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2

몬트리올 예수 '하나님이 기뻐하실 영화' - 기독신문

'하나님이 기뻐하실 영화'(6) - 기독신문


<영화이야기>'하나님이 기뻐하실 영화'(6)

강석근

승인 1997.06.11 12:00

캐나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89년작)를 조심스럽게 소개한다. 몇몇 대사
를 따진다면 성경을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나 다름없다. 감독들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때로는 비틀고 때로는 의도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자본의 논리만이 진리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듯한 지금, 이곳에 예수가
온다면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지는 않을까.
각본을
쓰고 연출한 데니 아르깡 감독은 광기와 혼돈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그리
스도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되묻는다.

표면적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다니엘이 새롭게 각색한 성극이 관객에
게는 인기를 끌지만 성당의 신부와는 갈등을 빚는다는 내용이다. 다니엘이
불러모은 배우 네 명은 물욕과 성욕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들은 예수 역을 맡은 다니엘과 공연함으로써 일종의 정죄를 하게 되는 것
이다.

이중극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본질을 오도하는 매스컴과 현대종교
의 타락성을 꼬집는다. 특히 세속화로 치닫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세차다.
불륜에 빠져있으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신부는 거룩과 경건을 위장한 바리새
인이라 할 수 있다.
복음서의 비유와 교훈을 잘 간추린 감독의 통찰력이 놀랍다. 여자 모델을
성 상품화하는 심사위원들을 몰아내고 집기를 부수는 다니엘은 성전에세 채
찍을 휘둘러 상인들을 내쫓던 예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또한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예수를 시험한 마귀는 다니엘에게 도시전체를 주겠다는 변호사
로 바뀐다.
과거와 현재가 꼭지점을 이루는 장면이 가슴을 때린다. 붉게 젖은 눈으로
심판에 대한 경고와 예언(마24:4-26)을 하는 다니엘은 끝내 숨을 거둔다. 그
의 심장과 눈을 이식받은 환자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며 부활의 기쁨을 누린
다. 나사렛 예수와 몬트리올 예수는 그렇게 동일화 된다.
땅바닥에 앉아 라틴성가를 부르는 두 여인과 흰옷 입은 여인을 담은 카메
라는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간다. 낮은 데로 임한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
를 이겼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
서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라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박평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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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edias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362

영화 ‘몬트리올 예수’ 그리고 성탄 전야..
기자명 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 / 문화평론가   
입력 2017.12.21 09:56  댓글 0

몬트리올 예수 포스터. /출처: 씨네21

며칠 전 코스리에서 주관하는 ‘찾아가는 CSR교육’의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 말미에 한 학생이 영화를 몇 편 정도 봤냐고 내게 물었다. 직업이 문화평론가니 꽤 많은 영화를 보았겠거니 생각한 모양이다. 맞다. 무지 많이 봤다. 그러나 좋은 영화를 자주 본다. 영화 보기는 책 읽기와 비슷하다. 잘 만든 영화를 나는 자주 보는 편이다. 그중의 하나가 ‘몬트리올 예수’다. 다소 생소한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개봉한지 꽤 됐다. (DVD 출시가 되었고 IPTV등으로 보실 수 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꺼내 보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국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해 버린 것이다. 알다시피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다. 어느 한 쪽 편을 들었다간 분란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클린턴이나 오바마도 선거공약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하겠다고 하였으나 실행하진 못했다. 유대인 표를 의식한 정치공약(空約)이었을 뿐이다. 현실 외교나 정치에서는 갈등이 첨예화될 때 암묵적 인정이나 적당한 화해를 통해 문제를 일시적으로 덮는다.

