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19h ·
<잠복>, 오래된 아내처럼 굴기
행복이 무엇일까. 젊은시절 나는 막연히 현재를 잘 보내면 미래에 다가올 무언가로 행복을 꿈꾸었다. 행복은 처음에는 '대학생이 되기만 하면' 다가올 줄 알았다. 그 다음에는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또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으로 수정되며 내내 미뤄지기만 했다.
그런 나에게 "바로 이것이 행복이야!"라고 짜잔 나타난 것은 앙드레 지드였다.
그는 <지상의 양식>에서 금욕과 쾌락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제시해주었다. 그것은 감각, 욕망의 박탈과 충족 사이를 극한으로 벌여 그 아찔한 낙차에서 생의 활력과 기쁨을 얻는 방법이다.
"나의 감각의 가장 큰 기쁨은 축여진 갈증이었다."
지드는 하늘과 땅 사이 넓게 펼쳐진 감각과 생의 들판을 홀로 부유하는 자유인이기를 원했다.
"나는 생각하였다. 지상에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부단히 변모하는 것들 사이로 영원한 열정을 몰아가는 자는 행복하리라고."
"홀로 나는 자부심의 벅찬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지금 당장 행복하겠다고 결심했다. 시험에 떨어졌어도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고독과 불안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도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지드의 방법론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나는 행복해지려 애썼고 애쓰면서 점점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늘과 꽃과 나무와 봄들판과 가을산과 사과 한 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사실 그것은 치기였다. 인생의 시련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반항의 외침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이 예상하지 못한 데로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니며 소금을 뿌려 젊은시절의 치기를 죽이고 나긋나긋하게 만들기 전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지드를 잊고 애 둘 딸린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드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다.
여기까지 과거이야기를 떠들어댄 것은 새로 생긴 페친의 담벼락에서 어제 읽은 시 한 수 때문이다. 처음 본 시고 처음 본 작가인데, 충격적이었다. 내가 그 시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그 시가 사무치게 폐부를 적셔온다는 것이. 몇 번이고 읽으면서 달라진 나를 확인하자 예전의 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무나 다른 세계로 건너왔다는 생각이 든다. 먼 길이었다.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거기서 목침을 베고 누운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는 것 같았고 그저 숨을 쉬는 건지도 몰랐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방에 있자니 오래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진 것이다
일으켜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
비가 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
검고 습한 두 개의 겨드랑이
이건 당신의 뼈
그리고 이건 당신의 고환
기록할 것이 많았던 연필처럼
여기는 매끄럽고 뭉둑한 끝
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이제 나는 이 시의 세계에 속해있다.
매일 옥상에 올라 해넘이를 보면서 때로 소월길과 남산 산책로를 거닐며 숨통을 틔우긴 하지만 나는 이 시의 사람이다. 내가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고 자세하게 관찰했다면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왔으니까.
남편의 아직 씩씩한 앞모습 보다 돌아누운 등과 큼큼한 겨드랑이에서 더 애틋한 정을 느끼니까.
비로소 대지에 발을 딛고 구질구질한 생활의 때가 묻은 행복의 구슬을 손에 넣은 자가 그 구슬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지상의 행복은 타인과 세상에 연결되는 것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의 제목인 잠복은 우리가 흔히 아는 잠복근무의 잠복이 아니었다. 잠복(暫福)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주로 가톨릭용어로 쓰이는 모양인데, '세상에서 갖는 잠시 동안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지상의 운명인 잠시 동안의 행복이라 해도 지드의 행복보다는 길고 든든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81년생인 시인이 이시가 수록된 시집 <연애의 책>을 출간한 연도가 2016년이라고 한다.그렇다면 서른 다섯도 되기전에 이 시를 썼다는 얘긴데. 그리고 시의 내용상 결혼생활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우와! 시인의 감성 성숙도는 보통사람과 이렇게 다른 것인가.
20살 더 먹은 나는 20년 결혼생활 끝에 '오래된 아내 처럼 굴기'를 터득할까, 말까 하는데 놀랍기만 하다.
이 시를 읽은 후부터 갓 무친 나물이 그렇게 먹고 싶어진다. 오늘 저녁밥상 위에는 새파랗고 윤이 좌르르 흐르는 시금치나물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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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의 시인, 유진목의 사진이다. 너무 이뻐서 퍼왔다. 처음에 이름을 보고 남자인 줄 알고 분기탱천했다. 남자가 이런 시를 쓴다면 악마적 재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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