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2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유상용
승인 2012.03.20 11:20
조회수 3,014
*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도시락 가게에서





















타케시 아저씨와 쿄코 아주머니 집에 초대 받아서. 좌로부터 해원, 나리, 승민, 해인





















모토야마상 댁에서 중간 미팅 겸 저녁식사





















지역의 청년들과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이요다상 부부와 함께







- 강화시선 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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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유상용
  •  승인 2012.03.20 11:20
  •  조회수 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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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도시락 가게에서

 

 

 

 

 

 

 

 

 

타케시 아저씨와 쿄코 아주머니 집에 초대 받아서. 좌로부터 해원, 나리, 승민, 해인

 

 

 

 

 

 

 

 

모토야마상 댁에서 중간 미팅 겸 저녁식사

 

 

 

 

 

 

 

 

 

 

지역의 청년들과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이요다상 부부와 함께

 

 

 

- 강화시선 2호 -

 

유상용

유상용

손가락질하며 떠난 이들 원망 대신 자기성찰 했다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손가락질하며 떠난 이들 원망 대신 자기성찰 했다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손가락질하며 떠난 이들 원망 대신 자기성찰 했다

등록 2017-05-31 10:32수정 2017-05-31 10:46
조현 기자 사진
조현 기자

[대안공동체 탐방] 조현의 공동체마을 체험기
⑪ 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곳


가스가야마 낙농부.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의 본부 격인 도요사토는 애즈원에서 차로 불과 20~30분 거리에 있었다. 애즈원에서 방문자들을 담당하는 이치가와 겐이치가 차로 도요사토까지 바래다주었다. 이치가와는 도요사토에서 나온 지 7년 만에 도요사토에 처음 들어온다고 했다. 야마기시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조차 중년을 넘겨 광야로 나갈 수밖에 없을 만큼 야마기시는 숨쉬기 어려운 공동체가 된 것일까.


도요사토는 한때 3천명이 사는 세계 최대 공동체의 명성에 걸맞은 위용을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다. 대학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 못지않게 잘 지어진 건물들과 아름다운 정원, 거대한 소 사육장과 야외 경기장, 대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야마기시에서 떨어져 나와 인근 스즈카에 만들어진 애즈원커뮤니티가 이제 막 출발한 신생 중소기업이라면, 도요사토는 굴지의 기업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도요사토에 사는 이는 이제 500명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한때 세계 전자업계 선두였던 소니의 몰락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소니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과연 야마기시는 어떨까.

야마기시 공동체는 야마기시 미요조(1901~61)가 양계장에서 발견한 상생의 원리를 깨닫는 ‘야마기시즘 특별강습 연찬회’로 출발했다. 이후 이런 깨달음을 삶에서 실현해보자는 ‘실현지’가 1961년 가스가야마에 탄생했다. 야마기시 미요조는 1961년 사망했지만, 실현지는 전세계로 퍼져나가 일본, 스위스, 브라질, 타이,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50여곳에 만들어졌다.

이상사회 실험의 모델로 여겨지던 야마기시는 밀레니엄인 2000년 전후 큰 위기를 맞는다.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부터 찾아왔다. 1995년 아사하라 쇼코 교주의 옴진리교가 일본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13명의 사망자와 5000명의 중경상자를 낳은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일본에선 공동체생활을 하는 유사종교집단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야마기시는 어떤 종교 교리나 신념 또는 아집이 없는 ‘고정되지 않는 전진’을 주창했지만, 일반인들에겐 유사종교단체와 달라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때 세계 최대 공동체 야마기시
개인 욕구 수용 못하고 소통 안돼
3천명 공동체 5백명으로 줄어
갈곳 없는 노인들이 주로 남아



속마음 털어놓는 연찬 되살려
권력화했다던 조정위원들도 민의수렴
얼마남지않은 젊은층들 즐겁게



야마기시 떠난 동료들도 돕는 배려
외부의 차가운 시선도 달라져
거센 우환 지나 여유 평화 넘쳐



지난 2009년 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3부작엔 신흥종교집단 ‘선두’와 후카다 교주가 나온다. 후카다 교주는 암살기술자 아오마메에 의해 호텔방에서 미세한 침에 찔려 살해된다. 후카다는 암살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죽음을 맞을 만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1Q84>가 나온 뒤 신흥종교집단 ‘선두’의 모델이 야마기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키의 와세다대 스승으로 알려진, 니지마 아쓰요시 교수가 도요사토 공동체에 입회한 것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니지마 교수가 사망한 후에도 부인은 지금까지 도요사토에 살고 있다.

