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 기독교①>한국교회는 왜 ‘함석헌’을 배척했나 | |||||||||||||||||||||||||||||||||||||||||||||
비폭력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근본정신은 ‘예수정신’ 함석헌 교권교리 거부하자 보수교단 이단으로 치부 퀘이커에서 노자까지…종교다원주의·상대주의 정립 함석헌 영원한 자유인…‘생명평화공동체’ 구현이 꿈 | |||||||||||||||||||||||||||||||||||||||||||||
| |||||||||||||||||||||||||||||||||||||||||||||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최신형 기자) ‘파란 눈의 오똑한 코, 금발 머리를 한 백인의 남성….’ 우리들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예수의 모습이다.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형상이 그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난 예수는 결코 파란 눈의 오똑한 코, 금발 머리를 한 백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전형적인 셈족의 모습인 담황갈색의 피부와 검은 머리, 검은 눈에 더 가깝다. 물론 그 누구도 실제 예수의 상(像)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런 의문을 통해 그간 사실이라고 여겼던 내적 기억을 밖으로 끄집어 내보자는 것이다. 진리의 발견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함석헌(1901∼1989)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함석헌 선생 앞에는 민주화운동가 독립운동가 종교사상가 언론인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함석헌의 이 모든 사상을 포괄하는 핵심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과거에도 주류는 아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함석헌은 기성 교단의 교리와 전통을 거부한 채 교회 밖에서 개개인의 인격의 변화를 꾀하는 자속(自贖)신앙을 주창했다. 비주류를 자처했던 그는 1950년대부터 예수의 정신이 결여된 한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함석헌은 지난 1956년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한국 기독교 무엇을 하려는가’라는 기고문을 통해 정통 기독교를 권력만 쫓은 채 윤리의식이 결여된 종교라고, 또 1971년 <씨알의 소리>에서는 교회가 샤머니즘적이며 교파의 분열을 꾀한다고 맹비난했다. 2011년 보수 대형교회가 안고 있는 정교유착, 패권주의, 양적성장주의, 기복주의, 엘리트주의, 신비주의 등을 이미 60여년 전에 간파한 셈이다. 때문에 정통 교단은 함석헌을 불편하게 여겼다. 결국 함석헌은 ‘이단’의 낙인이 찍혀버린 채 대다수 교단으로부터 배척당했다.
‘퀘이커’ 함석헌, 그가 꿈꾸던 것은? “함석헌 선생이 당시 보수 교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교회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은 받은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통해 교회의 제도와 교권, 예배의 형식 등을 거부했습니다. 표피적인 껍데기를 버리고 예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죠. 제도를 중시하는 교권주의자들은 참된 예수의 정신을 늘 등한시하지 않습니까.(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함석헌이 처음부터 무교회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함석헌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장로교 집안에서 자랐고 세례까지 받았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의 무교회주의를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신앙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 함석헌은 교회 밖에서 예수의 진리를 추구하는 무교회를 접한 뒤 1927년 7월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류석동 등과 함께 <성서조선>이라는 동인지를 창간하는데,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일본제국은 1942년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글이 개구리의 죽음을 통해 조선민족의 소생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성서조선>을 폐간시켰고, 함석헌 김교신 유달영 등 18명은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투옥된다. 흥미로운 대목은 함석헌이 무교회주의를 넘어 또 다른 예수의 정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1953년 7월 4일 ‘대선언’이라는 시를 통해 “나는 더 이상 무교회에 머무를 수 없다. 우치무라 간조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냐”며 신앙적 변화를 꾀한다. 이 때문에 기존의 무교회주의자도 함석헌을 멀리했고, 이후 그는 한국의 퀘이커(Quaker)를 만난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학교 교수의 종교로 널리 알려진 퀘이커는 형식을 배격하는 측면에서 무교회주의와 비슷하지만, 그 신앙의 출발점은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현필 (사)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무교회주의는 일본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사무라이 정신이 남아있는, 어떻게 하면 철저하게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반해, 퀘이커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개신교의 한 종파로 나왔다. 퀘이커들은 각각의 사람에게 내재돼 있는 내면의 빛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감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퀘이커는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등 세계평화운동을 중시하는데, 함석헌 선생이 이런 부분에 많이 끌린 거 같다. 신앙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예수를 향해 정진하는 것, 그것이 함석헌 정신”이라고 말했다. 김경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도 <시사오늘>과의 전화통화에서 함석헌 정신과 관련, “함석헌은 교권과 교리, 교회 건물의 크기, 교인 수 등을 신앙의 비본질적 요소로 규정한 채 다원주의를 통해 열린 종교의 자세를 취했다”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난 뒤 동네 사람들한테 달려가 이 같은 사실을 알렸듯이 함석헌도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영성과 생명을 전하며 권위의 껍데기를 던져 버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도 퀘이커에 대한 정통 보수교단의 시선은 곱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남오성 교회개혁실천 연대 사무국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기성 보수 개신교는 퀘이커 자체를 모를 것”이라며 “보수정서라는 게 일단 거부하고 보지 않느냐. 그들은 포용의 입장에서 사안을 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종교다원주의에 쏠린 두 개의 시선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따라 왜 목소리가 작습니까. ‘아멘’이라고 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매주일 개신교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풍경이다.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이다. 때문에 요한복음 4장 12절을 강조한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보수 교단의 금기,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 1991년 변선환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자, 감리교는 금란교회(김홍도 목사)에서 교단 법정최고형인 출교 처분을 내렸다. 또 변 학장은 동시에 목사직은 물론, 감리교인의 자격도 박탈당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5년 8월 8일 변 학장은 이단이라는 멍에를 벗어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도 2004년 5월 12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최고위과정의 특강에서 “불교는 불교만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언론은 즉각 “조용기 목사가 다원주의 종교관을 피력했다”며 그의 발언을 주목했다.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조 목사는 그 주 설교시간에 “자신은 그런 취지로 말한 게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고 해명한 바 있다. 그만큼 종교다원주의는 보수 개신교의 뜨거운 감자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일부 신학자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보수 교단에서는 이단의 첫 번째 구별방법으로 종교다원주의를 꺼낸다. ‘구원의 길이 예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다른 종교에도 있는가’ 라는 기독교 순혈주의의 문제는 여전히 평형선을 달리는 논쟁거리인 셈이다. 이 같은 논란과는 별개로 함석헌은 퀘이커에서 그치지 않고 동양의 노자, 공자, 석가 등을 끌어안으며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했다. 한마디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종교사상가의 삶을 걸었다는 얘기다. 함석헌은 종교다원주의를 통해 타종교와 상생할 수 있는 ‘상대적 종교관’을 전했지만, 보수 교단은 여전히 종교다원주의를 배척하고 있다. 보수 교단에서 함석헌을 목회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기성 교단이 종교다원주의를 배척한 이유에 대해 “보수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자기 방어적인 본능이 발동하고 있다. 기독교만이 계시종교라고 주장한 채 나머지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독선과 독단”이라며 “이슬람, 불교 등 타종교에도 문명과 선함, 양심, 예술 등이 각각 들어있지 않느냐. 종교가 진리에 이르는 길은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지금은 서구문화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다”고 일침을 놓았다. 정현필 (사)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함석헌 선생은 노자 공자 석가 등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등 계속 진보해 나갔다. 배타성을 가지고 구분 짓는 것을 거부한 것”이라며 “예수의 사상과 타종교 간의 진정한 대화를 통해 신앙과 삶의 혼연일체를 꿈꾸는, 교권에 대한 속박이 아닌 진리와 자유를 향한 생명평화공동체의 구현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
|
2016/10/30
2011 <함석헌과 한국 기독교①>한국교회는 왜 ‘함석헌’을 배척했나 - 시사ON
<함석헌과 한국 기독교①>한국교회는 왜 ‘함석헌’을 배척했나 - 시사ON
"'좋은 책방' 해도 굶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겠다"
"'좋은 책방' 해도 굶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겠다"
"'좋은 책방' 해도 굶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겠다"
2008.02.28
"'좋은 책방' 해도 굶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겠다"
성현석 기자
[인터뷰] '길담서원' 연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인왕산이 보이는 서울 통인동 거리에는 큰 건물이 없다. 오종종한 건물들이 들어찬 거리를 지나다보면, 이곳이 청와대에서 가깝다는 점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슬슬 걷다 보면 툭툭 마주치곤 하는 굳은 표정의 전경들이 가까이서 뿜어져 나오는 권력의 기운을 문득 깨닫게 한다.
오후 내내 날리던 눈발 사이로 비친 전경들의 눈빛이 유독 삼엄하던 25일,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었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같은 날, 통인동 골목에서 작은 책방이 문을 열었다. 물론 이 두 사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드디어 '바깥사람'이 되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책방 주인 역시 청와대의 새 주인만큼이나 이날을 기다렸다는 점이다. 선한 눈빛을 가진 예순 아홉 살 책방 주인은 "올해부터 '바깥사람'이 돼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는 '안사람'이었다. 부인인 한명숙 전 총리의 대외활동을 가정에서 돕는다는 뜻에서 '안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바깥사람'이라는 낱말과 함께 그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40년 전인 1968년, 이십대의 끝자락에 서 있던 그는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됐다. 대학 연합 동아리의 동료였던 한명숙 전 총리와 갓 결혼해 한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리고 13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감옥 안에 갇혀 지냈다. 이런 뜻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안사람'이었다.
'바깥'에 대한 동경이 그의 내면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다.
언론 보도를 꾸준히 접했던 독자라면, 이쯤에서 책방 주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박성준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다. 그의 존재는 정치인 한명숙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부부의 표상으로, 오랜 수감생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신뢰와 사랑의 표본으로 이들 부부는 종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따뜻한 눈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40년 전, 이들 부부를 갈라놓았던 통혁당 사건은 보수 언론이 색깔 공세를 펴기 위해 종종 들먹인 소재였다.
길에서 툭툭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이 '시대의 주인'이다
▲ 길담서원을 연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
그래서인지 개업 준비로 분주하던 22일, 책방에서 만난 그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낱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서 쓰는 티가 역력했다. 우선 책방 이름에 대해 물었다. "왜 '길담서원'이죠?"
"친한 후배 부부가 제안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 이름이 '길'입니다. 후배 부부 아이 이름이 '담'이고요.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책방 이름을 짓자는 제안이었죠. '길담서원'이라는 이름을 불러보니, 울림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한곳에 뿌리내지 않고 '길'만 따라 걷는 삶이 가볍고 얇다면, '담' 안에서만 머무른 삶은 좁고 무겁다. 통인동 골목을 걷다보면, 간혹 '담'이 '길'을 막고 있거나 '길'이 '담'을 뚫고 지나는 경우를 보게 되지만, '길'과 '담'이 꼭 서로 맞서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게다.
한명숙 전 총리를 '바깥사람'이라 부르는 그에겐 '안과 바깥'의 구분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에게 안과 바깥의 역할이 기계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안과 바깥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올해가 제게는 60대의 마지막 해입니다. 동양 사람들은 열자리씩 끊어서 나이를 구분하는데 익숙하죠. 60대는 바깥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이제 저도 세상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게다가 올해는 민주 정부 10년 역사가 막을 내린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지혜는 이미 많이 소모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전망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성격을 부여하고, 방향성을 만들어 가는 게 누구일까요? 흔히 권력을 가진 이들이 시대를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국민이 권력자를 올려다보면서,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평범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스스로 주인이 돼서, 방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어디선가 좋은 게 뚝 떨어지길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시민 스스로가 시대를 만들어 가야지요."
"정말 책 읽을 겨를이 없습니까?"
주로 담 안에 머물던 그가 이제 길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길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바깥에서 나눈 대화는 종종 바람결에 흩어진다. 안과 바깥을 수시로 넘나들겠다고 한 이유도 그래서일 게다. 길을 걸으며, 보고 들은 것들은 담장 안에서의 사색을 통해서만 숙성된다. 그리고 이런 숙성의 결과는 다시 길을 따라 걷는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물론 이런 숙성을 돕는 재료는 책이다.
"작은 책방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작지만, 좋은 책방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회가 갖고 있는 문화의 힘은 간단치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평범한 시민이 좋은 책을 읽는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아예 이런 가능성 자체를 잊어버린 듯합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아주 특수한 부류만 하는 일처럼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시민운동가들조차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 읽을 겨를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정말 겨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책 읽을 겨를이 있다는 생각을 못할 뿐입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혼자서는 못 바꾸지요. 그러나 함께하면 됩니다. 좋은 책을 함께 읽는 운동을 벌이고 싶습니다."
대학가에 책방을 내지 않은 이유
▲ 서울 통인동에 있는 길담서원 입구. (02-730-9949) ⓒ프레시안
'길담서원'은 인문학 서점이다. 그리고 무턱대고 많은 책을 팔기 위한 곳이 아니라, '좋은 책'을 골라서 권하는 곳이 되려 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이 대개 그랬다. 하지만 1980년대에 융성했던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은 이제 거의 몰락했다. 몇 곳만 간신히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대학가에 책방을 낼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전혀 없어요. 책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대학생으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들르는 책방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학가가 아니라 통인동에 자리 잡은 것도 그래서이지요.
왜 하필 통인동이냐고요? 처음부터 이곳을 고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자본금의 한계를 벗어나는 후보지를 하나씩 지워가다보니, 결국 통인동만 남더군요. 이곳은 개발제한지역이라 임대료가 싸거든요.
