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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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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작가 정보
본명김영일(金英一)
출생1941년 2월 4일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목포부
사망2022년 5월 8일(81세)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시
국적대한민국
직업시인, 작가
학력서울대학교 미학 학사
경력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원광대학교 석좌교수
본관김해
종교천주교(세례명: 프란치스코)
필명호(號) 지하(地下)
활동기간1969년~2022년
배우자김영주
자녀김원보(장남), 김세희(차남)
친지박경리(장모), 정일성(외숙부)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는 대한민국시인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1]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2]토지》를 집필한 소설가 박경리의 사위이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저항하여 투옥됐다. 1980년부터 동서양 철학과 한국 전통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 사상'을 제창하였다. 시집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시삼백』 등이 있고 회고록 『흰 그늘의 길』과 저서 『김지하 사상전집』이 있다.[3]

생애

유년기

1941년 3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경파(京派) 24세손이며,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익금리에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다. 증조부 김영배(金永培)가 암태도(岩泰島)에서 투전판에 얽힌 싸움으로 가족을 데리고 당시 동학 대두령이었던 사촌 형 김인배(金仁培)가 살고 있던 옛 고향 김제로 이주하였다. 이후 증조부는 사촌 형 조직에 들어가 갑오년 광양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고 영광 법성포로 피신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부는 법성포에서 거주하다가 목포에 정착하였다. 역전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 포목 장사서 기계 수선까지 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가 골패로 재산을 날렸다. 아버지 김맹모(金孟模)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전기기술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목포에서 전기 기술자로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기술을 배울 무렵에 공산주의를 접했다고 한다.

목포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했다[4]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하여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4·19혁명5·16 군사 정변을 겪었고, 6·3사태 등을 접하면서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66년 서울대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 동참하였다.

문단 등단 이후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였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70년 정치인과 재벌1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를 오적 필화 사건이라 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고[5], 아들 김원보, 김세희 형제가 태어났다. 그러나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체포되고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해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프랑스의 사르트르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 등 해외 문인 및 지식인들과 연대해 김지하 시인에 대한 '사법 살인'을 막고자 나섰다.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같은 해 3월 13일 서울에서 원주 집으로 가는 길에 중앙정보부가 연행해 다시 구속되었다.[6] 이후 재판을 받고 다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대 이후

1980년대 이후, 각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 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명에 대한 그의 존중심에서 나온 비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비난과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박두진, 고은의 시, 황석영, 최인훈, 이청준, 박경리 등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도 유럽과 미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시위에 나서기로 하면서 2001년 5월 4일 서울 시청 앞에서 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과 대외협력위원장인 소설가 이경자, 그리고 자유실천위원장인 소설가 김영현과 함께 차례로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했다.[7]

2007년 대선 전에 손학규를 한나라당에서 탈당하도록 권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손학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8]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9] 현대 한국의 도교로 유명한 종파는 국선도, 단학선원, 연정원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국선도, 김지하는 연정원과 인연이 있다.

작품 세계

70년대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이었던 김지하는 80년대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과 불교의 미륵 사상, 화엄 사상, 유교, 선불교·기(氣)철학 등의 여러 가지 사상들을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재해석하고 이를 모두 융합, 수용하여 생명사상을 제창했으며, 풍자력을 갖췄으면서도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담시와 서정시를 썼다. 대표작으로는 《오적》, 《》,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10] 등이 있다.

2022년 6월 25일 서울 삼일대로 천도교 대교당에서 49재 추모문화제가 열린자리에서 시인의 미발표 시 8편<교감, 헌화, 열리리, 심화, 사랑은 공경, 처용, 살아라, 하늘세계>이 공개됐다. 1999년 문화계 후배 임진택에게 희곡을 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대신 건넨 작품들이라 한다.[11]

작품과 저서

시집

  • 대설 남 1~4
  • 타는 목마름으로
  • 황토(풀빛판화시선 1)
  •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 애린
  • 제자리를 찾는 시(1985)
  •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 별밭을 우러르며
  •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
  • 한 사랑이 태어나므로
  • 말뚝이 이빨은 팔만사천개
  • 모로 누운 돌부처
  • 생명
  • 병든바다 병든지구
  • 동학이야기
  • 중심의 괴로움
  • 검은 산 하얀 방
  • 황토
  • 빈산
  • 생명과 자치
  • 2002 월드컵 포에버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의 여정
  • 셋과 둘 그리고 혼돈
  •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 편지 꽃과 그늘 기
  •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 김지하의 화두
  • 당신을 버릴때
  • 절 그 언저리
  • 사이버 시대와 시의 운명
  • 못난 시들

기타

  • 율려란 무엇인가
  • 사상기행 1~2
  • 생명과 평화의 길
  • 유목과 은둔
  • 탈춤의 민족미학
  • 똥바다 : 김지하가 짓고 임진택이 고쳐 만든 창작 판소리

저작

  • 옹치격(김지하산문집)
  • 민족주의 평화 중용 (공저, 2007년, 까치)
  • 현대문명의 위기와 시대정신
  • 흰 그늘의 길:김지하 회고록
  • 생명학1~3

학위

  • 1985년 미국 사회연구대학교 명예박사

상훈

  • 1975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 1993년 <이상문학상> 수상
  • 2002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 2002년 제17회 만해문학상
  • 2002년 제10회 대산문학상
  • 2003년 제11회 공초문학상
  •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
  •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평화부문상
  • 2010년 제6회 경암학술상 예술부문
  • 2011년 민세상

가족 관계

  • 배우자: 김영주(1946년~2019년 11월 25일)
    • 아들: 김원보, 김세희
  • 장모: 박경리(1926년 10월 28일~2008년 5월 5일)
  • 외숙부: 정일성(1929년 2월 19일~)

기타

6.3 사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회담이 굴욕외교회담이라 판단한 그는 서울대학교 후배 김덕룡, 고려대의 이명박, 이재오 등과 함께 6.3 시위에 참여한다.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된 그는 투옥, 4개월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오적 필화 사건

1970년 부패된 정권을 비판한 《오적(五賊)》이라는 시를 써서 《사상계》 5월호에 실었는데, 이것이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실리면서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0일 동안 옥살이를 했다.

