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
이경구 (지은이)푸른역사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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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384쪽
책소개
전환기에 처한 왕국에서의 철학 논쟁을 다룬 책이다. 17세기가 저물고 18세기가 시작되던 시점은, 안으로 주자학으로 국가를 재건했던 시기가 끝나고 바야흐로 세속화가 진전하는 시기였다. 밖에서는 오랑캐로 멸시했던 청나라의 융성이 확연했다. 일본, 베트남 등도 신국神國, 남제南帝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양반?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던 중인.서민.여성 등의 역량이 신장되었다. 오랑캐가 문명에 다가설수록 화이華夷 질서는 흔들렸고, 서민.여성이 성인이 될 가능성이 커질수록 명분 질서는 요동쳤다.
이에 대응해 조선의 선비들은 주작학적 질서와 명분으로 조선의 재건과 동아시아 변화에 적응하려 했다. 기존의 사단칠정 논쟁을 계승하면서도 좀 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주제, 즉 마음, 타자, 사람 일반의 문제에 매달렸다. 숙종 후반부터 순조 초반 붕당정치에서 탕평정치를 거쳐 세도정치가 정립되는 시기, 철학과 사회의 문제는 정치와 얽히면서 한 번 더 꼬였다.
논쟁의 최종 승자가 된 노론은 영조 대부터 북당北黨과 남당南黨, 시파時派, 벽파僻派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학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정치적 분쟁이 일어났다. 철학적 다툼이 조선의 정치?사회 흐름의 숨은 추동력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를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사상 중심으로 파악하기에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목차
들어가며
서장_호락논쟁 이모저모
조선의 3대 논쟁|송시열의 후예들,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핵심 주제들|또 다른 명칭, ‘인성물성人性物性 논쟁’
1장_논쟁 시작
1. 권상하와 제자들
송시열과 권상하|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한산사의 봄을 기약하다
2. 한산사 논쟁
한산사 가는 길|한산사의 첫날|둘째 날 이후, 귀향
3. 논쟁은 서울에서도
김창협․김창흡 형제|남산처사 조성기|서울의 편지논쟁
2장_논쟁 주제
1. 성리학은 무엇인가
유학과 성리학|주자학의 성립|사단칠정논쟁
2. 호락논쟁의 3대 주제
미발未發, 마음의 정체|인성과 물성, 인간과 외물의 관계|성인과 범인, 인간의 변화와 평등
3. 논쟁 아래 맥락과 현실
관점과 맥락|이론은 이론, 현실은 현실
3장_학파의 형성
1. 정변의 소용돌이
병신처분|경종과 신축환국․임인옥사|낙향하는 호론, 쑥대밭이 된 낙론
2. 영조, 새 판을 짜다
탕평 선포|학學-정政 체제를 분리하라!|한원진의 기대와 좌절|영조와 낙론의 인연
3. 만남과 논쟁
이재, 내일을 준비하다|비래암 강학회|한천시 논쟁
4장_빛과 그늘
1. 호론의 최고봉 한원진
정학正學의 수호자|제2의 송시열을 꿈꾸며|《주자언론동이고》, 완전무결한 주자학
2. 낙론을 부흥시킨 김원행
서울 명문가의 후예|일상에서 찾는 진실한 마음|학문공동체 석실서원
3. 삼무분설三無分說, 호론의 날카로운 칼
변화의 기로에서|호론의 디스토피아|보편 사상의 가능성과 한계
5장_복잡해진 지형
1. 안팎에서 부는 바람
청, 제국이 되다|김창업의 《연행일기》|오랑캐들의 부상|이익과 유행, 조선을 흔들다|떠오르는 계층들
2. 철학 논쟁 변질하다
윤봉구와 화양서원 묘정비|묘정비 사건․송시열 영정 사건|북당, 남당과 얽히다
3. 분열하는 학파들
정조 초반의 파란|갈등하고, 오고가고|시파, 벽파와 다시 얽히다
6장_반성과 성찰
1. ‘공담 비판’에서 실학까지
혈전血戰에서 벗어나기|영조와 정조, ‘한 쪽을 편들면 다툼이 생긴다’|남인과 소론, ‘학문으로 후세를 죽이지 말라’|실實을 향하여
2. 호락논쟁을 뛰어넘은 홍대용
공관병수公觀並受,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기|‘저들’에 대한 이해|차별이 사라진 범애汎愛의 세계
3. 타자 담론 파고들기
동양의 고귀한 야만인|동서고금의 타자들
7장_철학 왕국의 황혼
1. 파국
정순왕후의 수렴청정|반동의 여파|호론과 낙론의 악수惡手
2. 세도世道에서 세도勢道로
또 바뀐 정국|이야기 만들기|잃은 것과 지킨 것
3. 세 가지 유산
집마다 학설, 사람마다 의견|위군자僞君子의 가짜 도학|새로 움트는 싹들
맺으며_‘지금 여기’에서의 호락논쟁
철학과 이념|역사 이야기와 소통|마음의 참 모습|타자에 대한 성찰
부록
연표
학맥․관계도
참고논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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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1689년(숙종 15) 2월 숙종의 서인西人을 축출하고 남인南人을 대거 등용했다.