사린가스 사건 이후 공동체에 대한 매스컴의 비판 기사가 늘었다. 야마기시는 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모아 함께 양육했다.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공복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니시요법’에 따라 초등학생들한테도 아침을 먹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아이들을 억지로 굶기는 아동학대라며 집중 부각되고, 야마기시를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러자 그 전까지 야마기시의 유기농 제품을 공급받으려 읍소했던 유명 백화점들이 태도를 바꿔 야마기시 제품 판매 코너를 일제히 폐쇄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거품경제가 무너져 세수 확보가 절실했던 세무당국은 야마기시 참여자들의 기부나 무보수 노동을 탈세로 간주해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야마기시 이후 공동체를 이끌던 스기모토 도시하루가 1999년 도요사토의 포도밭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야마기시 공동체가 무려 수백억엔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이 알려졌다. 스기모토가 공동체를 성장시킨 주역이긴 했지만, 공동체원들의 자유를 제약하며 지나친 내핍생활로 이끈 것이 아니냐는 내부 비판도 제기됐다.

가장 비판적인 이들은 야마기시 안에서도 엘리트로 꼽히는 이들이었다. 야마기시즘 특강회를 이끌거나 사상과 교육, 방향을 결정하던 이들이 2000년 ‘야마기시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이탈해 시작한 게 스즈카의 애즈원이다. 이후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졌다. 더구나 처음 공동체에 들어올 때 전재산을 냈던 이들이 그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까지 간 소송에서 처음 낸 재산의 3분의 1 정도를 돌려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를 두고 야마기시 사람들은 공동체의 방향과 정책을 결정하던 주역들이 자성은커녕 공동체를 비난하고 나갔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도요사토 공동체 정원.그런 태풍이 휩쓸고 간 도요사토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노인 세대가 많이 남았지만, 자포자기나 남은 자의 비감은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이 보이는 드넓은 도요사토 공동식당의 분위기와 음식도 어느 고급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았다. 다만 자신이 먹을 만큼 가져다 먹고, 설거지를 스스로 하는 게 다를 뿐이었다. 외부의 비판 이후 아이들에게도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고 먹이는 등 공동체 내 변화는 뚜렷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축사의 현대화였다. 도요사토에선 ‘와규’로 유명한 흑소 3천마리를 기르고 있는데, 사람 손이 가지 않아도 되도록 모든 사육과정을 자동화했다. 고령사회 일본에서도 더욱 고령사회가 돼 젊은 노동력이 부족한 공동체에서 앞으로도 생산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자동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오늘날의 야마기시 공동체에는 ‘잘나가던’ 과거와 달리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 도요사토엔 노동력의 주축인 20~50살이 51명이다. 따라서 이들의 일 부담이 적지 않다. 이들이 우리 돈 10만원에 불과한 1만엔의 용돈을 받으며, 개인적 자유를 구가하기는 쉽지 않은 게 이곳의 삶이다. 그러나 윗세대를 무조건 따르라는 게 예전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귀한 몸’이 된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가 크게 달라졌다.



