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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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인(仁)의 실천으로 일이관지한 충서(忠恕)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여기 세 사람이 동업을 하는 옛 날 식으로 운영하는 카페가 있습니다.
각각 바리스타, 홀서빙, 설거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서로 빤히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홀서빙하는 사람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화가 납니다. 설거지에 집중이 안됩니다. 화가 나니까 손이 거칠어집니다. 그릇이 제대로 닦이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릇에 이가 빠지기도 합니다. 바리스타가 이런 그릇을 받게 됩니다. 바리스타도 기분이 나빠집니다. 자연히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카페는 어떻게 될까요?
망(亡)합니다.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홀서빙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일어나는 악순환입니다. 동업은 망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 헤어집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설거지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홀서빙하는 사람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잘하고 하고 싶은 설거지에 기쁘게 전념합니다. 그릇들이 빛이 납니다. 이 그릇을 받아든 바리스타의 마음도 환해집니다.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평판이 좋아져 손님들이 많아집니다. 홀서빙하는 사람도 신이 나서 손님들의 요구에 더 친절하고 마음을 다해서 다가갑니다. 세 사람의 사이도 좋아집니다. 이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가 잘 들립니다.
받아들임이 서(恕)이고, 기쁘게 전념하는 것이 충(忠)입니다.
이 서(恕)와 충(忠)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에 ‘자유로운 협동’이 비로소 빛나게 실현됩니다.
세 사람 모두의 생명력이 잘 살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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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서(忠恕)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6%A9%EC%84%9C(%E5%BF%A0%E6%81%95)
주요 정보
대표표제 충서
한글표제 충서
한자표제 忠恕
관련어 논어(論語), 증자(曾子), 중용(中庸)
분야 문화/인문학/유학
유형 개념용어
집필자 이형성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충서(忠恕)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성종실록』 13년 12월 15일, 『성종실록』 16년 3월 25일, 『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 『영조실록』 7년 7월 12일, 『정조실록』 4년 5월 16일, 『철종실록』 2년 9월 9일
충실한 마음과 배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아울러 일컫는 말.
목차
1 개설
2 내용 및 특징
3 변천
4 참고문헌
5 관계망
개설
공자는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고 하였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도를 실천하는데 그 원리를 충(忠)과 서(恕)로 개괄하였다. 증자의 충서(忠恕)는 공자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져, 동양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공자가 주장한 인(仁) 사상을 실천하려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공자는 증자를 불러 나의 도(道)는 하나로 관통하였다 하였다. 증자는 그것을 바로 수긍하고 충서(忠恕)로 이해하였다. 『중용』에서는 충서가 도로 나가는 것이 멀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몸에 베풀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충과 서의 성리학적 의미는 자기의 순수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이고, 그 순수한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나가는 것이 ‘서’이다. 즉 ‘충’은 내적인 것이고 ‘서’는 외적인 것이므로, 충서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학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학자들은 충서를 통해 공자의 도와 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변천
조선 성종대에 손순효(孫舜孝)는 충서 두 글자에 유념하기를 바랐다. 성종이 충서의 도(道)를 논하라고 하자, 손순효는 "속마음[中心]이 충이 되고 마음과 같음[如心]이 서(恕)가 됩니다."라고 하면서, 왕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기를 책망하면 충서의 도가 극진할 것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13년 12월 15일). 손순효는 녹봉이 없는 양계 지역 만호의 어려움을 상소하면서, 편안한 사람은 위태한 사람의 걱정을 생각하고 배부른 사람은 굶주린 사람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충서의 도리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6년 3월 25일). 중종대 성균관 대사성유숭조(柳崇祖)가 『강목십잠(綱目十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를 바치면서 충서의 마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효유할 수 없다고 하여 왕이 충서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였다. ‘충’은 수기(修己)를 위한 것이고 ‘서’는 치인(治人)을 위한 큰 덕목이기 때문이다.
숙종대 헌납(獻納)이윤문(李允文)의 상소에 의하면, 말세의 인심은 사납고 악독하므로 아무리 관후(寬厚)하고 충서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그 행정(行政)을 위임하더라도 원망이 없도록 하는 것은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였다(『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 말세에는 충서한 사람도 인의 정치를 실현하기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영조대 김상익(金尙翼)은 영조의 능 거둥 정지를 요청하는 신하들을 왕이 엄책한 것과 관련해 상소를 올려, "왕이 거절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엄중하게 꾸짖기를 너무 심히 하시고 조금만 거스린 점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시니 ‘충서’ 두 글자가 어디서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여 신료(臣僚)들에 대한 능멸을 멈출 것을 권유하였다(『영조실록』 7년 7월 12일).