P. 21 충청도의 노론 학자들은 당시에 호학湖學, 호론湖論, 호당湖黨, 아니면 그냥 호湖로 불렸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속했던 학자들은 낙학洛學, 낙론洛論, 낙당洛黨, 아니면 낙洛으로 불렸다. 서울에 ‘낙洛’이 붙은 것은 중국의 도시 낙양洛陽이 수도의 보통명사처럼 쓰였기 때문이었다. …… 사실 ‘논쟁’이란 말도 후대에 붙은 것이다. 당시에는 호락시비湖洛是非, 호락변湖洛辨, 호락이학湖洛二學, 호락본말湖洛本末 등으로 불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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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6 18세기 조선의 지역, 학문, 국제정세라는 세 가지 지표는 바야흐로 ‘상황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호론은 기존의 지향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송시열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했고, 남인과 소론은 배척의 대상이었으며, 청은 오랑캐이자 타도할 적이었다. 그에 비해 낙론은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파와 정파의 주장에 귀를 열었고, 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면 호락논쟁은 변화된 상황에 대한 원칙론자와 수정론자 사이의 인식과 대응의 차이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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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8 권상하의 호는 ‘수암’ 또는 ‘한수재’였으나, 사람들은 그가 살았던 황강촌을 따 그를 ‘황강 선생’으로도 불렀다. 권상하의 제자들도 자연스레 ‘황강 선생의 문하’가 되었으니, 그 말을 줄이면 ‘강문江門’이 된다. 세간에서는 강문의 선비들 가운데 빼어난 여덟 명을 ‘강문팔학사’라고 불렀다. 권상하 문하의 빼어난 여덟 선비, 호락논쟁의 첫 번째 주역이 바로 그들이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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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3 시詩는 마땅히 당나라 시를 배워야 한다지만 반드시 닮을 필요는 없다. 당나라 시는 인간의 성정性情에서 우러나는 흥취를 위주로 했고 실증이나 의론에 치우치지 않으니 이것은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
P. 68 권상하에서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호론의 주류 이론과, 김창협·김창흡에서 박필주·어유봉으로 이어지는 낙론의 주류 이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간과 이현익은 두 학파에서 비주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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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경구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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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조선후기 안동 김문金門의 성장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의 의 정치, 사상, 지식인에 대해 공부하고, 학술서와 교양서를 가로지르며 글을 썼다. 현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에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는 《조선후기 안동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 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정조와 18세기》(공저), 《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 등이다.
최근작 : <실학, 우리 안의 오랜 근대>,<비교와 연동으로 본 19세기 동아시아>,<조선, 철학의 왕국> … 총 15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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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여성사, 한 걸음 더>,<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다시, 제노사이드란 무엇인가>등 총 317종
대표분야 : 역사 5위 (브랜드 지수 587,56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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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세속화의 도도한 흐름, 동아시아의 변화 소용돌이 속에서
이상을 좇았던 조선 선비들 이야기
조선을 읽는 새로운 틀-정치사 제도사 중심을 벗어난 사상사
책은 한마디로 전환기에 처한 왕국에서의 철학 논쟁을 다룬 것이다. 17세기가 저물고 18세기가 시작되던 시점은, 안으로 주자학으로 국가를 재건했던 시기가 끝나고 바야흐로 세속화가 진전하는 시기였다. 밖에서는 오랑캐로 멸시했던 청나라의 융성이 확연했다. 일본, 베트남 등도 신국神國, 남제南帝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양반․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던 중인․서민․여성 등의 역량이 신장되었다. 오랑캐가 문명에 다가설수록 화이華夷 질서는 흔들렸고, 서민․여성이 성인이 될 가능성이 커질수록 명분 질서는 요동쳤다.
