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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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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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 2011. 05. 31
조회수 10314 추천수 0






잠들어있던 동시대인을 죽음의 잠에서 흔들어 깨운 시

존재의 새로움에 대한 비젼, 희망과 혁명, 창조와 전진을 노래





우리는 그동안 함석헌을 고난사관을 설파한 역사철학자, 문명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언론인, 비폭력평화를 주창하는 시민운동가, 무교회주의 신앙로선과 퀘이커신앙에 관계를 가졌던 종교사상가로서 많이 소개받아 왔고 배워왔다. 지금도 진행중인 그러한 여러 측면에서 연구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그런 관심과 노력들에 비하면 ‘시인으로서의 함석헌’연구는 이제 새롭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라고 여겨진다.



이글에서 다루려는 ‘시인으로서의 함석헌 탐구’ 주제는 다재다능했던 함석헌이 문학적 표현능력 면에서, 특히 우리말과 우리글을 다듬고 되살려 빛내는 언어능력 면에서 이룬 공헌을 밝히자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지 않다. 또한 한국 시문학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은 아니지만 「수평선 너머」안에 실려있는 120여편의 격조높은 시작품을 남긴 시인으로서의 함석헌 면모를 재발견하자는데 있지 않다. 그런 목적이라면, 문학이나 시의 세계엔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가 이런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없다.

필자의 관심은 창조적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그의 시론(詩論),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함석헌은 동양적 선비가 흔히 갖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동서양 고전(古典)의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 오늘에 재해석한 사상가 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함석헌의 진면목은 동터트는 새문명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전령자로서, 예언자로서, 신탁을 맡은 사제로서 살고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시대의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운명적 역할담당자를 한마디로 우리 시대언어로서 말 할 때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함석헌 스스로 말하기를 “영의 안테나에 간신히 느껴진 파동”을 크게 부르짖어야 하는 운명적 사명을 가진이 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대선언’이라는 장편시 가운데서도 그의 시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아래에 약간을 인용해보자.


어렴풋한 느낌을 서슴치말고 내 외치자.

물 냄새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움 속의 새싹처럼

가쁜 숨으로

떨리는 맘으로

영의 안테나에 간신히 느껴진 파동을 너는 가장 큰 마이크로 부르짖으라.

길(道)은 뵐 듯 말 듯 (夷)

참(眞)은 들릴 듯 말 듯 (希)

삶(生)은 잡힐 듯 안잡힐 듯(微)

말하는 네 입이 아니

행하는 네 몸이 아니

아는 네 맘이 아니.


위에서 인용한 함석헌의 글 뜻을 음미해보면, 그의 진리론은 20세기 하이데거의 그것과 많이 통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존재망각’의 시대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존재의 근본뿌리를 깊이 사유하기를 강조했던 두 사상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특히 시론(詩論)에 있어서 통하는 점이 많아 보인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사람이 깊이 생각하는 행위 곧 사유는 본질적으로 시를 짓는 행위이라는 것이다. 함석헌도 생각함을 많이 강조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유명한 논설을 비롯하여 그의 종교, 역사, 정치, 사회사상 속에 ‘사유’를 강조한 사상가였다.



하이데거에 깊은 통찰에 의하면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행위중에 시짓기도 있지만, “예술작품의 본질은 시작(詩作)이다”고 말한다. 예술적 창작행위 중에서도 특히 ‘시를 짓는 행위’(詩作)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는 서정적 표현기술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 일, 존재를 개현(開顯)시키는 일종의 계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시인의 역할은 동시대인들이 일상적인 것 속에 매몰되어 속물로 변하고, 진리를 실용성과 효용성의 척도로서 판가름하면서 스스로 자기본질에서 이탈 할 때,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은 성스러운 진리의 소리와 눈짓과 뜻을 순간적으로 감지하여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령처럼, 신탁의 사제처럼, 예언자처럼 전달하여 일깨우는 역할을 감당하는 운명적 사람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함석헌의 표현을 따르면, 길과 진리와 생명은 ‘공개된 비밀’같아서 훤한 것이면서 속된 우리맘의 오염 때문에 가리워져 은폐된것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보인다. 뵐듯 말 듯, 들릴듯 말 듯, 잡힐듯 안잡힐 듯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예민한 ‘영의 안테나에 느껴진 파동’을 붙잡는 사람 이라야 시인의 일차적 자격이 있다.




