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

역사칼럼 -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출처: 중앙일보]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日 지배층 청결성의 뿌리, 무사도 '할복'

역사칼럼 -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출처: 중앙일보]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日 지배층 청결성의 뿌리, 무사도 '할복'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출처: 중앙일보]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日 지배층 청결성의 뿌리, 무사도 '할복'

전후(戰後) 일본주식회사의 가치관, 지배계급의 청빈 세계관으로 정착… 한국에도 도덕적·윤리적 가치 기준의 구축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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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 <하라키리>의 한 장면. 일본 무사도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다. / 사진·중앙포토



이번 달 주제는 무사도, 일본말로 ‘부시도(武士道)’ 즉 사무라이의 계율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영화 얘기부터 시작하자. 필자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1962년도 작품으로, 제목은 <하라키리(腹切)>, 즉 할복이다. 196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스타, 나카다이 모토히데(仲代元久) 주연으로, 1963년 칸 영화제에 최우수작품 결선까지 올라갔던 영화다. 당시 최우수상이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감독의 <레오파드(Leopard)>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라키리>가 어느정도 수준의 영화였는지 짐작이 갈 듯하다. 일본 영화, 아니 영화 전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윌리엄 와이럴(William Wyler) 감독의 작품 <벤허(Ben Hur)>에 비견될만한 명작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무사도(武士道)로 본 일본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언제부턴가 생긴 습성이지만, 신작 영화보다 고전을 반복해서 보는 식의 관람을 즐긴다. 넷플릭스(Netflix), 훌루(Hulu) 같은 영화전문채널을 통해 고전 명작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하라키리>는 다섯번 정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다. 하라키리는 싸우는 사무라이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신켄쇼부(眞劍勝負, 진검승부) 장면이 곳곳에 나오지만, 스토리 전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진짜 스토리는 대화를 통한 부시도의 정수(精粹)를 보여주자는 데 있다.

얘기는 16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츠쿠모 한시로(津雲半四?)라는 이름의 사무라이가 에도(江?)에 있는 히코네한(彦根藩)의 한슈(藩主) 이이가(井伊家)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에도에는 300여 개에 이르는, 전국의 막부 대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지방 반란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막부의 자식을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에도 대저택들이 생겨난 것이다. 인질로 에도에 불러들이지만, 자기가 살 집은 막부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츠쿠모가 찾아온 이유는 할복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할복을 할 테니 자리를 빌려달라는 얘기다.

할복이라는 장엄한 의식



할복이 이뤄지는 장면을 묘사한 에도시대의 그림. 병풍과 대나무로 가려진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종교의식 같은 것이다. / 사진·유민호
 
1630년은 도쿠가와가 전국을 통일하고 평화에 들어선지 27년째에 접어든 때다. 평화는 일반인에게는 좋지만, 사무라이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한순간에 군축(軍縮)이 이뤄진다. 당당하던 사무라이도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돈에 목을 맨다. 주군을 잃어버린 실업자 사무라이, 즉 로닌(浪人)이 전국에 범람한다. 프라이드가 강한 로닌은 장사나 농사 같은 일을 할 수도 없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부채나 우산 만드는 일을 통해 근근이 살림을 이어갈 뿐이다. 그 같은 어려운 삶을 구차하게 연명해가는 것보다 아예 사무라이답게 할복으로 생을 깨끗하게 접겠다는 것이 ‘늙은 로닌’ 츠쿠모의 방문 이유였다. 이에 대해 히코네한 한슈의 총책임자인 사이토(?藤)는 할복 의사를 재차 확인한 뒤 장소를 제공한다.

‘셋푸쿠(切腹)’라고도 불리는 할복은 부시도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되는 의식이다. 자결(自決), 자재(自裁)란 말로도 표현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경우,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 부시도의 예의이자 미덕이다. 싸움에 진 사무라이를 가장 욕되게 하는 방법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살려 보내는 것이다. 죽일 만한 가치도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란 의미다. 패장 사무라이를 대하는 최상의 예의는 칼을 던져주며 할복를 허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 해도 목을 친 뒤 고향에 돌려보내는 것이 사무라이 사이의 암묵적인 예의다. 전국시대 때 풍습이지만, 적의 머리를 들고 오면 돈과 자리를 보장한다. 일단 머리를 통해 누구인지 확인한 뒤, 농민을 통해 시신을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는 것이 일상적 풍경이다.

