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7

書評「大貫隆・金泰昌・黒住真・宮本久雄編『一神教とは何か――公共哲学からの問い』」、『福音と世界』2006年9月号 | 書評 | 研究活動 | 小原克博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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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評「大貫隆・金泰昌・黒住真・宮本久雄編『一神教とは何か――公共哲学からの問い』」、『福音と世界』2006年9月号
投稿日2006年8月15日カテゴリ書評タグ一神教
 本書は、二〇〇四年一月に開催された「京都フォーラム」主催による第五二回公共哲学京都フォーラム「唯一神教と自・他論」で発表された内容に基づき、編集されたものである。そのことは「凡例」に記されているが、そもそも「京都フォーラム」や、それが目指している「公共哲学」についてなじみのない一般読者にとっては、本書を読み進めながら、その意図を察することを求められることになる。しかし、公共哲学が直接のテーマにな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で(本書の副題は「公共哲学からの問い」となっているが)、それについて理解せずとも、各章を味わうことはできる。
 本書は、九つの発題と二つの総合討論、一つの発展協議から構成されている。また、各発題の続きには討論が付されているので、全体として討論の占める割合はかなり大きい。討論はあまり編集上の整理はされずに掲載されているので、実際の雰囲気を伝えているだけでなく、本書に登場する第一線の研究者たちの目下の関心事やこだわりを随所に感じ取ることができ、興味深い。ただし、すべての討論が必ずしもかみ合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中には、誤解されたり、不愉快な質問をされたりして、怒りの様子がにじみ出ているような箇所もある。討論には確かに粗密の差があるが、全体としては、発題の論点を再確認できるという意味で有益であろう。
 本書の主タイトルは「一神教とは何か」である。そのテーマに対し、各発題が「自・他論」という焦点を緩やかに共有しながら、それぞれの専門的見地からアプローチしている。論文調の堅牢な発題もあれば、発題のテープ起こしが、ほぼそのまま原稿化されているようなものもあり、スタイルは様々である。分量も多いものからコンパクトなものまで差があるが、ここで各発題の論旨を詳細に追っていく紙面の余裕はないので、それぞれにおいて興味深いと思われる論点を中心に概要を紹介しておく(敬称略)。
 発題Ⅰ「新約聖書における神と自他――人格主義的神学と場所論的神学」(八木誠一)。ここで八木は、人格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関係において、人格を成立させているのが人格主義的神学だけでなく、場所論的関係もまた重要な役割を果たすことを強調する。前者の論理にのみ依存することを八木は問題視するが、場所論を適切に視野に入れることによって神義論的な問題を回避できるだけでなく、それがまたイエスの立場であり、仏教との親近性へと開かれていく道であることを指摘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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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発題Ⅱ「旧約聖書の宗教はいかなる意味で「一神教」的であったのか」(山我哲雄)。本書の中で、もっとも正面から一神教の概念整理に取り組んでいる発題である。ヤハウェ唯一神観が後代に成立してから、それ以前にあった旧約の伝承が「検閲」されたり、「校閲」されたりしてきたということを、様々な「検閲漏れ」、すなわち多神教的なイメージを取り上げながら紹介している。また、唯一神観の成立史をわかりやすく描写している。
 発題Ⅲ「人間の淵――ハーヤー存在とアウシュヴィッツ的解釈学」(宮本久雄)。アウシュヴィッツを根源悪のメタファーとして、あるいは解釈学的枠組みとして用いながら、旧新約聖書の様々なテキストを素材に用いて、物語のプネウマ的解釈を提示していく。そこで主題となる存在者は、空間的自己同一性を強調する西欧的存在論と区別される形で、ヘブライ的存在ハーヤーとして位置づけられる。
 発題Ⅳ「救済史の物語と神義論――一神教の落とし穴」(大貫 隆)。ここで「一神教の落とし穴」とは、一神教という枠組みの中で民族や共同体の「大きな物語」が救済史として語られるとき、不可避的に神義論が胚胎し、その中で、個人の苦難が忘れ去られてしまう事態のことを指している。またヨブ記と同様、モーセ契約が失効しているようなユダヤ教黙示思想においても、歴史は直線的に進むプロセスと理解されているのに対し、洗礼者ヨハネ、イエス、パウロがそれとは反対の方向、すなわち、救済史の神学から「新しい創造」の神学への転換の道(「宇宙の晴れ上がり」)を示していると大貫は語る。
 発題Ⅴ「アウグスティヌスの神研究――日本を公共性へと開く「神論」への途を求めて」(加藤信朗)。加藤は「神の国」が、その市民でありたい願う人々によって作られる共同体であり、神聖政治ではないことに注意を払いながら、我々が「地の国」に生きることの意義を説く。またそれが、日本の自己閉鎖性を克服していく道であることを示唆する。
 発題Ⅵ「唯一神と人格神」(鶴岡賀雄)。唯一神教における神の特質を、その唯一性より、むしろ、ペルソナ性に注目して描写している。旧約聖書や十字架のヨハネを援用し、我汝関係、「一」性、「二」性などの人称言語の作法を通じて、ペルソナ性と「私たち」としての共同体の関係を明らかにしようと試みている。