결과적으로 보면, 아주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동네에는 시민단체도 많고, 정부 기관이나 연구소, 언론사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니지요. 게다가 경치도 좋고요. 생활인에게 다가가는 책방을 열겠다는 원래 생각에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런 곳에 책방을 세우면, 망하지 않겠느냐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혼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하니까 책방이 잘 되는구나'라고 여길 수 있는 사례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 해도 굶어죽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인문학 책방 열어도, 굶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퍼져간다면, 굉장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이라는 낱말은 언제부터인가 '굶는다'라는 낱말과 짝을 이뤄 쓰이는 게 됐다. '실용'을 전면에 내세운 현 정권에서라면,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홀대받는 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당장의 밥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먹고살만해졌을 때는 다른 재미있는 게 많다는 이유로, 체제가 불안정할 때는 인문학에 섞이기 마련인 '불온한 상상력'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늘 외면당했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학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 물질적 생산 활동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인문학이 굳이 필요한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거나, 상아탑의 권위를 빌어 자신들의 작업을 신비화하는 방식으로 비판과 검증에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유 있는 이들을 위한 '악세사리' 역할에 그치곤 했다. 여유 시간이 넉넉한 대학생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인문학 고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셈. 그래서 물었다. "지금,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배고픈 자들에게 더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생활인과 동떨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사회과학의 경우, 1980년대에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최근까지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을 통해 오히려 관심을 끌게 됐죠. 인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졌지요.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우리의 삶이 던지는 물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문학의 원래 의미대로라면, 인문학은 평범한 생활인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문학적인 질문을 품게 되니까요. 다만 우리가 인문학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잊고 지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최근, 인문학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교육자인 얼 쇼리스가 시도한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이지요. 국내에는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가벼운 교양강좌 수준이 아닙니다. 대학 정규 과정 수준의 인문학 고전 교육입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빈민들에게 고급 인문학 교육을 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예상과 달리, 빈민들은 내용을 충분히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인문학 교육을 통해 자아에 눈 뜨면서, 가난을 딛고 일어날 힘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밥벌이와 전혀 무관한 인문학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문학 고전 독서를 통해 의식이 깨어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례가 빈민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두루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길담서원'은 책방인 동시에 공부방이 되고자 합니다.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서,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는다면, 얼 쇼리스가 시도한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시도 속에서 위기에 처한 인문학 역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흑인 노예들에게는 성서가 해방의 무기였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성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이뤄지기 전에, 미국 흑인들에게 단 한 권의 책만 주어졌다고 합니다. 킹 제임스 판 성서입니다. 이 책은 성서의 여러 판본 중에서 대체로 보수적인 언어로 쓰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흑인 노예들이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문학 책이거든요. 아주 인문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문학, 수사학, 인식론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게 담겨 있지요. 그런데 이런 인문학적인 독서를 통해 노예들이 스스로의 해방을 향한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은 제겐 큰 놀라움 이었습니다.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수감 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감옥 안으로 들여올 수 있는 책은 무척 제한돼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을 띤 책은 접하기 힘들지요. 그곳에서 읽은 성서는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었습니다. 아울러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시편에 담긴 구절이, 열왕기에 적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어찌나 강렬하게 다가오던지요. 물론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였겠지만요.
보수적 언어로 쓰인 성서가 노예 해방의 정치적 무기가 됐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1919년 3·1운동 이전에는 성서와 기독교가 이런 역할을 했거든요. 성서를 읽으면서, 많은 이들이 '의식의 깨어남'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런 경험이 잘 이뤄지지 않았지요.
한국의 교회가 경직됐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읽도록 강요합니다. 이래서는 성서의 깊은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성서를 달달 외우기만 할 뿐이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세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완전히 마비돼 버리는 것입니다.
흑인 노예들이 성서를 읽으며 깨어난 것과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다시 뒤집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성서가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함께 책을 읽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서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회
그가 성공회대에서 가르치는 것은 평화학이다. 이는 그가 퀘이커교도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퀘이커교도들은 교회를 짓지 않는다. 성직자를 따로 두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한다. 자신의 진실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빛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독선과 증오 대신 평화를 심으려 한다.
▲ 길담서원이 문을 열던 날, 박성준 교수가 손님들을 보며 웃고 있다. ⓒ프레시안
그는 오랜 수감 생활을 하며, 신학에 눈을 떴다. 철학, 역사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치열한 독서의 결과였다. 출소한 뒤, 그는 일본에서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퀘이커공동체에서 생활하며 평화에 대해 공부했다. 이런 그가 예수와 성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거듭 던졌지만, 그는 "다음 기회에"라며 사양했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출세하려면, 특정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말이 별 부끄러운 기색 없이 나오는 시대에, 교회가 자녀의 입시 성공과 가장의 승진을 기원하는 곳이 돼 버린 시대에, 성서가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빠뜨릴 수 있겠는가.
"성서는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노예 해방 전에, 흑인 노예들이 성서를 통해 정치적으로 깨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같은 텍스트라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이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성서를 교리에 맞춰서만 읽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서가 가진 풍부한 메시지가 다 죽어버립니다. 신자들에게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도록 하는 것은 목회자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성서에서 억지로 증거를 끌어내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아주 잘못된 태도라고 봅니다."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주인입니다"
대략 이쯤에서 그는 대답을 멈췄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였지만, 특정한 방식으로만 책을 읽도록 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몹시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입장은 굳이 성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려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견고하게 지켜졌다.
"시민단체가 그동안 많이 발전했습니다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도록 틀 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조직의 입장으로 관철됩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길담서원'은 특정한 사람의 생각이 우위에 놓이는 곳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어떤 생각이든 존중받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아꼈다. 단지 혼자만의 생각이므로,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길담서원'에 모이는 이들과 함께 결정해야 계획이 될 수 있다는 것.
"'좋은 책 100권 읽기', '아주 좋은 책 100번 읽기'를 '길담서원'에서 하고 싶습니다. 물론 함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계획이 아니라 제 바람일 뿐입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워가야겠지요. 무슨 일이든, 혼자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충분한 준비가 안 된 채로 책방을 열려 합니다. 빈자리는 여러 사람이 함께 채워가는 것이지요.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대답이지만, 그가 앞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은 엿볼 수 있다.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못 박은 뒤, 그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외로운 책읽기, 함께하면 달라요"
"책읽기는 사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지루한 일이도 하죠.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함께 읽기'입니다.
그런데 책을 함께 읽으려면, 좋은 책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므로, 단 한 권, 혹은 몇 권만 고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함께 읽으려면 100권 정도를 고르는 게 적당합니다. 하지만 좋은 책 100권을 고르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목록을 계속 수정해 가야겠지요. 추천도서 목록이라는 게 종종 떠돌지만, 무리의 독서 생활 속에서 검증된 목록은 흔치 않습니다. 여럿이 함께 읽은 결과, 좋은 책이라고 두루 합의된 책 100권을 고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주 좋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일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옛말에,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을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대충 읽은 버릇에 이미 깊숙이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수박 겉 핧기' 식으로 읽어서는 책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들의 독서 습관 중에서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아주 좋은 책을 신중하게 골라서, 여러 번 읽는 것도 그 중 하나라고 봅니다."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책을 읽자
책방 점원 출신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라는 책에서 독서 방식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소리 내서 책을 읽는 방식에서 소리 없이 읽는 방식, 이른바 묵독으로 바뀐 게 갖는 의미에 대해서다.
옛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 관심이 많은 그는 소리를 내며 책을 읽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
"'길담서원' 한 귀퉁이에는 작은 서당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소리를 내며 책을 읽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을 함께 듣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책 읽기는 매우 역동적인 행위입니다.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책을 읽는 방식은 책에 담긴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처럼 소리를 내서 책을 읽는 일에 대한 관심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과도 관계가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책은 단지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전에는 음악이 담겨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좋은 책은 그 자체로 음악입니다. 좋은 문장에는 고유한 리듬이 있기 때문이지요. 책을 눈으로만 읽어서는 이런 리듬을 느낄 수 없습니다. 좋은 소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고전을 읽는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책을 꽤 읽는 사람조차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지요. 대신 해설서나 요약본을 읽곤 합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고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고전에 담긴 '좋은 소리'를 맛볼 수 없는 것이지요. 고전은 되도록 원전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내서 천천히 읽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문장에서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전은 단지 옛날에 나온 책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을 뜻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도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이 있습니다.
'고전적 가치'가 뭐냐고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책이지요. 이런 책들은 대개 눈으로만 읽어서는 느끼기 힘든 고유한 음악을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는 거듭해서 '좋은 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물었다. 간단치 않은 인생 역정을 거치며 만난 '좋은 책' 가운데 어떤 것을 소개하고 싶은지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어느 것을 딱 짚어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우선 꼽자면 역시 성서를 꼽고 싶습니다. 성서를 단지 종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듬뿍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성서를 만난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는 역시 젊은 시절, 접했던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들을 꼽고 싶습니다. 이런 책들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인간의 내면을 다룬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이런 책들도 꼽고 싶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권하는 책방
문득 그가 "최근에 서점에 간 적이 있느냐, 어떤 서점을 자주 이용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직장에서 가까운 광화문이나 종로의 대형서점을 종종 들른다"라고 대답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어떻던 가요"라는 물음이 다시 돌아왔다.
"공기가 탁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혼잡스러워서 책을 읽거나 구경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듯하다"라고 답했다. 이어 "잘 팔리는 책이 주로 눈에 띄도록 진열해 놓은 것도 좋은 책을 고르고 싶은 입장에선 약간 못마땅하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생각은 비슷하면서, 조금 더 강했다.
"잘 팔리는 책, 이른바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책방 개업을 준비하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출판 도매상으로부터 베스트셀러 목록을 건네받아 살펴봤지만, 대부분 상업적으로 기획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아끼고 많이 읽는 이들에게서 검증된 좋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길담서원'이 닮고 싶은 좋은 책방인 부산의 인디고 서원이나, 서울 대학로의 이음 아트도서에서 추천한 책이 이른바 베스트셀러 목록에 포함된 경우를 거의 찾기 힘들었습니다.
좋은 책방은 백화점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많은 책을 쌓아둔다고 좋은 책방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화점'이 돼야 합니다. 정선된 상품이 전시되는 가게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이 고르고, 고른 책, 정말 좋다고 인정받은 책이 눈에 잘 띄도록 배치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책방을 찾는 이가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의 안목과 생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책방의 진열대를 보며, '아, 이 책방은 이런 책을 추천 하는구나', '이 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길담서원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 ⓒ프레시안
"좋은 책방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
좋은 책방은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만나게 해주는 곳입니다. '그 책방에 들르면,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를 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대를 품고 있는 이들이 드나드는 책방은 자연스레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됩니다. 이런 만남이 쌓이면,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겠지요.
1980년대 말까지만해도,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들이 대학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모임들이 확 줄었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책방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좋은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이 곳곳에 생겨난다면, 이는 작가들에게도 훌륭한 자극이 되리라고 봅니다. 소리 내서 읽을 만한 음악성이 담긴,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책을 읽는 모임이 세상을 바꾼다
그는 좋은 책이 있는 곳에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길담서원'이 좋은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이 활성화되는 촉매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것은 좋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과 같다. 길 위에서 함께 노래하고, 담장 안에서 함께 책을 읽는 좋은 사람들의 모임들이 철옹성 같던 군사정권에 균열을 냈던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다.
힘이 세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질린 이들이라면, 좋은 소리가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는 책방으로 향할 일이다.
성현석 기자
"'좋은 책방' 해도 굶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겠다"
2008.02.28
"'좋은 책방' 해도 굶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겠다"
성현석 기자
[인터뷰] '길담서원' 연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인왕산이 보이는 서울 통인동 거리에는 큰 건물이 없다. 오종종한 건물들이 들어찬 거리를 지나다보면, 이곳이 청와대에서 가깝다는 점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슬슬 걷다 보면 툭툭 마주치곤 하는 굳은 표정의 전경들이 가까이서 뿜어져 나오는 권력의 기운을 문득 깨닫게 한다.
오후 내내 날리던 눈발 사이로 비친 전경들의 눈빛이 유독 삼엄하던 25일,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었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같은 날, 통인동 골목에서 작은 책방이 문을 열었다. 물론 이 두 사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드디어 '바깥사람'이 되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책방 주인 역시 청와대의 새 주인만큼이나 이날을 기다렸다는 점이다. 선한 눈빛을 가진 예순 아홉 살 책방 주인은 "올해부터 '바깥사람'이 돼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는 '안사람'이었다. 부인인 한명숙 전 총리의 대외활동을 가정에서 돕는다는 뜻에서 '안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바깥사람'이라는 낱말과 함께 그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40년 전인 1968년, 이십대의 끝자락에 서 있던 그는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됐다. 대학 연합 동아리의 동료였던 한명숙 전 총리와 갓 결혼해 한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리고 13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감옥 안에 갇혀 지냈다. 이런 뜻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안사람'이었다.
'바깥'에 대한 동경이 그의 내면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다.
언론 보도를 꾸준히 접했던 독자라면, 이쯤에서 책방 주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박성준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다. 그의 존재는 정치인 한명숙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부부의 표상으로, 오랜 수감생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신뢰와 사랑의 표본으로 이들 부부는 종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따뜻한 눈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40년 전, 이들 부부를 갈라놓았던 통혁당 사건은 보수 언론이 색깔 공세를 펴기 위해 종종 들먹인 소재였다.
길에서 툭툭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이 '시대의 주인'이다
▲ 길담서원을 연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
그래서인지 개업 준비로 분주하던 22일, 책방에서 만난 그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낱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서 쓰는 티가 역력했다. 우선 책방 이름에 대해 물었다. "왜 '길담서원'이죠?"
"친한 후배 부부가 제안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 이름이 '길'입니다. 후배 부부 아이 이름이 '담'이고요.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책방 이름을 짓자는 제안이었죠. '길담서원'이라는 이름을 불러보니, 울림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한곳에 뿌리내지 않고 '길'만 따라 걷는 삶이 가볍고 얇다면, '담' 안에서만 머무른 삶은 좁고 무겁다. 통인동 골목을 걷다보면, 간혹 '담'이 '길'을 막고 있거나 '길'이 '담'을 뚫고 지나는 경우를 보게 되지만, '길'과 '담'이 꼭 서로 맞서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게다.
한명숙 전 총리를 '바깥사람'이라 부르는 그에겐 '안과 바깥'의 구분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에게 안과 바깥의 역할이 기계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안과 바깥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올해가 제게는 60대의 마지막 해입니다. 동양 사람들은 열자리씩 끊어서 나이를 구분하는데 익숙하죠. 60대는 바깥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이제 저도 세상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게다가 올해는 민주 정부 10년 역사가 막을 내린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지혜는 이미 많이 소모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전망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성격을 부여하고, 방향성을 만들어 가는 게 누구일까요? 흔히 권력을 가진 이들이 시대를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국민이 권력자를 올려다보면서,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평범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스스로 주인이 돼서, 방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어디선가 좋은 게 뚝 떨어지길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시민 스스로가 시대를 만들어 가야지요."
