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지극히도 평범한 추기경님 l신앙관련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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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l 2009-03-2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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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신문 엮음 / 평화방송.평화신문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수환 추기경 구술, 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작년(2008년) 평화신문 구독자 모집의 일환으로 우리 신제주성당에 어떤 분이 오셨다. 그때 나는 평화신문 구독신청을 했다. 도움이 되는 신문이다. 근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있다며 권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마 조용귀 목사 책이 나왔다고 하면 순복음교회 모든 신도가 다 그 책을 구입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 때문이다. 그 말 때문에 의무감에서 샀다. 그리곤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얼마 전 그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다. 선종 소식을 들은 건 월요일 성경공부가 끝나갈 무렵이다. 교구청에 근무하시는 분이 강우일 주교님이 서둘러 서울로 가셨는데, 추기경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을 한 번 읽어야겠다 싶었다. 읽고 나서 한 마디로 느낌을 적으면,
"이렇게 좋은 책을 책장에 꽂아만 두었다니"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추기경님의 훌륭함을 그리고 이 책의 뛰어남을 몰랐다.
김수환 추기경님,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이시돌에 피정 갔을 때 직접 뵌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학교 진학해서 신부가 될까, 아니면 나중에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까 하던 시절이다. 마침 내가 어느 신성여고 학생을 좋아하게 될 무렵이라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런 시절에 그분을 직접 뵈었을 뿐, 나머지는 사진 속에서 뵌 분이다.
대학 시절, 그 전까지만해도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게 줄었다. 주위에서는 이상한 루머도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 때문에 추기경님이 발목잡히셔서 그렇다는 둥.
물론 나는 그때 신앙을 버리고 살 때여서, 가톨릭이 더 강한 사회적 발언을 해주시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다른 생각은 없이 살았다.
근데 이 책을 읽으니 추기경님의 고뇌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 과격하지 않고 보수적인듯 하면서도 항상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필요한 발언을 잊지 않으셨던 분. 그 분의 이야길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목에서 물러선 뒤의 일까지. 근데 그 분도 나처럼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노라고 한다. 나와 다른 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깜짝 놀랄 신비적 체험도 없었다고 한다. 성령기도회에 가면 그렇게 많은 기적들과 증언들이 쏟아지는데, 추기경님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위대는 평범이외다"
중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구절이 여기서 떠오른다. 정말 튀는 구석이라곤 전혀 없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한국 가톨릭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너무도 평범했기에, 나와 다름이 없는 분이시기에 편안하게 그분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가 그렇게 평범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분의 겸손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하고, 항상 자신의 죄인임을, 비겁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사실 그분이 왜 대단한 구석이 없겠는가. 어찌 비범함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그분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으신다.
내가 본받을 많은 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면서 뭔가 잘 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은 모습들.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과 함께 나를 돌아볼 기회를 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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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신앙과 동양평화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9-03-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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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황종렬 지음 / 분도출판사 / 2000년 10월
평점 :

황종렬,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 분도출판사, 2000.
지식인의 관심 경향도 하나의 흐름이 있는 것인가. 내 삶의 중심 테마는 역사였다. 현직 역사교사이기도 하고. 그리고 심장 고동치던 그 80년대를 지탱하게 한 힘도 그 역사였다.
그러나 3년전부터 심하게 앓았고 그러면서 내 삶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젠 생태적 가치관을 앞에 내세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도 했다. 그 과정에 이 책의 저자 황종렬이라는 분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마 <평화신문>에서였지 싶다. 그 분의 이름과 또 한 분, 잘 기억나진 않는데 이동훈 신부님인가 하시는 분께서 생태 영성에 대한 책을 냈다는 기사였던 것 같다. 책 제목을 가지고 여러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녀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마 영세한 출판사에서 찍어 중앙 무대에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았다.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했다.
근데 그 인터넷 서점에서 황종렬이라는 분이 쓴 책이 몇 권 있음을 알게 되고서 일단 생태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책을 쓰신 분의 다른 책도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2권 주문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한 동안 책꽂이에 장식물로 있었다. 그러다가 순서대로 꺼낸다고 꺼낸 것이 이 책이다. 표지에 안중근의사의 손도장, 그리고 마지막 쓰신 글이 실려 있다. 려순 감옥에서 쓰신 글이다. 책의 부제가 -안중근 토마스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한 신학적 응답-이다.
내가 어쩌면 살짝 멀리 놓아둔 역사를 신앙과 접목시킨 책이겠다 싶었다. 저자 소개를 보니 해방신학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하신 분 같다. 나 역시 대학시절 해방신학에서 희망을 보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예 신앙을 놔버리기도 했었다.
그래서인가 더 친연성이 느껴지는 분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서문에서 그 분이 밝히기를 "역사와 사회와 신학을 통합시켜 갈 신학 방법론이 나의 주전공 분야이다." 라고 하셨는데, 나는 대학을 역사 전공, 석박사 과정을 사회학, 그리고 40대 중반에 들어 다시 신앙을 고민하는 모습이라 그분의 입장이 괜히 반갑게 다가왔다. 물론 요즘 세태에서 이런 책이 환영받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정직하게 한 시대를 증언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과거 일제 강점기 가톨릭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타협적이었다는, 아니 어쩌면 진정한 신앙에서 벗어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안중근의 의거를 둘러싼 교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이 책에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이 컸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렇게 역사와 함께 나중에 드러나기도 하는가 보다 싶었다. 저자의 말처럼 현재 정의구현사제단의 모습이 그런 계승이 아니겠나 싶었다.
책의 시작은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로부터다. 이렇게 글을 끌어가는 솜씨도 탁월하고 또 그런 동화 속에 역사와 신학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개고개의 지루함이라고 느껴졌던 것도 그 만큼 당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이 반영되어 있음이라고 한 것도 탁월한 분석이었다.
안중근 관련 인용 기사를 다른 곳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이 책에서 더 많이 확인한 것도 소득이다. 안중근이 빌렘 신부와의 마지막 접견에서 "인생이 있는 이상 죽음 또한 이르든 늦든 면치 못하는 바이다. 믿는 이인 나는 그 하루를 앞서 성단에 오르니 교우의 힘에 의해 한국 독립의 길보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라며 신앙인과 역사 속의 시대적 책무를 다한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은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다. 그가 적의 포로를 사로잡은 후에 처형을 주장하는 동료와 부하들을 만류하며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라며 어쩌면 비현실적인 포로 석방 조치를 취한다. 그로 인해 독립군이 오히려 곤경에 빠지고 안중근이 독립군 내에서의 위치도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는 확고한 평화의 원칙, 하느님 공법의 원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시 한국 지식층과 교회는 살인자의 죄목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잘못을 뉘우치기 전까지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인지 뮈텔 주교의 성사 거부를 어기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찾아간다. 물론 빌렘 신부도 안중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안중근의 자신의 뜻을 바꾸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빌렘신부로부터 고해성사를 받는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뮈텔 주교 등의 입장이다. 저자는 이것을 신앙보다는 서구 중심의 근대화론에 뿌리를 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패러다임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당시 서구 지식인의 보편성에서 찾고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시대를 뛰어 넘어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됨의 모습이기에 아쉬움은 남는다.
그게 없었기에 가톨릭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한 것이다. 1933년 1월 교황대사 에드워드 무니 대주교를 통해 신사참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의 원고이기는 하나, 상당히 무거운 원고이다. 생태영성을 공부하려다가 다시 나의 옛 테마인 역사로 돌아갔다 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신앙과 함께 한 역사 공부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예전부터 이런 책읽기를 했더라면 내가 영적으로 헤매는 기간이 짧았을 것을...
지금이라도 새롭게 만나게 되는 신앙과 역사, 종종 이런 책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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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심축만 바로 세우면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9-03-0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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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ㅣ 성서와 인간 10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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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바오로딸, 2001.
2008년 1월에 16쇄 한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10편이다. 포켓북, 그런 책인데도 할 말이 너무 많다. 이곳에 인용할 대목도 너무 많다. 생각 같아서는 책 전체를 옮겨 놓고 싶다. 짧은 글인데도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삶의 중심축에 예수님을 놓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쓸데 없는 근심걱정으로 인생을 고달프게 살지 않게 된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삶은 쉽지 않다. 계속 걱정이고 근심이다. 기도할 때만 예수님이 내게 와 있고 그렇지 않은 때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허덕거리며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다가 망가진다.
나 역시 많이 망가졌었다. 구체적으로는 2년전부터 심하게 앓았다. 근심 걱정 속에,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필요 이상의 상념 때문에 몸도 마음도 영도 망가졌다. 마귀는 '내일'이라는 것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걱정 초조 속에 빠뜨린다고 한다. 돌아보면 내가 완전히 그꼴로 마귀한테 당했다. 영적으로도 심한 병을 앓았다. 지나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 무엇이 문제였는지가 보인다. 내 삶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세속적 명예욕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 하루 정말 정신 없이 살았다. 그러나 꿈을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러면 나는 또 전력 질주, 그러다 보니 걱정과 불안과 초조와 스트레스와 질투심만이 남았다. 마귀는 이것을 바로 활용했다. 완전히 부마 상태가 되어 한 동안 힘들게 보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내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고 마귀를 몰아내 주셨다. 회심한 인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분께서 해 주신 일이다.
이 책 읽으면서 공감하는 대목들을 중심으로 옮긴다.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문제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갈 뿐이지, 오늘이라는 현실적 단계를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선이 항시 내일을 향해 고정되어 있기에 무엇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즐길 시간이 없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성취한 그 무엇을 올려놓고 진득하게 즐길 시간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인간, 아니 일의 노예가 되어 내일을 향해 뛰어가는 동안 우리의 인생은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들고 만다. 그리하여 삶은 마치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다 끝나버린 허망한 인생살이로 다가온다."