인류의 역사 대부분은 종교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고였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바로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전쟁터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 종교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고 자라고 번성했다. 예수를 신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삼위일체를 인정 할 것인가의 교리 차이 등으로 각자 갈라섰고 이후에는 역사에서 보여지듯 피의 살육과 대학살의 역사로 점철됐다. 인류가 이성적 사고를 조금만 한다면 얼마든지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의 문제는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그리 녹록하게 풀리진 않을 것 같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는 이천 년 전 예수처럼 똑같이 우리에게 묻는다. 종교란 무엇이고 신의 구원은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죽음 후 어디로 가는가? 근원적인 문제를 내러티브에 실어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우리에게 생소한 드니 아르캉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몬트리올 영화제 7관왕과 더불어 칸느에서도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교회로부터 예수의 생애를 연극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다니엘(로테르 블리토)은 받은 대본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각본을 다시 쓰고 연극 연습에 들어가나 교회가 이를 알고 방해한다. 다니엘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여 무대에 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뜨악하게 극을 보던 관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수의 모습과는 이질적인 예수의 파격에 서서히 빠져들고 공감한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나 주인공은 돌발 사고로 그만 크게 다치고 만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나 어느 한 곳 치료를 해주지 않아 결국 숨을 거두고 마는데 다니엘은 자신의 장기 이식 의사를 보여 예수의 부활을 실천한다.

영화는 주인공 다니엘을 통해 현대 문명에 화석화된 예수의 모습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그것이 신이 가져야 할 본래의 얼굴이라고 주장한다.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함께 치유하는 과정이야 말로 보편적 종교의 가치라고 알려준다.

이제 며칠 후면 성탄절이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즐기는 날이 되었다. 성탄을 맞아 ‘몬트리올의 예수’가 다시 이 시대로 부활하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길 바래본다.

 


 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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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91810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로 본다] (3) 몬트리올 예수(1989)

구원을 위한 희생, 지금 이 순간도 이어지고…


타락한 사회와 교회의 모습은
예수를 박해했던 모습과 맞닿아
점점 예수를 닮아가는 주인공
장기기증으로 부활 의미 보여줘

발행일 | 2018-03-11 [제3085호, 9면]


예수를 다루는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예수를 주인공으로 직접 다루거나 
혹은 예수 삶의 모범과 가르침을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로 형상화하는 영화. 
몬트리올 예수(Jesus De Montreal, Jesus Of Montreal, 1989)는 후자에 속한다. 다니엘이라는 무명의 젊은 연출가이자 배우인 주인공은 바로 예수 수난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예수의 형상이다.


■ 수난에 대한 비판적 성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감독 멜 깁슨과 마찬가지로 ‘몬트리올 예수’의 감독 데니 아르캉(Denys Arcand) 역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언론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원래 가르멜 수녀회의 수도자가 되길 원했다고 한다. 그 역시 세례를 받았고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9년간 다녔다. 따라서 그가 ‘몬트리올 예수’를 만든 것이 우연은 아니었던 듯하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상업영화로 자신의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철저하게 물든 상업영화에 염증을 느끼고 캐나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된다. 10여년의 다큐멘터리 제작 후, 그는 ‘미제국의 몰락’(The Decline of the American Empire, 1986)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수다만으로 구성한 이 영화를 통해 아르캉 감독은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비롯해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관객들은 ‘몬트리올 예수’를 통해서도 부조리와 가식에 대한 비판, 특별히 현대의 각종 제도와 법규부터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리고 교회의 단면들과 일부 성직자들의 그릇된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타락한 현대 사회와 교회의 모습은 예수를 박해했던 유다인과 당대의 사회적 모순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특히 예수의 수난은 현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 영화 속 수난극

영화의 내러티브는 연극과 영화를 넘나든다. 오래 된 이야기, 즉 성경 속 이야기를 재해석해 현대 연극으로 각색하고 파격적으로 각색한 연극을 다시금 영화 속에 배치함으로써 여러 층위의 각색을 수행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때론 영화 속 연극을 보고 때론 연극에서 빠져나와 연극 밖의 영화를 보게 된다. 때문에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다소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주인공 다니엘은 몬트리올 본당 신부의 요청으로 수난극을 현대적으로 각색해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예수 수난극이 아니라 최근의 고고학적 주장과 사료들을 바탕으로 대본을 새로 쓰고, 수난극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경력의 배우들을 새로 캐스팅한다.

예수의 행적을 새롭게 해석한 다니엘은 연극 공연을 막는 교회 측의 반대에 부딪히고, 배우를 모욕하는 면접관과 몸싸움을 벌여 유치장 신세를 진다.