함석헌은 우리민족이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기에 있을 때, 그의 ‘영의 안테나’에 잡힌 세미한 소리를 노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를 통한 말과 행위와 마음은 함석헌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시의 세계는, 물론 아름다운 서정시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예언시오, 생명의 지성소에서 듣고 본 사제만이 반벙어리처럼 더듬거리는 소리로서 신의 뜻을 지성소 밖에 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시론중에서 “시를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심도깊게 이야기한 그의 시집의 끝에 실린 ‘발문’(跋文)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시작품이 작은 책으로 엮어져 세상에 얼굴을 내보일 때마다 책머리말에 쓴 두 번의 머리글(1953,1961)을 통해서 그의 시에 대한 생각을 먼저 이해하여 보도록 하자.


시를 짓는 일, 낳는 일, 그리고 해석하는 일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저명한 철학자이면서 문예사가였던 빌헬름 딜타이(1833-1911)는 자연과학과 대조되는 정신과학 일반의 특징과 그 연구 태도가 어떠해야 할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학자였다. 이른바 현대적 해석학(Hermeneutics) 이론의 정립자로서 큰 공헌을 한 분이다. 그가 말하는 정신과학(精神科學)이란 요즘의 학문분류방식에 따르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모든 인간정신활동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의 표현된 세계를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인간내면적 삶의 표현들은 문학작품들, 예술작품들, 법률들, 역사기록들, 종교경전들, 철학이념과 시사평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면적 삶의 표현들’을 말한다.



함석헌이 시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딜타이의 ‘삶의 철학’과 그의 ‘이해이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두 사람사이에 아주 중요한 공통관심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관심의 본질은 첫째,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인가적 삶의 체험이 지닌 그 ‘의미’(뜻)를 다시한번 체험하는 것이다는 점이다. 인간개인이나 집단을 움직이게 했던 거대한 물리적 힘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징기스칸이 유라시아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건설자라거나 중국만리장성의 크기나 위용이 중요하지 않다.



둘째, 정신적 삶을 살아가고 표현하는 인간존재의 ‘역사성’에 대하여 심도깊은 이해를 두 사람은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에 의해 영향받아 자기를 형성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혼자서 자기일 수 있거나 살아갈 수 있는 독불장군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정신세계 내면적 체험은 고유한 것, 유일회적인 것, 흉내내거나 모방 할수 없는 인격적 절대성을 지닌 삶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이해도 작가의 내면적 체험을 사진필름 인화해 내듯이 그렇게 동일한 복재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에서 체험된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체험내용을 재구성하면서 추체험(追體驗) 하는 것이지 동일한 원체험을 복재해 낼수는 없다. 함석헌 표현대로 말하자면 “듣는 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


딜타이의 이해이론에 대한 해석학 공식은 흔히 <체험-표현-이해>라고 그가 명명한 삼단계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주장하였다. 체험(體驗)은 일반적인 경험(經驗)이라는 어휘와는 다른 특징을 함의한다. 체험은 보다 생생한 실존적이고도 내면적인 몸 전체가 동반되는 산체험을 말한다. 역동적이고 싱싱한 것이다. 절실하고 절절한 것이다. 그렇게 체험이 그 개인에게나 집단에게 강렬하고 진솔하고 잊을 없을 만큼 큰 의미로 느껴졌을 때, 그렇게 체험된 것은 표현(表現)되지 않을 수 없다. 감탄사를 발하거나 울부짖거나 탄식하거나 노래하게 된다. 그 표현방법은 행동을 동반한 행위예술일 수도 있고, 문학작품일 수도 있고, 음악미술 연극등 예술활동으로서 표현일수 있다. 문자로서 그 원초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길 때는 역사책과 문학작품과 종교경전이 될 수도 있다. 좀더 넓게보면 사회제도나 법질서와 문명자체가 일종의 표현들이다. 표현은 인간의 정신적 내면체험들이 겪었던 내용들, 영혼에 각인된바 감정과 의지와 가치경험을 객관화 한 것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인간적 삶이 동물일반과 다른 점은, 그렇게 표현된 것들의 체험내용을, 시공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재구성해내고 그 내용들을 추체험함으로써 원체험을 다시 ‘이해’(理解)할 수 있다는 신비한 정신적 능력에 있다는 능력인 셈이다. 이 때, 다시한번 주의할 점은 원체험을 녹음테이프에 녹화된 것을 재방영하듯이 판박는 일처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 그릇에 담을 만큼의 분량만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 신비요, 비극이며, 공정함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 의미와 뜻의 세계, 고귀한 자가 경험한 진선미의 진리체험을 작품을 통해 이해하는 일은 권력이나 금력이나 사회적 신분의 높음으로서 쉽게 얻어지거나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란 객관적 설명을 듣고 알아차리는 자연지식과 다른 것이다. 이해란 어떤 정신적 삶을 살고간 생동적인 인간적 체험을 내 영혼 안에서 다시 부활시키는 정신적 창조행위인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이해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독자로서 동일한 함석헌의 한편의 시를 이해하는 경우일지라도, 그 이해의 질과 높이와 깊이는 각각 다를 수 밖에 없다. 성경이나 불경이해에서도 그렇고, 쉑스피어나 플라톤의 작품이해에서도 그렇다. 함석헌은 그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내 영혼 속에서 다시 이해한다는 말은, 내 영혼이라는 관념적 실체가 따로 있다는 신화적 전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으로서 이미 세상에 태어난 이후, 아니 전생경험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내가 경험하고 지닌 ‘삶의 지평’속에서 다시 다른 사람의 작품내용을 되살려 경험하는 기이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평’(地坪)이란 시각적 은유이다. 사람은 각각 자기의 삶 속에서 세상과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평을 갖고 산다. 이 지평이 좁고 심지어 장애물 처럼 되어서 시야가 도리혀 가리워져 있거나 무명(無明)의 안개 때문에 투명성을 잃기도 하지만, 여하튼 자기의 ‘삶의 지평’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해란 지평융합(地坪融合)이다”(가다머)라고 갈파했다. 내가 지닌 지평을 매개로 하여서만 다른 사람의 삶의 지평을 이해하는 것이다. ‘삶의 지평’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의 삶체험이 제한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지평융합을 통해서 기존의 ‘지평’이 넓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질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시론(詩論)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듣는 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 내시야말로 내 것인데, 내

