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7

전병철 ‘치열했던 농민운동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 경북in뉴스

전병철  ‘치열했던 농민운동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 경북in뉴스

‘치열했던 농민운동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승인 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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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 풍양 토박이로 가톨릭농민운동 앞장선 전병철(全炳哲)

1979년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말기적 증상이 여러 형태로 등장했던 때다.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영역에서 정권의 억압은 드세어지고 있었고 이에 맞선 서민대중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대도시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성당으로 피신해 농성을 했고, 농민들은 인근 중소도시 성당을 근거지로 삼아 저항을 이어갔다.

그해 5월 경북북부권에서는 오원춘 납치연행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천주교안동교구의 전 사제단이 들고 일어났다. 오원춘은 영양군 청기면에 사는 농민이자 안동가톨릭농민회 영양군 청기분회장으로 감자피해보상운동에 앞장섰다가 납치 폭행을 당했다. 한국천주교회와 가톨릭농민회는 한 명의 농민에게 가해진 인권유린을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에 반하는 폭거로 받아들였다. 정권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서 안동 목성동성당에서 시작된 기도회와 항의농성은 유신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전병철(68세, 前 안동가톨릭농민회 이사 ․ 예천군농민회장) 회장은 이십대 후반인 70년대 초반부터 고향 풍양에서 농사를 짓다가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평생을 농민운동가로 활동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고향을 지키며 생명농업공동체 활동가로 평생의 신념을 지키고 있다.

목성동성당 시국농성 참여로 농민운동 눈뜨다

사제들과 가톨릭농민회 간부가 구속되는 과정에서 1979년 8월 6일 한 청년이 목성동 성당 농성장을 찾았다. 예천군 풍양면에서 3대째 천주교 신자로 농사를 짓던 27살 전병철은 친구 정원해와 함께 이 날부터 목성동성당 농성장에 합류했다. 8월21일 경 큰어머니가 별세해 삼우제를 지내러 나가다가 안동경찰서로 연행돼 이틀간 구류를 살던 중 친척어른들이 몰려 와서 풀려났다. 이로 인해 청년 농민 전병철의 삶의 여정도 크게 바뀌게 된다.
1979년 8월 천주교안동교구 모든 사제단과 안동가톨릭농민회원들이 안동목성동성당에서 시국기도회 및 농성을 펼쳤다. 영양 청기분회장 오원춘 납치폭행 사건에 엄중 항의하는 시국농성은 박정희정권의 몰락을 재촉했으며, 평번했던 청년농민 전병철의 삶을 농민운동가로 전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병철(68세, 前 안동가톨릭농민회 이사․ 예천군농민회장)씨를 주위 사람들은 평소 전 회장(會長)으로 부른다. 그만큼 오랜 세월 농민운동단체 회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풍양면 공덕1리로 ‘동림’마을이다. 풍양은 예전부터 예천읍내로부터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독자적인 정주생활권을 갖춰온 지역이다. 풍양을 둘러싼 낙동강줄기로 인해 의성 다인면 방향만 육로이고 나머지는 ‘3면이 바다’라는 우스개 소리도 곧잘 듣는 곳이다. 낙동강 중류의 수자원이 풍부해 수리시설이 잘 갖춰져 평야가 넓다. 벼농사를 포함한 각종 작물이 생산되어 예전부터 부촌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진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전병철에게 성당은 친숙한 놀이터였다. 십대 후반에 외지로 잠깐 나갔지만 군복무를 위해 고향마을로 돌아온 후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맘이 컸다.

