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 씨알의소리(1970-1981) | 바보새함석헌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 씨알의소리(1970-1981) | 바보새함석헌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작성자 바보새 14-05-18 01:54 조회542회 댓글0건
목록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퀘이커 세계대학생들과 이야기
아침 예배 모임에 참석하려고 버스를 탔을 때 나는 언젠지 모르게 또 전날 밤부터 하던 생각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전날이란 10월 30일 토요일인데, 그날 오후 2시부터 일본 동경서 온 퀘이커 세계대학 학생들이 만나자고 해서 신촌에 있는 퀘이커 모임 집에서 만났었다. 인솔자가 한 사람 있었고 학생은 여덟이었는데 그중 둘은 일본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서양 사람들이었다.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난 곳은 반도의 서북 구석 압록강 어구에서 가까운 농사와 어업을 겸한 지극히 외진 곳이었지만, 외졌기 때문에 인심은 순박했고,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있으면서도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자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화로운 전통적인 농촌자치 생활 속에 거의 “제력(帝力)이 하유어아재 (何有於我哉)리오.”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위기 속에 살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그때에 벌써 일본의 정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약장사라고 하며 종종 오는 일본 사람들이 있었고, 이따금 파선했노라고 하면서 표착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게 다 지금 와서 보니 우리나라를 먹으려고 나라 형편을 살피러 왔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내 집안에 아저씨 되는 분이 하나 한학자였는데 어느 때 일본 중이라는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필담으로 이야기를 하고 간 일이 있었는데, 후에 청일전쟁이 나자 일본 군대가 의주로 지나가게 됐는데 그 진중에서 편지를 보내면서 아무 때에 갔던 중 아무개가 지금 장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노라고 한 일이 있었다.

또 내가 난 그 촌락에서, 바다 가운데로 한 10리만큼 나가면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가 부동항(不凍港)이 될만하다 하여서 벌써 합병이 되기 여러해 전부터 매년 겨울이면 일본 사람들이 와서 압록강의 얼음 흘러내리는 상황을 조사하 곤 했다. 이런 따위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런 외진 곳에 보잘게 없지만 이상하게도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그 교회를 통해 기독교와 겸해 민족주의와 서양 문명과 세계 형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생각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해서 퀘이커가 됐느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가던 이야기, 유영모 선생님한테 우치무라(內村) 선생의 일화 하나를 얻어들은 것이 깊이 인상에 박혔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성경연구회에 나가게 됐던 이야기, 그와 한 학교 출신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 稻造) 박사는 일본 퀘이커 창시자라는 이야기, 내가 무교회 신앙이다가 퀘이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7년 봄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온 현동완(玄東完) 선생으로부터 첨으로 양심적 거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전쟁은 죄악이란 것을 알게 됐고, 퀘이커에 대해 처음에는 주로 평화사상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간디에 대해 고쳐 읽기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가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것 아니냐
그리고 난 다음 어느 학생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에 좀 내 생각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서 1962년 펜들힐에 갔을 때에 했던 말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책임으로 알고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야 한다는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으나, 또 다른 한편 6.25 전쟁 때에 미국의 도움이 컸던 것을 모르는 것 아니나, 미국인으로서는 자연 그럴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지만, 한국 문제에 대한 자기네의 책임은 너무 모르는 듯이 느껴지는 때가 많다. 그래서 퀘이커만한 사람들은 솔직히 말을 하면 알겠지 하는 생각에 어느 날, 학생과 선생 앞에서 아주 찔러서 말을 한 일이 있다. 한국지도를 봐라! 남북으로 등뼈 산맥이 있는데다가 38선을 그으니 그것이 십자가 아니냐? 소련은 두 팔을 잡고 미국은 두 다리를 잡고 중공은 옷을 벗겨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아니냐? 