불의한 현실과 타락한 성직자와의 싸움은 고통스러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자신이 의도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공연 도중 쓰러진 십자가에 깔려 다니엘은 죽음을 맞고, 장기기증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생명과 빛을 선사한다.



■ 다니엘과 친구들 vs 예수와 제자들

영화 속에서 연극과 현실은 같은 흐름을 갖는다. 다니엘과 배우로 캐스팅된 친구들의 삶은 예수와 제자들의 수난과 묘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각색한 수난기와 예수 수난 이야기를 겹쳐서 전개함으로써 영화는 예수의 삶, 나아가 이 시대 예수의 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예컨대, 다니엘은 맥주 광고 오디션 현장에서 모델들에게 옷을 벗어보라는 광고주와 광고 감독, 면접관들의 언행에 분노해 집기를 부수고 난폭한 행동을 함으로써 법정에 선다. 이 장면은 성전에서 장사치들에게 분노를 터뜨린 예수의 모습이 떠오르게 한다. 법정에서 다니엘을 단죄한 판사는 빌라도를 연상시킨다. ‘천한’ 직업을 갖고 있던 다니엘의 친구들은 변변치 않은 신분을 가진 제자들과 비슷하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날선 풍자는 다니엘에게 연극 공연을 맡겼다가 다시 그 공연을 막아 선 신부에 대한 이야기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수성가의 방법으로 성직을 택한 그 신부에겐 다니엘의 연극이 날리는 서슬 퍼런 비판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한 형상화는 이 영화가 예수 수난에 대한 이야기임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다니엘이 십자가에 깔려 죽고 장기기증을 위해 수술대에 양팔을 벌리고 누운 모습은 십자가 위에 달려 희생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는 “기적은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의 죽음이 다른 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사했다면 그 또한 예수 부활의 의미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행동의 하나일 수 있다. 부활의 기적은 여전히 가능하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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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filmpos&logNo=221205116335


[Jesus in Film](5) 드니 아르캉의 <몬트리올 예수
Jesus of Montreal>(1989)

<몬트리올 예수>(1989)
영제: Jesus of Montreal
감독: 드니 아르캉
출연: 로데어 블루토(다니엘), 캐서린 윌케닝(미리에), 조안느마리 트렘블레이(콘스탄스), 제미 지라르(마틴), 로버트 르페이지(르네)
캐나다, 118,min.

무명의 젊은 연출가이자 배우인 다니엘은 몬트리올 성당 신부의 요청으로 30년 전통의 연극을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상연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곧 네 명의 배우를 모집한 그는 전통
적인 예수 수난극이 아닌 최근의 고고학적 주장과 사료를 담은 연극을 선보여 세간의 주목을 받게된다. 전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가톨릭 교구와 자신의 스캔들이 탄로날까 노심초사하는 사제로서는 연극의 파격이 반가운 일은 아니었고, 그들의 연극은 상연금지된다. 더욱이 다니엘은 광고모델에 지원한 미리에가 모욕당하는 현장에서 참지 못하고 난폭한 행동을 한 죄로 체포되어 법정에 서기까지 한다. 

연극과 현실이 병치되고,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행적이 묘하게 예수와 제자들의 삶과 다중적
으로 겹치는 구조를 지닌 이 영화에서 다니엘 자신은 어느 새 예수가 되어 있고, 영화는 예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더 나아가 이 시대 예수가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결박당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를 이 시대에 풀어내야 하는, 생각하는 '사람' 예수(다니엘). 다니엘의 고민은 <몬트리올 예수>의 고민이기도 했다.

'현대적으로 각색(혹은 재해석)'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한다.
다니엘이 신부로부터 부여받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냈듯이, 드니 아르캉의 영화 <몬트리올 예수>는 2천년 전에 중동지역에 살았던 예수의 삶을 20세기 북아메리카(캐나다) 버전으로 각색하고 번역하는 난해한 작업을 멋지게 해냈다.