현재를 즐겨라. 내가 이룬 성과를 즐겨라. 나는 그렇질 못했다.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그냥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나마 내 삶이 황혼기에 접어들기 전에 이런 깨달음을 받은 것이 다행이다.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다가 끝나버린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 행복해야겠다. 각각의 단계를 즐기면서 충만하게 살아가야 겠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서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서 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야만 행복이 결정된다." 이 또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현실에서 예상치도 못한 고난이 다가오는데, 그걸 즐길 수가 있는가. 송신부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고통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진노에서 나오는 저주나 죄에 대한 심판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당신이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 6)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 19)
"여러분은 견책을 받거든 참아내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견책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히브 12, 7)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도 오늘 고통일 뿐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그냥 오늘 고통만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의 고통을 견딜 힘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걱정을 미리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내일이다."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살고, 오늘 하루만 화내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삶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맞다.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 일이다.
"하지만 오늘이 아닌 앞날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하루하루가 힘든 것은 물론이요." 중환자를 오래 간호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예견 때문이다. 그런 예견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는 것이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이로운 것은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걱정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주전략이다. 하느님은 당신 속성상 오늘을 살게 하시지만 마귀는 내일을 살도록 이끈다."
한국의 40대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신부님은 한 마디 하신다. "한꺼번에 생명의 진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내게 딱 들어맞는 말.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얼마나 바보처럼 살았는지.
"생명을 잘 보존하려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힘들여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즉시 알수 있다. 자연은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진을 빼지도 않고, 최소한의 노력만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 너무 밋밋한 게 아닌가 하고 회의할 수도 있겠다. 내 능력은 많은데, 너무 내가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어릴적 받은 성실 교육의 효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뭔가 거창한 일을 해야만 인생에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러니 그 일을 잘 하면 된다.
"어떤 일이나 자기 소임터인 주방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하였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하느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었다."(중략)"나는 프라이팬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든 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 이건 로렌스 수사님의 말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나는 어떤가. 이 부분 심히 반성되는 부분이다. 나는 항상 거창한 것만 꿈꿨다. 지금 학교 현실이 못마땅하다고, 교육이 완전 붕괴했다고, 더 이상 제도교육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한탄만 했다. 진정 그러하면 뛰쳐나와 대안교육을 해야할 터인데 그렇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불평만이다. 작은 일, 그 작을 일 마다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하느님은 함께 하실 터인데 말이다. 어렵지만 항상 고민할 일이다. 집에서 청소할 때도 옆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설겆이를 할 때도, 항상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할 일이다. 그러면 삶이 기쁘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 31)"라고 말이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숲 만들기, 주님께 헌정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 숲이 나중에 주님의 자녀들을 기쁘게 해주길 기도하면서.
또 하나 재미있고 실용적인 고민해소법을 읽었다. 심리학자 로빈 샤르마가 한 말이라고 한다. "걱정을 위한 고정된 시간을 저녁에 잡으십시오. 매일 저녁 30분 고정된 시간을 만들어서 그 시간에 걱정거리에 골몰하십시오. 그 대신 하루 중 나머지 시간에는 그 걱정거리를 잊어버리십시오. 만일 거정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메모한 뒤 저녁 걱정하는 시간으로 넘기십시오. 이렇게 하면 점차 걱정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끝내는 걱정하는 습관 자체를 아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걱정하는 시간이 되어 보면 이미 그 고민 거리가 해결된 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이 사실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 앞으로 오지도 않을 일 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진짜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10%도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도 우리는 90% 쓸데 없는 걱정에 짓눌려 살아간다. 벗어날 일이다.
랭크라는 사업가는 앞의 로빈 샤르마 박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주일 동안 고민을 잊고 수요일에 집중적으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고민 거리가 생기면 즉시 메모하여 고민함에 넣어 두고 그 순간만큼은 잊어버렸다고 수요일에 그 메모지를 꺼내 읽으며 하나씩 해결했다고 한다. 수요일에 꺼내보면 많은 경우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한다. 이건 정말 실용적인 지혜다. 창조적으로 내게도 적용해볼 만 하다. 일단 메모하고 잊어버릴 것.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고민할 것.
하나 오해하지 말 것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미래를 설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지, 짓눌리며 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3년은 현재의 우리 삶보다 더 바빴다. 가르침 주고, 병자를 치유하고, 잠도 못 주무시면서 하신 일이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은 평화 그 자체였다.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쁘게 살 필요는 있다. 다만 그것이 세속적 욕망을 위한 것일 때는 공허감만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뜻에 맞는 일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영적으로 충만할 것이다. 삶의 중심축에 그분을 항상 놓고 살기만 한다면 말이다.
더 바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바쁨은 어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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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부부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9-02-0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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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속의 인간 ㅣ 성서와 인간 8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9편이다. 제목만 봤을 때는 인간관계 전반을 신앙 차원에서 다루는 글인 줄 알았다. 근데 보니 부부관계에 국한되어 있다. 구구절절히 옳은 이야기.
특히 재미 있었던 부분은 창세기 아담과 이브 창조 이야기에서 남녀 차별, 남녀 불평등이 아니라 남녀 평등을 적극적으로 해설한 부분이다. 이를 테면 이브가 아담보다 늦게 그리고 아담의 몸을 재료로 해서 태어났으므로 남성보다 여성이 열등하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늦게 만든 것은 그 만큼 완결품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인간보다 하늘과 땅, 동물을 먼저 만들었는데, 선후관계에서 앞의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다른 동물이 인간보다 더 귀한 존재인가라며 반문한다.
재료 문제 역시 흙으로 아담을 빚었지만, 이브는 더욱 완성된 재료인 인간으로 빚었기 때문에 더 귀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핵심은 부부 사이의 문제이다. 결혼 후 다툼이 큰 부부가 무려 40%를 넘는다고 한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여기서 송신부님은 "하지만 부부가 자녀에게 첫째로 줄 것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자녀들 편에서도 부모 서로간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지, 부모끼리 서로 소원(疏遠)하다면 자녀들은 제대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녀 사랑의 기본은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면서 자녀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족하다.
그러면 어떻게 부부 사이의 간극을 좁힐 것인가. 먼저 다름,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감사하라고 말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차이 때문에 힘들어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차이는 내가 갖지 못한 상대방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기에 감사해야 한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 말씀에 나온 것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 항상 기뻐하는 삶, 항상 기도하는 삶이면 부부관계도 모두 원만하리라.
아 그리고, 사랑의 3단계도 재미 있게 읽은 구절이다. 1단계가 로맨서의 단계. 2단계는 권력다춤의 단계 그리고 3단계가 협동과 공동 창조의 단계라고 한다. 그냥 머리가 끄덕여진다. 부부 사이에서 권력을 휘둘러 봐야 무슨 필요가 있는가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럽게 협동과 공동창조로 이어진다. 다만 그 무의미한 권력다툼에서 어느 만큼 빨리 벗어나는가가 중요한 관건 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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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없음'으로 이룬 영성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9-01-21 11:50
https://blog.aladin.co.kr/790414144/2541738

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브라이언 콜로디척 신부 엮음, 허진 옮김 / 오래된미래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아주 좋아 하는 마더 데레사. 이 분에 관한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산다. 이 책도 그랬다. 다만 사 놓고도 안 읽는 버릇은 나의 게으름이다. 새해 시작하면서 그래도 뭔가 영적인 도움을 얻고 싶어 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확실히 소득이 많다. 일단 책 내용은 별도로 하고, 읽다가 아, 그래, 올해는 이렇게 살아야지 싶었던 게 몇 있다.
우선 올해는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가 첫 성체 하는 해다. 마더 데레사의 경우,아니 그 때의 이름은 마더 데레사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에 살던 소녀 곤히야다. 그가 첫 영성체 하던 날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구절 읽으면서 매일 기도에서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의 첫 영성체를 위해 기도해야되겠다 싶었다.
다음으로 마더 데레사와 같이 있던 수녀님들 평이 마더 데레사는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반대다. 근데 불평했다고 문제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럼 바보짓 한 게 틀림 없다. 건강한 비판은, 정당한 통로를 통해서 겸허하고 진솔하게 할 것이지만, 전혀 도움되지 않는 불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올 해 이 책 보면 결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마더 데레사는 과도한 일 속에서도 늘 새벽 4시 40분이면 일어나 성체조배를 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입맞춤하고. 이건 못하겠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기도는 빠뜨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네 번째, 성체조배 때 생각나는 얼굴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이다. 이건 따라할 수 있겠다. 이 네 가지만으로도 이 책 읽고 건진 소득이다.
근데 사실 책의 중심은 그게 아닐 것이다. 책 광고에 보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말 중에"내 안에는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라는 게 있다. 이게 뭘까. 마귀?
그건 아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사적 서원을 하고 실제 하느님을 만나 '사랑의 수도원' 건립을 계시받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막상 빈민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시작했는데, 정작 그 이후로는 하느님을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 부재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삶과 언어의 역설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언론인들에 의해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라는 식의 보도를 해 댔다. 나도 처음에 언론에서 읽었을 땐 놀랐다. 근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은 대단한 신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바오로의 가시와 같은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 가시를 빼어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건만 하느님은 응하지 않았다. 그 가시가 있어야만 바오로 사도가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 부재의 영적 어둠에 놓여 있지 않고, 늘 하느님과 대화하고 일치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교만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둠에 놓여 있었기에, 즉 자신은 완전히 비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그는 항상 교만하지 않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신앙체험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부러워 한다. 크게 쓰시려고 그런다고까지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그 이후론 맹맹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런 말 천박하게 함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만큼 더 낮아져야 하는데, 나는 항상 높아지려고 했다. 비워야 했는데, 채우려고만 했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이게 나 같은 한심한 인간하고 데레사 같은 성인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게 내적 어둠이 있었기에 그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마더 데레사가 50년 동안이나 겪은 어둠의 실체이고, 그 어둠을 통한, 다시 말하면 완전한 비움을 통한 영성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50년간이나 그런 하느님 부재를 느꼈다면 나는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차이가 있다. 그의 삶과 내 삶에는. 하긴 하느님도 나 같은 인간에겐 그런 단련을 주지도 않으실 것이다. 왜?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을 아시니까. 그릇 차이. 이걸 하느님은 잘 아신다.