전통적 의미의 할복은 예법에 따른 의식에 해당한다. 그냥 단순히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순서와 환경에 의해 치러지도록 명문화돼 있다. 에도시대 행해진, 죄인을 상대로 한 할복은 크게 11개 단계로 나눠져 진행됐다.

①할복이 이뤄질 것이란 통지가 죄인에게 전해진다.

②당일 할복에 앞서 목욕한다. 목욕물은 찬물을 먼저 넣고, 뒤이어 뜨거운 물을 넣어 온도를 맞춘 뒤 안에 들어간다. 뜨거운 물에다 찬물을 부어 온도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③머리카락을 깎고 흰옷을 입는다. 머리형과 옷은 할복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방식과 양식이 적용된다. 옷의 경우 흰색 마(麻)를 재료로 한 것으로 목의 뒷부분은 목이 쉽게 떨어져 나가도록 크게 열려 있다.

④할복 장소의 크기는 대략 10평 정도의 닫힌 공간으로 이뤄져 있으며, 남북으로 문을 열어두면서 행한다. 남문은 수행문(修行門), 북문은 열반문(涅槃門)으로 불린다. 공간의 사방은 병풍과 대나무 같은 것으로 규격화해서 장식한다. 공간의 중간은 뒤집어진 다다미(?) 2개를 설치한다.

⑤죄인은 북문에서 들어와 북문을 향해 두 장의 다다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 곳에 앉는다. 죄인에 이어 할복을 돕는 가이샤쿠닌(介錯人)은 남쪽 수행문에서 들어온다.

⑥할복 직전 흰 쌀에 따뜻한 물을 넣은 밥, 3개로 나눠진 야채, 소금이 제공된다.

⑦식사에 이어 두 잔의 술이 제공된다. 한 잔을 두 번에 걸쳐 마셔야 한다. 술을 더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다.

⑧이어 자신의 배를 가를 단도(短刀)가 제공된다. 길이가 11.35㎝로, 손잡이 부분은 약 5㎝ 정도다. 단도 손잡이는 나무가 아니라, 가는 실로 감싸져 있다. 날이 선 칼의 절반 정도는 종이로 28회 감싸서 제공된다.

⑨가이샤쿠닌은 할복 당사자 앞에 가서 이름을 밝히면서 인사한다. 뒤이어 뒤로 돌아서 칼을 물로 씻는다. 이어 하늘을 향해 칼을 들고 서 있는다.

단번에 목을 치는 게 최상의 예우



197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헬로키티. 표정이 없어 변형된 사무라이의 모습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 사진·유민호
 
⑩할복 당사자는 옷의 오른팔 부분을 벗어 아래로 내린다. 왼손으로 단도 손잡이의 중간 부분을 잡은 뒤, 오른손으로 손잡이 윗부분을 감싼다. 이어 왼손으로 배를 세 번 약하게 어루만지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배꼽에서 위쪽으로 약 1㎝ 윗부분을 중심으로 하면서, 단도를 배 안으로 찌른 뒤 서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이 순간 가이샤쿠닌이 뒤에서 목을 친다. 한번 만에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할복자에 대한 최고 예우로 해석한다. 단 한번에 잘려진 목은 ‘다키구비(抱き首)’라 불린다. 마치 어린아이의 머리를 안을 때와 같은 형상이란 의미다.

⑪이어 할복을 위해 설치된 병풍이 철거되고 사람들에게 사자(死者)의 모습을 확인시킨다. 떨어져 나간 목을 몸에 연결해 수의와 함께 관에 집어넣으면서 할복의식은 끝난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츠쿠모가 할복의식에 들어가면서 가이샤쿠닌에 관한 얘기가 등장한다. 아무리 로닌이지만, 할복을 통해 부시도를 증명해 보이는 만큼 가이샤쿠닌을 츠쿠모 자신이 지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한다. 책임자 사이토는 츠쿠모의 충정을 높이 산다면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무라이를 추천한다. 단칼에 목을 친다는 것은 고난도의 기(技)와 술(術)을 필요로 한다. 칼의 수준과 사무라이의 힘 등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 한순간 가능하다.