이에 대응해 조선의 선비들은 주작학적 질서와 명분으로 조선의 재건과 동아시아 변화에 적응하려 했다. 기존의 사단칠정 논쟁을 계승하면서도 좀 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주제, 즉 마음, 타자, 사람 일반의 문제에 매달렸다. 숙종 후반부터 순조 초반 붕당정치에서 탕평정치를 거쳐 세도정치가 정립되는 시기, 철학과 사회의 문제는 정치와 얽히면서 한 번 더 꼬였다. 논쟁의 최종 승자가 된 노론은 영조 대부터 북당北黨과 남당南黨, 시파時派, 벽파僻派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학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정치적 분쟁이 일어났다. 철학적 다툼이 조선의 정치․사회 흐름의 숨은 추동력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를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사상 중심으로 파악하기에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호락논쟁이란-호락호락하지 않는 호락논쟁
학자 외에 국왕, 정치인, 남인과 소론 학자, 때론 중인까지 왕성하게 참여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은 호론湖論(충청도의 노론 학자)과 낙론洛論(서울의 노론 학자) 사이의 논쟁이므로 이렇게 불린다. 이황, 이이가 주역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졌던 예송禮訟과 함께 조선의 3대 철학논쟁으로 꼽히지만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다.
가장 큰 이유는 호락논쟁의 주제들이 꽤 난해하기 때문이다. 논쟁의 주제는 보통 세 가지로 간추려진다. 첫째, 미발未發에서의 마음의 본질에 대한 논쟁. 미발은 감각이 발동하지 전의 마음의 상태이니, 이 주제는 간단히 말해 인간과 마음[心]의 정체에 대한 논쟁이다. 둘째,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논쟁. 여기서 물성은 인간을 둘러싼 외물外物로서 타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셋째,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인성물성논쟁은 청나라로 대표되는 오랑캐에 대한 인정 여부와, 성인과 범인의 이동異同을 둘러싼 다툼은 서민․여성에 대한 인정 여부와 연결되기에 논쟁은 치열하고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왜, 지금 여기서 호락논쟁인가-여전한 현재진행형
호락논쟁의 주제와 그 속에서 활동했던 인간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고민과 관련해서도 생각거리를 풍성하게 던진다.
논쟁의 첫 주제였던 마음을 보자. 근대 이후 우리는 인간의 정체를 두뇌와 신경의 작용에 연관해 설명하고 있다. 심학心學이 사라진 자리를 사이콜로지psychology 곧 심리학心理學이 채웠다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정신, 의지, 도덕, 감수성의 총체로서의 마음이 다시 주목받는 듯하다. 마음의 주재성과 외물에 대한 조정력을 중시했던 유학의 마음공부야말로 지금 충분히 재음미될 수 있다.
호락논쟁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지금 우리가 겪는 다문화, 남녀, 장애인, 난민 등의 문제 또한 타자에 대한 이해가 해결의 고리다. 앞으로는 로봇,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타자에 대한 인정 문제가 부상할 것이다. 호락논쟁의 여러 장면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자를 이해하며 공존하는 노력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독특한 구성, 풍성한 읽을거리
굳이 분류하자면 사상사 관련 서술인 이 책은 몇 가지 장치를 통해 딱딱한 이론 소개를 넘어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지은이는 전형적인 ‘철학사’ 서술을 우회해 철학사 서술에서는 보통 간과되기 마련인 주변 정보들을 활용해 ‘이야기’라는 색채를 입혔다. 지금은 매우 낯설어진 사유방식인 성리학에 그들의 마음과 일상, 정치․사회 이론, 활동과 관계망 등을 복원해 정치․사회적 요인까지 복잡하게 얽힌 이 문제를 입체적으로 풀어나갔다. 결국 이 책은 부제에서 ‘호락논쟁 이야기’에서 보듯 이상을 향한 철학과 세속 질서로 움직인 사회 속에 있었던 조선 철학자들의 이야기다.