근데 사실 마더 데레사도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외로움.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흘리신 피땀과 또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외치던 절망적 목소리 역시 그 외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은 그 외로움, 그 不在를 통해 일을 '완성'하신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일을 '짜잔'하고 해결하지 않으신다. 그 완전한 비움, 그 완전한 없음을 통해 구원 사업을 하신 것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죄가 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니 신적 능력으로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적 절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마더 데레사 역시 그랬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과시욕이 아니라,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자각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내려 놓음. 그 내려놓을 수 있는 근거였던 아버지 하느님마저 현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곧 기댈 언덕조차 없어보이는 그 절박함에서 기적은 이뤄진다. 이게 신앙의 신비다.
그건 그렇고. 나는 마더 데레사의 그 겸손에 매번 놀란다. 그는 남들로부터 칭찬 받은 것에 대해 그것은 모두 십자가일 뿐일고 한다.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거꾸로 그는 남들로부터 잊혀지기를, 무시당하기를, 경멸당하기를 오히려 수용한다. 그래야 하느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굴욕은 저에게 가장 달콤한 과자랍니다" 이렇게 말한다. 또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무시다아며, 어떤 인정도 받지 않기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게 이해가 되는데, 난 도저히 몸으론 안 된다. 나는 오늘도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니 항상 내 중심이 아니고 남 중심이 된다. 내 인생인데, 남의 평가를 따라 가는 인생이 된다. 한심한지고.
난 언제면 '굴욕을 가장 달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긴 그렇게 해야 나는 작아지고 하느님은 커지실 것이고, 허세는 사라지고 본질만 남을 것일 텐데. 알긴 아는데 실천이 어렵다. 쓸데 없는 자존심. 이걸 어떻게 극복하나. 그래, 이런 책 자주 읽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도움이 될 터이지. 작아지자. 작아지자.
또 하나. 그렇게 내가 작아지면 마더 데레사처럼 '작은 사랑, 작은 희생, 작은 내적 금욕'을 말하게 될 것인가. 그 분은 "큰일을 찾지 말고,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게 맞다. 사실 나는 큰 그릇이 못된다. 그러니 작은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 근데, 격에 안 맞게 큰 일을 좋아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면 너무 좋다. 그분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래도 항상 떠올리자. 내가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이건 나의 십자가임을'
그리고 또 '특별한 시련'을 '더 큰 사랑 실천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건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항상 가져야 할 자세다. 어려워서 그렇지, 머리로는 나도 안다. 그래도 자주 연습하자. 시련은 사랑실천의 기회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소. 그냥 미소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달라고 항상 기도하세요 라고 하신다. 그렇게 기도해야겠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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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고 다 삶인가, 생명이 있어야 삶이지.l신앙관련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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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l 2008-11-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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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돌보는 인간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3편이다. 역시 좋다. 살아도 정말 ‘생명’이 있어야 삶이지, 지금처럼 맹탕 살면 그건 죽은 삶이다. 신부님 글 읽으며 1) 생명을 받고, 2) 생명을 유지, 보존하며, 3)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게 이 책의 내용이다. 사실 내용 자체가 어려울 것은 없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信·望·愛 3덕을 잘 닦으면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생명을 받고, 소망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사랑함으로써 생명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생명을 받는 것은 당연히 하느님부터로다. 기도와 성사 속에, 명상 속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꿈을 통해. 나는 분주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근데 신부님은 “말없이 멈춰서서 바라보는 한 폭의 경치는 우리가 책에서 얻는 가르침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줄 것이다”라고 한다. 이제야 조금 느낀다. 언제가 오름에 올라가 들꽃을 보면서 눈물이 나던 날. 예전에 그렇질 못했다. 모든 것이 연구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힘을 빼니 아름다움이, 하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이 했던 건, 꿈을 통한 하느님 만나기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꿈은 그냥 돼지꿈, 개꿈으로만 생각했었다. 근데 신부님은 꿈은 무의식이 드러난 것이며, 무의식 역시 삶의 실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꿈을 꾸면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라고 하신다. 잊기 전에 기록도 하고. 앞으로 해 봐야겠다.
다음은 그렇게 받은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먼저 일에 반응하지 말고 선택하라고 하신다. 반응하면 화나 낼 것이다. 하지만 선택하면 너그러워진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환경에 내가 주체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애씀과 무리가 없는 삶. 이건 노자 도덕경 이야기 같다. 물고기는 애쓰면서 헤엄치지 않는다고, 인간만이 어깨와 목에 힘을 줄 뿐이라고. 맞다. 덧 없는 것에다 진을 빼지 말자. 온유하게, 여여하게, 자연스럽게, 매사에 애씀이 없이, 무리함 없이, 생명의 진 뺌 없이, 자연의 음률에 따라 사는 삶.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작년까진 내가 너무 젊었는지, 정신없이 살았다. 이제야 좀 힘 빼고 있는데, 근데, 몸이 좀 나아지니까 다시 옛 버릇처럼 ‘애씀’으로 살 것 같다. 조심해야지.
신부님은 이런 삶을 위해 우선 하루 세 끼 밥 규칙적으로 잘 먹을 것. 잠 충분히 잘 것을 말한다. 황당할지 모르지만, 이는 예전에 어느 피정에서 듣고 공감했던 부분이다. 이런 자세가 되어야 주님과 만난다. 바쁘면 못 만나고 만나서 얻은 생명을 보존하지도 못한다.
다음은 항상 소망을 상기하면서 살라고 하신다. 물론 소망과 욕망은 다를 것이다. 욕망은 예전 험한 세상 헤쳐 나가느라 하던 짓이라면 이제 중년 이후의 삶에서 소망은 생을 더욱 보람 있게 만들 가치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랑의 실천, 나눔의 실천이라는 소망 말이다. 이 세상 소망 말고 저 세상 소망 말이다. 이 때 주의할 점, 소망을 자신의 능력에 두면 안된다. 그러다간 스스로에게 속고 만다. 항상 기도 중에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고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된다.
그리고 감사하는 훈련도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잘 못한다. 이 책을 보니까 그게 1)내가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2)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명성.- 그렇다. 내가 이랬다. 근데 모든 것이 창조주에게서 나왔다는 생각, 즉 나는 내 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고 모두 감사해야 함을 느낀다. 맞다.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일부터 감사할 일이다. 선물임을 깨달았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자리마다 순간마다 감사할 일이다. 오늘부터 매일 잠들기 전에 하루에 감사할 일 10 가지 이상은 떠올리고 자야겠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나누는 것. 이건 사랑이다. 보시다. 돈만이 아니라 시간, 관심 등 모든 것을 나눠야 한다. 배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부님은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에게 선물을 주라고 한다. 물질적이든, 격려든, 칭찬이든, 인사든.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항상 화살기도를 올리라고 한다. 참 좋은 제안이다. 항상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주어야겠다. 사랑을 나누는 일, 그 자체가 생명을 나누는 일일 터이니.
문제는 실천이다. 감사와 선물 주기만이라도 오늘부터 꼭 해 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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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로의 초대 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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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선 인간 ㅣ 성서와 인간 2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2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광야에로의 초대
송봉모, <광야에 선 인간>, 바오로딸, 1998.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씨리즈’ 2권이다. 이 씨리즈를 다 구입해서 하나씩 읽고 있다. 예전에 몇 권 읽었더니 좋았다. 포켓북이라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짧은 글이면서도 울림이 크다.
특히 요즘 성경공부 진도가 <탈출기> 중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부분이라 시기적으로도 더욱 적절했다. 게다가 내가 겪은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더 와 닿는다.
광야. 처음 광야라는 단어를 접하고 ‘짠’던 건 대학 다닐 때 불렀던 ‘광야에서’라는 노래였겠다. 그러나 그 노래의 광야와는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광야는 물도 없고, 삭막하고,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그런 땅이다. 밤이면 춥고, 낮에는 햇빛 가릴 나무조차 없는 그런 곳이다.
소설 속에서 그려 보긴 좋으나 막상 내가 그런 땅에 놓이게 된다면 돌아버릴 것 같다. 낭만이 아니다. 절박함이다. 그러니 피하고 싶은 땅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광야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광야가 자신의 성숙을 위한 땅이 되기도 하고, 절망과 좌절의 땅이 되기도 한다.
작년부터 겪었던 그 고통,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던 날들. 물론 지금도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작년 같지는 않다. 수월하다. 방심할 것은 아니겠지만.
작년 그 고통의 시간, 당시에는 정말 이러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 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라나 지금 그 고통이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에서 보니 그 광야는 내게 축복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광야로 초대했던 것이다. 나의 성숙을 위해, 나의 정화를 위해, 나의 정립을 위해.
광야는 그래도 과정이다. 끝이 아니다. 자유인으로 거듭 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유의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 생활 40년을 통해 단련되고 정화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신앙을 떠나, 삶의 참의미 찾기를 떠나,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했던 시간을 광야는 정화해주었다.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 작년 추석 영훈 형이 어쩌면 내게 그런 시련이 닥쳐 온 게 다행이라고 했다. 공감한다. 우리 386들, 이제 40대 사회의 주역이 되면서 정신없이 산다. 그러다 보니 자기 성찰을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작년 무너지면서, 바닥까지 내려가면서 성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고통의 기간 중에 성찰 외에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광야야말로 나의 삶을 바꾼 하느님의 초대이지 않은가.
송봉모 신부님은 책에서 광야는 두 얼굴의 장소라고 말한다. 고통의 얼굴, 그리고 보살핌의 얼굴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얼굴을 따라가면 그 고통은 위기만을 키우고 유혹에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위기를 또 하나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의 보살핌을 따라간다면 삶은 다르게 열린다. 축복으로 바뀐다. 삶의 우선순위를 깨닫게 된다. 세속적 명예의 덧 없음을 보게 된다. 신기한 게 작년 겪었던 그 고통 속에서도 죽지는 않았다. 이건 신비다. 그래서 이게 주님의 보살핌임을 느꼈다.
그래서 ‘쾌락, 학벌, 명예 등 세속 문화에의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덧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갔던 시간을 뼈저리게 반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작년 그 고통의 과정에서도 석 달 정도 지나니까 내 입에서 “주님, 이 고통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신부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안고’갈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 한다.
결국 광야는 우리를 시험하는, 단련하는 장소인 것이다.
