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9

이병철 -지(止) / 우선 멈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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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지(止)/ 우선 멈추어.

2021년 새해 서시(序詩) 

지금은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 서서
돌아보고 내다 보아야 할 때
잘못된 길로
불타고 무너지는 것들을
온 사방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이제는 가는 길 바꾸어야 할 때,
이 길은 함께 사는 길이 아니었으니
이대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생명의 그 길로 다시 돌아가
살아나야 할 때
다시 살려야 할 때
한 숨의 공기를
한 모금의 물을
한 줌의 흙, 한 그릇의 밥을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와 한 송이의 꽃과 한 마리의 꿀벌과 한 마리의 지렁이와 그리고 병들고 죽어가는 숱한 그 한 목숨들을
나와 너 우리의 목숨, 여기에 이 땅에 이 지구에 살아갈,
살아가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그 한 목숨들을
의지해 있는 목숨
어느 한 목숨 내치고는 살아갈 수 없으니
서로 살림으로 함께 사는 길
모심으로 꽃 피어나는 그 생명의 길로
남은 걸음
그 길로 다만 오롯해야 할 때
지금은 다시 태어나야 할 때,
인간이란 오랜 그 탈을 벗고
대지의 생명, 그 지구 어머니의 자식으로 하늘 다시 열어야 할 때
-당신에게.

새해, 2021년 새로운 한 해의 아침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 가슴은 새해에 대한 기대와 설렘보다 불안과 우려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코로나19의 충격이 이런 불안을 더 깊게 하는 것이라 싶습니다. 이제는 코로나19 ‘이후’가 아니라 코로나19와, 또는 지구 기후위기, 인류문명의 위기와 ‘함께’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세밑이면 다가오는 새해에 품어갈 한 글자를 무엇으로 삼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그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21년 새해는 그 글자를 ‘지(止)’로 정했습니다.
지(止)의 뜻은 자전에서 보면 ‘그치다, 끝나다. 그만두다, 폐하다(廢--). 금하다(禁--). 멎다, 멈추다. 억제하다(抑制--). 도달하다(到達--). 떨어버리다. 되돌아오다.’ 등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 가운데 특히 ‘멈추다. 그치다. 그만두다. 되돌아오다.’의 뜻을 담은 글자로 ‘지(止)’자를 품어봅니다. 이 ‘지(止)’는 지지불태(知止不殆), 멈출 줄 안다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에서 따왔습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도덕경 44).
지금 인류문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전환’일 것입니다. 대붕괴, 대멸절이라고도 하는 지구 차원의 대위기에 직면하여 근본적인 전환이 없이는 지속가능한 인류의 생존도, 그 문명도 없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전환이란 길을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의 선택입니다. 이대로는 살길이 아니니 가던 길을 새로운 살길로 바꾸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인류문명이란 관점에서 개벽, 또는 다시 개벽의 길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전환이나 개벽이란 이 지구적 차원의 대붕괴와 절멸적 상황에서 살아남고 함께 사는 길을 향해 우리의 삶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멸에서 상생으로, 살림의 길, 생명의 길로의 전환이 그것입니다.
이 전환, 길을 바꾸기 위해선 우선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나온 길, 여태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보고 그 길, 그 방향이 아닌 새로운 방향, 새로운 길로 바꾸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를 품어갈 ‘지(止)’는 우선 멈추어 서서 자신과 세상을 다시 돌아본다는 의미와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짓을 ‘그치고 그만둔다.’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으로 ‘다시 돌아간다.’라고 새길 수 있습니다.
멈추어 돌아보기, 전환 또는 개벽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깁니다. 우선 달려가던 것을 멈추어 서서 이제껏 우리가 추구하고 매달려왔던 것들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것임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음을, 이대로는 살아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릴 때만 그 길, 그 방식이 아닌 새로운 길, 새로운 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열탕 속의 개구리가 이대로는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뛰어나오지 않는 한 살아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멈추어 돌아보고 지나온 길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알아 길을 새롭게 바꾸게 하는 깨달음, 그것을 각비(覺非), 또는 각작비(覺昨非)라고도 하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대목인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에서 따온 말입니다. 지금 비로소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깨달았다는 뜻으로 삶의 전환으로 이끄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바른길로 돌아감을 회향(廻向)이라고도 할 수 있다면, 죽임의 길에서 살림의 길로의 회향이 곧 전환이라 해도 되리라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가 개인이나 지역 또는 국가의 차원을 넘어 인류문명 전체의 위기임과 동시에 전 지구적 차원, 지구 생명계, 생태계 전체의 위기라는 것은, 이제 전환의 방향과 내용이 지구적 차원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인류라는 종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그 문명이 지금의 지구 생명 위기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길, 다시 생명의 길은 나와 인류에게 이로운 길이 무엇인가의 차원을 넘어 나와 지구, 지구의 생명 공동체에 이로운 길이 무엇인가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전환, 다시 개벽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란 종 이전에 지구 생명계, 생태계의 일원이며 우리 모두 생명의 근원인 지구 어머니의 자식이란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넘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생명체라는 정체성과 지구의식, 지구영성이 새로운 전환의 전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멈추어 서서 우리 자신이 우리를 어떻게 죽임의 길로 내몰아 왔던가,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란 이름으로 어머니 지구와 뭇 생명에게 저질러온 잘못과 어리석음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와 지구, 나와 뭇 생명이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 아마도 상황은 지난해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엄중해질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이미 한계점을 넘었다는 지적처럼 그동안 쌓여있던 것들이 마치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전환만이 희망이고 살길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해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은 지금의 이 위기상황이 전환을 위한 절실하고 적절한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지구촌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구인이라는 자각으로 삶과 문명의 전환에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구 생명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지구생명체와 나의 생명체는 하나이다. 지구(지구생명계, 생태계)의 위기가 곧 나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지구생명계를 해치는 것이 곧 나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고 동시에 나를 돌보는 것이 어머니 지구생명계를 돌보는 것이라는 이러한 인식은 사실 인류의 오랜 지혜이자 토착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보편적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제 물질 중심의 산업 성장사회에 속에서 잊고 있었던 오랜 지혜와 전통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전환, 생명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대한 물결이 일어날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그런 기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개벽의 혼돈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치솟아 오르는 기운을 느껴봅니다. 다시 역동하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새해는 자신의 삶과 세상을 생명의 길로 전환하는 기운들이 온 사방에서 피어나기를, 그 기운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다시 개벽의 새 세상, 새 문명을 일구는 문을 활짝 열어가는 그 첫해가 되기를, 그 길에서 ‘지(止)’를 가슴에 품고 가던 길 멈추어 돌아보며 생명의 길을 잃지 않고 찾아 돌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마음 모읍니다.
당신의 새해, 전환의 기쁨과 신명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새해, 첫 아침에
여류, 정원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