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8

예수가 중심인가, 내가 중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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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중심인가, 내가 중심인가
유무상통마을 2011-12-02  조회 : 2,368, 추천 : 71

조현 2011. 11. 29 조회수 1943 추천수 0 

이은선(왼쪽에서 세번째) 이정배(왼쪽에서 네번째) 교수 부부가 결혼30돌과 저서 출간 기념 예배를 축하하러온 현경 교수(왼쪽에서 두번째) 등 축하객들과 함께했다





이은선 교수와 이정배 교수님이 결혼 30주년을 맞아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신학자 부부인 이정배 감신대(56) 교수와 이은선(53) 세종대 교수가 결혼 30돌을 맞아 동시에 책을 출간했다. 이정배 교수는 <빈탕한데  맞혀놀이-다석으로 세상을 읽다>(동연 펴냄)를, 이은선 교수는 <한국 생물 여성영성의 신학-종교,여성,정치의 한몸짜기>(모시는사람들 펴냄)을 각각 출간했다.

 지난 25일 오후엔 서울 중구 정동 정동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들 부부의 결혼 30돌과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예배를 겸한 잔치가 열렸다. 이 자리엔 신경하 전 대한감리회 감독과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목사, 조헌정 향린교회 목사, 현경 미국 뉴욕유니언신학대 교수 등 200여명의 목사와 신학자 등이 함께 했다.


 이 정배 교수는 현재 기독자교수협의회장을 맡고 있고, 이은선 교수는 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와 여성신학회 회장을 지낸 여신학자다. 이정배 교수는 신학의 토착화를 위해 앞장서다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교수직과 목사직, 신자직까지 박탈당했던 변선환(1927~95) 전 감신대 학장의 애제자로 스승의 맥을 잇고 있다. 이은선 교수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교회를 한국인에 의한 토착적 교회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한국그리스도교회연합회 회장이던 신학자이고 목사이자 화가이며 영성가였던 이신(1927~81)의 딸이다.


 이정배·이은선 교수는 동년배 친구였던 변선환과 이신에 의해 부부로 맺어졌다. 이들 부부가 결혼하자 변선환은 이들을 자신의 스승인 스위스 바젤대 프리츠 부리 교수에게 보낸다. 교토포럼에서 활약했던 프리츠 부리 교수는 신학의 지평을 동양으로 확대한 현대신학의 거장이다. 프리츠 부리로부터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을 시도했던 변선환은 이정배와 이은선에게 ‘기독교와 유교의 만남’을 시도해 보도록 했다. 이에 따라 ‘부리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프리츠 부리 교수의 지도 아래 이정배는 주자학을, 이은선은 ‘페스탈로치와 왕양명’을 연구했다.





정동교회 아펜젤로홀에서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정배 이은선 교수의 지인들




 그 뒤 이정배 교수는 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장으로서, 대화문화아카데미 프로그램 위원장 등으로 동서 종교 사상의 만남과 교류를 이끌었다. 이은선 교수도 다시 성균관대 한문학과 대학원에서 다시 박사학위 과정으로 유학을 공부했다.


 <빈탕한데 맞혀놀이-다석으로 세상을 읽다>는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여러해동안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이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은선 교수는 <한국 생물 여성영성의 신학-종교,여성,정치의 한몸짜기>에서 한국 여성신학의 창조적 영성을 ‘한국 ‘생물’(生物) 여성영성’으로 표현하면서 우리의 생명의 참 모습이 그 안에 ‘천지의 낳고 살리는 원리와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이 세상 모두를 한식구로 알아서 큰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임을 말했다. 여기서 ‘생물’ (生物)이라는 개념은 ‘생명’보다 더 포괄적으로, 소위 물질과 무생물의 영역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진정으로 ‘만물’(物)을 ‘낳고 살리는’(生) 일을 의미하는 말이다. 저자는 한국 생물 여성영성은 오늘날 기독교의 생명 신학이 오늘 우리 시대 ‘생물권 정치학’시대에 만물을 살리는 생물(生物) 신학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편 이날 축하예베에서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은 이정배 교수의 <빈탕한데 맞혀놀이-다석으로 세상을 읽다>를 읽고 장문의 서평을 발표했다. 이 서평은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 이정배 교수의 기독관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자신의 견해까지 상세히 담았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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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를 읽고
-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소장)


이정배 교수, 이은선 교수 두 분이 30년 동안 가족공동체로 살고서 각자 책을 내어 함께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가정이 흔들리고 깨지는 세상에서 두 분은 남다른 부부애와 가정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은선, 이정배 교수는 부부의 도가 매우 깊은 것 같다. 가정을 지켜가는 비결이 있을 것 같다.



이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그 비결의 실마리나 흔적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교수는 아내인 이은선 교수를 존경하고 고마워하고 이은선 교수에게 배운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이은선 교수에 대한 찬양까지는 아니지만 찬사가 자주 나온다. 이처럼 아내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품고 아내에게 배우는 자세로 살면서 아내에 대한 찬사를 잊지 않으면 부부의 도가 깊어지지 않을까?



이정배 교수는 가정생활에서 아름다운 성공을 이루고 모범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학문과 인생의 길에서도 아름다운 성공을 이루고 큰 모범이 되었다. 유학자의 풍모를 보인 아버지, 한국적인 종교심을 가진 어머니, 고등학교 은사, 교회 담임 목사인 장기천 감독, 감신대학교 스승 변선환 교수, 장인 이신 박사, 바젤대학 지도교수 프릿츠 부리 박사, 다석의 제자인 김흥호 교수와 류승국 교수의 아낌없는 후원과 축복 속에서 이정배 교수의 인생과 학문이 발전하고 성숙해졌다.





탈 교리화 탈케리그마화 도모한 프릿츠 부리로부터 영향 받아


이교수는 이신 박사의 ‘초월과 영과 예술’ 신학, 변선환 박사의 종교다원신학, 프릿츠 부리의 보편적 실존과 생명 신학을 거쳐 유교 성리학과 서구 신자유주의신학을 비교하는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다석 유영모의 사상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 책은 신학뿐 아니라 지성세계의 폭넓은 절실한 주제들과 학문적으로 대화하고 대결하면서 다석의 신학과 사상을 논구하고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프릿츠 부리는 이교수의 스승 변선환박사의 논문지도교수일 뿐 아니라 이정배, 이은선 부부의 박사논문 지도 교수이므로 이교수와는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다. 이교수의 학문적 뿌리와 배경을 밝히는데 부리를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부리는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로 탈교리화를 넘어서 탈케리그마를 주장했다.


케리그마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선포”를 가리킨다. 불트만은 기독교 신앙(기독교인의 신앙적 실존)이 케리그마에 근거할 뿐, 역사적 예수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적 진술만 있으면 기독교 신앙을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불트만은 케리그마의 비신화화를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신앙적 실존을 드러내려 했다. 비신화화는 기독교 신앙의 케리그마에서 신화적 교리를 벗겨내고 순수한 신앙적 실존을 밝히는 케리그마만을 남기려 했다. 그는 기독교의 케리그마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의 실존에 이르려 했다.


부리는 불트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케리그마에서도 벗어나서 이성적이고 영성적인 인간실존, 생명과 정신의 실존에 충실하려고 했다. 따라서 기독교의 케리그마에 매이지 않고 다른 종교인 불교, 유교와 대화를 통해서 인간 생명과 정신의 실존에 이르려 했다. 부리는 서구 신학계에서 가장 진지하면서도 자유롭고 파격적인 신학자다. 그의 학풍을 배경으로 이 교수는 자유롭게 다석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의 서론 “미정고로서의 예수”는 저자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가정과 학문연구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다석의 기독론”을 다루고, 2부는 “두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라는 제목 아래 종교일원적이며 회통적인 다석신학과 사상을 다룬다. 3부는 “다석으로 본 오늘의 세상 읽기-다석 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이란 주제로 진화론적 생명담론과 다석신학을 다루었다. 짧게 말하면 1부 기독론, 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종교다원주의 신학, 3부 생명진화론과 종교를 중심으로 다석신학과 사상을 논하고 있다.



이정배 교수는 몇 해 전부터 ‘다석학파’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석 유영모, 그의 제자 함석헌, 김흥호, 류승국, 박영호 등을 아우르는 말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이정배 교수와 함께 다석학파의 끝자리라도 참여하고 싶다. 아직 다석학파라는 명칭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함석헌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는 다석학파보다는 함석헌 학파, 씨?학파라는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영모가 함석헌의 스승이고 씨알사상의 토대를 놓은 분이라는 점에서 다석학파라는 명칭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회적 영향력이 훨씬 더 크고 씨알사상을 크고 활달하게 펼쳤다는 점에서 함석헌 학파라는 말도 쓸 수 있다고 본다.


또 다석학파에 민중신학자 안병무와 민중신학을 포함시키거나 관련시킬 수 있는지 논의할 여지가 있다. 안병무는 젊은 시절에 유영모와 함석헌에게 오랫동안 배웠고 함석헌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오늘의 민중과 예수를 동일시하고, 고난 받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하다는 민중신학의 기본원칙과 개념들이 다석사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은 다석학파에 속하거나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민중신학이 사회경제의 차원에 집중하는데, 다석이 영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석사상과 민중신학의 차이를 말할 수 있다.


나는 다석학파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찍이 다석은 자신이 남강 이승훈과 함석헌이라는 두 벽 사이에 둘러 싸여 살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그의 삶과 정신세계가 이승훈, 함석헌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남강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남강과 유영모와 함석헌이 만났고 깊은 정신적 결속을 이루었다. 오산학교는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의 교육입국(敎育立國)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깨워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려는 일념이 이들에게 사무쳐 있었다. 이들의 정신과 사상은 이승훈을 통해서 삼일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함석헌을 통해서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다석의 씨?철학은 안창호, 이승훈의 민중교육입국운동과 함석헌의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되고 발전되었다.





전통 기독론은 예수의 삶과 행위, 말씀보다 예수 신격화에만 초점


이 책의 1부는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론을 비판하고 역사적 예수, 속죄론, 탈민족주의를 논하면서 다석의 얼 기독론, 스승 기독론, 다중(多衆) 기독론을 제시한다. 서구의 전통 기독론은 예수를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교리적 기독론이다. 전통 기독론은 예수의 삶과 행위, 말씀에 대한 관심은 없거나 부족하고 예수를 신격화하여 신적 존재로 고백하는데 초점이 있다.