민청학련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7월 9일 결심 공판에서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013년 1월 4일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 국가보안법상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판결 선고 후 "보상금을 받으려 재심을 신청했다. 완전히 무죄를 선고하지 않은 이유는 돈을 적게 주려는 것"이라며 1월 10일 재심판결에 항소를 하였다.[12]

변절 논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열사의 사망 이후의 대치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비난해 재야 진보세력과 맞서는 행보를 보이며 '변절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2009년, 촛불 시위 반대와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객들을 비난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이어 다른 대선 후보를 비난하고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고 리영희 교수를 매도해 인터넷에서 "자신에게 씌워졌던 ‘빨갱이’란 누명을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씌우고 있다","유신독재와 박근혜의 나팔수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있다.[13]

죽음의 굿판 논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앞에서 대학 측의 일방적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진압하다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 강경대군(당시 19세)이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고 이후 숨가쁜 ‘분신·투신 정국’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5월 5일,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비난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더 이상의 죽음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뜻”이라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권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14]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 논란

2008년 이명박 지지로 인해 네티즌들로부터 맹공격을 당하던 작가 황석영에 대해 2009년 5월 18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시비걸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 "작가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15]"는 시각을 공개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라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했다.[16] 진중권이 일관성을 비판하기 위해 황석영을 금붕어에 비유한 것에 대해서 그는 "작가라는 것이 아침마다 변한다. 기억력이 강한 작가일수록 엉터리다"라며 황 씨의 행보에 작가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진 교수가 황 씨를 가리켜 '금붕어 기억력'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노골적인 반박이다.[15] 5월 19일 진중권은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을 글을 올려 "기억력이 나쁜 작가일수록 좋은 작가라는 미학이론은 들을수록 해괴하다. 그렇다면 최고의 작가는 금붕어겠다. 금붕어의 눈앞에는 2초 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라고 말했다[15]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객 "맑스 신봉자" 발언

2009년 5월 부산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추모객들을 향해 "봉하마을에서 악을 쓰는 맑스(칼 마르크스) 신봉자"들이라고 표현했다. 해당글에 대해 네티즌들은 "내가 아는 그 김지하가 맞는가" "정말로 '타는 목마름'의 그 김지하 시인 맞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문과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살까지도 애도하게 하는 이유는 왜 빼먹었는지" "삶은 무조건 고귀하고 죽음은 무조건 비겁한 것인가"라며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네티즌은 "김지하 시인 안목으로는 자살이라는 것이 비겁한 행동이었겠지만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이유가 있어서 추모하는 것"이라며 "그걸 마치 옳지 않다라는 듯이 하는 자세가 별로 좋은 자세는 아니다라며 비판했다.[17]

공산화 지지자 발언

2013년 1월 8일 CBS 라디오에 출현하여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국민 48%는 공산화 좇는 세력 맞지 않나"라고 한 발언[18] 등이 논란이 되었다.[19]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게 막말을 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 욕설을 하는 등[20] 입에 담지 못한 막말이라는 평과 비판이 이어졌으며[21] 이에 대해 한 칼럼니스트는 좌충우돌하던 언행에서 무엇보다 끔찍스러웠던 것은 정제하지 않고 내뱉는 막말이라며 김지하가 공론장에 내뱉는 '한마디로 X 같아서…' 등의 욕설은 더 이상 시인의 언어는 아니라고 평했다.[22] 또한 민청학련 무죄 판결에 대해서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것에 대해 평론가는 김지하가 ‘돈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을 옹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며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생활은 보수주의가 지배를 한다며 김지하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것이라고 평했다.[23]

김지하를 연기한 배우

  • 2005년 이병욱 《지금도 마로니에는》 - EBS 드라마

같이 보기

각주

  1. [YES24]
  2. 네이버 지식백과 김지하. 국어국문학자료사전.
  3. 시인 김지하, 지구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다. 오마이뉴스. 2007년 8월 30일.
  4. 홍미희. 목포가 낳은 세계적인시인 - 노겸(勞謙) 김지하(金芝河, 1941- ). 목포출신문학인소개.
  5. 지하, 박경리 딸 김영주와 결혼… 주례 김수환 추기경.
  6. '유신 광기 절정... 김지하의 신변에 불길한 예감', 《한겨레》2012년 2월 14일자
  7. 한겨레신문 국제 | 문화>출판 | 문화] 2001-05-07 / 최재봉
  8. 김지하“‘손아무개한테 가봐라’말하는 정도로 돕겠다”
  9. 김지하, 변절의 길 걷는다,,,박근혜 지지선언. 뉴스플러스. 2012년 11월 6일.
  10. 이 시는 가수 김광석이 노래로 부르기도 하였다.
  11. 김지하 미발표 시 8편 첫 공개. 중앙일보. 2022년 6월 25일.
  12. 김지하 시인, '사실상 무죄' 재심판결에 항소. 동아일보. 2013년 1월 10일.
  13. 김지하, 또 백낙청 공격에 문단 "안타깝다". 경향신문. 2012년 12월 5일.
  14. 강경대 사망 20주기 등록금 투쟁서 비롯, 정권 퇴진 운동으로 달궈져. 경향신문. 2011년 4월 24일.
  15.  "황석영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포기했다". 황 씨를 옹호하고 나선 시인 김지하. 2014년 12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16. 김지하 "작가는 좌우 오갈 자유 있어야".
  17. 김지하 "봉하마을에서 악을 쓰는 맑스 신봉자" 논란
  18. 국민 48% 공산세력" 김지하 막말 논란에 의견 분분. 브레이뉴스. 2013년 1월 8일.
  19. 김지하 '막말'발언 논란, 누리꾼 비난 '봇물'. 뉴스포스트. 2013년 1월 8일.
  20. 김지하, 또 막말.... 한겨레. 2013년 1월 8일.
  21. 김지하의 막말, 지적 수준 의심스러워. 시사브리핑. 2013년 1월 9일.
  22. 이준희 칼럼 김지하, 황석영. 한국일보. 2013년 1월 9일.
  23. 이택광의 왜?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김지하. 경향신문. 2013년 1월 10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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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芝河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金 芝河
生誕1941年2月4日
大日本帝国の旗 日本統治下朝鮮 全羅南道木浦市大安洞
死没2022年5月8日(81歳没)
大韓民国の旗 韓国 江原特別自治道原州市
職業詩人思想家
言語朝鮮語
国籍韓国
最終学歴ソウル大学校文理科大学美学科
ジャンル
代表作『五賊』
主な受賞歴ロータス賞クライスキー人権賞
 ウィキポータル 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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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芝河
各種表記
ハングル김지하
漢字金芝河
発音:キム・ジハ
ローマ字Kim Chi-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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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芝河(キム・ジハ、きん しが[1]김지하、Kim Chi-Ha、本名:金 英一(キム・ヨンイル、김영일)、1941年2月4日 - 2022年5月8日)は、大韓民国詩人思想家。ペンネームの「芝河(チハ)」は同音の「地下(チハ)」に由来する[2]本貫金海金氏[3]