“내가 너희 찌꺼기를 용광로에서 녹여내고 납들을 걷어내어 너를 순결케 하리라”(이사 1, 25)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스스로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곧게 가져 동요하지 말며 역경에 처해서 당황하지 말라.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네 처지가 불쌍하게 되더라도 참고 견디어라. 실로 황금은 불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집회 2,1-5)
작년 겪은 광야는 하느님이 나를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발적으로 간혹은 광야를 찾아가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시작 전 40일을 광야에서 지내셨다. 단련을 위해서겠다. 사도 바오로도, 사막의 교부들도 스스로 사막으로 들어갔다. 필요해서 그랬을 것이다.
내게도 그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이집트 시절을 그리워했듯이 나 역시 예전의 세속적 생활을 간혹은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명예욕에 집착하며 살았던 그 시절,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는 그 맛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경계하기 위해서도 때론 일상에서 잠깐 일상을 벗어나 광야를 찾아들어가야겠다. 예수님께서도 간혹 기도하기 위해 혼자 산으로 오르시곤 했다. 그런 시간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일상의 바쁨에 빠지지 않게, 늘 성찰할 시간을 마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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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진인(無碍眞人)-자유인으로 산다는 것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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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용서 ㅣ 상처와 용서 -미니북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무애진인(無碍眞人)-자유인으로 산다는 것.
송봉모, <상처와 용서>, 바오로딸, 1998.
요즘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 별 일이다. 정말 많이 변했다. 작년 이후의 변화다. 그땐 중독이다 싶을 정도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대던 때도 있었다. 담배를 놓았을 때 나타난다는 금단 현상처럼 책을 며칠 읽지 못했을 때 왠지 갑갑하고 안절부절 하던 경험도 있다.
근데, 이젠 책을 안 읽는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나 속박되지는 않을 생각이다. 자유. 이것이 또한 자유다. 그때, 책에 미쳐 살 땐, 분명 강박이 있었다. 읽고, 또 읽은 것을 꼭 써 남겨야 한다는 강박. 이건 구속이다. 자유가 아니다. 근데도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그것은 내 ‘영혼의 느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참된 나의 자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헛된, 무상한 욕망에서 야기된 것임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런 욕망에서 많이 벗어나자 책 읽기도 그리고 그에 대한 글쓰기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더 이상 덧없는 그 명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규정짓기에 나를 구속시킬 필요가 없다. 본질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그럴 때 진정 자유를 느낀다.
요즘 그 자유가 좋다. 관계성에서 많이 벗어난 삶이다. 물론 인드라망적인 관계는 끝이 없겠지만, 그 그물에 걸려 허우적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 때에는 대전에 가서 은사 세미나에 참석했다. 호주 빅터 신부님이 지도하는 세미나였다. 느낌이 확 다르다. 서구의 신앙이 많이 식었다 하나 두텁기는 엄청 두텁다. 반면 한국의 그것은 뜨거우나 얇다. 큰 가르침,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흠뻑 느낀 좋은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 여기선 그 때 우연히 같은 방을 썼던 형제가 읽던 책 이야길 하려는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의 책 <상처와 용서>. 가만 보니 내가 예전에 송신부님 책을 읽은 바가 있다. 바로 이 책의 씨리즈 물이다. 성서와 인간 씨리즈인데 내가 전에 읽은 것은 <9 회심하는 인간>이고 이번 것은 씨리즈 1편이다.
책은 간단하다. 포캣북이다. 그러면서 쪽수도 135쪽밖에 안 된다. 그래, 진리는 단순한 것이지. 몇몇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사회학자들처럼 장황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짧아도 울림은 크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전체적인 주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는 그리고 받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가, 그런 만큼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담고 있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여러 번이라도 읽고 싶어진다.
상처 이야기와 함께 중요한 것은 용서다. 내 경우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처럼 한심하게 나를 단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송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고, 비그리스교적이다. 자기 멸시와 자기 학대에 빠질 때 우리는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단죄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랬나. 이번 대전에서의 세미나에선 처음 프로그램에서부터 나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이젠 이뤄졌기 때문인 모양이다.
유다와 다르게 “자신을 용서한 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일어섰다. 성서의 훌륭한 인물은 다 스스로를 용서한 자이다. 다윗,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 바로오 등.”
이런 예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셨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내가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부분은 5장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이다. 먼저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기대는 실망과 상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 기대는 안개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기대하면 안 된다.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자녀의 재능과 꿈을 먼저 헤아려 주며 자녀의 생이 완성되고 선이 자라기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고 자녀든, 친지든 친구이든 누군가에게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상처를 받겠다고 자처하는 꼴이라 한다.
평소 주변에 기대하고 사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이 그저 뜻 없이 한 사소한 행동에서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갖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멀리한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섭섭함은 상대가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상처들은 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해야 낫는다.
특히 친밀한 사이일수록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상처도 클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기대하고 상처받을 것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표현을 하라고 한다. 표현 없이 기대하다가는 상처만 키운다.
둘째는 추측하지 말라고 한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추측하면 오해와 상처를 낳는다.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건 전에 MBTI, 에니어그램 프로그램을 하면서 배웠다. 사람은 각각 다르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인정과 애정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환상 속에 산다. 존경받고, 인정받고,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이다. 나는 이 증세가 심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번 대전 세미나에서 나의 명예욕의 뿌리가 어디인가도 보았다. 그걸 파악하니 치유도 쉬워진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명예욕은 본성 아니겠냐고 물을 것이다. 송신부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송신부님은 대답은 다르게 끌어간다. 본성적인 것인가를 가만히 물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그리고 어떤 느낌이 오는가 점검해 보라. 만약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 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하다면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인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마음, 자유로운 삶이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정과 인정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가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는가를 찾고 그것을 치유해주어야 한다. 애정결핍에서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많다. 기도로 치유를 하여야 한다. 요즘 교회 안에 이런 치유를 위한 기회가 많음을 보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독하되 외롭지 않은 관계를 잘 만들어가야 한다. 홀로 있되, 사람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평소에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고독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다.
넷째는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전에 2등은 있을 수 없다’ 등의 태도는 모두 상처를 낳는 텃밭이다. 어떤 사람이 완벽한 명강의를 해서 청중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항상 그 상처의 텃밭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이젠 그렇게 살지 않는다. 송신부님은 여기서 예수님도 나자렛 회당에서 말 한 번 잘못해 매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다며 완벽한 강의, 강론에 대한 강박을 버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저 주님께 맡기고 강의하면 그뿐이다.
그래서 “반대자들의 갖은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는 드 멜로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명성에 연연하며 진리를 왜곡시키는 경우를 경고한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잘 나간다고 생각할 때 이처럼 헛된 길을 간 경우가 많았다. 명성에 연연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비하는 영성생활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자기비하를 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한다. 영성가들도 말하기를 악마가 가장 노리는 자는 1)두려워하는 자 2)분노와 악심을 품는 자 3)걱정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 4)자기비하를 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악마는 이런 성향을 더욱 부추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뒤집어 살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 것,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365회 반복된다고 한다. 2)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갈 것 3) 걱정, 죄책감에서 벗어날 것-기쁘게 살아가야 하겠다. 4)자기 긍정적으로 살 것. 결국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마귀가 접근을 못하겠다 싶다.
물론 자기애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자기애는 나누지만 이기주의는 받고 챙기기만 한다. 이런 자기 사람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다. 대전에서 그런 비슷한 이야길 들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본이라는 말. 자기 긍정성이 있어야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세계와 교감을 나누지, 결코 외부상황에 지배되지 않고, 왜곡된 죄의식이나 솔직하지 못한 합리화, 자기 변명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자기 신뢰가 있어야 다른 이들의 비판 앞에서도 인내하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의 기준에 맞춰 살면서 좋은 사람 소리 들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말라고 한다. 갈등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사실은 그 사람 안에 나의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그 그림자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내가 나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우리 안의 그림자가 주체가 되어서 행동한다면 우린 예민해진다. 내 안의 그림자가 나를 통제해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의식의 빛을 그 그림자에 비춰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더 하여 화, 갈등과 관련한 조언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셨다. 심하게 꾸짖기도 하셨고, 성전 앞의 환전상들의 물건을 뒤집어 엎어버리시기까지 했다. 이때 우리는 나의 부정적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화가 난다고 해도 그 화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니다. 이걸 떼어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감정과 나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면 휘말린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부분에 나를 전부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여유가 필요하다. 떼어놓는 여유. 매 상황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반응하면 평화를 잃는다. 하지만 선택하면 다르다.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한 훈련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인을 다시 생각한다. 원효 같은 무애인.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그 내면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하느님 품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 그것을 통해 만들어져 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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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닥의 미소가 할 수 있는 그토록 큰 일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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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반양장)마더 데레사 지음, 베키 베니나트 엮음, 이해인 옮김 / 샘터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가닥의 미소가 할 수 있는 그토록 큰 일
마더 데레사 지음, 이해인 옮김, <아름다운 선물>, 샘터, 2001.
‘빈자의 성녀’ 마데 데레사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책일기’ 쓰기가 힘들다. 책의 거의 모든 부분을 옮겨 놓고 싶어서다. 그건 막노동. 그렇다고 어느 부분만 옮기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럴 때 그냥 닥치는대로 쓰는 수밖에.
사실 언제부터인가 이 분의 책을 많이 읽는다. 예전엔 그냥 마음속으로만 존경하고 멀리서 쳐다보았을 뿐인데, 이제는 가까이 하고 싶다. 머리로가 아니라 삶으로.
“평화는 미소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대가 도무지 미소짓기 어려운 사람에게 하루 다섯 번 미소짓도록 애쓰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평화의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미움들을 이 빛으로 몰아내고 사랑만을 가져 오도록 합시다. 서로 미소지으십시오.”
-그래도 올해부터는 내 얼굴이 많이 달라졌다.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음 좋겠다.