 発題Ⅶ「日本思想における「一神教的なもの」」(黒住 真)。一神教と多神教を対立的にとらえるのではなく、経験的な次元では、相互に関係性があると語る。日本神話や日本宗教の中にも一神教的なものの考え方があることを指摘すると同時に、近現代における一神教と多神教のあり方に対しては、歴史的な批判が必要であると主張する。
 発題Ⅷ「イスラーム政治思想における自と他」(池内 恵)。キリスト教には「神のものは神へ、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へ」という発想があるのに対し、イスラーム教において政治と宗教を分け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われる。その言説にまつわる誤解を解きながら、その根拠や歴史的経緯について、イスラーム政治思想の立場から語っていく。また、イスラーム教における自・他論の代表例としてジハード理解を取り上げ、さらに、イスラーム社会内部においても、善や共同体の秩序をめぐって、絶えざる緊張関係があることを指摘する。
 発題Ⅸ「シーア派少数派における神観と他者認識」(菊池達也)。シーア派の中のイスマーイール派や、その分派であるドゥルーズ派に焦点を当てることによって、少数派と多数派との間に生じる他者認識を考察している。イスラーム教内部における正統と異端をめぐる緊張は今なお存在しており、その状況に対して、西欧的な公共空間の概念(公と私の区別)を安易に持ち込むことはできないと菊池は主張する。
 以上の概要からも察せられるように、必ずしも、それぞれの発題の間に有機的な関連があるわけではない。しかし討論を通じて、全体に通底するような課題を模索する努力は十分にうかがうことができるし、また時には発言の中から先鋭的な見解を聞き取ることもできる。研究者同士が交わす熱い議論に関心がある方は、本書を存分に堪能する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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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最後に、本書が設定している課題、すなわち「一神教とは何か」という問いに対して、本書の内容が、全体としてどの程度応えているのかを最後に考え、あわせて、今後の課題についても言及したい。冒頭で、本書は一神教を外側からではなく「内側からその生きた現実を証し語ろうとする」と明確に述べられている(ⅰ頁)。本書の大半は聖書学や思想史で占められており、多様な一神教世界の葛藤や生々しい現実は、そもそも射程の範囲外であるのは、本書が(公共)哲学的関心を基盤にしていることから、ある程度やむを得ないと言える。しかし、本書全体を通じて感じ取られる一神教は、あくまでもキリスト教の視点や関心から整理された一神教であり、複雑に絡み合ったユダヤ教・キリスト教・イスラーム教の内側からその生きた現実を語る、ということにはなっていない。討論の中で大貫が「一神教という言い方は、私は自分自身のものとして、あまりリアリティがないのです」(三二七頁)ともらす言葉は、他の参加者にも共有される感覚であろうし、だからこそそこに、キリスト教と一神教の間を橋渡ししようとする本書の意図があるのは理解できる。しかし、キリスト教から(抽象化された)一神教概念への熱い思い入れは感じられても、現実の生きた他者としての一神教世界、具体的にはユダヤ教やイスラーム教からキリスト教がどのように見られているのかについての考察は、ほとんどない(ちなみにユダヤ教に関する発題は一つもない)。討論の中で池内が「ほとんどの先生方のまことに高度な議論が、往々にして他者性を失いがちだということに気づくたびに、そう感じます」(四二五頁)と語るのを、皮肉として受けとめるべきではないだろう。
 もちろん、日本社会の中で一神教世界の現実に開かれていくことは容易ではない。しかし、討論の中でも、しばしば指摘されていた日本社会の自閉性を、まずは日本の神学の自閉性として自覚し、それを克服していく道を見いだすべきであろう。たとえば、聖書学者の発題の中には、組織神学を専門とする私にとっても啓発的な内容が多々あった。専門性の中に自閉す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教がマイノリティであるからこそ可能となる、越境的な「宇宙の晴れ上がり」(大貫)を、日本の神学的地平にも見出したいと感じさせる一書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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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오즈키 타카시, 김태창, 쿠로스미 마코토, 미야모토 히사오 편 「일신교란 무엇인가――공공 철학으로부터의 질문」, 「복음과 세계」 2006년 9월호
게시일: 2006년 8월 15일카테고리 서평태그 일신교


 본서는, 2004년 1월에 개최된 「교토 포럼」 주최에 의한 제52회 공공 철학 교토 포럼 「유일 신교와 자·타론」에서 발표된 내용에 근거해, 편집된 것으로 있다. 이것은 「범례」에 기재되어 있지만, 원래 「교토 포럼」이나, 그것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공공 철학」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에게 있어서는, 본서를 읽으면서, 그 의도를 찰것을 요구된다. 그러나 공공 철학이 직접적인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본서의 부제는 「공공 철학으로부터의 질문」이 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이해하지 않아도, 각 장을 맛볼 수는 있다.