生涯

生い立ち

1964年5月20日にソウル大学校文理科大学で行われた「民族的民主主義葬礼式」。金が書いた弔辞が朗読された[4][5]。金は運動を主導したとして6月に逮捕された[5]

全羅南道木浦市大安洞に映画技師の一人息子として生まれる。1954年、父親の仕事の関係で江原道原州市に移住[5]。中学時代から詩作を始める。1959年、ソウルの中東高等学校卒業。同年3月、ソウル大学校美術学部美学科(現・哲学科)に入学。美術学部はのちに文理科大学に統合された[6]

1960年4月に発生した反政府デモ(4・19学生革命)に参加。1961年5・16軍事クーデターでの朴正煕政権登場以降、反政府活動を強める。

1964年5月20日、韓日会談反対闘争の一環として、ソウル大学校文理科大学の学生が「民族的民主主義葬礼式」を開いた。金が書いた弔辞を同大学政治科の宋哲元が朗読した[4][5]。6月3日、国会議事堂前の太平路通りは、市内17大学、1万5千人の学生で埋め尽くされた。同日20時、政府はデモ激化を理由として、非常戒厳令を宣布した(6.3抗争[7]。同月、金は運動を指導したとして逮捕された。9月に起訴猶予処分を受けた[5][2]。以降も学生運動を主導した。

1966年9月、ソウル大学校卒業。江原道の炭鉱で働く[5]

長篇詩『五賊』

1970年張俊河の主宰する総合雑誌『思想界』5月号に長篇詩「五賊」を発表した。金は財閥、国会議員、高級公務員、将軍、長官次官の“五賊”をパンソリの節に合わせて痛烈に風刺した[6]。6月1日、「五賊」は最大野党の新民党の機関紙『民主前線』60号に転載された。6月2日、金と『思想界』発行人の夫琓爀は逮捕され、新民党は強制捜査を受けた(五賊筆禍事件[8]。肺結核が再発し、逮捕から1か月後に釈放される[5]。「五賊」は「週刊朝日」1970年6月26日号に全訳で紹介された[9]

当局からの逃亡生活を余儀なくされるが、地下活動を続け、軍事政権下で民主化運動をリードした。同年12月、最初の詩集『黄土』をハンオル文庫から刊行[5]

1971年12月25日、『黄土』や「五賊」のほか、評論や戯曲を収録した日本語の翻訳書『長い暗闇の彼方に』が中央公論社から出版された。同社の宮田毬栄が編集し、タイトルも宮田が考えた[10]。翻訳者の渋谷仙太郎は日本共産党赤旗」記者だった萩原遼のペンネーム。同書により、金芝河の名前は日本でも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

1972年4月、金は長編風刺詩「蜚語」を発表したが、4月12日に検挙され、木浦市の国立結核療養院へ強制軟禁された[6][11][12]。宮田が立ち上げた「金芝河救援国際委員会」の依頼により、鶴見俊輔真継伸彦、金井和子の3人は同年6月29日、金の釈放を求める署名を持って韓国に渡り、病室で金と面会した[6][13][14]

1973年4月7日、作家の朴景利の娘の金玲珠(キム・ヨンジュ)と結婚[5]

民青学連事件

1974年4月3日、民青学連事件[注 1]が発生。事件の関与者として指名手配を受け、4月9日から地下に潜行。4月25日、逃亡先の全羅南道黒山島で逮捕された[5][17][2][18]。7月9日、韓国非常普通軍法会議は金に死刑を求刑[18]。翌10日、宮田毬栄は「金芝河救援国際委員会」を拡大・発展させ「金芝河らを助ける会」を設立。「金芝河を殺すな! 釈放せよ!」という朴大統領に送る要請文を書いて署名運動を行った。日本では大江健三郎遠藤周作松本清張柴田翔谷川俊太郎などが、外国ではサルトルボーヴォワールヘルベルト・マルクーゼハワード・ジンノーム・チョムスキーエドウィン・ライシャワーなど数多くの知識人が賛同した[11][10][19]。7月13日、非常普通軍法会議第一審判部は金に対し死刑判決を下した[5]。16日までに、金ら14人に死刑、15人に無期懲役、日本人の太刀川正樹と早川嘉春を含む26人に懲役15年から20年の刑が科せられた[20]

