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하는 <자기부정>론
제가 야학을 시작했던 대학 1학년 79년 겨울. 가장 인상깊게 남은 선배의 말중에서는 <지식인들이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없으면 사회에 큰 해악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함께 읽으면서 했던 말로 기억됩니다만, 이후 나에게 <자기 부정>은 지금까지 내 사고의 밑바닥에 큰 중심이 되어 항상 자신을 돌아보게하는 말이었습니다.
자기부정이란 타인(민중)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과 쾌락을 내려놓고 흔쾌히 개인적 시련을 감내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이후 나는 당시 야학 학생이었던 분과 결혼할수 있을까 하는 자기점검의 고민으로 보낸 소박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68년 일본대학과, 동경대 의대생들이 시작한 전공투운동의 대명사가 <자기 부정>론이 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가난한 지역주민들의 고통을 함께 하는 투쟁(오오지, 산리스카 투쟁)하면서 그들은 학교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연구와 학문을 다시 매진하며 개인의 입신양명 계층상승을 위해 멀쩡히 공부하는 것, 그리하여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적대적 계급이 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견딜수 없는 자기 기만이라고 생각하며, 학생운동의 고민의 일단으로서 중요 의제가 된 것이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졸업이후 가난한 사람, 가난한 국가를 착취하는 대학의 제국주의화를 반대하고 대학을 민중에게 돌리며 제국주의화를 해체하는 <반대학운동>을 기치로 했던 것이 바로 <자기부정>론이었습니다. 실제 위의 책은 사르트르가 65년 일본을 방문하여 3차례의 강연을 정리한 내용이라 일본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준것이라고 유추해볼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의 경우도 과거 7-80년대 학생운동으로 수배와 투옥 이후 감옥에서 나와 제적된 이후 이른바 <존재이전>이라 하여 대거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큰 흐름이 있었습니다. 졸업장이 없어야 흔들림없이 기득권을 벋어날수 있고 스스로의 존재를 하방하여, 그들을 위하는 (For)삶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With>하는 삶을 산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금강경공부를 하며 깨달은 것은 이 자기부정의 궁극은 부정했다는 의식까지 부정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부정이 욕망과 결합하여 보상의식을 키워 타인과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기 때문이지요. 과거 그렇게 현장으로 하방한 경력이 또다른 기득권이 되어 개인적 계층상승욕망에 이용되는 경우가 종종있었으니까요.
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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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nie Kim우치게바 총괄….일본의 신좌파운동은 자기파괴가 혁명으로 오인되던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자기부정’(안주의 부정)과 전공투의 자기부정은 다르게 느껴집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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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o Jung Gil김찬휘 그렇게 오염된 중핵과 혁마들의 자기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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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nie KimYoo Jung Gil 네 그렇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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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o Jung Gil김찬휘 일본 학생운동의 <자기부정>론은 자기존재의 하방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약소국가와의 연대의식으로 확장되어, 가해자였던 제국주의국가로서의 일본에 대한 자기 부정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그나마 당시 학생운동세대였던 <간 나오토 수상...등>같이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사람들의 의식의 기조가 되지요. (그래서 최근 돌아가신 제가 아는 일본분이 <비국민>임을 선언한 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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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u Hyun Kim유선생의 생을 관통하는 자기성찰이 자기부정의 결과물이군요. 참으로 훌륭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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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윤자기부정의 의식까지 부정하는 것이 쉽지가 않지만 그냥살다보니 조금씩 나아가는 듯 합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지은이) 한마당 1999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지은이)
한마당 1999-03-05
전체선택지식인의 고뇌와 자기성찰을 담은 사르트르의 저서. 이 책은 저자가 지난 1965년 일본 방문 당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주제로 세 차례 연속 강연한 것을 수록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지식인이 한 사회 속에서 처하는 특수한 상황과 모순을 분석하고 지식인의 참다운 기능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저자는 '지식인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은 자신의 권한밖에까지 참여'할 때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 인간에 대한 억압이 자행되는 모든 현장에서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지식인으로서의 참여를 서슴지 않던 사람 중 하나다. 지식인의 참모습을 설파한 이 책은 저자의 실천적인 삶과 어울려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목차
제 1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1.지식인의 상황
2.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지식인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은 자신의 권한밖에까지 참여'할 때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 인간에 대한 억압이 자행되는 모든 현장에서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지식인으로서의 참여를 서슴지 않던 사람 중 하나다. 지식인의 참모습을 설파한 이 책은 저자의 실천적인 삶과 어울려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목차
제 1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1.지식인의 상황
2.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제 2부 지식인의 기능
1.모순
2.지식인과 대중
3.지식인의 역할
제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
1
2
3
4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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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모든 사람을 위해'자기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근본주의적 태도로써 (말하자면 진리의 기법을 환상과 허위에 적용함으로써) 그 모순을 초극하는 것이다.