이 작품은 사실 여러 구조의 각색 층위를 갖는다. 오래 전 성경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것을 현대적인 연극으로 만들고 그것을 영화 속에 배치해서 다시 원본(성경)의 각색이 되도록 하는 것이어야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그것은 재해석을 포함한 번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문에 충실한 번역', '원전에 충실한 각색'과 같은 말들이 반드시 축자적 번역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으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충실한 현대적 각색을 위해 <몬트리올 예수>가 스스로 제기했을 법한 일련의 질문들을 추려내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 숨은 질문 찾기 혹은 20세기 몬트리올에서 예수 찾기

1. 예수가 지금(1989년 현재) 캐나다에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일 것인가.

아마도 가장 큰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과 사건들을 재구성해서 재현하는 것이 영화의 큰 과제였을 것. 이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으로 흥미롭게도 드니 아르캉은 예수를 연출가이자 배우(즉 예술가)로 설정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그의 부름에 응하여 생업을 그만두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한다.

2. 부름받기 전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몬트리올 예수>에서 다니엘이 함께 공연을 할 배우들을 모집하는 과정은 흡사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과 유사하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변변찮은 직업을 갖고 있었거나 심지어 쉬이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기도 했다.
마틴은 일인 다역이 가능한 그의 재능을 한 번에 두 명의 포르노 배우 목소리를 더빙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었고, 미리에는 "광고를 위해 옷을 벗는" 모델이라는 '천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할리우드 영화나 광고는 브레히트나 고다르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자주 '영혼을 파는' 직업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 속에서 창부로 이미지화되곤 했다).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를 지닌 르네는 지구 멸망설에 관한 과학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읊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각각 상업화되고 천박하게 변해버린 예술세계(마틴과 미리에)나 과학과 이성의 편에 서서 신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콘스탄스는 무료급식소에서 봉사를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쪽이었지만, 그녀 역시 성직자의 정부로 살고 있었으므로, 세상과 종교의 비난을 모두 피해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술에 대한 동경과 열정만은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배운 것 없지만 순박했던 예수의 제자들의 이미지를 그대로 품고 있다.

콘스탄스의 집에 처음 모인 '제자들'(좌)과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몬트리올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그들(우).

3. 예수가 분노했을 만한 일들, 혹은 타락이란 오늘날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까.

예수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향해 분노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사건은 영화 속에서 맥주 CF 오디션 현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다니엘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그는 모델들에게 옷을 벗어보라는 CF감독의 요구와 모델들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광고주와 면접관들의 언행에 분노한다.

CF 감독이 여성으로 등장하고, 남성 모델에게도 탈의가 요구되는 점은 그것이 단지 페미니즘의 문제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던 두 여성은 "맥주 광고를 위해 옷을 벗는" 오디션 현장에 나타난다.

4. 그가 고소당하고 재판을 받을 만한 사건 중 정치적(현실적) 이슈에 해당하는 일이라면?

표면적으로 유대인들이 로마 법정에 제시한 예수의 죄목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적 이유인 신성모독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반역죄. 빌라도는 그 중 신성모독은 로마 법정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고, 반역죄에 관해서는 예수가 그다지 위협적인 인물은 아닌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것은 유대인들이 황제에 대한 빌라도의 충성심을 걸고 넘어졌기 때문이다.
영화속 연극에서 빌라도역은 르네가 맡았다. 그는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심지어 예수를 위로하기까지 한다.
현대의 빌라도는 법정의 판사였다. 기물파손과 폭행죄로 즉결심판에 회부되고 자기변호의 기회까지 거부한 채 즉시 유죄를 인정하는 그에게 판사는 정신감정을 받을 것을 권한다. 마치 오늘날 죄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는 듯이.
판사의 요청에 의해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감정을 받고 있는 다니엘. 자기변호를 포기한 채 유죄를 순순히 인정하면 정신이상을 의심받아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아" 빌라도는 말한다. "정신과 의사 말이 당신이 이 법정의 어느 누구보다 정상적이라더군." 판사가 말한다. 판사로 깜짝 등장한 이 남자는 감독 드니 아르캉.