同年7月16日夕方から19日にかけて金石範金時鐘李恢成真継伸彦、南坊義道らは数寄屋橋公園でハンガー・ストライキを行った[20][21][22]。7月20日早朝、宮原昭夫国鉄藤沢駅前でハンストに入った[23]。7月21日、国防部長官徐鐘喆は金の死刑を無期懲役に減刑した[24]。7月27日から30日にかけて鶴見俊輔金達寿李進熙針生一郎ら4人は、全被告の釈放を求める第二次ハンストを数寄屋橋公園で行った[5][11][25][26]。8月8日には「金芝河らをたすける国際委員会代表団」が韓国に派遣された。団長は日高六郎で、大島孝一ジョージ・ウォルド、反戦活動家のフレッド・ブランフマン福音館書店編集長の藤枝澪子らがこれに参加した[22]

1975年2月15日、朴大統領の刑執行停止措置により人革党関係者をのぞく148名が釈放された。金もこのときに出獄。2月25日から27日にかけて「東亜日報」に手記『苦行―1974』を掲載し[5]人民革命党事件の捏造を批判した。3月13日、反共法違反容疑で再逮捕された[27]

1980年12月11日、釈放される[28]。通算7年にも及ぶ獄中生活に対し、軍事政権の言論弾圧に屈しなかったとして、ロータス賞(特別賞、1975年)、クライスキー人権賞、偉大な詩人賞、鄭芝溶文学賞空超文学賞怡山文学賞大山文学賞を受賞。

以降、詩作以外にも随筆や談論集を発表し、パンソリや仮面劇の伝統を生かした『櫻賊歌』『蜚語』などを発表。1982年頃からは、地域自治を提唱するサルリム(生命)運動や環境問題、消費者共同体運動、東アジアの伝統を見直す活動など、詩作以外にも活動を広げる。しかし、生命運動などを通じて神秘主義的な言動が顕著になったことで、民主化運動(特に学生運動)に対する思想転向と受けとめる者も現れ、韓国内では賛否両論を巻き起こした。

1991年4月には、明知大学校生の姜慶大殴打致死事件を契機に起こった一連の焼身自殺事件に対して、その抗議姿勢を批判して1991年5月5日付の『朝鮮日報』コラムに「死(焼身自殺)による礼讃を止めよ!(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とのアピールを出している[29]。この文章は国内に激烈な反響を引き起こす。

1998年12月に日本を初訪問[30][31]

自身の政治的立場は「中道進歩」としており、1998年〜2008年の10年間続いた進歩政権、特に盧武鉉政権については厳しい批判をしている[32]。2007年の大統領選挙ではソウル大学時代の先輩で親交が深い孫鶴圭支持を表明[33]2012年大韓民国大統領選挙では、自身が弾圧を受けたときの大統領である朴正煕の長女で与党セヌリ党の大統領候補となった朴槿恵支持を表明した[34]

2013年1月4日、再審で民青学連事件の嫌疑について「犯罪の事実なし」として無罪判決が下った[35]

2022年5月8日、江原道原州市の自宅で死去[36][30]81歳没

人物

日本語訳書

  • 『長い暗闇の彼方に』(渋谷仙太郎 訳、中央公論社、1971)
  • 『五族黄土蜚語』(姜舜 訳、青木書店、1972)
  • 『金芝河詩集』(姜舜 訳、青木書店、1974)
  • 『民衆の声』(金芝河作品刊行委員会 編訳、サイマル出版会、1974)
  • 『不帰』(李恢成 訳、中央公論社、1975)
  • 『良心宣言』(井出愚樹 編訳、大月書店、1975)
  • 『わが魂を解き放せ』(井出愚樹 編訳、大月書店、1975)
  • 『深夜』(鄭敬謨 訳、土曜美術社、1976)
  • 『金芝河作品集』(1・2、井出愚樹 編訳 青木書店、1976)
  • 『獄中から』(井出愚樹 編訳、大月書店、1977)
  • 『苦行 獄中におけるわが闘い』(金芝河刊行委員会 編訳、中央公論社、1978)
  • 『飯・活人』(高崎宗司中野宣子 訳、御茶の水書房、1989)
  • 『金芝河 生(いのち)を語る』(高正子 訳、協同図書サービス、1995)
  • 『傷痕に咲いた花』(金丙鎮 訳、毎日新聞社、2004)

映画

脚注

注釈

  1.  大韓民国国家情報院は2004年、過去の弾圧事件についての真相究明委員会を設置し、調査を開始した。2005年12月7日に「民青学連事件、1964年に発生した第一次人民革命党事件、1975年に発生した第二次人民革命党事件はいずれも、朴正熙大統領の指示によって捏造されたもの」とする調査結果を公表した[15][16]

