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Powell, Christian Zen: The Essential Teachings of Jesus Christ,
『선과 그리스도교』, 심광섭 역 (서울: 예술과영성, 2023) 소개 및 서평
도마복음서에 관한 국내의 저서나 역서들이 신약성서 학자보다는 종교학자, 철학자, 영성가들이 출간한 책들이 주종을 이룬다.
본 역서의 저자 로버트 포웰도 이력에서 나타나듯이 인도 힌두교 영성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핵심 개념은 ‘비이원론’(advaita, 不二)이다.
도마복음서의 부제가 “예수의 비밀말씀”인데 저자는 예수 말씀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적절한 열쇠를 제대로 적용하여 이해하면 예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무시간적인 ‘비이원성’(Advaita, non-duality)의 가르침으로서
세계의 위대한 모든 종교들의 내적 의미를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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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그저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경고한다(특히 62절과 93절을 보라).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 모든 말씀의 표현에 들어있는 ‘비이원성’(advaita, 不二)을 세상에 밝힐 만한 시점이 도래했다.
말씀의 밀의주의로부터 더욱 일반적으로 접근 가능한, 다시 말해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시키려거나 의미를 떨어뜨리려는 시도 없이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예수는 그의 가르침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의 가르침은 감각적 기관을 통해 경험되거나 정신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나는 너희에게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한 것,
귀로 결코 들어보지 못한 것,
손으로 결코 만져보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결코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줄 것이다.”
(17절 말씀).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말씀은
끝없는 추론이 아니라
- 직관을 강조하는 선(禪, Zen)
- 모든 지적 개념을 넘어가는
- 자기 입증적인 초월적 진리에 대해
-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말한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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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도약해보면...
도마는 12제자들 중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늘 지근거리에서 예수를 동행했던 코어 그룹에 속하는 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롯 유다처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가 예수를 적군에 팔아먹은 제자도 아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도마’가 제자들의 명단에만 나온다. 유독 요한복음서만이 네 차례 언급한다. 그것도 소극적이거나 회의적이거나 약간 부정적인 어조로 도마를 소개한다.
⑴ 나사로의 죽음 현장에 출발하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무엇을 믿게하고 싶다고? - 나사로가 결코 죽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11:16) - 부정적, 절망적
⑵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는니라(14:5)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 질문하는 도마-> 14:6
⑶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요 21:2)
⑷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20:25)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μὴ γίνου ἄπιστος ἀλλὰ πιστός,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ing"(20:27)
교회는 전통적으로 의심은 불신이고 죄의 결과라고 가르쳐 왔다. 죄와 의심은 모두 소외상태의 표현이기 때문에 의심을 금지한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서의 의심이 아니라 믿음의 한 요소로서의 의심도 있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 믿음으로 이해된다면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앙이 궁극적 관심이라면 의심과 비판은 필연적 요소이다. 신앙은 무한자에 대한 경험이고 교제이다. 신앙은 의심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정복하는 용기이며, 의심을 제거하지 않고 그것을 신앙의 요소로 취한다.”고 말한다.
요한복음과 비슷한 점도 많으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요한이 믿음을 강조한 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비밀말씀’을 강조한다.
이 비밀말씀은 한편으로 궁극적 실재인 ‘空’과 ‘無’라는 존재론적 차원을 말하고
다른 한편 실존적 차원인 ‘깨달음’(gnosis)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 비이원성의 자각은 깨달음의 자각과 같다.
- ‘空’은 텅빔이고 텅빈 온통이고 열려 있음 그 자체이다.
- 텅빈 온통으로서의 없음(無)의 상태는 한마디로 ‘깨끗함’이다.
- 모든 이원론적 끝(대극점)이 완전히 다 깨뜨려진 가이-없는 상태인 것이다.
- 모든 끝(대극성, 양극성, 이원론, 모순, 변증법)을 다 깨어버리는 부정 그 자체의 체험이 바로 ‘깨달음’이다.
- 나 자신의 끝(한계)까지도 깨져 다다르게 된 체험이 곧 ‘깨달음’이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이 깨지고 나 자신도 깨져 존재하는 것 속에 빠졌던 상태에서 깨어나 이제 비로소 나의 근원이고 바탕인 텅빈 온통 하나와 하나되는 체험이 곧 ‘깨우침’이다.
(이기상,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참조)
깨달음의 체험은 심오하고도 광활하다. 깨달음을 통해 내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한얼), 내 속에 있는 참나(얼나)를 봄으로써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요 20:18). 이런 맥락에서 도마의 의심은 믿음을 뚫고 이러한 깨달음의 지혜에 가닿게 하는, 믿음과 비이원성의 지혜에 도달하는 의심이다.
요한복음은 도마를 통해 ‘믿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도마를 통해 ‘믿음’을 칭송한 요한복음도 막달라 마리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요 20:18)는 바로 이 ‘봄’(見, 觀)의 차원을 잠시 간과하고 있다.
처음에 육안으로 보려고 했던 도마는 불신의 도마로 비난받지만 주님의 허락으로 안목의 욕망이 세례를 받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변화한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에는 봄(깨달음)과 믿음의 이원론이 여전히 남아 있다.
도마복음은 바로 이 이원론을 넘어선 것이다.
도마복음은 실재를 공(0)과 총체성(∞)으로 보는 비이원론의 不二적 세계로 돌파한다. 그 세계는 견인성(見人性, 얼나)과 견신성(見神性, 한얼)의 상호내주(Schechina)와 사귐(Perichoresis)이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見性의 세계, 곧 空(0)의 세계이며 하나님 나라(∞)의 세계이며, 풍성한 생명의 세계이다.
불이적 세계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산 아이를 둘로 나눌 수 없는”(왕상 3:25) 생명의 세계, 하여 우리는 생명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말씀(신 30:19)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불이적 세계이다.
저자가 도마복음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마술열쇠로 제시한 아드바이타는
최근의 기후위기나 포스트(트랜스)휴먼, 신유물론(인류세의 철학, 사물철학/신학, 객체지향적 존재론), 정동(affectus)이론 등의 이론과 함께 생명신학과 생명운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실재관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