지난 2~300년 동안 서구 지성계가 성서와 신학을 탐구한 결과 내린 가장 중요한 결론은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를 구분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성서학자 르와지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예수는 하늘나라를 선포했는데 교회는 예수를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를 믿고 선포한 역사적 예수가 믿음과 선포의 대상(신앙의 그리스도)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와 신안의 그리스도를 구분한 학문적인 성서연구는 전통 기독론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 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조직신학자 칼 바르트와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이다.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를 탐구했는데 결론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신앙적 실존)은 역사의 예수에 근거하지 않고 기독교의 선포(케리그마)에 의존하다고 보았다. 역사의 예수를 몰라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만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은 상대적인 역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계시)에 근거하는 것이며 신앙의 근거로서 역사의 예수를 탐구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하였다.





본회퍼, 민중신학, 해방신학, 예수 믿음 넘어 따르려는 운동 일어나

역사의 예수를 외면한 그리스도론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앙, 교리적인 신앙, 내면적이고 실존적인 신앙에 머물기 쉽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디트리히 본회퍼를 비롯해서 민중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 예수를 따르려고 했다. 또 20 여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머물지 않고 예수의 삶과 말과 행동을 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예수 믿기, 따르기, 살기를 함께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가 주이고 목적이다.



 이정배 교수는 서구의 기독교전통을 비판하고 역사적 예수 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석의 기독론을 얼 기독론과 스승 기독론으로 제시한다. 이교수가 제시한 다석의 기독론은 예수 믿기, 따르기, 살기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기독론이다. 다석에게 “믿음은 인간 속에 내재된 전체(하나), 곧 ‘밑둥’ 또는 ‘얼’에 대한 깨침이었다.”(85쪽) ‘내’ 속 밑둥의 얼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것이 얼 기독론이다.
스승 기독론은 나와 예수의 관계를 사제관계로 본다. “스승이란 길을 가다 길이 되신 존재로서 우리 인간 모두···‘하나’로 이끄시는 존재”다.(87쪽) 스승 예수를 따라서 우리도 길을 가다 길이 되라는 것이다. 스승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나’의 몸과 맘과 얼로써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기독교의 미래를 “스승 기독론에 터한 수행(修行)적 기독교의 모습에서 찾는다.(89쪽)


다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얼(성령)이며 ‘나’의 스승으로 파악했다. 예수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얼이 ‘나’의 속에서도 계신다. ‘나’의 속에 하나님의 얼이 계시면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한다. 얼 기독론에서는 예수가 중심에 있지 않고 나의 얼이 중심에 있다.  기독론에서 스승 기독론이 나온다. 스승은 나를 이끌어주고 바르게 살도록 가르칠 뿐 나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승 예수와 나의 관계는 긴밀한 인격적 관계이지만 나의 삶과 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다.


다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서 그리스도록”으로 풀었다. 예수를 이어서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로 산다는 말이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기독론의 새 지평을 여는 것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정신을 이어서 예수의 바통을 이어서 내가 나의 때를 사는 것이다. 스승은 스승의 때를 살고 제자는 제자의 때를 산다. 예수는 예수의 때를 살고 나는 나의 때, 나의 삶을 산다.







예수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낳고 그리스도가 되어 사는 주체



여기서는 더 이상 예수가 중심과 주체가 아니라 내가 중심과 주체이다. 다석의 ‘예수 이어 살기’는 ‘예수 믿고 따르고 살기’를 넘어서는 주체적인 기독론이다. 예수를 이어 사는 다석의 기독론은 예수처럼 “만물을 살리는 그리스도가 되라”(206쪽)는 것이다. ‘내’ 속에서 그리스도를 낳고 그리스도가 되어 나의 때 나의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한 다석의 기독론에서는 기독교의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일보다 ‘제소리’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


다석의 ‘예수 이어 살기’는 역사의 예수를 넘어서 오늘의 시대, ‘나의 때’를 사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게 매여서 역사적 예수의 삶에 갇히는 것은 예수의 뜻이 아닐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을 넘어서 살 것을 요구했다. “너희는 나보다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제자들이 자기를 넘어서 제자들 자신의 때를 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예수가 선한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한 것도 자신을 완전자로 보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최고선은 세상의 완전을 뜻한다. 예수는 결코 최고선이 아니며 역사와 사회의 완전한 결말이 아니다. 역사와 사회의 생명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넘어 나아가야 한다.


이정배 교수는 A.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多衆)’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석의 기독론을 다중 기독론으로 제시한다. 네그리는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제국으로 보고 이 제국의 불의한 억압과 수탈에 맞서는 인간 대중을 ‘다중’으로 표시한다. 네그리는 제국과 다중의 대결을 위해서 민족과 국가를 이념적으로 해체하고 불의한 자본에 대한 다중의 불만과 저항을 고취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민족의 종교문화전통에 담긴 깊은 영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세계 속에서 민족과 국가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한다. 나는 이교수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만일 민족과 국가의 정치종교문화적 전통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세계화라면 그것은 매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세계화일 것이다. 바람직한 세계화는 민족의 문화와 정신이 존중되고 꽃 피고 열매 맺는 세계화일 것이다.


이 교수는 제국과 다중에 대한 네그리의 세계분석을 받아들이면서도 초월을 배제하고 다중의 정신과 실천을 사회과학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다중의 각성과 실천을 위해서 종교의 초월적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얼’의 존재 속에서 다중을 이해한다. “각양각색(특이성)의 모습으로 살지만 그 속에 ‘얼’이 공재하기에 인간은 본래 다중”이라는 것이다.(122쪽) 얼 기독론과 스승 기독론을 결합시키면 얼 나를 깨달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일’을 완성해 간다는 급진적이고 보편적인 기독론이 나온다. “십자가를 거쳐 새롭게 태어난 성령의 존재, 곧 ‘얼나’는 미정고로 남겨진 예수의 일을 완성시킬 책임이 있다...예수 한 분에게 맡겨진 책임이 다수(多數)의 그리스도, 성령의 사람이 된 뭇 ‘얼나’에게 나뉠 수 있으니 항차 감당치 못할 일이 없을 듯하다.”(193~194쪽)


다석의 얼 기독론과 스승 기독론은 뭇 사람의 영적 자각 속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하는 기독론이므로 다중 기독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나는 다중 기독론보다는 ‘씨알 기독론’이 다석의 기독론으로서 더 적합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씨알은 무수한 다수이면서 생명과 정신의 알찬 개체를 나타낸다. 씨알은 다중의 의미와 실존적 영성의 자각을 함께 나타낼 뿐 아니라 유영모와 함석헌이 함께 사상과 정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2부는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를 논하고 있다. 차축시대는 칼 야스퍼스가 쓴 말로 2500년 전 후의 위대한 영성 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예레미야(예수)가 거의 동시에 나와서 고등종교들이 탄생하고 철학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정신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시대라는 의미에서 축(軸)의 시대, 기축시대 또는 차축시대라고 부른다. 자연종교 시대 때는 자연만물에서 신적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찾았고 국가종교 시대 때는 국가권력과 국가에서 신적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보았다. 차축시대의 영성은 자연이나 국가사회가 아니라 인간 내면(마음)의 이성과 영성에서 신적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발견했다. 사랑, 자비, 인(仁), 진리로 표현되는 내면의 생명과 가치는 개인의 깊은 내면에서 발견되는 것이면서 개인을 넘어서 보편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이것은 배려와 공감의 영성이며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는 황금율(黃金律)의 윤리로 나타난다.


차축시대의 영성은 보편성을 지녔으나 시대와 지역의 제약 속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되고 실천되었다.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그리스철학 등은 차축시대의 영성에서 생겨났으나 서로 다른 전통과 형태를 지니고 있다. 기축시대의 영성과 전통들은 내용적으로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시대의 제약 속에 갇혀 있다. 비민주적 신분계급, 비과학적 미신, 국가지역주의의 한계 속에서 기축시대의 영성은 생겨났고 전파되었다. 이런 시대와 지역의 제약 속에서 민중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종교에 머물렀고, 종교와 철학은 분리되었다. 믿고 따르는 종교는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는 종교, 저 자신의 생활종교가 되지 못한다. 또 종교와 철학이 분리됨으로써 반쪽 진리에 머물게 되었다. 사람의 이성과 영성이 분리되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듯이,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면 온전한 정신에 이를 수 없다.





개체를 넘어 통합의 영성이 핵심이 되는 두번째 차축시대 도래



이 교수는 두 번째 차축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차축시대가 개별성(자유), 초월을 발견한 시점이었다면 두 번째는 “개체를 넘어선 ‘통합’의 영성이 그리스도 이념의 핵심이 되는 시기”다. “상호 나뉘어 발전한 종교들이 우주적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수렴될 ‘결정적 때’에 이르렀다.”(304쪽) 두 번째 차축시대는 믿고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자각하여 실천하는 종교의 시대이며, 서로 다른 종교와 철학이 공감하고 통합하며 합류하는 시대다. 민주화, 산업(과학)화, 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에는 서로 다른 종교와 철학이 회통하고 합류하는 것은 당연하다. 믿고 따르는 종교에서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종교로 전환하는 것도 시대의 요청이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이 회통하고,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종교는 이성과 영성, 철학과 종교의 통합을 추구하는 종교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다석의 사상은 대속적 완결체계로서의 정통적 기독교와 단절함으로써 “축(軸)의 시대의 에토스와 상응하되 종교 창시자들뿐 아니라 씨알모두를 ‘하나’ 곧 대아(大我)의 존재로 이끌었던 급진성에 있어서 두 번째 차축시대 곧 후천시대를 열었다.”(152쪽) 더 나아가 이 교수는 다석의 귀일사상이 “종래-적응주의(마테오 리치), 변증론(濯斯), 그리고 바르티안(海天)-의 유교/기독교 대화의 지평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축(軸)의 시대의 시각과도 충분한 변별력을 지녔”다고 보았다.



귀일사상은 “제 종교의 절대성, 포괄성을 거부하고 자기 종교의 틀마저 넘어설 것을 요구하되, 일체 종교가 ‘하나’, 곧 인간의 밑둥(바탈)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본다.(162쪽) 이 교수는 축의 시대가 인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지만 시대적 한계로서 여성경험을 탈각시켰고, 분화과정이 두드러질 뿐 통합에 이르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분화되었던 종교들이 하나로 모이고 그 하나가 보편적인 인간의 밑둥(바탈)이 되는 때가 바로 후천(後天)의 시대며 두 번째 축의 시대”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분화된 종교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영성을 창출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163쪽)





자기 종교를 넘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닫고 개화되는 후천 시대의 개화



나는 이 교수의 이런 견해에 공감하고 동조한다. 다석은 동서고금의 사상과 정신을 회통시키고, 생각하는 이성과 신통(神通)하는 영성을 통합하는 철학을 제시했으며,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씨알사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 차축시대를 열었다. 씨알사상이 시사하는 두 번째 차축 시대의 영성은 성현을 믿고 따르는 종교를 넘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깨닫고 삶과 정신의 꽃과 열매를 맺는 새 종교의 영성이다. 두 번 째 차축시대의 영성은 민주적이고 과학적이며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 차축시대의 영성과 구별된다.



