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명에 관한 열한 가지 테제
황대권
문명전환mindlenews01@mindlenews.com다른 기사 보기
생명·생태·평화
입력 2025.02.02 18:00
수정 2025.02.0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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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생명지역주의#장소적존재#산업문명버전2#생태문명
AI 지배 산업문명 2.0이냐 생태문명이냐
모든 생명은 장소적 존재-생명지역주의
도시 집중, 인간 중심, 거대 지향 버려야
국가, 국경 거부하고 지역공동체 번영으로
자치와 자급, 수계 중심 생명지역별 생태문화
자주권을 지닌 생명지역들의 세계연방으로
‘농업’ 아닌 생활과 문화 차원의 ‘농사짓기’
첨단기술은 생태적 전환 위해 제한적 활용
산업사회 제도교육 버리고 생태문화 교육으로
황대권 '야생초 편지' 작가
기후위기와 팬데믹, 전쟁, 사회적 혼란 속에서 많은 이들이 문명의 전환을 얘기한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일들이 그동안 해왔던 대처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달리 말해 하나의 문명이 그 소임을 다하고 새로운 문명에게 배턴을 넘겨주는 시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명에서 어떤 문명으로 전환이 되는가가 문제이다. 지금의 문명이 ‘산업문명’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음에 올 문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다음 둘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나는 AI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산업문명 버전 2’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생태문명’이다.
산업문명 버전 2냐 공존의 생태문명이냐
엄격히 말해 <산업문명 버전 2>는 문명의 전환이 아니다. 기존에 해 오던 것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다만 변화의 주체가 문명의 위기를 일으킨 ‘멍청한’ 인간이 아니라 ‘AI와 테크놀로지’라는 점에서 문명전환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는 디스토피아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 방향으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노예’라는 말은 현실 사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쓰는 말이고 현세의 가치를 굳건히 믿는 자들은 ‘동반자’ 또는 ‘도구’라는 말을 쓰고 싶을 것이다.
매년 열리는 생명을 위한 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1월 24일 미국 워싱턴에 모여 워싱턴 기념탑에서 대법원까지 행진하고 있다. 2025.1.24. AP 연합뉴스
분명한 것은 역사상 지능이 낮은 집단이 지능이 더 높은 집단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보다 더 똑똑한 기계를 만들었는데 내가 그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예전엔 기계의 플러그를 뽑거나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되었지만 AI에게는 그런 빤한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우회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AI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인간의 개체 수를 급격히 줄이는 판단을 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대부’로 불리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가 인류가 AI로 인해 30년 안에 멸망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는 최근 보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만히 있어도 죽고, 위기에 적극 대처해도 죽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생태혁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태문명을 건설하는 일을 ‘혁명’이라고 했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그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이전의 가치관과 습관을 과감히 버린다는 뜻이다. 과연 버릴 수 있을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건강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식습관으로 인해 중병에 걸렸다. 의사가 말하길, 몸의 원리와 구조를 제대로 공부하고 식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석 달 안에 죽는다고 한다면 그는 의사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냅둬유, 이대로 살다 죽을라요!” 할 것인가.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선택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골수 깊이 잘못된 지식과 습관이 몸에 배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Refresh!”(리프레쉬)
분위기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적한 곳을 찾아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대자연과 조용한 시골이 적당한 장소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곳이 새 출발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태문명은 원시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처럼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을 난도질했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이 어떻게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잘 보고 배워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오염된 안개로 뒤덮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2025.2.1. AFP 연합뉴스
인도 북부 하리아나 주 수브리 마을의 밭에서 수확한 감자로 가득 찬 자루 옆에 서 있는 농민, 2025.2.1. 로이터 연합뉴스
생태문명은 첫째, 자본의 요구로 모든 인구를 도시로 몰아넣은 것부터 고치고자 한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생태 위기이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상위 포식자일수록 개체 수가 적어야 한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최상위 포식자는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결국 자기들끼리 잡아먹기 시작한다. 원래 자연상태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지만 ‘자본’이 끼어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선전하여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로 전락할 뿐이다.