“서로를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하며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합시다. 다른 이가 비록 실수로 허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서로 좋은 점을 찾아보려 애쓰십시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맞다. 그건 용기다. 보통 용기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니. 쉽겠는가. 아니다. 무척 어렵다. 그래도 그게 답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내 틀로 재단해서 수용하려면 체한다. 그냥 세상의 일로는 이게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물론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그가 하느님이다. 그에게 해 준 것이 곧 주님께 해준 것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침묵도 많이 강조했다. 당신의 일이 알려져 더 바빠질수록 묵상 시간을 늘렸다고 한다. 침묵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은 상태로 일에 매달려면 주객이 전도될 위험에 빠진다. 하느님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면 인간의 일,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곧바로 교만에 빠진다. 그러니 침묵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좋은 말을 꺼내 놓기에 급급해서인지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 듣는 시간은 잘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고요 속에서만 하느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중략)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었구나. 내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 차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기 어려웠던 것이로구나. 비워야 하는 것. 어떻게 뭘 비우지?
“우리가 지닌 책, 생각, 기억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분과 함께여야 합니다. 모두를 온전히 벗어나 그분의 현존, 침묵, 비움, 희망, 동요되지 않는 고요함 안에 사랑스럽게 머무는 것입니다. 야단스럽게 법석을 떠는 곳에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적 침묵을 연습하라고 하신다.
“눈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영혼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될 뿐인 타인의 결점 찾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만을 찾으십시오.”
“귀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타인의 험담, 소문을 실어 나름, 무자비한 말들처럼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는 일체의 모든 소리에는 귀를 막으십시오. 항상 하느님의 음성에, 그대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십시오.”
“혀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칙칙한 어둠과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모든 말과 얄팍한 자기 변호를 삼가고 우리에게 평화, 희망, 기쁨을 가져 오고 마음을 밝혀 주는 생명의 말을 함으로서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지성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거짓됨, 산만한 정신, 파괴적인 생각, 타인에 대한 의심과 속단, 복수심과 욕망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경이에 대해 깊이 관조했던 성모 마리아처럼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진리에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마음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온갖 이기심, 미움, 질투, 탐욕을 피하고 온 마음과 영혼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렇게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기쁠까. 데레사 수녀님은 “사랑에 불타는 마음은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그 기쁨의 방법을 말해 주신다.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구나. 그냥 마냥 기뻐하며 살아야하는 거구나. 그래서 테살로니카 1서에도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이겠지.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늘 떠올리며 살아야겠다.
“기쁨은 감염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가는 곳마다 항상 기쁨이 넘쳐흐르도록 애쓰십시오.” “기쁨은 우리 삶의 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은 너그러운 인격의 표현입니다.”
觀想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이 안에서 어디서든지, 어느 때에나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것. 또한 모든 사건 안에서 그분의 손길을 보는 것. 특별히 초라한 빵의 형상 안에,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모습 안에 신음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 뵙고 흠숭하는 것. 이것이 곧 세상 한가운데서의 관상이다.”
-내용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항상 의식하며 살자. 그게 관상이란다.
희생에 대해서는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은 상처를 받아야 하며 자기 자신을 비워 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신다.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또 “방관은 가장 두려운 가난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디에든 있지만 가장 가난한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 가난한 이들이 많다. 나의 학생들도 상당히 가난하다. 물질적인 면만이 아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다. 애들을 신경 써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옮긴이 이해인 수녀님의 글이다. 이해인 수녀님이 인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본 구절 중에 “침묵의 열매는 기도, 기도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봉사, 봉사의 열매는 평화”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흔히 주변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많이도 말하지만 진작 그 평화가 내 몸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요즘에야 아, 이런 게 평화로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해 가는데, 여기 소개된 평화도 마찬가지다. 그런 평화라야 하겠다. 침묵하고, 기도하고, 그 결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봉사하고 그 봉사로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다 좋은 말이다. 새로 듣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전히 머리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내 모습에서 언제, 어떻게 탈피하는가 하는 점만이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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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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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으로 3앨런 에임스 지음, 정성호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
앨런 에임스 지음, 정성호 옮김, <예수님의 눈으로 3권>, 가톨릭 크리스챤.
1권 2권과 달리 3권의 옮긴이가 다르다. 읽다 보면 한자어에 괄호를 치고 친절하게 한자를 써 놓은 게 많다. ‘굳이’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확인해 보니, 역자가 달랐다. 그랬구나 싶었다. 그래도 내용전달은 별 무리가 없다. 좋은 번역이다.
이번 3권에서도 여전히 와 닿는 대목 옮기고, 약간의 토를 단다. 묵상과 함께. 특히 ‘기도’가 많이 가깝게 다가온 느낌이다. 기도를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는 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네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비록 네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라도,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아라. 하느님께 모든 말과 생각을 다 바친다면 너도 기도하는 것이 된다.”
“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만일 네가 그 일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면, 그때 그것은 행동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네가 행한 모든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한 것이라면, 그 때는 모든 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호흡을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숨을 쉴 때마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을 통해서,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 선물을 활용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신 선물이 너의 봉사에 의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면 그때 행한 모든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리고 기도와 생활이 많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의 구절을 읽어 보면 삶이 곧 기도인 것이고,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하느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내 삶을 모두 하느님 마음에 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돕는데 힘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게 곧 기도라는 것이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최후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냄으로써 그 순간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자세라야 한다. 최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 이럴 때 앞에서 말한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네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질 때 악이 너를 해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나의 사랑에 믿음을 갖는다면 그때는 악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이 세상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고,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령의 공격은 내가 두려워할 때 심해진다. 그러나 하느님이 항상 함께 함을 믿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어떤 악령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유다의 행실이 문제가 되어 다른 제자들이 불평을 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다. “너희 중 하나가 어떤 면에서 약하다는 것을 알면, 너희는 그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도록 당연히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중략) 왜냐 하면 자신의 나약함을 다른 사람들이 얕잡아 보거나 해칠 수 있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인 너희는 서로의 약점을 형제를 돕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겸손한 사람으로, 너희는 형제가 짊어지지 못하는 짐을 져 주어야 한다. 형제인 너희는 다른 사람한테서 나약함을 보면 그것을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도 극복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형제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써, 그리고 시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중을 들어 주는 것으로써 형제 노릇을 좀 더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쉽게 남을 비난한다. 근데 비난할 게 아니라 그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나의 성장이다. 그래야 나의 나약함도 극복될 수 있다. 나는 한없이 작은 인간이기에.
“네가 그러는 것은 남들한테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고,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용서를 할 수 있을 때, 너는 진실로 사랑의 마음을 열 수 있고, 동시에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중략) 너는 자신의 노여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처럼 슬프고 그처럼 불행하고, 그처럼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그 노여움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인생에서 행복을 느껴라.”
-용서, 사랑이 넘치면 용서가 빠르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했기에 ‘내 탓’인 줄 모르고, ‘남 탓’을 했던 것이다. 내 탓이다. 모두가. 그리고 혹 앞의 글처럼 남의 약점이 보이면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상처 입을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노인은 “너무나 행복해서 미워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말이겠다.
“비록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항상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사랑하는 힘을 달라고 그때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란 말이오!”
-어려울 때, 그때가 사랑이 가장 필요한 때이겠다.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더 많이 사랑을 하고 어떻게 악을 피하는가를 배우기 위한 은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너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것을 은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성찰하고 회개함으로써 전보다 더 사랑 넘치는 사람으로, 전보다 악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남으로써.
“시몬아, 먼저 너부터 달라져야 한다. 죄를 보지 말고 죄인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길을 찾아라. 죄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면, 너는 그 노여운 생각 때문에 죄로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악마의 영리한 점이다. 너에게 악에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써 너를 불쾌하게 만들고”
-분노나 비난이 아니라 계속적인 사랑과 이해를 보여줘야 한다.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물론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고자 한다면 이런 덕성이 몸에 배어야 한다. 타인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 만약 내가 이겨내지 못하고 노여워한다면 그때 악령은 나를 사로잡는다. 이렇게 나는 또 다시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현명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고 한 모양이다. 한계상황이 생기면 분노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를 도와야 한다. 아무리 꼴통이라도.
“남들을 매도하기 쉽고, 그들을 죄로 이끌어간 약점을 보지 않고, 그들이 그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무시해 버리기가 쉬워진다. 사람들에게서 善을 보고, 그들이 죄를 짓거든 그 善을 강화하는 길을 찾아 주고, 그들의 사랑이 위력을 발휘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때가 죄인이 변하는 때이고, 내 안에서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는 때이다.”
-다시 반복되는 말이다. 군더더기 보다 묵상으로 대신한다. 그 사랑, 지독히도 어려운 사랑이지만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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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기쁨 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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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으로 2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기도의 기쁨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예수님의 눈으로 2권>, 가톨릭 크리스챤, 2000.
“너도 네 자신을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아라.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네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그것을 극복할 도움을 내게 청하여라. 그러면 내가 항상 네 곁에서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조급함. 나의 약점이다. 책을 통해서 보면 야고보 사도도 그렇게 안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신다. 생각해 보면 나도 많이 차근차근 변하고 있다. 믿고 계속 길을 갈 뿐이다. 주님께 청하면 항상 곁에서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믿고 싶었고, 치유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그런 방식을 인정해 주는 말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많은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만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누군가가 말해 줄 때 그 말을 믿고 싶어 했다. 진리를 들었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자기 생활 속에서 넘치는 죄를 알아보게 되고, 자기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활을 바꾼다는 것을 너무 어려운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한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말과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말과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하는 말만을 잘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속임수인 것이다.”
-진리 앞에 절대 겸손. 나를 바꾸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여겨선 안 된다. 앞 문장에서처럼 ‘나의 聖化’로 여길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뜻이라····. 사랑이 그 힘이며, 용서가 그 정의며, 자비가 그 뜻이로구나. 어려워도 이웃에 대해 심지어는 원수에게도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전해져야 한다. 그 정도로 나를 다듬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그런 경험을 다시 맛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구하려고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우선으로 두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 그렇게 기도드릴 수 있는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받는 은총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 너희 마음이 열리게 될 것이며 너희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넘치게 될 것이다. 기도할 때 너희가 하느님께 고압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시기나 질투나 분노를 품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린다면, 너희는 기도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경계할 일. 나 역시 어떤 신앙신비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한 동안은 그 체험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니 기도가 웃기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체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것으로 이미 나는 하느님 현존을 확인했다. 그래 놓고 또 그런 신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사실 일상 삶이 모두 신비이고 기적인 것을.