씨알의 영성은 역사와 사회를 스스로 창조하고 형성하는 주체적 영성이며, 과학과 철학을 아우르고 생각을 강조하는 이성적 영성이고, 동서고금의 종교사상과 철학을 회통하는 종합적 영성이다.





공자 민주 민중의식, 석가 역사 진보 성찰, 예수 이성적 깨움이 부족



차축시대는 민주화, 산업(과학)화, 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오늘의 시대보다 작고 뒤떨어진 시대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차축시대보다 크고 앞서 있다. 공자는 민주정신과 민중의식이 부족하며 노자는 역사를 능동적으로 변혁하는 주체적 영성이 부족하다. 석가에게는 생명의 자람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성찰이 아쉽고, 소크라테스에게는 고통 받고 억눌린 민중에 대한 공동체적 공감과 배려가 부족하다.


예수는 역사성과 공동체성에 충실했으나 역시 시대의 제약 속에 있다. 복음서에 이미 여성 차별의 관점이 나오는 것도 예수의 시대적 한계를 드러낸다. 12제자 가운데 여성이 없고, 오병이어의 설화에서 여성을 빼고 사람 수를 헤아리는 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여성해방과 평등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가르침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해준다. 예수 자신이 여성차별의식을 갖지 않았다 해도 여성평등의 원리를 제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예수는 믿음을 강조했을 뿐 이성적 생각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성적 생각을 강조했다면 제자들이 그렇게 쉽게 “부활한 예수가 구름 타고 올 것”이라는 식의 신화적 사고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민중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늘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민중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나 민중이 새 나라(하늘나라)를 실현하는 행동적 주체임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하늘나라는 오는 것이고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로 들어간다고 했을 뿐 사람이 하늘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점은 강조하지 않았다.


지난 2천년 동안 역사와 사회를 변혁하고 창조해가는 민중의 역사적 경험이 축적되었다. 민중이 민주(民主)가 되었다. 민중이 세상과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다석의 씨알사상에 따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와 역사의 씨알로서 자신의 얼 생명을 스스로 자각하고 실천하여, 사회와 역사를 지어가고 새 시대를 가져온다.



3부는 생명과 생명진화에 관한 생물학·철학·신학의 논의를 하고, 생명진화와 종교를 중심으로 다석의 신학과 사상을 논하고 있다. 이 교수는 생물학적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을 넘어서 생명의 신적 깊이를 본다. “죽음 역시도···더 깊은 우주에 이르는 통로”이며, “삶과 죽음 나아가 부활을 통해 진화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진화론적 신학의 영성”이다.(297쪽) 이 교수는 과정철학적 진화유신론과 책임을 강조하는 한스 요나스의 생명철학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과정철학적 진화유신론은 자연생명세계의 형이상학적 깊이와 높이를 드러냈으나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에 경도되었기 때문에 다종교 상황을 감당키 역부족이다. 한스 요나스는 생명진화론을 받아들여 우주와 세상에서 신의 자기무화를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성을 요구한다. 신생대로부터 생태대로의 전환이 인간의 몫이며 “막 태어난 갓 난 신생아를 향한 무한책임”이 인간에게 요구된다.(301쪽) 이 교수는 진화론적 신학이 생태학적 위기의 긴박성을 놓치고 있으며 요나스의 무력한 신 개념 역시 인간의 책임을 말하기에 미흡하다고 보았다.(302쪽)


다석은 ‘몸나’의 예수를 숭배하지 않고 “‘얼나’로 솟구친 십자가상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다.”(308쪽) “저마다 밑둥에서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다석의 얼 기독론은 “자신의 몸나를 줄여 ‘얼나’로 솟구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308~309쪽) 다석은 자신의 밑둥(本性)을 불살라 몸나를 줄이고 얼나를 세움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자신을 불태워 산제사를 드리는 다석은 다른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보다 오늘의 삶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강조한다.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 교수는 물질에 대한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나 ‘얼나’로 솟구쳐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이 생태학적 회심을 이룬 다석 삶의 본질이었다고 보고 다석을 “우주 대자연의 본질을 꿰뚫은 첨예한 생태 지능의 소유자”로 재해석한다.(270쪽)


다석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 무릎 꿇고 앉아 경전을 보고 묵상하며 진리를 깨우쳤고 하루 한 끼 먹으며 더불어 사는 길을 생각했고 참과 사랑의 말씀을 말하고 실천하려 했다. 김흥호는 이것을 다석의 ‘일좌식 일언인’(一座食一言仁)이라고 했다.



“‘일좌식 일언인’(一座食一言仁)을 통해 근원적 ‘하나’, ‘없이 있는’ 존재를 자신 속에서 깨친 다석의 삶과 지혜는 생태적 능력을 집단지능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277~278쪽)


생명과 생명진화에 관한 논의에서 나는 다석의 생명철학이 생명진화를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석 사상 속에 생명진화의 원리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다석은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 곧게 선 존재임을 강조하고 하늘을 머리에 인 사람이 하늘과 땅과 사람의 합일을 이루는 사명이 있음을 강조한다. 다석이 직립인간을 강조한 것은 생명진화와 직결된다. 사람은 수 십 억 년 생명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땅에서 하늘을 향해 곧게 선 존재가 되었다. 수 십 억 년 생명진화 끝에 사람은 비로소 하늘을 향해 ‘얼나’로 솟구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솟아올라 앞으로 나감’(솟남)을 강조한 다석의 철학은 생명의 진화와 역사의 진보를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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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속죄는 악의 방패도 은신처도 아니다

한국일보 : 속죄는 악의 방패도 은신처도 아니다



속죄는 악의 방패도 은신처도 아니다
김교신, 함석헌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
1893년 '구안록' 집필 당시의 우치무라 간조 부부. 우치무라는 2년 전 1891년 교
육칙어에 대한 불경 사건으로 직장을 잃었다. 포이에마 제공
“믿~슙니까!” 첫 음절에 강세 팍팍 찍은 이 외침은 ‘개독교’의 상징과도 같은, 거부감
이 울컥 밀려들게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얼굴
에 좋은 기운이 흐르십니다’처럼 기분 좋은 찰나라도 선사하는 말도 아닌데, 안 그래
도 큰 호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뜸 믿으라, 믿으면 된다는 말만 반복하는 이유는 뭘
까. 이창동 감독이 영화 ‘밀양’에서 신애(전도연)로 하여금 김추자의 흘러간 유행가
‘거짓말이야’를 틀도록 했음에도, 여전히 기도하고 용서받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
까.
1893년 32살의 우치무라 간조(1861~1930)가 쓴 ‘구안록’은 이 문제를 다룬 기록이
다. 구안록(求安錄)은 제목 그대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
끓었던 자신이 어떻게 그 열망에서 빠져 나와 안식을 구했는가에 대한 기록이며, 그
것은 결국 믿음 뿐이었음을 고백한 글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서적임에도 이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순전히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라는 점 때문이다. 진솔하게 대화했기에 우치무라의 삶은 다르다. 그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탈아입구(脫亞
入毆)의 주창자 후쿠자와 유키치와 정반대 입장에 서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제에
맞서서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면서 국적(國賊)이라 불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을 쓰기 2년 전인 1891년에는 천황이 직접 서명한 ‘교육칙어’를 부인했다는 이
유로 극우의 테러 표적이 되어 직장을 잃고 한동안 가명을 쓰고 숨어 살아야 했다.
애국 세력임을 자칭하는 이들이 벌이는 짓이란 늘 이렇다.
지금은 우치무라의 이런 면모 덕분에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
지 않음에도 엄청난 신도 수를 자랑하는 한국과 달리 사회적으로 존중 받을 수 있게
됐다는 평을 받는다. 동시에 그런 우치무라이기에 민족 감정을 뛰어넘어 김교신ㆍ함
석헌ㆍ송두용 등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도들이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사람이기도 했
다. ‘구안록’을 번역하고 해제를 달아둔 이도 김교신 연구자인 양현혜 이화여대 교수
다.
흔히 믿음을 지니고 평안함을 얻어서 천국을 간다고 한다면, 다들 ‘선행’을 떠올린다.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복도 받고 그런 것 아니겠냐는, 인과응보를 생각하기 마
련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다. 인간은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선행 좀 어쩐다 해서 나아질 건 없다. 아니 오히려 ‘나 좀 착하지 않아요?’라는 마음
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때문에 좋지 않다. 선행이 커질수록 더 위험해진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분량을 넘어서는 자선을 한다면 그 자선은 위선이 되고 만
다.”
망해가는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이었던 우치무라는 편히 살 수 있는 고급 공무원의
길을 포기하고 미국 지적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의 간호부로 일하다가 이 사실을 깨
달았다. 스스로는 자신의 도덕적 훈련을 위한 결단이라 했지만, 그 결정 또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행위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치무라
의 표현은 이렇다. “성서라는 전등으로 내 마음을 샅샅이 비춰보면 나는 하나님을 모
독하는 자요, 사람을 속이는 자다. 나는 그처럼 밝은 빛을 견딜 수가 없다.”
괴로워하다 그게 속죄론의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줄리어스 실리 애머스트대 총장의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자네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
고 매일 그 놈을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네. 왜 햇빛에 맡기고 안심
하고 자네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죄에 막혀 무력해지거나 이미 지은 죄를 핑
계 삼아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그 죄를 십자가를 통해 예수에게 대신 물었고 용서받
았기에 그 다음 할 일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아름답게 생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우치무라는 “나의 전 존재가 응답하고 내 경험이 이를 증명하기”에
“이렇게 미신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진리 중의 진리”라고 확언한다.
우치무라 간조의 묘비 첫줄에 'I For Japan'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그는 애국자였
다. 자칭 애국 세력과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포이에마 제공
그렇기에 선행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조건부 행동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든 자가 기
쁨에 겨워 행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물일 뿐이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사랑에 고무돼 선을 행한다.” 그렇기에 선행이
란 게 남달리 대단한 게 아니다. “자선사업하는 사람을 면전에서 칭찬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가 큰 인물이라면 칭찬을 불편하게 여길 것이요, 소인이라면 칭찬 때문에
타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우치무라가 말하는 이유다.
믿으면, 속죄하면 용서받는다는 식의 흔한 논리에 균열을 낸다. “속죄는 의를 사모하
는 이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는 일갈이다. 관건은 죄를 아느냐다.
“세상에 자기 죄를 깨달은 기독교 신자처럼 곤궁한 자는 없을 것”이지만 “죄에 대해
무감한 기독교 신자처럼 강한 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모르는 이는 가장
“대담무쌍하여 무엇이든 다 하는” 사람이다. 뭐든 다 용서받을 수 있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는 “정의와 거룩을 방패로 삼아 죄를 범하
려는 자도 다 교회로 오라!”고 역설적으로 외쳤다. 이리 보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
양’은 이미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교세 확장이라
는 이름 아래 교회가 앞장서서 그 오해를 심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믿~슙니까!”란 외침은,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요란스럽고 장황하게 늘
어놓는 말의 성찬은, 그에 맞춘 열광의 도가니는 정작 믿음과 별 상관이 없다. 어쩌
면 그토록 요란하게 떠드는 건,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일 수 있다. 염치와 성찰을 찾고 싶다면, 종교와 무관하게 한번 읽어 볼만하다.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시인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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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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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 2011. 05. 31
조회수 10314 추천수 0