생태문명은 둘째, 인간이 모든 생물종 가운데 가장 우월하므로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거부한다. 인간은 지능이 좀 높은 특이한 존재일 뿐 생명 가치에서 다른 생명체와 동일하다. 인간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른 생명과 동일한 존재로서 개인의 성장을 생태계의 안정과 번영보다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금기(터부)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의 일탈 행위를 막아 주었지만, 현대에 들어와 과학이라는 ‘주술’에 빠져 제멋대로 날뛰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황새들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처 베르하임의 남부 지역 둥지로 돌아왔다. 2025.1.30. AP 연합뉴스
생태문명은 셋째, 인간의 표준이라든가 이상형 같은 아이디얼 타입(Ideal Type)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생물종처럼 ‘장소적 존재’이다. 다른 장소에는 다른 인간이 산다. 다른 지역에 사는 인간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것은 제국주의 논리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이데아론’으로부터 인간의 관념적 이상형을 만들어 그것이 바로 자기들이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못된 짓을 한 것은 인류사의 씻을 수 없는 수치이다. 장소를 떠난 인간은 주로 남의 등을 쳐서 먹고 산다. 장소는 내 목숨을 유지시켜 주는 ‘생산의 현장’이다. 큰 도시에 그렇게나 많은 범죄자와 사기꾼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간은 장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장소에 있는 다른 생물종이나 자연도 정치적 타협 혹은 협력의 대상이 된다.
생태문명은 넷째, 거대 기계, 거대 조직, 거대 시설, 거대 이념 같은 거대함을 거부한다. 최상위 포식자가 만든 거대함은 생태계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기후재앙과 팬데믹이 휩쓸고 지나간 몇십 년 후 지상에 남아 있는 거대한 축구장과 공연장, 마천루 등은 로마 시에 남아 있는 콜로세움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생태문명은 ‘인간척도(Human Scale)’를 추구한다. 지역과 장소에 어울리는 적당한 규모야말로 인간적이고 또한 생태적이다. 우리가 관광지에서 만나는 거대한 고대 사원이나 유적은 인간의 광기가 빚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다섯째, 국가라는 인위적 구조와 국경선을 거부한다. 대신에 지역과 공동체의 번영을 추구한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을 기어다니는 뱀에게는 38선도 국경선도 없다. 어리석은 인간만이 국경선을 그어놓고 죽어라 쌈질을 하면서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국가는 만악의 근원이다. 어리석고 포악한 자가 국가 권력을 잡았다고 생각해 보라! 불행히도 인류사에는 성군(聖君)보다 폭군(暴君) 또는 우군(愚君)이 훨씬 많았다. 인간의 성정이 원래 포악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자들이 권력의 최상층에 오르기 쉬워서 그렇다. 만약 인류가 국경선을 없애고 지역과 마을에 흩어져 살면서 자유롭게 교류한다면 지금처럼 끔찍한 전쟁이나 지독한 경쟁은 없을 것이다.
생태문명은 여섯째, 사회구성원의 자치와 자급자족을 추구한다. 산업문명이 경쟁과 배제를 통해 발전했다면 생태문명은 협동과 돌봄을 통해 번성할 것이다. 자치는 생태문명의 정치적 표현이고 자급자족은 생태문명의 경제적 표현이다. 자치의 방법은 나라마다 전통적인 것부터 현대적인 것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화백회의와 현대의 직접민주주의 방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자급자족은 하나의 원칙이다. 지구 위 어떤 지역도 자급자족이 100% 가능한 곳은 없다. 원칙을 지켜 나가되 이웃 지역과 유무상통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융통성을 발휘하더라도 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자족(自足)’에 달려 있다. 생태문명이 가능한 경제구조에 대해서는 그동안 ‘대안경제론’을 통해 수많은 이론적·실천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너무도 강력한 자본주의적 관행으로 인해 거의 빛을 보지 못했으나, 기후위기와 경제불황 등으로 모두가 어려워지면 협동과 돌봄에 기초한 대안경제 체제가 저절로 작동하리라 본다.