영화에서는 가이샤쿠닌의 일이 한순간에 끝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할복 가이샤쿠닌의 참수는 두 번, 세 번, 아니 네 번, 다섯 번에 걸쳐 이뤄진다. 프랑스혁명 당시 기요틴의 날이 무뎌지면서 목이 한꺼번에 안 떨어져나가 몇 번이나 시행한 것과 똑같다. 치다가 칼이 목에 꽂혀져 빠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제국군대의 만행을 얘기할 때 중국인 참수 경쟁스토리가 등장하지만, 사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목을 칠 경우 단번에 무뎌진다고 한다. 일본군이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과정에서 100명의 목을 쳤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 뼈의 강도는 짚을 넣은, 강한 대나무와 비슷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진검으로 대나무를 자를 때 고수의 실력을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잘려진 대나무의 단면이 직선인지 여부가 실력을 가늠한다. 일직선 단면은 검도 9단 정도 실력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일직선으로 간다는 것은 힘이 한순간에 모아지면서 상대방이 고통스러워할 겨를도 없이 절명(絶命)한다는 의미다. 한칼에 목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일직선을 통한 무고통 절명에 해당된다. 힘이 분산될 경우 잘린 대나무 결이 울퉁불퉁하다. 그만큼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다. 검도의 고수라 해도 대부분은 울퉁불퉁한 것은 물론이고, 단칼에 대나무를 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사이토가 로닌에게 가이샤쿠닌 지정권을 준 이유는 바로 최고 실력의 사무라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츠쿠모는 사이토가 추천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을 지정한다. 그러나 병이 나서 출근을 안 했다고 한다. 이어 두 번째 실력의 사무라이를 지정했다. 역시 병으로 인해 출근을 안했다고 한다. 세 번째 다시 사무라이를 지정하지만, 역시 감기로 출근을 안 했다고 한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맡은 사이토는 츠쿠모의 의사와 무관하게 다른 사람을 통해 당장 시행하라고 명령한다. 순간 츠쿠모는 머리카락 묶음 세 개를 던진다. 사이토가 자랑하는 실력자 3명의 머리카락으로, 츠쿠모가 가이샤쿠닌으로 지정했던 사무라이들의 흔적이다. 츠쿠모 자신이 세 명의 사무라이를 상대해 모두 이긴 것이다. 머리카락이 깎였다는 것은 사무라이로서 죽음 이상의 수치다. 세 명 중 한 명은 이미 할복한 상태지만, 두 명은 잘려진 머리카락 때문에 출근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집에 머물고 있다. 츠쿠모는 비웃음과 함께, 자신에 앞서 할복을 해야 할 사람은 사이토의 사무라이들이라고 말한다. 츠쿠모의 말이 떨어진 순간 사이토는 당장 죽이라고 명령한다. 곧이어 영화장면은 사무라이 칼싸움으로 들어간다. 100대 1의 장렬한 싸움을 벌이다가 츠쿠모는 온몸에 칼이 꽂힌 채 세상을 떠난다. 영화에서 왜 츠쿠모가 스스로 할복를 자청하면서 찾아가 싸움을 벌이다 죽었는지 궁금할 듯하다. 17세기 일본 전역이 로닌으로 넘치면서 부시도를 생활의 방편으로 오용(誤用)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극단적인 경우로, 사무라이답게 할복을 할 테니까 자신의 가족들을 부탁한다는 식의 행동이 나타난다. 죽음을 내건 비즈니스다.

생활고에 찌든 할복 자원자들의 행렬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하라키리>에서 사무라이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 사진·유민호
 
17세기초 에도에 모인 300여 막부는 각자의 위상과 위신을 높이려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일본에 가면 형형색색 각 지역 특산품의 종류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부들간의 경쟁 속에서 지역 내 독자상품을 열심히 개발·판매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지역특산물들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부시도에 맞춰 할복을 행할 경우 막부 자신의 위상도 부시도에 어울리는 명가(名家)로 부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로닌이 늘어나고 할복 신청자도 넘쳐나면서 문제가 생긴다. 공급이 늘어나면서 할복에 걸맞은 보상이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가난에 몰려 찾아온 사무라이들에게 ‘충정은 알겠다’면서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서 되돌려 보내는 일들이 발생한다.