그의 고독이야말로 그를 '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되게 한다. 즉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 권리에 내재하는 추상적 성격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그러한 권리를 없애 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구체적 권리를 더하고자-자유와 함수 관계에 있는 진리를 민주주의 속에 구현시키면서-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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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장 폴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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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구토>,<더러운 손>,<실존주의란 무엇인가> … 총 124종 (모두보기)
파리에서 태어나 1929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1-46년에는 교사 생활을 하였다. 학창시절 결합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와 평생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으며, 전쟁 중인 1939년 징집되어 1940년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만에 석방된다. 교사 시절 발표한 일기체 소설 「구토」(La Nausée, 1938)로 첫 명성을 얻은 뒤 여러 편의 철학적 작품들을 집필하는데 그 중 대표는 “인간 의식 또는 비사물성(néant, 無)을 존재, 즉 객관적 사물성(être, 存在)과 대비시킨”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일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한 그는 종전 후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 소설과 희곡으로 윤리적 메시지를 전한다. “자유의지와 선택, 그리고 행동”이란 주제는 「파리떼」(Les Mouches, 1943), 「닫힌 방」(Huis-clos, 1944),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1948), 「악마와 선신」(Le Diable et le bon dieu, 1951) 등 희곡은 물론 그가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에 대해 쓴 「성(聖) 주네, 희극배우와 순교자」(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 1952)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정치적으로는 분명 좌파였으나 화석화한 현실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공산주의는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1964년 자전적 소설 「말」(Les Mots, 1963)이 노벨상을 받게 되지만 수상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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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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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카페 사르트르>,<초록일기>,<지식인을 위한 변명> … 총 6종 (모두보기)
한국외대 불어과, 동 대학원, 프랑스 파리 8대학 박사. 현재 전남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역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 논문 「사르트르의 주체성의 사실주의」, 「전쟁의 이야기체와 몽타주 기법: <희망>과 <자유의 길>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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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이 물음의 해답이 아니라 이 물음의 옹호이다. 사회의 모순을 <자기의 모순>으로 환치한 ‘행동의 지성’ 사르트르.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있다. 그가 남기고 간 이 물음을 우리가 다시 묻고 있는 한…….
지식인이야말로 가장 불우한 인간이다. 그는 아예 처음부터 어떤 <지식>도 마음대로 탐구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권력>도 지닐 수 없다. 그들은 어떤 것들을 ‘알고는’있다. 그러나 그들의 ‘앎’이 진실한 법칙으로부터 추론된 것은 아니다. 보편성이 지배계급의 특수주의 particularism에 의해, 진실이 신화에 의해 폭력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사회의 산물인 만큼 그는 사회 속에서의 자기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사회 전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는 그 근본적인 모순의 형태로서 그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모순이 결국 객관적 모순의 특수한 표현임을 깨닫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이러한 모순과 싸우는 모든 인간에게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고독하지 않다.
