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8

조성환의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 다른백년

Sunghwan 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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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대표의 제안으로 <다른백년>에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앞으로 6개월간 매달 2차례씩 <조성환의 K-사상사>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야 한다...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 다른백년


조성환의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기화(氣化)와 경행(敬行) – 개벽파선언은 지구학선언이다

조성환 2022.06.15






기후변화 시대의 인간의 행위

3년 전에 다른백년에서 <개벽파선언>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이번에는 <K-사상사>라는 제목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것도 서신 교환이 아니라 단독 저술이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귀한 기회를 주신 이병한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3년 전의 기획이 ‘개벽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면, 이번 연재는 ‘지구학’으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번 <K-사상사>는 지난 3년 동안의 지구학의 여정을 소개하는 자리가 될 것 같다.

사실 개벽학과 지구학, 지구학과 개벽학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미 《개벽파선언》에서 이병한 선생이 “개벽학은 지구학이다”라고 천명했듯이, 개벽학에는 지구학적 문제 의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반 동안은 이것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선언》은 “지구학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 인문학계에서 최초로 지구학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다만 당시에 나는 아직 지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벽파선언》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우연히 ‘지구인문학’ 개념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반이 지난 지금은 ‘인류세인문학’으로 관심이 좁혀졌다. 차크라바르티 식으로 말하면 ‘행성인문학(planetary humanities)’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다만 아직 ‘행성’이라는 말은 국내에서는 생소해서 ‘지구’를 사용하기로 한다).



과학인문학과 지구인문학

‘인류세(anthropocene)’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지구인문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인류세와 같이 지구적 차원의 담론을 통칭하는 신조어다. 형태만 보면 라투르가 말하는 ‘과학인문학’의 ‘과학’에 ‘지구’가 들어간 모양이다.

지구인문학의 주어가 ‘지구’라면 종래의 인문학의 주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이다. 마치 ‘근대’라는 말에 ‘서구’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듯이, ‘인문학’에는 ‘인간’이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들만의 인문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사회와 국가가 인문학의 중심 주제였고, 자유나 권리, 복지나 공공성 같은 ‘가치’들은 인간에 한정되었다.

그런데 라투르의 과학인문학이 그렇듯이, 지구인문학은 인간 이외의 존재, 즉 사물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사물(hyperobject)인 지구를 주어 자리에 넣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저기에서 징후가 나타나듯이, 지구의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이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 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제서야 인간의 생존 조건의 가장 근저에 지구라는 거주지가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니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자각을 한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이다.



지구는 인간의 조건이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조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국가’라고 답했을 것이다. 국적이 없으면 난민이 되고, 나라를 잃으면 주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님’을 주제로 한 “님의 문학”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자유를 상실한 식민지 지배 하에서, 한국인이 추구했던 보편적 가치(생명, 평화, 자유)를 ‘님’이라는 시어로 그리워 한 것이다. 그래서 만해의 《님의 침묵》(1926)은 80년대로 말하면 〈님을 위한 행진곡〉에 다름 아니다. 다만 그 님의 성격이 종교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런데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근대 국가를 만들어 갈 무렵에, 아렌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조건을 ‘지구’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The earth is the very quintessence of the human condition).” –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서론」, 한길사, 2020, 78쪽.

이 한 마디는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지구”이다. 실제로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의 영어 원서에는 ‘earth’라는 말이 200번 넘게 나오고 있다. 아렌트를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이 1958년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거주지로서의 지구

그렇다면 지구는 어째서 인간의 핵심 조건인가? 이에 대해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구는 우주에서 인간이 별다른 노력 없이, 그리고 그 어떤 인공물도 없이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거주지(habitat)를 제공하는 유일한 곳이다. – 《인간의 조건》, 78쪽