그리고 그 ‘시크렛 플레이스’를 너희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38선이 어찌 우리 국경이냐? 너희 국경 아니냐? 이제 잘린 허리를 다시 고치지 못한다면 너의 데모크라시, 너의 서양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던 일이 있는데, 그날은 그 이야기를 다는 아니하고 다만 민주주의가 둘은 아니니 너희가 정말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한국 원조한다는 심리로는 아니 된다, 언제나 너희 일로 알거든 그대로 해라, 지금 군사원조 말이 있지만, 군사원조는 참 원조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물건도 들어오면 산 관계를 그르친다, 나라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군사원조도 있으면 그것은 물질이 한 원조지 미국인이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인간 미국 씨이 이 나라의 씨을 참으로 이웃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의 말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 다 헤어지고 나서 생각을 하니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물론 언제나 사람을 의심하면서 예배는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요 비밀이 있어 가지고는 참 사회운동은 될 수 없다는 주의이므로 언제나, 내 속에 확신하는 바를 사람 차별을 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로 노력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예배드리려 할 때 형제가 네게 대해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우선 가서 화해부터 하고 오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힘을 쓰고 있고, 간디가 암살당할 직전에 주위의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오니 몸 검색을 하자고 했을 때 사람의 몸 검색을 하면서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반대했던 것을 과연 장한 일이라고 흠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하여도 마음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여야 하는 우리 사회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사람이서 무슨 모임을 해도 거기는 반드시 이질분자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차 누구도 빠짐없이 생각하는 사회, 이것은 무슨 사회냐? 생각할수록 슬프다. 일본의 정탐이 끊임없이 오던 그 망국기에도 우리는 그런 일은 없었다. 합병이 되어 그 말기에는 다소 그런 걱정도 했지만도 오늘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없다. 살기를 그만둘 생각도 없다. 메뚜기도 아니하는 생각을 사람인 내가 어찌 할 수 있을까?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런 생각을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하다 잤고 아침에 깨어서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날만 아니라 근래는 이것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버티다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고치느냐? 그래서 아침에도 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신촌을 가려고 버스를 타니 자연 또 그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쩐지 모르게 명상에 빠졌다. 버스를 타기만 하면 나는 그 소위 음악인가 뭔가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이 많아서, 한 두 주일 전에도 성경모임에서 명상에 때한 주의를 말해주며 명상은, 적어도 훈련이 되기 전에는, 사람 많은 데서는 하지 말라 했다. 왜냐하면 사람 많은 데서 명상을 하려면 자연 남이 이상하게 보지 않나 하는 등등 생각으로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혹시는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신경조직에 이상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더러 그런 데서는 하지 말라 한 나인데, 어떤지 나 자신이 음악을 했는지 아니했는지, 사람들이 잡담을 하는지 아니하는지, 모르고 나는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쑥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다, “네 할 것을 어서 해라!” 하시는 그 말씀이다.
그러니 마음이 참 시원했다. 기뻤다. “이것이 절대 승리법이다”했다. 그래서 모임에 가서 예배 시간에 그것을 증거 했고 오후 모임에서도 다시 그 말을 했고, 장자 모임에서도 노자 모임에서도 했다. 이 한 주일은 그 말씀으로 살았고 이 앞으로는 또 그 얼마 동안 양식이 되겠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감히 나 같은 것이 입에 올릴 수도 없지만, 길을 가노라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셨던 것을 조그마치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상한 것은 왜 늘 유다와 관계가 될까? 1970년 이맘 때, 이보다 조금 더 늦어 펜들힐에 첫눈이 내리던 저녁, 나의 이성은 아닌 줄을 뻔히 아는데도, “저기 쭈그리고 앉은 것이 가롯 유다 아니냐” 하는 속봄을 하다가 얻은 말씀이 일찍이 「대화」(펜들힐의 명상)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또 유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게 됐다.