속에서 나간 내 혼정(魂精)인데, 내 아들인데, 나만이 낳고 나만이 아는 것인데, 내 생명의

지성소(至聖所)에서 나와 내님만이 만나서 지난 일인데,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인 일인데,

그것을 누가 안단 말이냐? 알게 할 방법도 없거니와 알게 해서 될 일이냐? 그러나 또 정말

알리지 않을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반드시 알려지는 것이요,또 알리고 싶어 못견디는

것이다. 시는 숨기며 알리는 것이요, 알리며 숨기는 것이다 생명은 드러내놓은 비밀이다.




위 인용구에서 두가지 진리가 맞서며 갈등하면서도 두가지 주장이 참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첫째주장은 시인의 시를 제3자가 시인의 내면세계 지성소에서 체험한 그대로 이해 할수 없다는 인간 인식론적 한계와 절망과 슬픔의 면모이다. 다른 또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는 이해되기를 기다리며 이해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 생명, 진리, 하나님등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숨기면서 알리고, 은폐되면서 계시되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진실한 실상을 한마디로 집약해서 함석헌은 “생명 혹은 하나님은 드러내놓은 비밀이다”라고 표현한다.



‘공개된 비밀’이라는 표현은 역설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공개성과 비밀성, 은폐와 계시, 없음과 있음은 서로 논리적 개념으로서는 반대되고 충돌되고 모순관계의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없이 계신 하나님’(유영모) 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나 생명이나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내놓은 비밀’(함석헌)이라고 말하거나 역설적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실재 그 자체(생명, 진리, 하나님)가 역설적이어서 그런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성 때문인지는 알수 없다. 후자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인간이 생명, 진리, 하나님등을 생각하거나 말 할 땐 어쩔수 없이 인간관계에서 말하는 것이요 인간자리에서 말하는 것이니까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수평선 너머」의 후기(後記, 跋文)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함석헌의 시론중 또하나 중요한 점은 “시를 짓는다”라고 보지 않고 “시를 낳는다”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짓는 것이나 낳는 것이나 같은 말이고, 뒤의 표현은 앞의 표현을 좀더 시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 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그보다도 좀더 깊은 뜻이 그 말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은 언젠가 생각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이라고 구별한바 있다. ‘하는 생각’은 데카르트가 말하는바 저 생각하는 인식주체가 자기의 오성과 이성능력을 구사하여 사물의 이치와 삶의 연기적(緣起的) 관계를 추리하고 추론하고 논증하고 설명하는 지성의 행위다. 생각하는 주체자로서 책임성과 깨어있는 분변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생각 중에는 이상하게도 ‘나는 생각’이 있다. 불현듯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일이 생각난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나는 생각’은 두뇌속에 내장되었던 기억의 회상만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예술적 영감을 말 할 때도 ‘나는 생각’이라는 범주에 든다. ‘나는 생각’도 두뇌작용을 거치겠지만 그 기원과 출처는 두개골 안에 담겨있는 큰뇌의 세포덩어리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온다. 마치 텔레비전의 영상이 텔레비전 기계의 하드웨어를 통해 나타나지만, 그 드라마나 뉴스의 전기신호적 발신은 안방이 아니라 수백킬로 떨러진 전파방송국인 이치와 유사하다.