지구가 인간의 조건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유일한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 안에서 다른 유기체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지구 내 존재’이다(김봉곤・야규 마코토, <‘실학’의 지구기학>, 《지구인문학의 시선》, 모시는사람들, 2022, 194쪽). 프랑스의 철학자 에드가 모랭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가 인류의 조국”인 것이다(에드가 모랭・안느 케른 지음, 이재형 옮긴, 《지구는 우리의 조국》, 문예출판사, 1993). 사실 전통 시대의 문명은 대개 이런 인간관과 자연관을 표방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천지론(天地論)이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상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세계와 인공세계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지구라는 천연 조건과는 별도로 인간만의 거주 조건을 따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구로부터의 독립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과학기술에 의한 인공세계의 구축이다. 여기에서 세계는 둘로 양분된다. 하나는 자연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세계이다.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의 시작이다.

인간 실존은 인공적 세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동물적인 환경과 구분된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이런 인공적 세계 밖에 있으며, 인간은 이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관계한다. 《인간의 조건》, 78쪽.

그런데 아렌트가 보기에 ‘생명’은 인공세계만으로는 살 수 없다. 생명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세계가 없으면 인공세계도 무용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세계는 인공세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방이라는 용도를 가능하게 하는 텅 빈 허공이다.

반면에 자연 세계는 인공세계 없이도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다. “생명은 인공세계 밖에 있다”는 아렌트의 말은 “생명은 인공세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결국 인공세계는 생명의 편의를 위한 부차적인 조건일 수는 있어도, 생명의 본질적 조건은 아닌 셈이다.



지구파괴와 정치개벽

문제는 자연세계와 인공세계의 분리라는 그 사실보다는 양자의 부조화 상태이다. 자연과 인공, 달리 말하면 무위(無爲)와 유위(有爲)가, 조화를 이루는 상생관계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하는 상극관계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지식을 이런 목적에 사용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은 과학적 수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가의 결정에 맡길 수 없다. – 《인간의 조건》, 79쪽.

여기에서 아렌트는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과학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식으로 말하면 “정신이 물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문명의 이기(利器)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는 한 과학의 발달은 멈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이성은 – 박중빈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정신’은 –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 도덕적인 힘을 기르는 것을 천도교와 원불교에서는 ‘정신개벽’이라고 하였다. 결국 아렌트는 개벽학적으로 말하면 “지구파괴 시대의 정치개벽”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 문제를 개인의 수양이나 도덕의 차원에서 논하지 않는다. 정치철학자답게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간다. 바로 여기에서 과학과 정치의 이분법이 다시 물어지게 된다. 과학이 과학의 영역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의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는 것이다. 라투르 식으로 말하면 인간과 자연, 문화와 자연은 결코 근대인이 생각하듯이 이원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라투르는 말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고.



인간해방과 지구소외

천도교나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주창한 것은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물질문명의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는 어떻게 해서 지구인문학적 관점을 갖게 되었을까? 당시는 아직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유행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따라서 단순한 과학기술의 발달만으로는 지구적 차원의 물음을 던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의 발사였다. 《인간의 조건》이 나오기 1년 전에 소련에서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의 메스콤에서는 인간 이성의 최대 성과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 아렌트의 해석은 달랐다.

“인간의 아버지인 신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던 근대의 인간 해방과 세속화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 지구를 거부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끝나야 하는가?” – 《인간의 조건》󰡕 78쪽.

여기에서 아렌트는 과학기술을 이용한 지구탈출을 인류 해방의 사건이 아니라 ‘지구 거부’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속화된 인간이 자신의 생존 조건인 지구를 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지구소외’라는 말로 개념화하였다( 《인간의 조건》 316쪽, 330쪽). 따라서 아렌트의 해석대로라면 1957년은 인간에 의한 지구소외의 원년이 되는 셈이다.

확실히 근대 유럽적 세계관에서 보면 지구는 인간을 구속하는 “감옥”일지 모른다(77쪽).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이상이 서구 계몽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비로소 지구탈출이라는 이상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근대적 또는 비유럽적 세계관에서 보면 지구는 인간의 ‘어머니’에 다름 아니다. 아렌트가 말한 ‘어머니 지구(Mother Earth)’는 서구의 성서 전통의 배경에서 나온 표현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을 ‘천지(天地)’라고 불렀다.