이 책은 지식인이 처해있는 특수한 상황과 모순을 분석하고, 그 모순의 극복을 통해 지식인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지식인이란 사회계급상 중간계층에 속해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불우한 의식을 가진 자 일 수밖에 없다. 지배계급은 지식인을 지배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식인이란 불편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이다. 반면에 피지배 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인이란 지배계급의 앞잡이로 전락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어떠한 사회계급에 의해서도 그의 진정한 기능을 위임받은 것이 없다. 이러한 지식인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 비판하려 들 때 그는 결국 〈자기와 무관한 일에 참견하려 드는〉귀찮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식인의 진정한 기능이란 ‘자신의 권한 밖에까지’ 관여하는 데에 주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여의 기준에서 그는 지식전문가와 지식인을 구별하고 있다. 지식 전문가는 지배계급이 통치수단으로 제시하는 기존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들의 〈특수주의〉를 비호한다. 반면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보편적 진리를 얻은 지식전문가가 그것을 사회와 인간 전체에로 〈보편화〉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는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 이때 그가 지향하는 보편성은 지백계급과 자신의 계급의 특수주의를 파괴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지식인이 빠지게 되는 모순과 갈등은 이와 같은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갈등에서 온다. 그러나 지식인의 내부의 갈등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불평등성과 세계의 갈등을 그대로 증거한다는 사실로써, 지식인은 세계의 모순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 그러므로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한,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지키는 ‘민중의 옹호자’로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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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외로운 발바닥 200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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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때 선배들과 소위 세미나라는 것을 하면서 이 책의 내용이 토론의 주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1학년 새내기로서 막연히 내가 지식인, 또는 엘리트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미나 준비를 위해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약 7년이 지나서 이 책을 우연히 다시 읽으면서 그 때 그은 밑줄이 지금 책을 다시 읽는 나에게 가슴 깊숙이 다가오는 내용이라거나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니 말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지 7년이 더 지났지만, 과연 지금 내가 그 때보다 얼마나 더 지식인다워졌는지 - 그런 지식인다움이란 개념이 존재한다면 - 더 근본적으로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면서 사회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돌이켜보면 솔직히 부끄러워진다. 대학 입학후 수년간을 정신없이 보내다가 약간 여유가 생긴 지금 집의 책꽃이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이 책에 손이 간 것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항상 하루하루의 일상에 쫓겨서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내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솔직히 내 자신에게 실망도 많이 했다. 그 동안 삶의 경험이나 지식의 증가로 무난히 이 책을 소화해내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는 거의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사르트르의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냉전의 시대가 사실상 끝난 지금은 조금 구닥다리로 생각될 수도 있긴 하지만, 지식인이 지배계급에게는 통치목적을 위한 하부관리직으로, 노동자계급에게는 지배계급의 앞잡이로 여겨지는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스스로 모순을 지닌 자임을, 그래서 지식인은 사회와 자기자신의 모순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부조리와 끝까지 싸워나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임을,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지식전문가가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역자의 말처럼 시대가 바뀌면서 지식인의 개념과 역할이 사르트르가 처음 의도한 것과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사회부조리와 억압적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 특히 잠재적인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요원한 보편적 평화나 개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행동으로써 부조리와 싸워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외침은 우리에게 아직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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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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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택씨의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를 읽은 후 다시 꺼내 읽은 책. 사실, 대학 3학년때 이 책을 우연히 처음 접한 후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학회 세미나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었고 주변사람들에게도 권하긴 했지만 그 때 당시 이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지는, 그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나의 무지 때문인지 몰라도(아마도 후자때문이리라.)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었지만 역시나 부분부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부분은 그야말로 '하얀건 종이요, 검은건 글씨'였으니, 읽으면서 굉장히 처참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는.-_-;;;;;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은 지배계급 즉, 부르주아의 필요에 의해 전문가가 된 사람들 중, 자신의 학문의 보편적 성격과 자신이 복무하는 계급의 특수한 성격의 괴리에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전자, 즉 보편성을 택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그러므로, 사르트르의 개념에 있어선, 전문가라 하더라도 체제 영합적이라면 '지식인이 아니다')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보편계급-즉, 프롤레타리아-에 속할 수 없고, 쓸데없는 일에 참견만 하는 사람들로 치부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비판받기 일쑤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대부분 타당하기에 스스로 감내해야한다.
결국 사르트르는 이러한 이유로 지식인은 그 스스로가 결코 완벽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모순적이며 죄많은 존재이기에 사회변혁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반성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려는 듯 싶다. 결국 나에겐, 때문에 이 책이 제목과 달리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아닌 '충고'로 들렸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전문가들의 '보편적 지식'이란 이야기가 오늘날에 들어맞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어느정도 확실해진 듯 싶다. 복잡다단해진 사회속에서 보편적 기획, 혹은 지식이란 때로는 폭력으로 변질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적지않게 목격한바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 즉,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 진보에 대한 헌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가 직접 몸으로 보여준 사회적 실천들은 오늘날 '모든 이들이 각각 나름대로 전문적인'(때문에 오늘날 시대는 지식인의 '종언'의 시대일수도 있지만, 푸코적 의미의 특수적 지식인들의 '확장'의 시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함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여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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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 200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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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고 몇장 못 읽어서 눈물이 났다.