정조는 좌의정서명선에게 조정에 빨리 나올 것을 회유하며, "여러 관원을 감독하고 경계하여 모든 직무에 힘쓰게 하며 충서의 도리로 미루어 나가고 광필(匡弼)의 의리로 돕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것이 하나가 되어 법도에 들어맞으면 세상이 다스려지 않고 풍속이 바로잡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충서의 도리를 언급하였다(『정조실록』 4년 5월 16일).
철종대에 송능상(宋能相)과 권돈인(權敦仁)을 탄핵하는 충청도·전라도 유생 박춘흠(朴春欽) 등의 상소를 접한 철종은 두 현인의 부당한 단락을 모아 말을 만드니 이는 충서의 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물러가도록 명하였다(『철종실록』 2년 9월 9일).
참고문헌
『논어(論語)』
『중용장구(中庸章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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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개념어
충서(忠恕)
프로필
채자왈
2009. 5. 11. 11:08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sylogos&logNo=60067354935
충서는 공자 사상의 중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그 제자 증자(曾子)가 스승 공자의 사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바 있다. 공자가 자신의 도(道)가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一以貫之)고 하자 증자는 그것을 바로 충서라고 해석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다. 충서란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仁)이라는 추상적 덕목을 실현하는 구체적 지침의 역할을 한다.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서(恕)란 용서를 뜻한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혹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을 때(忠)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진다. 진정한 용서는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서(恕)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다. 충서란 곧 ‘정성과 공감’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충을 서(恕)와 짝을 지어 말하지 않고 성(誠)과 짝을 지어 충성(忠誠, loyalty)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충성에서 성(誠)이란 본래 충(忠)의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충성이 곧 충이다. 충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충은 오히려 국가적 권위나 외부의 명령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확고한 믿음을 강조한다. 국가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때 과감히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충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충성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충이란 대상이 필요 없이 자기 홀로 실천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스스로 마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정성도 가능하다. 충의 결과를 충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고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을 의미했던 충서 개념은 이후 주희(朱熹)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강화된다. 주희에 의하면 충은 단순히 실천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까지 보장받는 인간의 본성(性)이 된다. 증자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고 윤리적 측면에서 충을 강조했다면 주희는 ‘모든 인간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하늘에 의해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충을 규정함으로써 존재론적 측면에서 강조했다.
충(忠)하지 못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지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희는 그런 사람을 존재론적 층위에서 우주의 법칙에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배척해 버린다. 윤리적 비난에는 인간적 끈끈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배척에는 그러한 여지가 원천 봉쇄된다. 단죄는 엄하되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힘은 미약하다.
주희는 충서를 형이상학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각박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충서(忠恕)스럽지 못한 결과를 빚는다. 주희의 문집과 어록에서는 실제로 충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논어(論語)에는 정연한 이론들이 많이 담겨 있지 않다. 대신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주희의 문집과 어록에는 치밀한 이론이 가득한 대신 충서를 실천하는 인간적 스승의 모습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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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 소통의 기본 윤리, 충서
https://draft.blogger.com/blog/post/edit/933322945938724907/1934083200815632555
서원 ·향교의 이해를 위한 유학 개괄 > 유학의 기본 사상
인간 사회 소통의 기본 윤리, 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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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제자 증자에게 "나의 도는 하나로 꿰었다"고 하자, 증자가 그 도가 바로 "충서"라고 해석했다. 충서란 글자의 모양 그대로 마음의 속(忠)과 같은 마음(恕)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마음 작용의 기본 원리이다. 대학에서는 충서를 혈구지도라고 했다. 즉, 내가 싫어하면 그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혈구지도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기본 윤리이다. 그러므로 충서는 유학에서 인간 상호관계의 핵심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공자(孔子)의 도(道)를 전했다고 하는 증자(曾子)에게 어느 날 공자가 말씀하였다.
“삼(參)아! 나의 도(道)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吾道一以貫之) 증자가 답한다. “예!”
이렇게 이루어진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을 듣고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 중 하나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증자가 대답했다. “충서忠恕이다.”