천지(天地)와 자연(Nature)

《농본주의를 말한다》의 저자 우네 유타카(宇根豊)는 자연과 천지의 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과 천지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천지와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자연과 인간은 별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천지는 사람을 감싸고 있지만, 자연은 인간의 외부에 있어서 대상화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자연관과 천지관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명사 ‘자연’은 메이지 20년대(1887~1896)에 ‘nature’의 번역어로서 당시까지 ‘자연스럽다’라는 의미로밖에 사용되지 않던 부사의 ‘자연’이라는 표현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말입니다. 에도시대에는 ‘nature’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선조는 인간과 자연을 나누지 않고 인간도 자연도 포함하는 ‘천지’라는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우네 유타카 지음, 김형수 옮김, 《농본주의를 말한다》, 녹색평론사, 2021, 62쪽.

‘자연(自然)’은 《논어》나 《맹자》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노자》나 《장자》에 등장하는 말이다. 즉 도가(道家)에서 유래하는 철학 용어이다(물론 나중에는 주자와 같은 신유학에도 수용되지만). 도가 문헌에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원래 그러하다’는 의미의 술어였다. 이 말이 19세기에 서양어 nature의 번역어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어 nature에 해당하는 동아시아적 개념은 천지(天地)였다. 그렇다면 nature와 天地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네 유타카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nature는 인간과 분리되지만 天地는 인간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nature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전형적인 서구 근대적 자연관을 대변한다. 그것은 인간의 거주지나 조건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원이자 도구로서의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관이 자연소외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지적한 지구소외(earth alienation)는 자연소외(nature alienation)의 궁극이자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가장 큰 범위가 지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을 바꾸는 인간

반면에 동아시아에서 천지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조건으로 생각되어 왔다.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준다”[천부지재天覆地載]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만물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햇볕과 땅에서 제공하는 곡식, 그리고 바다에서 생산하는 먹거리 등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는 인간과 만물의 생존 조건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천지관을 윤리화하고 의례화한 것이 19세기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은 “천지야말로 만물의 포태(胞胎)”라고 하였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이 태아를 잉태하고 있듯이, 천지가 만물을 품으면서 길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월에게 있어 천지는,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거주지”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천연의, 유일한, 신성한 거주지이다. 다만 해월은 그것을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까지 밀고 갔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천지에 대한 공경과 감사의 태도를 경물(敬物)과 식고(食告)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인류세라는 시대 규정은 nature나 天地와 같은 동서양의 자연 인식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영역에 침입하면서 자연의 존재 방식까지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기후변화다. 기후는 개념적으로는 천지 중에서 ‘천’에 해당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기후변화는 “인간이 하늘을 바꾼 사건”이다. 이렇게 인간(anthropo)의 영향력이 커진 시대(cene)를 과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세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천지 안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천지 안에 살면서 천지를 개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 세계가 자연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고, 그 변화가 다시 인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 세계든 자연 세계든 ‘기후’라는 조건 없이는 살 수 없다. 인류세는 인간에게 가장 핵심적인 생존 조건 중의 하나가 ‘기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nature/天地에서 ‘가이아’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가이아(gaia)’에 주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근대적인 nature 개념으로는 인류세적인 지구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이아’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인데, 1970년대에 영국의 대기화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지구의 대기를 연구하던 러브록은 1965년 어느 날, “지구가 스스로 기후와 그 구성 성분을 조절함으로써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 조건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통찰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지구를 여신 ‘가이아’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러브록에 의하면, 가이아는 단일한 전체로서의 지구를 의미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Globe’로서의 지구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조성은 지구에 사는 모든 구성원들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구성원에는 인간은 물론이고 바다, 바위, 대기와 같은 무생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지구는 화성이나 금성과는 달리 (…)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항상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지구가 갖는 이런 속성은 태양계 내에서 지구가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 때문이 아니라, 지표면에서 생활하는 생물체들 덕분이다. (…)

지구 생물권(biosphere)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생물체들과 대기, 해양, 암석 등 사실상 지구의 모든 존재들이 지구의 조절 작용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

– 제임스 러브록 지음, 홍욱희 옮김,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서문」, 갈라파고스, 2018, 9쪽, 12쪽.