청년 큐조(求女)는 그 같은 상황 속에 나타난 비극적 인물이다.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 생활하던 큐조는 부인과 자식조차 병으로 쓰러지면서 결심을 하게 된다. 사이토를 찾아가 할복을 요청한다. 충절을 보이면 적당한 선에서 돈을 주면서 돌려보낼 것으로 판단했다. 사이토도 그 같은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큐조 같은 로닌이 계속해서 몰려들 경우 돈도 들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고 판단한다. 사이토는 큐조의 상황을 알면서도 할복을 진짜로 실행하도록 명령한다. 큐조는 겁을 먹지만,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죽기 전 집에 가서 자신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보고하고 오겠다고 부탁한다. 사이토는 그 같은 요청을 거부한다. 도망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모욕을 준다. 결국 큐조는 사이토와 다른 사무라이들 앞에서 할복을 행한다.

말이 할복이지, 차갑고도 잔인한 인간의 야만적 심리를 충족시켜주는 공개참살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가난했던 큐조는 자신의 칼조차 팔아, 대나무로 된 가짜 칼을 차고 다녔다. 사이토는 사무라이답게 자신의 칼로 할복을 하라면서 대나무 칼을 큐조에게 준다. 큐조는 무뎌진 대나무 칼로 수십 차례 자해를 한 끝에 고통과 함께 세상을 떠난다.

츠쿠모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 같은 할복에 처해진 큐조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강제로 죽임에 처하고, 사무라이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항의의 근거다. 스스로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찾아온 것은 큐조가 츠쿠모 자신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잘려진 3명의 사무라이는 바로 큐조 참살의 주모자에 해당된다. 같은 사무라이를 모욕한 죄로 츠쿠모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응징한 셈이다.

<하라키리>의 고바야시 감독은 ‘안티(Anti)’라는 접두사에 걸맞은 인물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광기와 봉건 일본의 모순을 고발·비판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남겼다. 무죄로 투옥된 전범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그린 <두꺼운 벽의 방(壁あつき部屋)>, 전쟁 중 만주에서 벌어진 일본의 만행을 그린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같은 작품은 집단 일본의 광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일본판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이다. 고바야시 감독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스토리 한 부분에 반드시 한국인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 <하라키리> 역시 죽음을 매개로 한,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 극단적인 모순을 그렸다는 점에서 ‘안티’ 영화의 본보기라 해석된다.

190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만난 <부시도>



1. 일본 요츠야 괴담(四谷怪談)에 나오는 이이와(お岩)를 모신 신사(神社). 요츠야 괴담은 부시도 이면의 추한 사무라이 모습을 묘사해놓았다. 2. 올해 화제를 모은 영화 <제로>의 한 장면. 2차대전 당시 죽음의 비행에 나서는 청년에 관한 얘기로 출격 당일 술이 두 잔 내려진다. / 사진·유민호
 
필자가 영화 <하라키리>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츠쿠모의 거대한 모순과의 대립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의 맛과 멋을 더하기 위한 소재로서의 갈등관계이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메시지는 다른 곳에 있다고 판단된다. 바로 부시도다. 사무라이의 원칙과 가치에 관한 부분이 츠쿠모와 사이토로 대표되는 17세기 일본인의 세계관을 통해 영화에 반영되고 있다. 큐조의 죽음을 둘러싼 대립관계를 통해 선과 악으로 나눠진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무라이가 지켜야 할 부시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 스토리 전체에 투영돼 있다. 영화 속에서 츠쿠모는 사위 큐조의 죽음 자체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명예와 존엄을 무시한, 사악한 인간의 심리를 부정할 뿐이다.

