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1

儒林(68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 서울신문

儒林(68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 서울신문



儒林(68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입력 :2006-09-08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퇴계의 우려는 사실이었다.

정지운의 스승 모재(慕齋:김안국)와 사재(思齋:김정국) 두 사람은 모두 퇴계 자신도 존경하고 있었던 당대의 성리학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광조가 주장하였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바탕으로 ‘정치의 도는 경천(敬天)과 근민(勤民)에 있다.’고 강조함으로서 정치개혁에 힘썼던 대학자들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정지운이 퇴계를 만나 ‘천명도설’의 수정을 부탁하였을 무렵에는 죽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살아생전 두 스승의 질정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명도설’이 크게 사우들에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은 퇴계의 걱정대로 사문(師門)에 큰 누를 끼치는 불미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이런 우려를 표시하자 정지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천명도설’ 후서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지운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제 자신도 오래 전부터 근심해온 일입니다. 가르쳐 주시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드디어 ‘태극도’ 및 제자의 설을 인증하면서 어떤 것은 잘못이니 고쳐야 하겠고, 어떤 것은 불필요하니 버려야 하겠고, 어떤 것은 모자라니 보태야할 것 같은데 어떠냐고 지적해 물었다. 지운이 즉석에서 좋다 하고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나의 말이 온당치 못한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극력 변난(辯難)하여 지당한 결론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었다.…”

퇴계 자신이 쓴 후서의 내용을 보면 ‘천명도설’이 비록 정지운이 초고를 썼으나 나중에는 퇴계의 자문을 받고 퇴계의 고친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완성된 합작품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서의 결말에 퇴계가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지음으로써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수개월이 되더니 지운이 고친 그림과 그 부설(附設)을 가지고와서 나에게 보이므로 우리는 다시 서로 의견을 교환하여 조정하면서 그림을 완성시켰다. 비록 그것이 과연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소견이 미칠 수 있는데까지는 온 힘을 다하였다.…”

퇴계의 자술을 통해 ‘천명도설’은 퇴계와 정지운, 두 사람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여 조정하면서 그것을 완성’시킨 합작품이며,‘우리의 소견이 미칠 수 있을 때까지는 온 힘을 다하였던’ 공동명의의 저작품임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정지운의 저술이긴 하지만 당대 최고의 거유 퇴계의 인증을 받은 ‘천명도설’은 그 무렵 유생들에게는 센세이셔널한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제작을 전남 나주에 살고 있던 기고봉이 비록 촌생원이라 할지라도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고봉이 ‘천명도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한양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김인후와 이항과 같은 대학자들을 만나서 태극도설을 비롯한 여러 성리학에 관한 주제에 관해서 토론을 나누다가 우연히 ‘천명도설’을 얻어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적인 것이지만 열혈청년 고봉은 이 ‘천명도설’을 본 순간 대학자 퇴계의 오류를 직관하게 되는 것이다.

2006-09-08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