잠들어있던 동시대인을 죽음의 잠에서 흔들어 깨운 시

존재의 새로움에 대한 비젼, 희망과 혁명, 창조와 전진을 노래





우리는 그동안 함석헌을 고난사관을 설파한 역사철학자, 문명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언론인, 비폭력평화를 주창하는 시민운동가, 무교회주의 신앙로선과 퀘이커신앙에 관계를 가졌던 종교사상가로서 많이 소개받아 왔고 배워왔다. 지금도 진행중인 그러한 여러 측면에서 연구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그런 관심과 노력들에 비하면 ‘시인으로서의 함석헌’연구는 이제 새롭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라고 여겨진다.



이글에서 다루려는 ‘시인으로서의 함석헌 탐구’ 주제는 다재다능했던 함석헌이 문학적 표현능력 면에서, 특히 우리말과 우리글을 다듬고 되살려 빛내는 언어능력 면에서 이룬 공헌을 밝히자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지 않다. 또한 한국 시문학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은 아니지만 「수평선 너머」안에 실려있는 120여편의 격조높은 시작품을 남긴 시인으로서의 함석헌 면모를 재발견하자는데 있지 않다. 그런 목적이라면, 문학이나 시의 세계엔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가 이런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없다.

필자의 관심은 창조적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그의 시론(詩論),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함석헌은 동양적 선비가 흔히 갖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동서양 고전(古典)의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 오늘에 재해석한 사상가 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함석헌의 진면목은 동터트는 새문명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전령자로서, 예언자로서, 신탁을 맡은 사제로서 살고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시대의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운명적 역할담당자를 한마디로 우리 시대언어로서 말 할 때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함석헌 스스로 말하기를 “영의 안테나에 간신히 느껴진 파동”을 크게 부르짖어야 하는 운명적 사명을 가진이 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대선언’이라는 장편시 가운데서도 그의 시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아래에 약간을 인용해보자.


어렴풋한 느낌을 서슴치말고 내 외치자.

물 냄새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움 속의 새싹처럼

가쁜 숨으로

떨리는 맘으로

영의 안테나에 간신히 느껴진 파동을 너는 가장 큰 마이크로 부르짖으라.

길(道)은 뵐 듯 말 듯 (夷)

참(眞)은 들릴 듯 말 듯 (希)

삶(生)은 잡힐 듯 안잡힐 듯(微)

말하는 네 입이 아니

행하는 네 몸이 아니

아는 네 맘이 아니.


위에서 인용한 함석헌의 글 뜻을 음미해보면, 그의 진리론은 20세기 하이데거의 그것과 많이 통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존재망각’의 시대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존재의 근본뿌리를 깊이 사유하기를 강조했던 두 사상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특히 시론(詩論)에 있어서 통하는 점이 많아 보인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사람이 깊이 생각하는 행위 곧 사유는 본질적으로 시를 짓는 행위이라는 것이다. 함석헌도 생각함을 많이 강조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유명한 논설을 비롯하여 그의 종교, 역사, 정치, 사회사상 속에 ‘사유’를 강조한 사상가였다.



하이데거에 깊은 통찰에 의하면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행위중에 시짓기도 있지만, “예술작품의 본질은 시작(詩作)이다”고 말한다. 예술적 창작행위 중에서도 특히 ‘시를 짓는 행위’(詩作)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는 서정적 표현기술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 일, 존재를 개현(開顯)시키는 일종의 계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시인의 역할은 동시대인들이 일상적인 것 속에 매몰되어 속물로 변하고, 진리를 실용성과 효용성의 척도로서 판가름하면서 스스로 자기본질에서 이탈 할 때,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은 성스러운 진리의 소리와 눈짓과 뜻을 순간적으로 감지하여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령처럼, 신탁의 사제처럼, 예언자처럼 전달하여 일깨우는 역할을 감당하는 운명적 사람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함석헌의 표현을 따르면, 길과 진리와 생명은 ‘공개된 비밀’같아서 훤한 것이면서 속된 우리맘의 오염 때문에 가리워져 은폐된것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보인다. 뵐듯 말 듯, 들릴듯 말 듯, 잡힐듯 안잡힐 듯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예민한 ‘영의 안테나에 느껴진 파동’을 붙잡는 사람 이라야 시인의 일차적 자격이 있다.




함석헌은 우리민족이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기에 있을 때, 그의 ‘영의 안테나’에 잡힌 세미한 소리를 노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를 통한 말과 행위와 마음은 함석헌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시의 세계는, 물론 아름다운 서정시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예언시오, 생명의 지성소에서 듣고 본 사제만이 반벙어리처럼 더듬거리는 소리로서 신의 뜻을 지성소 밖에 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시론중에서 “시를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심도깊게 이야기한 그의 시집의 끝에 실린 ‘발문’(跋文)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시작품이 작은 책으로 엮어져 세상에 얼굴을 내보일 때마다 책머리말에 쓴 두 번의 머리글(1953,1961)을 통해서 그의 시에 대한 생각을 먼저 이해하여 보도록 하자.


시를 짓는 일, 낳는 일, 그리고 해석하는 일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저명한 철학자이면서 문예사가였던 빌헬름 딜타이(1833-1911)는 자연과학과 대조되는 정신과학 일반의 특징과 그 연구 태도가 어떠해야 할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학자였다. 이른바 현대적 해석학(Hermeneutics) 이론의 정립자로서 큰 공헌을 한 분이다. 그가 말하는 정신과학(精神科學)이란 요즘의 학문분류방식에 따르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모든 인간정신활동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의 표현된 세계를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인간내면적 삶의 표현들은 문학작품들, 예술작품들, 법률들, 역사기록들, 종교경전들, 철학이념과 시사평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면적 삶의 표현들’을 말한다.



함석헌이 시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딜타이의 ‘삶의 철학’과 그의 ‘이해이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두 사람사이에 아주 중요한 공통관심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관심의 본질은 첫째,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인가적 삶의 체험이 지닌 그 ‘의미’(뜻)를 다시한번 체험하는 것이다는 점이다. 인간개인이나 집단을 움직이게 했던 거대한 물리적 힘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징기스칸이 유라시아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건설자라거나 중국만리장성의 크기나 위용이 중요하지 않다.



둘째, 정신적 삶을 살아가고 표현하는 인간존재의 ‘역사성’에 대하여 심도깊은 이해를 두 사람은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에 의해 영향받아 자기를 형성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혼자서 자기일 수 있거나 살아갈 수 있는 독불장군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정신세계 내면적 체험은 고유한 것, 유일회적인 것, 흉내내거나 모방 할수 없는 인격적 절대성을 지닌 삶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이해도 작가의 내면적 체험을 사진필름 인화해 내듯이 그렇게 동일한 복재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에서 체험된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체험내용을 재구성하면서 추체험(追體驗) 하는 것이지 동일한 원체험을 복재해 낼수는 없다. 함석헌 표현대로 말하자면 “듣는 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


딜타이의 이해이론에 대한 해석학 공식은 흔히 <체험-표현-이해>라고 그가 명명한 삼단계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주장하였다. 체험(體驗)은 일반적인 경험(經驗)이라는 어휘와는 다른 특징을 함의한다. 체험은 보다 생생한 실존적이고도 내면적인 몸 전체가 동반되는 산체험을 말한다. 역동적이고 싱싱한 것이다. 절실하고 절절한 것이다. 그렇게 체험이 그 개인에게나 집단에게 강렬하고 진솔하고 잊을 없을 만큼 큰 의미로 느껴졌을 때, 그렇게 체험된 것은 표현(表現)되지 않을 수 없다. 감탄사를 발하거나 울부짖거나 탄식하거나 노래하게 된다. 그 표현방법은 행동을 동반한 행위예술일 수도 있고, 문학작품일 수도 있고, 음악미술 연극등 예술활동으로서 표현일수 있다. 문자로서 그 원초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길 때는 역사책과 문학작품과 종교경전이 될 수도 있다. 좀더 넓게보면 사회제도나 법질서와 문명자체가 일종의 표현들이다. 표현은 인간의 정신적 내면체험들이 겪었던 내용들, 영혼에 각인된바 감정과 의지와 가치경험을 객관화 한 것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인간적 삶이 동물일반과 다른 점은, 그렇게 표현된 것들의 체험내용을, 시공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재구성해내고 그 내용들을 추체험함으로써 원체험을 다시 ‘이해’(理解)할 수 있다는 신비한 정신적 능력에 있다는 능력인 셈이다. 이 때, 다시한번 주의할 점은 원체험을 녹음테이프에 녹화된 것을 재방영하듯이 판박는 일처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 그릇에 담을 만큼의 분량만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 신비요, 비극이며, 공정함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 의미와 뜻의 세계, 고귀한 자가 경험한 진선미의 진리체험을 작품을 통해 이해하는 일은 권력이나 금력이나 사회적 신분의 높음으로서 쉽게 얻어지거나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란 객관적 설명을 듣고 알아차리는 자연지식과 다른 것이다. 이해란 어떤 정신적 삶을 살고간 생동적인 인간적 체험을 내 영혼 안에서 다시 부활시키는 정신적 창조행위인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이해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독자로서 동일한 함석헌의 한편의 시를 이해하는 경우일지라도, 그 이해의 질과 높이와 깊이는 각각 다를 수 밖에 없다. 성경이나 불경이해에서도 그렇고, 쉑스피어나 플라톤의 작품이해에서도 그렇다. 함석헌은 그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내 영혼 속에서 다시 이해한다는 말은, 내 영혼이라는 관념적 실체가 따로 있다는 신화적 전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으로서 이미 세상에 태어난 이후, 아니 전생경험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내가 경험하고 지닌 ‘삶의 지평’속에서 다시 다른 사람의 작품내용을 되살려 경험하는 기이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평’(地坪)이란 시각적 은유이다. 사람은 각각 자기의 삶 속에서 세상과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평을 갖고 산다. 이 지평이 좁고 심지어 장애물 처럼 되어서 시야가 도리혀 가리워져 있거나 무명(無明)의 안개 때문에 투명성을 잃기도 하지만, 여하튼 자기의 ‘삶의 지평’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해란 지평융합(地坪融合)이다”(가다머)라고 갈파했다. 내가 지닌 지평을 매개로 하여서만 다른 사람의 삶의 지평을 이해하는 것이다. ‘삶의 지평’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의 삶체험이 제한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지평융합을 통해서 기존의 ‘지평’이 넓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질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시론(詩論)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듣는 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 내시야말로 내 것인데, 내