5. 신성모독이라고 칭할 만한 결정적인 갈등의 요인들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영화 속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예수 벤 폰테라라고 알려진 성직자의 이야기입니다."
연극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며, 사실 제자들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 폰테라는 0그를 후송했던 로마 군인의 이름이었다고 진술한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낳은 사생아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되 심지어 로마 군인이 그 아버지였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연극은 또 예수를 젊은 날 이집트에서 신기한 마법을 배워온 마법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 스스로도 스스로 자신을 구세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 부분은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도발적이고 민감한 영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또한 가장 고차원의 각색이기도 하다.
연극의 내레이션을 맡은 두 여인의 말대로,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당대의 유대교인들에게 예수의 신성이 문제가 되었다면, 이천년동안 예수의 굳게 신성을 믿어온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에 준하는 문제는 아마도 예수의 인성을 주장하는 것일 터.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가 아닌 한 이 문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축자적인 의미로서보다는 구조적이고 정서적인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존의 성직자들과 교단이 예수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극적 인과관계로서 말이다.
유사한 이유로, 순전히 내러티브의 내적 논리에만 의존하자면, 예수의 출생과 연고가 불분명하다는 연극의 대사 역시 영화 후반부 다니엘의 죽음과 사후처리 문제 등에 대한 암시로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영화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또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예수의 부활이 거부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논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 증인이 된 여인들은 말한다. "예수는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영화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대부분 고문으로 순교했으며, 예수는 천국에서 그들을 기다렸다고 증언한다. "그들의 죽음은 세상을 바꾸었다"고.
예수가 결국 여러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다는 점에서 그의 고통이 희극(happy ending)이 되어 있는 역설적인 결말 또한 그렇다.
만약 영화가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여 주장하고 싶었다면, 부활도 세상을 바꾼 제자들의 삶도, 그 모든 것을 '희생'으로 평가하는 논리도 거부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다.

6. 옛날 대제사장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워했듯이, 인간으로서 오늘날 성직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니엘에게 연극을 의뢰했던 신부는 그 자신이 어릴 적부터 연극을 하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하는 방법으로 신부의 길을 택한 그는 콘스탄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상과 성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렵냐는 콘스탄스의 질문에 대한 신부의 답은, 요약하자면, 가진 것(기득권)을 잃는 것이었다.
"팬츠 두 장과 런닝, 60달러만 가지고" 교황청으로부터 쫓겨날까봐,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동료들처럼 노년을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내게 될까봐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도발적인 내용에 대한 상부의 통제가 아니더라도, 연극에서 사제와 성직자들을 향해 직언을 날리는 다니엘(예수)에게 그는 더 이상 연극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비난과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상황을 못견뎌했던 것처럼, 신부는 다니엘의 연극을 못견뎌했다.
그리고 백성들 위에 마치 신처럼 군림했던 그들처럼 신부는 다니엘이 없는 사이 다니엘 일행의 연극을 '원래대로(30년 전부터 해온 버전으로) 되돌리려고 스스로 연출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신도들 위에, 심지어 신 위에 군림하는 제도로서 가톨릭과 기독교에 대한 날선 패러디이자 풍자이다.

연극 대사를 통해 신부를 향해 직언을 하는 다니엘(위)과 스캔들이 폭로되거나 교황청의 추궁을 받고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운 신부(아래)

7. 예수가 유혹받을 만한 일은 무엇일까. 즉. 오늘날 사탄의 공격은 어떤 형태로 올 수 있을까.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그를 먹을 것으로, 권력으로 유혹하던 사탄은 이 시대에 변호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이 '사탄'의 주요 사업은 매니지먼트이다. 재능은 있지만 어떻게 성공하는지 몰라 방황하거나 어렵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버젓한 자기 건물 몇 개쯤 손에 쥐어주었다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자서전을 쓰든지("대필작가는 얼마든지 있다"), 마약과 온갖 중독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여행과 방랑(마치 예수의 젊은 날 구체적인 행적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듯이, 다니엘 역시 이곳 저곳을 여행했다고만 되어 있다)에 대한 글을 쓰든지, 토크쇼에 출연하라고 그는 부추긴다.
영화에서 성직과 구원의 사역이 줄곧 예술에 비견되어왔다면, 엔터테인먼트산업은 시종일관 타락과 허영과 유혹의 영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변호사는 또 다니엘의 이름을 딴 극단을 만들어 그를 기리자고,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동료들을 설득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미리에를 제외한 다른 세 친구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타협'을 시도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예수의 '남은 제자들' 역시 유혹에 그렇게 쉽게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는 지점이기도 하다.