둘째 이를 위해 역사 이야기와 철학 이론 설명이 교차되는 독특한 구성을 택해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서장에서는 호락논쟁을 개괄적으로 소개했다. 사전적인 정리이므로 처음에 읽어도 되고, 나중에 읽어도 된다. 본문의 1장․3장․5장․7장은 역사 이야기가 뼈대고, 2장․4장․6장․결론은 철학이나 이론에 대한 소개가 뼈대다. 관심에 따라 이 장들만 떼서 연결해 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세 번째 미덕은 여느 철학이론서 또는 사상사에서 만나기 힘든 풍부한 도설圖說이다. 각 장마다 7컷 정도의 그림과 사진을 실어 본문에 생동감을 더했다. 소재는 등장인물의 초상, 유적지가 기본이고 당시 생활을 상상케 하는 회화 자료 또한 풍부하다. 그림 가운데는 중국, 일본은 물론 서양화가의 작품까지 있다. 그림 설명에서도 가급적 자세한 정보를 더하여 깊이 있는 해석을 도왔다. 부록에 실린 연표와 학맥․관계도 역시 주목할 사항. 덕분에 책을 수시로 뒤적이거나 다른 정보를 찾는 수고가 줄어 진지한 독자들이 반길 만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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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의 왕국』: 저물어 간 철학의 왕국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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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논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주제다. 최소한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선 전기와 후기에 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락논쟁은 앞의 두 논쟁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논쟁으로 꼽힘에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재수 시절 풀었던 국어 모의고사 지문을 통해 처음으로 호락논쟁을 접했다.
사실 세 논쟁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건 의외로 호락논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의 경우, 막상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는 순간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절벽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사단과 칠정이 리(理)와 기(氣) 중 어디에 속하는지, 계모인 자의대비는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전개된 치열한 논쟁을 접한다면 누구라도 얼이 빠질 것이다.
반면 호락논쟁이란 거칠게 말해 인간과 동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머리에 팍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부딪혔던 쟁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이기에, 비교적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호락논쟁이 대중에게 이토록 홀대받았던 이유는, 다른 두 논쟁과 달리 논쟁 ‘바깥의’ 이야깃거리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단칠정논쟁은 젊고 야심찬 기대승의 도발에 나이든 대학자 이황이 보인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로 두고두고 회자되며, 조선 전기의 건강한 학문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논쟁으로 기억된다. 예송논쟁 역시 그 쓸모없음을 조롱하건, 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성숙에 감탄하건 간에 어쨌든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친다. 이와 달리 호락논쟁은 소위 ‘임팩트’ 있는 사건이 없어서인지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요컨대 누구나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지만, 이야깃거리가 상대적으로 풍부하지 않다는 점이 호락논쟁을 21세기 한국인의 삶으로 끌고 들어오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 철학의 왕국』(이하 『철학의 왕국』)은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저자 이경구는 호락논쟁의 쟁점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기보다는 이를 두고 벌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논쟁의 당사자인 한성의 낙론과 충청의 호론, 논쟁을 중재해야 했던 영조와 정조, 논쟁 바깥에 비켜서서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했던 남인과 소론 등 ‘호락논쟁’을 키워드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체상이 들어온다. 단순히 글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너무나 단정하고 아름다워 탐이 날 지경인 저자의 문장 역시 독자로서 누리는 과분한 호사이자 즐거움이다.
이처럼 술술 읽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철학의 왕국』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리학이란 무엇이며, 호락논쟁은 무엇을 두고 벌어졌는가를 서술한 2장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싸매는 성리학(!!)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을 뿐 아니라, 이쪽 분야의 책으로는 퍽 이례적으로 주자학의 양면성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땅에 무려 500년 넘게 뿌리를 내려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지라,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은 주자학을 평정심을 갖고 차분히 바라보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다르지 않은지라,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이 “오래된 미래”냐 “북한의 조상”이냐에 따라 주자학에 대한 평가가 널을 뛰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모름지기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데, 주희 선생이 아무리 꼼꼼하고 똑 부러진다 한들 우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콩알만 했을 때부터 저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던 조숙한 소년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도전에 맞서 송대 유학을 집대성하고, 하나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리(理)의 보편성을 근거로 만인의 성인됨을 옹호했는데, 김상준이나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를 근거로 주자학에 근대성의 맹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자는 기(氣)의 차별성을 내세워 금수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의 금에게 중원을 빼앗겼다는 열패감에 시달리던 남송의 한족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자학은 중화와 야만, 성인과 범인을 구별 짓고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계승범의 경우 바로 이러한 차별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리라.
요컨대 주희는 김상준과 미야지마 히로시 식으로도, 계승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상당히 다면적인 인물이다. 그가 집대성한 주자학 역시 아무리 체계적이라 한들 평등과 차별의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고 말이다. 호락논쟁이란 결국 주자 자신보다도 주자를 완벽히 이해하고자 했던 조선의 유자들이, 주자학의 어느 한 측면에 주목하여 이를 정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립인 것이다.