속에서 나간 내 혼정(魂精)인데, 내 아들인데, 나만이 낳고 나만이 아는 것인데, 내 생명의

지성소(至聖所)에서 나와 내님만이 만나서 지난 일인데,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인 일인데,

그것을 누가 안단 말이냐? 알게 할 방법도 없거니와 알게 해서 될 일이냐? 그러나 또 정말

알리지 않을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반드시 알려지는 것이요,또 알리고 싶어 못견디는

것이다. 시는 숨기며 알리는 것이요, 알리며 숨기는 것이다 생명은 드러내놓은 비밀이다.




위 인용구에서 두가지 진리가 맞서며 갈등하면서도 두가지 주장이 참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첫째주장은 시인의 시를 제3자가 시인의 내면세계 지성소에서 체험한 그대로 이해 할수 없다는 인간 인식론적 한계와 절망과 슬픔의 면모이다. 다른 또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는 이해되기를 기다리며 이해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 생명, 진리, 하나님등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숨기면서 알리고, 은폐되면서 계시되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진실한 실상을 한마디로 집약해서 함석헌은 “생명 혹은 하나님은 드러내놓은 비밀이다”라고 표현한다.



‘공개된 비밀’이라는 표현은 역설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공개성과 비밀성, 은폐와 계시, 없음과 있음은 서로 논리적 개념으로서는 반대되고 충돌되고 모순관계의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없이 계신 하나님’(유영모) 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나 생명이나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내놓은 비밀’(함석헌)이라고 말하거나 역설적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실재 그 자체(생명, 진리, 하나님)가 역설적이어서 그런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성 때문인지는 알수 없다. 후자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인간이 생명, 진리, 하나님등을 생각하거나 말 할 땐 어쩔수 없이 인간관계에서 말하는 것이요 인간자리에서 말하는 것이니까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수평선 너머」의 후기(後記, 跋文)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함석헌의 시론중 또하나 중요한 점은 “시를 짓는다”라고 보지 않고 “시를 낳는다”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짓는 것이나 낳는 것이나 같은 말이고, 뒤의 표현은 앞의 표현을 좀더 시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 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그보다도 좀더 깊은 뜻이 그 말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은 언젠가 생각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이라고 구별한바 있다. ‘하는 생각’은 데카르트가 말하는바 저 생각하는 인식주체가 자기의 오성과 이성능력을 구사하여 사물의 이치와 삶의 연기적(緣起的) 관계를 추리하고 추론하고 논증하고 설명하는 지성의 행위다. 생각하는 주체자로서 책임성과 깨어있는 분변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생각 중에는 이상하게도 ‘나는 생각’이 있다. 불현듯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일이 생각난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나는 생각’은 두뇌속에 내장되었던 기억의 회상만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예술적 영감을 말 할 때도 ‘나는 생각’이라는 범주에 든다. ‘나는 생각’도 두뇌작용을 거치겠지만 그 기원과 출처는 두개골 안에 담겨있는 큰뇌의 세포덩어리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온다. 마치 텔레비전의 영상이 텔레비전 기계의 하드웨어를 통해 나타나지만, 그 드라마나 뉴스의 전기신호적 발신은 안방이 아니라 수백킬로 떨러진 전파방송국인 이치와 유사하다.


시를 낳는다. 인생이란 여죄수(女罪囚)가 이 사회란, 이 교회란, 이 가정이란, 감방 안

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는 유화부인(柳花夫人) 모양으로 이 감방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만나 남모르게 애기를 배었던 것이다. 처녀는 애기를 낳으면 젊음이 빠지고 아름다움이

잃어진다 하지만, 인생은 시를 낳으면 낳을수록 더 젊어지고 고와간다..... 이 세상이 감옥

아니냐? 분명 감옥 아니냐?....시를 낳았으면 그 곳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함석헌은 참된 시는 짓는것이 아니라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듯 수태하여 애기낳듯 몸에서 출생시키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것도 보통 여인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여인의 잉태와 출산에 비유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구려시조 주몽설화를 예로들어 유화부인이 어두운 방속에 갇혀있다가 한줄기 빛을 받아 태기가 생기고 알을 낳고 알에서 주몽이 나왔다는 난생설화를 예로 든다.

어두운 감방에 갇힌 상태란 인간실존이 비본래적 상태속에서 시달려야 하는 타락한 세상, 병든세상, 물상화된 세계를 상징한다.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은 죄수처럼 갇혀살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빛이 창틈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듯이, 진리의 빛이나 소리를 접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새생명을 낳는다면, 감옥은 감옥이로되 새아기 탄생한 기쁨으로 인하여 산모나 감방에 함께 옥살이하던 죄수들은 기쁨을 맛본다. 이미 그 곳은 감옥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어두운 감방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그 빛을 받아 수태하게되는 생명의 잉태, 그리고 수태한 생명씨를 열달동안 배속에서 키워 몸 밖으로 내보내는 출생 비유이다. 진정한 시란 기교적인 언어놀음 이거나 인간의 희비애락의 감정표현의 수사적 표현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주장을 하는 셈이다. 시인을 거룩한 생명의 씨를 받아, 뱃 속에서 남모르게 키워서 출생시키는 아이낳는 산모에 비유했다.


참다운 시는 생명낳는 기쁨과 같아서, 잠시동안 감옥속에 갇혀 인간다움과 웃음과 기쁨과 생명의 환희를 잃어버린 동시대인들에게 그것들을 다시 되찾게 해준다. 잊어버린 사람의 본래성을 되찾게 하고, 타향에서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서 고향에로의 ‘귀향’하고자 하는 희망과 뜻을 일으켜준다. 그래서 진정한 시는 비본래적 상태에 빠져있는 인간 실존에게 ‘해방과 구원의 능력’을 가져다 줄수 있는 것이다.


시의 언어로서 상징과 비유


함석헌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그의 시작품만이 아니라 그의 저술물들이 유난히 상징과 비유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과, 상징이나 비유가 갖는 위대한 진리개현(眞理開顯)능력과 거기에 따른 위험을 동시에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들면 그의 대표적 저술물이라고 평가받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구성하는 핵심어휘들(key words)열거해 보면 뿌리, 씨, 숲, 수레바퀴, 수난의 여왕, 씨, 미완성곡, 중축이 부러진 역사등등이 모두 비유와 은유로 가득차 있다. 하물며 그의 시작품은 비유와 상징어로 가득차있다. 유명한 ‘맘’이라는 시제(詩題)의 첫구절과 끝부분의 단락만을 예로 들어보자.


맘은 꽃

골짜기 피는 난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씨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

모든 자람이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사행시(四行詩)로 구성된 위의 짧은 두 문단 만으로서도 사실 함석헌의 ‘씨사상’과 ‘역사철학’이 말하려는 내용의 알짬을 다 표현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시의 일단은 단순히 골자기에 피어있는 식물로서의 난초가 어떻게 성장하고 꽃을 피우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곡식의 씨열매가 어떻게 영글며 또 다음세대의 종자씨앗이 되는 가를 설명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꽃, 골짜기, 썩어진 흙, 먹고자람, 향기를 발함, 씨, 꽃이 떨어져 여뭄, 자람과 끝, 형상, 어머니 등등 모든 단어 하나 하나가 엄청난 내용을 그 안에 담고있는 고도의 상징적 은유인 것이다. 인간존재의 역사성, 전통에 빚지고 사는 해석학적 존재성, 실존의 고유한 주체성, 인격체의 꾸밈없는 순수성, 고난을 통한 생명의 성숙원리, 미래희망과 책임성 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라는 문학장르에서 비유의 기능을 살피기전에 인간적인 삶의 독특한 형태로서 비유(比喩, parabole)가 지닌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비유를 헬라어로서 ‘parabole" 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para’(옆에)와 ‘bole’(놓다)의 합성어로서 하나의 비교점을 가지고 서로 다른 것을 나란히 놓음으로서 체험과 사물의 깊이를 드러내거나 느끼거나 깨닫게하는 사유적 언어행위다. 비유(比喩, parable)라는 폭넓은 개념안에는 직유(直喩,simile), 환유(換喩,metonymy),풍유(諷諭,allegory), 은유(隱喩,metaphor)) 등이 있다.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나란히 놓으면서 강조하는 비유법이어서 복잡한 변증법적 긴장같은 것은 없다. 직유법의 예문을 든다면, “공나물시루 같이 사람이 발디딜틈 없이 방한칸에 앉아야만 했다”. 혹은 “내 누이의 얼굴은 보름달같이 둥그렇게 생겼다”등이다. 환유는 사물의 한 특징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법이다. 예들면, “빵문제가 해결되어야 염치를 찾게된다”. 혹은 “감투싸움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민생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등이다. 여기에서 빵은 물질경제생활을 말하며 감투는 공직상의 높은 직위를 말한다. 풍유는 우의법(寓意法, allegory)이라 칭하는 비유법의 일종인데, 비유에 동원된 어구나 단어를 일종의 암호같은 것으로 보고 정신적-영적 의미해석을 부여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전구절의 해석에서 흔히 영해(靈解)라고 하는 것이다. 예들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쫒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있는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라디아서 4:30)같은 비유법이 풍유이다. 여기에서 여종은 율법적 종교 창출한 유대교를 우의적으로 상징하고, 자유있는 아들은 바울이 경험한 새로운 초대기독교의 복음을 상징한다.