도요사토 공동체 직판장을 책임지고 있는 윤성준씨.경기도 화성 야마기시 마을에서 자라 2009년부터 도요사토에 살고 있는 윤성준(43)씨는 “젊은이들이 너무 외롭지 않게 함께 모여 일하게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스위스계 일본인 공동체원 가지야마 하이디(25)와 결혼한 윤씨는 도요사토 정문 앞에 지역민들을 위해 2014년 문을 연 직판장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 윤씨는 “고가의 유기농보다는 지역 먹거리 정도로 만족하는 게 요즘 일본의 분위기여서 공동체에서도 유기농이 아닌 일반 농축산물을 생산하지만 유통마진 없이 저가에 판매해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야마기시에 대한 외부의 편견도 다시 누그러지고 있는 셈이다. 직판장은 시내와는 떨어져 있는데도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도요사토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최초의 야마기시 공동체 가스가야마의 사육장에서 일하는 야마사키 아키히사(32)도 “같은 또래 4명이 밤이면 자주 모여 술도 마시면서 스포츠와 영화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매사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연찬’을 통한 ‘무고정 전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탈자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제기한 것이 이 연찬이다. 형식만 남고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의사 결정을 하는 ‘조정위원’이 권력을 쥐고서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등의 개인적 욕구를 수용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스가야마 식생활부에서 연찬하는 공동체원들.그런데 가스가야마 공동식당에서 일하는 10명이 모여 진행하는 식생활 연찬을 보니,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점심 200명분, 저녁 240명분의 메뉴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유쾌하게 논의했다. 다음날 인근 학교 운동회에 군고구마를 가져다주자는 제안과 단풍축제의 이동판매소에 ‘나도 가보고 싶다’는 바람도 나왔다. 집을 옮기고 싶다고 신청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거나, 남자들이 숙소 1층에서 담배를 피워 연기가 올라와 싫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한 여성은 “몸이 좋지 않아 4일간 일을 쉬었는데 내일부터는 나오겠다”고 말하며, “예전엔 쉬고 싶거나 뭔가 하고 싶어도 분위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거의 마음을 꺼내고 있다”고 했다.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야마기시에 합류해 일본인 남성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오상순(57)씨도 도요사토의 조정위원이다. 조정위원은 도요사토에서 6개월마다 10명이 뽑힌다. 오씨는 “공동체 인터넷을 통해 하루 수십통의 크고 작은 제안이 들어온다”며 “자신의 제안이 거부당해도 다시 제안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고 했다. 공동체가 개인적 욕망 실현의 장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곳인 만큼 모든 욕구를 다 수용할 수는 없지만, 좀더 개인과 사회의 욕구의 조화를 위해 더 애쓰게 된 것이다.



가스가야마 공동체 식당.

가스가야마의 기타오지 요리노부.

가스가야마에서 만난 기타오지 요리노부(65)는 고교 시절 학생운동의 리더였다. 당시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갇힌 그는 “오히려 밖에서 느끼지 못하는 자유를 감옥에서 느꼈다”며 18살에 야마기시에 합류했던 계기를 전했다. 야마기시는 외형상 지도자를 내세우지 않지만 기타오지는 스기모토 이후 주요 지도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도쿄대 출신들을 비롯한 야마기시의 우수한 인재들이 스즈카로 빠져나갔는데, 그들이 내게도 함께 갈 것을 권유한 걸 보면, 나도 우수한 인재인 모양이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우수한 분들이 빠져나간 이곳엔 갈 곳 없는 노인과 장애인들이 많고, 화가 나면 자기 분뇨를 벽에 칠하는 분도 있다. 나는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다”

애즈원은 구태에 빠진 야마기시를 비난하며 나갔지만, 오히려 야마기시에선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이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애즈원 같은 곳이 곳곳에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초기 경제적 자립에 고심하는 애즈원이 만든 비료공장의 비료를 사주며 자립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거센 태풍이 야마기시를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신생 커뮤니티 애즈원이 신선한 생기로 반짝인다면, 야마기시 공동체엔 성숙한 여유와 평화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끝>

도요사토·가스가야마(일본)/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연재조현의 공동체마을 체험기

백승종 장일순

백승종

21 February 2021
무위당 장일순, 물질 만능의 세태를 질타하다

장일순(1928~1994)은 평생 단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서양의 종교와 고전에 두루 해박하였고 특히 노자(老子)를 믿고 따랐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의 이 말씀 따라서 그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을까.
당호 ‘무위당(无爲堂)’이 상징하듯,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실은 일평생 그가 종사한 일이 여럿이었다. 약자를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였다.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그가 노심초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재사였다. 
장일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우나, 굳이 말하면 ‘생명사상가’요 20세기 이 땅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이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식자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언행일치에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장일순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자 했다. 그는 세속(朝市)에 숨은 ‘대은(大隱)’이요, 난세의 ‘대현(大賢)’이었다. 