그리고 나는 아무리 봐도 질투, 시기심이 강한 것 같다. 남이 하느님 사랑을 흠뻑 받을 때 기뻐해야 하는데, 웬걸 엉뚱하게도 질투하고 있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 생기는 못된 버릇이다. 그 사랑을 확신하면 오히려 남들을 축복해 줄 수 있다. 더 닦을 일이다. 그럴 때 진정 기도의 기쁨이 다가 온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변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깊이 잠겨 머무르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 암튼 기도의 기쁨을 조금은 맛 본 것 같다.
“원수를 반겨주고 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면, 원수가 친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여러분을 창조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원수들도 똑같은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려운 가르침. 머리로는 하나도 어렵지 않은데, 생활에서는 절대 실천 불가능할 것처럼 어렵다. 물론 절대여서는 안 된다.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사람 중심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해는 된다. 그리고 원수를 증오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을 통해서도 이미 터득한 바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는 게 쉽지 않다. 하긴 어디 예수님 따라 가는 삶이 그리 쉽겠는가. 그래도 가야 할 길.
“잠자기 전에 꼭 기도하거라. 그리고 너희 천사들에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학고.”
- 기도의 생활화. 많이 해 간다. 근데 천사들에게 하는 기도는 늘 빼먹는다. 이건 신화나 동화가 아니다. 실제다. 악령을 체험한 나로서는 그 반대의 성령을 함께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악마와 천사가 결코 동화적 개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항상 잊지 말고 수호천사께 도움을 청해야겠다. 지금 당장부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똑똑한 두뇌를 가진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성을 갖게 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선물은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선물 받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성을 지녔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그 지성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중략)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전에 난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착한 사람이고자 한다. 많이 변했다. 그리고 나는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배움을 나의 명예욕만을 위해 썼다. 이젠 그 못된 버릇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예전처럼 제주역사 공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돌아가도 그 지식을 다른 사람 돕는데 쓰겠다. 절대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쓰지는 않겠다. 이게 지난 1년 동안 주님이 허락하신 고통을 겪으면 배운 바다. 정말로 나의 지적 능력은 하느님 거두어 가시고자 하니 한 순간에 날라 갔다. 아무 것도 지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겪었다. 그러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었음을. 겸허하고 또 겸허해질지어다.
제자 중 하나가 유다의 금풍 횡령 때문에 걱정하며 비난하자 예수님은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걱정을 하다 보면, 그것이 네 기도를 산만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약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없어지게 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을 파괴하면서 퍼져나가는 것이다. 죄를 짓은 사람이 악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죄인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라.”
-나는 비난만 했다. 아니 증오하고 왕따시키고 매장시키려 했었다. 그러니 나의 기도는 산만할 수밖에. 죄인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안 그러면 나까지 그 죄에 감염된다. 어렵더라도 죄인을 위해 기도를.
제자 야고보의 묵상: “주님, 저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제가 어떤 좋은 일을 했다 싶으면, 그런 일을 한 제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선행을 하게 한 것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문득 기억하게 되면, 자신을 훌륭하게 생각한 제 자신이 아주 싫어집니다.”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 말, 이해 못한다. 사람이 교양을 잘 닦아, 덕을 닦아, 인격을 도야해서 겸손해진 것이지,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험으로 이게 동양 종교(철학)과 기독교의 차이다. 동양 종교에서는 무엇보다 인간, 나, 자아, 주체, 진아를 내세운다. 그 자아의 깨달음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우린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절대자 창조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체험으로 알 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적 겸손의 한계를 본다. 그래서 예전에 김홍섭 판사는 당신의 수상기 제목을 ‘무상을 넘어서’라고 했나. 무상 너머의 절대자를 묵상한 것이다. 물론 동양 종교의 좋은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에 가다 보면 그것은 한계에 달한다. 결국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니라 주님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나의 의지가 아니다. 이끄심 없이는 하나도 못한다.
“너희가 사랑으로 산다면 이런 일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너희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모는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되면, 짐승들과 새들과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공포가 없어지면 모든 피조물들은 서로 친구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며 함게 살아가는 친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새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었나 보다. 하긴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만난다면 가능한 일이겠다. 노래 가사에 있는 사자들이 어린양과 뒹굴고.
기도하면 “너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죄가 아닌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리고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값진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기도는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도가 단순히 사람 마음 위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교회에 다시 돌아와 ‘통공’이라는 말뜻을 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이 기도가 참으로 큰 축복임을 알았다. ‘기도의 기쁨.’ 말로 해선 모른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다. 네가 기도할 때 하는 말은, 네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기 위한 것이다. 네 마음이 기도하는 데에 있다면, 같은 기도를 날마다 되풀이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가끔씩 기도할 마음이 없을 때에는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하느님께 사랑의 말씀을 드리고,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서 가능하다면 다시 일상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라.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은 기도를 바침으로서,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자기 마음을 훈련시킨다.”
-기도하기 싫은 땐 그냥 대화하라고 하신다. 이 얼마나 좋은가. 그래, 대화라도 자주 해야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부록에 몇몇 성인들이 저자 앨런 에임스에게 계시하신 말씀이 실려 있다. 와 닿는 것 옮긴다.
성토마스: 의혹을 없애기 위해, 기도하여라.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여라. 평화 속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의혹과 오류를 없애고, 평화를 얻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성 유다 타대오: 하느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힘을 받는 것은, 네 믿음에 달려있고, 하느님께 대한 네 사랑에 달려있다. 너희가 하느님을 사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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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속에서 준 예수님의 가르침 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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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으로 1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일상생활 속에서 준 예수님의 가르침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예수님 눈으로 1권>, 가톨릭 크리스찬, 2000.
지난 1월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 피정 갔다가 사온 책이다. 그냥 책꽂이에 꽂아 뒀다. 예전처럼 책읽기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다. 예전에 사회과학 서적을 읽을 땐 지식 습득, 논리 다듬기였다. 그런데 지금 신앙 서적은 그게 아니다. 묵상이 주가 된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더디다.
이 책 저 책 읽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걸 잡았다. 전체 3권인데 오래 전에 시작했는데 최근에야 끝냈다.
책이 좀 특이하다. 외형이 특이하다는 게 아니라 구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저자 앨런 에임스라는 분이 영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걸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1996년에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 계시 내용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현 세태에 대한 걱정, 기도 당부,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것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하실 때의 일상생활을 마치 소설 읽듯, 아니면 영화 보듯 전해주는 내용이다.
성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아무래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바로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과정이 생략되고, 중요한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로 메시지 위주다. 근데 이 책은 스토리로 되어 있다. 소설을 일근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특이하고 말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특이하면서도 편하다. 그래서 좋다.
또 저자 앨런 에임스가 성직자인가 하면 그도 아니다. 평신도이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그분의 그런 활동은 인정했다. 특이한 경우다.
어쨌든 경우야 어찌했던 내겐 읽기 쉬우면서 메시지가 적지 않았음이 좋았다. 뭐 달리 할 말이 없다. 신앙 서적의 경우 ‘책일기’를 쓰면서도 내 의견은 별로 쓰지 않는다. 지당하신 말씀만 있기에 그냥 인용하는 게 전부다. 간혹 그냥 감탄의 동의 표시나 하는 게 나의 코멘트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 전체 간추리는 것도 없고, 그냥 좋은 구절만을 옮긴다. 스토리는 빼고 그냥 좋은 가르침만을 옮긴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시오. 누구한테도 상처를 주지 말고 남을 도와주시오.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고 지낸다면, 바로 그것이 나를 따르는 길이고 영원한 기쁨을 얻는 길이 될 것이오.”
-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라. 그렇게 살면 참 행복하겠다. 늘 의식하고 살아야지.
“점잖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의견을 토론하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그러면 아무도 마음을 상하지 않고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친구를 잃는다면 논쟁에서 승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논쟁에서 승리한들, 친구를 잃는다면 소용이 없다. 그렇구나. 사람이 더 중요하지.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들인데. 그 동안 나는 어쩌면 과도한 논쟁을 즐겼다. 앞으로 꼭 필요한 논쟁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겠다.
“너희는 자아라는 멍에를 너희 영혼 위에 짊어지고 있을 셈이냐?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 자아라는 멍에. 나는 이것을 과도할 정도로 지고 다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우선이다. 참, 어제 신문 읽다가 문동환 목사가 형님 문익환 목사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삼촌이 만들어준 팽이가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정신없이 놀았던 모양이다. 근데 형 문익환이 그 좋은 나무 팽이를 불에 집어넣어 태우며,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대상은 모두 우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감동. 맞다.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가릴 정도가 되면 안 된다. 나의 ‘자아’보다, 그 자아를 내어 주신 하느님께 먼저 다가설 일이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순결한 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지녀야 할 믿음인데,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며 천국에 갈 때까지 결코 얻지 못할 대답을 끝없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 그랬지. 나 역시. 사실 진리는 단순한 것인데, 불필요하게 머리를 많이 굴렸다. 물론 그 과정이 전혀 필요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얻지 못할 대답’일 뿐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도 “이 뭣고?” 하면 “오직 모를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겸손을 얻으면 다행이데, 뭔가 깨달았다고 폼 잡으면 그 순간 꽝이다. 그래서 자력 신앙이라는 게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물론 우리 계시신앙인 가톨릭도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교만으로 떨어지긴 하겠지만.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것을 통해 틀림없이 우리에게 가장 좋고 큰 보상을 받게 하신다.”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고통에 대해 불평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서면 확실히 경험한다. 나 같은 탕자가 회개하고 개과천선하는 것, 이거 내 노력으로 한 게 아니다. 주님이 주신 큰 보상이다. 물론 그래도 고통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하는 게 아닌 걸. 그러니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표현이 맞다. 이건 정말 말로 해서 모른다. 겪어보지 않고선.
“때때로 괴로움을 겪게 되면 남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이 하나의 은총이 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우리의 가슴을 사랑과 자비로 채워주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고통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당한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큰 은총이라는 뜻이다.”