조선 최대의 이데올로그였던 송시열의 제자들은 만물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두고 분화를 시작했다. 충청도의 권상하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집한 호론은 인간과 동물, 성인과 범인의 본성이 다르다며 차별을 정당화했다. 한성의 김창협을 중심으로 느슨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낙론은 만물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며 평등을 주창했다. 호론과 낙론이 벌인 치열한 논쟁은 굉장히 흥미진진하며, 진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낙론을 부흥시킨 김원행과 그 제자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마치 종교인처럼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모습은, 세속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허나 시간이 흐르며 호락논쟁은 초기의 역동성과 건강함을 잃고 논쟁만을 위한 논쟁,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정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글을 읽어가며 이들이 과연 얼마만큼 실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애초에 호론과 낙론 모두가 사상적 지반으로 삼고 있던 주자학이 가장 강조했던 게 다름 아닌 “경전 공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논쟁이 주자를 들어 주자를 비판하는 공리공론으로 흐르는 건 어쩌면 예정된 파국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반응을 예상한 듯 5장의 한 챕터를 할애해 당시 조선이 이전과는 다른 흐름 속에 놓여 있었고, 호론과 낙론 역시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호락논쟁 자체의 문제이며 동시에 조선이란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철학의 왕국』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하자마자 떠올랐던 건, 조선은 고도의 관념국가였다는 이영훈의 일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철학의 왕국’과 ‘관념국가’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나의 조선상은, 6장에 이르러 결국 후자로 기울고 말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아마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던 “사회”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란 말이 풍기는 근대의 냄새가 영 어색하다면, 생활세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당시 조선 유자들에게 사회란 지리적으로는 궁궐 혹은 넓게 잡아 사대문 안이고, 인적으로는 같은 양반에 국한되는 왜소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였으리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핫한(!) 지식인인 김영민은 얼마 전 『일본비평』에 통념과 달리 조선은 중앙정부와 사회가 모두 약한 국가였다는 문제적인 논문을 개제한 바 있다. 그의 냉정한 분석은 적어도 내겐 꽤 타당하다고 느껴진다. 한성의 중앙정부에서 활동하던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은 궁궐 바깥의 사회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형식화·교조화된 호락논쟁은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와 더불어 철학의 왕국 조선 역시 황혼을 맞이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종필은 2004년 총선에 출마하며 해는 지더라도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말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이 자신의 욕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19세기는 이 멋들어진 말이 꽤 어울리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호락논쟁이라는 해는 저물었지만, 그 붉은 빛이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리학을 다룬 2장이라면, 19세기의 변화를 다룬 7장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앙 유자들의 논쟁은 활력을 잃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오히려 유학이 민간으로 널리 전파되어 집마다 학설을, 사람마다 의견을 내세우는 수준에 도달한다. 19세기란 결국 이와 같은 “인민의 유교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착실히(?) 이루어진 전 사회의 유교화가 이후 한국의 근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밝히려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주자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교화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린다. 혹자는 인민의 유교화란 사실상 가족 단위의 신분상승에 몰두하는 “온 나라 양반되기”에 불과했다고 단정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근대는 결국 혈족공동체의 지원을 받은 개인들이 중앙을 향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사회”였으며, 그 에토스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였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인민의 유교화를 만인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추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군자”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식민지시기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건 다름 아닌 “군자들의 행진”이었다.
저자는 19세기 인민의 유교화가 결국 한국의 근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제가 호락논쟁인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저자가 여백으로 남겨놓은 부분을 채워가는 건 독자인 우리들의 몫이다. 물론 저자에게 바라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잔잔한 파장을 몰고 온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와 같은 훌륭한 통사를 저자가 써주었으면 한다. 물론 길고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철학의 왕국』을 주춧돌로 삼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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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 2018-11-24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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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논쟁을 위한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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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사회의 사상을 알지 못하고 그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학문을 넘어선 삶의 태도이자 지표였으며, 회복되어야 할 이상세계의 기준이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사상이었던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3대 논쟁' 중에 가장 덜 알려진 호락논쟁을 다룬다. 호락논쟁은 25년간 연구한 저자조차도 이해하기에 힘들고 사상을 연구하면 할수록 혼란에 빠진다고 표현할 만큼 난해하다.그렇지만 책 제목에 호락논쟁 ‘이야기’라는 말을 붙인 것처럼, 저자는 유학과 성리학의 탄생부터 호락논쟁 이면의 이야기까지 역사적 흐름, 논쟁 주역들의 대화와 일상, 심성과 욕구도 함께 설명한다.
