 이어갈 박성용 목사님의 오늘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