-바로 나온다. 왜 고통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잘 나갈 때는 주변의 아픔을 모른다. 알아도 머리로만 안다. 내가 겪어봐야 이웃의 아픔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니 은총인 것이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병들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이러한 사람들의 안팎과 주위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고, 사람들을 악의 소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죄를 짓는, 나쁜 짓을 하는 타인을 보았을 때) 분노하게 되는데(중략) 죄를 지으면서라도 그 사람의 죄악을 멈추게 하고 싶어 한다. 폭행을 하거나 증오심으로 학대하거나, 적개심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등의 죄를 짓고서라도 그 사람의 죄악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스며든 악으로 눈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방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모르고 행동할 때, 착한 사람들도 악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악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중략) 사랑과 평화를 첫째로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시간 내 삶의 원천적 힘은 ‘분노’에서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부정의가 횡행하는 현실 앞에서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분노의 처리 방법을 알게 되었다. 사실, 예전에 그 분노를 그냥 날 것으로 폭발시켰다. 타도를 위해서 노력했고, 응징하려 했다.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짜릿한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교만을 강화했고, 내 마음에 사랑보다 증오가 더욱 커져가게 나를 몰아갔던 걸 당시는 깨닫지 못했다. 이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큰 고통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암튼 그래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악을 악으로 누르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았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몸에 다가 왔다. 간디를 만나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으나, 신념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신앙으로 이걸 받아들이게 되면서는 달라졌다.
그런 변화, 깨달음 역시 성령 하느님의 역사하심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어봤다. 증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 부정의에 눈을 감겠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내어주면서 문제를 풀어야 함을 새롭게 배웠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전보다 더 어려운 투쟁이다. ‘사랑과 평화를 첫째로 앞세우면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사회의 현안인 해군기지, 의료 민영화 등, 많다. 여기에 대해서 사회과학적 인식을 제대로 하되, 그 해결 방법은 예수님의 방식이라야 함을 본다. 훨씬 어려운 방법이다. 그래도 진리는 하나다.
“베드로, 이런 조롱을 무시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이런 조롱을 무시할 때, 너는 나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부활 미사 영성체 후 묵상 중에 내면에서부터 이런 소리가 올라왔다. ‘아직도 교만함이 남아 있다. 주변으로부터 어떤 모욕을 하더라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님이 주신 메시지라 생각한다. 더 낮추라는 얘기다. 낮추다 보면 모욕적인 상황도 맞게 될 것이다. 그래도 평화를 잃지 않는 경지까지.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할 때는, 주로 악의와 증오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한 일은 하느님께 맡겨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오직,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만을 생각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회만을 찾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이외의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라는 것과, 다른 사람이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도로 하여라. 너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우선으로 삼아야지, 사람의 일을 우선으로 삼으면 안 된다.”
- 지독히도 어려운 주문이다. 내가 예수님께 돌아오고 나서 삶 속에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가르침 중의 하나다. 판단하지 마라. 어렵다. 그냥 판단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이 몇 마디 말만 해도. 그가 쓴 글 몇 조각만 읽어 봐도. 그런데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니. 참 어렵다. 그래도 낮은 수준에서라도 실천해 보자 노력한다. 악의와 증오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께 데려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래도 쉽지 않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의 부정의들. 어찌 판단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지. 그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금식을 하면 너희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기도하기가 더 쉬워진다. 너희가 육신을 단련시킬 때 너희 마음도 단련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닥쳐올 대를 준비하며 자신을 강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로 단식이 필요한 것이다.”
-동양적 수련을 하다가 다시 하느님을 찾아온 나다. 우상숭배의 대가는 상당히 혹독했다. 물론 그 고통 자체가 은총이긴 했다. 암튼 예전에 단식이 익숙했는데, 가톨릭에 와서는 거의 못했다. 별로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몸 축난다. 모든 음식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기쁘게 먹어라’라는 논리였다. 물론 맞다. 그래도 단식을 필요하다. 성경에도 나온다. 기회가 되면 단식 해야겠다. 뿐 아니라 요즘 영성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에 가서 단식을 하는데, 여기 가톨릭에서도 단식함을 알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보는 게 좋겠다.
“기도할 때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여라. 모든 분심을 떨쳐 버리고, 너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너희들 생애에 무엇을 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그 다음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엉터리 기도. 분심 속 기도가 많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이 책의 가르침대로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늘 깨어 있을 일.
“당신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대 마귀를 마음 안에 들어오게 하여(중략). 그러나 앞으로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용서해 주고자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죄책감을 버려야 하오. 그러나 그 죄는 잊지 말고 기억하여,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오.”
-죄책감 버릴 것. 여기에 매여 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것이고, 내가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고자 한다. 그러니 더 이상의 죄책감이야말로 진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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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가 가르쳐준 사랑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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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마더 데레사가 가르쳐준 사랑
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마음이 급했다. 읽기도 전에 10권 주문했다. 우리 봉사반 학생들 나눠주려고. 일단 마더 데레사의 삶이 묻어 있는 책이라면 봉사반 애들 선물용으론 적합하다 싶은 이유 때문이다. 사서 다 나눠줬다. 아니 한 권 남겼다. 나도 읽어 봐야지.
주문해서 보니 책 사이즈가 한참 작다. 포켓북도 이렇게 작은 것은 처음이다. 손에 넣고 다니긴 편할지 모르지만 읽기엔 좀 불편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메시지다. 당연 사랑이다. 책 제목처럼. 식상하다고? 물론 식상하다. 그래도 진리는 역시 단순한 것이다. 사랑 이상의 가르침이 어디 있겠나. 근데 잘 보면 그 ‘사랑’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안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특히 마더 데라사가 말하는 사랑은 엄청 큰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생각 외로 아주 작은 것이었다. 하긴 그 작은 사랑이야 말로 큰 사랑의 바탕일 것이다.
먼저 “사랑은 죽는 날까지 매일매일 삶과 호흡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다 한 번 나가는 장애인 시설 봉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 지당하다. 그러면서도 난 찔린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는 것을 거창하게만 생각해서 그랬다.
근데 마더 데레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가족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때때로 서로에게 웃음을 보내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웃음을 짓기가 가끔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순수해지려면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그런 사랑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즉 가족 안에 있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바로 거기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서 펼쳐집니다.
멀리 있는 이를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 한 끼 제공하기는 쉽지만 우리 집안의 누군가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외롭고 힘들어할 때 그를 위로하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도 폼 잡지 말라고 하는 말씀. 마누라 사랑 못하면서 어디 가서 거창하게 세계 평화 말하지 말라는 말. 지당. 철저히 실천해야 할 일.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 때문에 사랑 놓고 다니는 사람. 그게 맞을 것이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살았다.
뒤쪽 어린이를 테마로 다룬 장에서도 이 가르침은 이어진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가정에 사랑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먼저다. 이거 못하면서 밖에서 거창한 일하는 사람, 이젠 안 믿을 생각이다. 위선일 수 있다. 몸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사랑에 그칠 수가 있다. 사랑이 생활이고 삶이고 호흡이고 보면 먼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 옳아 보인다.
“어머니는 가정의 심장입니다.” 울림이 강하게 온다. 그렇다고 해서 나 같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
“나는 오늘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입니다. 가정과 가족 안에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사랑의 결핍이 바로 이 세상에 그토록 심각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다. 가정에 사랑이 넘치면 사회 문제도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
근데 많은 경우 가족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가족을 망치고 있다. 나도 예전에 그랬다. 바빠 살 때, 정신없이 살 때 말이다. 마더 데레사는 그 점도 지적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더 발전하고 싶고, 더 부유해지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서두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시간을 내어줄 수 없고, 부모 또한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행히 나는 요즘 가정에 돌아왔다. 일보다 가정을 중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당신의 어린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기도하는 어린이는 항상 행복한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일치된 가정입니다.”라는 말도 실천하고 있다. 다행인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 읽다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
“나는 당신이 주변에서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예수님 닮아간다면 좋겠다. 노력해야지. 성찰하고, 기도하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봉사, 용서,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사랑은 봉사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봉사를 하다가 주의할 점. 실망하지 말 것. “당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상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공과 영광에 대해서도 모두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실망한다면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만심의 표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재지 않습니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은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의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유혹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파수꾼의 하나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말한 대목도 좋은 구절이 많다. “죄를 짓거나 실수했을 때,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디딤돌”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나 요즘 회개하고 이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중이다. 앞으로도 한창 회개해야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구절. 많이 하는 말이지만 죽음은 하느님께도 가는 것이라는 것. 그래도 나는 아직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족함이 많다. 근데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다. 나 잘났다고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잘 산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 앞으론 그렇게 살아야지.
오랜만에 책 읽고 글 써 본다. 남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생각 정리다. 좋다. 간간히 이렇게 글 써야겠다. 왜? 사랑 실천을 위해서 나를 닦을 필요가 있으니까.
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마음이 급했다. 읽기도 전에 10권 주문했다. 우리 봉사반 학생들 나눠주려고. 일단 마더 데레사의 삶이 묻어 있는 책이라면 봉사반 애들 선물용으론 적합하다 싶은 이유 때문이다. 사서 다 나눠줬다. 아니 한 권 남겼다. 나도 읽어 봐야지.
주문해서 보니 책 사이즈가 한참 작다. 포켓북도 이렇게 작은 것은 처음이다. 손에 넣고 다니긴 편할지 모르지만 읽기엔 좀 불편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메시지다. 당연 사랑이다. 책 제목처럼. 식상하다고? 물론 식상하다. 그래도 진리는 역시 단순한 것이다. 사랑 이상의 가르침이 어디 있겠나. 근데 잘 보면 그 ‘사랑’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안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특히 마더 데라사가 말하는 사랑은 엄청 큰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생각 외로 아주 작은 것이었다. 하긴 그 작은 사랑이야 말로 큰 사랑의 바탕일 것이다.
먼저 “사랑은 죽는 날까지 매일매일 삶과 호흡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다 한 번 나가는 장애인 시설 봉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 지당하다. 그러면서도 난 찔린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는 것을 거창하게만 생각해서 그랬다.
근데 마더 데레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가족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때때로 서로에게 웃음을 보내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웃음을 짓기가 가끔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순수해지려면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그런 사랑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즉 가족 안에 있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바로 거기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서 펼쳐집니다.
