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1

예송논쟁과 사단칠정론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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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과 사단칠정론

bullhwe

2020. 5.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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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체 난 그럼 어쩌라는 겐가?'





오늘은 조선 붕당정치의 폐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송논쟁'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국사시간만 해도 국사선생님께서 '이기론이니 예송이니 하는 소모적인 논쟁들만 벌여서 조선이 망했다'라고 하는 말씀을 수 없이 하셨었는데요. 오늘날에도 이런 견해가 다수 존재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붕당정치를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는가? 붕당정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오늘 이 글의 주제입니다. 우선 오늘날 조선의 붕당정치를 가장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건인 '예송논쟁'을 통해서 붕당정치가 가지는 정치적 철학적 사상사적 함의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정치사적 사건'인 예송논쟁 사건을 간략히 살펴보면 조선 17대 왕인 효종이 승하하자(1659년) 효종의 계비(자의대비, 효종의 아버인 인조의 둘째 마누라)의 복상문제를 놓고 1년을 입어야하느니, 3년을 입어야하느니 하는 사건입니다. 우암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집단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미수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집단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이 당시 서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1년상을 치루게되는데 이를 일컬어 1차 예송논쟁, 기해년에 일어났다 해서 기해예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15년 뒤 1674년 효종비인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이번에도 다시 복상문제가 불거졌고 9개월이냐, 1년이냐를 놓고 대립한 끝에 남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를 2차 예송논쟁, 갑인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갑인예송이라고 합니다.





결국 붕당정치의 폐단을 이 사건과 '사화' 사건을 두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적'인 시각에서 이 사건을 바라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볼 수 없을까요? 자의대비의 의붓아들(효종)과 며느리(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상문제가 어떠한 '의미'가 당시에 있었다고 판단했기에 각 붕당은 '정치적 사상적 신념'을 걸고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패권다툼'이라는 관점에서만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할까요?







우선 '예송논쟁' 사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먼저 알아보도록 하지요. 오늘날 예송논쟁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기사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와봤습니다.