책은 아주 얇다.
내용은 부분 부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사르트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변명은 내가 해줄테니까 당신들은 지식인답게 살아달라.
배운 놈처럼 살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007년 대선 후보들 추천 도서에 정동영씨가 이책을
추천한 걸 보고 가슴이 찡했다.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라면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선거는 끝났고
작년 이후로 사람들은 아무도 리뷰를 달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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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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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선과 악의 구분에 있어 자본의 소유 유무에 그 기준을 둔다. 자본의 소유는 악이며 타도의 대상이고 그 이면이 까발려져야 할 허위와 착취의 근원이다. 지식 노동자들의 본래 역할이란 기껏 이런 자본의 소유를 두둔하는데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 회개하는 길은 계급적 전향에 있다. 자본 소유자의 계층에서 태어난 지식인은 무산자의 편에 서야만 선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보편성의 정의는 [계급의 해체]다. 여기서의 계급이란 다만 통칭적 사회계층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자산의 소유의 양에 따른 [실존적 상황으로서의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그래서 자기 계급을 뛰어넘어 무산자를 향하는 속죄의 길은 훨씬 험난하다. 이것은 진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산자 출신의 지식인의 운명이다. 끝없는 자신 안의 긴장과 계급의식의 잔재를 송두리째 뽑아내고자 투쟁하는 삶이다. 과연 무자산은 선일까? 진정한 균형은 소유는 마음대로 하게 두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주는 것인가 아니면 소유 자체를 가능치 않게 하는 모어의 유토피아인가? 이런저런 갈피잡지 못함을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자산을 소유한 자기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동료인간의 실제적 어려움을 못 본체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무산자라고 선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두둔하는 것도 낯부끄럽다. 그렇다고 무산자의 편에 서고 계급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지식인의 자기정체가 붕괴되는 그날까지 자기자신을 불사른다면 비로소 선하다 할 수 있는가? 지난 한세기를 지식인은 우왕좌왕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는 않았다. 지식인 역할의 한몫이 진정 자본에 대한 반작용에만 있다면 우리는 더 실제적이어야 한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의 삶과 자본의 이익은 달콤하고 안락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안하다. 진정한 적은 중류층 지식인 내부에 있는 상층부에 대한 동경이다. 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앞에 두고 불쌍한 우리 인생은 그 아래를 어슬렁거린다. 허접한 중류 지식인이라도 나누어줄 힘이 있다면 자기가 조금 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비로소 이 일은 시작된다. 남의 것으로 가져다 줄 생각을 말고 자기 것을 나눌 수 없다면 나는 또 다른 덫에 걸린셈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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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체 200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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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책 목차입니다.
제1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1. 지식인이 처한 상황
2.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제2부 지식인의 기능
1. 모순
2. 지식인과 대중
3. 지식인의 역할
제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
나는 오랫동안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닌 사람들과(만약 그렇게 나누는게 허락된다면)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왜냐하면 그 둘 간의 그다지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서였다.차이가 없다면 지식인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한낱 개인의 지적유희일 뿐. 그래서 난 오랫동안 지식을 알기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이런 심각한 고민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나를 일깨워준 책은 바로 이 책이었다. 첫장을 열고 머릿말을 읽고 한장한장 읽어나가면서 얻은 그 기쁨이란. 해답에 목말라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렇다고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변호'하고 있지는 않다. 지식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자 이 책을 잡는다면 어김없이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식인의 한계와 그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직 그 모순으로부터 지식인은 유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안고.