멀리 있는 이를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 한 끼 제공하기는 쉽지만 우리 집안의 누군가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외롭고 힘들어할 때 그를 위로하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도 폼 잡지 말라고 하는 말씀. 마누라 사랑 못하면서 어디 가서 거창하게 세계 평화 말하지 말라는 말. 지당. 철저히 실천해야 할 일.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 때문에 사랑 놓고 다니는 사람. 그게 맞을 것이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살았다.
뒤쪽 어린이를 테마로 다룬 장에서도 이 가르침은 이어진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가정에 사랑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먼저다. 이거 못하면서 밖에서 거창한 일하는 사람, 이젠 안 믿을 생각이다. 위선일 수 있다. 몸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사랑에 그칠 수가 있다. 사랑이 생활이고 삶이고 호흡이고 보면 먼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 옳아 보인다.
“어머니는 가정의 심장입니다.” 울림이 강하게 온다. 그렇다고 해서 나 같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
“나는 오늘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입니다. 가정과 가족 안에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사랑의 결핍이 바로 이 세상에 그토록 심각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다. 가정에 사랑이 넘치면 사회 문제도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
근데 많은 경우 가족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가족을 망치고 있다. 나도 예전에 그랬다. 바빠 살 때, 정신없이 살 때 말이다. 마더 데레사는 그 점도 지적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더 발전하고 싶고, 더 부유해지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서두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시간을 내어줄 수 없고, 부모 또한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행히 나는 요즘 가정에 돌아왔다. 일보다 가정을 중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당신의 어린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기도하는 어린이는 항상 행복한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일치된 가정입니다.”라는 말도 실천하고 있다. 다행인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 읽다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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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주변에서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예수님 닮아간다면 좋겠다. 노력해야지. 성찰하고, 기도하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봉사, 용서,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사랑은 봉사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봉사를 하다가 주의할 점. 실망하지 말 것. “당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상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공과 영광에 대해서도 모두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실망한다면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만심의 표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재지 않습니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은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의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유혹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파수꾼의 하나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말한 대목도 좋은 구절이 많다. “죄를 짓거나 실수했을 때,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디딤돌”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나 요즘 회개하고 이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중이다. 앞으로도 한창 회개해야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구절. 많이 하는 말이지만 죽음은 하느님께도 가는 것이라는 것. 그래도 나는 아직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족함이 많다. 근데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다. 나 잘났다고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잘 산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 앞으론 그렇게 살아야지.
오랜만에 책 읽고 글 써 본다. 남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생각 정리다. 좋다. 간간히 이렇게 글 써야겠다. 왜? 사랑 실천을 위해서 나를 닦을 필요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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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진인(無碍眞人)-자유인으로 산다는 것l신앙관련 책읽기 댓글(0)
샬롬 l 2008-11-06 10:27
https://blog.aladin.co.kr/790414144/2389323

상처와 용서 -미니북 ㅣ 상처와 용서 -미니북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무애진인(無碍眞人)-자유인으로 산다는 것.
송봉모, <상처와 용서>, 바오로딸, 1998.
요즘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 별 일이다. 정말 많이 변했다. 작년 이후의 변화다. 그땐 중독이다 싶을 정도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대던 때도 있었다. 담배를 놓았을 때 나타난다는 금단 현상처럼 책을 며칠 읽지 못했을 때 왠지 갑갑하고 안절부절 하던 경험도 있다.
근데, 이젠 책을 안 읽는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나 속박되지는 않을 생각이다. 자유. 이것이 또한 자유다. 그때, 책에 미쳐 살 땐, 분명 강박이 있었다. 읽고, 또 읽은 것을 꼭 써 남겨야 한다는 강박. 이건 구속이다. 자유가 아니다. 근데도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그것은 내 ‘영혼의 느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참된 나의 자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헛된, 무상한 욕망에서 야기된 것임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런 욕망에서 많이 벗어나자 책 읽기도 그리고 그에 대한 글쓰기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더 이상 덧없는 그 명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규정짓기에 나를 구속시킬 필요가 없다. 본질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그럴 때 진정 자유를 느낀다.
요즘 그 자유가 좋다. 관계성에서 많이 벗어난 삶이다. 물론 인드라망적인 관계는 끝이 없겠지만, 그 그물에 걸려 허우적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 때에는 대전에 가서 은사 세미나에 참석했다. 호주 빅터 신부님이 지도하는 세미나였다. 느낌이 확 다르다. 서구의 신앙이 많이 식었다 하나 두텁기는 엄청 두텁다. 반면 한국의 그것은 뜨거우나 얇다. 큰 가르침,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흠뻑 느낀 좋은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 여기선 그 때 우연히 같은 방을 썼던 형제가 읽던 책 이야길 하려는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의 책 <상처와 용서>. 가만 보니 내가 예전에 송신부님 책을 읽은 바가 있다. 바로 이 책의 씨리즈 물이다. 성서와 인간 씨리즈인데 내가 전에 읽은 것은 <9 회심하는 인간>이고 이번 것은 씨리즈 1편이다.
책은 간단하다. 포캣북이다. 그러면서 쪽수도 135쪽밖에 안 된다. 그래, 진리는 단순한 것이지. 몇몇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사회학자들처럼 장황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짧아도 울림은 크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전체적인 주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는 그리고 받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가, 그런 만큼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담고 있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여러 번이라도 읽고 싶어진다.
상처 이야기와 함께 중요한 것은 용서다. 내 경우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처럼 한심하게 나를 단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송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고, 비그리스교적이다. 자기 멸시와 자기 학대에 빠질 때 우리는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단죄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랬나. 이번 대전에서의 세미나에선 처음 프로그램에서부터 나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이젠 이뤄졌기 때문인 모양이다.
유다와 다르게 “자신을 용서한 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일어섰다. 성서의 훌륭한 인물은 다 스스로를 용서한 자이다. 다윗,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 바로오 등.”
이런 예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셨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내가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부분은 5장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이다. 먼저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기대는 실망과 상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 기대는 안개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기대하면 안 된다.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자녀의 재능과 꿈을 먼저 헤아려 주며 자녀의 생이 완성되고 선이 자라기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고 자녀든, 친지든 친구이든 누군가에게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상처를 받겠다고 자처하는 꼴이라 한다.
평소 주변에 기대하고 사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이 그저 뜻 없이 한 사소한 행동에서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갖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멀리한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섭섭함은 상대가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상처들은 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해야 낫는다.
특히 친밀한 사이일수록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상처도 클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기대하고 상처받을 것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표현을 하라고 한다. 표현 없이 기대하다가는 상처만 키운다.
둘째는 추측하지 말라고 한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추측하면 오해와 상처를 낳는다.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건 전에 MBTI, 에니어그램 프로그램을 하면서 배웠다. 사람은 각각 다르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인정과 애정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환상 속에 산다. 존경받고, 인정받고,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이다. 나는 이 증세가 심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번 대전 세미나에서 나의 명예욕의 뿌리가 어디인가도 보았다. 그걸 파악하니 치유도 쉬워진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명예욕은 본성 아니겠냐고 물을 것이다. 송신부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송신부님은 대답은 다르게 끌어간다. 본성적인 것인가를 가만히 물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그리고 어떤 느낌이 오는가 점검해 보라. 만약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 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하다면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인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마음, 자유로운 삶이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정과 인정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가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는가를 찾고 그것을 치유해주어야 한다. 애정결핍에서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많다. 기도로 치유를 하여야 한다. 요즘 교회 안에 이런 치유를 위한 기회가 많음을 보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독하되 외롭지 않은 관계를 잘 만들어가야 한다. 홀로 있되, 사람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평소에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고독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다.
넷째는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전에 2등은 있을 수 없다’ 등의 태도는 모두 상처를 낳는 텃밭이다. 어떤 사람이 완벽한 명강의를 해서 청중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항상 그 상처의 텃밭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이젠 그렇게 살지 않는다. 송신부님은 여기서 예수님도 나자렛 회당에서 말 한 번 잘못해 매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다며 완벽한 강의, 강론에 대한 강박을 버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저 주님께 맡기고 강의하면 그뿐이다.
그래서 “반대자들의 갖은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는 드 멜로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명성에 연연하며 진리를 왜곡시키는 경우를 경고한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잘 나간다고 생각할 때 이처럼 헛된 길을 간 경우가 많았다. 명성에 연연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비하는 영성생활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자기비하를 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한다. 영성가들도 말하기를 악마가 가장 노리는 자는 1)두려워하는 자 2)분노와 악심을 품는 자 3)걱정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 4)자기비하를 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악마는 이런 성향을 더욱 부추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뒤집어 살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 것,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365회 반복된다고 한다. 2)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갈 것 3) 걱정, 죄책감에서 벗어날 것-기쁘게 살아가야 하겠다. 4)자기 긍정적으로 살 것. 결국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마귀가 접근을 못하겠다 싶다.
물론 자기애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자기애는 나누지만 이기주의는 받고 챙기기만 한다. 이런 자기 사람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다. 대전에서 그런 비슷한 이야길 들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본이라는 말. 자기 긍정성이 있어야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세계와 교감을 나누지, 결코 외부상황에 지배되지 않고, 왜곡된 죄의식이나 솔직하지 못한 합리화, 자기 변명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자기 신뢰가 있어야 다른 이들의 비판 앞에서도 인내하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의 기준에 맞춰 살면서 좋은 사람 소리 들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말라고 한다. 갈등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사실은 그 사람 안에 나의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그 그림자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내가 나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우리 안의 그림자가 주체가 되어서 행동한다면 우린 예민해진다. 내 안의 그림자가 나를 통제해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의식의 빛을 그 그림자에 비춰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더 하여 화, 갈등과 관련한 조언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셨다. 심하게 꾸짖기도 하셨고, 성전 앞의 환전상들의 물건을 뒤집어 엎어버리시기까지 했다. 이때 우리는 나의 부정적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화가 난다고 해도 그 화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니다. 이걸 떼어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감정과 나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면 휘말린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부분에 나를 전부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여유가 필요하다. 떼어놓는 여유. 매 상황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반응하면 평화를 잃는다. 하지만 선택하면 다르다.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한 훈련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인을 다시 생각한다. 원효 같은 무애인.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그 내면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하느님 품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 그것을 통해 만들어져 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