"정말 책 읽을 겨를이 없습니까?"
주로 담 안에 머물던 그가 이제 길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길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바깥에서 나눈 대화는 종종 바람결에 흩어진다. 안과 바깥을 수시로 넘나들겠다고 한 이유도 그래서일 게다. 길을 걸으며, 보고 들은 것들은 담장 안에서의 사색을 통해서만 숙성된다. 그리고 이런 숙성의 결과는 다시 길을 따라 걷는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물론 이런 숙성을 돕는 재료는 책이다.
"작은 책방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작지만, 좋은 책방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회가 갖고 있는 문화의 힘은 간단치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평범한 시민이 좋은 책을 읽는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아예 이런 가능성 자체를 잊어버린 듯합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아주 특수한 부류만 하는 일처럼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시민운동가들조차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 읽을 겨를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정말 겨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책 읽을 겨를이 있다는 생각을 못할 뿐입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혼자서는 못 바꾸지요. 그러나 함께하면 됩니다. 좋은 책을 함께 읽는 운동을 벌이고 싶습니다."
대학가에 책방을 내지 않은 이유
▲ 서울 통인동에 있는 길담서원 입구. (02-730-9949) ⓒ프레시안
'길담서원'은 인문학 서점이다. 그리고 무턱대고 많은 책을 팔기 위한 곳이 아니라, '좋은 책'을 골라서 권하는 곳이 되려 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이 대개 그랬다. 하지만 1980년대에 융성했던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은 이제 거의 몰락했다. 몇 곳만 간신히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대학가에 책방을 낼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전혀 없어요. 책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대학생으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들르는 책방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학가가 아니라 통인동에 자리 잡은 것도 그래서이지요.
왜 하필 통인동이냐고요? 처음부터 이곳을 고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자본금의 한계를 벗어나는 후보지를 하나씩 지워가다보니, 결국 통인동만 남더군요. 이곳은 개발제한지역이라 임대료가 싸거든요.
결과적으로 보면, 아주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동네에는 시민단체도 많고, 정부 기관이나 연구소, 언론사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니지요. 게다가 경치도 좋고요. 생활인에게 다가가는 책방을 열겠다는 원래 생각에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런 곳에 책방을 세우면, 망하지 않겠느냐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혼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하니까 책방이 잘 되는구나'라고 여길 수 있는 사례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 해도 굶어죽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인문학 책방 열어도, 굶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퍼져간다면, 굉장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이라는 낱말은 언제부터인가 '굶는다'라는 낱말과 짝을 이뤄 쓰이는 게 됐다. '실용'을 전면에 내세운 현 정권에서라면,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홀대받는 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당장의 밥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먹고살만해졌을 때는 다른 재미있는 게 많다는 이유로, 체제가 불안정할 때는 인문학에 섞이기 마련인 '불온한 상상력'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늘 외면당했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학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 물질적 생산 활동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인문학이 굳이 필요한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거나, 상아탑의 권위를 빌어 자신들의 작업을 신비화하는 방식으로 비판과 검증에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유 있는 이들을 위한 '악세사리' 역할에 그치곤 했다. 여유 시간이 넉넉한 대학생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인문학 고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셈. 그래서 물었다. "지금,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배고픈 자들에게 더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생활인과 동떨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사회과학의 경우, 1980년대에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최근까지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을 통해 오히려 관심을 끌게 됐죠. 인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졌지요.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우리의 삶이 던지는 물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문학의 원래 의미대로라면, 인문학은 평범한 생활인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문학적인 질문을 품게 되니까요. 다만 우리가 인문학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잊고 지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최근, 인문학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교육자인 얼 쇼리스가 시도한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이지요. 국내에는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가벼운 교양강좌 수준이 아닙니다. 대학 정규 과정 수준의 인문학 고전 교육입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빈민들에게 고급 인문학 교육을 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예상과 달리, 빈민들은 내용을 충분히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인문학 교육을 통해 자아에 눈 뜨면서, 가난을 딛고 일어날 힘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밥벌이와 전혀 무관한 인문학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문학 고전 독서를 통해 의식이 깨어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례가 빈민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두루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길담서원'은 책방인 동시에 공부방이 되고자 합니다.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서,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는다면, 얼 쇼리스가 시도한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시도 속에서 위기에 처한 인문학 역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흑인 노예들에게는 성서가 해방의 무기였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성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이뤄지기 전에, 미국 흑인들에게 단 한 권의 책만 주어졌다고 합니다. 킹 제임스 판 성서입니다. 이 책은 성서의 여러 판본 중에서 대체로 보수적인 언어로 쓰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흑인 노예들이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문학 책이거든요. 아주 인문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문학, 수사학, 인식론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게 담겨 있지요. 그런데 이런 인문학적인 독서를 통해 노예들이 스스로의 해방을 향한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은 제겐 큰 놀라움 이었습니다.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수감 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감옥 안으로 들여올 수 있는 책은 무척 제한돼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을 띤 책은 접하기 힘들지요. 그곳에서 읽은 성서는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었습니다. 아울러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시편에 담긴 구절이, 열왕기에 적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어찌나 강렬하게 다가오던지요. 물론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였겠지만요.
보수적 언어로 쓰인 성서가 노예 해방의 정치적 무기가 됐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1919년 3·1운동 이전에는 성서와 기독교가 이런 역할을 했거든요. 성서를 읽으면서, 많은 이들이 '의식의 깨어남'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런 경험이 잘 이뤄지지 않았지요.
한국의 교회가 경직됐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읽도록 강요합니다. 이래서는 성서의 깊은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성서를 달달 외우기만 할 뿐이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세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완전히 마비돼 버리는 것입니다.
흑인 노예들이 성서를 읽으며 깨어난 것과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다시 뒤집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성서가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함께 책을 읽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서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회
그가 성공회대에서 가르치는 것은 평화학이다. 이는 그가 퀘이커교도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퀘이커교도들은 교회를 짓지 않는다. 성직자를 따로 두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한다. 자신의 진실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빛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독선과 증오 대신 평화를 심으려 한다.
▲ 길담서원이 문을 열던 날, 박성준 교수가 손님들을 보며 웃고 있다. ⓒ프레시안
그는 오랜 수감 생활을 하며, 신학에 눈을 떴다. 철학, 역사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치열한 독서의 결과였다. 출소한 뒤, 그는 일본에서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퀘이커공동체에서 생활하며 평화에 대해 공부했다. 이런 그가 예수와 성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거듭 던졌지만, 그는 "다음 기회에"라며 사양했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출세하려면, 특정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말이 별 부끄러운 기색 없이 나오는 시대에, 교회가 자녀의 입시 성공과 가장의 승진을 기원하는 곳이 돼 버린 시대에, 성서가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빠뜨릴 수 있겠는가.
"성서는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노예 해방 전에, 흑인 노예들이 성서를 통해 정치적으로 깨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같은 텍스트라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이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성서를 교리에 맞춰서만 읽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서가 가진 풍부한 메시지가 다 죽어버립니다. 신자들에게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도록 하는 것은 목회자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성서에서 억지로 증거를 끌어내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아주 잘못된 태도라고 봅니다."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주인입니다"
대략 이쯤에서 그는 대답을 멈췄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였지만, 특정한 방식으로만 책을 읽도록 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몹시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입장은 굳이 성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려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견고하게 지켜졌다.
"시민단체가 그동안 많이 발전했습니다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도록 틀 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조직의 입장으로 관철됩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길담서원'은 특정한 사람의 생각이 우위에 놓이는 곳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어떤 생각이든 존중받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아꼈다. 단지 혼자만의 생각이므로,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길담서원'에 모이는 이들과 함께 결정해야 계획이 될 수 있다는 것.
"'좋은 책 100권 읽기', '아주 좋은 책 100번 읽기'를 '길담서원'에서 하고 싶습니다. 물론 함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계획이 아니라 제 바람일 뿐입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워가야겠지요. 무슨 일이든, 혼자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충분한 준비가 안 된 채로 책방을 열려 합니다. 빈자리는 여러 사람이 함께 채워가는 것이지요.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대답이지만, 그가 앞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은 엿볼 수 있다.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못 박은 뒤, 그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외로운 책읽기, 함께하면 달라요"
"책읽기는 사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지루한 일이도 하죠.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함께 읽기'입니다.
그런데 책을 함께 읽으려면, 좋은 책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므로, 단 한 권, 혹은 몇 권만 고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함께 읽으려면 100권 정도를 고르는 게 적당합니다. 하지만 좋은 책 100권을 고르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목록을 계속 수정해 가야겠지요. 추천도서 목록이라는 게 종종 떠돌지만, 무리의 독서 생활 속에서 검증된 목록은 흔치 않습니다. 여럿이 함께 읽은 결과, 좋은 책이라고 두루 합의된 책 100권을 고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주 좋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일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옛말에,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을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대충 읽은 버릇에 이미 깊숙이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수박 겉 핧기' 식으로 읽어서는 책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들의 독서 습관 중에서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아주 좋은 책을 신중하게 골라서, 여러 번 읽는 것도 그 중 하나라고 봅니다."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책을 읽자
책방 점원 출신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라는 책에서 독서 방식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소리 내서 책을 읽는 방식에서 소리 없이 읽는 방식, 이른바 묵독으로 바뀐 게 갖는 의미에 대해서다.
옛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 관심이 많은 그는 소리를 내며 책을 읽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
"'길담서원' 한 귀퉁이에는 작은 서당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소리를 내며 책을 읽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을 함께 듣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책 읽기는 매우 역동적인 행위입니다.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책을 읽는 방식은 책에 담긴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처럼 소리를 내서 책을 읽는 일에 대한 관심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과도 관계가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책은 단지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전에는 음악이 담겨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좋은 책은 그 자체로 음악입니다. 좋은 문장에는 고유한 리듬이 있기 때문이지요. 책을 눈으로만 읽어서는 이런 리듬을 느낄 수 없습니다. 좋은 소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고전을 읽는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책을 꽤 읽는 사람조차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지요. 대신 해설서나 요약본을 읽곤 합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고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고전에 담긴 '좋은 소리'를 맛볼 수 없는 것이지요. 고전은 되도록 원전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내서 천천히 읽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문장에서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전은 단지 옛날에 나온 책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을 뜻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도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이 있습니다.
'고전적 가치'가 뭐냐고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책이지요. 이런 책들은 대개 눈으로만 읽어서는 느끼기 힘든 고유한 음악을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는 거듭해서 '좋은 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물었다. 간단치 않은 인생 역정을 거치며 만난 '좋은 책' 가운데 어떤 것을 소개하고 싶은지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어느 것을 딱 짚어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우선 꼽자면 역시 성서를 꼽고 싶습니다. 성서를 단지 종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듬뿍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성서를 만난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는 역시 젊은 시절, 접했던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들을 꼽고 싶습니다. 이런 책들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인간의 내면을 다룬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이런 책들도 꼽고 싶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권하는 책방
문득 그가 "최근에 서점에 간 적이 있느냐, 어떤 서점을 자주 이용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직장에서 가까운 광화문이나 종로의 대형서점을 종종 들른다"라고 대답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어떻던 가요"라는 물음이 다시 돌아왔다.
"공기가 탁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혼잡스러워서 책을 읽거나 구경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듯하다"라고 답했다. 이어 "잘 팔리는 책이 주로 눈에 띄도록 진열해 놓은 것도 좋은 책을 고르고 싶은 입장에선 약간 못마땅하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생각은 비슷하면서, 조금 더 강했다.
"잘 팔리는 책, 이른바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책방 개업을 준비하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출판 도매상으로부터 베스트셀러 목록을 건네받아 살펴봤지만, 대부분 상업적으로 기획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아끼고 많이 읽는 이들에게서 검증된 좋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길담서원'이 닮고 싶은 좋은 책방인 부산의 인디고 서원이나, 서울 대학로의 이음 아트도서에서 추천한 책이 이른바 베스트셀러 목록에 포함된 경우를 거의 찾기 힘들었습니다.
좋은 책방은 백화점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많은 책을 쌓아둔다고 좋은 책방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화점'이 돼야 합니다. 정선된 상품이 전시되는 가게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이 고르고, 고른 책, 정말 좋다고 인정받은 책이 눈에 잘 띄도록 배치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책방을 찾는 이가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의 안목과 생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책방의 진열대를 보며, '아, 이 책방은 이런 책을 추천 하는구나', '이 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길담서원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 ⓒ프레시안
"좋은 책방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
좋은 책방은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만나게 해주는 곳입니다. '그 책방에 들르면,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를 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대를 품고 있는 이들이 드나드는 책방은 자연스레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됩니다. 이런 만남이 쌓이면,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겠지요.
1980년대 말까지만해도,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들이 대학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모임들이 확 줄었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책방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좋은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이 곳곳에 생겨난다면, 이는 작가들에게도 훌륭한 자극이 되리라고 봅니다. 소리 내서 읽을 만한 음악성이 담긴,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책을 읽는 모임이 세상을 바꾼다
그는 좋은 책이 있는 곳에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길담서원'이 좋은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이 활성화되는 촉매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것은 좋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과 같다. 길 위에서 함께 노래하고, 담장 안에서 함께 책을 읽는 좋은 사람들의 모임들이 철옹성 같던 군사정권에 균열을 냈던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다.
힘이 세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질린 이들이라면, 좋은 소리가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는 책방으로 향할 일이다.
성현석 기자
[110] '퀘이커 평화 운동가’ 박성준씨 (read)
[110] '퀘이커 평화 운동가’ 박성준씨 (read)
'퀘이커 평화 운동가’ 박성준씨
[한겨레신문] [기획] 2003년 3월 25일
우리 안위위해 남의 피눈물 어찌 강요하나
박성준(63) 씨는 ‘평화를 외치는 자’라기 보다는 ‘평화로운 자’였다. 조용조용한 음성, 수줍은 듯 따뜻하게 짓는 미소에서 그의 내면이 느껴진다. 퀘이커교도의 영성인 듯싶다. 함석헌 선생 등으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인 퀘이커교는 미국과 유럽에서 인종·성 평등과 비폭력 평화운동에 앞장서온 교파다.
