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하나, 온몸으로 번역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5.07.28
최혜리 기자
독일 국제문학상 시상식에 자리한 박술 시인. [사진 HKW]
현재 독일 힐데스하임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박술(39)은 철학자이자 시인, 그리고 번역가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던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독일로 혼자 유학을 떠났다. 독일과의 연(緣)은 훨씬 전부터, 일제강점기 독일 예수회 신부들을 사사(師事)한 철학자 친할아버지와 독일에서 공부한 물리학자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독일에 발을 딛고 나선 본격적으로 ‘이중언어 사용자’의 삶이 열렸다. 괴로운 유학길에 번역을 버팀목 삼았고, 어느새 체질이 됐다. 지난 3월에는 번역을 하며 몸에 새긴 감각을 담은 첫 시집 『오토파일럿』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가 지난 17일(현지시간) 독일 국제문학상 시상식에 섰다. 지난 2월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 독일어 번역본(‘Autobiographie des Todes’) 공(共)역자로서다. 매년 세계 현대문학의 뛰어난 작품 중 독일어로 번역된 첫 작품에 수여하는 이 상을 원작자 김혜순과 공역자인 시인 울리아나 볼프·박술이 함께 받았다. 첫 아시아인 수상이자, 시 장르 첫 수상이다. 심사위원단은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꼽으며 “출발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달되는 탁월한 번역”이라고 극찬했다.
『죽음의 자서전』은 김혜순의 열두번째 시집으로, 한국에서 2016년 출간됐다. 죽은 자의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시간인 불교의 ‘사십구재’에서 착안, 죽음에 관한 마흔아홉 편의 연작시로 구성됐다. 국제문학상 심사위원 데니즈 우틀루는 “이 시들은 기적이다. 저승의 문턱에서 만들어지는 울림을 그대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평했다.
지난 21일 독일에 거주 중인 박술 시인과 서면으로 만났다. 김혜순 외에도 김소연·김리윤 등 한국 시인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그는 “시쓰기와 번역은 몸으로 언어를 옮기는 일”이라고 했다.
『죽음의 자서전』 번역은 어떻게 시작됐나.
“2022년쯤 독일 시인들 사이에서 『죽음의 자서전』 영어 번역본이 많이 읽혔다. (독일 문단에서) 한국 시가 주목 받는 경우를 처음 접해, 바로 번역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마침 영어 번역을 맡은 최돈미 시인과 친분이 있던 울리아나가 독어 번역 공역자를 찾고 있었다.”
한국어판 『죽음의 자서전』 표지. [사진 문학과지성사]
2019년 출간된 최돈미 시인의 영어 번역본은 길잡이가 돼줬다. 박술 시인은 “한국어 원문보다 구어체에 가깝고, 언어의 맛을 살린 영어 번역본의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다. 소설과 달리 시의 번역은 어조와 음색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더 감각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공역의 과정은 어땠나.
“둘 다 시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이미지와 발음 등을 종합적으로 느끼고 더 맞는 감각을 설계하려 했다. 시에 나오는 수많은 의성·의태어들을 입으로 말해보고, 귀로 들어보고,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며 옮겼다.”
독일어판 『죽음의 자서전』 표지. [사진 문학과지성사]
한국 시를 독일어의 자연스러운 문장 구조에 맞춰 번역하기란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죽음의 자서전』 속 열여섯번째 시, ‘나체’는 이렇게 시작한다.
“네 온몸을 네가 모르는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맑음이 도착했다/오르가슴에 빠진 눈동자 같은 맑음이 이불을 들치고 도착했다/꿈과 같은 화학기호를 가진 너의 영혼의 거처에 꿈과 같은 화학기호를 가진 맑음이 도착했다/저녁을 굶은 저녁의 맑음이 도착했다.”
4행 모두 주어가 ‘맑음’이다. 독일어 문장은 주어가 맨 앞에 오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에 맞춰 번역하면 ‘어떤 맑음이 도착했는데, 그 맑음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모든 것을 너는 모르고 있다’라는 식이 된다. 박술 시인은 “이 번역으로는 길고 긴 수식어를 통과해 겨우 쥘 수 있는 ‘맑음’의 드라마틱한 효과가 사라져버린다. 고민을 거듭하다, ‘도착하다’라는 중요한 동사를 빼고, 시제도 바꾸고, 순서를 다시 뒤집었다”고 했다.