여기에서 ‘생물권’은, 역사학자 토인비에 의하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쓴 개념으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film)”을 가리킨다. 그것은 육지와 해양과 대기로 둘러싸인 막으로, 생물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거주지(habitat)이다(A.J. 토인비 지음, 강기철 옮김, 《세계사 : 인류와 어머니되는 지구》, 1983, 제2장 「생물권」, 20쪽). 따라서 아렌트가 “지구는 인간의 유일한 거주지”라고 했을 때, 이 거주지는 샤르뎅의 개념으로 말하면 ‘생물권’에 해당한다.

그래서 결국 가이아 가설에 의하면, 지구의 환경은 지구의 구성원들이, 달리 말하면 천지에 사는 만물들이, 각자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러브록은 편의상 “지구가 조절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만물이 조절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가 지구환경을 만들어 가는 구성원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가이아와 한울/하늘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에 의하면, 지구상에 거주하는 만물은 지구라는 공간에 수동적으로 살고 있는 객체가 아니다. 토마스 베리의 개념을 빌리면 객체가 아닌 ‘주체’이다. 자신들의 거주 환경과 생존 조건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물은 하나의 ‘행위자(agent)’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20세기 초에 천도교에서 제창한 ‘한울’ 개념을 연상시킨다. 한울은 종래의 ‘천지’와는 다른 동학적 ‘지구’ 내지는 천도교적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이아’ 역시 종래의 지구과학적 지구와는 다른 지구를 설명하기 위해 소환된 개념이다.

다만 한울과 가이아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는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울’의 ‘한’(大+一) 개념은 ‘전체성’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반면에 가이아는,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니다(Gaia is not a totality of God)」(2017)는 라투르의 논문 제목이 말해주듯이, 전체성보다는 ‘개체성’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반면에 천도교에서 한울을 ‘자신(自神)’이나 ‘자천(自天)’, 즉 “자기 안의 신”이나 “자기 안의 하늘”이라고 설명하는 점을 감안하면, 한울이 반드시 전체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각 개체들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강조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런 점에서는 “만물이 하늘님이다”는 해월의 하늘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든 한울이든 종교적 뉘앙스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영성의 다른 이름이고 경건의 충만이다. 그래서 해월에게 있어 만물은 하늘같이 신성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라투르는 가이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 점은 그가 가이아를 “자연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세속적 이름”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는 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Latour, Facing Gaia, Ch.3). 이에 대해 해월의 하늘은 “자연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신성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라투르가 가이아 존재론을 말하고 있다면, 해월은 가이아 신학론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이아다

가이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든 세속적으로 해석하든,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이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이아는 각각의 행위 주체들의 총체를 말하는데, 그 행위 주체들이 지구환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가이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류세는 우리에게 ‘인간 행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인간의 산업활동이 지구의 기후를 바꾸기 시작한 시대가 인류세라면, 그리고 그 변화가 인간의 조건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가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사회의 영역을 넘어서 지구라는 행성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작게는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에서, 크게는 핵폭탄의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지구환경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어찌 신중히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敬行]!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그리고 최근에는 라투르가 ‘행위’ 개념에 천착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인류세란 결국 인간 행위의 ‘지구성(globality)’ 내지는 ‘행성성(planetarity)’에 주목한 시대이자, 인간을 ‘지구행위자’, 즉 “지구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planetary agent)”로 규정한 시대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인류세와 가이아, 가이아와 인류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류세라는 시대 인식은 가이아의 관점에서 인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해월이 “하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서로가 서로를 길러주는 기화(氣化)의 작용이다”고 했듯이, 가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야말로 기화의 작용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다만 그 기화가 대기의 변화, 즉 ‘기후변화’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763078730613013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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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