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

니토베 이나조

칼럼 니토베 이나조



(황 진) 사과드립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보아도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너그럽게 양해가 될 수만 있다면 자격은 모자라고 그럴 입장에 있지도 못한 사람이지만 이런 말을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드립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동쪽으로 밀려오던 서세동점의 시기인 19세기 말 일본의 위대한 선각자 중에 니토베 이나조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5천엔권 구화폐에 초상화가 올려 질 정도로 현대 일본인들에게는 위인의 반열에 오른 분입니다. 그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클라크가 설립한 삿보로 농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에 유학하여 사학과 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본 대학에도 유학하여 농학에 대한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는 농업 행정가로, 교사로 그리고 야학을 설립해 운영하는 등의 사회사업가로, 나중에는 미일 교환교수로, 국제연맹 사무차장으로 국내외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말년에는 귀족 의원으로, 마이니치신문의 고문 등으로 일본 최고의 원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를 일본 내외 최고의 저명인사로 만들어준 저술이 있는데 그것은 1905년 영문으로 쓰여진 “무사도”라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무사도 정신을 이어받은 일본인이 탁월하게 고상하고 이성적이며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품성을 지녔다는 점을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서술하였다고 합니다. 일본 사회의 대중적인 의식인 무력에 대한 숭상을 종교적 수준으로까지 승화시킨 저술가였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한 종파로 영성의 지극한 고양을 지향하고 자유로운 신앙 양심을 추구하던, 함석헌 선생님도 몸담았던,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 퀘이커 기독교인인 그는  “식민은 문명의 전파다. 제군들은 비전을 잘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태양은 반도 왕국에서 가라앉으면 떠오르고, 그곳에서 떠오르면 또 가라앉는다. 언젠가 역사가들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계획을 흥망성쇠의 지표로 볼 것이다. 가장 현저하지만 어중간한 정복 시도는 이미 히데요시가 행한 바 있다. 그 이후 일본은 반도에 손을 댈 수가 없었지만 동면중이었을 때조차 조선이 속국이었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았다.”  또한 그는 조선과 타이완의 일본 병탄에 적극 협력한 극렬 제국주의자였고 자국 원주민인 아이누 족에 대하여 가혹한 통치를 부축인 국수주의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내의 극렬 정한론 자와 똑같이 조선을 폄하하고 조롱하며 정부 당국자에게 조기 병합을 독촉하였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자기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의무라고 까지 믿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실례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창시자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다고 하였으며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 바울 역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까지만 이여야 합니다. 그것이 공세적이고 배타적으로 까지 나아가서는 결코 안 되는 일입니다. 폭력적인 것은 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와는 결코 공존될 수 없는 적대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같이 사랑해야할 가까운 이웃으로서의 보편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에게 위인인 한 인물이 타민족에게 원흉일 경우에는 그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는 부를 수 없습니다. 니토베 이나조가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한 일원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한 인간으로, 구체적으론 한 기독교인입니다. 나는 한국 민족으로서 니토베 이나조에게 적대적이기 전에 한 기독교인으로서 니토베 이나조가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나는 일본이 참 부럽습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그들이 시기가 날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와 똑같은 개화기를 거쳤던 당시에 오로지 멸사봉공하던 무수한 선각자들을 둔 일본 백성이 너무나도 부럽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일본의 모든 것을 그때 결정해 버렸습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도 여기로부터 연유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신앙하는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가 함유하고 있는 창조적 생명력이 이 땅에 뿌리를 내려 이 땅의 사람들을 가치 있고 유력하게 고양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독교가 미미한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우위에 있는 한국이 그 기독교의 창조 역량을 통하여 부럽고 무서운 일본을 극복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종교란 인간 개개인의 삶 자체 외 에 그 어떠한 것에도 수단이 될 수가 없지만 민족은 기독교가 지향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고 역사는 그 이웃들의 총체적인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의 기독교가  이 땅에 사는 국민들의 삶과 그들의 역사에 진정으로 유익을 주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이나 삶 너머의 문제가 종교에서 빠뜨릴 수 없는 궁극의 영역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신앙의 진정성과 성실성은 인간의 육체적 삶과 현세 안에서 평가되고 검증 될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 반대는 공허하고 명목적인 것입니다. 여기가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유대인의 몸을 입고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로 들어오신 지점이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빈약한 일본 사회보다 그 반대인 한국 사회의 수준이 더 우월하다고 자신할 수 없고 개인적으로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일본에서의 생활보다 언어가 통하는 한국생활이 더욱 불편하다는 말을 경험자로부터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아름답지 못하고 불편한 것의 책임은 최소한도 신자 비율 이상만큼은 기독교에게 있습니다.

  이웃에게 불편과 불행을 가져다 주는 니토베 이나조 같은 기독교인은 없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기독교 종교인 인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무례하고 지혜롭지 못하기가 그지없는 일명 ‘땅 밟기’ 라는 것을 하는 미숙하고 맹목적인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간구하셨습니다.  “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슨 짓인지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  이들이 그와 같습니다.

    복음의 진실 된 내용은 이웃을 스스로에게 하듯이 최대한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이웃과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민족도, 이념도, 빈부귀천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여기에서 더욱 나아갑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고....”

 

   감히 자격도 없는, 그리고 사실은  가장 먼저 이 말을 들어야 할 처지에 있는 제가 모세만 알고 예수님을 모르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니또베 이나조 같은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깊은 반성을 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아직 동의하지 않는 우리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사죄드립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올해 2010년은 불행한 한일강제병탄 100년이 되는 해이며 조금 있으면 다가오는 25일은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기쁜 성탄절입니다.



황 진/군산시민연대 운영위원/중앙치과 원장/byul-ba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