스페인 북부 나바르 지방의 이투렌에서 열린 전통 카니발에서 등에 큰 소 종을 달고 행진하고 있는 주민들. 이웃 마을인 이투렌과 주비에타의 주민들이 옷을 차려입고 이 3일간의 연례 축제에서 두 마을을 순례하는데, 주로 농업과 양치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2025.1.27. AFP 연합뉴스
생태문명은 일곱째, 생명지역(Bioregion)에 근거한 생태문화를 추구한다. 생태문명을 온전히 구현하려면 기존의 행정구역과 국경선을 넘어 생태지리(Ecological Geography)에 맞게 모듬살이의 경계를 재구성해야 한다. 일정한 구역에 사는 모든 생명은 동일한 생태적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데 이를 ‘생태지리’라고 한다. 생태지리를 구별 짓는 유력한 기준은 ‘수계(水系, Watershed)’이다. 수계에 의해 구획된 지역에 인간의 문화 활동이 가미된 것을 ‘생명지역(Bioregion)’이라고 부른다. 생태문명은 생명지역에서야 온전히 꽃피울 수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 ‘풍수학’이나 ‘풍토학’으로부터 이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생태문명은 여덟째, 자주권을 가진 생명지역의 세계연방을 추구한다. 생명지역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자급자족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구태여 남의 지역을 침략할 필요가 없다. 내게 주어진 환경을 최고로 알고 어떻게 그곳에 문명의 꽃을 피우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마주치게 될 것이므로 다른 지역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도 여행이나 교육, 문화교류, 재해 극복 차원에서도 연방제가 필요하다. 이 세계연방은 국가들의 연합인 지금의 UN과 다르다. 산과 강이 표현된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명지역의 세계연방은 수계로 구분된 지역들의 연방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 중국이라는 국가 아이덴티티가 사라지고 양쯔강 수계, 황하강 수계, 티벳 고원 수계... 이런 식으로 구분이 되며, 이들 수계는 한국의 한강 수계나 낙동강 수계와 연방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관계를 맺는다.
생태문명은 아홉째, ‘농사짓기’를 업(業)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 차원에서 바라본다. 농업이라는 말은 산업시대에 들어와서 널리 알려진 용어이다. 오죽하면 농업을 ’1차 산업‘이라고까지 했겠는가. 그 이전에는 그저 농사 또는 ’녀름짓기‘로 불렀다. 전 세계 어디건 일부 대농을 제외하고 전업농으로 자급자족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농사를 업이 아니라 생활로 바라보아야 한다. 생태문명에서는 먹고 사는 모든 문제가 농사와 관련되어 있어서 누구든 생존과 생활을 위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업(業)의 굴레를 벗어난 농사는 문화와 테크놀로지, 영성과 결합하여 무한한 창조 또는 창작의 세계로 나아간다.
생태문명은 열 번째, 현대의 첨단기술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인다. 현대의 첨단기술은 그 발생부터가 반생태적이기 때문에 단순히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제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생태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묶어두어야 할 것이다. AI나 첨단 자동화 시설 등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겠지만, 이 기술들은 현재의 반생태적인 제반 법과 제도, 체제, 관행 등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다. 대신에 생태문명은 인간척도에 근거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적극 권장한다. 모듬살이의 규모가 생명지역에 국한될 때 지금의 거대 첨단기술은 오히려 비효율적이 될 것이다.
생태문명은 열한 번째, 산업사회를 지탱하는 지금의 제도 교육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생태문화교육으로 전환한다. 지금의 제도교육은 19세기 후반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프로이센에서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고안된 억압적 훈육 시스템이다. 이 제도를 도입한 프로이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제국으로 통폐합된 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이 시스템에서 학생들은 고도로 조직화된 교실에 갇혀 어떻게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효율적으로 착취할 것인지 배운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이다. 제도 교육을 당장에 폐지할 수 없으므로 지역과 마을 단위에서 다양한 대안교육과 유사 교육 프로그램이 행해져야 한다. 미래는 결국 교육의 내용과 질이 결정할 것이다.