시를 낳는다. 인생이란 여죄수(女罪囚)가 이 사회란, 이 교회란, 이 가정이란, 감방 안

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는 유화부인(柳花夫人) 모양으로 이 감방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만나 남모르게 애기를 배었던 것이다. 처녀는 애기를 낳으면 젊음이 빠지고 아름다움이

잃어진다 하지만, 인생은 시를 낳으면 낳을수록 더 젊어지고 고와간다..... 이 세상이 감옥

아니냐? 분명 감옥 아니냐?....시를 낳았으면 그 곳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함석헌은 참된 시는 짓는것이 아니라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듯 수태하여 애기낳듯 몸에서 출생시키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것도 보통 여인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여인의 잉태와 출산에 비유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구려시조 주몽설화를 예로들어 유화부인이 어두운 방속에 갇혀있다가 한줄기 빛을 받아 태기가 생기고 알을 낳고 알에서 주몽이 나왔다는 난생설화를 예로 든다.

어두운 감방에 갇힌 상태란 인간실존이 비본래적 상태속에서 시달려야 하는 타락한 세상, 병든세상, 물상화된 세계를 상징한다.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은 죄수처럼 갇혀살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빛이 창틈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듯이, 진리의 빛이나 소리를 접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새생명을 낳는다면, 감옥은 감옥이로되 새아기 탄생한 기쁨으로 인하여 산모나 감방에 함께 옥살이하던 죄수들은 기쁨을 맛본다. 이미 그 곳은 감옥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어두운 감방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그 빛을 받아 수태하게되는 생명의 잉태, 그리고 수태한 생명씨를 열달동안 배속에서 키워 몸 밖으로 내보내는 출생 비유이다. 진정한 시란 기교적인 언어놀음 이거나 인간의 희비애락의 감정표현의 수사적 표현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주장을 하는 셈이다. 시인을 거룩한 생명의 씨를 받아, 뱃 속에서 남모르게 키워서 출생시키는 아이낳는 산모에 비유했다.


참다운 시는 생명낳는 기쁨과 같아서, 잠시동안 감옥속에 갇혀 인간다움과 웃음과 기쁨과 생명의 환희를 잃어버린 동시대인들에게 그것들을 다시 되찾게 해준다. 잊어버린 사람의 본래성을 되찾게 하고, 타향에서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서 고향에로의 ‘귀향’하고자 하는 희망과 뜻을 일으켜준다. 그래서 진정한 시는 비본래적 상태에 빠져있는 인간 실존에게 ‘해방과 구원의 능력’을 가져다 줄수 있는 것이다.


시의 언어로서 상징과 비유


함석헌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그의 시작품만이 아니라 그의 저술물들이 유난히 상징과 비유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과, 상징이나 비유가 갖는 위대한 진리개현(眞理開顯)능력과 거기에 따른 위험을 동시에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들면 그의 대표적 저술물이라고 평가받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구성하는 핵심어휘들(key words)열거해 보면 뿌리, 씨, 숲, 수레바퀴, 수난의 여왕, 씨, 미완성곡, 중축이 부러진 역사등등이 모두 비유와 은유로 가득차 있다. 하물며 그의 시작품은 비유와 상징어로 가득차있다. 유명한 ‘맘’이라는 시제(詩題)의 첫구절과 끝부분의 단락만을 예로 들어보자.


맘은 꽃

골짜기 피는 난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씨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