교육사업과 민주화운동을 넘어 

일제 말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점령군인 일개 미군 대령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나왔다. 장일순은 이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다. 6ㆍ25전쟁 직후에는 도산 안창호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고향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때아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교육자 장일순의 삶을 망가뜨렸다. 군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를 3년간이나 옥에 가두었다. 평소 장일순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중립화’론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형기를 마친 장일순은 1963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 복귀하였는데, 이번에는 독재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걸려 사회활동이 금지되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도 그는,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고향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1년 10월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흥기를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2년 뒤에는 홍수로 재난을 입은 강원도민을 구제하고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민청학련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꾀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였다. 

생명 사상으로 

그의 삶에 일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1977년이었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 그는 일체의 사회운동을 공생의 원리에 따른 ‘생명운동’으로 전환했다. 1983년에 그는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를 위한 ‘한살림’이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생명 사상의 원류였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기념비를 원주에 세웠다.
말년의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주제로 숱한 강연회를 열었다. 노자에 정통했던 그였기에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풀이했다. 이현주 목사는 그 내용을 정리해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달 지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장일순은 영영 눈을 감았다. 
돈에 환장한 세상!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세태를 그렇게 비판했다. “돈이 기준이 돼 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 되는 거라.”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학문이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장일순은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이런 사태는 종국적으로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비극을 빚게 될 것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 해요.” 장일순은 장차 현대문명과는 정반대되는 새 문명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밥 한 사발에 우주가 담겨 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니, 개체와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만물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이 본질적인 과제로 부각될 터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생태계의 질서가 되살아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장일순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밥 한 사발이 되려면, 많은 농부가 땀을 흘려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어야만 밥 한 사발의 농사가 이뤄진다.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생전에 장일순이 자주 언급했듯,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일렀다. 이때 하늘은 사람을 비롯해 곡식 한 알, 돌멩이나 버러지 하나까지도 포함한다. 모두가 하늘이며, 그 하늘이 서로를 극진히 위해야 평화도 정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의 장일순 사상의 중심이다. 

노자의 삼보(三寶)를 실천하며 

우주 만물이 내 한 몸이라는 생각은 노자에게서도 발견된단다. 장일순은 그렇게 보았다. 하여, 그는 노자의 ‘삼보’를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자애 곧 사랑이다. 어머니가 객지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듯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검약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모든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쓰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고, 장일순은 주장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다들 빚 살림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나라도 가계도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더러 지하의 장일순은 과연 뭐라고 일갈할 것인가. 
셋째는 겸손이다.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장일순의 비유는 곧 생명과 진리의 본바탕에서 사물과 나의 관계를 세우자는 뜻이다.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어지러워진 남북문제도 우리는 풀 수 있겠다.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 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 현대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장일순의 쩌렁한 목소리가 아직 귓전에 남아 있다.

출처: 백승종 ,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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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3 April 2018
  · Pyeongtaek, South Korea  · 
생명운동가 장일순, 농촌 살리기 노력에 반독재 투쟁 앞장

장일순(張壹淳, 1928~1994, 호는 无爲堂)은 평생 단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동서양의 종교와 고전에 두루 해박하였다. 특히 노자(老子)를 믿고 따랐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의 이 말씀 따라서 그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을까.
당호 ‘무위당(无爲堂)’이 상징하듯,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실은 일평생 그가 종사한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약자를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였다.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그가 노심초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재사였다.
장일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굳이 말하면, ‘생명사상가’요, 20세기 이 땅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식자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언행일치에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장일순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자 했다. 그는 세속(朝市)에 숨은 ‘대은(大隱)’이요, 난세의 ‘대현(大賢)’이었다.

교육사업과 민주화운동을 넘어
일제 말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점령군인 미군의 일개 대령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나왔다. 장일순은 이를 극력 반대했다가 제적되었다. 6ㆍ25전쟁 직후에는 도산 안창호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고향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때 아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교육자 장일순의 삶을 망가뜨렸다. 군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를 3년간이나 옥에 가두었다. 평소 장일순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중립화’론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형기를 마친 장일순은 1963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재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시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걸려 사회활동이 금지되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도 그는,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고향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1년 10월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흥기를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2년 뒤에는 홍수로 재난을 입은 강원도민을 구제하고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민청학련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꾀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였다.

생명사상으로

그의 삶에 일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1977년이었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 그는 일체의 사회운동을 공생의 원리에 따른 ‘생명운동’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1983년에는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를 위한 ‘한살림’이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생명사상의 원류였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기념비를 원주에 세웠다.
말년의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주제로 숱한 강연회를 열었다. 노자에 정통했던 그였기에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풀이했다. 이현주(1944-) 목사는 그것을 정리해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달 지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장일순은 영영 눈을 감았다.