그는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교수, ‘비폭력 평화연대’와 ‘아름다운 가게’의 공동대표, 목사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퀘이커교도 평화운동가’가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
퀘이커교도는 ‘나 아닌 남에게도 진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을 내 신념이나 주장쪽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상대에게서 진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쓴다고 한다.
함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과 다르면 ‘악’으로 규정짓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부시 미국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인 셈이다.
서울 양천구 신정2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미국 퀘이커공동체에서 살고 돌아온 뒤 ‘움직이는 학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는 보통의 학교가 아니라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이다. 상대의 말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 듣도록 하는 ‘경청 학교’다. ‘경청’이야말로 갈등과 전쟁을 막을 방법이라고 여기는 그다. 따라서 그는 말하기보다는 경청하길 즐겨한다. 그러나 그가 평화를 원하는 간절함을 담아 모처럼 입을 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있다. 이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전쟁’이 아니다. 침략이다. 미국은 유엔의 무기사찰도 무산시키고, 국제사회의 평화적 해결 노력도 허물어버렸다.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불법인 침략이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미국만큼 대량살상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미국은 이라크를 최첨단 무기 성능시험장으로 만들고 있다.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 이권과 중동에서 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고 있다.
-그런 침략을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하고, 지원부대를 파견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대신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으려고 하는데, 우리의 안위를 위해 어찌 남에게 피눈물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살육에 참여해놓고 한반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할 수 있겠는가. 미국이 국익만을 위해 저렇게 무도한 짓을 하는데, 우리도 국익만을 생각해야 하는가. 어떤 이익도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전쟁을 막는 반전운동가가 아닌가. 이번 침략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영국만이라도 주저앉혔어야 했다. 실제 이라크 공격에 참가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뿐이다. 만약 영국 국민의 반전 열기가 더욱 거세 국민과 의회 차원에서 불참 결정이 내려졌다면, 미국 홀로 침략을 결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민의 70% 이상이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물음에 따라 조사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미국에도 전쟁 반대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미국 사회를 바꾸도록 도와야 한다. 미국의 문제는 먼저 그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라크전 남의집일 아닙니다. 힘의논리 패배주의 젖지말고 붉은 함성처럼 떨쳐 일어나야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그렇다. ‘강 건너 불 구경’할 때가 아니다. 설마 설마 하다가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일본에선 이미 북한이 핵 원자로를 가동하면 미국이 바로 북한을 공격하고, 북한은 미사일로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전쟁이 나면 한·미·일 동맹체제에 따라 일본도 전쟁에 참여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상황 인식은 안이하기 그지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도 말이다. 휴전선에서 30~40분 거리에 2천만 명이 밀집해 있다. 전쟁이 나면 원치않아도 우리 모두가 ‘인간 방패’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을 방도가 없겠는가. 이라크전에서 이미 봤듯이 미국은 막무가내 아닌가.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숙명론은 안된다. 우리의 목숨이 달렸고,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부시가 하겠다고 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패배주의는 안된다. 이라크전은 이미 되돌이키기 어렵지만, 한반도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국민 절대 다수가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결정해야 한다.
-전세계의 반전 여론에도 기어코 침공하는 부시가 아닌가.
=월드컵 때 보인 열기라면 부시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축구를 즐기는데도 그렇게 열을 냈는데, 생사문제에 그보다 힘을 모으지 않는다는 게 될 법이나 한 얘긴가.
-그러나 반전 평화시위가 월드컵 열기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 아닌가.
=(잠시 한 숨을 쉬며) 내놓고 말하기 어렵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운동가들의 운동 방식이다. 문제가 심각하다. 사람들은 소수 운동가들만이 단상에 오르고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밀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방식에 더 이상 호응하지 않는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들러리를 서지 않을 만큼 대중은 이미 달라져 있지만 운동가들은 옛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은 이회창이 되느냐, 누무현이 되느냐의 운동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한민족이 결딴나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운동가들이 뼈를 깎는 자기 반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월드컵 때 붉은악마 응원과 미군 장갑차 사고 때 촛불시위를 보지 않았는가. 운동가는 뒤에 숨고, 참가자들이 주인이 되게 했다. 그들은 단상과 단하를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 하나 되게 했다. 소수가 마이크를 잡고 다수를 가르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참여자가 주인이 되어 현장에서 분위기를 자신이 만들어 가니 흥이 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안일도 큰 문제 아닌가.
=미국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반도 전쟁은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문제다. 그러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들 촛불 정도는 스스로 들고 거리로 나와야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매스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국민도 인터넷을 통해 직접 미국민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글 조연현 기자 cho@hani.co.kr,사진 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
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지은이) | 행복한책읽기 | 2010-02-26
----
이정희추천(2) 김제동추천(1) 독자추천(1) 박경철추천(1)
두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장관직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총리직을 수행한 한명숙의 자서전. 이 책에는 한명숙 전 총리의 지나온 삶이 5부로 나뉘어 담겨 있다.
1부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에는, 사업가인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꾸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평양에서 서울로 피난을 내려오면서부터 겪게 된 가난과,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2부 '결핍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에는 감옥에 있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더불어 6남매 중 장녀로서 친정의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생업 일선에 나서는 상황이, 3부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서다'에는 구습과 열배감에 젖어 있는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여성 사회운동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4부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에는 13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남편과 재회한 후 가족법 개정운동과 민우회 활동을 통한 다각적이고도 체계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거치며 직면했던 문제들과 이를 풀어나가는 대화와 이해의 해결방식, 그리고 특유의 부드러운 열정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
글을 시작하며
1부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
· 유복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 물지게를 지는 소녀
· 내 운명의 남자
·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
· 6개월 만에 깨어진 신혼
2부 결핍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 첫 면회
· 공부에 매달리다
· 신입사원 한명숙
·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견디다
· 살림의 마술사
3부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서다
· 용기 있는 스승
· 인습의 알을 깨고 나오다
· “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생과부 한명숙입니다”
· 아버지의 실종
· 희망을 만드는 숙달된 조교
· 희열이 나를 일하게 한다
· 가난도 힘이 된다
· 취소된 면회
· 어떤 예언
· 내 생애 최악의 날
· 인간이기에, 다만 인간이기에
· “살아있다, 만세!”
· 미친 듯이 살 일이다
· 감옥에서 맞은 10.26
· 크리스마스 캐럴
· 어울려 사는 즐거움
· 오월의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 그림자에게 말 걸기
· 교도관의 영어선생
· 노란 손수건
4부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
· 여성운동 종합선물세트
· 부엌에서 세상을 보다
·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탄생
· “쏘지 마! 쏘지 마!”
· 꽃다운 목숨들, 거리에서 지다
· 여성운동의 산맥, 가족법 개정운동
· 가사노동의 가치는 얼마?
·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
· 일본까지 따라온 일들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 일본군 위안부
· 평화를 배우다
5부 한명숙, 정치인이 되다
· 대통령에게 걸려 온 두 번째 전화
· 남편과 아들을 두고 서울로 오다·
· 버스 타는 정치인
· 한명숙은 뿔 달린 여자
· 여성의 멍에, 성희롱
· 우는 암탉 만들기
· 오전에는 퇴임식, 오후에는 취임식
· 업무평가 최우수, 리더십 1위
· 가수 한명숙이 아닌 기호 3번 한명숙입니다
· 균형의 가치
· 나는 그들을 용서했다
· 나는 장악하지 않는다
· “대추리 주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 장미꽃을 안고 낯선 집으로·208
·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지다
·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나는 우리 국민을 믿는다
* 한명숙에 관한 오해와 진실
* 연보
-----
P.5 : 진실’이란 말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다른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지금 저에게 진실을 설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미 제 삶과 명예에 잔뜩 먹칠을 해 놓은...
P.29 : 나는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친정집에 들렀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신변이 걱정이 되었다. 내 우려대로 며칠 후, 우리 식구들은 어딘지 모를 데로 실려 가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동생들은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풀려났다. 나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 남편의...
P.68-69 : 아버지가 실종된 지 정확하게 일주일째 다시 집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를 발견한 곳이 바로 시립병원이라는 것이었다.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모습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
-----
독자
: 일을 하며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주부입니다. 삶이 무척 힘들게 느껴지곤 했는데 한 총리님 자서전을 읽으니 부끄럽습니다. 이 책을 늘 가까이 두고 힘들 때마다 읽겠습니다. -신라영(40대 주부)
이정희 (변호사. 18대 국회의원.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대표 역임)
: 어둠이 가시지 않은 80년대, ‘여성학특강’에서 만난 한명숙 선생님, 참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13년이나 옥바라지를 하셨고 당신도 수감된 적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아야 했습니다. 다시 사람마다 삶이 무거운 시대, 우리를 감싸 안아 일으켜 세우는 한 총리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
저자 : 한명숙
저자파일
최근작 :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한명숙>,<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총 4종 (모두보기)
SNS : http://twitter.com/hanmyeongsook
소개 :
194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결혼했으나 남편 박성준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수감되자 이후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1974년부터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사회 간사로 일하면서 70년대 한국사회에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 반을 복역한 후 1981년 광복절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석방된 남편과 13년 반 만에 재회했다.
1990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1993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 여성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1999년 정계에 입문하여 16대 국회의원, 초대 여성부장관, 환경부장관, 17대 국회의원을 거쳐,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0년 현재 민주당 상임고문, 국정자문위원장, 중앙위원회 의장과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명숙 전 총리,‘시련의 한복판’에서 펜을 들다
한명숙 전 총리가 생애 첫 자서전을 냈다.
두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장관직(여성부, 환경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총리직 수행을 끝으로 조용히 자연인 한명숙으로 돌아가려 했던 한 전 총리가 『한명숙』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서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서거 이후 깊은 슬픔 속에서도 묵묵히 전직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일에만 몰두해오던 그가 펜을 들고 세상을 향해 다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 책 『한명숙』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진실’ 이란 말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다른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지금 저에게 진실을 설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미 제 삶과 명예에 잔뜩 먹칠을 해 놓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진실을 보여줄 것인가. 결국은 제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명숙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명숙이란 이름에 흠집을 내놓은 사람들을 향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 글은 저들의 조작과 음해에도 저를 믿어주고 흔들림 없이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향한 대답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증명하다
이 책에는 한 총리의 지나온 삶이 5부로 나뉘어 담겨 있다.
1부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에는, 사업가인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꾸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평양에서 서울로 피난을 내려오면서부터 겪게 된 가난과,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2부 결핍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감옥에 있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더불어 6남매 중 장녀로서 친정의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생업 일선에 나서는 상황이, 3부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서다에는 처음에는 직장 일로서 시작한 ‘크리스챤아카데미’ 활동을 통해 서서히 이 나라의 사회문제와 여성문제를 자각하게 되고, 구습과 열배감에 젖어 있는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여성 사회운동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과정과 그 활동으로 인해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하지만, 오히려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단련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4부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에는 13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남편과 재회한 후 가족법 개정운동과 민우회 활동을 통한 다각적이고도 체계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여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여성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5부 한명숙 정치인이 되다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름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거치며 직면했던 문제들과 이를 풀어나가는 대화와 이해의 해결방식, 그리고 한명숙 특유의‘부드러운 열정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기된 <한명숙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는 한명숙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세간에 드러나지 않아 오해를 사는 몇 가지 편견들에 대해 짚어준다.
우리 현대사가 만든 인물, 한명숙
이 책을 보면 시대가 한명숙을 만들었고 한명숙이 시대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한명숙은 처음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거나 의지를 가지고 여성운동에 뛰어든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는 한명숙을 반독재투쟁가로, 여성운동가로, 정치인으로 키우고 단련시켰다. 시국사범으로 신혼 6개월 만에 투옥된 남편으로 인해 전혀 다른 인생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활동을 통해 사회문제와 여성문제를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자각이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명숙은 자신의 자각을 현장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며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갔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 것이다.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던 한명숙이 국회의원, 장관, 총리를 역임하는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련에 지지 않고 시련을 통해 단련되다
남편의 투옥과 생활을 옥죄는 가난 그리고 끝내는 자신마저 감옥에 갇히는 고난 속에서도 한명숙은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다. 엄혹한 독재의 시대는 한명숙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삶을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고, 주어진 일, 해야 할 일을 사명감과 희열을 가지고 했다. 감옥에서는 책을 읽고 명상을 하면서 자신을 다스렸고, 출옥을 한 이후에는 강고한 사회적 편견과 맞서며 여성운동 일선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보다 큰 틀에서 세상을 보고 행동하며 자신의 삶과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다
한명숙의 삶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싸우는 삶이었다. 여성문제가 치열한 고민이었을 때는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현장에서 일했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역할이 필요할 때는 그 부름에 응했다. 여성운동가로서, 안정된 행정관료로서 이미 얻은 명성이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이제까지 한명숙이 살아온 방식이고, 그 삶의 태도가 지금의 한명숙을 만들었다.
부드러운 열정은 꺾이지 않는다
한명숙의 얼굴은 그가 거쳐온 역경의 삶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부드럽다. 지금까지 여성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보여온 그의 말과 행보는 결코 최전선에서 싸워 온 투사의 모습이나 정치 지도자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부드러운 열정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 바로 그것이 온유한 귀부인처럼 보이는 한명숙이 정치인으로서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이유이다. 부드러운 열정은 꺾이지 않는다. 부드러움은 일견 약하고 희미해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저들’까지 끌어안고 함께 나아가는 힘, 그것이 바로 부드러운 열정의 숨겨진 힘이다.