우선 위 기사의 내용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코로나정국'의 문제를 '예송논쟁'에 빗대서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요. 빨간줄 친 부분은 작성자가 바라보는 '예송논쟁'에 대한 관점입니다. '실용과는 거리가 먼 형이상학적 주제로 소모적 논쟁을 벌이며 국력을 낭비'가 바로 오늘날 붕당정치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관점입니다. '예송논쟁'이 형이상학적 주제라는 거지요. 좋습니다. 그런데 왜 저 논쟁에서 1년이냐 3년가 하는 구체적 수치가 등장하는지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1년이니 3년이니 하는건 의미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구체적 수치들이 갖는 의미는 당시에 분명히 존재했었고 그 가치들은 이미 정치적제도와 법제도 그리고 통치 윤리규범과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윗 기사의 파란줄 친 부분은(글쓰신 분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명백하게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주자가례'(유학 예법에 관한 제도)에 의하면 부모보다 자식(아들의 경우)이 먼저 죽었을 경우 부모는 복상기간을 장자는 3년, 차남부터 1년을 해야한다고 명시가 되어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서인의 경우 아무리 왕이라도 인조의 둘째 아들이니 일반백성과 다른 예법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똑같이 1년을 입어야한다는 입장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정통적으로 계승한 왕이 어떻게 일반백성과 똑같은 '예법'을 적용시킬 수 있겠는가 하여 '국조오례의'를 근거로 장자원칙에 따라 3년을 입어야 한다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친명사대주의에 기운 서인들은 조선이 제후국이니 명나라보다 간소하게 예법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들은 일반 가정집에서도 3년복을 입는데 하물며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며 원칙을 고수했다.' 라는 설명은 명백하게 역사왜곡입니다. 그러니 '예법'과 '왕실'과 '통치윤리'간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정치사상적 대립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봤을 때 서인들의 경우 '일반예법'과 '왕실예법'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인'들의 정치적 윤리적 사상적 입장이었고, 동인들의 경우 '일반예법'과 '왕실예법'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라는 것이 동인들의 입장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동시에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서인과 동인이 바라보는 정치관, 윤리관, 예법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다고. 이것은 즉 각자 바라보는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들이 다른 세계관을 가지는 사상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걸까요? 이들의 사상적 근거는 모두 '주자학'에 근거합니다. 주자학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은 '이기론'이 아니던가요? 이기일원론(서인)과 이기이원론(동인)은 모두 '이기론'의 틀 속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드러나는데 세계관이란 곧 '인간관' 즉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대한 사상적 철학적 진단이 내려지지 않고서는 존립이 불가능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공적 영역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께서 최근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송논쟁'이란 정치적 사건은 '세상과 인간'의 규율을 도덕적 윤리적 기틀을 세우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제가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아주 유명한 두 사람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밝힌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밝힌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자본론'의 저자 칼 맑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있는 '국부론'과 '자본론'은 '도덕감정론'과 '독일이데올로기' 이 두 책을 기틀로 삼아 정치적 사상적 철학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방대합니다만 이 두 책에서 이 위대한 두 사상가는 각자가 생각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스미스는 전통적인 '인간 이성'의 신뢰에 입각한 자유적 사회교환 행위의 정당성을, 칼 맑스는 '유물론'에 입각한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와 세계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인간관에 대한 확립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게 저 당시 사회이론가들의 주된 입장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세계(혹은 사회)는 인간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정당한 논의 없이 세계관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국부론'은 '도덕감정론'과 관계를, '자본론'은 '독일이데올로기'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즉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죠.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이기론'에 입각한 '인간관'에 대한 논의가 과연 있었느냐. 예 있습니다. 바로 아주 유명하고도 유명한, 고등학교 입시시험마다 수험생들을 아주 괴롭히는 '사단칠정론'에 대한 논쟁입니다. 혹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사단칠정론'은 조선사회의 유교통치이념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자 사상적 논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단칠정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그것을 이야기할 능력도 소양도 없고 이미 훌륭한 다른 분들께서 작업해놓으신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참조하시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사단칠정론이 촉발된 사건을 대강 바라볼 수 있다면 조선 성리학에서 추구하려던 일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래에서 부터는 최대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이거 아주 어려워서 혼자 책 보면서 알아보기 너무 어렵더라고요. 강의하시는 분이나 설명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도 약간씩 차이가 있어서 제가 이해한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정지운의 천명도






우선 사단칠정논쟁은 성리학적 인간관은 인간을 '감정'의 존재로 바라보고 있으며, 감정을 잘 조절하고 통제하여 어떻게하면 인간이 도덕적 주체로써 존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논쟁이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둡니다. 초기 문물제도들이 조선에 수입되고 나서 사상적 윤리적 이념으로써 유학이 정착하게 된 시기가 바로 사단칠정 논쟁이 발생하게 된 무렵인 걸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조선 경국대전이 완성된 이후 드디어 통치 이념으로써 성리학이 자리잡게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단칠정논쟁은 이러한 맥락에서 촉발됐구나 이해되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그림의 형태로 나타낸 천명도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기론의 이념적 틀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으로부터 사단칠정논쟁이 촉발되는데요, 저 위의 붉은 표시를 보시면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 칠정은 기가 발한 것), 사단리지발(四端氣之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지운이 천명도를 그렸을 때 저 부분이 칠정발어기(七情發於氣,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 사단발어리(四端發於理, 사단은 리에서 발한 것)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퇴계선생이 고친 것이지요. 그 결과 이와 기를 움직이는 주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즉 인간 속에는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등등)의 도덕적 감정과 칠정(희노애락) 등의 일반적 감정들이 나오는 그 본연의 기원이 다르게 설정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사단과 칠정이 각각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봉 기대승은 본인의 생각을 퇴계선생에게 전하게 됩니다.



'측은지심은 사단이지만' '측은지심이 인(仁)은 아니다', 곧 사단도 '인'이 아니다. 그러고 중용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노애락 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희노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발하여 상황에 맞아 들어갈 경우 그것을 화라한다)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達道也.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달도야)

(중을 일컬어 천하의 근본이라하고, 화를 일컬어 천하의 달도라 한다)







'즉 미발인 상태가 성(性)이고 리(理)요, 발한 상태가 정(情)이요 기(氣)니 사단과 칠정은 따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보내는 것이 기고봉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도식을 그림으로 나타내보면 아래의 그림처럼 나타낼 수 있을 듯 합니다.