“우리 땅은 별로 없었지만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제대로 짓자는 생각이었죠. 우리 마을 천주교신자들은 다인성당 소속이었지만, 공덕에도 공소(公所)가 있었고 나름 열혈 신자였죠. 그리고 풍양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활권이다 보니 성실하게 농사짓고 성당에 열심히 나가면 됐고요. 20대 초반에 평신도 모임인 빈첸시오 회장을 맡았어요. 70년대 중반, 어느 날 빈첸시오 회장인 제 앞으로 편지 한 통이 왔었죠. 구미에서 온 편지인데 농민회에 가입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덕 공소 평신도단체 회장은 입회를 의무적으로 한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적으로 회원순서가 182번째, 안동교구 권역에서는 1번이었다. 농민운동단체라는 걸 확고하게 알고 가입한 건 아니지만 운명처럼 곧 농민운동가의 길을 걷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3년 2월 열린 한국가톨릭농민회 제14차 전국대의원 총회. 천주교신자이자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선 전병철은 한국가톨릭농민회 182번째 회원이었다.

치열했던 쌍호, 다인, 풍양 농민운동 전국 모범으로

1976년 4월 한국천주교는 ‘한국가톨릭농민회’를 공식단체로 인준했고, 안동교구에서는 1977년 4월부터 농민사목부를 설치해 ‘공소 주변 마을실태조사와 현지농민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농민지도자연수회를 지속화하는 과정에서 교육을 이수한 농민들은 자연스럽게 회원으로 연결됐고, 분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각 지역의 분회를 기반으로 한 안동가톨릭농민회가 1978년 12월27일~28일에 창립되기에 이른다.

이미 농민지도자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농촌의 문제점과 농민들의 단결 필요성을 느낀 전병철은 오원춘 납치연행 농성장 참여와 경찰 연행을 계기로 본격적인 농민 권익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풍양 인근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왕성한 안동가톨릭농민회 분회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의성 다인본당 상광과 쌍호, 예천 지보 축동의 활동을 지켜보며 1980년 8월21일 풍양분회를 창립하게 된다. 당시 5명 회원이 확보되면 분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풍양에서는 전병철, 최정규, 정상우, 윤종갑 등이 초기 회원이었다.

풍양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부유한 편이지만 빈부격차도 심했다. 그리고 농업관련 제도에 비민주적인 요소가 많았다. 농민 수탈구조와 함께 악습도 여전했고, 농민들의 자의식이 낮아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소극성 또한 단단했다.

“70년대 말경 박정희 유신정권과 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 분위기는 알다시피 서슬이 퍼랬죠. 우리는 교육연수를 통해 농민에게 불이익을 주는 농지세, 수세 문제 등을 재인식하게 됐습니다. 벼품종 선택권 쟁취, 수세 시정, 농협 강제출자 거부 등에 대한 숱한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나섰고요. 하지만 농민교육을 하려고 해도 장소를 거부당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심지어 가정집에 모여도 온갖 방해를 해댔죠. 마을유지들이 막 들어와서는 훼방을 놨고요.”
1988년 8월23일 풍양면사무소 앞에서 열린 민주농협 및 의료보험 통합제 쟁취 풍양면농민대회. 1980년대 내내 풍양면 농민회원들은 독자적인 집회를 개최했다. 안동가농 풍양분회 5명으로 출발한 회원들은 80여 명까지 조직을 강화하며 비민주적인 농촌사회의 변화와 농민권익을 위해 활동했다.

농민권익과 농촌공동체에 헌신했던 선배 세대의 좌절까지 기억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우망이라는 동네에 귀촌한 강학중씨가 정착이후 고추농사 재배기술을 혁신적으로 적용해 상당한 수확을 올렸다. 당연히 가톨릭농민회원이었다. 그는 신협을 만들어 왕성하게 활동을 했지만, 지역기득권에 밀리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을 낀 들판이 넓었고 수리시설이 잘 갖춰진 풍양, 지보, 안계, 다인지역에서의 초기 농민회 활동은 만만치 않았다. 기존 비민주적인 제도와 기득권 의식은 철옹성 같았다. 그러다보니 안동가농 실무자들의 활동 또한 치밀하게 전개되었고, 곧 이 지역 가톨릭농민회 활동은 전국의 모범으로 떠올랐다.