거대한 벽을 거대한 문으로 만드는 사람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그리고 침착하게 일해 온 사람, 그래서 시대와 함께 했던 고난에 찬 삶이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 이제 시대가 자신에게 맡긴 소명을 다했다고 믿으며 조용히 물러서려 했으나 다시 시대의 부름을 받은 사람. 한명숙은 다시 원치 않았던 싸움터의 한복판에 섰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지만, 그는 다시 거대한 벽을 거대한 문으로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총 : 4편
한명숙부드러운열정세상을품다 새창으로 보기
만화애니비평 ㅣ 2012-01-15 ㅣ 공감(0) ㅣ 댓글 (0)
19C 독일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詩人)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시는 너무나도 인상 깊고 잊을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은 “직조공(織造工)의 노래(歌)”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읽어보면 그들의 원망과 분노, 한탄이 하늘 위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오늘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명숙씨가 노동가요 배포와 관련된 일로 구속을 당한 직후 심한 고문과 독방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공안경찰들이 와서 그녀를 잡아가게 만든 노래는 다음과 같다. 시와 노래는 비슷하니 그 음율적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인간의 마음에 와닿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살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일했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쳐서 눈빛에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당시의 노동자의 대우는 매우 혹독했다. 사실 한국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답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위협당할 경우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기 전의 인사청문회의 질문이 정말 코미디와 같았다. 누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은 무슨 국가냐고? 그녀의 대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질문자가 다른 코멘트를 추가한다.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국가 점에서 한국은 경제자유가 보장되어있는 자본주의국가는 맞다. 그리고 개인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는 점에서 자본주의구조사회가 장점도 있다. 문제는 그런 구조사회에서 정말 자유롭게 하는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어느 사람이 정해진 근로시간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안전적인 장치와 보건환경적인 요소에서 소외를 당하면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맞는 처사이냐고 말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지금에 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시 그녀가 살아온 길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권을,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국민들에게 맑은 물과 공기를,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은커녕 오히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그런 삶 인듯 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과부가 되어 13년 넘게 남편을 보지 못한 여인, 법적인 절차도 없이 납치되듯이 경찰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고, 거기에 모자라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말이다.
가족 중에 남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불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한 지선에 생각을 치우쳐져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편하게 생각하기 좋기에 남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에서는 눈빛이 변한다.
기회주의적인 인간형에 길들어진 사회구조에서 세상은 각박해져 가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는 더욱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밟히고 밟힌 사람과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본인마저 밟힌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한국사회 이면에 가려워진 어둠이 보인다.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원망했냐는 말에 하지 않는다고 하나,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후려친 존재들에 대한 용서한다는 말조차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공감 가는 부분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성부 장관 시절,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전통적인 부분의 혼동이 남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전통 문화는 조선사회를 많이 따라가는데, 특히 성리학 부분에서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폐단적인 부분을 아직까지 수용하는 점이다. 확실히 전통문화의 존재와 현실화는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정체성에서 과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전통이 아닌 것이 당연지사로 넘어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인권문제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학대받아온 여성의 권리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학교 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 인권문제도 문제이나 남성의 억압된 사회도 같이 생각할 부분이었다. 문성근씨와 황신혜씨가 출연한 “생과부 위자료 소송사건”처럼 인간은 항상 억압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취지의 여성부가 지금은 안타까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명숙씨의 이화여대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촌, 어린이, 노약자, 여성이 주된 초점이라면 지금의 여성부는 엘리트주의적인 이화여대 엘리트를 위한 정치권리 노선이 아닌가도 싶었다. 한명숙씨가 추구한 페미니즘이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간애적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무참히도 가슴을 짓밟힌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런 짓밟힌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욱 짓밟힌 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의 의지 인 것 같다.
------
롤모델 만나다 새창으로 보기
공중제비 ㅣ 2011-06-19 ㅣ 공감(0) ㅣ 댓글 (0)
한명숙...이렇게 멋진 분이신줄 몰랐다.
수많은 수식어들이 붙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책을 읽으면서 모성보호법 통화, 여성할당제 등이 모두 그분이 여성부장관일 때 이룬 업적인지도 몰랐다.
소신을 가지고 30년 동안 여성의 인권향상을 위해 노력하신것,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일하신 점을 새삼스레 알게되었다. 젊은 나이에 2년이나 넘게 옥생활도 하고 고문도 당했다니 정말 더 위대하고 존경이 절로 표해진다.
요즘 시대에 여성 롤모델이 참 부재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명숙 전 총리가 계신다니 참 다행이다. 서울시장 낙마해서 안타깝지만 분명 더 큰 일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
닮고 싶은 사람...한명숙 새창으로 보기
줄리아 ㅣ 2010-04-09 ㅣ 공감(1) ㅣ 댓글 (0)
이전부터 티비에 비치는 한명숙이라는 분을 보면서 온화해 보이면서도 단단하고 내공이 상당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요즘 모든 면에서 많이 힘든 나에게 자극을 줄 책을 찾았는데 읽는 동안 눈물도 흘리며 내 자신이 얼마나 나태하고 부끄럽게 살았는지 반성하기도 하고 용기도 얻게 해준 책이다.
정말 누군가와 비교해서 내 자신이 많이 부끄럽다고 느낀 건 두번째다. 내 주위에 이런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한명숙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든지 당당한 사람...이건 나이 들수록 어려운 과제다. 철 없을 땐 나 잘났다고 당당한 척 했지만 나이들수록 주변의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서 절로 부끄러워 꼬리가 내려진다.
이런 분들이 우리 사회에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이 분의 나이가 되면 한명숙님의 온화함과 당당함 부드러운 포용력을 겸비한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있기를 기대 해 본다.
<아래내용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 책을 통해 나에게 다시한번 많은 생각을 해준 내용입니다. >
p.147 - 세상이 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변하는 것은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작은 변화를 이뤄 내기 위해 눈물과 땀을 쏟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새창으로 보기
Seresca ㅣ 2010-03-29 ㅣ 공감(6) ㅣ 댓글 (0)
서평을 잘 쓰지 않는 편인데, 이벤트를 보고 겸사겸사 상품을 받으면 좋고, 더 많은 분들이 책을 읽었으면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 별로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번 이대통령 정권에 들어서 부쩍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생각이 많으실 수도 있고, 아닌 분이 많을 수도 있겠지요. 요즈음 화제가 되는 한명숙 전 총리를 향한 검찰의 날카로운 칼날이, 더 한명숙 전 총리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 잘못을 저질러서 수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번 수사에는 많은 의혹들이 있었지요. 저도 그저 뉴스에 적당한 관심밖에 없는 네티즌의 일부라 잘은 모릅니다만, 무리한 억지가 들어있는 수사 감행은 이해할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덕에 한명숙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전대통령님 서거 후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 그저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민심의 방향을 잘 타서 성공하고 싶은 정치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면 세상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제 혼탁해 져버린 마음때문 일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그 사람에대해서 더 알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미 다음 시장선거때 뽑을 사람으로 한명숙 전 총리를 지지하고 있었던 터라, 더 알고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막연한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당연히 한전총리가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인가 싶었지만, 전 확신을 내세워서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큼 잘 할고 있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친구들의 지식도 얄팍한 수준인것은 사실이지요. 무조건 적으로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더 알아보고 내 생각대로 내 식대로 판단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뉴스를 찾아보고, 웹페이지 자료들을 둘러보고 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귀찮기도하구요,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한번 보는게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나온지 얼마안된 책이라는 생각도 인식 못하고, 그저 휙휙 사버렸습니다.
자서전이라 그랬던지 책은 생각보다 참 재미있어서 3시간 만에 꿀꺽 읽어버렸습니다.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서 고마웠습니다. 항상 나 자신은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생각을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하나 내 신념과 열정이 담긴 일이 아닌 그저그런, 어쩔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음에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더 빨리, 학생시절에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한숨섞인 한탄도 하게 되었구요. 원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못되는데도 참 책을 재미있게 읽었네요. 정치적인 색깔이 있다기 보다는 학생이 읽기 좋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변에 여학생이 있다면 더더욱 추천을 해주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이 한전총리님과 같은 능동적인 삶이 아닌 수동적인 삶을 사는데 익숙해 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떤 방향이든 스스로가 행복하다면 가장 최고의 삶이 겠지만요.
한전총리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기도 하면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글들이 담긴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전총리님과 어머님의 긍정적 마인드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앞으로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도록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
아.. 다 쓰고 보니 참으로 허접한 서평이지만, 열심히 썼으니 잘 봐주세요.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과 신념을 지키고 살기를 바라면서 !!!! 피스 !!! ^-^)
-----
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지은이) | 행복한책읽기 | 2010-02-26
----
이정희추천(2) 김제동추천(1) 독자추천(1) 박경철추천(1)
두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장관직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총리직을 수행한 한명숙의 자서전. 이 책에는 한명숙 전 총리의 지나온 삶이 5부로 나뉘어 담겨 있다.
1부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에는, 사업가인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꾸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평양에서 서울로 피난을 내려오면서부터 겪게 된 가난과,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2부 '결핍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에는 감옥에 있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더불어 6남매 중 장녀로서 친정의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생업 일선에 나서는 상황이, 3부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서다'에는 구습과 열배감에 젖어 있는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여성 사회운동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4부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에는 13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남편과 재회한 후 가족법 개정운동과 민우회 활동을 통한 다각적이고도 체계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거치며 직면했던 문제들과 이를 풀어나가는 대화와 이해의 해결방식, 그리고 특유의 부드러운 열정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
글을 시작하며
1부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
· 유복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 물지게를 지는 소녀
· 내 운명의 남자
·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
· 6개월 만에 깨어진 신혼
2부 결핍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 첫 면회
· 공부에 매달리다
· 신입사원 한명숙
·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견디다
· 살림의 마술사
3부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서다
· 용기 있는 스승
· 인습의 알을 깨고 나오다
· “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생과부 한명숙입니다”
· 아버지의 실종
· 희망을 만드는 숙달된 조교
· 희열이 나를 일하게 한다
· 가난도 힘이 된다
· 취소된 면회
· 어떤 예언
· 내 생애 최악의 날
· 인간이기에, 다만 인간이기에
· “살아있다, 만세!”
· 미친 듯이 살 일이다
· 감옥에서 맞은 10.26
· 크리스마스 캐럴
· 어울려 사는 즐거움
· 오월의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 그림자에게 말 걸기
· 교도관의 영어선생
· 노란 손수건
4부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
· 여성운동 종합선물세트
· 부엌에서 세상을 보다
·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탄생
· “쏘지 마! 쏘지 마!”
· 꽃다운 목숨들, 거리에서 지다
· 여성운동의 산맥, 가족법 개정운동
· 가사노동의 가치는 얼마?
·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
· 일본까지 따라온 일들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 일본군 위안부
· 평화를 배우다
5부 한명숙, 정치인이 되다
· 대통령에게 걸려 온 두 번째 전화
· 남편과 아들을 두고 서울로 오다·
· 버스 타는 정치인
· 한명숙은 뿔 달린 여자
· 여성의 멍에, 성희롱
· 우는 암탉 만들기
· 오전에는 퇴임식, 오후에는 취임식
· 업무평가 최우수, 리더십 1위
· 가수 한명숙이 아닌 기호 3번 한명숙입니다
· 균형의 가치
· 나는 그들을 용서했다
· 나는 장악하지 않는다
· “대추리 주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 장미꽃을 안고 낯선 집으로·208
·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지다
·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나는 우리 국민을 믿는다
* 한명숙에 관한 오해와 진실
* 연보
-----
P.5 : 진실’이란 말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다른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지금 저에게 진실을 설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미 제 삶과 명예에 잔뜩 먹칠을 해 놓은...
P.29 : 나는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친정집에 들렀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신변이 걱정이 되었다. 내 우려대로 며칠 후, 우리 식구들은 어딘지 모를 데로 실려 가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동생들은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풀려났다. 나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 남편의...
P.68-69 : 아버지가 실종된 지 정확하게 일주일째 다시 집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를 발견한 곳이 바로 시립병원이라는 것이었다.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모습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
-----
독자
: 일을 하며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주부입니다. 삶이 무척 힘들게 느껴지곤 했는데 한 총리님 자서전을 읽으니 부끄럽습니다. 이 책을 늘 가까이 두고 힘들 때마다 읽겠습니다. -신라영(40대 주부)
이정희 (변호사. 18대 국회의원.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대표 역임)
: 어둠이 가시지 않은 80년대, ‘여성학특강’에서 만난 한명숙 선생님, 참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13년이나 옥바라지를 하셨고 당신도 수감된 적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아야 했습니다. 다시 사람마다 삶이 무거운 시대, 우리를 감싸 안아 일으켜 세우는 한 총리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
저자 : 한명숙
저자파일
최근작 :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한명숙>,<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총 4종 (모두보기)
SNS : http://twitter.com/hanmyeongsook
소개 :
194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결혼했으나 남편 박성준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수감되자 이후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1974년부터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사회 간사로 일하면서 70년대 한국사회에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 반을 복역한 후 1981년 광복절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석방된 남편과 13년 반 만에 재회했다.
1990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1993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 여성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1999년 정계에 입문하여 16대 국회의원, 초대 여성부장관, 환경부장관, 17대 국회의원을 거쳐,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0년 현재 민주당 상임고문, 국정자문위원장, 중앙위원회 의장과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명숙 전 총리,‘시련의 한복판’에서 펜을 들다
한명숙 전 총리가 생애 첫 자서전을 냈다.
두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장관직(여성부, 환경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총리직 수행을 끝으로 조용히 자연인 한명숙으로 돌아가려 했던 한 전 총리가 『한명숙』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서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서거 이후 깊은 슬픔 속에서도 묵묵히 전직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일에만 몰두해오던 그가 펜을 들고 세상을 향해 다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 책 『한명숙』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진실’ 이란 말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다른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지금 저에게 진실을 설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미 제 삶과 명예에 잔뜩 먹칠을 해 놓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진실을 보여줄 것인가. 결국은 제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명숙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명숙이란 이름에 흠집을 내놓은 사람들을 향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 글은 저들의 조작과 음해에도 저를 믿어주고 흔들림 없이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향한 대답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증명하다
이 책에는 한 총리의 지나온 삶이 5부로 나뉘어 담겨 있다.