사실 사이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름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부시도에 의거해 큐조를 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돈을 위해 찾아온 큐조에게 사무라이로서 진짜 할복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나무로 된 검을 주면서 할복하라고 한 점, 할복에 앞서 집에 가서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무시했다는 부분에 대해 츠쿠모는 반발한다. 부시도를 따르는 사무라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 감독의 영화는 안티라고는 하지만, 사무라이와 부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부시도의 해석에 관한 부분에서의 갈등과, 부시도를 지켜야만 하는 사무라이의 고통과 고난을 묘사한 명작이라 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부시도로 대표되는 일본 전통사상을 한층 더 갈망하고 추구하는 영화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과연 부시도란 것은 어떤 것일까?

부시도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니토베이나조(新渡??造)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지만, 유럽·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라면 메이지(明治) 천황에 비견될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부시도: 일본의 혼 (Bushido:The Soul of Japan)>이란 책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책이 출간된 것은 20세기로 들어선 1900년이다. 일본어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영어로 출간된다.

곧바로 미국과 유럽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잡는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은 8년이 지난 1908년이다. 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쓰라-태프트조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루스벨트가 가진 일본관의 대부분은 니토베가 쓴 <부시도>에서 온 것이다. 존F. 케네디를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은 물론,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접하는 일본 이해의 기본서다.

니토베의 <부시도>는 서방만이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큰 영향을 준 책이다. 아마존 일본에 들어가 ‘니토베 부시도’란 키워드를 치면 348권의 책이 나온다. 1908년 이와나미(岩波) 출판사에서 번역·출간된 이래 매년 각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새로 번역해 펴낸 책들이다.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니토베의 영어를 보다 알기 쉽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매년 신판 번역서가 출간된다. 저작권과 무관하기 때문에 출판사 모두가 경쟁적으로 출간한다. 물론 매년 새롭게 업그레이드해서 나온다. 필자의 경우 1990년 이와나미 출간 40판을 갖고 있지만, 출판사마다 보통 50판 가까이 중판(重版)해 왔다. 일본 국민이라면 모두가 읽는 국민 기본서에 해당된다.

니토베는 저술의 동기를 자신의 부인과 친구들에게 두고 있다. 원래 농학학자로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많은 친구를 만난다. 미국 여성과 결혼하면서 사무라이, 부시도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영어로 설명하는 가운데 저술의 필요성을 느껴 출간하게 됐다는 것이다. 니토베의 책과 관련해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출간된 해가 1900년이란 점이다. 미국에 영어로 된 한국 관련 책은 거의 전무할 때다. 단편적인 글은 있겠지만, 역사와 심리를 파고드는 저서는 전무하다고 봐도 된다. 최근 화제가 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어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41년 진주만 공격 직전이다. 한국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일본의 호전성을 알린 책이 영어로 된 한국인 저서의 출발점이다. 문(文)의 나라라 자랑하지만 자국을 외국에 알리려는 노력은 한참 뒤졌다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상황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변화가 없다. 한국이란 나라의 심층을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제대로 된 영어책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니토베가 1900년에 책을 낸 것은 당시 한반도 상황과 연결해 해석될 수 있다. 1894년부터 시작된 청일전쟁이다. 일본이 중국을 격퇴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상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중국이 아시아의 대표주자라 생각하던 서방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흔든 것이 청일전쟁이다. 일본에 대한 수요와 궁금증이 더해지는 과정에서 때마침 미국에서 요양 중이던 니토베가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인 부인과 친구들의 질문에 답하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책의 골자다.

죽음 염두에 둔 사람일수록 삶에 집착


1908년 이와나미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래 국민 필독서로 자리잡은 니토베 이나조의 <부시도>(왼쪽). 한국에도 <무사도란 무엇인가> 등의 제목으로 번역됐다. / 사진·유민호
 