인간의 사유와 언어는 본질적으로 항상 은유적인 것이다. 은유(metaphor)는 비유중에서 가장 복잡한 상징기능을 동반하는 비유법이어서 시문학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비유는 인간의 삶 그자체이고 ‘확장된 은유’(extended metaphor)라고 볼수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에서만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삶의 전반이 비유없이는 이뤄지지 못한다.

비유의 한 형태로서 은유는 항상 그 내면적 논리구조가 “그것은 ...이면서 또한 아니다”라는 긍정/부정의 동시적 기능을 통하여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고도 풍요로운 의미에서 말하건데 비유는 곧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비유의 한가지 형식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다.


인간적 삷체험에서 위대하고 심원한 근본 주제들, 예들면 사랑, 생명, 영생, 진리, 죽음, 희망, 두려움, 은혜, 거듭남 등을 이야기하려는 시인이나 예언자들은 항상 비유(은유)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하고 심원한 그 체험과 실재 ‘이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이 아닌 ‘저것’을 말하면서 그 양자사이의 닮음과 닮지 않음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잘 알려지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은폐되어 있는 실재의 깊이를 알게하는 것이다. 비유(은유)의 특징은 그러므로 항상 ‘...이면서 동시에 ...이 아니다’라는 부조화, 창조적 긴장, 비관습성, 놀라움, 변혁, 다양성, 개방성, 급진성을 촉발시킨다. 본래 영문학을 전공했던 저명한 미국의 여성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은유는 충격을 던지고 서로다른 것을 결합시키며, 관습을 뒤집고 긴장되게하며, 함축적으로 혁명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상징적이고 성례전적인 사유는 제사장적 특징을, 은유적인 사유는 예언자적 특성을 지닌다. 전자가 이미 현존하는 질서의 통일성과 완성을 기다린다면, 후자는 앞으 로 실현되어야 할 변화의 가능한 질서와 통일성을 시험적으로 투사한다.


앞에서 잠시 인용한 함석헌의 ‘맘’이라는 은유시를 다시한번 음미해 보자. ‘마음’이라고 순수 우리말로 표현했지만 ‘마음’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마음은 의식이면서 의식을 넘어서는 신령한 측면이 있고, 육체를 넘어서는 자기초월적 기능마져 보이면서도 철저히 육신의 감각기능이나 생화학적 조건에 영향받고 있다. ‘마음’은 자기초월적 정신능력을 지닌 주체적 인격이요 실존적 자아이다. 다른무엇과 바꾸거나 대체할수 없는 고유성과 독자성마져 갖는 신령한 단독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마음’과 나란히 ‘마음’하고는 전혀다른 골짜기에 핀 난초 ‘꽃’을 나란히 놓고 다른 차원을 열어 보이려한다. 비관습성과 놀라움과 변혁을 준비하게한다.


꽃이 ‘썩어진 흙’을 먹고 자란다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자명한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자기초월적 주체적 자아’가 독존적 존재가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정신적 토양속에서 영향받고서 성장성숙해가는 사회적 존재요 역사적 존재이며 관계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끝부문의 4행시구로서 시인 함석헌은 ‘마음’을 ‘씨’과 나란히 놓고서 평소엔 깊이 자각하지 못했던 인간존재의 통시성(通時性)을 부각시킨다. 개인의 지난 일생만이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씨은 ‘모든 자람의 끝열매’이듯이 개인 실존을 “아브라함이 낳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 할수 있는 무한과거에 까지 소급하여 연장시키고, 또 무한한 미래에로 이어져갈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한다. 인간 실존은 미미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생명전체와 연대하여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하여, 자기밖에 모르는 자폐증 환자같은 이기주의적 자아중심주의가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관인가를 저절로 깨우치도록 놀라움과 변혁성을 급진적으로 선물한다. 속물적 타성에 젖어살던 잠든바나 다름없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 자각적인 씨로서 재탄생하도록 격려한다. 좋은 시는 통속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면목을 문득 보게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혁명하도록 변혁과 창조적 고통마져 용기를 가지고 수용하기를 촉구한다.






비유의 문자화는 치명적 독, 그것의 교리화는 우상


사람의 삶이 비유적이며 은유적임으로 인하여 동물 일반과 사뭇 다른 정신적 삶을 살수 있고 존재의 다양한 면모와 열려진 차원을 보고 느끼도록 촉매한다. 그런데, 비유나 좁은 의미에서 은유란 언제나 그 본질이 “...이면서 동시에 ... 아닌 것”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긴장과 틈새 속에서 진리의 얼굴을 언듯 보이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긴장과 역설적 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 비유(은유)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심지어 교리화하여 사람 삶 속에 독을 만들거나 우상을 만들어 이성을 마비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



함석헌의 시는 이것과의 싸움인 것이 많다. 예들면 그의 말년의 종교적 장편시 ‘흰손’은 기독교의 ‘십자가 피에 의한 속죄론’이라부르는 가장 심원한 은유적 진리를 문자화, 물상화, 우상화 해버린 기성교회의 독소에서 사람 영혼을 해방시키려는 예언자적 교리비판시 이다. ‘흰손’이라는 제목의 시를 평면적으로 읽고서 함석헌을 오해하면, 그 사람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초대교인들의 증언 “예수의 피로써 새 생명을 얻었다”는 고백적 명제를 미신, 주술, 비인격적 물상화, 어리석은 자들의 맹신따위로서 매도해버리고 함석헌이 ‘대속론’을 폐기 하고 무효화 시켰다고 가볍게 속단한다. 그렇게 속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피상적 이해인 것이다. 함석헌의 진의는 그렇지 않다.


“예수의 피로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종교적 비유와 상징적 언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교리적으로 우상화시킨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지 폐기시키거나 무효와 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세계적 신약학자 루돌프 붙만(R.Bultmann)의 소위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이 신약성경안에 나타난 신화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실존적으로 재해석 하려는 것에 본래 뜻이 있음과 같다. 종교적 고백언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교리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의 오류 못지않게, 합리적 논리와 계몽된 지성의 눈으로 비판하면서 무조건 ‘대속론’을 우숩게 여기는 사람과 신화를 고대인들의 무지한 지식표현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유와 상징을 이해못하는 ‘계몽된 장님’이 되는 것이다.


콜린 터베인(Collin M.Turbayne)은 생동적이고 사람에게 놀라움과 생기발랄한 통찰력을 가져다주던 살아있던 비유(은유)가 어떤단계를 거쳐 죽은 비유, 굳어진 비유, 독소를 품은 경직된 교리나 우상물로 변질해가는지 설명했다. 사물과 사건과 인생의 깊은 속을 폭로하면서 진실을 눈치채도록 하는 좋은 비유(은유)가 처음 이야기되면, 제1단계에서는 보통 사람들은 낯설고 비습관적 표현이기 때문에 시쿵둥하거나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제2단계는 사람들이 던져진 비유(은유)가 말하려는 속뜻을 알아차리고 즐기며 환영하고 통찰력을 얻고 유머감정 마져 만족시킨다. 이 제2단계가 비유(은유)의 절정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삶의 상황이 변하면서 비유(은유)는 “...같으면서 동시에 ...같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적 긴장이 살아지고 상투적인 것, 진부한 것, 굳어지고 말라빠진 빵처럼 된다. 심하면 곰팡이가 피어나서 교리적 도그마가 되거나 우상화 되기도 한다.


문학작품 특히 시작(詩作)은 비유(은유) 없인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누이 앞에서 말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시중에는 아예 시의 작품제목이 ‘비유’로 되어있는 시가 있다. 말하자면 ‘비유’를 시로서 노래하는 셈이다. 그 ‘비유’라는 작품 전체를 아래에서 인용하여 감상해보기로하자.


드러내놓으면서 숨김

숨기면서 드러내놓음


가리움으로 보여줌

보여줌으로 가리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음

옅은 것 속에 깊은 것이 들어 있음

껍질 속에 들어있는 알

거짓 속에 들어있는 참


시간속에 영원이 깃들였다

땅위에 하늘이 나려와 앉았다


성령이 마리아 뱃속에 드셨다

말씀이 육(肉)이 되셨다.


그것은 꽃송이요

그것은 흐르는 시내요

그것은 비치는 호심(湖心)이요

그것은 음악이다


함석헌의 시 ‘비유’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첨 두행은 비유의 본질을 더 없이 간결하게 비유의 본질을 갈파한다. 비유법이란 그 본질적 특성이 어떤 진리나 실재의 깊은차원을 보이도록 드러내놓으면서 숨기는 것이요, 숨기면서 드러내놓는 현상이고, 실재를 가리움으로써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리우는 기능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다. 비유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비유란 “...이면서 동시에 ...아니다”라는 논리아닌 논리, 반대의 역설적 일치, 부정을 통한 긍정, 긍정을 통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들, 특히 심원한 종교적이거나 철학적 진리개현(眞理開顯)의 시적 표현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려면 말이 않되는 말이고, 합리적 이성논리로 보면 자가당착적 모순 명제들이다. 시간 속에 영원이 깃들고, 땅위에 하늘이 내려와 앉았고, 신령한 령이 육신을 가진 마리아 뱃속에 자리잡고, 말씀(로고스, Logos)이 육(사르크, sark)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유와 은유를 통하여 가장 심원한 진리를 전달하려는 표현인데, 이 표현을 보수적 기독교 정통교리주의자들은 ‘신의 전능교리’를 전제로 하여, 문자적으로 마리아가 남자없이 아기예수를 잉태했다고 믿어야 옳다고 우기게 된다. 제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33년간 땅위를 걷고 살으셨던 예수는 ‘전능신의 초자연적 기적’에 의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지상에 나타나서 33년간 진리를 가르치고 다시 승천한 신화적 인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정통교리주의자들은 종교독에 침윤되어 진리를 모르고, 경건한 우상숭배자가 되어 다른종교를 우상이라고 공격하는 독선주의자들이 되고 만다. 그들은 비유와 은유를 실증과학적 명제로서 받아드리려는 어리석음을 ‘돈독한 신앙인의 표징’이라고 강변하는 셈이다.