1부 결혼, 그리고 긴 이별의 시작에는, 사업가인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꾸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평양에서 서울로 피난을 내려오면서부터 겪게 된 가난과,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2부 결핍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감옥에 있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더불어 6남매 중 장녀로서 친정의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생업 일선에 나서는 상황이, 3부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서다에는 처음에는 직장 일로서 시작한 ‘크리스챤아카데미’ 활동을 통해 서서히 이 나라의 사회문제와 여성문제를 자각하게 되고, 구습과 열배감에 젖어 있는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여성 사회운동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과정과 그 활동으로 인해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하지만, 오히려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단련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4부 낡은 시대가 무너지는 소리에는 13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남편과 재회한 후 가족법 개정운동과 민우회 활동을 통한 다각적이고도 체계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여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여성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5부 한명숙 정치인이 되다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름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거치며 직면했던 문제들과 이를 풀어나가는 대화와 이해의 해결방식, 그리고 한명숙 특유의‘부드러운 열정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기된 <한명숙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는 한명숙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세간에 드러나지 않아 오해를 사는 몇 가지 편견들에 대해 짚어준다.
우리 현대사가 만든 인물, 한명숙
이 책을 보면 시대가 한명숙을 만들었고 한명숙이 시대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한명숙은 처음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거나 의지를 가지고 여성운동에 뛰어든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는 한명숙을 반독재투쟁가로, 여성운동가로, 정치인으로 키우고 단련시켰다. 시국사범으로 신혼 6개월 만에 투옥된 남편으로 인해 전혀 다른 인생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활동을 통해 사회문제와 여성문제를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자각이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명숙은 자신의 자각을 현장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며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갔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 것이다.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던 한명숙이 국회의원, 장관, 총리를 역임하는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련에 지지 않고 시련을 통해 단련되다
남편의 투옥과 생활을 옥죄는 가난 그리고 끝내는 자신마저 감옥에 갇히는 고난 속에서도 한명숙은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다. 엄혹한 독재의 시대는 한명숙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삶을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고, 주어진 일, 해야 할 일을 사명감과 희열을 가지고 했다. 감옥에서는 책을 읽고 명상을 하면서 자신을 다스렸고, 출옥을 한 이후에는 강고한 사회적 편견과 맞서며 여성운동 일선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보다 큰 틀에서 세상을 보고 행동하며 자신의 삶과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다
한명숙의 삶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싸우는 삶이었다. 여성문제가 치열한 고민이었을 때는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현장에서 일했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역할이 필요할 때는 그 부름에 응했다. 여성운동가로서, 안정된 행정관료로서 이미 얻은 명성이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이제까지 한명숙이 살아온 방식이고, 그 삶의 태도가 지금의 한명숙을 만들었다.
부드러운 열정은 꺾이지 않는다
한명숙의 얼굴은 그가 거쳐온 역경의 삶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부드럽다. 지금까지 여성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보여온 그의 말과 행보는 결코 최전선에서 싸워 온 투사의 모습이나 정치 지도자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부드러운 열정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 바로 그것이 온유한 귀부인처럼 보이는 한명숙이 정치인으로서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이유이다. 부드러운 열정은 꺾이지 않는다. 부드러움은 일견 약하고 희미해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저들’까지 끌어안고 함께 나아가는 힘, 그것이 바로 부드러운 열정의 숨겨진 힘이다.
거대한 벽을 거대한 문으로 만드는 사람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그리고 침착하게 일해 온 사람, 그래서 시대와 함께 했던 고난에 찬 삶이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 이제 시대가 자신에게 맡긴 소명을 다했다고 믿으며 조용히 물러서려 했으나 다시 시대의 부름을 받은 사람. 한명숙은 다시 원치 않았던 싸움터의 한복판에 섰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지만, 그는 다시 거대한 벽을 거대한 문으로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총 : 4편
한명숙부드러운열정세상을품다 새창으로 보기
만화애니비평 ㅣ 2012-01-15 ㅣ 공감(0) ㅣ 댓글 (0)
19C 독일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詩人)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시는 너무나도 인상 깊고 잊을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은 “직조공(織造工)의 노래(歌)”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읽어보면 그들의 원망과 분노, 한탄이 하늘 위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오늘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명숙씨가 노동가요 배포와 관련된 일로 구속을 당한 직후 심한 고문과 독방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공안경찰들이 와서 그녀를 잡아가게 만든 노래는 다음과 같다. 시와 노래는 비슷하니 그 음율적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인간의 마음에 와닿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살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일했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쳐서 눈빛에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당시의 노동자의 대우는 매우 혹독했다. 사실 한국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답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위협당할 경우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기 전의 인사청문회의 질문이 정말 코미디와 같았다. 누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은 무슨 국가냐고? 그녀의 대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질문자가 다른 코멘트를 추가한다.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국가 점에서 한국은 경제자유가 보장되어있는 자본주의국가는 맞다. 그리고 개인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는 점에서 자본주의구조사회가 장점도 있다. 문제는 그런 구조사회에서 정말 자유롭게 하는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어느 사람이 정해진 근로시간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안전적인 장치와 보건환경적인 요소에서 소외를 당하면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맞는 처사이냐고 말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지금에 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시 그녀가 살아온 길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권을,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국민들에게 맑은 물과 공기를,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은커녕 오히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그런 삶 인듯 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과부가 되어 13년 넘게 남편을 보지 못한 여인, 법적인 절차도 없이 납치되듯이 경찰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고, 거기에 모자라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말이다.
가족 중에 남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불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한 지선에 생각을 치우쳐져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편하게 생각하기 좋기에 남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에서는 눈빛이 변한다.
기회주의적인 인간형에 길들어진 사회구조에서 세상은 각박해져 가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는 더욱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밟히고 밟힌 사람과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본인마저 밟힌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한국사회 이면에 가려워진 어둠이 보인다.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원망했냐는 말에 하지 않는다고 하나,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후려친 존재들에 대한 용서한다는 말조차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공감 가는 부분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성부 장관 시절,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전통적인 부분의 혼동이 남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전통 문화는 조선사회를 많이 따라가는데, 특히 성리학 부분에서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폐단적인 부분을 아직까지 수용하는 점이다. 확실히 전통문화의 존재와 현실화는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정체성에서 과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전통이 아닌 것이 당연지사로 넘어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인권문제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학대받아온 여성의 권리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학교 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 인권문제도 문제이나 남성의 억압된 사회도 같이 생각할 부분이었다. 문성근씨와 황신혜씨가 출연한 “생과부 위자료 소송사건”처럼 인간은 항상 억압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취지의 여성부가 지금은 안타까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명숙씨의 이화여대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촌, 어린이, 노약자, 여성이 주된 초점이라면 지금의 여성부는 엘리트주의적인 이화여대 엘리트를 위한 정치권리 노선이 아닌가도 싶었다. 한명숙씨가 추구한 페미니즘이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간애적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무참히도 가슴을 짓밟힌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런 짓밟힌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욱 짓밟힌 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의 의지 인 것 같다.
------
롤모델 만나다 새창으로 보기
공중제비 ㅣ 2011-06-19 ㅣ 공감(0) ㅣ 댓글 (0)
한명숙...이렇게 멋진 분이신줄 몰랐다.
수많은 수식어들이 붙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책을 읽으면서 모성보호법 통화, 여성할당제 등이 모두 그분이 여성부장관일 때 이룬 업적인지도 몰랐다.
소신을 가지고 30년 동안 여성의 인권향상을 위해 노력하신것,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일하신 점을 새삼스레 알게되었다. 젊은 나이에 2년이나 넘게 옥생활도 하고 고문도 당했다니 정말 더 위대하고 존경이 절로 표해진다.
요즘 시대에 여성 롤모델이 참 부재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명숙 전 총리가 계신다니 참 다행이다. 서울시장 낙마해서 안타깝지만 분명 더 큰 일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
닮고 싶은 사람...한명숙 새창으로 보기
줄리아 ㅣ 2010-04-09 ㅣ 공감(1) ㅣ 댓글 (0)
이전부터 티비에 비치는 한명숙이라는 분을 보면서 온화해 보이면서도 단단하고 내공이 상당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요즘 모든 면에서 많이 힘든 나에게 자극을 줄 책을 찾았는데 읽는 동안 눈물도 흘리며 내 자신이 얼마나 나태하고 부끄럽게 살았는지 반성하기도 하고 용기도 얻게 해준 책이다.
정말 누군가와 비교해서 내 자신이 많이 부끄럽다고 느낀 건 두번째다. 내 주위에 이런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한명숙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든지 당당한 사람...이건 나이 들수록 어려운 과제다. 철 없을 땐 나 잘났다고 당당한 척 했지만 나이들수록 주변의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서 절로 부끄러워 꼬리가 내려진다.
이런 분들이 우리 사회에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이 분의 나이가 되면 한명숙님의 온화함과 당당함 부드러운 포용력을 겸비한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있기를 기대 해 본다.
<아래내용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 책을 통해 나에게 다시한번 많은 생각을 해준 내용입니다. >
p.147 - 세상이 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변하는 것은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작은 변화를 이뤄 내기 위해 눈물과 땀을 쏟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새창으로 보기
Seresca ㅣ 2010-03-29 ㅣ 공감(6) ㅣ 댓글 (0)
서평을 잘 쓰지 않는 편인데, 이벤트를 보고 겸사겸사 상품을 받으면 좋고, 더 많은 분들이 책을 읽었으면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 별로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번 이대통령 정권에 들어서 부쩍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생각이 많으실 수도 있고, 아닌 분이 많을 수도 있겠지요. 요즈음 화제가 되는 한명숙 전 총리를 향한 검찰의 날카로운 칼날이, 더 한명숙 전 총리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 잘못을 저질러서 수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번 수사에는 많은 의혹들이 있었지요. 저도 그저 뉴스에 적당한 관심밖에 없는 네티즌의 일부라 잘은 모릅니다만, 무리한 억지가 들어있는 수사 감행은 이해할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덕에 한명숙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전대통령님 서거 후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 그저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민심의 방향을 잘 타서 성공하고 싶은 정치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면 세상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제 혼탁해 져버린 마음때문 일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그 사람에대해서 더 알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미 다음 시장선거때 뽑을 사람으로 한명숙 전 총리를 지지하고 있었던 터라, 더 알고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막연한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당연히 한전총리가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인가 싶었지만, 전 확신을 내세워서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큼 잘 할고 있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친구들의 지식도 얄팍한 수준인것은 사실이지요. 무조건 적으로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더 알아보고 내 생각대로 내 식대로 판단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뉴스를 찾아보고, 웹페이지 자료들을 둘러보고 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귀찮기도하구요,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한번 보는게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나온지 얼마안된 책이라는 생각도 인식 못하고, 그저 휙휙 사버렸습니다.
자서전이라 그랬던지 책은 생각보다 참 재미있어서 3시간 만에 꿀꺽 읽어버렸습니다.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서 고마웠습니다. 항상 나 자신은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생각을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하나 내 신념과 열정이 담긴 일이 아닌 그저그런, 어쩔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음에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더 빨리, 학생시절에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한숨섞인 한탄도 하게 되었구요. 원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못되는데도 참 책을 재미있게 읽었네요. 정치적인 색깔이 있다기 보다는 학생이 읽기 좋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변에 여학생이 있다면 더더욱 추천을 해주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이 한전총리님과 같은 능동적인 삶이 아닌 수동적인 삶을 사는데 익숙해 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떤 방향이든 스스로가 행복하다면 가장 최고의 삶이 겠지만요.
한전총리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기도 하면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글들이 담긴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전총리님과 어머님의 긍정적 마인드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앞으로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도록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
아.. 다 쓰고 보니 참으로 허접한 서평이지만, 열심히 썼으니 잘 봐주세요.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과 신념을 지키고 살기를 바라면서 !!!! 피스 !!! ^-^)
-----
인문학 공동체 불 지핀 박성준 선생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인문학 공동체 불 지핀 박성준 선생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627807.html#csidx1820c20ecfca50aa15c3112e26aa484
인문학 공동체 불 지핀 박성준 선생
등록 :2014-03-11 19:51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나를 울린 이 사람
3년 전, 인문학을 기치로 공동체를 처음 설립했을 때 이곳을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사람이 없어 폐강하는 강좌와 세미나가 훨씬 더 많았다. 당시 개설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좌도 폐강될 가능성이 높았다. 독일어 원서 강독이니 더했다. 강의 시간 또한 직장인은 오기 어려운 낮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강의가 살아났다. 길담서원 박성준(전 성공회대 교수) 선생이 길담에서 공부하는 청년들과 우르르 이 강의를 찾은 덕이었다. 길담서원은 2008년, 선생이 만든 책방과 찻집을 겸하는 인문학 및 문화예술 공간이다.그는 진지하면서도 치열하게 공부했다. 69살에 철학 공부에 뜻을 둔 뒤 독일어도 다시 시작했다는 그의 책은 예습을 하며 적은 글씨로 빼곡했다. 강의를 하는 50대 학자도, 강의를 듣는 20대 청년도 혀를 내둘렀다. 그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프랑스어로 읽는 모임에도 참여했다. <분노하라> 강독은 모처럼 강의실을 채울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선생은 여기서 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공부’를 주제로 특강도 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사환 일을 하거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선생의 자전적 특강은 청중들을 울렸다. 그는 내게 몇 차례 점심을 사며 공동체 운영에 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간명했다. 스스로 공부하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주인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매달 월세 내기에 급급하던 당시, 그는 길담서원에서 영어 원서 강독을 진행하며 받은 사례비를 공동체에 내놓기도 했다.선생의 가르침 덕인가. 그가 공동체를 찾은 이후 다른 공부모임들도 조금씩 활성화했다. 당시 10개 안팎이던 공부모임도 이젠 60개 안팎으로 늘었다. 문화예술이나 인문학 초보처럼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강좌나 세미나에서 프랑스어로 난해한 철학서를 읽는 모임까지 내용도 풍성해졌다. 10~70대의 학생,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에서 주부, 회사원, 연구자, 작가, 교수, 전문 직업인, 대기업 경영자들이 한방에서 강의를 듣거나 발제하고 토론을 나눈다. 기적이 따로 없다.이제 일부 강의나 세미나 참여자들은 이곳에서 밥도 지어 함께 먹는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공부하는 청년들도 있다. 프린터에 종이가 떨어지면 누군가가 종이를 채워 넣고 맛있는 것이 생기면 이곳으로 먼저 가져와 나눈다. 강의나 세미나를 앞두고 빔 프로젝터를 점검하거나 난로 따위를 살피는 이도 있다. 참여자들이 슬금슬금,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공동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선생의 발길도 뜸해졌다. 하지만 이곳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스스로 공부하고, 이곳을 찾는 이가 주인이 되게 하라.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627807.html#csidx1820c20ecfca50aa15c3112e26aa484
아름다운가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름다운가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름다운가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아름다운가게(Beautiful Store)는 영국의 옥스팜을 본보기로 하여 2002년 출범한 비영리기구이자 사회적 기업이다. 아름다운 가게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자 사명은 나눔과 순환 그리고 시민의 참여이다. 아름다운가게는 영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그 수익금을 제3세계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가게는 종교적 편향을 지양한다.