出典

  1.  金芝河”.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2022年12月31日閲覧。
  2.  「独裁に対抗した抵抗文学の象徴」韓国詩人の金芝河氏、永遠に輝く文学の星に(2)”. 中央日報 (2022年5月9日). 2024年12月24日閲覧。
  3.  김지하 (2001年9月25日).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2> (朝鮮語). www.pressian.com. 2022年7月18日閲覧。
  4.  『コリア評論』1964年7月号、コリア評論社、58-60頁、「韓国日誌」。
  5.  『苦行 獄中におけるわが闘い』 1978, pp. 660–670.
  6.  平井久志 (2024年7月7日). 「この金で逃げてくれ!」唐十郎が頼んだ韓国詩人 アングラ演劇の旗手と韓国の大詩人との邂逅”. 東洋経済オンライン. 2024年12月30日閲覧。
  7.  林建彦 1967, pp. 189–191.
  8.  『コリア評論』1970年8月号、コリア評論社、60-62頁、「韓国日誌」。
  9.  『長い暗闇の彼方に』 1971, p. 191.
  10.  増田恵美子 (2024年4月13日). <土曜訪問>出版の仕事 人生かけ 日本で初の女性文芸誌編集長を務めた 宮田毬栄(みやた・まりえ)さん(元編集者・文筆家)”. 東京新聞. 2024年12月30日閲覧。
  11.  「言葉の力に魅了された『金芝河との52年』が 私を目覚めさせてくれました」”. ハンギョレ新聞 (2022年7月6日). 2024年12月24日閲覧。
  12.  (天声人語)金芝河さんを悼む”. 朝日新聞 (2022年5月12日). 2024年12月30日閲覧。
  13.  土倉莞爾「非暴力直接行動と鶴見俊輔」 『関西大学法学論集』2021年11月22日発行。
  14.  鶴見俊輔・上野千鶴子小熊英二『戦争が遺したもの』新曜社、2004年3月11日。ISBN 978-4788508873
  15.  国家情報院、「人革党・民青学連事件はねつ造」”. 東亜日報 (2005年12月8日). 2024年12月24日閲覧。
  16.  高槻忠尚「74年の韓国政府転覆事件『朴政権のでっちあげ』 情報院究明委」 『朝日新聞』2005年12月8日付朝刊、7面。
  17.  詩人の金芝河さん、39年ぶり無罪判決 民青学連事件”. 朝日新聞 (2023年1月4日). 2024年12月24日閲覧。
  18.  会の歴史・2”. 日本現代詩人会. 2024年12月24日閲覧。
  19.  李美淑『「日韓連帯運動」の時代』東京大学出版会、2018年2月28日。ISBN 978-4-13-056115-0
  20.  『朝日新聞』1974年7月17日付朝刊、19面、「韓国軍法会議の判決に 抗議行動広がる 東京ではハンスト 国際連帯も」。
  21.  村松武司「1974年7月―金芝河たちの処刑」 『朝鮮研究』1974年6・7月合併号、日本朝鮮研究所、57-62頁。
  22.  太田修「金大中拉致事件から始まった日韓連帯運動」。同志社大学、2021年3月。
  23.  『朝日新聞』1974年7月21日付朝刊、3面、「宮原氏 ハンスト続行」。
  24.  『コリア評論』1974年10月号、コリア評論社、57-60頁、「韓国日誌」。
  25.  中島健蔵『回想の文学 1』平凡社、1977年5月25日、8-9頁。
  26.  「民族詩人金芝河(キムジハ)の夕べ」における金達寿の所感(音声)”. 神奈川近代文学館 (2021年1月21日). 2024年12月24日閲覧。
  27.  '유신 광기 절정... 김지하의 신변에 불길한 예감', 《한겨레》2012년 2월 14일자
  28.  『コリア評論』1981年2月号、コリア評論社、59-61頁、「韓国日誌」。
  29.  「焚身自殺 분신자살」関連のことば「死の儀式をやめなさい」、李鍾珏『はやり言葉でわかる韓国いまどき世相史』(亜紀書房)167-168頁
  30.  恩地洋介 (2022年7月29日). 故・金芝河さん(韓国の詩人) 独裁と闘った「抵抗詩人」”. 日本経済新聞. 2024年12月24日閲覧。
  31.  アジア詩文学史の記念碑 伝説の「五賊」遂に日本上陸! 梁石日
  32.  47NEWS地球人間模様「戦い続ける詩人、金芝河」47NEWS(2009年3月4日)2012年12月9日閲覧。
  33.  “김지하 “‘손아무개한테 가봐라’ 말하는 정도로 돕겠다”. ハンギョレ(本国版). 2007年3月22日. 2012年12月9日閲覧.
  34.  “韓国大統領選 「恩讐を越えて」あの金芝河氏が朴槿恵候補を支持”. MSN産経ニュース. 2012年12月1日. 2012年12月1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 2012年12月9日閲覧.
  35.  “김지하, 39년 만에 무죄(金芝河、39年ぶりに無罪)”. 京郷新聞. 2013年1月4日. 2013年1月5日閲覧.
  36.  고병준 (2022年5月8日). Poet and democracy activist Kim Ji-ha dies at 81 (英語). Yonhap News Agency. 2022年5月8日閲覧。

参考文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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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Chi-h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Kim Chi-ha
Kim Chi-ha
Kim Chi-ha
Born
Kim Yeongil

4 February 1941
Died8 May 2022 (aged 81)[1]
OccupationWriter
LanguageKorean
Period1963–2022
Korean name
Hangul
김영일
Hanja
金英一
RRGim Yeongil
MRKim Yŏngil
Pen name
Hangul
김지하
Hanja
金芝河
RRGim Jiha
MRKim Chiha

Kim Jiha or Kim Chi-ha (Korean: 김지하; born Kim Yeongil (김영일); 4 February 1941 – 8 May 2022) was a South Korean poet and playwright.[2]

Biography

Kim Jiha was born Kim Yeongil (김영일; 金英一) on 4 February 1941 in Mokpo, Zenranan Province, Korea, Empire of Japan (now South Jeolla Province, South Korea). As a university student, Kim took part in April Revolution demonstrations that toppled the regime of South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in April 1960.[3] In March 1963, under the pen name Kim Jiha, he published the poem "Evening Story" (Jeonyeok iyagi) in the journal Mokpo Literature. In 1964, Kim took part in the demonstrations against the normalization treaty establishing diplomatic relations with Japan, for which he was briefly arrested.[4] In 1966, he graduated with a degree in Aesthetics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He made his official literary debut in 1969.[2]

Kim was a dissident under the Park Chung Hee regime, which began when Park came to power in a coup d’état in May 1961. During this period, Kim took the pen-name Jiha because it is the Korean word for "underground".[5]

Kim first came to widespread attention in May 1970 with his poem Five Bandits, which led to him being arrested under the Anti-Communist Law, though the poem says nothing about either communism or North Korea.[6] The title of Five Bandits is a reference to the "Five Traitors" who signed the treaty turning Korea into a Japanese protectorate in 1905.[7] In Five Bandits, Kim described how about "ten years ago" the eponymous bandits came to dominate South Korea, rapaciously devouring everything as they set out to loot the country.[7] One of the "five bandits" is described as a general who is a great Japanophile and who began his military career fighting for the Japanese in World War II; the character of the general was clearly supposed to be Park, who was often expressed his admiration for Japanese militarism and who like the unnamed general fought for Japan in World War II, which is why the poem was promptly banned and Kim arrested.[7] Sasanggye magazine, in which it was printed, was pulled from circulation and never permitted to publish again.[8]