증자가 제시한 충(忠)은 단순히 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에서 보이듯이 마음(心)의 속(中)으로, 사람 마음의 깊숙한 뿌리다. 서(恕)는 같은(如) 마음(心)으로, 사람 간의 마음이 같아져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사람의 본심과 그 본심이 발현되는 마음작용의 원리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一)은 한자 자전의 맨 처음 글자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일이관지(一以貫之)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貫) 다르지 않은(一) 인간사회의 원리(道)이고 증자는 그것을 사람마음의 본체와 작용의 도리인 '충서'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상호소통은 ‘타인이 나에게 이렇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나도 타인에게 하지 말아야한다는 보편적 감정을 인정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대학』에서는 충서를 혈구지도로 표현하고 있다. “위에서 받은 싫은 방식으로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받은 싫은 방식으로 위를 섬기지 말며, 선배로부터 받은 싫은 방식으로 후배를 선도하지 말며, 후배로부터 받은 싫은 방식으로 선배를 추종하지 말며, 좌측의 사람한테 받은 싫은 방식으로 우측의 사람과 교제하지 말며, 우측의 사람에게 받은 싫은 방식으로 좌측의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혈구지도(絜矩之道)이다.” 『대학』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혈구지도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기본 윤리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라고 새길 수도 있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혈구지도’와 같은 도덕률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중대해진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충서는 인간 상호관계의 핵심적 윤리이다.
부가정보
혈구지도(絜矩之道)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적인 길
참고자료단행본유교대사전편찬위원회. 儒敎大事典. 서울: 성균관, 2007.단행본임종욱. 중국역대 인명사전. 서울: 이회문화사, 2010.단행본오석원. 유교와 한국유학.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4.웹페이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수정, 2018년 8월 1일 접속웹페이지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n.d. 수정, 2018년 8월 1일 접속 집필자최정준
연관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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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충서(忠恕)는 진정한 일관지도(一貫之道)가 될 수 있는가?- 서양의 황금률 논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Can Zhong-Shu in the Analects Be the “One Thread” That Really Penetrates All Things? In Comparison with the Golden Rule Debates in the West
유교사상문화연구
2020, vol., no.82, 통권 82호 pp. 325-356 (32 pages)
DOI : 10.23012/tsctc..82.202012.325
발행기관 : 한국유교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유교학
김명석 /Myeong-seok Kim 1
1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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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도(道)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는 공자의 말을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라고 해석하였고, 공자는 자공에게 자신은 많이 배워 기억하는 자가 아니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자라고 말했으며, 또 일생동안 실천할 만한 한 가지 원칙으로 서(恕)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공자의 ‘하나’가 서인지 충서인지, 또 충과 서는 무엇이며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에 대해 예부터 수많은 해석이 있어 왔다. 이 글에서는 『논어』의 충 개념에 대한 동서양의 주요 해석들을 황금률 개념과 연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논어』의 충 개념은 ‘남들과의 관계에 있어 그들의 행복이나 성공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행위나 마음의 태도’를 뜻하며, 서 개념은 황금률의 긍정적 형식뿐만 아니라 부정적 형식까지도 아우른다는 점을 밝힌다. 나아가 서양에서의 황금률 논쟁을 참고하여, 황금률로서의 서가 어떻게 다른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황금률에 대해 제기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임으로써, 서가 일정 정도의 자족성을 지닌 도덕원리라는 점을 주장한다. 본론의 종결부에서는 서의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공자 도덕철학의 주요 요소들을 모두 서 또는 충서의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 또는 충서는 ‘공자의 일관지도’일 수는 있어도 모든 덕목과 원리들을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일관지도가 되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후, 끝으로 이 주장의 철학적 함축을 논의한다.