그래서 탄생한 첫 문장의 독일어 번역은 이렇다. ‘Sie kennt deinen Körper, alle innersten Winkel, die du nicht kennst – diese Klarheit’ 이를 다시 한국어로 대략 옮겨보면 ‘그것은 네 몸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 네가 모르는 곳까지도 - 이 맑음은’이 된다.
앞으로의 계획은.
“첫 시집을 낸 이후 꾸준히 시를 쓰고 있다. 철학 쪽은 좀 더 야심이 있다. 한국철학이라는 분과를 유럽에서 새롭게 구축해보고 싶은 생각이다. 이곳에서 한국철학은 한국 시보다도 훨씬 더 척박하기 때문이다.”
최혜리 기자 choi.hyeri@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54656
“번역은 죽은 사람과의 대화”… 詩를 번역하는 철학자[오경진 기자의 노이즈캔슬링]
입력 :2024-07-12 01:11:41
수정 :2024-07-14 23:59:42
<20>86년생 번역가·철학자 박술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시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결국 시와 철학의 목표는 같아

본인 제공ⓒJiangyue Guo
지금도 시를 쓰곤 있지만 더욱 신경을 쏟는 일은 시 번역이다. 독일 힐데스하임대 철학과 조교수로 강단에도 오르며 시와 철학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11일 그와 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범상치 않은 첫인상 뒤로 그가 살고 있는 뮌헨의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이 책을 소화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에 번역자의 욕망이 숨어 있다. 동시에 번역은 죽은 사람과의 대화로 일종의 ‘빙의’인 것 같기도 하다. 엄청 중독적이다.”
독일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할아버지를 비롯해 가족 전체가 독일과 연이 깊었다.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서일까. 고1 때 혈혈단신 독일로 훌쩍 떠나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주한독일문화원에서 한 달간 배운 독일어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언어에 재주가 있어 큰 무리는 없었다.
놀라운 건 지금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개수다. 한국어·독일어·영어를 기본으로 일본인 아내 덕에 일본어도 읽을 수 있으며 산스크리트어도 사전과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한문에도 꽤 조예가 깊어 중국어 텍스트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많이 까먹긴 했지만 학창 시절엔 히브리어도 읽을 줄 알았단다.
“한국 문학이 이렇게 주목받은 건 처음이었다. 독일 문학 세기의 명연설로 꼽히는 파울 첼란의 ‘자오선’(1960년 뷔히너상 수상연설)에 비긴다고 현지 언론이 말할 정도였으니. 낭독회에도 100명 넘게 모였다. 시 번역을 더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다.”
박술은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시 페스티벌에서 김혜순 시인이 ‘혀 없는 모국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낭독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이때 시를 독어로 옮겼던 인연으로 박술은 독일의 시인 울리아나 볼프와 함께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을 독일에 소개할 기회를 얻었다. 얼마 전 원고를 다 넘겼고 내년 초 현지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현지 유력 출판사와 상당히 좋은 조건에 계약했다”고 귀띔했다. 올해는 시인 김현과 황유원이 초청됐는데, 이들의 시도 박술이 옮겼다. 김혜순 이후 독일에서 한국시의 물꼬가 터진 것. 박술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어는 주어가 없어도 말이 된다. 독어에선 아니다. 주어를 슬쩍 없애도 동사 변화에서 들통이 나니까. 난감할 때가 많다. 한번은 김혜순 선생님께 한 문장을 보여 주며 ‘이건 몇 인칭입니까’ 물었더니 ‘6인칭이나 7인칭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하시더라…. 결국 번역자인 나의 선택이었다.”
학부부터 박사까지 철학을 공부했다. 비트겐슈타인과 니체에 탐닉했던 세월이었다. 올해 카프카 100주기를 맞아 이달 초에는 ‘위로 없는 날들’(다)이라는 그의 ‘파편집’을 한국어로 펴내기도 했다. 파편집이라는 말은 다소 낯설지만, 책을 열어 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알게 된다. 소설도 일기도 아닌 것이 잠언 같기도 하고…. 짧고 알쏭달쏭하면서도 매혹적인 문장 109개가 수록됐다. 이거, 혹시 시 아닌가.
“철학과 시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걸 ‘언어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니 형식이 해체되고 글이 파편화되겠지.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시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그런데 개념과 이미지는 모두 언어로 포섭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론과 실존에 더해 미학까지 품은 시와 철학의 목표는 결국 같다.”
오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