After accusing the regime of extracting false confessions with the use of torture, he was tried and sentenced to death in 1974, which was commuted to a life sentence and eventual release following a public outcry. When he further accused the government of using torture to get confessions in the 1974 People's Revolutionary Party case, he was once again sent to prison and his life sentence renewed.[9] He was subject to torture himself.[8]

Personal life

As a Catholic, he compared the suffering of the Korean people with the greater suffering of Jesus Christ.[citation needed]

Kim died at his home in Wonju after suffering from an undisclosed illness for a year.[10]

Work

From his first collection, The Yellow Earth, to his collection of lyrical poetry, Looking up at a Starry Field, Kim has displayed a broad literary range including both narrative and lyrical poems, ballads, taeseol, drama, and prose. His works also cover the full gamut of religious thought and philosophy, from the Donghak, to the Catholic, Jeungsan, Avatamska, Zen, and Maitraya tradition.[2]

The majority of Kim's poems also present satirical social critiques. In The Yellow Earth and With a Burning Thirst, the poet offers a scathing invective of society through the medium of lyric poetry. In ballads such as "Five Bandits" (Ojeok) and "Groundless Rumors", he employs a pansori rhythm and occasionally obscure classical Chinese characters to satirize the misdeeds and corruption of those in power. The pansori rhythm is present again in A Rain Cloud in these Days of Drought, a collection of narrative poems that examine the life and death of Choi Jeu. Love Thy Neighbor, when compared to Kim's earlier works, focuses more directly on the notion of romantic love, thus marking a turning point in the poet's thematic focus. Looking up at a Starry Field and The Agony of the Center reflect this shifting thematic interest in their lyrical content and intent in relating the individual's interior monologue. These works also reveal a strong undercurrent of Romanticism, in focusing more deliberately on the poet's desire to connect with nature than on his discontent with society.[2]

In the 1980s Kim's poetry and thought underwent yet another transfiguration. Distancing himself from the struggle of the labor movement then the dominant theme of the era, the poet was able to develop a fresh perspective on life.[2]

In his play The Gold-Crowned Jesus[11] a leper, the most despised outcast class in Korea, encounters the imprisoned Jesus. Jesus tells the leper that he must help liberate Him. By helping the poor, the gold crown of Jesus will be removed and His lips freed to speak.

Awards and honors

Works in translation

  • "Aufgehen der Knospe" (German Language)
  • Heart's Agony: Selected Poems of Chiha Kim (1998)
  • Cry of the People and Other Poems (1974)
  • The Middle Hour: Selected Poems (1980)
  • The Gold-Crowned Jesus and Other Writings (1978)
  • Five Thieves (Thai translation by Jiranant Phitpreecha in 1989)

Works

  • The Yellow Earth, With a Burning Thirst, South (Nam)
  • Love Thy Neighbor 1-2 (Aerin 1-2)
  • Black Mountain, White Room (Geomeun san hayan bang)
  • A Rain Cloud in These Days of Drought (I gamun nare bigureum)
  • My Mother (Naui eomeoni)
  • Looking up at a Starry Field (Byeolbateul ureoreumyeo)
  • The Agony of the Center (Jungsimui goeroum)
  • Rice (Bap)
  • Boat Songs of the South Land (Namnyeokttang baennorae)
  • Livelihood (Sallim)

References

  1.  "Poet and democracy activist Kim Ji-ha dies at 81". 8 May 2022. Retrieved 8 May 2022.
  2.  LTI Korea Author Database: http://klti.or.kr/ke_04_03_011.do# Archived 21 September 2013 at the Wayback Machine
  3.  Hwang, Kyung Moon A History of Korea, London: Macmillan, 2010 page 240
  4.  Hwang, Kyung Moon A History of Korea, London: Macmillan, 2010 page 240.
  5.  "Kim Chi-Ha / 김지하 ( Poet and Playwright )". www.korea-fans.com. Retrieved 28 January 2020.
  6.  Hwang, Kyung Moon A History of Korea, London: Macmillan, 2010 pages 236-237.
  7.  Hwang, Kyung Moon A History of Korea, London: Macmillan, 2010 page 241.
  8.  Kang, Sugwon (1977). "The politics and poetry of Kim Chi-ha". Critical Asian Studies. 9 (2): 3–7 via Taylor & Francis Online.
  9.  William Shaw, ed. Human Rights in Korea: Historical and Policy Perspectives p. 184-5.
  10.  "S. Korean dissident poet Kim Chi-ha dies at 81". Hankyoreh (in Korean). Retrieved 10 May 2026.
  11.  Kim, Chi-ha, (1978). The Gold-Crowned Jesus and Other Writings
  12.  Arana, R. Victoria (2008). The Facts on File companion to world poetry: 1900 to the present. Infobase Publishing. p. 244. ISBN 978-0-8160-6457-1. Retrieved 25 Nov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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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최근 수정 시각: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
고조선 · 삼국 · 남북국
(BC 4C ~ AD 936년)
 · 가요
고조선

삼태극 서정시공무도하가(저자 미상)

신라

삼태극 가요해가(저자미상)
삼태극 향가월명사(제망매가) · 충담사(찬기파랑가) · 처용(처용가) · 득오(모죽지랑가)
삼태극 한시최치원(추야우중)
삼태극 불교시의상(화엄일승법계도)
삼태극 향가집김위홍(삼대목)


백제

삼태극 가요정읍사(저자미상)
삼태극 향가무왕(서동요)

가야

삼태극 가요구지가(저자미상)

발해

삼태극 한시양태사(야청도의성) · 왕효렴(제일봉 · 봉칙배내연)
신라

삼태극 단편 설화설총(화왕계)
신라

삼태극 역사학김거칠부(국사)
삼태극 불교원효(금강삼매경론 · 대승기신론소 · 판비량론)
삼태극 여행기혜초(왕오천축국전)
삼태극 상소문최치원(토황소격문)
삼태극 금석문진흥왕(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 임신서기석(저자미상) · 김○○&한눌유(문무왕릉비)