Zengzi (曾子) interpreted Confucius’ saying that his Way is penetrated by one thread to mean that his teacher’s Way consists in nothing but zhong (忠) and shu (恕). To Zigong (子貢), another of his advanced disciples, Confucius said that he was not a person who learns a lot and memorizes them all, but one who runs a thread through them all, and also recommended shu as the single principle worth practicing for one’s whole life. Regarding these remarks, there have been numerous interpretations from the antiquity about what Confucius meant by the “one thread,” whether it referred to shu or zhong-shu, what zhong and shu respectively mean, and how they are related theoretically. In this article, I critically review important interpretations by previous scholars of the concept of zhong in the Analects in terms of the Western scholarship on the Golden Rule, and argue that zhong in the Analects refers to one’s sincere attitude or efforts to bring about success or happiness of other people, and that shu encompasses both positive and negative forms of the Golden Rule. Next, I briefly discuss the problems raised by Western scholars against the Golden Rule and argue that shu, as a Confucian version of the Golden Rule, has theoretical resources to solve those problems without relying on other principles, thereby showing that shu possesses a certain degree of self-sufficiency. Nevertheless, in the last part of the main body of the text I argue that all the important elements of Confucian moral philosophy cannot be reduced to the one principle of shu or zhong-shu, and therefore shu or zhong-shu, pace Confucius, seems to fall short of being the “one thread” that really penetrates al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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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忠), 서(恕), 황금률, 공자, 일이관지(一以貫之)
Zhong (忠), shu (恕), golden rule, Confucius, “the one thread” that penetrates al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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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충서(忠恕), 내 마음을 조율하는 공부-
백민정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2022년 01월 04일(화) 광주일보
http://m.kwangju.co.kr/article.php?aid=1641236400731624067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이 같은 발언은 유교적 황금률로 잘 알려져 있다. 공자는 ‘타인이 자신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나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않아야 한다’(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고 말했다. 공자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 제시한 행위 준칙은 그의 제자들에게 ‘충서’(忠恕)의 가르침으로 전해졌다.
충서란 무엇인가? 동아시아 사유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주희(朱熹,1130∼1200)의 해석 탓에 ‘충’(忠)은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盡己)으로, ‘서’(恕)는 자신을 타인에게 미루어 적용하는 것(推己及人)으로 이해되었다. 주희가 생각한 충서란 내 마음의 진실성에 근거해서 타인을 대우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서’는 내가 아니라 타인을 다루는 방법을 의미했다. 이것은 나에게 선함이 있으면 타인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나에게 악함이 없으면 타인에게 그 악함을 없애도록 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주희는 ‘서’의 방법이 상대에게 선할 것을 요구하고 상대에게 불선을 책망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진실한 마음(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그가 ‘서’를 타인을 교정하고 훈육하는 행위로 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충서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말한 충서란 ‘진실한 서’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때 ‘서’는 남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훈련하고 닦는 공부를 뜻한다. 말하자면 다산은 타인에게 미루어 적용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조율하는 공부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서(恕)라는 것이 본래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自治)인데 이것을 거꾸로 잘못 말하면 간혹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治人)에 가깝게 된다”고 우려한다. 다산은 옛 성현이 말하는 ‘서’는 우리가 남에게 선함을 요구할 때 자신에게 먼저 그것이 있도록 노력하고, 남의 잘못을 비판할 때 자신에게서 먼저 그것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태도라고 이해했다.
이 점에서 다산은 주희가 제시한 충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충서란 순수하게 자신을 닦는 내 마음의 공부인데 주희가 이것으로 남을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더구나 다산은 남을 교정하고 가르친다는 의미의 치인(治人)도,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으로 내가 그 사람을 섬기는 행위(事人)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남을 섬기려고 할 때 내가 남에게서 바라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지 못하면, 오히려 나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요컨대 핵심은 ‘서’의 의미가 나 자신을 수련하고 조율하는 데 있지, 내가 타인에게 선을 요구하고 불선을 책망하도록 강제하는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서(恕)의 행위 준칙은 유교의 윤리학과 도덕철학의 핵심을 밝히는 매력적인 주제로 부각되었다. 충서의 논리는 특수한 도덕률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관계에서 보편적인 행동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간 유교의 충서론은 동서양의 보편적 황금률로 해석되거나 혹은 칸트(Kant, Immanuel,1724∼1804) 도덕철학의 정언명법과 함께 평가되었고,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정치철학과 비교되기도 했다. 충서를 타자에 대한 상호 존중과 배려, 공감과 관용으로 풀이하는 현대적 해석들도 등장했다. 물론 유교적 문맥에서 ‘서’는 차이나 다름에 대한 용인과는 구별된다.
유학자 다산은 왜 ‘충서’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이라고 보았을까? 그는 타인에 대한 대처나 인간관계의 기본은 우선 자신에게 열쇠가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타인 관계는 내 자신을 돌보고 나를 수련하고 변화시키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다산은 인륜 관계에서 상대에게 ‘서’를 실천하는 것이 자수(自修), 즉 자기 연마와 수양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타인 관계가 내 자신과의 관계, 즉 내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비추는 거울임을 의미한다.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나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바라고 희구하는가? 나는 자신과 어떻게 화해하기를 원하는가? 타인 관계란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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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충서(忠恕)
https://contents.premium.naver.com/kimyoungk/knowledge/contents/211116132836508Ew
철학적 사유는 논증적 사유이다. 즉 철학은 어떤 문제나 주제에 대해서 논증을 제시하고, 그 논증이 정당한지에 대해
서 따져보는 지적 활동이다. 가령 신의 문제에서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신의 존재를 우리는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시된 논증이 정당한지, 혹은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바로 철학적 활동이다.