아름다운가게의 원동력이자 활력소는 시민의 참여이다. 낡거나 오래 된 물건을 기증받으면 아름다운가게는 다시 이 물건들을 되살려 시장으로 보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쓸모 없는 물건을 기증하면 다른 사람들은 기증된 물건을 다시 사간다. 다시 말해 자원의 순환을 이용한 시민 운동이다. 아름다운가게는 부의 편중과 빈부격차에 대해 서로가 이해하고 나누는 활동을 통해 자원의 더 긴 순환과 유통을 실현하고자 하며, 이를 되살림 정신이라 칭한다.[1]
목차 [숨기기]
1개요
2역사
3기증
4비판
5각주
6바깥 고리
개요[편집]
아름다운가게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재활용품 사용 시민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헌 물건을 팔아 생긴 수익을 제3세계의 빈곤 구제와 사회 지원에 사용하는 영국의 옥스팜(Oxfam)이 아름다운가게의 결정적인 선구모델이 되었다. 옥스팜 매장은 유럽 전역에 82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으며 막대한 규모의 수익금을 극빈자와 장애인, 이민노동자를 위해 출자한다. [2]
2003년 1월 5일 두 달 만에 1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기록하였으며 매출의 10%를 나눠주기로 했던 처음의 목표를 달성했다. 12월 26일 6명과 한 단체를 선정해 첫 수혜자를 찾게 됐다.[3]
이후, 물품의 재사용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옥스팜(Oxfam)을 모델로 하여 '아름다운가게'로 이름을 정하였다. 2002년 10월 17일 재단법인 아름다운재단 산하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단체가 되었고, 2008년 6월 9일 행정안전부 소관 비영리 법인인 '재단법인 아름다운가게'로 독립하였다.
아름다운가게는 그 시초부터 헌옷과 책, 가방, 신발, 주방, 가전, 장식 등 중고 물품을 기증 받아서 자원봉사자가 손질해 가게에 유통하도록 했다. 가게에서는 자원봉사자와 구매자 모두를 천사로 칭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스스로가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 나아가 더 큰 구심점이 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옥스팜의 핵심 가치인 '물품의 재사용을 통한 사람과 사람의 연결' 을 실현하는 것이며 아름다운가게는 이러한 연결을 그물과 그물을 연결하는 그물코에서 따와 그물코정신으로 칭한다. 아름다운가게의 되살림 정신과 그물코 정신은 환경 운동과 공익을 실행하는 것으로 이웃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자선을 베풀 수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4]다만 대형 가구와 대형 가전 등 외관에 손상을 입기 쉽거나 창고 보관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는 기증품에서 제외한다.[5]
기증 받은 헌 물건을 수선하여 되파는 일 외에 다른 사업으로는 기업이나 정부기관과 함께 아름다운토요일, 나눔교육, 움직이는가게, 등 재사용과 나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 매월 한 번씩 서울시와 함께 아름다운나눔장터를 마련하고, 자선과 공익을 실천하기 위한 수익배분과 공정무역 그리고 그린디자인 '에코파티메아리'등도 진행한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에 본점이 있다.
역사[편집]
아름다운가게가 태동하기 전 부터 아름다운재단은 참여연대 사무실 앞길에서 가두 판매를 진행했다. 여러 물품을 놓고 판매하는 이른바 "알뜰시장"의 개념은 박원순 변호사와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2001년 5 월 부터 시작한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매월 두 번씩 열렸던 사업이 큰 호응을 얻게 되면서 서울 강남구 미도아파트 주민들이 매달 한번씩 '아름다운 날' 행사를 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공식적인 알뜰시장의 배출구를 만들고자 박원순변호사(현 서울시장)를 비롯한 여러 운동가들은 2002년 초 구세군 미국 본부를 방문해 환경 운동과 시민 참여의 매커니즘을 전수받았다.[6][7]
1호점이 문을 열면서 아름다운가게는 다양한 물품을 시민들로부터 기증받기 위해 아름다운 트럭과 기부 물품 취급, 공정무역 방식의 도입 등에 대해 검토하게 된다. 아름다운 트럭은 기부물품을 직접 수거해 가게로 내보내는 다리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여러 기업의 후원과 참여로 기증된다. 공 무역에 대해 처음 아름다운가게가 표방했던 생각은 제 3세계 물품을 공정 무역으로 수입해 다시 수익을 되돌려주는 방식이었다. 개점 행사의 일환으로 작가와 연예인, 정·재계 인사의 기증품이 줄을 잇기도 했다.[8]
모든 것이 기증으로 이뤄지는 아름다운 가게는 지역민들의 호응과 적극적인 자원봉사 참여로 문을 열어 오전 10시 ~ 오후 8시 까지 활동천사라고 불리는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운영되며 이듬해 1월 18일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삼선교점이 개점했다. 가게의 운영에는 간사(매니저)를 제외한 모두가 자원봉사자로 구성된다. 삼선교점 개장 당시에는 임기를 시작하기 전이었던 노무현전 대통령이 기증한 밤색 대나무 필통이 100만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부부는 자기세트도 기증했다.[9]
아름다운가게는 초기부터 주목하던 3세계 국가와의 공정 무역에 착수했다. 2003년 4월 18일 공식 발표를 시작으로 수익금을 돌려주는 대안 무역을 시작했는데 이는 독일, 일본 등에서 시도된 국제 복지활동 운동을 도입한 것이다. 대안무역으로 불린 계획의 실행을 위해 일본에 담당자를 파견했고 인도네시아, 네팔, 페루에서 수공예품과 커피를 수입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0]
또한, 2003년 4월 18일은 3호점인 독립문점이 개점한 날이기도 하다. 3호점은 한국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임대료를 후원하면서 기업의 본격적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주한 외국인의 물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기증 활동을 새로이 선보여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도왔다.[11] 8월에는 경기도 1호점으로 안양 상록수점이 문을 열었다. 경기도는 상록수점에 공식적으로 18억 원을 지원했다.[12] 수도권역 외에 최초로 문을 연 곳은 광주광역시로서 빅마트 광주 첨단점으로 부터 20 여 평 규모를 기증받아 선을 뵈었다.[13]
서울시가 주최하고 아름다운가게가 운영하는 뚝섬 벼룩시장은 2004년 3월 27일 첫 선을 보였으며 나눔 장터의 형식으로 3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 시 ~ 오후 4시 까지 장터가 열린다. 나눔장터는 80개 미만의 기증품만 있으면 단체 형식으로 참가가 가능하며 일반인들의 관람료는 집에서 가져온 기증품 1개이다.[14] 2004년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뚝섬에서 열리는 나눔장터는 매회 일정한 주제로 열리며, 이를테면 어린이의 달인 5월에는 장터의 수익금을 제 3세계 어린이를 위해 사용하는 식이다. 참가한 단체는 수익금의 10% 를 결식 아동과 장애인을 위해 기부하도록 되어있다.[15]
지방 대도시에 속속 문을 연 아름다운가게는 2004년 4월 23일 대구 1호점이 문을 열면서 지방 2호점이자 전국 21번째 가게가 됐다.[16] 6일 뒤 부산점이 문을 열면서 개점 속도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17]
기증[편집]
시민들의 기증을 받아 트럭에서 물건이 내려지는 곳은 되살림터 이다. 우선 옷가지나 여러 기증품을 단계별로 분류한다. 옷을 예로 들자면, 사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우선으로 분류하며, 이후 얼룩이나 보풀이 많이 일었는지 혹은 브랜드 가치가 있는지의 세부적인 사항으로 2차, 3차 분류를 진행한다. 세탁의 경우에는 여러 세탁업체의 도움으로 빨래를 하거나 얼룩을 제거한 후 가게로 보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개 수도권 지역에는 이런 일을 하는 되살림터가 존재한다. 되살림터는 기증 물품을 다시 고치고 손보는 장소로서 접시의 경우 먼지를 제거하고 가전 제품의 경우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험을 해보고 이상이 있으면 고치는 일을 맡고 있다.[18]
아름다운가게의 개점 초기에 사무실 비품이나 작업에 필요한 어려움을 덜어준 것은 기업과 관청의 도움이었다. 이런 도움도 기증의 일환이다. 사무실에 필요한 물품들은 국세청에서 지원을 받았고 현대자동차는 기증품 수거 트럭을 기증했다. 세탁 업체인 크린토피아는 무료로 의류 세탁을 담당해주었다.[19] 이후 계속적으로 점포의 수가 늘어나면서 가게의 개점 초기 자금 마련에 도움을 주는 향토 기업들도 늘어났다. 이런 "씨앗 자금"을 지원하는 단체나 기업들 역시 기증을 통해 지역 사랑과 지역민에 보답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비판[편집]
2006년 10월 아름다운 가게 간사로 근무하던 박 모 씨가 내부통신망에 당시 사무처장의 법인카드 사용 관련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리자, 가게 측은 2007년 5월 `고의로 내부문제를 제기해 조직운영을 어렵게 했다'는 이유로 박씨를 징계 해고하였다. 이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박기주 부장판사)는 절차상 하자가 크다"며 "따라서 박씨에 대한 해고는 무효"로 판결하였다.[20]
2006년 10월 18일에 10명의 간사들이‘아름다운가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열었고, 이날 비공식으로 열린 간사 모임은 불법 녹취되었다. 가게측은 이를 바탕으로 녹취록을 만들어 증거자료로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아름다운가게 김재춘 정책국장은 “당시 참석자 가운데 한 명이 MP3플레이어를 실수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MP3가 오작동해 우연히 녹음된 것을 기록했다고 주장했다.[21]
아름다운가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아름다운가게(Beautiful Store)는 영국의 옥스팜을 본보기로 하여 2002년 출범한 비영리기구이자 사회적 기업이다. 아름다운 가게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자 사명은 나눔과 순환 그리고 시민의 참여이다. 아름다운가게는 영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그 수익금을 제3세계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가게는 종교적 편향을 지양한다.
아름다운가게의 원동력이자 활력소는 시민의 참여이다. 낡거나 오래 된 물건을 기증받으면 아름다운가게는 다시 이 물건들을 되살려 시장으로 보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쓸모 없는 물건을 기증하면 다른 사람들은 기증된 물건을 다시 사간다. 다시 말해 자원의 순환을 이용한 시민 운동이다. 아름다운가게는 부의 편중과 빈부격차에 대해 서로가 이해하고 나누는 활동을 통해 자원의 더 긴 순환과 유통을 실현하고자 하며, 이를 되살림 정신이라 칭한다.[1]
목차 [숨기기]
1개요
2역사
3기증
4비판
5각주
6바깥 고리
개요[편집]
아름다운가게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재활용품 사용 시민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헌 물건을 팔아 생긴 수익을 제3세계의 빈곤 구제와 사회 지원에 사용하는 영국의 옥스팜(Oxfam)이 아름다운가게의 결정적인 선구모델이 되었다. 옥스팜 매장은 유럽 전역에 82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으며 막대한 규모의 수익금을 극빈자와 장애인, 이민노동자를 위해 출자한다. [2]
2003년 1월 5일 두 달 만에 1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기록하였으며 매출의 10%를 나눠주기로 했던 처음의 목표를 달성했다. 12월 26일 6명과 한 단체를 선정해 첫 수혜자를 찾게 됐다.[3]
이후, 물품의 재사용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옥스팜(Oxfam)을 모델로 하여 '아름다운가게'로 이름을 정하였다. 2002년 10월 17일 재단법인 아름다운재단 산하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단체가 되었고, 2008년 6월 9일 행정안전부 소관 비영리 법인인 '재단법인 아름다운가게'로 독립하였다.
아름다운가게는 그 시초부터 헌옷과 책, 가방, 신발, 주방, 가전, 장식 등 중고 물품을 기증 받아서 자원봉사자가 손질해 가게에 유통하도록 했다. 가게에서는 자원봉사자와 구매자 모두를 천사로 칭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스스로가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 나아가 더 큰 구심점이 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옥스팜의 핵심 가치인 '물품의 재사용을 통한 사람과 사람의 연결' 을 실현하는 것이며 아름다운가게는 이러한 연결을 그물과 그물을 연결하는 그물코에서 따와 그물코정신으로 칭한다. 아름다운가게의 되살림 정신과 그물코 정신은 환경 운동과 공익을 실행하는 것으로 이웃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자선을 베풀 수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4]다만 대형 가구와 대형 가전 등 외관에 손상을 입기 쉽거나 창고 보관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는 기증품에서 제외한다.[5]
기증 받은 헌 물건을 수선하여 되파는 일 외에 다른 사업으로는 기업이나 정부기관과 함께 아름다운토요일, 나눔교육, 움직이는가게, 등 재사용과 나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 매월 한 번씩 서울시와 함께 아름다운나눔장터를 마련하고, 자선과 공익을 실천하기 위한 수익배분과 공정무역 그리고 그린디자인 '에코파티메아리'등도 진행한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에 본점이 있다.