백제

삼태극 역사학고흥(서기) · 백제본기(저자미상)
삼태극 불교: 혜균(대승사론현의기)
삼태극 금석문미륵사지 금제사리봉영기(저자미상) · 정지원(금동정지원명삼존여래입상 금석문) · 사택지적(사택지적비)

발해

삼태극 도교이광현(금액환단백문결)
삼태극 금석문정혜공주 묘비명 · 정효공주 묘비명
김지하
金芝河 | Kim Chi-ha
31478 11186 4954
본명
김영일 (金英一)
출생
사망
2022년 5월 8일 (향년 81세)
원적
국적
직업
시인
학력
노겸(勞謙)
배우자
김영주 (1973년 ~ 2019년, 사별)[5][A]
자녀
아들 김원보, 김세희[A]
종교

1. 개요2. 생애
2.1. 반독재 운동2.2. 생명사상2.3. 1991년 죽음의 굿판 칼럼
2.3.1. 고문 후유증설2.3.2. 당사자들의 주장
2.4. 말년2.5. 사망
3. 대표작4. 여담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시인.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2. 생애[편집]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부(現 목포시) 산정동 1044번지에서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목포산정국민학교 졸업 후 목포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54년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원주시로 이주하여 원주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1956년 상경하여 배재고등학교에 수험을 쳤으나 낙방하여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59학번)에 입학했다.[8]

2.1. 반독재 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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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계속 학생운동을 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고향 목포시 등지에서 항만 노동자, 광부 등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1964년 6월에는 '서울대학교 6.3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수감되어 4개월간 복역했고, 1966년 8월에는 7년 6개월만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저항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독재에 항거하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서 필화를 입었고,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시기에 소리꾼 임진택이 담론시 '비어'의 첫부분인 '소리내력'을 판소리화하기도 했다.

1971년 가수 김민기와 함께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2년 후 김민기는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했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金玲珠)와 결혼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전남 홍도 영화촬영장에서 체포된 후 옥고를 겪었으며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무기징역을 거쳐 7년으로 감형되었고[9] 1980년에 석방되었다.

1975년 〈타는 목마름으로[10][11]가 발표되었다.

적극적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으며 김수환 추기경 역시 이러한 모습을 대단하게 여기는 동시에 너무 열혈이 지나친 거 아니냐며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추천된 경력도 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년 수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정지용 문학상,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했을 정도의 대단한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초기 〈오적〉으로 대표되는 재기 넘치는 풍자 정신을 보여주는 시편과 감옥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중기의 시들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으로 남아있다.

2.2. 생명사상[편집]

김지하는 70년대 후반 5년여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우쳤다고 한다. 재판이 끝나고 책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김지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댔다고 한다. 선불교, 동학, 생태학 등의 책을 섭렵했는데, 인간과 삶의 진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생태학에서 시작했으나 더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고 그때 접한 것이 선불교 사상이었다. 원래 그의 종교는 가톨릭이었는데, 옥중에서 선불교에 크게 경도되었다. 아울러 동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김지하는 선불교 관련 경전들을 읽으며 영적인 깨달음을 얻어 갔다. 그리고 감옥에서 꽃과 풀을 보며 깨달음을 이어갔다. 저런 미물들도 생명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고등 생명인 인간의 생명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여기에 민족주의와 반전주의가 더해졌다.

출감 이후 김지하는 장모인 박경리 선생의 도움으로 원주에 거주하게 된다. 이후 80년대에 걸쳐 김지하는 여러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혼합하여 수용하고 생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출소 이후 그는 가톨릭, 선불교, 원불교, 도교 등 생명 존중과 관련된 각종 종교들을 섭렵해 갔다.

그의 관심은 증산도환단고기 등에까지 미쳤다.[12] 199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로 여겨지고 있는 단월드의 창시자 이승헌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에 이승헌의 내부비리를 접한 후 탈퇴하여 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과 환경운동가 최열, 강대인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 부원장,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등과 함께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을 창설해 단월드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생명사상과 관련된 여러 종교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했는데 이것이 개별 종교들이 오히려 김지하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배척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그가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진보 진영도 그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후 진보 진영과 적대 관계를 이루게 된다.

2.3. 1991년 죽음의 굿판 칼럼[편집]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중 전경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은 온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이에 김지하가 1991년 5월 5일호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한다.[13] 칼럼 원문 김지하는 생명주의 사상에서 접근하여, 목숨을 버리면서 하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했다. 이 칼럼에서 김지하는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면서 운동권 세력들이 연이은 자살을 조장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심지어 칼럼에는 학생들처럼 자신의 죽음을 강요당했던 자신의 경험이 스며있다고 주장했다.

이 칼럼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그동안 김지하를 투쟁 동지로 여겨왔던 운동권과 진보좌익세력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김지하를 부도덕한 자로 매도하며 군부독재에 아부한다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진보좌익 성향 문인들의 단체였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5월 9일 찬성 46, 반대 1로 김지하를 제명했고, 진보좌익세력에선 김지하를 변절자, 배신자로 규정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 대다수 운동권 인사들, 진보좌익 성향 문인들은 김지하와의 사적인 만남조차 거부했다.

반면 노태우 정부와 보수 진영은 이 칼럼을 대서특필하면서 운동권을 인명을 도구로 보는 집단이라며 비판했다. 여기에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주사파 배후세력설을 주장하면서 파문을 일으킨 상황에서 당시 궁지에 몰려 있던 노태우 정부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단숨에 상황을 반전시켰다. 공안당국에 의해서 범인으로 조작된 강기훈은 훗날 최종 무죄 판결로 누명을 벗지만, 당시에는 자살 조장이라는 식의 언론 플레이를 통해 운동권의 명예가 실추됐다. 노태우 정부는 정원식 밀가루 사건 등과 연계시켜 공안정국을 도모했다. 이후 분신 등 시위는 사그라들고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급격하게 위축된다. 소련 등 공산권 붕괴도 여기에 한 몫했다.