"당신의 재능 정도면 이 도시를 차지할 수 있죠." 매니지먼트를 주업으로 하는 변호사가 빌딩숲을 내다보며 말한다.

8. 기적이 사라진 시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이라면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다니엘의 연극은 예수를 "마법사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마법사는, 사람을 살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예수가 살았을 때 했던 이 일은 영화 속에서 예수가 죽은 후에 장기 기증으로 재현된다. 튼튼한 젊은 남자의 심장을 얻은 릭비씨와 각막을 이식받고 눈을 뜬 여인은 각각 이렇게 말한다.
"주여.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그들의 죽음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증언하는 예수와 제자들의 삶을 통해 이처럼 영화는 오늘날도 여전히,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덤에서 일어난 나사로(위)와 다니엘의 심장을 이식받은 릭비씨(아래)
소경이 눈을 뜬 사건(위)과 각막이식으로 앞을 보게 된 여인(아래)

9. 이 시대 예배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영화가 기독교와 예수의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또한 어떤 예배와 어떤 종교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지에 대한 <몬트리올 예수>의 뚜렷한 관점에 의해 확인된다.
사실 영화는 어떤 연극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데(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죠프 형제들>의 한 장면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기의 배우라고 칭송받는 초반의 그 배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세례요한의 재현이라고 한다), 사실상 예수의 이야기는 성가를 부르는 두 여인의 이미지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또 동일한 두 여인의 성가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는 동안 두 여인은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성가곡을 부르고 있는데 그들의 위치는 성당의 윗층이고, 처음 등장한 예수가 아래서 위쪽의 성가석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가 위에서 잡고 있다.
카메라가 높은 곳에 있는 하이앵글 쇼트가 이 영화에는 유독 잦은데, 이는 신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요컨대 신을 찬양한다 하는 인간들은 영화 초반에는 예수보다 확연히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직전 이 두 여성이 노래하는 곳은 예수가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쓰러졌던 곳인 전철역이었다. 무릎꿇고 앉은 여성들의 노래를 카메라는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이 두 여성은 오디션 현장에 나타나기도 했고 그 중 우측의 여성은 면접관들로부터 모욕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두 여성의 성가대석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예수보다 높은 곳.

10.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다니엘은 한마디로 '신원 불명의' 가족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초반에 '제자들도 모르던' 예수의 출생과 탄생지 정보에 대한 언급과 병치되는데, 그러한 이유로 그의 사후 시신 기증절차는 보다 용이해진다. 하여 수술대에 오른 다니엘의 몸은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된다.
한 가지 더, 다니엘의 죽음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의 죽음이 그를 옹호하고자 나섰던 무리(관중)중 한사람에 의해 십자가가 쓰러지면서 유발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천년 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면, 오늘날 예수는 십자가에 깔려 죽음을 맞는다. 변함없는건 그가 사랑하는 혹은 그를 사랑했던 군중에 의한 죽음이었다는 점.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수술대에 오른 예수

그 옛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면 현대의 예수 다니엘은 십자가 아래 깔려 죽는다.

11. 여인들 & 기타등등.
싱글맘인 콘스탄스와 노출이 잦고 돈많은 남자들과만 어울렸던 광고모델 미리에는 각각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잘 알다시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 여인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전철역이었을까?
거기서 예수가 된 다니엘은 세상 마지막 때에 대해 설교한다. 사람들이 모두 제각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부지런히 움직이고 또 멈추어 기다리는 곳. 예수가 다가서서 말을 건네는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황망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전철역에서 예수가 되어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다가 쓰러진 다니엘과 미리에. 예수의 마지막을 지키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이처럼 나름 치밀하게 구석구석 병치되어 있는 이미지나 사건의 요소들을 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뒤적거리다 보면 흥미로운 질문들을 속속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는 뻔히 예상되는 비난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얼마나 예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된다. 머리보다는 가슴을 먼저 울리는 방식으로. 그러나 여전히 한편에는 실소와 냉소를 완전히 감추지는 않은 채.