논증적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자의 [논어]는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논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
작되고 있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벗이 멀리서 찾아주면 그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의 이런 말씀이 모두 소중하고 맞는 이야기처럼 보
인다. 배우고 때맞추어 익혀라. 멀리 있는 벗을 찾아가라.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말라. 이런 공자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우리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공자의 말씀이 참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무슨 이유 때문에 공자의 이런 말씀에 감명을
받는 것인가? 공자의 [논어]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하기를 제안하고 권유한다.
공자의 [논어]는 논증적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논증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미흡하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논어]를 읽다가 그냥 뻔한 이야기만 반복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논어] 읽기를 포기해 버
리곤 했다. 그렇지만 [논어]의 어떤 주장에 대해서 내가 공감하고 감동한다면, 그 공감과 감동의 이유를 성찰해 보아
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논어]를 읽으면서 하나의 논증을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가령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즐거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적어도 내 발전이나 성숙함을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논증을 구성할 수
있다.
철학은 우리가 공감하는 주장에 스스로 그 논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점 때문에 철학은 가만히 수동적으로 경
청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이 아니다. 다양한 일상적 일들에도 골치가 아픈데, 철학은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
로 생각하면서 논증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나아가 그것이 설득력이 있고 정당한지 스스로 따져 보는 골치 아픈 일
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자가 말하는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21.11.16. 오후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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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풍경 로그인
나는 [논어]에서 가장 핵심 개념의 하나가 충서(忠恕)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말한다. “내 도(道)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그러자 공자의 제자들이 증자에게 묻는다. 하나로 관통되어 있는 그 도가 무엇인가? 증자는
그것이 충서(忠恕)라고 말한다. 그런데 글자적 의미에서 “충성”과 “용서”를 의미하는 충서(忠恕)라는 것이 무엇인
가?
“평생토록 실행할 만한 것이 있느냐”는 자공(子貢)의 물음에 공자는 서(恕)라고 답변한다. 그런데 그 서(恕)가 무엇
인가? 공자는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 베
풀지 마라”, 혹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것,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닌
것, 혹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마땅히 남에게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공자가 서(恕)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만, 충서(忠恕)의 개념은 증자를 통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전문
학자들 사이에 충서와 서가 과연 같은 것인지, 충서 개념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충(忠)의 개념이 무엇인지 논의
가 된다.
풍우란은 그의 [중국철학사]에서 “자기 욕망을 확인하고 이윽고 타인의 욕망을 인정함”은 곧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 주는 것”이 충(忠)이라고 주장한다. 풍우란이 지적하는 충서(忠恕)
는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을 두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충(忠)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
하는 적극적 방식을 지적하고 있으며, 서(恕)는 그 소극적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은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기 좋은 것이라는 주장
과 논리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반면에 풍우란은 충(忠)을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기독
교의 황금률과 동일한 형식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황금률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충서가 주장하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이 도덕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
서 공자의 충서(忠恕)는 하나로 관통하는 도덕적 원리로서 미흡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렇지만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명령을 “인간적,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仁), 즉 ‘진정한 인간다움’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논
어]의 맥락에서 내가 하기 싫은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이 사소한 개인적 취향에 해당되는 것
이거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충서(忠恕)를 수정하여 이해하면, 충서(忠恕)는 칸트가 도덕의 원리로 주장하는 “모든 인간을 단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정언 명령과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공자나 칸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우리 인간
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면서 인격체로 대우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다. 인간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 예수가 말한다. 모든 인간을 형제로 대우하라. 이웃 사
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마르크스가 말한다. 많이 소유하는 대신에 존재하라.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인간으로 대
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맥락에서 공자가 말한다. 네가 하기 원하지 않는 것을 타
인에게 하지 말라. 네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라.
그런데 왜 내가 하기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하면 안 되는가? 내가 하기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해야 하지 않
아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는가? 즉 평생 동안 실행해야 할 서(恕)의 원리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음 시간
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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