모든 자람이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사행시(四行詩)로 구성된 위의 짧은 두 문단 만으로서도 사실 함석헌의 ‘씨사상’과 ‘역사철학’이 말하려는 내용의 알짬을 다 표현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시의 일단은 단순히 골자기에 피어있는 식물로서의 난초가 어떻게 성장하고 꽃을 피우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곡식의 씨열매가 어떻게 영글며 또 다음세대의 종자씨앗이 되는 가를 설명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꽃, 골짜기, 썩어진 흙, 먹고자람, 향기를 발함, 씨, 꽃이 떨어져 여뭄, 자람과 끝, 형상, 어머니 등등 모든 단어 하나 하나가 엄청난 내용을 그 안에 담고있는 고도의 상징적 은유인 것이다. 인간존재의 역사성, 전통에 빚지고 사는 해석학적 존재성, 실존의 고유한 주체성, 인격체의 꾸밈없는 순수성, 고난을 통한 생명의 성숙원리, 미래희망과 책임성 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라는 문학장르에서 비유의 기능을 살피기전에 인간적인 삶의 독특한 형태로서 비유(比喩, parabole)가 지닌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비유를 헬라어로서 ‘parabole" 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para’(옆에)와 ‘bole’(놓다)의 합성어로서 하나의 비교점을 가지고 서로 다른 것을 나란히 놓음으로서 체험과 사물의 깊이를 드러내거나 느끼거나 깨닫게하는 사유적 언어행위다. 비유(比喩, parable)라는 폭넓은 개념안에는 직유(直喩,simile), 환유(換喩,metonymy),풍유(諷諭,allegory), 은유(隱喩,metaphor)) 등이 있다.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나란히 놓으면서 강조하는 비유법이어서 복잡한 변증법적 긴장같은 것은 없다. 직유법의 예문을 든다면, “공나물시루 같이 사람이 발디딜틈 없이 방한칸에 앉아야만 했다”. 혹은 “내 누이의 얼굴은 보름달같이 둥그렇게 생겼다”등이다. 환유는 사물의 한 특징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법이다. 예들면, “빵문제가 해결되어야 염치를 찾게된다”. 혹은 “감투싸움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민생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등이다. 여기에서 빵은 물질경제생활을 말하며 감투는 공직상의 높은 직위를 말한다. 풍유는 우의법(寓意法, allegory)이라 칭하는 비유법의 일종인데, 비유에 동원된 어구나 단어를 일종의 암호같은 것으로 보고 정신적-영적 의미해석을 부여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전구절의 해석에서 흔히 영해(靈解)라고 하는 것이다. 예들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쫒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있는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라디아서 4:30)같은 비유법이 풍유이다. 여기에서 여종은 율법적 종교 창출한 유대교를 우의적으로 상징하고, 자유있는 아들은 바울이 경험한 새로운 초대기독교의 복음을 상징한다.


인간의 사유와 언어는 본질적으로 항상 은유적인 것이다. 은유(metaphor)는 비유중에서 가장 복잡한 상징기능을 동반하는 비유법이어서 시문학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비유는 인간의 삶 그자체이고 ‘확장된 은유’(extended metaphor)라고 볼수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에서만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삶의 전반이 비유없이는 이뤄지지 못한다.

비유의 한 형태로서 은유는 항상 그 내면적 논리구조가 “그것은 ...이면서 또한 아니다”라는 긍정/부정의 동시적 기능을 통하여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고도 풍요로운 의미에서 말하건데 비유는 곧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비유의 한가지 형식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다.


인간적 삷체험에서 위대하고 심원한 근본 주제들, 예들면 사랑, 생명, 영생, 진리, 죽음, 희망, 두려움, 은혜, 거듭남 등을 이야기하려는 시인이나 예언자들은 항상 비유(은유)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하고 심원한 그 체험과 실재 ‘이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이 아닌 ‘저것’을 말하면서 그 양자사이의 닮음과 닮지 않음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잘 알려지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은폐되어 있는 실재의 깊이를 알게하는 것이다. 비유(은유)의 특징은 그러므로 항상 ‘...이면서 동시에 ...이 아니다’라는 부조화, 창조적 긴장, 비관습성, 놀라움, 변혁, 다양성, 개방성, 급진성을 촉발시킨다. 본래 영문학을 전공했던 저명한 미국의 여성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은유는 충격을 던지고 서로다른 것을 결합시키며, 관습을 뒤집고 긴장되게하며, 함축적으로 혁명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상징적이고 성례전적인 사유는 제사장적 특징을, 은유적인 사유는 예언자적 특성을 지닌다. 전자가 이미 현존하는 질서의 통일성과 완성을 기다린다면, 후자는 앞으 로 실현되어야 할 변화의 가능한 질서와 통일성을 시험적으로 투사한다.


앞에서 잠시 인용한 함석헌의 ‘맘’이라는 은유시를 다시한번 음미해 보자. ‘마음’이라고 순수 우리말로 표현했지만 ‘마음’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마음은 의식이면서 의식을 넘어서는 신령한 측면이 있고, 육체를 넘어서는 자기초월적 기능마져 보이면서도 철저히 육신의 감각기능이나 생화학적 조건에 영향받고 있다. ‘마음’은 자기초월적 정신능력을 지닌 주체적 인격이요 실존적 자아이다. 다른무엇과 바꾸거나 대체할수 없는 고유성과 독자성마져 갖는 신령한 단독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마음’과 나란히 ‘마음’하고는 전혀다른 골짜기에 핀 난초 ‘꽃’을 나란히 놓고 다른 차원을 열어 보이려한다. 비관습성과 놀라움과 변혁을 준비하게한다.