돈에 환장한 세상!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세태를 그렇게 비판했다. “돈이 기준이 돼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 되는 거라.”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학문이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장일순은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이런 사태는 종국적으로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비극을 빚게 될 것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 해요.” 장일순은 장차 현대문명과는 정반대되는 새 문명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밥 한 사발에 우주가 담겨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니, 개체와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만물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이 본질적인 과제로 부각될 터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생태계의 질서가 되살아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장일순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밥 한 사발이 되려면, 많은 농부가 땀을 흘려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어야만 밥 한 사발의 농사가 이뤄진다.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생전에 장일순이 자주 언급했듯,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일렀다. 이때 하늘은 사람을 비롯해, 곡식 한 알, 돌멩이나 버러지 하나까지도 포함한다. 모두가 하늘이며, 그 하늘이 서로를 극진히 위해야 평화도 정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의 장일순 사상의 중심이다.

노자의 삼보(三寶)를 실천하며

우주만물이 내 한 몸이라는 생각은 노자에게서도 발견된단다. 장일순은 그렇게 보았다. 하여, 그는 노자의 ‘삼보’를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자애 곧 사랑이다. 어머니가 객지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듯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검약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모든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쓰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고, 장일순은 주장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다들 빚 살림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나라도 가계도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더러 지하의 장일순은 과연 뭐라고 일갈할 것인가.

셋째는 겸손이다.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장일순의 비유는 곧 생명과 진리의 본 바탕에서 사물과 나의 관계를 세우자는 뜻이다.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난마처럼 어지러워진 남북문제도 우리는 풀 수 있겠다.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현대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장일순의 쩌렁한 목소리가 손에 잡힐 듯하다.

* 이 글은 제 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의 한 대목입니다. 장일순 선생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에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백승종 拜



[Sejin님의 서재] 백승종 책

[Sejin님의 서재] 백승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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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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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ook]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그들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2012년 11월
  • [eBook] 조선의 아버지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진정한 아버지 다움 / 2016년 11월
  • [eBook] 세종의 선택- 사람을 살찌우고, 인재를 발탁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 / 2021년 7월   
  • [eBook]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 2019년 9월
  • [eBook] 선비와 함께 춤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비 정신을 찾아서 / 2018년 5월
  • [eBook] 신사와 선비- 오늘의 동양과 서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사우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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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주의 역사강의- 근대와 국가를 다시 묻는다/ 2017년 5월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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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는
한국전쟁 이후 56, 57년에 북한으로 파견된 동독 건축가 레셀의 사진 모음집





13 공동체를 넘어 무소유 마을로 < 한국농정신문

공동체를 넘어 무소유 마을로 < 기획 < 기사본문 - 한국농정신문



공동체를 넘어 무소유 마을로
대안적 삶을 찾아서 화성의 산안마을

현재위치기획 입력 2013.07.07 21:58
수정 2014.03.03

몇 해 전에 서울대학교 대입 논술고사에 한 마을이 소개된 적 있다. 꽤 긴 지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1953년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즈가 제창한 공동체 운동을 야마기시즘이라고 부른다. 야마기시즘이 꿈꾸는 공동체는 한마디로 ‘돈이 필요 없는 사이좋은 마을’이다. 1958년 일본에 야마기시즘 공동체가 처음 탄생한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해 스위스, 브라질,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세계 각국에 40여 개가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환경 친화적 농법으로 먹거리를 생산한다. 우리나라에는 1984년에 최초로 야마기시즘 공동체가 생겼다. 이 마을의 홈페이지에는 “모든 생활과 경영을 일체 생활, 일체 경영, 일체 사회로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양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함께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양계장이나 공동체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태만을 본 오해이고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은 급료나 분배가 없는 일체 생활 속에서 사이좋게 즐겁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저희 자신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밝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뀌기를 염원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마을은 무엇보다 무소유(無所有)를 삶의 근본 가치로 삼고 있다. 무소유는 공동소유와 다르다. 이들은 마을의 재산도 주민들의 공동소유물로 보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태양과 공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도 그러해야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냥 존재할 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마을 공동체의 무소유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은 돈이 필요 없는 사회이며, 필요한 물건은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야마기시즘 공동체가 물건을 필요로 할 때에도 물론 무료로 공급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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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안마을 사람들은 연찬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이용, 이웃과 소통한다.이 지문을 읽고 학생들이 어떤 내용의 답을 썼는지 궁금하지만, 그것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마을은 언제라도 찾아가 볼 수 있는 화성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마을의 역사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발안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얼마 가지 않으면 화성군 향남면이 나온다. 그곳 구문천리라는 동네에 바로 산안마을이 있다. 10여 가구쯤이 모여 사는 마을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과 각양각색의 꽃들이 가득 심겨 있어 온통 꽃밭이다. 농장이자 거주지인 마을 입구에는 안내문이 서 있는데, ‘야마기시즘 실현지 영농조합법인’의 명의이다.