퇴계선생과 고봉선생의 논쟁이 촉발된 이후로 이러한 서신이 7년 넘게 이어지면서 서로의 이론적 약점을 보완해가게 되는데, 이 논쟁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성리학적 관점에 입각한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논의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후로 퇴계학파의 이론을 계승해 나가는 사람들을 주리론자라고 하고 기대승의 입장을 계승한 사람들을 주기론자라고 하지요. 퇴계의 학풍을 이기이원론이라고 하고 기대승의 입장을 이기일원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로 세계관과도 연결 되는데 다시 예송논쟁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송시열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는데 김장생은 율곡선생의 학풍을 사상적으로 계승한 사람이고, 미수 허목은 한강 정구를 스승으로 두었는데 정구의 스승은 바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입니다.



















이제 이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이시나요? 결국 예송논쟁문제는 조선중기 성리학적 이념의 충돌과 사상적 대립, 그리고 왕의 권한행사의 문제와 제한에 대한 문제, 어떻게 조선의 성리적 통치질서를 확립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현실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패권싸움, 당파싸움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예송논쟁'이 의미가 없다는 분들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한 번 생각해보심은 어떨까요?

























전두환씨 국립묘지문제를 놓고 보면 어떨까요? 저 사람이 왜 국립묘지에 가면 안 되는건가요? 전직대통령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나요? 박정희, 이승만도 국립묘지에 묻혀있는데. 더군다나 사면도 받았겠다. 저 사람이 국립묘지에 묻히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요? 전두환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둘러싼 사건 그리고 국립묘지라고 하는 공간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이 국립묘지에 묻혀서 안된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쿠데타를 통해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고, 자국의 국민에게 군을 투입시켜 살상을 저지른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 아닌가요? 공권력은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행사해야한다는 법치주의를 위반한 사람이기때문 아닌가요? 즉 전두환이란 인물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민주적 가치에 반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전두환 반대편에는 '민주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00년뒤 우리의 후손이 '국립묘지에 묻히고 말고 가지고 쓸데없이 싸우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그래'라고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송논쟁'도 동일한 입장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게 저의 입장입니다. 모든 역사는 동일한 잣대 위에 놓고 평가해야 올바른 역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을 통해 본 조선의 붕당정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우리사회에 있어서 다양한 시사점을 안겨주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식민사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함입니다. 민족을 단위로 하는 민족사를 처음으로 기술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사편수회라는 조선총독부 직할 기관에서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개떡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그 사람들이 쓴 역사에 대해서 알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일본놈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역사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식민사관하면 어렵게 생각하시는데 두 가지만 외우시면 됩니다.





1. 한국민족은 분열하기 좋아한다. 2. 한국민족은 사대하길 좋아한다.





분열하기 좋아한다라. 뭐 좋습니다. 논쟁도 분열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갈등상황이 꼭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안타깝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오랜 투쟁과 역사적 갈등들을 극복하여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완벽히 정착된 나라입니다. 갈등은 해소되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일본 꼬라지를 보시면 아시겠죠. 코로나 팬데믹에 일본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화(和)'의 문화가 어떤 파장을 불어일으키고 있는지를. 일본정부가 헛짓거리하고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어도 거리에 나서서 항의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같았으면 벌써 탄핵돼서 쫓겨나 법정에 세워졌을 사람입니다. 어떤게 민주주의인지 생각해보게 되지 않으신지요. 합리적 논쟁은 적극적으로 권장해야합니다.(100분 토론에 나오는 국회의원들 같은 논쟁말고요. 애들 보여주시면 곤란합니다. 못된 것만 배우니.) 갈등을 공적영역으로 끌어내 합리적 논쟁과 토론(때론 격렬할 수 있더라도)을 장려해 대다수 국민들의 합의를 찾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애들을 싸우면서 큰다고 하신 선조의 말씀을 한 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그러면 '예송논쟁'이란 정치적 사건도 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