‘비유’라는 위에 인용한 시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그 것은’이라고 첫마디를 반복적으로 지시하고 있는데, ‘그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현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꽃이요, 흐르는 시내요, 비치는 호심이요, 음악이라고 노래한다. ‘그것은’ 이란 시의 앞절에서 말한 시간속에 영원이 깃듬, 땅위에 임한 하늘, 자궁속에 들어오신 성령님, 육신이 되신 진리의 말씀을 뜻한다. ‘그 것은’ 특수한 종교적 영역에서의 예외적 기적의 사건사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눈 뜨고 보면 삼라만물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렇게 비유로서 말함으로써 꽃, 강, 호수, 음악을 경제적 효용성이나 인간중심적 실용성과 능률성 잣대로서만 측정하며 지내왔던 ‘무명(無明)의 백내장’(구상) 시각장애인들을 눈뜨게 하는 것이다. ‘이념(理念)의 사팔뜨기 핏발선 눈동자’(문익환)를 지니고 살던 살인기계가 다되어버린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존재 혹은 진리 혹은 하나님 혹은 생명 그 자체의 황홀한 현존과 충만한 영광을 느끼고 보도록 촉매한다.






함석헌의 은유시에서 저항과 창조적 새로움


비유(은유)가 살아있을 땐, 역설적 긴장 속에서도 진리를 드러내고, 사람의 사유를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만들며, 언제나 생명이란 창조적 과정속에서 변화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비유를 구사한 인류의 성현중에서 석가모니와 예수는 가장 탁월한 비유를 말 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그들의 비유적 가르침은 기성세계를 설명하거나 안존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고 혁명시키는 에네르기를 제공했다.



함석헌의 시작품 들 중에는 서정시도 있고, 장편시도 있고, 산문시도 있고 시 형태상으로는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함석헌 시의 세계가 지닌 진면목은 그의 은유적 비유들이 우상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의 발로이며,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트려 창조적 새로움에로 발돋음하게 하려는 산모의 진통소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완성’ 이라는 작품 일부와 ‘대선언’이라는 작품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그 사실을 확인해보자.


미완성


높은 봉우리에 애타는 동경(憧憬)의 얼굴 빛 있고

날뛰는 바다에 풀지 못한 분노의 울부름 있고

오고 가는 바람에 잊지 못하는 탄식이 속삭임 있고

벌럭거리는 심장엔 영원히 이루지 못하는 이상의 불탐있고.


(중략)


완성은 반갑다고 누가 그러나?

끝맺음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나?

얻어들음은 즐겁다고 누가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영감(靈感)의 거장(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줄 모르는 절대의 의지.


영원의 미완성,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그 가슴엔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마다 제대로 무한한 즐거움,

끝없이 닫는 영의 헐떡이는 염통엔

찰나 찰나의 고동의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한 이김.


(후략)


위에서 부분 인용한 ‘미완성’ 이라는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일체의 기성의 정치경제 제도, 철학, 과학, 예술, 종교등 그 무엇이던 간에, 기존의 것과 기성의 것의 타성과 편익에 젖어 생명의 창조적 약동을 부정하는 일체의 사상과 인생관에 저항한다. 그는 저항의 시인이다. 하물며 기존의 제도와 사상과 사회질서가 기득권자들의 자기합리화를 돕는 ‘거짓 위장품’인담에야 시인의 저항정신은 비유를 통한 시작품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의 생애후기의 종교시 ‘대선언’의 일부를 읽어보아도 저항정신과 창조적 새로움을 향하는 산고의 진통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진면목이 여실하게 들어난다.


대선언


.......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탑 담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생명은 난 끝에 있나니

레바논 백향목의 자람 그 순 끝에

역사의 나감 시대의 뾰죽한 끝에

거룩한 영의 피어남 맘의 풋 끝에

묵은 가지의 짙은 그늘을 수북이 두고

생명의 원줄기는 사정없이 올라만 가나니


부사산 민고 눈물 흘러 넘쳐 윗뎀베르히 높은 숲에 대들었듯이

태평양은 또 무한의 구름을 일으켜 그 봉우리를 닾고야 말리라

굳어진 가톨릭 성다락 북유럽 광산군의 망치에 부셔졌고

얼크러진 프로테스탄트 그물 동아시아 무사의 칼에 찍혔고

그리고 역사는 또 나갔더라

무섭게 날개치는 그 바퀴가 오늘 너와 나를 끌지 않나


어렴풋한 느낌을 서슴치 말고 내 외치자

물냄새 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움 속의 새싹처럼

가쁜 숨으로

떨리는 맘으로

............

...........


생명은 연약해보이지만 모든 것의 맨첨에서 새로움의 도약을 시작한다고 노래하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개신교 신앙형태와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의 무교회 신앙형태에 안주하지 말고 그것들도 초극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자신과 확신이 넘쳐서 그리하는것 아니라, 목말라 달리는 약대의 가쁜 숨처럼, 스며든 작은 빛 잡으려는 어두운 움막 속의 새싹처럼 떨리는 모험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위의 ‘대선언’시는 특히 정통기독교의 교리적 ‘대속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그 교리가 만들어지기 전의 본래 뜻을 붙잡도록 하려는 신학논쟁적 종교시이지만, 깊은 은유와 비유로 가득차 있다.

함석헌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자연주의 문학의 ‘서정시’도 아니고,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감옥에서 강단에서 논밭에서 시장바닥에서 느꼈던 자신과 민중의 감정적 희비애락을 노래한 좁은 의미의 ‘참여시’도 아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있다. 함석헌의 시는 우주와 생명, 자연과 역사의 가장 깊고도 높은, 강하고도 여린 형태속에서 ‘비유’가 표현하려는 본래적 인 것 곧 존재의 새로움에 대한 비젼, 희망과 혁명, 창조와 전진, 대신 고난당하는 생명의 대속원리를 노래하려는 ‘역설적 진리의 증언자로서 시대적 안테나’ 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자, 예언자요, 철인이자 농부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잠들어있던 동시대인을 죽음의 잠에서 흔들어 깨워놓고 새로운 문명의 여명기에 씨시대가 열렸음을 힘껒 외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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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김경재 목사, 한신대 명예교수. 크리스천아카데미, 함석헌, 시인, 씨알, , 기독교, 진리, 하이데거, 존재, 예수, 대선언, , 교리, 통합, 예술, 창작, 은유, 생명, 파동, , 안테나

김경재 목사근현대 한국 정신사의 한 획을 그은 함석헌 선생과 한신대·기독교장로회 교단 설립자 장공 김재준 목사 등 양대 거목으로부터 진리를 배운 신학자. 전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이자 한신대 명예교수.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내며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메일 : jacobjae@chollian.net      

[기획연재(36)] 함석헌의 대속사상(代贖思想) - 들소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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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36)] 함석헌의 대속사상(代贖思想)[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직전 이사장 문대골





[1474호] 승인 2013.01.30 12:18:30








생각하는 사람 함석헌.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의 가슴에 한 '생의 과제'를 품고 있었다. 진리를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진리를 찾아가야 하는 과제만큼이나 그를 힘들게 하는 논리가 하나 더 있었다. 진리란 결코 붙잡히지 않는 것이라는.
'진리란 결코 사람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란 곧 그 진리를 붙잡자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빈 손이었다. 이승훈도, 유영모도, 내촌도 함석헌에겐 예외없이 내버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조직 불교, 조직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조직불교의 석가, 조직 기독교의 예수도 함석헌에게는 결코 진리일 수 없었다. 세계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그토록 절대진리로 절규하는 구주예수, 믿음, 대속, 영생하는 것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힘이거나 논리(理)이거나(심지어 '진리'라 하는 것까지도) 함석헌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거나 붙잡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천하사람들이 '절대'라 하고, '님'이라 하고, '진리'라 해도 그는 '아니' 하고, '글쎄'했다. '붙잡았다' 하는 순간 놓아야 한다. 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함석헌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그는 변화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가고, 가고, 또 가야하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함석헌은 '이것이다', '여기다'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것이었다. 함석헌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라 하면서도 한국의 기독교, 특히 대교회 중심의 정통주의자들로부터 타락한 자, 이단, 지옥 갈 자 운운하는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들어야 했던 이유였다.

'그는 변했다', '그는 아니다' 소리는 기독교의 정통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 특히 무교회의 지도층 인사들까지도 그랬다. 특히 함석헌이 그의 믿음의 친구들로 '함 선생이 변했다' 하게 한 대표적인 강론이 그의 구원론, 곧 대속론(代贖論)이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속죄(贖罪)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인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담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도덕인간에게 대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복음주의의 신앙의 대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전에 선생이(내촌감삼·필자 주) 해주었던 말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거기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체험 보다는 감정(emotion)의 도취인 것 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을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느니,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느니, 자기가 죽는다느니, 완전히 새로났다느니 하는 말을 지금도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거기서도 분명치 않으면서도 서로 묻지 않기로 말없이 약속한 묵계가 있어 슬쩍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감정형으로 된 사람들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파고드는 사색형의 사람에겐 그것만으로 아니됩니다.

그러면 사색하는 것은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고 정죄합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신앙은 아무것도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린이의 것일 것입니다.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안되는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계에서는 행동하는 도덕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든 미신에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없는 자에게는 대속이란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해 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에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라는 체험엘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벌써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아닙니다. 그런즉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조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은 없이 대신해 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이 못일어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속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습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날의 진 빚을 물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죄를 아니짓게 돼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끝없는 문제이지만, 나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내 식으로 풀어버렸습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예수를 골고다로 이끌어간·필자 주).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딴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내 육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해서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자기 중심적 감정뿐이요, 도덕적으로는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죄, 곧 죄성(罪性)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전집 4, p.219∼220).



함석헌, 한국기독교계에 불을 던지다


“나도 자유하는 인격을 가진 이상 어떻게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겠느냐?”, “체험은 이성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유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대신해 주겠다는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 해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라는 소위 함석헌의 이 속죄론이 말이 되는가?

예나 이제나 한국기독교로선 가톨릭에게나 프로테스탄트에게나 용서할 수 없는 역천(逆天)이었다. 그래서였다. 개신교에서 함석헌은 개신교의 강단에 세워서는 안된다고 일사분란(?)의 결의를 했고, 심지어 가톨릭의 한 신부는 '함석헌 씨는 회개하라. 천국은 있다'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절대의 도그마로 가지고 있는 그 준엄한 '천당 지옥'까지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있지도 않은 천당, 지옥 가보기나 한듯이 있다하여서 영혼 건져주마 하는 대신 이 세상에서는 개, 돼지 같은 살림에도 만족하고 정신적으로 거세를 하며, 이리 같은 압박자들이 맘 놓고 해먹도록 해주는 대신 신교의 자유(信敎自由, 신앙의 자유는 사실 하나님이 양심 위에 주는 수밖에 없는데) 얻어가지고 실속으로는 제가 세상에서 향락하는 보장을 얻어야 하겠으니 나는 천당, 지옥은 아니 믿어도 내 양심에 내리는 하나님 명령이 무서워 그런 짓(목사, 신부 노릇·필자 주) 못한다.”

