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3

박정미 -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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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새로운 존재감각을 찾아서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드디어 이런 책을 한권 더 건졌다.
한번쯤은 본 듯한 인식의 풍경 속에 졸던 정신을 전혀 새로운 지평으로 깨우는 책, 드넓고 낯선 전망이 거대하게 펼쳐진 봉우리로 단숨에 몰고 가 세우는 책을.
게으른 낚시꾼이 몇 년 만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 월척이라고나 할까.
하이데거 해설자로 유명한 캘리포니아대 철학교수 드레이퍼스와 하버드대 철학교수 켈리의 합작품인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를 읽고 난 후 세상이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빛난다.
고대의 생의 기쁨이 일렁이는 다신론적 세계, 유일신을 최상위 정점으로 한 위계적 중세세계, 신의 부재 속에 자율적 자아의 함정에 빠진 근대세계를 지나 우리가 사는 현대는 어디까지 왔을까.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어 여기 있을까. 지금 우리는 어떻게 우주와 자아를 감각하고 생의 의미를 찾고 있을까. 근래에 이토록 ‘판돈을 크게 내건’ 인식의 놀이판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인문학적 철학적 논거를 이토록 실증적이고 체계적으로 동원하여 맛깔스럽게 엮은 작가도 오랜만이었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자기자신을 내적인 경험과 신념을 통해 완결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처한 특정상황을 비춰주는 정조(moods, 하이데거의 Stimmung)를 공유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정조들을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적이고 영웅적인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존재로 신을 상정했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트로이전쟁의 시발점이 된 헬레네는 에로스의 현현으로 묘사된다.
현대에 와서는 가정주부의 불륜과 일탈로 단죄되었을 행위였다. 하지만 그 시대 관념에서 헬레네는 불가피하고 신적인 행위로 숭앙받는 것이다.
신성이 강림한 특유의 정조에 동화되었을 때 인간은 탁월성(아레테)에 이르게 된다. 마르스의 가호아래 아킬레우스가, 아테네의 가호아래 오디세우스가, 아프로디테의 가호 아래 헬레네가 인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 즉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인간은 감사와 경이의 마음으로 신을 찬양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이처럼 동시대의 각 개인을 비추는 정조가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그리스인들은 인식하고 포용해 왔다. 여기서 시야를 확대해보면 인류사 전체의 국면마다 인간을 사로잡은 거대한 정조가 바뀌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거대한 존재의 바다에서 다른 각도의 빛을 통해 자신과 우주를 비추고 인식해왔다. 시대마다 달리하여 새로운 정조가 인간을 비추었고 사람들은 이에 맞추어 세계를 달리 해석하고 생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여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왔다. 여기서 정조는 패러다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감정과 존재의미에 더 깊숙이 스민다.
이러한 거대 정조의 설정자로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인류역사에서 딱 두 인물을 든다.
성자와 죄인만 있는 세계에서 구원받는 사람도 함께 있는 기독교적 세계를 정초한 예수와 사람과 사물을 각각 주체와 객체로 재설정하여 근대세계를 정초한 데카르트가 그 두 사람이다.
예수는 유대교적 관념에서는 주변부에만 머물러있던 순수한 인간욕망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념의 중심부로 옮겨놓음으로써 가치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예수는 히브리 율법에 언급된 모든 외적행위의 금기들을 그런 행위에 대한 내적생각의 금지로 바꾸어놓았다. 외적인 삶이 아니라 내적인 삶으로의 혁명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데카르트는 예수와 달리 신과의 연계를 끊어내고 자기 충족적인 코기토(Cogito)를 통해 인간이 주체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라는 관념을 세웠다.
데카르트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서, 내적인 사유와 욕망과 의지를 갖는 존재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외적세계는 나와 대립해있는 비주체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졌다.
예수의 관념에 포박된 중세 기독교왕국은 신을 정점으로 모든 것에 절대적인 자리를 정했는데 생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의 빛을 관조함으로써 얻는 행복이야말로 삶의 궁극적 목표이다. 하지만 이 행복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지상의 다른 모든 즐거움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지복에 이르는 길은 실존의 충만함보다는 오히려 현실적 삶을 회피하는 경로로 굴러떨어진다. 사실상 이것은 중세적 형태의 허무주의, 수동적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외적 세계와 단절을 이룬 데카르트 이후 근대인은 자신을 거의 무한히 자유로운 ‘의미의 할당자’로 보게 된다. 이런 할당자는 자신이 선택한 의미만을 자기주변의 무의미한 대상들에게 부여한다.
사실상 인간을 완전히 자율적인 자아로 본 칸트적 개념으로부터 인간을 모든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본 니체적 개념까지 근대인들의 기본 정조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의미들은 그것들이 자유롭게 만들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또한 자유롭게 취소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의미부여자를 넘어서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근대인 또한 능동적 허무주의의 덫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과의 연계도 끊고 외적세계에도 문을 닫아 내부에 고립된 근대적인간에게 생의 기쁨과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근본문제의식이고 여기서 고대의 다신론적 지혜를 되살려 삶의 활력을 회복하자는 것이 저자들의 근본 아이디어다.
고대의 정점에서 '축의 시대'의 직관이 전 인류의 관념을 관통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배후에 궁극적인 진리가 있다는 그리움이 인류정신에 새겨졌다.
이후 서양문화는 두가지 근본적 위험성에 시달려왔다. 즉 궁극적인 진리가 없다는 인식 때문에 미치거나 또는 그 진리가 있음을 증명하느라 미쳐버릴 가능성 말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허먼멜빌이 <모비딕>에서 보여준 세계인식을 빌려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접고 두 치명적인 위험을 피하여 안전하게 바다를 운행할 수 있는 생의 항로, 그것은 바로 <무지개의 원리>이다.