꽃이 ‘썩어진 흙’을 먹고 자란다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자명한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자기초월적 주체적 자아’가 독존적 존재가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정신적 토양속에서 영향받고서 성장성숙해가는 사회적 존재요 역사적 존재이며 관계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끝부문의 4행시구로서 시인 함석헌은 ‘마음’을 ‘씨’과 나란히 놓고서 평소엔 깊이 자각하지 못했던 인간존재의 통시성(通時性)을 부각시킨다. 개인의 지난 일생만이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씨은 ‘모든 자람의 끝열매’이듯이 개인 실존을 “아브라함이 낳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 할수 있는 무한과거에 까지 소급하여 연장시키고, 또 무한한 미래에로 이어져갈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한다. 인간 실존은 미미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생명전체와 연대하여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하여, 자기밖에 모르는 자폐증 환자같은 이기주의적 자아중심주의가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관인가를 저절로 깨우치도록 놀라움과 변혁성을 급진적으로 선물한다. 속물적 타성에 젖어살던 잠든바나 다름없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 자각적인 씨로서 재탄생하도록 격려한다. 좋은 시는 통속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면목을 문득 보게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혁명하도록 변혁과 창조적 고통마져 용기를 가지고 수용하기를 촉구한다.






비유의 문자화는 치명적 독, 그것의 교리화는 우상


사람의 삶이 비유적이며 은유적임으로 인하여 동물 일반과 사뭇 다른 정신적 삶을 살수 있고 존재의 다양한 면모와 열려진 차원을 보고 느끼도록 촉매한다. 그런데, 비유나 좁은 의미에서 은유란 언제나 그 본질이 “...이면서 동시에 ... 아닌 것”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긴장과 틈새 속에서 진리의 얼굴을 언듯 보이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긴장과 역설적 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 비유(은유)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심지어 교리화하여 사람 삶 속에 독을 만들거나 우상을 만들어 이성을 마비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



함석헌의 시는 이것과의 싸움인 것이 많다. 예들면 그의 말년의 종교적 장편시 ‘흰손’은 기독교의 ‘십자가 피에 의한 속죄론’이라부르는 가장 심원한 은유적 진리를 문자화, 물상화, 우상화 해버린 기성교회의 독소에서 사람 영혼을 해방시키려는 예언자적 교리비판시 이다. ‘흰손’이라는 제목의 시를 평면적으로 읽고서 함석헌을 오해하면, 그 사람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초대교인들의 증언 “예수의 피로써 새 생명을 얻었다”는 고백적 명제를 미신, 주술, 비인격적 물상화, 어리석은 자들의 맹신따위로서 매도해버리고 함석헌이 ‘대속론’을 폐기 하고 무효화 시켰다고 가볍게 속단한다. 그렇게 속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피상적 이해인 것이다. 함석헌의 진의는 그렇지 않다.


“예수의 피로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종교적 비유와 상징적 언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교리적으로 우상화시킨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지 폐기시키거나 무효와 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세계적 신약학자 루돌프 붙만(R.Bultmann)의 소위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이 신약성경안에 나타난 신화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실존적으로 재해석 하려는 것에 본래 뜻이 있음과 같다. 종교적 고백언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교리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의 오류 못지않게, 합리적 논리와 계몽된 지성의 눈으로 비판하면서 무조건 ‘대속론’을 우숩게 여기는 사람과 신화를 고대인들의 무지한 지식표현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유와 상징을 이해못하는 ‘계몽된 장님’이 되는 것이다.


콜린 터베인(Collin M.Turbayne)은 생동적이고 사람에게 놀라움과 생기발랄한 통찰력을 가져다주던 살아있던 비유(은유)가 어떤단계를 거쳐 죽은 비유, 굳어진 비유, 독소를 품은 경직된 교리나 우상물로 변질해가는지 설명했다. 사물과 사건과 인생의 깊은 속을 폭로하면서 진실을 눈치채도록 하는 좋은 비유(은유)가 처음 이야기되면, 제1단계에서는 보통 사람들은 낯설고 비습관적 표현이기 때문에 시쿵둥하거나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제2단계는 사람들이 던져진 비유(은유)가 말하려는 속뜻을 알아차리고 즐기며 환영하고 통찰력을 얻고 유머감정 마져 만족시킨다. 이 제2단계가 비유(은유)의 절정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삶의 상황이 변하면서 비유(은유)는 “...같으면서 동시에 ...같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적 긴장이 살아지고 상투적인 것, 진부한 것, 굳어지고 말라빠진 빵처럼 된다. 심하면 곰팡이가 피어나서 교리적 도그마가 되거나 우상화 되기도 한다.