천당, 지옥을 어떤 공간으로 믿는 종교(?)의 입장에서일 경우 함석헌은 지옥에 보내야 옳다고 보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과 그 신부를 더할 수 없는 친구로 만들어준 것은 기이하게도 1972년 박정희의 유신 쿠테타였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몸으로 거부하던 두 사람은 10수년 후 몸으로 만났다.

민주, 씨알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역사 신앙의 자리에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 되었고, 후에 갑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긴 그 신부는 명동성당 안의 한 별체에서 가료를 받아야 했는데, 함석헌은 수차례 그를 찾아 손을 잡고 격려하면서 뜨거운 우정을 이루어갔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하나로 묶은 종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는 것일까?


함석헌의 변질(?)에 우는 사람들


변해야 하는 사람 함석헌! 동경고사 유학 중에, 졸업하면 고국에 돌아가 성서조선, 성서민족운동을 하기로 깊은 맹약을 했던 여섯 동인 중 한 사람인 송두용의 추모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였다.

함석헌은 송두용 보다는 3년 연상의 나이였지만 아직 건강한 몸으로 이 동우의 추모식에 참석했는데, 이 추도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게 된 한 함석헌의 지인이 말하기를 “흔히들 아는 사람들은 함석헌 선생을 두고 다섯번 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늘 가신 지 1주년을 맞는 송두용 선생은 일생동안 오직 한길을 걸어오신 분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함석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계시받은 절대의 진리를 붙잡고 살아온 완성의 사람과 절대의 진리(?)를 붙잡기 위해 달려온 미완성의 사람이 함께 한 자리였을까? 함석헌을 두고 애증간(愛憎間)을 숨질때까지 오고간 사람이 최태사(崔泰士)일 것이다. 그는 일부러 틈을 내어 함석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을 위한 그의 기도는 6·25를 계기로 해서 그 내용이 전혀 달라지고 있었다. 최태사의 기도는 순수했다. 그는 중심을 기울여 오산시절의 함석헌(내촌의 함석헌·필자 주)이기를 기도한 것이다.

최태사는 내촌의 대속사상, 십자가의 은혜, 구원을 입은 자의 내적평화와 자유를 철기둥처럼 신봉하는 무교회의 신자였다. 그 신앙의 51%는 함석헌에게서 온 것이었고. 그런데 '선생님이 딴소리 하신다!' 아, 그것은 최태사에겐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최태사의 생각엔 선생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누리시고 계실까 의심마저 드는 것이었다.

'아, 선생님이 주님께로 돌아오셔야 하는데….'

최태사는 선생님의 타락(?)에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냥 달라져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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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2


2012년 08월 20일 18:59:15 심의석 자유기고가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이 사건 이후 함석헌은 “죄는 참말로는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가를 누누이 강조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룬다. 여기서는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그의 속죄 과정을 살펴본다. 60년 동안 쌓아온 그의 빛나는 생애를 모래탑에 비유한 그는 이제 남은 30년 생애를 속죄과정으로 채우면서 다시 일어선다.

1960년 10월 9일에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18-25)에서 함석헌은 “아아,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라고 절규한다. 이 편지에서 일부를 발췌해보자.

“나는 지금 대한교련(大韓敎聯)에서 주최한 전국교육자대회에 나가서 시민으로서 격려사를 하라고 해서 말을 하고 왔소. 나는 끌려 나간 거요. 아니 나가야 할 내 처지인 줄 알면서도 나갔어요. 지난 18일 일이 터진 후 하루도 평안할 날 없어요.

일반 세상에서는 아직 모르지만 친구들은 내 잘못을 아니 데모를 한 거요. 그래 어디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거요. 나도 그리 생각해요. 하지만 그리 아니 되는 점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왔지요. 외국행도 그래 생각한 거요.

글을 써라 말을 해라, 실속 모르는 사회는 자꾸 요구하지요. 매일 몇 사람 혹 청년 혹 원로들이 오지만 속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사회 형편으론 내가 뭐라거나 말해야 할 사정인 것도 알지만 이 이상 더 속임의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유(영모) 선생님, 또 여러 친구들도 다 내가 근신해야 할 것을 말씀들 하지요. 거래는 통 없지요. 참 연옥이에요. 여기다 비하면 이때까지의 풍파는 아무것도 아니요. 형은 순풍의 길이지. 부디 이 앞 배의 파선을 거부하시오.

오늘도 나갈 수 없는 건데 내 사정 모르는 사회는 꼭 나와야 한다고 막 끌어냈어요. 이것이 허위생활 하는 나의 받는 심판이에요. 그래 각오하고 나갔지요. 죽을 각오 하고. 내 마음 아무도 모를 거요. 나는 지금 향리에서 망나니 생활 하던 놈이 갈 곳 없어 돌격대에 지원병 나가는 심리예요. 그밖에는 나의 재생의 길 없어요. 내 죄를 나의 지는 십자가로 속(贖)해야지. 대속(代贖)이 뭐요, 자속(自贖)이지. 나는 죽어야 해요. 이 죽음이나마 이용해보라는 거요. 그래 나는 애써 호소했어요. 나를 봐라, 내 속이 썩은 사람임을 봐라. …사람이 필요하다고, 바른 말 하라고 나한테 오는데, 나 자체가 썩었으니! 아아,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 내가 이 나라 청년 망쳤어요!”

또 석진영 님에게 보낸 1965년 6월 2일자 편지(18-159)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편지 고맙게 읽었소. 지나간 일을 또 한 번 생각해보오. 지나간 것도 아니오. 지나가버릴 수가 없지. 무사(武士)의 얼굴에 난 상처가 일생을 두고 말을 하듯이. 문제는 살아났나 못 났나에 있지. 다 아물고 나으면 뼛속까지 났던 상처도 자랑일 수 있고, 열매를 못 맺었으면 곱던 꽃이 되려 부끄러움이지. 세상에서 그어놓은 금을 내가 깨뜨렸던 것이 잘못이지. 남의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이 내 죄지.

나와 하나님과의 대결에는 다른 사람은 개입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때의 나의 심경은 <예언자>의 서문에 썼지요.

‘이젠 다 나았어요, 다 잊었어요,’ 나는 그런 소리를 하리만큼 한 성자도 아니고, 양심이 아주 없지도 않고, 영원한 고민을 하면서도 자라자는 마음이지. 가능한 한 속(贖)을 해보아야지."

또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넘은 때에 함석헌이 해남에 있는 이준목 목사에게 보낸 편지(18-98)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그의 속죄과정의 하나로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내 가슴에서는 지금까지도 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때문에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을 안 것도 많습니다. 씨알의 전체 속에 나를 발견하게 된 것도 탄탄대로식으로만 나갔다면 발견하지 못했을는지 모릅니다.

<씨알의 소리>는 나의 속죄과정의 하나로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곡절이 참 많습니다. 다 됐다고 해서 손에 들어온 잡지를 받아들면 병신자식 낳아놓은 엄마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내 자식일까? 이렇게 낳자던 것이 내 마음일까? 찢기고 할퀴고 부러지고 잘리고, 화가 나서 못 살겠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지요.”

함석헌의 부인인 황득순 여사는 1978년 5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그 달 호에 “나야 뭐”(8-392)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사부곡(思婦曲)을 발표하는데, 거기에 “그는 그렇게 순종 봉사를 했는데 나는 그에 대해서 성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치시지 않고 그를 치셨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건 후 18년이나 지났지만 간음의 상처는 부인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살아난다. 그때까지 그의 속죄과정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그의 속죄론은 옳기는 하지마는 자신의 범법과 속죄의 체험이 빠진 것이었다. 그만큼 알맹이가 빠진 추상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체험이 있으니 정말로 힘 있게 자신의 속죄론을 개진할 수 있게 되었다.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서 개진한 속죄론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자신의 고백인 셈이다.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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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그의 영성적 삶에 대한 종교-신학적 연구/김영태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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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종교사상과 그의 영성적 삶에 대한 종교-신학적 연구/김영태
작성자 바보새 17-03-31 05:49 조회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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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종교사상과 그의 영성적 삶에 대한 종교-신학적 연구

김영태

성공회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목차

Ⅰ.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2. 연구 방법과 범위 6
3. 선행 연구와의 변별성 9
Ⅱ. 함석헌의 생애, 영적 순례 14
1. 생애 개요 14
1) 연차별 스케치 14
2) 시기별 스케치 22
3) 문하생의 증언 27
2. 영적 순례 33
1) 장로교 신앙 33
2) 무교회 신앙 36
3) 퀘이커 신앙 41
Ⅲ. 함석헌의 이웃 종교 섭렵과 원용 51
1. 한민족의 종교접근 방식 비판 51
2. 유교의 경우 54
3. 불교의 경우 62
4. 도가 및 도교의 경우 71
5. 힌두교 및 간디사상의 경우 79
Ⅳ. 함석헌의 한국 그리스도교 비판 93
1. 그리스도교의 전래, 전개과정 그리고 복잡성 93
2.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 107
3. 함석헌 신앙관의 패러다임 전환 130
1) 신관 134
2) 예수와 그리스도관 140
3) 대속론(속죄론) 148
Ⅴ. 함석헌의 새 종교론과 종교다원적 삶 161
1. 새 종교론 161
2. 보편종교 173
3. 한국의 다종교상황과 종교다원적 삶 179
1) 한국의 다종교상황 179
2) 함석헌의 종교다원적 삶 185
Ⅵ. 함석헌의 평화사상 구현 노력 194
1. 평화사상의 배경과 목표 194
2. 평화실현 방법론 204
3. 평화실현에 대한 한민족의 사명 216
Ⅶ. 20세기 한국사회 민주화의 창도자(唱導者) 함석헌 224
1. 한국 민주화의 연원과 함석헌의 민주 이념 224
2. 함석헌의 민주화 실현론 227
1) 씨알 민중론 227
2) 민중 신학의 단초와 발전 236
Ⅷ. 함석헌 철학 및 종교사상의 매트릭스(matrix) 245
1. 철학사상의 매트릭스 246
2. 종교사상의 매트릭스 256
3. 영성(靈性)의 매트릭스 260
Ⅸ. 결론 265
참고문헌 269
Abstract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