 본서는 9개의 발제와 2개의 종합토론, 1개의 발전협의로 구성되어 있다. 또, 각 발제의 계속에는 토론이 붙어 있기 때문에, 전체로서 토론이 차지하는 비율은 꽤 크다. 토론은 그다지 편집상의 정리는 되지 않고 게재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서에 등장하는 제일선의 연구자들의 현재의 관심사나 고집을 곳곳에 느끼는 수 있고 흥미 롭습니다. 다만, 모든 토론이 반드시 맞물리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오해되거나 불쾌한 질문을 하거나 하여 분노의 모습이 흩어져 있는 곳도 있다. 토론에는 확실히 조밀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발제의 논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로 유익할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제목은 "일신교란 무엇인가"이다. 그 주제에 대해, 각 발제가 「자・타론」이라고 하는 초점을 완만하게 공유하면서, 각각의 전문적 견지로부터 어프로치하고 있다. 논문조의 견고한 발제도 있고, 발제의 테이프 발생이 거의 그대로 원고화되고 있는 것도 있어, 스타일은 다양하다. 분량도 많은 것부터 컴팩트한 것까지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 각 발제의 논지를 상세하게 쫓아가는 지면의 여유는 없기 때문에, 각각에 있어서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논점을 중심으로 개요를 소개해 둔다 경칭 약어).
 발제Ⅰ「신약성경에 있어서의 신과 자타――인격주의적 신학과 장소론적 신학」(야기 세이이치). 여기서 야기는 인격과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 있어서, 인격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 인격주의적 신학뿐만 아니라, 장소론적 관계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자의 논리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야기는 문제시하지만, 장소론을 적절히 시야에 넣음으로써 신의론적인 문제를 회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예수의 입장이며 불교와 친근성으로 열려가는 길임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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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제Ⅱ「구약성경의 종교는 어떠한 의미로 「일신교」적이었는가」(야마가 테츠오). 이 책 중에서 가장 정면에서 일신교의 개념 정리에 임하고 있는 발제이다. 야하웨 유일 신관이 후대에 성립하고 나서, 그 이전에 있던 구약의 전승이 「검열」되거나 「교열」되어 왔다는 것을 다양한 「검열 누설」, 즉 다신교적인 이미지 를 다루면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유일하게 신관의 성립사를 알기 쉽게 묘사하고 있다.
 발제Ⅲ「인간의 후치――하야 존재와 아우슈비츠적 해석학」(미야모토 히사오). 아우슈비츠를 근원악의 메타파로 혹은 해석학적 틀로서 이용하면서, 구신약성서의 여러가지 텍스트를 소재에 사용하여 이야기의 푸네우마적 해석을 제시해 나간다. 그래서 주제가되는 존재자는 공간적 자기 동일성을 강조하는 서구적 존재론과 구별되는 형태로 히브리적 존재 하야로 자리 매김된다.
 발제Ⅳ「구제사의 이야기와 신의론――일신교의 함정」(오오즈키 타카시). 여기서 「일신교의 함정」이란, 일신교라는 틀 안에서 민족이나 공동체의 「큰 이야기」가 구제사로서 말해질 때, 불가피하게 신의론이 배태해, 그 중에서, 개인의 고난이 잊혀져 버리는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또한 욥기와 마찬가지로 모세계약이 해지된 유대교 묵시사상에서도 역사는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 반면 세례자 요한, 예수, 바울이 그와 반대 방향, 즉 구제사의 신학에서 '새로운 창조'의 신학으로의 전환의 길('우주의 맑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오오츠키는 말한다.