우주는 우리 한번의 생과 자아가 꿰뚫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한하고 끝이 없다.
만일 우주가 감추고 있는 단일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단번에 들으려고 한다면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색깔들을 단번에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아무 색깔도 인식할 수 없다.
이처럼 모든 다양한 의미들은 서로를 소멸시키고 우리는 그때그때의 관점에서만 그것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런 의미들 각각과 충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것들이 제시하는 진리들에 만족해서 사는 것이며, 그것들을 강박적으로 화해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복수적 다신주의를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그 이미지는 색채의 스펙트럼 속에서 저마다의 색들이 아름다운 색조를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을 것이다.
그럼 고대의 다신론적 생의 감각을 이 시대에 그대로 되살려내면 문제가 해결이 될까.
이처럼 실존의 기초를 상황적인 것으로 보는 관념 속에는 파멸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저자들은 경고한다. 한 시대가 히틀러 같은 선동자의 광기에 휩싸여 악으로 치달았던 역사적 경험을 상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로운 정조와 파괴적인 정조를 구별해내야 하며 정조에 휩싸여야 할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챌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여기서 저자들은 그리스인들처럼 몸과 마음을 고양시키는 정조의 파도에 자신을 실어 멀리 기쁨으로 나아가는 법과
외계의 사물들과 깊이 관계를 맺고 상황을 가장 훌륭하고 깊이있는 상태로 만드는 운전기법,
그리고 때로 모든 성스러운 것들을 뒤로하고 삶의 자동적이고 자족적 형태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는 법을 수평적차원에 놓고 보여준다. 그리고 이 상이한 방법론을 받아들이고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경지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역사를 관통하여 거대한 감각과 사유의 흐름을 그려낼 때는 그렇게 장엄하던 문장이 현대인에게 실천적으로 제시하는 방법론에 이르러서는 왜 이리 소박하게 느껴질까, 잠시 당황했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읽고 결국 그것이 철학의 본령, 본질적 역할과 한계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철학은 세상에 없는 새로운 철학,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철학은 우리시대 미국인들과 서구화된 세계인들의 생활감정과 우주에 대한 느낌을 철학적으로 정련하여 포착해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신비와 경외감을 가지고, 내 바로 곁에 있는 것은 가볍고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음을 숙고해야 한다.
그러면 이 책의 성취에 합당한 경탄과 감사의 정이 절로 일어나게 된다. 두고두고 곁에 모시고 몇번이고 읽을 스승같은 책을 만났다.
(이 책을 소개해준 페친 김운하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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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허버트 드레이퍼스,숀 도런스 켈리 (지은이),김동규 (옮긴이)사월의책2013-06-26
원제 : All Things Shining: Reading the Western Classics to Find Meaning in a Secular Age (2011년)
424쪽
책소개
미국 철학계의 거장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하버드대 철학교수 숀 켈리가 이야기하는 우리 시대, 삶의 상실과 회복. 책 한 권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떤 책은 우리 삶을 괴롭히는 문제의 근원을 뿌리째 들어내고 직시하게 해준다. 우리는 그 책으로 인해 삶이 바뀌지는 않을지언정 최소한 내 삶의 연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역자는 번역을 고사하다가 원서를 읽어보고는 책의 불가피한 유혹에 빠져 번역의 중노동을 감수하기로 한다. 편집자 역시 책을 만들면서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을 통독하고는, 이 책이 건네는 감동과 깨달음에 젖어 한 계절을 보낸다. 감히 말하건대, <모든 것은 빛난다>는 근래에 나온 인문적, 철학적 에세이 가운데 최고라고 주장하고 싶다.
미국 철학계의 거장 중 한 명인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하버드대 철학과장 숀 도런스 켈리가 함께 썼다. 권위의 「뉴욕타임스」는 동일한 책에 대해 유례없이 3번이나 리뷰를 실으면서 “2011년 올해 최고의 책”이라 추켜세웠고, 우리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명저술가 찰스 반 도렌(Charles Van Doren) 등은 대놓고 극찬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목차- 독자에게
1장선택의 짐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보았을 뿐 /선택의 짐 / 선택을 회피하는 첫 번째 방식 /선택을 회피하는 두 번째 방식 / 상황에 대한 감각 /프란체스카와 보바리의 차이 /세익스피어와 데카르트가 던진 질문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
2장우리시대의 허무주의탄광의 카나리아 / 월러스와 길버트가 글을 쓴 이유 /가장 지루한 것들에 매달리기 / 권태 대처법 /“오늘은 오늘 일만” / 생각의 통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비결? /아무도 완수할 수 없는 과제 /너무 자유롭기에 오히려 불행한 / 태양을 삼키라는 요구
3장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세계호메로스가 헬레네를 숭배한 까닭 / 포르투나 /행운인가 보살핌인가 / 현대판 오디세우스 /감사, 실존의 느낌 / 희생의례의 두 가지 기능 /잠은 성스럽다 / 카리스마 / ‘입스’의 늪 /그들이 만신전을 세운 이유 /“경이가 우리를 사로잡는군요”
4장유일신의 등장 - 아이스킬로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역사를 읽는 몇 가지 시각 / 오레스테이아 3부작 /복수의 여신들 / 애국주의, 일신주의의 또 다른 얼굴 /예술작품의 초점조절 기능 / 해설자와 재설정자 /예수, 최초의 재설정자 / 바울, 예수의 해설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민
5장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단테에서 칸트까지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 단테의 두 스승 /지옥의 요새 / 단테식 자유의지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중세식 허무주의 / 살로 만들어진 말씀 /의미의 할당자 / 칸트와 자율적 주체 개념
6장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멜빌의 ‘악마적 예술’사악한 책 / 악마적인, 그러나 순진무구한 /물보라 여인숙의 그림 / 이슈메일의 변덕 / 식인종 퀴케그 /가면의 뒤 / 에이해브의 일신주의 /고래에게 얼굴이 없는 이유 / 사랑의 공동체적 경험 /흰색의 공포 / 신의 베틀 소리 /광기의 두 가지 유형 / 우주는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구원의 실마리 / 비밀스런 모토
7장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루 게릭 / 경기장에 강림한 신성 /퓌시스의 반짝임 / 야누스의 얼굴 /스킬라와 카리브리스 사이 / 장인의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현대 세계의 공식 /메타 포이에시스,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 /우리 시대의 성스러움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옮긴이 해설: 허무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 찾기접기