1. 곧음이냐 유연함이냐
명이 멸망하자 조선은 유일한 유교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세워 유교의 명맥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 이후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강력한 생각이었다. 송시열로부터 이어지는 노론 학맥은 충청도의 권상하와 서울의 김창협으로 나뉘어 충청도의 호론과 서울의 낙론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나뉜 호론과 낙론 사이의 논쟁이 바로 호락논쟁이다. 호락논쟁은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호락논쟁이 일어난 18세기는 안팎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오랑캐라고 무시해온 청의 문화와 지배는 점차 융성하고 확고해졌다. 조선 내부에서는 도시의 성장과 세속화, 여러 계층이 떠오르며 기존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변화되는 환경에 호론과 낙론은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호론은 송시열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였다.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자 타도할 적이었고, 남인과 소론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낙론은 새로운 국면에 유연하게 반응했다. 다른 학파와 정파의 주장에 귀를 열었고, 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들의 논쟁은 치열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말과 글이 오갔고, 분파가 형성되고 갈라졌으며 말과 글은 칼이 되어 많은 사람을 베기도 하였다.
호락논쟁은 사단칠정 논쟁을 계승하는 성격이 있다. 사단칠정 논쟁은 만물의 형성 원리인 이(理)와 만물의 근본 질료이자 형질인 기(氣)가 인간의 사단과 칠정에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에 비해서 호락논쟁의 성격은 인간 정의에 대한 문제로서 상대적으로 구체적이었다. 호락논쟁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논쟁했다. 먼저는 마음의 정체에 대한 논의이며, 두 번째는 인간과 물성, 인간과 외물의 관계 마지막은 성인과 범인, 인간의 변화와 평등에 관한 논의였다. 마음의 정체에 대한 논쟁은 수양의 문제였고, 인간과 물성은 타자에 대한 인정과 관련된 문제였으며, 성인과 범인은 다양한 계층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
각각의 입장에는 앞서 언급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올곧은 호론과 유연한 낙론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호론은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기(氣)로 인해 움직이는 현실 세계를 중시했다. 이이의 철학은 기의 가변성을 긍정하자 현실에서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러나 기의 중시는 기로 인해 생겨난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강조로 흐를 수 있었다. 호론의 사상은 후자였다.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며 기로 인한 차별과 분별을 강조하였고,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반면에 낙론은 이(理)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성인과 범인 인성과 물성은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보편성은 유교 문명만의 보편성으로서 청나라와 신분질서에까지 보편성이 확장되지는 못하였다.
2. 탁류 속으로
호락논쟁은 정치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론은 숙종 후반부터 정계와 학계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영조 대에 거의 굳어졌다. 이 시기에 노론은 호론과 낙론으로 학파가 갈라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숙종 대에서 경종 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발 딛고 있는 정치는 복잡했고 살얼음판이었다. 특히나 경종 때의 신축환국과 임인옥사는 노론, 특히 낙론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즉위한 영조는 탕평 정치를 선포하고 더 이상 붕당의 논쟁과 사문 시비를 허용하지 않았다. 탕평 정치에서 주도권은 군부이자 공을 대표하는 국왕에게 있었고, 어느 한 붕당이 정권을 잡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호론과 낙론은 영조의 탕평 정치에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낙론은 탕평 가운데서도 노론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탕평 정치의 주도권이 노론에게 있었지만, 호론은 노론이 완전한 주도권을 잡는 때까지 기다렸다. 영조 후반 왕권이 강해지자 그에 따라 외척의 권력도 강해졌다. 당시 외척은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북당과 정순왕후 계열의 김한구·김구주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남당으로 대립하였다. 남당은 학맥과 인맥으로 호론과 연결되었고, 북당은 낙론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호론과 낙론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을 이었지만, 영조와는 달리 국왕이 주도하는 의리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계는 국왕을 따르는 시파와 붕당의 의리를 고수하는 벽파로 나뉘었다. 이들의 갈등은 정조 말년에 한원진의 시호 문제로 극단에 치닫고 정조가 죽은 후 파국에 이르렀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호론과 결탁하였다. 영조 후반 청류를 지원하여 척신과 대항했던 자신들의 사상을 저버리는 순간이었다. 호론은 스스로 척신이 되어 정순왕후와 함께 사학을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정과 사의 이분법은 천주교를 신봉했던 많은 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정계에서는 남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낙론의 김건순이란 인물과 혜경궁의 동생까지도 사사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사상의 자유와 새로운 탄생을 경직시켰다. 서울에서 자유로운 문학을 전개하던 자들과 낙론의 한 부류로 청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 북학파는 모두 활기를 잃었다. 사상의 전환을 불러온 홍대용과 박지원, 기발한 글을 썼던 이옥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무기력함을 절감하였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정국은 급변하였다. 순조는 서울의 명문 안동 김씨 출신 순원왕후와 혼인하여 친정을 시작하였다. 안동 김씨 세력은 정국 변화를 주도하였고 이에 벽파는 일련의 사건으로 몰락했다. 결국 벽파와 호론의 학자들은 역적이 되어 제거되었다. 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순조의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이 순조·헌종·철종 때까지 정치를 주도한 것이 바로 세도정치다. 그리고 그 세도정치 기간 동안 호론이 벽파에 종속된 것 이상으로 낙론은 세도정치에 종속되었다.