 발제 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연구――일본을 공공성으로 여는 「신론」에의 길을 찾아라」(카토 신로). 가토는 '신의 나라'가 그 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신성정치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리가 '땅의 나라'에 사는 것의 의의를 전한다. 또한 그것이 일본의 자기 폐쇄성을 극복해 나가는 길임을 시사한다.
 발제 Ⅵ 「유일신과 인격신」(쓰루오카 가오). 유일한 신교에서의 신의 특질을, 그 유일성보다는 오히려, 페르소나성에 주목해 묘사하고 있다. 구약성서나 십자가의 요한을 원용하고, 가성관계, '1'성, '2'성 등의 인칭언어의 작법을 통해 페르소나성과 '우리'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를 밝히려고 시도 있다.
 발제 Ⅶ 「일본 사상에서의 「일신교적인 것」」(쿠로스미 마코토). 일신교와 다신교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관계성이 있다고 말한다. 일본 신화나 일본 종교 중에도 일신교적인 것의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근현대에 있어서의 일신교와 다신교의 본연의 자세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발제 Ⅷ 「이슬람 정치 사상에 있어서의 자신과 다른」(이케우치 메구미).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으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발상이 있는 반면, 이슬람교에서 정치와 종교를 나눌 수 없다고 한다. 그 언설에 관련된 오해를 풀면서 그 근거와 역사적 경위에 대해 이슬람 정치사상의 입장에서 말해 간다. 또 이슬람교에 있어서의 자·타론의 대표예로서 지하드 이해를 거론하고, 또한 이슬람 사회 내부에 있어서도, 선이나 공동체의 질서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긴장 관계가 있는 것을 지적한다.
 발제 Ⅸ 「시아파 소수파에 있어서의 신관과 타자 인식」(키쿠치 타츠야). 시아파 속 이스마일파와 그 분파인 드루즈파에 초점을 맞추어 소수파와 다수파 사이에 발생하는 타인 인식을 고찰하고 있다. 이슬람교 내부의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긴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상황에 대해 서구적인 공공 공간의 개념(공과 나의 구별)을 안이하게 반입할 수 없다고 기쿠치는 주장한다 .
 위의 개요에서 알 수 있듯이, 반드시 각각의 주제 사이에 유기적인 관련이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토론을 통해 전체에 통저하는 과제를 모색하는 노력은 충분히 엿볼 수 있고, 또 때로는 발언 속에서 선예적인 견해를 들을 수도 있다. 연구자들끼리 교제하는 뜨거운 논의에 관심이 있는 분은 본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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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본서가 설정하고 있는 과제, 즉 「일신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본서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응하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생각해, 아울러, 향후의 과제에 대해서 또한 언급하고 싶다. 서두에서 본서는 일신교를 바깥에서가 아니라 “안쪽에서 그 살아있는 현실을 간증하고 말하고자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ⅰ페이지). 본서의 대부분은 성서학이나 사상사에서 차지되고 있어 다양한 일신교 세계의 갈등이나 생생한 현실은 원래 사거리의 범위 밖인 것은, 본서가 (공공) 철학적 관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부득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서 전체를 통해 느껴지는 일신교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시점이나 관심에서 정리된 일신교이며, 복잡하게 얽힌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안에서 그 살아있는 현실을 말한다는 것에 되지 않았습니다. 토론 속에서 오오츠키가 「일신교라는 말은, 나는 자신의 것으로서, 별로 리얼리티가 없는 것입니다」 브로시, 그래서 그곳에 기독교와 일신교 사이를 다리려고 하는 본서의 의도가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추상화 된) 일신교 개념에 대한 뜨거운 생각은 느껴지더라도 현실의 살아있는 타인으로서의 일신교 세계, 구체적으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은 거의 없다 (덧붙여서 유대교에 관한 발제는 하나도 없다). 토론 속에서 이케우치가 「대부분의 선생님의 진정으로 고도의 논의가, 흔히 타자성을 잃어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렇게 느낍니다」(425페이지)라고 말하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일본 사회 속에서 일신교 세계의 현실로 열려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토론 속에서도 종종 지적되고 있던 일본 사회의 자폐성을, 우선은 일본의 신학의 자폐성으로서 자각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성서학자의 발제 중에는 조직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나에게도 계발적인 내용이 많이 있었다. 전문성 속에 자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는, 월경적인 「우주의 맑음」(오오츠키)를, 일본의 신학적 지평에도 찾아내고 싶게 하는 것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