지식인으로서, 혹은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그 길에 혹시 의심이 든다면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다. 실망과 상처도 받겠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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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본능 200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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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도 읽을 얄팍한 책이지만 무려 3주에 걸쳐서 힘겹게 읽은 책의 핵심은 의외로 간결하다지식인의 모순과 고독, 지식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당위 곧 '알면 행하라'이다
몇 년전에 용가리를 계기로 인구에 회자되던 신지식인 논쟁을 떠올린다 '못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해서 못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심형래씨를 화두로 유행했던 신지식인의 정의는 자신의 지식을 새로운 부가가치로 창출하는 사람, 능동적으로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전혀 다른 두개의 개념같지만 (구)지식인이던 신지식이던 결국은 결론은 실천으로 귀결되는 점에선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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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0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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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지식전문가들이 직업상 습득한 학문은 보편을 지향하는 전문 이론인데도, 기실 그들은 특수지배계층의 필요에 의해 양성되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복무한다. 이것이 바로 이들 계층의 모순이다. 직업에서 비롯된 보편주의와 출신계급에서 비롯한 특수주의 사이의 모순. 자신의 학문적, 직업적 역할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계급을 부정하게 되어있으면서도 정작 태생적으로는 그 계급에 의해 조건지어진 존재라는 모순. 특수층이면서도 또한 지배자들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모순. 지식인이란, 이러한 모순을 깨달은 사람이다.
지식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순적 성격 때문에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 속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은 사회를 억압하고 다수를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해야 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을 해명하고 은폐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지식인은 항상 구체적 사실과 마주쳐야 하며 그때마다 늘 구체적 해답을 가져야만 한다.
어떤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가장 효과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존재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자기 자신을 두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은 한 번도 접촉해본 적 없는 노동계층의 객관적 정신을 대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모순은 불가피한 것이고 완벽하게 극복될 수도 없다. 다만 지식인은 부단한 자기비판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끊임없이 재인식해야 한다. 또한 지식인은 자신이 계급적 특수성에 안주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하고, 계급적 특수성에 기반한 사고체계를 형성할 위험에 대해서도 또한 경계해야 한다.
"보편의 전문가가 민중의 보편화 운동에 기여하는 것은, 바로 한 번도 그들과 동화된 적이 없고 격렬한 행동중에 마저도 그들로부터 따돌려지는 인간, 갈갈이 찢긴 채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는 분열된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서인 것이다. 지식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그 모순을 초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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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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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무엇인가? 그걸 정의 내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겐 없다. 다만, 야금야금 책읽기를 시작할 때 처음 만난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들과 그 외의 저서들을 통해서, 지식인이란비판적이며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지성인으로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비판적, 성찰적 지식인과 그 반대편에 선 이들로 구분해왔다. 비판을 할 줄 모르는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게,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내 생각이다. 강준만적인 생각은 그의 저서를 많이 읽지 않고 있는 요즘에도 완전히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 한국 사회라는 기괴한 현실 속에서 지식인의 성찰과 비판은 배부른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그건 지식인들의 지식인이라 일컬어지는 강준만이 퍼뜨린 '지식인론'의 파장이기도 했지만, 함석헌, 김재준, 안병무, 리영희로부터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 그리고 숱한 인터넷 논객들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정말 그렇다'라는 강한 긍정일 수밖에 없다.
1965년 9월과 10월에 걸쳐 사르트르가 일본에서 행한 세 차례 동안의 강연을 수록한 이 책은, 물론 한국 사회와 한국의 지식인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식인론은 사르트르 당대의 사회 현실과 그에 따른 사르트르의 비판적 사고과 선택을 떠나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너무도 많다.
'지배 계급은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인 '이익'에 준하여 실용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의 수를 결정한다. 지배 계급은 동시에, 산업 발전의 정도에 따라, 또 경제 상황과 새로이 등장한 필요에 맞춰, 잉여가치분의 얼마를 그들 전문가의 봉급으로 내줄 것인지를 결정한다. 오늘날, 사태는 명약관화하다. 기업은 대학으로 하여금, 낡아 퇴색한 인문주의(人文主義)를 포기하고, 그 대신 기업진단가나 중간관리자, 전문가 등을 공급해 줄 전문화된 학습을 시행하도록 하기 위해 손을 뻗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30쪽)
놀라지 마시라.(강준만의 말투로!) 이건 한국의 어느 비판적 논객이 게시판에 올려놓은 언사가 아니다. 아마 사르트르가 당대의 프랑스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사르트르의 말에는 아직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실상, 이 강연들은 사르트르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엄살 섞인 목소리로 담아낸 것일 게다. 즉, 나는 많이 아는 놈이다. 나는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괴롭다. 으아! 아, 그래.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하나,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다.'(72쪽) 십자가를 져라, 이 먹물들아!
자기 분석을 통해서 자기 결단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고뇌와 사유, 그리고 삶의 선택의 치열함은 이 책의 두께를 착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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