책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란 것도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1장, 20쪽)  접기19세기 이래로 서양의 역사는 어쨌건 진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와 이후 시대야말로 이런 발전의 정점에 이른 시대라고 배워왔다. 자유의 자기충족성, 이성의 투명성,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안정성,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진보를 가리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존재한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탈마법화된 상태야말로 끝없는 쇠퇴와 상실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탈마법화된 오늘의 세계를 거부하고 과거의 마법적인 시대를 지지한다. 자유의 대가로 안게 된 홀로서기의 짐,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이 닦아놓은 무미건조하고도 무자비한 길,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생기 없는 얼굴, 이 모든 것이 역사의 퇴보를 가리킨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옳지 않다면? 즉 경이와 매혹이 저 멀리로 사라졌다는 생각이 현대 세계를 오해한 결과라면? (4장. 161~162쪽)  접기우주의 궁극적 스토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데 있지 않다. 비록 에이해브가 만난 모비 딕처럼 우리에게 무관심한 신도 있지만 말이다. 어린 선원 핍이 외롭게 버려진 미아처럼 바다에 조난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생각, 즉 세상은 “그의 신처럼 냉담하다”는 생각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그런 신과 달리 세상에는 또 다른 신들, 즉 즐겁고 성스러운 신들과 사악하고 복수심에 차 있는 신들도 있다. 우주는 번갈아가며 이런 신들의 모습을 띤다. 우주가 그 신들 가운데 궁극적으로 어떤 신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하나의 신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萬神殿)일 것이다. (6장. 320쪽)  접기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세계가 지닌 다차원적인 성스러움들 속에서 사는 장인은 어떤 순간에 전자레인지가 필요하고 어떤 순간에 감사의 축제가 필요한지를 반성 없이 즉각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거칠고 열광적인 스포츠의 신들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동시에, 광적이고 위험한 선동가의 웅변에 이끌리지 않도록 구별하는 기술도 습득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빛나는 사물들에 조율되어 있으며, 따라서 신들이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열어두고 있다. (…) 하지만 고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 이해는 신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왔다.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덮거나 막아왔다는 얘기다. 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음에도, 우리가 듣기를 멈춰버린 것이다. (7장. 374~375쪽)  접기이렇듯 감사는 호메로스에 있어서 최선의 삶을 이루는 필수적 구성요소다. 이런 점에서 신들은 어쨌든 우리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감사의 요구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여분의 요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기본 현상을 곧잘 접할 수 있다. 예컨대 타이타닉 호의 침몰에서 살아남은 아이아스 같은 사람을 상상해 보자. 구명정에서 건져졌다는 사실에서 자신이 위대하다는 증거를 찾는 인물이다. 지금도 이런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120  접기 - iwasfaraway더보기추천글“허무주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매혹적인 통찰. 『모든 것은 빛난다』는 ‘축의 시대’ 이래로 전개된 인간?종교?윤리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이슈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이슈들과 정면 승부하고 있다.- 찰스 테일러 “굉장한 책!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놀랍고 가슴 벅차며 아름다운 책이다. 나의 감동을 여러분과,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나의 찬사, 아니 이 경외감을 말이다.”- 찰스 밴 도렌 (『지식의 역사』 저자) “특출하고 영감이 가득한 책.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틀을 제공한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의 강렬하고도 의미 깊은 삶으로부터 망설임과 무기력의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들은 서양의 위대한 고전들을 통해 선택과 자율성과 광신주의와 오락중독 등 오늘날의 삶을 잠식하는 문제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고전들에 담겨 있는 불멸의 가치들을 통찰력 있게 파헤친다. 나는 도저히 이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바턴 그레고리언 (카네기재단 이사장)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이 책의 공저자인 미국의 두 철학 교수에 따르면 우리시대는 허무주의 시대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 계몽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족적인 주체다. 오직 나 혼자만이 나의 행동에 책임이 있으며, 칸트에 따르면 이 책임의 자각이 성숙함의 표지다. 근대의 주체는 중세의 신을 대신하여 세상의 주재자가 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선택의 짐을 우리는 떠안고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상이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인간의 모든 성취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신의 특별한 선물이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외부의 힘에 우리가 열려 있고 항상 감사할 때 우리는 탁월성에 도달한다. 바로 다신주의적 세계관이다. 다신주의는 허무주의나 일신론적 광신주의와는 다른 길, 다른 지혜로 우리를 인도한다.이 책의 탁월한 통찰은 서양사에서 일신주의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를 배태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준 데 있다. 저자들의 대안이 현대적 다신주의다. 이 다신주의로의 여정을 다룬 책의 부제가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고 붙여졌는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부터 단테의 <신곡>, 멜빌의 <모비딕>까지 3천년에 이르는 서양 고전에서 사색의 실마리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란 말이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 소개는 밋밋하다고 여겨질 만큼 책은 특출한 영감과 통찰로 가득 차 있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빛난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경이와 감사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 이현우 (서평가,『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신들을 다시 만나는 방법 - 이현우 (서평가,『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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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허버트 드레이퍼스 (Hubert L. Dreyfus)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하버드대학교 철학 박사. 