문학작품 특히 시작(詩作)은 비유(은유) 없인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누이 앞에서 말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시중에는 아예 시의 작품제목이 ‘비유’로 되어있는 시가 있다. 말하자면 ‘비유’를 시로서 노래하는 셈이다. 그 ‘비유’라는 작품 전체를 아래에서 인용하여 감상해보기로하자.


드러내놓으면서 숨김

숨기면서 드러내놓음


가리움으로 보여줌

보여줌으로 가리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음

옅은 것 속에 깊은 것이 들어 있음

껍질 속에 들어있는 알

거짓 속에 들어있는 참


시간속에 영원이 깃들였다

땅위에 하늘이 나려와 앉았다


성령이 마리아 뱃속에 드셨다

말씀이 육(肉)이 되셨다.


그것은 꽃송이요

그것은 흐르는 시내요

그것은 비치는 호심(湖心)이요

그것은 음악이다


함석헌의 시 ‘비유’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첨 두행은 비유의 본질을 더 없이 간결하게 비유의 본질을 갈파한다. 비유법이란 그 본질적 특성이 어떤 진리나 실재의 깊은차원을 보이도록 드러내놓으면서 숨기는 것이요, 숨기면서 드러내놓는 현상이고, 실재를 가리움으로써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리우는 기능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다. 비유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비유란 “...이면서 동시에 ...아니다”라는 논리아닌 논리, 반대의 역설적 일치, 부정을 통한 긍정, 긍정을 통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들, 특히 심원한 종교적이거나 철학적 진리개현(眞理開顯)의 시적 표현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려면 말이 않되는 말이고, 합리적 이성논리로 보면 자가당착적 모순 명제들이다. 시간 속에 영원이 깃들고, 땅위에 하늘이 내려와 앉았고, 신령한 령이 육신을 가진 마리아 뱃속에 자리잡고, 말씀(로고스, Logos)이 육(사르크, sark)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유와 은유를 통하여 가장 심원한 진리를 전달하려는 표현인데, 이 표현을 보수적 기독교 정통교리주의자들은 ‘신의 전능교리’를 전제로 하여, 문자적으로 마리아가 남자없이 아기예수를 잉태했다고 믿어야 옳다고 우기게 된다. 제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33년간 땅위를 걷고 살으셨던 예수는 ‘전능신의 초자연적 기적’에 의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지상에 나타나서 33년간 진리를 가르치고 다시 승천한 신화적 인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정통교리주의자들은 종교독에 침윤되어 진리를 모르고, 경건한 우상숭배자가 되어 다른종교를 우상이라고 공격하는 독선주의자들이 되고 만다. 그들은 비유와 은유를 실증과학적 명제로서 받아드리려는 어리석음을 ‘돈독한 신앙인의 표징’이라고 강변하는 셈이다.


‘비유’라는 위에 인용한 시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그 것은’이라고 첫마디를 반복적으로 지시하고 있는데, ‘그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현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꽃이요, 흐르는 시내요, 비치는 호심이요, 음악이라고 노래한다. ‘그것은’ 이란 시의 앞절에서 말한 시간속에 영원이 깃듬, 땅위에 임한 하늘, 자궁속에 들어오신 성령님, 육신이 되신 진리의 말씀을 뜻한다. ‘그 것은’ 특수한 종교적 영역에서의 예외적 기적의 사건사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눈 뜨고 보면 삼라만물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렇게 비유로서 말함으로써 꽃, 강, 호수, 음악을 경제적 효용성이나 인간중심적 실용성과 능률성 잣대로서만 측정하며 지내왔던 ‘무명(無明)의 백내장’(구상) 시각장애인들을 눈뜨게 하는 것이다. ‘이념(理念)의 사팔뜨기 핏발선 눈동자’(문익환)를 지니고 살던 살인기계가 다되어버린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존재 혹은 진리 혹은 하나님 혹은 생명 그 자체의 황홀한 현존과 충만한 영광을 느끼고 보도록 촉매한다.






함석헌의 은유시에서 저항과 창조적 새로움


비유(은유)가 살아있을 땐, 역설적 긴장 속에서도 진리를 드러내고, 사람의 사유를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만들며, 언제나 생명이란 창조적 과정속에서 변화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비유를 구사한 인류의 성현중에서 석가모니와 예수는 가장 탁월한 비유를 말 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그들의 비유적 가르침은 기성세계를 설명하거나 안존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고 혁명시키는 에네르기를 제공했다.