"비극에는 늘 재앙이 따른"다고 했던가(극중 르네의 대사다).
어쩌면 재앙을 피하려고(?) 드니 아르캉은 예수 이야기를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만들었다. 패러디와 풍자극으로 각색 번역된, 하지만 dark black 또는 blue black comedy.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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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만한영화들
영화 <몬트리올 예수> 가장 '급진적인’'예수 영화
유리Yueli
2016. 6. 29. 15:57

현대의 평범한 도시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배경으로 종교적 신념과 확신을
찾으려는 젊은 연극인 다니엘은 몬트리올 교회로부터 연중 행사인 연극연출을 맡아줄 것을 제
안 받는다. 예수의 고행을 담은 연극의 대본이 마음에 들지않자 그는 자신이 직접 다시 쓴 대본에 따라 예수역을 연기할 배우를 찾아나선다.
다니엘이 사랑하는 프랑스 여인 밀레유. 그녀는 텔레비전 CF 모델로 뛰어난 몸매를 지니고 있
어 캐스팅이 된다. 또한 지난해 교회 연극에 참여한 바 있는 관능적인 여인 콘스탄스, 포르노
영화에 목소리를 더빙하는 성우 마린, 햄릿을 연기하고 싶어하는 풋내기 배우 르네, 이렇게 5명이 뭉쳐 연극 연습에 들어간다.
그러나 예수의 고행을 연기하기엔 캐스팅된 배우들의 행적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교회
측은 연극을 막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예수의 행적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며 예수에 심취하는 다니엘에게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고행처럼 타락한 현실과 싸우는 고행이 뒤따른다. 오디션 도중 밀레유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 시험관에게 항의하며 집기를 부수고 유치장 신세를 지는 등 온갖 타락과 유혹에 맞서 싸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막을 올리고 처음에는 별반 기대를 하지 않던 교회측도 공연이 계속 될 수록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들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불위를 걷는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등 예수의 고행이 상황마다 바뀌어 나타날 때 격
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을 부르며 쫓아 나오는 관객이 있는 등 열렬한 반응을 얻는다. 연극은
대성공이고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기자들까지도 감동되어 삽시간에 현장은 흥분과 감동의 박수소리로 들뜬다. 그러나 이런 감동도 잠시, 경찰들이 몰려와 극단 배우들과 엎치락 뒤치락 몸싸움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공연장에 설치했던 십자가가 무너져 다니엘을 덮쳐 버린다.

영어 단어 ‘radical’의 어원은 ‘뿌리’를 뜻하는 라틴어 ‘라딕스’(radix)다. 존 스토트는 말년에 기록한 「제자도」(The Radical Disciple, 한국 IVP 역간)의 서문을 책의 제목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변함없는 핵심 자질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가장 앞서가는 것 같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고 가장 두드러져 보이지만 사
실은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역설이 이 단어의 의미에는 포함되어있다.
이는 또한 ‘그것만 살아 있으면’ 언제고 다시 생명이 움틀 수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예수의 삶을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되살리려는 시도는 캐나다 감독 드니 아르캉에 의해 이루
어졌다. <몬트리올 예수> (1989)를 통해 그는 2000년 전 예수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서 출발해, 이 시대 바로 이곳에서 예수란, 오늘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란 어
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예수, 20세기 몬트리올의 젊은 예술가 무명의 연출가이자 배우인 다니엘(로데어 블루토)은 몬
트리올 성당 신부의 요청으로 30년 동안 전통적으로 상연되던 연극 프로젝트를 맡는다. 곧 배
우 네 명을 모집한 그는 전통적인 예수 수난극이 아닌 최근의 고고학적 주장과 사료를 담은 연
극을 선보여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런데 연극을 둘러싼 주목과 논란이 사제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콘스탄스(조안느-마리)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탄로 날 것과 전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가톨
릭 교구와 마찰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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