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철학 교수. 1960년부터 1968년까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1968년부터 UC버클리에서 철학과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미셸 푸코,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특히 마틴 하이데거의 뛰어난 해석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인공지능에 대한 비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주요 저서로는 12개 국어로 번역된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1972) 및 『컴퓨터가 여전히 할 수 없는 것』(1992)을 비롯하여, 『세계-내-존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주석』(1991), 『인터넷의 철학』(2001, 2009), 동생 스튜어트 드레이퍼스와의 공저 『기계 위의 정신』(1986), 제자 숀 켈리와의 공저 『모든 것은 빛난다』(2011) 등이 있다. 접기최근작 : <인터넷의 철학>,<모든 것은 빛난다> … 총 62종 (모두보기)숀 도런스 켈리 (Sean Dorrance Kelly)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하버드대 철학교수이자 학과장. ‘마음, 두뇌, 행동 연구를 위한 하버드 학제간 연구회’ 의장이기도 하다. 스탠퍼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콜노르말 쉬페리외르) 방문교수를 거쳤다. ‘마음’ 문제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로 유명하며, 프랑스와 독일의 현상학 철학에 대한 중요한 해석자로 평가받고 있다. 구겐하임 재단과 미국 국립과학재단, 국립인문학기금, 제임스맥도넬 재단에서 수상을 하거나 회원으로 있다.최근작 : <모든 것은 빛난다> … 총 8종 (모두보기)

김동규 (옮긴이)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유럽 현대 철학과 미학이 주요 전공 분야이다. 오랫동안 서양 예술과 철학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 연구에 매진했고, 현재는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매체에 정기적으로 철학 칼럼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멜랑콜리아: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 미학: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철학의 모비딕: 예술, 존재,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사이-예... 더보기최근작 : <철학자의 사랑법>,<x의 존재론을 되묻다>,<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 … 총 1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
『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들 현대인의 실존 상황, 우리의 문화적 위기를 저 어두컴컴한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성찰한 책이다. 튼튼하게 고정된 닻 하나 없이 부유하는 우리의 일상, 우리들이 매일처럼 겪고 있는 삶의 불안과 무기력증과 허무―즉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저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찬양하는 “개인의 자율성”,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아”는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이 질문은 정말 충격적이다. 개인이 어떤 외적 강제도 없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유와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와 칸트 이래, 그리고 프랑스 인권선언 이후 인류의 신성불가침한 이상 아닌가?
저자들은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허무와 우울의 시대적 병증은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그릇된 신념이 최종적으로 봉착한 지점이라고 한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선택의 짐을 오롯이 개인에게 지운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 존재이기에 홀로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삶의 피로감을 넘어 심각한 허무주의, 의미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한계 상황이 개인의 삶을 질식하게 만드는 직접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해소된다고 해서 우리 삶이 회생할 것인가? 또다시 그런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삶은 파탄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렇게 보면, 성과주의의 피로감을 성공과 성취감이라는 프로작 약물로 마취시키는 사회를 비판한 『피로사회』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진단은, 그에 앞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진단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서양 고전에서 읽어내는 우리 존재의 빛
이 책의 저자들은 개인들이 이렇게 살지 않아도 각자가 성스러운 존재로서 충분히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서양 고전들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어떻게 인간의 삶이 고대의 성스럽고 빛나는 경험 세계로부터 창백하고 우울한 피로 사회로 떨어져버렸는지를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저자들은, 의미의 다양한 생산지를 하나의 원천으로만 응집시키려 한 서양 사상사의 시도야말로 허무주의의 주범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원천을 초월적인 신의 사랑에서 찾으려 한 중세나, 자율적 개인의 내면에서 찾으려 한 근현대의 시도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자각된 개인” “계몽화된 개인”이라는 내면의 견고한 영웅주의에 취해서 스스로를 꽁꽁 닫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세상이 던져주는 빛들에 대해 열린 존재가 된다면, 성스러움을 다시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보고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뛰어드는 행동, 야구장 관중석에서 하나 되어 환호하는 기쁨, 아침에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 한 잔의 즐거움이 그런 빛들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이것을 고대의 다신적(多神的) 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다신적’이라는 것이 종교적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신들이 던져주는 의미의 순간들을 만끽하고 감사함으로써 성스러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의미의 생산자나 부여자로 보지 말고, 세상이 일으켜 보여주는 의미들의 발견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스쳐지나가는 사건들(physis)에 대해 우리의 지성과 신체를 끊임없이 밀착시키고 연마하는 활동(poiesis)을 함으로써, 광포한 감정의 선동이나 차디찬 이성의 명령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기술(meta-poiesis)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7장 참고).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라는 말의 뜻이기도 하다.