그때에 내게 알려주신 것은 열둘이 하나인 문제인데, 왜 제자들이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만 생각을 해서 “주님 저입니까?” 하기만 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은 그렇게 여지없이 깨어진 하나 됨을 예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하셨나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간 데마다 유다가 있다. 그 의미에서 죽은 사회다. 몸은 여럿이지만 영은 하나다. 그 하나가 깨지면 죽는다. 그것을 살려야한다. 목사님, 신부님, 신학자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나 나는 「요한복음」13장 21절에 “마음이 몹시 산란해지셔서”란 말은 이 깨어진 하나 됨 때문이라고 밖엔 해석할 도리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주셨다는 것과 당신이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것을 아시는” 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물론 아니지만, 유다 하나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본래 열둘의 의미는 열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 하나인 생명체를 이룬 데 있었다. 이제 그것이 깨졌다. 유다 하나가 문제 아니다. 물론 그 개인도 불쌍히 여기지만 그로인해 열 하나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상태를 놓고는 자기 가실 길을 갈수 없다. 그러므로 몸소 제자의 발을 씻으신 것은 단순히 봉사정신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이는 그 산산 부서짐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다시 씻어 깨끗이 하기 위해서다. 상처는 씻지 않고는 합창이 아니 된다. 독성균을 씻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발을 씻음으로 그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직감으로 유다의 속을 아시지만 사랑에는 버리는 사람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내쫓을 수는 없다. 모든 벌은 인간이 스스로 제가 받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생명의 법칙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참는다.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시는 말씀도, “너희 중 하나가 나를 잡아 줄거다” 하시는 것도, “빵을 적셔서 주신 것”도 다 이제라도, 이제라도 하고 기다려서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빵을 먹지 못하고 나가는 데 스스로 자기 벌을 받는 길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가 어둠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간 뒤에 예수의 태도는 일변한다. 마치 막혔던 동이 터지고 폭포가 쏟아지듯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됐다”는 말로 시작되는 은혜의 말씀이 쏟아진다. 이제 다시 하나 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간 곳마다 유다가 있는 사회라면,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하지 못하고 의심의 독균이 끼어 죽게 된 것이라면, 그것이 살아나는 것도 최후 만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결이 회복되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만드는 결정적인 말이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말씀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너 할 것”이라 해서 생명의 근본원리인 스스로 함을 자극하신다. 죽어도 네가 죽고, 살아도 네가 산다. 선도 네가 하는 선이요, 악도 네가 하는 악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자유의 정신을 넣어주신 하나님이다. 벌하는 권위는 하나님께 있으나 그것을 취하는 것은 인간 제게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이요, 도덕을 기초로 하지 않은 위에 영은 자라지 못한다. 우리끼리는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 사람을 내쫓을 권리는 없다. 내쫓으면 나 자신이 죄다. 얼마나 많은 죄가 교회라는 이름, 나라라는 이름, 진리라는 이름 아래 지어질까? 모든 혁명은 거짓 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독립의 기초를 거의 다 놓고도 정권을 쥐지 않은 간디가 과연 참을 찾는 이 답게 한 것이다. 예수는 유다를 정죄하시지도, 회개하라 책망하시지도 않으시고 그보다 더하신 것을 했다. 악은 거기 못 견디어 스스로 저 갈 곳으로 갔다. 만일 제자들이 의분을 발해 내쫓았다면 세상적 혁명은 됐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 됨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 크리스천이라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하는 일이 악과 싸우는 것인 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참으로 정결을 회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영의 힘의 모자람 때문 아닐까?

둘째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시는 데서 그 사람과 행위를 구별하셨다. 우리는 “그 행위를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를 이론으로는 알지만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님은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셨으므로 그 다음 잡으러 왔을 때 “친구여” 하실 수가 있었다. 자기를 잡아주는 행동이 죄인 것은 아시나 그것으로 유다를 미워하시지도 벌을 선언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고 사회국가가 어찌 되어 갈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점이 믿음 없는 데다. 이 세상이 이 세상대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의 하는 일이 늘 피를 피로 씻는 일에 그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뽑으려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꼭 뽑아야 할듯한데 그러면 곡식까지 해친다고 했다. 노자(老子)도 벌하는 것은 하늘에 있지, 사람에 있지 않다 했다. 사람에 있지 않기 때문에 최후에 제가 자연과 역사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벌의 길을 자취할 때까지 참으신다. 인간의 고통을 지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제 뜻으로 판단해서 죽이고 나서는, 이것은 하늘이 하신 것이다 하는 것은 거짓이요 교만이다.
