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3

Sen no Rikyū - Wikipedia 千利休

Sen no Rikyū - Wikipedia


센노 리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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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노 리큐의 초상

센노 리큐(일본어千利休1522년 ~ 1591년 4월 21일)는 일본에서 일본다도를 정립한 것으로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승려, 정치가). 특히 와비챠(わび茶, 草庵の茶) 전통의 원조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다조(茶祖)라 부르기도 한다. 조화와 존경맑음과 부동심을 의미하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의 정신을 강조하여 차마시는 것을 단순한 마시는 행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로서 차도를 만든 사람이다.

리큐는 오늘날 오사카 지방인 사카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요시로'였다. 58세때 오다 노부나가의 다도 스승이 되었으며 그가 죽은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이 되었다. 1585년의 오기마치 천황을 위해 일본 황궁에서 연 다도회에서 코지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를 위해 크고 작은 다도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고언(古言)을 하다 미움을 사게 되어 사형을 명받아 1591년 2월 28일주라쿠 다이에서 할복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일본다도는 17세기를 거쳐 자손들과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며 귀족층과 일본 중산계급에도 널리 보급되게 된다.

와비[편집]

센노 리큐는 간소하고 차분한 일본의 미의식인 와비(侂び)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의 와비(侂び)를 구현하기 위해 다도는 작은 족자 하나와 꽃 한 송이 꽂힌 꽃병 이외엔 아무 장식이 없는 작고 수수한 다다미 2장짜리 다실과 또한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다기들을 가지고 행하는 문화적 행위였다. 리큐는 이러한 미의식 추구를 바탕으로 차 달이기의 의례적인 측면, 다회의 진행순서, 회석요리 등을 양식화하여 다도를 확립한다.

다도와 조선 도자기[편집]

당시 일본은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중국산 도자기는 지나치게 화려하여 소박한 미를 추구하는 일본 다도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에서 만든 도자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는데,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고 조선 백자를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작 센노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을 반대했는데, 이는 출병이 실질적으로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세상의 균형이나 평화의 미학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스님으로서 리큐가 설파했던 다도속의 이상향은 히데요시의 정치적 목적과 현실에 대치되어서 크게 미움을 사게 된다. 리큐가 자결을 하도록 명령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리큐가 히데요시의 출병을 만류했던 것은 비교적 분명하게 사료로 남아있으며 자결을 하도록 명을 받은 이유로도 추정되고 있다. 이후 리큐의 다도는 그 제자들에 의해 여러 문파로 갈라져서 일본에서 발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막부와 왕가의 모든 귀족들은 다도는 할 수 없어서는 안 되는 교양이 되었다.

조선의 도자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했던 이유중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자체적으로 고령토나 백토의 산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수요는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비교적 늦게 도자기가 발달했는데, 정작 다도는 융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17세기에 도자기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일본의 당대 기록에 따르면 하급 무사의 토지와 녹봉 전체가 다완(茶碗) 하나의 가치와 맞먹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본의 다도 예절 중에 다도 도구를 감상하는 시간이 있는 것은 당대 다도구들이 모두 예술품이고 엄청난 고가의 제품들이었기 때문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하달 수 있겠다.

오다 노부나가 시절에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상인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이 당시로부터 이후 백년간 유럽에서는 고령토를 생산하지 못 했고 중국은 이를 이용해서 막대한 수출액을 챙기고 있었으며, 교역상대역시 중국측에서 고를 수 있었다. 중국의 주요 교역국이 되지 못 했던 네덜란드는 대체품을 원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도공들에게 중국에서 들여온 고령토를 쥐어주고 생산을 하도록 시키게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도공들을 가족까지 모두 잡아가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시킨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 도공들은 규슈로 이주해 도공 마을에 한데 묶여 감시를 받으면서 막부가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던 고령토를 이용해서 초기 일본 도자기를 만들었고 이삼평과 심수관 등의 이주 도공들은 규슈에서 고령토를 찾아낸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의 상품은 네덜란드에 고가에 판매되어 막부에 막대한 수익을 남기게 되었다. 막부는 특히 이도 다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도다완으로 정부 인증을 붙여 고가에 판매하여 규슈는 도자기 산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일본의 판화를 세계에 알렸던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이 도자기를 출품했던 것을 보면, 당대의 일본이 무엇으로 유럽에 알려져 있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일본의 도예가 발전한 것에 대한 치하 이유로 귀화를 한 많은 도공 일가에 대해 막부는 무사의 지위를 주고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게 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차별대우와 감시는 여전해서, 이도 다완에는 숨어서 하는 외출에 대한 이야기나 고향을 그리는 시같은 것들이 적혀있는 경우가 왕왕있다. 메이지 시대 말까지 귀화하지 않은 조선 도공들의 후손들은 자신의 영지이자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하며 그럼에도 상당수가 귀화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살았으며 이들은 도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재 14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심수관요는 일본의 대표적인 이도다완이며 현재 한일 민간 외교사절이자 주한 가고시마 대사관 역할을 겸하고 있다.