내용 소개
1장 선택의 짐 ― 선택의 짐을 회피하는 두 가지 방식“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신이 없기에 모든 것을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로도 읽힌다. 이처럼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런 실존적인 선택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선택 대신 완강한 자기 확신에 취해 있는 인간형이나, 대중오락, SNS, 약물 등에 매달려 자신을 잊는 유형이 그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고현장에서 망설임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경기장에서 몰아적인 플레이를 행하는 선수처럼 주저 없이 선택을 행하는 영웅적 인간형도 많다. 그러나 어떤 태도를 취하건 선택의 상황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개인의 모습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극한까지 맞서는 사람은 일쑤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곤 한다.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 실존의 과도한 짐은 허무주의를 부른다자살한 미국의 천재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David F. Wallace)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없지만, 그런 실존의 상황을 가장 극한까지 감당하려 했던 인물이다. 월러스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야 하는 오늘날의 반복적인 삶에서도 끝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했고, 그런 과제로부터 주의를 빼앗고 정신을 중독시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는 결국 월러스를 자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와 달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의미의 창조자’라는 짐을 개인이 지는 것은 부당하며, 우리는 순수한 은총에 의해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둘 중 누구를 택해야 할까?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행복했던 세상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칭송한 인물들은 그런 현대적 실존 상황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헬레네는 파리스와 연정에 빠져 도망쳤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의 칭송을 얻는 여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와 가정의 신 헤라가 한 인물을 동시에 지배하듯이, 신들이 정해주는 정조(mood)에 자신의 전 존재를 조율(tunning)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특징이었고,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윤리적 관점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고대의 미덕(arete)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들의 은총에 대해 경이와 감사를 바침으로써 자기 문화에 온몸으로 참여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4장 유일신의 등장 ― 기독교가 바꿔놓은 삶의 가치호메로스 시대의 충만했던 삶은 그리스 전성기인 아이스킬로스의 시대와 초기 기독교를 거치면서 통일적이고 일원론적인 인간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복수와 분노가 지배하던 고대의 원시적 정념들이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아폴론의 법질서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 역작이다.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의 율법 질서를 인간의 내면적 욕망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문화의 획기적인 재설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시대의 무질서한 정조들은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문화와 유대 문화를 거치면서 공동체의 법적 질서 안에 포섭되었지만, 다시 예수와 바울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욕망이라는 한 가지 기준만이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물론 그 욕망은 신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수렴될 때만 인정될 수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개인의 욕망을 신의 사랑과 일치시키려고 한 내면적 투쟁의 기록이었다.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악마의 특징이 인간의 미덕으로 변하다예수와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초점이 된 내면의 욕망 문제는, 육체와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현세적 삶과 신의 정신적 사랑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문제에 늘 봉착하곤 했다. 단테에게도 이 문제는 여전히 큰 난제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존의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악마의 특성으로 돌린다.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 운동자’를 신의 특성이라 보고, 신의 사랑의 움직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는 개인의 의지를 꽁꽁 얼어붙은 지옥의 것으로 돌린다. 인간의 욕망은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거쳐 신에 대한 사랑에 이르는 것처럼 신의 은총 안에서만 일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단테는 이렇게 자율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옥에 가둔 반면, 인간의 의지로써 순수성에 이를 수 있다고 본 마르틴 루터를 거쳐 데카르트와 칸트에 이르면, 자율성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특징으로 복권된다.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 인간은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평가될 수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개인 대 신의 싸움이 책 6장에 이르면 우리는 “의미의 무한한 원천”이라는 자리를 두고 개인과 신이 벌이는 장엄한 투쟁을 볼 수 있다. 멜빌의 『모비 딕』이 바로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소다. 흰 고래는 무한대의 힘을 감추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반면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자신의 실존)를 물어뜯은 존재를 이해하고 정복함으로써 자신을 의미의 완성자로 세우려는 인물이다. 이런 영웅적 개인과 기독교적 유일신의 싸움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배와 선장이 함께 침몰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신이자 우주의 비밀인 흰 고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는다.그러나 『모비 딕』의 화자(話者)인 이슈메일이 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을 변화무쌍하게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에게 고래는 의미의 원천일 수도, 그냥 무심한 우주일 수도 있다. 이슈메일은 유일신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다. 저자들은 이슈메일에게서 다신적 사고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길이 대단원의 장에서 저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다신적 사고가 현대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다신적 사고는 우선 퓌시스(physis)라는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자연’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퓌시스’는 어느 날 피어났다 사라지는, 휙 스쳐가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즉 야구장에서, 군중집회에서, 일의 몰입에서, 아침 식탁의 향기에서 늘 퓌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퓌시스는 거칠고 일시적인 힘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그것만으로는 히틀러의 위험한 선동 같은 데 빠질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고도의 양육적인 기술을 갖춰야 한다. 원래 예술적 ‘창작’과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는 장인이 갖춘 기예처럼 숙련되고 안목이 높은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퓌시스의 계기들을 포이에시스로 함양함으로써 삶의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감 있게 만드는 메타-포이에시스(meta-poiesis)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우리 삶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구별과 차이에 대해 둔감한 사람은 의미의 구별도 할 수 없으며, 걸어다니는 자동기계와 다름없게 된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의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儀式)으로 행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이 던지는 다신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존재의 성스러움이란 이런 문화적 실천(praxis)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이고,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접기북플 bookple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친구가 남긴 글내가 남긴 글img‘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서구 중세를 지탱해오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근대적 자아의 부상을 단정하는 니체의 유명한 문장이다. 