“그때 안동가농의 정재돈 총무가 먼저 농촌현장을 다니며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문제점들을 파악합니다. 그러고 나면 권종대 회장이 교육을 하러 왔죠. 소위 현지교육이 진행되는 거죠. 이후 안동으로 나가서 지도자교육을 받으며 농민회 조직을 강화시켜 나간 거죠.”
풍양면 낙동강변에서 마을잔치와 농민회원들의 친목행사가 열렸다. 천주교 의성 다인성당과 공덕 공소는 일상에서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풍양면에 전경 4백 명이 바리케이드 친 적도 있었다

안동, 상주 등 각종 농민집회에 참석을 하면서도 풍양, 안계 면소재지에서도 독자적인 집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집회를 사전에 사찰하고 진압하는 경찰계통에서도 풍양분회 회원들의 단결력은 소문이 나 있었다. 이후 풍양농민회 조직은 80여 명까지 확대되었다. 풍양면 소재지에서 집회가 시작되면 어디에 있다가 모여드는지 2백~3백여 명 넘게 농민들이 결집했고, 전경이 4백 명까지 투입되었다. 일반 주민 중에는 가스통을 차에 싣고 와 대치를 한 적도 있었다.

풍양면 소재지에서 장날 농민집회를 준비하는 건 전병철 회장의 몫이었다. 집회준비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면 지금까지도 평생 동지관계인 안희문(現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장)과 함께 경찰서나 면사무소에 늘 붙잡혀가 억류되기 일쑤였다.

“실제로 집회가 시작될 때면 나는 할 일이 없었어요. 집회를 개최하기 전에 미리 잡혀 들어가 있으니까. 회원들이 스스로 다 진행을 했던 거지. 한번은 집회가 끝난 뒤였는데 늦은 밤 안희문이가 팬티바람으로 잡혀갔어요. 우리회원 7~8명이 구출하러 쫒아갔다가 모두 잡혀 들어갔죠. 모두 다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경찰얘길 들어보니까 ‘전부 본인이 주동자라고 주장했다’는 거야. 보통은 가기 싫은데 누가 오라고 해 참석했다고 진술하는데 우린 모두 다 자기가 주동했다고 진술했다는 거지. 풍양농민회 놀랍다고들 했지. 경찰서에 잡혀 있다 보면 류강하 신부님이 쫒아 들어와요. 그럼 곧 풀려나죠. 안희문이가 비신자였는데 그땐 신부님이 대단하게 보였을 거야. 한참 후에 안희문도 영세를 받았고.”

30대~40대 시절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할 때 그가 소속된 천주교회의 신부들은 의지처이자 든든한 빽(?)이었다. 1984년에 의성 다인성당에 부임한 류강하 신부는 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농민이 당하는 게 많은 만큼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선 누군가 앞장을 서야 하는데 감시와 탄압을 뚫고 나갈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천주교회와 신부들은 농민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성당 신자이자 농민운동에 뛰어든 초기 회원들은 교회의 정신적 지원에 용기를 더 낼 수 있었다.
천주교회 신부님들은 농민운동의 든든히 의지처였다. 특히 1984년 다인성당 류강하 신부(1939~2010)는 가톨릭농민운동을 헌신적으로 지도, 지원했다.

외국소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1984년 연말부터 소값이 폭락해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고 자살하는 농민들이 속출했다. 1985년 7월 다인성당에서 안동가농 주도로 소몰이 시위가 결정되었다. 7월21일 안계우시장에서 소, 경운기 등이 경찰의 방해로 집결이 어려워지자, 30리 떨어진 다인면에서 경찰의 이중 바리케이드를 뚫고 다시 안계까지 거리행진을 성공시켜낸다. 농민회원들과 일반농민이 함께 대중투쟁의 성과를 이뤄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다인과 쌍호, 청기, 풍양지역 17명의 농민이 강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풍양에서는 전병철, 정원해, 전연대, 김병원, 안희문, 안영성 등이 예천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러나 다수농민들이 참여하는 지역의 자주적 농민운동으로 발전가능성을 맛보는 쾌거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내내 전병철은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헌신했고, 이는 예천군 단위 자주적 농민회 창립으로 이어진다. 1990년 이후 전병철은 예천군 농민회장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97년 구담성당에서 열린 제2회 안동가톨릭농민회 동지회.