하나로 압축하면 '생명지역주의'
지금까지 생태문명의 골격을 열한 가지로 정리해 보았는데, 이 내용을 하나의 이념으로 압축한 것이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이다. 이를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풍수’ 또는 ‘풍류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풍수학과 풍류도는 인류문화유산이라 할 정도의 내용을 품고 있음에도 제국주의 학문에 빠진 지식인들이 현대화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명당자리나 찾는 미신으로 알고 있다. 서양의 논리학과 지식이 지금의 기후위기를 가져왔으므로 지금이라도 우리가 내팽개쳤던 ‘지식의 다른 길’을 적극 개척하여 위기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모든 생명은 장소적 존재이다. 단순히 생명운동을 주장하는 것은 관념론으로 흐르기 쉽다. 운동은 반드시 ‘실천’이 전제되어야 하는바, 그 실천의 장이 바로 지역과 마을이다. 모두 지역으로 내려가면 중앙은 기득권자들이 계속 장악할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실상은 그 반대이다. 지역이 튼튼하면 중앙에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너무도 부실하여 자격 미달의 정치인들이 중앙에서 멋대로 활개 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엉터리 정치인들이 중앙에서 활개 치기 때문에 지역이 급속히 소멸하고 있다. 산업문명이 막강할 때는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도한 산업화가 지구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산업문명 자체가 사멸할 위기에 놓인 지금이야말로 생태문명을 얘기해야 할 때이다. 얘기가 신념이 되고, 신념이 삶으로 전환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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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생태·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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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2.0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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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지배 산업문명 2.0이냐 생태문명이냐
모든 생명은 장소적 존재-생명지역주의
도시 집중, 인간 중심, 거대 지향 버려야
국가, 국경 거부하고 지역공동체 번영으로
자치와 자급, 수계 중심 생명지역별 생태문화
자주권을 지닌 생명지역들의 세계연방으로
‘농업’ 아닌 생활과 문화 차원의 ‘농사짓기’
첨단기술은 생태적 전환 위해 제한적 활용
산업사회 제도교육 버리고 생태문화 교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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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팬데믹, 전쟁, 사회적 혼란 속에서 많은 이들이 문명의 전환을 얘기한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일들이 그동안 해왔던 대처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달리 말해 하나의 문명이 그 소임을 다하고 새로운 문명에게 배턴을 넘겨주는 시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명에서 어떤 문명으로 전환이 되는가가 문제이다. 지금의 문명이 ‘산업문명’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음에 올 문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다음 둘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나는 AI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산업문명 버전 2’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생태문명’이다.
산업문명 버전 2냐 공존의 생태문명이냐
엄격히 말해 <산업문명 버전 2>는 문명의 전환이 아니다. 기존에 해 오던 것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다만 변화의 주체가 문명의 위기를 일으킨 ‘멍청한’ 인간이 아니라 ‘AI와 테크놀로지’라는 점에서 문명전환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는 디스토피아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 방향으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노예’라는 말은 현실 사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쓰는 말이고 현세의 가치를 굳건히 믿는 자들은 ‘동반자’ 또는 ‘도구’라는 말을 쓰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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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역사상 지능이 낮은 집단이 지능이 더 높은 집단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보다 더 똑똑한 기계를 만들었는데 내가 그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예전엔 기계의 플러그를 뽑거나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되었지만 AI에게는 그런 빤한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우회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AI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인간의 개체 수를 급격히 줄이는 판단을 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대부’로 불리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가 인류가 AI로 인해 30년 안에 멸망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는 최근 보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만히 있어도 죽고, 위기에 적극 대처해도 죽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생태혁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태문명을 건설하는 일을 ‘혁명’이라고 했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그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이전의 가치관과 습관을 과감히 버린다는 뜻이다. 과연 버릴 수 있을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건강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식습관으로 인해 중병에 걸렸다. 의사가 말하길, 몸의 원리와 구조를 제대로 공부하고 식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석 달 안에 죽는다고 한다면 그는 의사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냅둬유, 이대로 살다 죽을라요!” 할 것인가.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선택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골수 깊이 잘못된 지식과 습관이 몸에 배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Refresh!”(리프레쉬)
분위기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적한 곳을 찾아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대자연과 조용한 시골이 적당한 장소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곳이 새 출발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태문명은 원시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처럼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을 난도질했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이 어떻게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잘 보고 배워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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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은 첫째, 자본의 요구로 모든 인구를 도시로 몰아넣은 것부터 고치고자 한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생태 위기이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상위 포식자일수록 개체 수가 적어야 한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최상위 포식자는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결국 자기들끼리 잡아먹기 시작한다. 원래 자연상태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지만 ‘자본’이 끼어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선전하여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로 전락할 뿐이다.