이성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관점에 따르자면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분명히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에게서 존재와 행위의 의미를 찾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 더보기huckebein 2020-03-24 공감 (7) 댓글 (1)img난데없이 출간된 에세이집이 화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바다출판사). 월리스가 누구인가는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를 읽고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의 호평을 보고 그의 괴작 <무한한 재미>(역자의 말대로 조이스의 <율리시스>보다 두껍다)를... 더보기로쟈 2018-04-08 공감 (41) 댓글 (2)img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많고 많은 작가들 소개에 독서샘이 강렬히 자극되다. 많은 책들이 욕심났지만 그 중에서도 예전부터 관심이 갔던 David Foster Wallace를 또 만나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 소설 번역 좀 해주세요ㅜㅜ... 나오면 5권 정도는 기필코 사겠음요. 이 작가를 안 뒤부터 수년째 기다리고 있는데 안 나오고 있어서 이젠 원서를 사야... 더보기AgalmA 2018-03-14 공감 (26) 댓글 (3)더보기마니아 읽고 싶어요 (90) 읽고 있어요 (27) 읽었어요 (114) 이 책 어때요?구매자 분포0.6% 10대 0.1%9.3% 20대 5.2%18.0% 30대 10.0%20.5% 40대 13.3%9.6% 50대 9.5%1.3% 60대 2.6%여성 남성평점 분포    8.8    60.0%    22.5%    12.5%    5.0%    0%100자평     배송 문의나 욕설 및 인신공격성 글은 상품 페이지에서 노출 제외처리됩니다.등록카테고리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구매자 (10)전체 (17)공감순      신형철 선생 팟캐스트 듣고 찾아온 사람 손!  구매꿈의서재 2013-10-24 공감 (20) 댓글 (0)Thanks to 공감     청소년기에 읽었던 모비딕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읽으면서 저런 문장이 있었던가 싶다.빛나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지식의 합동공연.밑줄칠 부분이 많아서 별다섯개를 주자.그 시절의 나는 너무 어려서 모비딕을 스치듯 자랑삼아 읽었거늘..  구매대아재산책 2019-02-11 공감 (8) 댓글 (0)Thanks to 공감     이 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단 하나의 신만 있는 세계와 굉장히 많은 신들이 있어 위로받을 수 있는 세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겠다. 개인의 정신과 육체가 매우 빛나는 존재이며 우리가 그걸 회복해야하는 이유도 조금은 알겠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말이 사실은 이 책이 말하는 전부다.  구매수수꽃다리 2018-05-11 공감 (5) 댓글 (0)Thanks to 공감     옮긴이 해설이 명쾌했다. <모비딕>에 대한 해석만으로도, 우리 시대에 팽배한 허무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 정신사의 굵직한 맥락을 짚어낸 것만으로도 훌륭한 책이었다. 이 시대 크나큰 난제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깨끗이 소거된 저자들의 해결책에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의미 있는 지적 체험.  구매거리산책자 2017-02-14 공감 (4) 댓글 (0)Thanks to 공감     허무주의에 대한 해독제  구매madwife 2014-09-11 공감 (3) 댓글 (0)=====마이리뷰구매자 (11)전체 (24)
     잘 표현된 불행. 새창으로 보기 구매              잘 표현된 불행 ( 不行 )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은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런 목재는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다.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과도 같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나 도끼(역시 패물이 된) 아래에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 더보기곰곰생각하는발 2014-01-02 공감(25) 댓글(16)Thanks to 공감     빛나는 모든 것들... 모든 것이 빛나는 건 아니었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이 책의 원제는 all things shining이다.
에필로그에서처럼 '빛나는 모든 것들'이 옳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세상은 너무 구질구질하고 더럽기 짝이 없어졌다는 데 있었다.
이 책의 부제는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고 되어 있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라는데, 모든 것이 빛날 수 있겠는가?
아무리 허무하고 무기력한 시대라 해도, 빛나는 것들은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은 폐허처럼 우중충한 지구별에서 <아직 남아있는> 그런... '빛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스승님 : 제자들아. 이제 너희는 세상에 나가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 (오랜 후)..........
제자 1 :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솔직히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 말이야.
제자 2 :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하지.(에필로그)
 
이 책은 서양 고전의 몇 구절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다.
다시 말해,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자 씌어진 책은 아니다.
부제인 'Reading the western classics to find Meaning in a Secular age'란 말은,
'세컬러'한 시대의 의미 찾기~인데, 세컬러의 의미는, 레귤러의 반의어로 <세속적인, 종교적이지 않은>이란 뜻이란다.
정해진 시각에 수도원 안에서 <레귤러>하게 규칙에 따라 의식을 행했던 반대쪽인,
세속의 <세컬러>는 종교적이지 않은~ 시대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이 책의 뜻이 통한다.
 
서양 고전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집어든다면, 뭥미? 하고 당황할 수 있겠다.
그건 순전히 책팔이들의 농간에 놀아난 결과이니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은 재미있는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서양 고전을 읽고 싶어 하도록 만들어 주는 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만,
그런 책이라면, 이미 '로쟈의 인문학 서재'나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를 우리 문화는 가지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이 답답한 시대를 살아가는 해법의 하나로 고전 몇 권 읽기를 권할 따름이다.
 
특히 모비 딕을 열심히 읽게 하는데,
모비 딕을 떠올리면서 <스타 벅스>를 상상하게 된다.
우리가 멋도 모르게 입에 익혀버린 커피맛처럼,
세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문화'에 접하게 된다.
 
서사시의 시대에는 인간이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모자란 존재~일 뿐이었고,
그리스 비극의 시대에는 인간의 모든 삶은 신들의 행위에 의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 고대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퓌시스>라는 '반짝이는 생동감 넘치는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포이에시스>라는 '예술적 세계'로 반영되는데, 현대에서는 다양한 테크놀로지 등의 융합으로 이 세계가 단조롭게 한다.
그를 위해 작가는 <메타 포이에시스>의 삶을 제안한다.
<메타>란 것은 <기반>이 되는 구조나 <틀>을 읽어내는 시각인데, 그런 것들을 읽어내기 위해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이 책에는 장자의 <모든 고전은 찌꺼기>라는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을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들은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와도 같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나 도끼 아래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 안다.(356)
 
장자의 이야기에서는, 목수가 일의 진실된 고갱이는 말로 전해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마님이 읽는 책은 모두 <옛날에 죽은 사람들이 지껄인 찌꺼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 역시 실제로 참여해 본 사람만이 몸으로 느낄 줄 아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삶의 진실에 다가가기 보다는, <장인적 기술>, <창작의 오묘함>을 드러내는 데 머무르는 인용이다.