역사[편집]
아름다운가게가 태동하기 전 부터 아름다운재단은 참여연대 사무실 앞길에서 가두 판매를 진행했다. 여러 물품을 놓고 판매하는 이른바 "알뜰시장"의 개념은 박원순 변호사와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2001년 5 월 부터 시작한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매월 두 번씩 열렸던 사업이 큰 호응을 얻게 되면서 서울 강남구 미도아파트 주민들이 매달 한번씩 '아름다운 날' 행사를 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공식적인 알뜰시장의 배출구를 만들고자 박원순변호사(현 서울시장)를 비롯한 여러 운동가들은 2002년 초 구세군 미국 본부를 방문해 환경 운동과 시민 참여의 매커니즘을 전수받았다.[6][7]
1호점이 문을 열면서 아름다운가게는 다양한 물품을 시민들로부터 기증받기 위해 아름다운 트럭과 기부 물품 취급, 공정무역 방식의 도입 등에 대해 검토하게 된다. 아름다운 트럭은 기부물품을 직접 수거해 가게로 내보내는 다리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여러 기업의 후원과 참여로 기증된다. 공 무역에 대해 처음 아름다운가게가 표방했던 생각은 제 3세계 물품을 공정 무역으로 수입해 다시 수익을 되돌려주는 방식이었다. 개점 행사의 일환으로 작가와 연예인, 정·재계 인사의 기증품이 줄을 잇기도 했다.[8]
모든 것이 기증으로 이뤄지는 아름다운 가게는 지역민들의 호응과 적극적인 자원봉사 참여로 문을 열어 오전 10시 ~ 오후 8시 까지 활동천사라고 불리는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운영되며 이듬해 1월 18일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삼선교점이 개점했다. 가게의 운영에는 간사(매니저)를 제외한 모두가 자원봉사자로 구성된다. 삼선교점 개장 당시에는 임기를 시작하기 전이었던 노무현전 대통령이 기증한 밤색 대나무 필통이 100만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부부는 자기세트도 기증했다.[9]
아름다운가게는 초기부터 주목하던 3세계 국가와의 공정 무역에 착수했다. 2003년 4월 18일 공식 발표를 시작으로 수익금을 돌려주는 대안 무역을 시작했는데 이는 독일, 일본 등에서 시도된 국제 복지활동 운동을 도입한 것이다. 대안무역으로 불린 계획의 실행을 위해 일본에 담당자를 파견했고 인도네시아, 네팔, 페루에서 수공예품과 커피를 수입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0]
또한, 2003년 4월 18일은 3호점인 독립문점이 개점한 날이기도 하다. 3호점은 한국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임대료를 후원하면서 기업의 본격적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주한 외국인의 물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기증 활동을 새로이 선보여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도왔다.[11] 8월에는 경기도 1호점으로 안양 상록수점이 문을 열었다. 경기도는 상록수점에 공식적으로 18억 원을 지원했다.[12] 수도권역 외에 최초로 문을 연 곳은 광주광역시로서 빅마트 광주 첨단점으로 부터 20 여 평 규모를 기증받아 선을 뵈었다.[13]
서울시가 주최하고 아름다운가게가 운영하는 뚝섬 벼룩시장은 2004년 3월 27일 첫 선을 보였으며 나눔 장터의 형식으로 3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 시 ~ 오후 4시 까지 장터가 열린다. 나눔장터는 80개 미만의 기증품만 있으면 단체 형식으로 참가가 가능하며 일반인들의 관람료는 집에서 가져온 기증품 1개이다.[14] 2004년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뚝섬에서 열리는 나눔장터는 매회 일정한 주제로 열리며, 이를테면 어린이의 달인 5월에는 장터의 수익금을 제 3세계 어린이를 위해 사용하는 식이다. 참가한 단체는 수익금의 10% 를 결식 아동과 장애인을 위해 기부하도록 되어있다.[15]
지방 대도시에 속속 문을 연 아름다운가게는 2004년 4월 23일 대구 1호점이 문을 열면서 지방 2호점이자 전국 21번째 가게가 됐다.[16] 6일 뒤 부산점이 문을 열면서 개점 속도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17]
기증[편집]
시민들의 기증을 받아 트럭에서 물건이 내려지는 곳은 되살림터 이다. 우선 옷가지나 여러 기증품을 단계별로 분류한다. 옷을 예로 들자면, 사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우선으로 분류하며, 이후 얼룩이나 보풀이 많이 일었는지 혹은 브랜드 가치가 있는지의 세부적인 사항으로 2차, 3차 분류를 진행한다. 세탁의 경우에는 여러 세탁업체의 도움으로 빨래를 하거나 얼룩을 제거한 후 가게로 보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개 수도권 지역에는 이런 일을 하는 되살림터가 존재한다. 되살림터는 기증 물품을 다시 고치고 손보는 장소로서 접시의 경우 먼지를 제거하고 가전 제품의 경우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험을 해보고 이상이 있으면 고치는 일을 맡고 있다.[18]
아름다운가게의 개점 초기에 사무실 비품이나 작업에 필요한 어려움을 덜어준 것은 기업과 관청의 도움이었다. 이런 도움도 기증의 일환이다. 사무실에 필요한 물품들은 국세청에서 지원을 받았고 현대자동차는 기증품 수거 트럭을 기증했다. 세탁 업체인 크린토피아는 무료로 의류 세탁을 담당해주었다.[19] 이후 계속적으로 점포의 수가 늘어나면서 가게의 개점 초기 자금 마련에 도움을 주는 향토 기업들도 늘어났다. 이런 "씨앗 자금"을 지원하는 단체나 기업들 역시 기증을 통해 지역 사랑과 지역민에 보답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비판[편집]
2006년 10월 아름다운 가게 간사로 근무하던 박 모 씨가 내부통신망에 당시 사무처장의 법인카드 사용 관련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리자, 가게 측은 2007년 5월 `고의로 내부문제를 제기해 조직운영을 어렵게 했다'는 이유로 박씨를 징계 해고하였다. 이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박기주 부장판사)는 절차상 하자가 크다"며 "따라서 박씨에 대한 해고는 무효"로 판결하였다.[20]
2006년 10월 18일에 10명의 간사들이‘아름다운가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열었고, 이날 비공식으로 열린 간사 모임은 불법 녹취되었다. 가게측은 이를 바탕으로 녹취록을 만들어 증거자료로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아름다운가게 김재춘 정책국장은 “당시 참석자 가운데 한 명이 MP3플레이어를 실수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MP3가 오작동해 우연히 녹음된 것을 기록했다고 주장했다.[21]
---
각주[편집]
이동↑ 운동철학
이동↑ 문화일보 2002-11-02 아름다운가게 어떤 곳
이동↑ 동아일보 2003-01-05 재활용품판매 이웃돕는 '아름다운가게' 첫수혜자 선정
이동↑ 2002-10-09 <물품 재사용운동 `아름다운 가게'>
이동↑ 오마이뉴스 어제의 물건으로 내일의 꿈을 살리는"<아름다운 가게>로 한번 놀러오세요"
이동↑ 문화일보 2002-10-09‘아름다운 가게’ 1호점 여는 박원순변호사
이동↑ 국민일보 2002-10-09 재활용품 전문매장 ‘아름다운 가게’
이동↑ 한겨레 2002-10-13 "기부물품 재활용 전문매장 '아름다운 가게'"
이동↑ 한국경제 2003-02-02 노 당선자 소장 필통 100만원에 낙찰
이동↑ 2003-04-18 후진국 빈곤 악순환 끊는 '아름다운 무역' 나선다
이동↑ 한겨레 2034-04-19 국제화 나선 '아름다운 가게'
이동↑ YTN 2003-07-09 안양에도 아름다운 가게 개설
이동↑ 한겨레 2003-11-26 광주에 ‘아름다운 가게’지방점 1호
이동↑ 동아일보 2004-03-27 뚝섬 벼룩시장 27일 열린다…낮12~오후4시 운영
이동↑ 소년한국일보 2004-04-13 '아름다운 나눔장터' 뚝섬유원지서 17일 개최
이동↑ 연합뉴스 2004-04-19 '아름다운 가게 대구점' 개점
이동↑ 연합뉴스 2004-04-29 아름다운 가게 부산점 문열어
이동↑ 오마이뉴스 2008-10-22 알뜰 주부정신으로 태동한 아름다운 가게…그 뒤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동↑ 2002-10-27 장명수칼럼/ 인기집중 '아름다운 가게'
이동↑ 연합뉴스 2009-09-21 “"`아름다운 가게' 내부고발자 해고 부당"”.
이동↑ 동아일보 2010-05-14 ““공금 편법지출 내부비리 고발자 ‘아름다운 가게’측 해고는 부당”.
바깥 고리[편집]
아름다운가게 홈페이지
각주[편집]
이동↑ 운동철학
이동↑ 문화일보 2002-11-02 아름다운가게 어떤 곳
이동↑ 동아일보 2003-01-05 재활용품판매 이웃돕는 '아름다운가게' 첫수혜자 선정
이동↑ 2002-10-09 <물품 재사용운동 `아름다운 가게'>
이동↑ 오마이뉴스 어제의 물건으로 내일의 꿈을 살리는"<아름다운 가게>로 한번 놀러오세요"
이동↑ 문화일보 2002-10-09‘아름다운 가게’ 1호점 여는 박원순변호사
이동↑ 국민일보 2002-10-09 재활용품 전문매장 ‘아름다운 가게’
이동↑ 한겨레 2002-10-13 "기부물품 재활용 전문매장 '아름다운 가게'"
이동↑ 한국경제 2003-02-02 노 당선자 소장 필통 100만원에 낙찰
이동↑ 2003-04-18 후진국 빈곤 악순환 끊는 '아름다운 무역' 나선다
이동↑ 한겨레 2034-04-19 국제화 나선 '아름다운 가게'
이동↑ YTN 2003-07-09 안양에도 아름다운 가게 개설
이동↑ 한겨레 2003-11-26 광주에 ‘아름다운 가게’지방점 1호
이동↑ 동아일보 2004-03-27 뚝섬 벼룩시장 27일 열린다…낮12~오후4시 운영
이동↑ 소년한국일보 2004-04-13 '아름다운 나눔장터' 뚝섬유원지서 17일 개최
이동↑ 연합뉴스 2004-04-19 '아름다운 가게 대구점' 개점
이동↑ 연합뉴스 2004-04-29 아름다운 가게 부산점 문열어
이동↑ 오마이뉴스 2008-10-22 알뜰 주부정신으로 태동한 아름다운 가게…그 뒤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동↑ 2002-10-27 장명수칼럼/ 인기집중 '아름다운 가게'
이동↑ 연합뉴스 2009-09-21 “"`아름다운 가게' 내부고발자 해고 부당"”.
이동↑ 동아일보 2010-05-14 ““공금 편법지출 내부비리 고발자 ‘아름다운 가게’측 해고는 부당”.
바깥 고리[편집]
아름다운가게 홈페이지
김성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The Position of Quakerism and Ham Sok-H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한국기독교와 역사
약어 : chk
2005, vol., no.23, pp. 163-194 (32 pages)
발행기관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기독교신학
김성수 1
1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초록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대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월간지〈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스캔들’ 등으로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The Position of Quakerism and Ham Sok-H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한국기독교와 역사
약어 : chk
2005, vol., no.23, pp. 163-194 (32 pages)
발행기관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기독교신학
김성수 1
1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초록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대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월간지〈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스캔들’ 등으로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인간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의 약자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하면서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했다.
이 글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역사에 미친 주요 공헌과 영향을 분석했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의 ‘조직기피증’ 성향에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했다.
Ham Sok Hon had a close connection with the Western Quakers from 1960 until he died in 1989. During this period he was actively engag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vigorously protesting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At the height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1970, Ham also established a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People. What turned Ham, the downhearted man of the end of 1950s who was involved in a scandal, into a relentless freedom fighter? From at least the 1960s onward, Quakerism was always behind Ham whenever he was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George Fox, early leader of the Quaker movement, also emphasized the equality of men and women, and respect for each individual, not only under the law but also before God. Fox said that religion means looking after the social underdog and standing by him. Ham, always a man of doing rather than a man of being, ended his life as a Quaker. I will therefore examine and evaluate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Ham and Quakerism. In this paper, firstly I will look into the philosophical aspect of Quakerism as seen through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In particular, I will closely examine the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Quakerism to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Secondly, I will analyze how and why Ham became interested in Quakerism, and how his thinking was influenced by Quakerism. By doing so, I will look into what it meant to be a Quaker to Ham as a Korean. In addition, I will also examine what kind of role Ham fulfilled as a Quaker in relation to Korean Christianity.
키워드
내면의 빛, 기독교, 종교, 성속, 평등, 과학, 민족과 국가, 퀘이커, 역사, 세계평화.
Inner Light, Christianity, Religion, Secred and Secular, Equality, Science, Nation and State, Quaker, History, and the World Peace.
Ham Sok Hon had a close connection with the Western Quakers from 1960 until he died in 1989. During this period he was actively engag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vigorously protesting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At the height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1970, Ham also established a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People. What turned Ham, the downhearted man of the end of 1950s who was involved in a scandal, into a relentless freedom fighter? From at least the 1960s onward, Quakerism was always behind Ham whenever he was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George Fox, early leader of the Quaker movement, also emphasized the equality of men and women, and respect for each individual, not only under the law but also before God. Fox said that religion means looking after the social underdog and standing by him. Ham, always a man of doing rather than a man of being, ended his life as a Quaker. I will therefore examine and evaluate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Ham and Quakerism. In this paper, firstly I will look into the philosophical aspect of Quakerism as seen through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In particular, I will closely examine the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Quakerism to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Secondly, I will analyze how and why Ham became interested in Quakerism, and how his thinking was influenced by Quakerism. By doing so, I will look into what it meant to be a Quaker to Ham as a Korean. In addition, I will also examine what kind of role Ham fulfilled as a Quaker in relation to Korean Christianity.
키워드
내면의 빛, 기독교, 종교, 성속, 평등, 과학, 민족과 국가, 퀘이커, 역사, 세계평화.
Inner Light, Christianity, Religion, Secred and Secular, Equality, Science, Nation and State, Quaker, History, and the World Peace.
박성준 (194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성준 (194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성준 (194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67년 한명숙과 결혼했으나, 이듬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刑이 확정됐다. 검찰은 박성준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그 후 실형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복역하다가 1981년 전두환의 도움으로 출소해 진보 성향의 활동과 저술 활동을 했고, 일본 릿쿄대학교 대학원과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와 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학력[편집]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 릿쿄대학교 대학원 신학 박사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