마을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면, 10여 동의 양계축사가 늘어서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생활집과 식당, 작업공간, 마을회관 등이 모여 있다. 여느 양계장보다 상당히 깨끗하다는 느낌과 놀랍게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양계장의 규모는 보통의 양계로 치면 이십만 마리를 키울 수 있는 크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라는 닭은 삼만 여 마리다. 그만큼 닭들의 사육 여건이 남다르다.

야마기시즘이라는 말이 일본말이라 낯설게 들리기는 한다. 야마기시(山岸)라는 일본 사람의 이름에 이즘을 붙여 일종의 이념처럼 들리는데 그다지 복잡한 사상체계는 아니다. 물론 복잡하지 않다고 해서 깊이가 옅은 것은 아니다.

창시자인 야마기시는 청소년 때부터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하나 되어 사이좋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고 여러 사상을 섭렵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닭을 키우던 야마기시에게 인생의 전기가 된 것은 1950년에 불어 닥친 태풍 때문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들판의 벼가 다 쓰러졌는데 한쪽 논에서만 벼가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것을 한 농촌 보급원이 발견한 것이다. 신기해서 누구 논인지 알아보니 그 곳이 바로 야마기시의 논이었고, 그의 농사법과 양계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농촌 보급원은 야마기시를 설득하여 농사법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게 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야마기시의 양계법에 공감하다가 점차 이러한 양계법을 낳은 독특한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즉, 이상사회와 인간성 회복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주삼라만상이 하나다’, ‘나 아닌 것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 ‘무소유 일체 사회’, ‘교육이 아니라 함께 배우며 성장한다는 점에서 학육이다’ 등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1956년 교토의 한 절에서 162명이 모여 야마기시즘 특별 강습 연찬회가 처음으로 열렸고 이 강습은 매월 2회씩 개최되었다. 1958년, 7월 야마기시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일본 미에현 가스가야마라는 곳에서 일체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야마기시즘 실현지'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다. 현재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 스위스, 브라질, 타이,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8개국에 걸쳐 있다.


우리나라에서 야마기시즘 특별 강습 연찬회가 시작된 것은 1966년이었다. 현재 영농법인의 대표이자 마을의 촌장 역할을 하고 있는 윤성렬 씨의 아버지가 1965년 일본 가스야마 세계중앙실현지에서 연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야마기시즘은 당국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일단 조사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자꾸 모여서 이상사회니 무소유니 하는 이야기를 하니까 당국에서 이상하게 볼만도 했지요."

그는 전직 교사다. 젊은 시절, 이상적인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데 모든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실패와 온갖 역경을 거친 끝에 1984년 지금의 자리에 실현지를 마련했다. 그들은 야마기시즘 생활을 하는 곳을 실현지라고 부른다.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곳이란 뜻이다.

산안마을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개인의 소유는 물론이고 공동체의 소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 아예 필요 없는 세상을 이들은 실현하고자 한다. 한편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부하며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꿈꾼다. 이러한 목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 야마기시즘 실현지 영농조합법인 안내문이 서 있는 산안마을 입구.무소유와 풍요를 함께 꿈꾸다



산안마을에서 개인은 가진 게 없지만 공동체가 가진 것은 적지 않다. 5만여 평의 농장에서 일년에 십억이 훨씬 넘는 수입을 올린다.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는 재정은 양계를 통해 마련하는데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독특한 양계법을 통해 맛있는 유정란을 생산한다. 비법은 닭도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하며 키우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닭을 사람 대하듯 한다.