장자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해석이다.
그리고 고전에 대한 인용에서 일관성 없이 프로 야구나 커피 등으로 널뛰는 이야기를 읽는 일은 싱겁기도 했다.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한, 뜨겁고 아름다운 책.
이 책에서 강력하게 던진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와 싸우며 찬란하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다.(뒤표지,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저자)
 
이런 사람들이 싫다.
과연 이 책을 읽고나 이런 말을 썼던 걸까?
이 책이 정말 뜨겁고 아름다웠을까?
하긴, 저 사람은 이 책이 '빛나고' 뜨겁고 아름다웠을지 모르겠다.
그냥, 제목과 부제를 읽고 상상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의 서평 참고 자료를 읽고...
그거나 다 읽었을래나?
나는 그런 거 받으면 바로 버리는데... ㅋㅋ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6장의 모비 딕이다.
<서양 문학 속의 철학적 이슈 읽기>라는 팟 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하니,
이 책은 그 강의를 어찌어찌 얽어매어 책으로 만든 느낌이다.
 
부제 그대로.... <레귤러>한 시대, 고대의 작품이나 중세의 작품과 비교하여,
<세컬러>한 시대, 현대의 작품을 읽어 보면서,
인간은 어떻게 파편화되어 왔는지를 철학적으로 읽어주는 내용이라,
철학적 기반이나 서양 고전에 대한 기본적 이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 접기글샘 2014-01-06 공감(10) 댓글(0)Thanks to 공감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빛난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서구 중세를 지탱해오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근대적 자아의 부상을 단정하는 니체의 유명한 문장이다. 이성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관점에 따르자면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분명히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에게서 존재와 행위의 의미를 찾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실존적 선택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의 참다운 동기를 찾기 어려우며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위험성을 껴안게 되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이것은 21세기의 사회가 병원, 수용소, 공장 등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를 지나 개인 능력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성과를 향한 강한 압박이 정신적·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노동과 함께 끊임없는 노력만을 추구하여 개인에게 우울증을 초래하는 성과사회로 이행하였다는 한병철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한다. 규율(≒신)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지만 한편으로 너무 많이 펼쳐진 길 앞에서 피로감과 무기력을 느낀다. 또한 일찍이 카뮈는 신을 속인 대가로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의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야 하는 시지포스의 상황에 빗대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표현한 바 있다. 성과사회이든 부조리이든 현대사회에서 개인에게 지우는 짐이 너무도 무겁다는 점에서 한병철과 카뮈, 드레이퍼스 및 켈리(이하 저자)의 지적은 일치한다.
   신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허용된 결과 허무주의에 빠지는 현대인의 역설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월러스는 하루 중 한 시간은 글쓰기에 할애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권태와 불안, 좌절이 지배하는 시대의 암울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지성인이지만 현실에 벽을 세우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싸우는 초월적 존재가 되고자 하였고, 글쓰기라는 과제와 열렬히 투쟁하며 인내하였다. 저자는 월러스의 대응방식-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실천에 옮긴 신의 현신(現身) 그 자체-보다 작가란 자신의 천재적 영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길버트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월러스의 니체식 접근법과,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에 의존하는 길버트의 사고방식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저자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호메로스의 세계관을 끌어온다. 호메로스가 살던 고대 그리스는 다신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신들이 주는 빛에 응답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회였다. 호메로스적 세계가 아이스킬로스부터 예수,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데카르트, 칸트를 거쳐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로 이어진다는 일련의 분석은 탁월하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호메로스 시대의 다신교적 믿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가 허무주의에 휩싸이기 쉬운 현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하나의 방안이라고 착안하여 삶의 순간마다 마주치는 일상적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을 갖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던지는 순간의 빛남, 성스러운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행할 줄 알며,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고 소중하기에 일상의 순간마다 가치를 찾고 감사함을 느끼는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적용 가능 여부 혹은 효용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의 극복 방식은 현대의 허무주의가 일상의 무기력한 반복과 권태로 인하는 경우에만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허무주의에 대해 정의해 보자. 사전에서 허무주의는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인식되지도 아니하며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는 책의 맥락상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이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정리하면 정확할 것이다. 허무주의는 일상의 권태나 무기력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자신의 노력에서 벗어나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결과를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하고 절망하는 경우 쉽게,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 저자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자유의지의 가치와 위력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의지와 노력이라는 개인이 의도할 수 있는 제어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까? 인생은 예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도에서 벗어난 우연한 결과는 삶의 순간순간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인이 취할 앞으로의 생활방식과 개인의 행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저자는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누군가가 어렵게 합격한 회사 자리를 사장의 친지에게 빼앗겼다고 해보자.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기 위해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을 갖춰야 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오히려 개인의 자유의지를 짓뭉개는 세계의 부당함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는 것이 당사자에게 위안과 일시적인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수년 간 임용고사 혹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지쳐 있는 지인들을 떠올리며 과연 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하였다. 또, 최저 생계비로 하루를 나며 캔 참치를 사 먹고 남는 돈으로 신문까지 사보며 황제가 된 기분을 느꼈다는 모 의원을 떠올린 것은 내가 지나치게 삐딱하기 때문일까. 영화 「기생충」에서 폭우가 내린 다음 날 파티를 열어 미세먼지 없는 청정한 하늘을 만끽하는 ‘동익’과 ‘연교’는 저자가 설파하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그대로 실현한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폭우 속 반지하에서 역류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만 피우는 ‘기정’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빛남을 찾으라는 저자의 말보다 독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니체의, 에이헤브 선장의 강한 의지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말하듯 모든 것들이 빛나는 것은 아니고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한다. 일상에서 그러한 태도가 필요한 때가 있다. 하지만 더 어울리고 적용가능한 시기가, 특정 계층이 있다는 말이다.