우리가 사탄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게는 말할 자격이 없다. 신학으로 설명해도 망발이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로 둘 것이다. 하나님이 아신다. 무엄하게도 나는 하나님이 돌아서시면 사탄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고 말해본 일도 있지만, 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잠잠한 것이 가장이다. 사람이 지혜를 내어 선악 시비의 판단을 한 결과가 오늘의 세상 되지 않았는가? 요순(堯舜)에서부터 천년 후에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일이 시작됐다 하는 장자(莊子)의 말이 옳지 않은가?
그러므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속에는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네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너를 사랑한다 하는 뜻이 있다. 이 세상이 만일 악한데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어딘지 한 마음이 무한히 용서하며 무한히 참으며 믿는 싸움이 하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것이 속는 길이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많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도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으면 몰라도 믿는 이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이 군비 없는 헌법을 제정했다가 실지로 군비를 두지 않은 까닭으로 적국에게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자기는 만일에 그런 일이 있다면 차라리 일본 전체를 번제로 드리면서라도 그 헌법을 지지하고 싶다고 한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박사를 나는 흠모하고 싶다. 그런 정신이 있으면 나라 절대로 망하지 않을 거다. 나라 망하는 근본원인은 적국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제 국민 사이에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 불신풍조다. 믿지 못하면 서로 죄를 만들어내어서 싸운다. 다른 사람은 모르나 내가 감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설혹 누군지 모르는 유다가 거기 있다 하더라도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겁이 없어진다. 선악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겁이 없어지는 일이다. 상당한 분별력과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 아주 선의의 사람이면서도, 무력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불의의 세력을 보고 겁을 집어먹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있어야 겁을 대지 않기도 하지만 또 겁을 내지 않도록 힘을 써야 정신의 힘이 자라기도 한다.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이요, 기일즉지동(氣ᅳ則志動)이다. 그러므로 힘쓰려 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기도, 기도 아니다. 저절로 겁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하나님을 믿고 겁을 내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노력해야 정말 기도다. 그런데 겁을 내지 않으려면 “그래 무슨 일을 네가 하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서 하라. 내가 다 당하마” 하고 결정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서 겁을 제해 버리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마음이 평안하면 점점 더 깊은 명상과 기도에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전보다 좀 더 분명한 말씀을 듣게 된다. 나는 지난 3월 이래 과거 70년 동안에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고.

우리가 또 혹하는 것의 하나는 행동의 결과다. 유다가 배반하는 생각을 가지지만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감은 유다의 재주나 힘으로 되는 것 아니다. 배신한 것과 십자가에 돌아감은 외면으로 원인 결과같이 보이나 그것은 이 둔한 육신의 생각이고, 인간이 선악간 무슨 생각을 했거나 그 결과는 결코 그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일찍이 잘못 계획한 일도 잘못 싸운 일도 없었지만 비 몇 방울 온 것 때문에 패했고 그래서 유럽 역사가 달라졌던 것같이 언제나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결코 급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 수십 백 천이 무고히 고생을 하는데 어떻게 끝없이 기다리느냐 하겠지만 참과 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스케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의미는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이 지나간 날의 모든 선한싸움 싸운 이들의 증거하는 것이다. 씨 한 알을 심어서 열매를 얻으려 해도 몇십 년이 필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혼, 한 민족의 역사일까? 모든 악은 다 수천만 년 나이 먹은 악이다. 오늘날 내가 당하는 억울은 몇 백 년 자란 악의 힘이다. 그것이 이 조그만 나의 며칠 몇 해의 기도나 노력으로 쉽게 없어질 리가 없다. 우주는 법칙이 있는 우주이므로 그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 농사가 사시 법칙에 순응하고야 되듯이 역사의 농사도 나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새 본 책에 있는 좋은 말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는 이 말의 끝을 맺자.
“사티아그라하의 목적은 대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대적을 개심시킴에도 있기 때문이다. (The aim of Satyagraha is not only to confront but also to convert the enemy)” 조지 우드코크

씨알의 소리 1976. 11,12월. 59호
저작집; 15- 31
전집; 3- 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