두 번째는 동과 서를 오가며 비교 분석한, 입체적 차원의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란 점이다. <부시도>는 전부 17장으로 이뤄진 150쪽 정도의 책이다. 도덕 체계로서의 부시도, 부시도의 연혁, 의(義)·인(仁)·용(勇)·예(禮)·성(誠)·충(忠), 할복, 일본도, 부시도의 장래 등에 관한 얘기로 이어진다. 사실 한말의 유학자가 본다면 한국인이 중시하는 가치나 덕목과 비슷하다고 말할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용의 대부분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나 현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니토베는 프로테스탄트의 일종인 퀘이커 교도다. 서양을 이해하고, 학자로서 동과 서를 오가며 체득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동서비교문화론으로서의 책이 <부시도>다. 예를 들어 제 2장의 부시도의 연혁에 언급된, 비교문화론적 관점의 분석을 살펴보자.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비교한 몸젠의 책에 따르면, 그리스인은 예배를 할 때 눈을 하늘에 두면서 신을 생각지만, 로마인은 머리로 신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리스인이 응시(凝視)라고 한다면 로마인은 내성(內省)이란 측면에서 신을 대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은 종교관은 로마인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성에 주목하는 것으로….”

일본 농학자가 쓴 책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풀이해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과 지혜에 기초한, 이른바 리버럴아츠 관점에 입각한 저서였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판단된다.

부시도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는 일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침반에 해당된다. 과거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위기 시의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 부시도에 관한 것이다. 2012년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등장 이후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것이 니토베의 <부시도>다. 중국발 위협이 가속화되면서 부시도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이라 분석된다. 부시도의 내용 가운데 한국인이 가장 잘 모르는 부분은 하라키리, 즉 할복에 관한 부분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따르면 부모에 앞서 죽거나, 몸을 자해하거나 절단하는 행위는 인륜과 예에 어긋나는 최악의 케이스에 해당된다. 충·인·의·예·성처럼 한국의 유교와 비슷하지만, 어떻게 해서 죽음을 염두에 둔 세계관으로 나아갔는지 궁금하게 느껴진다.

여러 측면에서 풀이될 수 있겠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삶에 더 집착한다는 점이 최적의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의 공포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맞선 삶의 즐거움이 하라키리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해낸 것이다. 따라서 하라키리는 극단적인 경우에 나타나는 것일 뿐, 일상에서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이 1945년 8월 11일 심야회의다. 당시 군부 내각을 대표하는 6명이 참가해 천황의 항복의사를 듣는다. 돌아가서 할복을 한 사람은 육군대신 ‘아나미고레치카(阿南 惟幾)’ 단 한 명이다. 나머지 5명은 모두 살아남아서 이후 일본 재건에 나선다. 필자는 6명 전원 할복하는 것이 부시도의 전통이라 믿는다. 그러나 전통은 전통일 뿐 현실과 다를 수도 있다.

일본 지배층의 윤리적 청결성의 뿌리

부시도는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닌, 삶에 주목하는 가치관이다. 한국인이 보면 오해하기 쉬운 세계관이지만 1940년대 전쟁 중 ‘1억 결사 옥쇄(玉碎)’와 같은 광기는 부시도를 오용한, 일본판 탈레반들의 생각이었다고 보면 된다. 평화시의 부시도는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시 일본판 탈레반이 득세할 경우 죽음의 행진곡으로서의 부시도로 둔갑하기 쉽다. 한국전쟁 당시의 인민재판,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니토베의 부시도는 전후(戰後) 일본주식회사의 가치관이자 세계관으로 확립된다. 하라키리 부분이 아니라 하라키리를 염두에 둔 비장한 세계관이 핵심이다.

상대적이지만 일본의 경우 부정부패나 상위층의 경제독점같은 것이 거의 없는 나라다.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회장이나 사원의 대우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회장의 월급도 같은 연령대의 직원보다 조금 많을 뿐이다.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무라이가 지켜야 할, 청빈의 세계관에 따른 것이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일본 역시 갖가지 모순과 갈등으로 뒤덮인 나라다. 상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부시도에 입각한 사무라이, 즉 일본 지배층의 도덕적·윤리적 청결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과 중국이 부족한 부분으로,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갈등의 정도가 미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 상황을 보면, 무도(武道)는 있어도 무사도(武士道)는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자고 나면 방산비리, 정치인·기업인의 부정부패 관련 뉴스로 넘쳐난다. 최근에는 운동선수, 연예인도 가세하는 판이다. 국민소득 5만, 10만 달러가 된다 해도 행복해지기 어려운 나라가 한국이다. 도덕적·윤리적 가치 기준의 구축이 절실한 나라가 2015년 겨울, 한국의 모습이다.

글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