   철학이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고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일상의 빛남을 찾으라는 저자의 논의가 지니는 의의는 명확하다. 우리는 철학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숙지해야 하며,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끝내서는 안 된다. 결국 저자의 논의는 명확한 신념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의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였으나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해준 것은 아니며,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지닐 것이다.
- 접기huckebein 2020-03-24 공감(7) 댓글(1)Thanks to 공감     빛나는 모든 것들, "모든 것은 빛난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이 책의 제목부터 내가 찾고 있던 책이란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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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책은 내가 몰랐던 지식을 전달해준 책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나, 어떤 삶을 살것인가 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이 저자들이 보여준 해답이 내 마음에 쏙 든건 아니지만 아주 의미있게 다가왔고 그렇게 살아볼려고 노력할 생각이다.
그럼 나만의 다른 답이 보이겠지 싶기도 하고.
지금은 아무것도 몰라 무슨 말도 할 수 없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면 내가 찾는 답이 보이지 않을까...?
이 책을 고를 때만해도 진리는 없다는 허무주의가 뭔지 궁금해서 샀다.
허무주의를 찾아보니 넓게는 상대주의도 포함된다는 말에 얼씨구나 했다. 난 상대주의를 싫어한다.
언제나 상대주의 얘기하다 보면 지식이 짧아 진도가 나가지 않곤 했는데 뭔가 새로운 걸 배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리스 시대의 호메로스, 플라톤, 중세시대의 기독교, 현대의 데카르트, 칸트, 니체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딕 까지, 이 책을 정확히 이해하자면 여기서 언급된 것들의 면면을 살피고 다시 읽어봐야 제대로 이해하겠지 싶은 난이도가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심리학에 속지마라, 하류지향 에서 줄곧 나왔던 "자기" 에 집중하는 이 현대사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관해 실로 꿰듯 하나로 엮여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궁금했던게 이 책에 쫙 나와있었다.
하지만  철학적 지식이 없는 내가 깊이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고, 내 눈에 이 책이 들어왔다는 건 이 늪에서 빠져나올 때가 됐기 때문인거 같고, 이젠 내가 어느 지점에 서 있고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 알게 됐다.
이 책 덕분에 어디쯤인지 알게 됐다.
결말부분을 세번 읽었지만 잘 모르겠다.
읽다보니 든 생각이 우주 너머엔 진리따윈 없다고 했고, 사건들의 배후엔 깊은 의미가 없다고 했으니 그런것들을 고민하는  지성이란 필요없는 것일까?
매순간 살아있고 성스러운 느낌에 자신을 열고 신은 하나가 아니라 많다고 했는데 이게 니체의 관점주의랑 뭐가 다른건지도 모르겠다.
진리가 결국은 하나가 아니고 보는 사람, 보는 상황에 따라 여러개가 존재한다는 것은 같아 보인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진리를  보는 주체가 "나" 지만, 여기 저자들이 말하는 다신주의는 그저 상황과 순간에 날 맡기는 것이고 단지 발견하는 것이니 의미를 "나"가 할당하는 것은 아니란 의민가?
결국은 신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견 그말에 동조도 한다. 인간말고 다른 어떤것이 있다는 생각은 나이가 들면서 더더욱 하게 되었다.
그걸 신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데카르트 부터 시작해 인간 자신이 의미를 할당하기 시작하며 자율성이 찬양받고 개인화가 심화되어 현대사회가 허무와 우울 무기력해진것은 알겠다. 인간이 모든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자체가 버려져야 한다는 생각도 동의한다.
책을 읽다보니 내가 나에 알게 된 사실은  난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해브 선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도 배격한다.



행복의 기대치를 낮추고 표면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쓸데없이 우주의 진리따위 찾지 말라는 거다. 없으니까.
사실 이 책을 읽어보니 더 허무하기도 하고 한편 희망이 보이는 듯도 하고... 확실히 잘 모르겠다.
 
 
빛나는 모든 것들이라.....
나도 볼 수 있을까?
 
 
나의 밑줄
http://blog.naver.com/icewitch1/150190180398
- 접기청풍명월 2014-05-10 공감(3) 댓글(0)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모든 것은 빛난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사이비 기독교 신자의 독후감)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일신주의의 풍토속에서 살아온 까닭에, 결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니었음에도, `금욕`을 넘어 자학으로 이어지던 때가 있었다. 이 땅에 분명 존재하는 기쁨들이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지 늘 자기검열을 하곤 했다. 지금은 가나안 성도(`가나안`을 거꾸로 하면?)로 지낸다.
`표면`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들을 폄하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대로 동화되어 삶의 선택을 이어가는 모습은 멋져 보인다. 저자의 말대로 `광기`가 될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하겠지만, `지금`, `여기`, `이 땅 위에서` 행복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책을 읽은 후의 마음)
0. 나는 음악의 신 `뮤즈`의 정조(moods)를 따르고 싶다. 그리스의 신들의 정조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예수의 정조인 `사랑`은 내게 잘 안 맞는 듯. ㅋ
1. `신곡`과 `모비딕`을 천천히, 간절하게 읽고 싶어졌다.
2. 고래를 흰색으로 묘사한 모비딕의 구절을 어떤 그림의 흰색 `배경`으로 설명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내게는 인상적인 부분이 너무 많아서 세 번 정도는 더 정독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서 독후감도 수정하고 싶은 마음.

- 접기영영 2015-01-05 공감(2) 댓글(0)Thanks to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