3. 다른 지평에서
호락논쟁은 순수한 학문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정쟁과 연관되고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한원진은 도교, 불교, 허형을 비판하는 삼무분설을 통해 낙론을 거세게 몰아붙인다. 만물의 원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보편 사상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배제와 차별의 논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낙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말로는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말하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면서도 실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호락논쟁은 점차 경직되었고 극단으로 치달았다.
극단과 포화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는 법이다. 호락논쟁이 현실과 유리되어 이상만을 추구할 때 지역과 정파를 가리지 않는 소수의 학자들은 실(實)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폐해를 보며 진실, 현실, 실천, 무실 등을 외치며 자신을 수양하고 실천하는 실(實)로써 성리학의 이상세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해석이 난무하고 어느새 본질로부터 멀어져 폐단을 드러내는 논쟁에서 소박했던 정신을 되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성리학 세계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호락논쟁과는 다른 지평에 서 있었다. 홍대용은 노론의 명문 출신으로 정파로 따지자면 낙론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홍대용은 청에 다녀온 이후 개방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 『의산문답』에서 그는 유학 중심, 인간 중심, 더 나아가 우주 중심의 모든 중심성을 해체하고 상대적인 관점을 취했다. 이것은 외물에 대한 평등과 연대의 정신으로 뻗어 나갔다. 홍대용은 경직되어 가는 사상논쟁과 정쟁 속에서 새로운 사상과 가능성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다.
4. 이해로서의 역사
호락논쟁은 저자는 물론이거니와 당시의 학자들도 어려워했던 내용이었다. 나도 예전부터 몇 번씩 한국사상에 관해 공부해보고 싶었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적절한 설명과 비유를 들며 간결하게 서술하여서 편히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며 호락논쟁의 역사성을 재현해낸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이뤄진 정치적 다툼을 호락논쟁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부분은 그 연관성이 와닿지 않았다. 더불어 이것이 학문적 논쟁인지 정쟁인지 학문적 논쟁이 정쟁에 이용된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논쟁의 지속성이라든지 파급력의 차원은 약간 의문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에서 시대와 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호락논쟁의 의미를 찾고 호락논쟁과 현대를 엮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학문에 임하는 자세와 열성은 많은 배움이 되었고, 유학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통해서 조선시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사실 조선, 특히 성리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강력하다.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역사는 대중들에게 꽤 인기 있는 상품이 되었다. 역사를 얘기하는 장도 다양해졌다. 누구든지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 역사에 대한 다양한 평가도 이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호사가’로서 역사에 기웃거리며 ‘심판자’로서 역사를 판결하는 것 같다. 이들은 호락논쟁이나 성리학에 대해서 고리타분한 역사거나, 무익한 논쟁, 혹은 조선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시대착오적인 역사로 단정 짓는다. 역사는 (옛날)인간에 대한 이해이지만 이들에게는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호락논쟁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으며 그들의 사상과 삶을 통해 조선시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면 호락논쟁은 충분히 가치 있는 역사다.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는 심판자와 호사가의 역사에게서 공격받은 조선의 역사, 성리학(자)과 호락논쟁을 훌륭히 변호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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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소리 2019-09-1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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