90년 이후 친환경농업 실천, 생명농업공동체 활동 앞장

최근 30년 동지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 당시 안동에서 열린 집회, 교육, 회의 등 횟수를 헤아려보니 연중 72일간으로 집계됐다고 말한다.

“80년대에는 풍양에서 안동까지 길도 꼬불꼬불하고 차편도 불편했지. 한번 나가면 당일치기가 안 되니, 하룻밤을 넘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힘들다거나 바쁘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어. 실제 농사를 지으면서도 아스팔트농사까지 다 지은 거지. 지금은 대외 활동 없이 농사만 짓는데 그때보다 더 바빠. 참 묘하죠.”

전병철은 중매를 통해 스물아홉 나이에 장가를 들었다. 일곱 살 터울 김숙이(61세)씨는 의성 쌍호 출신이다. 처가 동네가 농민운동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남편의 활동을 수긍해줬다. 자녀로 딸을 셋 두게 되는데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싶어 했다. 농촌에서 큰 희망이 없다고 보였는지 은근히 이농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를 알게 된 조창래 신부가 교육장에서 ‘아들을 낳게 기도해 주면 이농을 포기할 수 있냐’고 말했다. 울진 어느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말에 그곳을 다녀왔는데 실제로 늦둥이 아들을 낳게 된다. 지금도 젊은 시절 밖으로만 뛰어다닌 남편을 이해하고 넉넉하게 품어준 마음에 코끝이 찡하다.
29살 청년 전병철과 결혼한 의성 쌍호 출신의 22살 김숙이의 약혼 사진.


29살 청년 전병철과 결혼한 의성 쌍호 출신의 22살 김숙이의 최근 모습. 3녀1남의 자녀를 두었다. 처가 동네는 가톨릭농민운동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990년대를 맞으며 기존 농민운동은 종교단체의 울타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전국 단위 시․군에서 자주적농민회가 결성되는 시기를 맞아 가톨릭농민회는 생명농업으로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풍양지역은 생명농업을 91년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굉장히 빨랐죠. 90년 경 안동교구에서 3박4일 공소 봉사자교육이 열렸는데 교육 과정에 이미 생명농업 커리큘럼이 있었습니다. 각 현장에 가서 생명농업공동체를 만들어 내자는 거였죠. 예천성당에 계시던 남학현 신부가 봉화로 갈 계획 중이었는데 우리가 졸라서 풍양성당으로 모셔왔어요. 남 신부님을 모셔온 후부터 생명공동체 활동을 본격화시켰어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냅니다.”

20대에 시작한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대해 전혀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90년대 이후부터는 생명농업 활동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여러 조합원과 우리밀제분공장을 운영하며 소 몇 마리를 키우고 있다.

2019년 5월 한겨레신문 뉴스에는 친환경 생명농업 활동의 한 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예천군 풍양면 한마을 농가 20여 가구가 30여ha에서 우리밀 농사를 지으며 3일간 6회째 우리밀축제를 열고 있다.’ ‘전병철 우리밀축제위원장은 우리밀 재배농가들이 정성들여 가꾼 황금 밀밭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향수를 되살릴 수 있도록 사라져가는 다양한 밀 체험 행사를 준비했다.’
2013년 3월31일 부활주일을 맞아 성당 신자들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나이를 좀 더 먹은 우리는 멀쩡한데 젊은 층이 아프거나 사고로 많이 죽었어요. 그리고 안타까운 건 예전 활동가 중에 소수이지만 극우적 사고로 바뀐 사람도 있고요. 나보다 한참 젊은데.... 옛정을 생각하면 나무랄 수도 없고. 지방선거가 시작되면서 세력이 갈리고 이쪽은 하나의 정당이 거의 독점해 당선되잖아요. 선거 영향도 크다고 봐요.”

천주교안동교구 선언문처럼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늘 선언문의 문구를 되새기며 지낸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위 구술생애사는 계간 예천산천 4호(2020년 겨울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