함석헌의 시작품 들 중에는 서정시도 있고, 장편시도 있고, 산문시도 있고 시 형태상으로는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함석헌 시의 세계가 지닌 진면목은 그의 은유적 비유들이 우상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의 발로이며,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트려 창조적 새로움에로 발돋음하게 하려는 산모의 진통소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완성’ 이라는 작품 일부와 ‘대선언’이라는 작품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그 사실을 확인해보자.


미완성


높은 봉우리에 애타는 동경(憧憬)의 얼굴 빛 있고

날뛰는 바다에 풀지 못한 분노의 울부름 있고

오고 가는 바람에 잊지 못하는 탄식이 속삭임 있고

벌럭거리는 심장엔 영원히 이루지 못하는 이상의 불탐있고.


(중략)


완성은 반갑다고 누가 그러나?

끝맺음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나?

얻어들음은 즐겁다고 누가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영감(靈感)의 거장(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줄 모르는 절대의 의지.


영원의 미완성,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그 가슴엔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마다 제대로 무한한 즐거움,

끝없이 닫는 영의 헐떡이는 염통엔

찰나 찰나의 고동의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한 이김.


(후략)


위에서 부분 인용한 ‘미완성’ 이라는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일체의 기성의 정치경제 제도, 철학, 과학, 예술, 종교등 그 무엇이던 간에, 기존의 것과 기성의 것의 타성과 편익에 젖어 생명의 창조적 약동을 부정하는 일체의 사상과 인생관에 저항한다. 그는 저항의 시인이다. 하물며 기존의 제도와 사상과 사회질서가 기득권자들의 자기합리화를 돕는 ‘거짓 위장품’인담에야 시인의 저항정신은 비유를 통한 시작품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의 생애후기의 종교시 ‘대선언’의 일부를 읽어보아도 저항정신과 창조적 새로움을 향하는 산고의 진통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진면목이 여실하게 들어난다.


대선언


.......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탑 담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생명은 난 끝에 있나니

레바논 백향목의 자람 그 순 끝에

역사의 나감 시대의 뾰죽한 끝에

거룩한 영의 피어남 맘의 풋 끝에

묵은 가지의 짙은 그늘을 수북이 두고

생명의 원줄기는 사정없이 올라만 가나니


부사산 민고 눈물 흘러 넘쳐 윗뎀베르히 높은 숲에 대들었듯이

태평양은 또 무한의 구름을 일으켜 그 봉우리를 닾고야 말리라

굳어진 가톨릭 성다락 북유럽 광산군의 망치에 부셔졌고

얼크러진 프로테스탄트 그물 동아시아 무사의 칼에 찍혔고

그리고 역사는 또 나갔더라

무섭게 날개치는 그 바퀴가 오늘 너와 나를 끌지 않나


어렴풋한 느낌을 서슴치 말고 내 외치자

물냄새 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움 속의 새싹처럼

가쁜 숨으로

떨리는 맘으로

............

...........


생명은 연약해보이지만 모든 것의 맨첨에서 새로움의 도약을 시작한다고 노래하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개신교 신앙형태와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의 무교회 신앙형태에 안주하지 말고 그것들도 초극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자신과 확신이 넘쳐서 그리하는것 아니라, 목말라 달리는 약대의 가쁜 숨처럼, 스며든 작은 빛 잡으려는 어두운 움막 속의 새싹처럼 떨리는 모험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위의 ‘대선언’시는 특히 정통기독교의 교리적 ‘대속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그 교리가 만들어지기 전의 본래 뜻을 붙잡도록 하려는 신학논쟁적 종교시이지만, 깊은 은유와 비유로 가득차 있다.

함석헌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자연주의 문학의 ‘서정시’도 아니고,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감옥에서 강단에서 논밭에서 시장바닥에서 느꼈던 자신과 민중의 감정적 희비애락을 노래한 좁은 의미의 ‘참여시’도 아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있다. 함석헌의 시는 우주와 생명, 자연과 역사의 가장 깊고도 높은, 강하고도 여린 형태속에서 ‘비유’가 표현하려는 본래적 인 것 곧 존재의 새로움에 대한 비젼, 희망과 혁명, 창조와 전진, 대신 고난당하는 생명의 대속원리를 노래하려는 ‘역설적 진리의 증언자로서 시대적 안테나’ 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자, 예언자요, 철인이자 농부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잠들어있던 동시대인을 죽음의 잠에서 흔들어 깨워놓고 새로운 문명의 여명기에 씨시대가 열렸음을 힘껒 외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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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근현대 한국 정신사의 한 획을 그은 함석헌 선생과 한신대·기독교장로회 교단 설립자 장공 김재준 목사 등 양대 거목으로부터 진리를 배운 신학자. 전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이자 한신대 명예교수.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내며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메일 : jacobjae@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