생태문명은 둘째, 인간이 모든 생물종 가운데 가장 우월하므로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거부한다. 인간은 지능이 좀 높은 특이한 존재일 뿐 생명 가치에서 다른 생명체와 동일하다. 인간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른 생명과 동일한 존재로서 개인의 성장을 생태계의 안정과 번영보다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금기(터부)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의 일탈 행위를 막아 주었지만, 현대에 들어와 과학이라는 ‘주술’에 빠져 제멋대로 날뛰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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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은 셋째, 인간의 표준이라든가 이상형 같은 아이디얼 타입(Ideal Type)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생물종처럼 ‘장소적 존재’이다. 다른 장소에는 다른 인간이 산다. 다른 지역에 사는 인간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것은 제국주의 논리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이데아론’으로부터 인간의 관념적 이상형을 만들어 그것이 바로 자기들이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못된 짓을 한 것은 인류사의 씻을 수 없는 수치이다. 장소를 떠난 인간은 주로 남의 등을 쳐서 먹고 산다. 장소는 내 목숨을 유지시켜 주는 ‘생산의 현장’이다. 큰 도시에 그렇게나 많은 범죄자와 사기꾼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간은 장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장소에 있는 다른 생물종이나 자연도 정치적 타협 혹은 협력의 대상이 된다.
생태문명은 넷째, 거대 기계, 거대 조직, 거대 시설, 거대 이념 같은 거대함을 거부한다. 최상위 포식자가 만든 거대함은 생태계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기후재앙과 팬데믹이 휩쓸고 지나간 몇십 년 후 지상에 남아 있는 거대한 축구장과 공연장, 마천루 등은 로마 시에 남아 있는 콜로세움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생태문명은 ‘인간척도(Human Scale)’를 추구한다. 지역과 장소에 어울리는 적당한 규모야말로 인간적이고 또한 생태적이다. 우리가 관광지에서 만나는 거대한 고대 사원이나 유적은 인간의 광기가 빚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다섯째, 국가라는 인위적 구조와 국경선을 거부한다. 대신에 지역과 공동체의 번영을 추구한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을 기어다니는 뱀에게는 38선도 국경선도 없다. 어리석은 인간만이 국경선을 그어놓고 죽어라 쌈질을 하면서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국가는 만악의 근원이다. 어리석고 포악한 자가 국가 권력을 잡았다고 생각해 보라! 불행히도 인류사에는 성군(聖君)보다 폭군(暴君) 또는 우군(愚君)이 훨씬 많았다. 인간의 성정이 원래 포악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자들이 권력의 최상층에 오르기 쉬워서 그렇다. 만약 인류가 국경선을 없애고 지역과 마을에 흩어져 살면서 자유롭게 교류한다면 지금처럼 끔찍한 전쟁이나 지독한 경쟁은 없을 것이다.
생태문명은 여섯째, 사회구성원의 자치와 자급자족을 추구한다. 산업문명이 경쟁과 배제를 통해 발전했다면 생태문명은 협동과 돌봄을 통해 번성할 것이다. 자치는 생태문명의 정치적 표현이고 자급자족은 생태문명의 경제적 표현이다. 자치의 방법은 나라마다 전통적인 것부터 현대적인 것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화백회의와 현대의 직접민주주의 방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자급자족은 하나의 원칙이다. 지구 위 어떤 지역도 자급자족이 100% 가능한 곳은 없다. 원칙을 지켜 나가되 이웃 지역과 유무상통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융통성을 발휘하더라도 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자족(自足)’에 달려 있다. 생태문명이 가능한 경제구조에 대해서는 그동안 ‘대안경제론’을 통해 수많은 이론적·실천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너무도 강력한 자본주의적 관행으로 인해 거의 빛을 보지 못했으나, 기후위기와 경제불황 등으로 모두가 어려워지면 협동과 돌봄에 기초한 대안경제 체제가 저절로 작동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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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은 일곱째, 생명지역(Bioregion)에 근거한 생태문화를 추구한다. 생태문명을 온전히 구현하려면 기존의 행정구역과 국경선을 넘어 생태지리(Ecological Geography)에 맞게 모듬살이의 경계를 재구성해야 한다. 일정한 구역에 사는 모든 생명은 동일한 생태적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데 이를 ‘생태지리’라고 한다. 생태지리를 구별 짓는 유력한 기준은 ‘수계(水系, Watershed)’이다. 수계에 의해 구획된 지역에 인간의 문화 활동이 가미된 것을 ‘생명지역(Bioregion)’이라고 부른다. 생태문명은 생명지역에서야 온전히 꽃피울 수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 ‘풍수학’이나 ‘풍토학’으로부터 이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생태문명은 여덟째, 자주권을 가진 생명지역의 세계연방을 추구한다. 생명지역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자급자족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구태여 남의 지역을 침략할 필요가 없다. 내게 주어진 환경을 최고로 알고 어떻게 그곳에 문명의 꽃을 피우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마주치게 될 것이므로 다른 지역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도 여행이나 교육, 문화교류, 재해 극복 차원에서도 연방제가 필요하다. 이 세계연방은 국가들의 연합인 지금의 UN과 다르다. 산과 강이 표현된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명지역의 세계연방은 수계로 구분된 지역들의 연방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 중국이라는 국가 아이덴티티가 사라지고 양쯔강 수계, 황하강 수계, 티벳 고원 수계... 이런 식으로 구분이 되며, 이들 수계는 한국의 한강 수계나 낙동강 수계와 연방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관계를 맺는다.