한편 김지하는 인터뷰에서 오히려 운동권 동지·후배들이 칼럼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매도한다면서 정신병원 진료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말했다. #

2.3.1. 고문 후유증설[편집]

1991년 김지하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굿판 칼럼'으로 운동권과 진보 진영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도 여러 의견이 갈렸다. 그를 변절자라고 극렬히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70년대 민주화 투쟁의 아이콘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 정권으로부터 어떠한 금전적인 이익을 취한 정황이 없기 때문에 변절자라고까지 매도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후 김지하의 이런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설이 대두된다. 급기야는 너무 심한 고문으로 외모까지 확연히 달라졌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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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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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출감 후의 김지하(40세).

자기 아들이 대학 진학 문제에 대해 다른 말을 한 적이 있어 기억이 오락가락하며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것 외에도 과거 자신이 썼던 자서전적 내용과 이후에 주장하는 자신의 경험담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거론되기도 했다.

2.3.2. 당사자들의 주장[편집]

부인 김영주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정권의 박해야 예상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 시인이 좌우 양편에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듯 좌파 일각에서 김 시인을 박정희 정권이 죽이도록 유도해 '민족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츰 그 상황을 인식한 어머니는 사위를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남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 덕분에 살아남았다."
"좌파의 색채는 여럿이다. 순수한 사람도 많지만 야심가도, 종북주의자도, 간첩도 있다. 돌아보면 민주화 과정에 악(惡)도 기여한 바가 있다. 온갖 세력이 합쳐야 민주화가 가능했다. 민주화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개적으로 남편 속을 들쑤시고 마음에 상처를 줬다. 석방된 이후 20년 동안 12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 1991년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한 뒤엔 무슨 사회적 발언만 하면 못 잡아먹어 조직적으로 난리를 쳤다. 그 배신감과 원통함이 오죽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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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는 문단 거물 고은의 성추문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 이 인터뷰에서 김지하는 고은이 김지하의 장모이기도 한 '''박경리 작가가 자신의 말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이라고 비하한 것을 옥중 교도관을 통해 전해들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에서는 고은의 그 말에 같은 술자리에 있었던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던 리영희와 문학계 거물인 백낙청 두 명도 함께 낄낄댔다는 증언도 추가적으로 덧붙였다.

그러나 해당 주장은 이를 뒷받침할 녹취록이나 교차 검증 증거가 없으며, 오직 증언만 있기 때문에[14] 진위여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2001년 5월 <실천문학> 여름호에서 '죽음의 굿판' 발언에 대해서 10년만에 유감을 표명하였다.

2008년부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로 있다가 2013년부터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했다.

2012년 11월 26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

2013년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인터뷰에서 ''이 필요하여 재심을 신청했다고 발언했다. #[15]

형사보상을 받은 것과는 별도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5월, 15억 원의 배상판결이 확정되었다.

문재인이나 안철수, 리영희, 백낙청 같은 인사들에 대한 원색적 비난 발언이 물의를 빚기도 했으나, 비난받은 인물 측에서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아 그냥 넘어갔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후 2014년에 김지하 명의로 쓰여진 <김지하 시인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 세월호 특별법 비난글이 인터넷과 SNS에 유포됐으나, 실제로 김지하 본인이 쓴 글이 아니다. 이에 김지하 측은 2019년 관련 게시글 유포자나 단체에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하였고, 촛불집회·미투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2019년 11월 25일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향년 73세로 사망했다.[16]
2022년 5월 8일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자택에서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2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대표작[편집]

4. 여담[편집]

  • 필명 '지하'
    본명은 김영일(金)[17]로, 김지하의 '지하'는 20대 초반에 술에 취했을 때 길바닥 입간판에 적힌 '지하(地下)'를 보고 따온 필명이라고 한다. 처음 쓴 필명은 성 없이 그냥 지하였는데, 하도 주변인들이 이름 대신 불러대는 통에 성을 붙이고 한자까지 갈아 버렸다고 한다. 이후 일본의 출판인들이 ‘지초의 강물’이란 뜻의 한자 '지하()'를 붙이면서 우리가 아는 김지하로 불리게 되었다. #

5. 둘러보기[편집]

[1] #[2] "[3보] '타는 목마름으로' 시인 김지하 별세…향년 81세'[3] #[4]목포산정초등학교[5] 최보식,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일보」, 2011.2.28.[A] 6.1 6.2 서원일, "김지하 시인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별세", 「푸른한국닷컴」, 2019.11.25.[8] 입학 당시 미술대학에 속해 있었으나 박의현 교수의 주도로 1960년에 미학과가 문리과대학 문학부로 복귀했다. 이 때문에 미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적지 않은 반발이 일어났다고 한다.[9]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까지 했던 프랑스의 명사 장 폴 사르트르가 김지하의 석방을 탄원했다.[10]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졌고, 안치환이 부르면서 수많은 운동권 세력이 부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유명하다.[11] 다만 폴 엘뤼아르의 '자유'와 그 형태가 너무 유사해서 표절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12] 이런 면모는 1984년 간행되어 1999년 출판된 사상기행에 매우 자세히 나와있다. 그리고 장모 박경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토지〉 4부부터 등장한 해도사라는 인물이 강증산을 언급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좋다 나쁘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13] <실천문학> 2001년 여름호서 회고하기를 조선일보쪽에서 보다 자극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 제목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고 한다.#[14] 김지하가 교도관을 통해 들었다고 밝혔지만, 해당 교도관에게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한 진위 여부 검증 인터뷰를 시도한 언론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김지하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15] '오적 필화 사건'에 대해서도 항소하여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2013년 5월 9일 기각하였다. '재심 사유가 없는 반공법 위반 혐의의 유무죄를 새로 판단할 수 없다'는 법리상의 한계가 그 이유이다.[16] 현재 이사장직은 차남이 맡고 있다.[17] 뜻은 '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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