닭장 안으로 들어가 사료를 주거나 알을 꺼낼 때 닭들에게 노크를 하거나 양해를 구한다. 말없이 들어갈 때는 ‘안녕’하고 눈짓으로라도 인사를 건넨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야 양계를 할 자격이 있다는 심성과 철학으로 양계를 하기 때문에 닭들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

옴짝달싹 못하게 가둬 키우는 보통 양계장의 닭들과 달리 아주 건강하다. 그렇게 닭의 생명을 존중하며 키워서 그런지 이곳 닭이 낳은 유정란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시중에서 팔리는 계란보다 3배 가량 비싸지만 한번 먹어본 사람은 대부분 이곳의 계란을 다시 찾게 된다고 한다. 야마기시 양계법을 배워서 그 방식대로 닭을 키우는 농부들이 전국에 여럿 생기기도 했다.

산안마을은 유정란을 팔아서 번 돈으로 의식주 등 필요한 것을 모두 공동체에서 해결해 준다. 개인에게는 한 달에 5만원정도의 용돈이 주어지는데 이 돈으로 책을 사고 영화를 보고 바깥 음식을 사먹기도 한다. 돈이 더 필요하면 더 달라고 하면 되고 큰돈이 드는 물건이 필요할 경우에는 마을 회의에서 논의를 해서 결정한다.

양계와 함께 마을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일은 서로 나눠서 한다.

일은 생활 부문과 생산 부문으로 나뉘는데, 생활은 가정이고 생산은 일터라고 할 수 있다. 생활 부문에는 식생활부, 의생활부, 주생활부, 학육 부문이 있고, 생산부문에는 양계, 채소, 공급 부문이 있다. 일은 가능하면 전문화, 분업화를 하려고 하는데 돌아가면서 일을 하면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던 일만 계속하면 타성에 젖을 수가 있어서 이곳 사람들은 6개월마다 자신이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아이들도 함께 키운다.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모두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낳은 부모가 데리고 키우지만 초등학교 2학년을 전후해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진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을의 모든 어른들을 부모처럼 여기며 호칭도 엄마, 아빠라고 한다.

비슷한 뜻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도 아닌 남남인 사람들이 항상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우리들은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그 때문에 그 조직을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산안마을에는 그렇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게 만드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것은 연찬이라는 독특한 방식이다.

"연찬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의지의 바탕에서 스스로 사는 법, 인생관, 일상의 생활이나 사회생활 등, 인생의 모든 주제에 관하여, 모두의 지혜를 모아 모두와 함께 진리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연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집을 버리는 것이다. 연찬을 할 때 야마기시 사람들은 상식, 선입관, 고정관념 등에서 벗어나 모두가 사이좋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안을 찾고자 한다. 사람들이 다투는 것은 각자 다른 경험을 가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만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그 판단이 맞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서로 싸운다.

산안마을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다르게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만이 아닌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다. 그렇게 연찬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모두와 사이좋게, 건강하게, 물자가 풍요롭고, 정이 가득한 쾌적한 마을을 만들어가는 일은 어떤 것이고, 그를 위해 자신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을 그들은 연찬생활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서 들어와서 거주하는데 특별한 자격은 없다. 하지만 일단 야마기시즘 회원이 되기 위해선 무소유의 삶에 동의해야 한다. 이것을 참획이라고 하는데, 마을에서 거주하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야마기시즘회에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14박 15일로 진행되는 연찬학교를 마쳐야 한다.



산안마을은 자신들이 꿈꾸는 무소유와 일체생활의 이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공동체 바깥과의 소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벌이는 무소유 체험마당인 '초록축제', 어린이들이 산안마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어린이 낙원촌', 국내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워크캠프, 한일 대학생 교류 모임인 '테손', 청년들이 산안마을에서 한 달 동안 살아볼 수 있는 생활체험 등이 그러한 프로그램이다.

돈이 필요 없고 이웃들이 사이좋게 어울려 사는 마을이 곳곳에 만들어지고 지구촌 전체가 그런 공동체 마을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은 허황된 것일까? 산안마을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꿈은 또 다른 세상을 염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최용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