생태문명은 아홉째, ‘농사짓기’를 업(業)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 차원에서 바라본다. 농업이라는 말은 산업시대에 들어와서 널리 알려진 용어이다. 오죽하면 농업을 ’1차 산업‘이라고까지 했겠는가. 그 이전에는 그저 농사 또는 ’녀름짓기‘로 불렀다. 전 세계 어디건 일부 대농을 제외하고 전업농으로 자급자족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농사를 업이 아니라 생활로 바라보아야 한다. 생태문명에서는 먹고 사는 모든 문제가 농사와 관련되어 있어서 누구든 생존과 생활을 위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업(業)의 굴레를 벗어난 농사는 문화와 테크놀로지, 영성과 결합하여 무한한 창조 또는 창작의 세계로 나아간다.
생태문명은 열 번째, 현대의 첨단기술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인다. 현대의 첨단기술은 그 발생부터가 반생태적이기 때문에 단순히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제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생태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묶어두어야 할 것이다. AI나 첨단 자동화 시설 등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겠지만, 이 기술들은 현재의 반생태적인 제반 법과 제도, 체제, 관행 등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다. 대신에 생태문명은 인간척도에 근거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적극 권장한다. 모듬살이의 규모가 생명지역에 국한될 때 지금의 거대 첨단기술은 오히려 비효율적이 될 것이다.
생태문명은 열한 번째, 산업사회를 지탱하는 지금의 제도 교육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생태문화교육으로 전환한다. 지금의 제도교육은 19세기 후반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프로이센에서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고안된 억압적 훈육 시스템이다. 이 제도를 도입한 프로이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제국으로 통폐합된 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이 시스템에서 학생들은 고도로 조직화된 교실에 갇혀 어떻게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효율적으로 착취할 것인지 배운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이다. 제도 교육을 당장에 폐지할 수 없으므로 지역과 마을 단위에서 다양한 대안교육과 유사 교육 프로그램이 행해져야 한다. 미래는 결국 교육의 내용과 질이 결정할 것이다.
하나로 압축하면 '생명지역주의'
지금까지 생태문명의 골격을 열한 가지로 정리해 보았는데, 이 내용을 하나의 이념으로 압축한 것이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이다. 이를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풍수’ 또는 ‘풍류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풍수학과 풍류도는 인류문화유산이라 할 정도의 내용을 품고 있음에도 제국주의 학문에 빠진 지식인들이 현대화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명당자리나 찾는 미신으로 알고 있다. 서양의 논리학과 지식이 지금의 기후위기를 가져왔으므로 지금이라도 우리가 내팽개쳤던 ‘지식의 다른 길’을 적극 개척하여 위기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모든 생명은 장소적 존재이다. 단순히 생명운동을 주장하는 것은 관념론으로 흐르기 쉽다. 운동은 반드시 ‘실천’이 전제되어야 하는바, 그 실천의 장이 바로 지역과 마을이다. 모두 지역으로 내려가면 중앙은 기득권자들이 계속 장악할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실상은 그 반대이다. 지역이 튼튼하면 중앙에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너무도 부실하여 자격 미달의 정치인들이 중앙에서 멋대로 활개 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엉터리 정치인들이 중앙에서 활개 치기 때문에 지역이 급속히 소멸하고 있다. 산업문명이 막강할 때는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도한 산업화가 지구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산업문명 자체가 사멸할 위기에 놓인 지금이야말로 생태문명을 얘기해야 할 때이다. 얘기가 신념이 되고, 신념이 삶으로 전환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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