관련 작품[편집]

한국

참고 서적[편집]

  • 다도와 일본의 미 - 한림신서일본학총서 17,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김순희 옮김, 소화, 2004년,ISBN(13) : 9788984102606
  • 일본다도의 이론과 실기, 곤니치안 지음, 박민정 옮김, 다도사, 2007년, ISBN(13) : 9788988651117
  • 일본 기행 조선도공을 생각한다, 최승범 지음, 신영출판사, 1994년, ISBN : 6000029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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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휴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千利休像
하세가와 등 백화 , 하루야 종원찬)

천리휴 (센노리큐, 센리큐,  2년( 1522년 ) - 텐쇼 19년 2월 28일 ( 1591년 4월 21일 ))는, 전국 시대 부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 걸친 상인 , 차인 .

와비차 (초암의 차)의 완성자로 알려져, 차성 이라고도 불린다.  이마이 무네히사 , 쓰다 무네히로 와 함께 다탕의 천하 3종 장인 이라고 불리며 ‘ 리큐 칠철’ 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제자를 안았다. 또한 스에요시 손자 에몬의 친족인 히라노 감평위 이방과 친하게 교류가 있었다. 후손은 다도 의 삼천가로 이어지고있다. 천리휴는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측근이라는 일면도 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주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계승 한 ‘ 오차유 미나미 정도’ 속에서 많은 다이묘 에도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나 이윽고 히데요시와의 관계에 불화가 생겨, 마지막은 숙청 되게 되었다. 절복을 목숨에 이르렀던 진상에 대해서는 제설이 있어 정해져 있지 않다.

이름・호 편집 ]

유명 은 다나카 요시로(與四郎), 나중 법명 을 센종이 (센노소에키, 센소에키), 쇼우 사이(호센사이)라고  했다.

널리 알려진 리큐 의 이름은 텐쇼 13년( 1585년 )의 금중차회에 있어서 마을인의 신분으로는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쇼친마치 천황으로부터 주어진 거사 호 이다 . 고안자는 오바야시 무네토시 , 미소네 종고 , 고계종진 등 여러 설이 있다. 모두 대덕사 의 주지가 된 명승이었고, 종지와 종연은 사카이의 남종사의 주지이기도 했다 . 종진의 형제제자였던 하루야 종원에 따르면 , 오바야시 종지가 고안자였다고 한다(『일묵고』). 그러나 소지는 금중차회의 17년 전에 시로하고 있어, 그가 관련되었다고 하면 리큐가 종지로부터 주어진 것은 「리큐 무네이이」의 이름이며, 젊음 때는 諱( 이미나 ) 의 「종이」를 사용해, 적어도 요시로라고 칭하고 있던 천문 4년(1535년) 4월 28일부터 천문 13년(1544년) 2월 27일 이전에 종이라고 호했다고 생각된다[1 ] . 나중에 미야나카 참내에 있어서  (아자나)의 「리큐」를 거사호로 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야나카 참내의 2년 전, 텐쇼 11년( 1583년 )에 그려진 초상화( 마사키 미술관)구라)의 고계종 첸에 의한 찬사에 「리큐종이 선인」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호의 유래는 「명리, 이미 휴식한다」의 의미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는 「이심, 휴식하라」 의 경지를 목표로 해)라고 생각되고 있다. 「리큐」의 이름은 만년에의 자칭이며, 차인으로서의 인생의 대부분은 종이를 자칭한다.

평생 편집 ]

이즈미 쿠니 · 사카이 의 상가 (야호 "생선 가게 (토토야)")의 태생. 아버지는 다나카 요베에 (다나카 쇼베이즈키), 어머니의 법명은 츠키사키(岑岑) 묘반, 여동생은 소엔(다도 구다류에 이어진다 ).

가업 은, 헛간 [ 요출전 ] (창고업). 소금고기를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상인(  ) 없고, 그러한 상인들에게 창고를 빌려주는 '문'이었다고 여겨진다分.同佐野問、塩魚座賃銀百両也」라고 있다) [2] .

19세에 아버지를 잃고, 그것과 전후해서 할아버지도 잃는다 [3] . 할아버지의 일곱 기사에 무재이기 때문에 법요를 할 수 없고, 눈물을 흘리면서 무덤 청소를 했다는 일기가 남는다(수상한 안장 『녹이묵 흔적』). 당시 오인의 난의 영향으로 특권적 상인들은 독점에 대한 보호를 잃고 곤경에 처해 있었다 [4] .

17세보다 차의 탕을 배운다. 리큐의 첫사는 북향도 첸 (『사카이 수기자의 이야기』) [5] . 남방록』에 의하면, 그 후, 타케노 사오아카 에게 사사해, 스승과 함께 차의 탕의 개혁에 임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 기술은 『사카이수 기자의 이야기』나 『남방록』의 타네 책으로 되어 '사카이경'에는 없다 [6] . 한편, 『야마가미 무네지기』의 기술로부터, 리큐의 스승은 사와타가 아니라 츠지현야였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 7 ] .

천문 13년( 1544년 ) 2월 27일, 마츠야 쿠마사 등을 초대하여 다회를 연다(『마츠야 회기』). 이 다회가 신뢰할 수 있는 기록 가운데 최초의 이휴차회이다 [8] . 이 차회에서 리큐는, 주광 찻잔(기술적 미비 로 파랗게 되어 손상된 청자로, 무라타 쥬코가 사용하고 있던 명물( 청완 명물기』))를 이용하고 있어, 이후, 에이로쿠 2 년(1559년 )까지의 「마츠야 회기」 및 「텐노지야 회기」에 기록되어 있는 4개의 다회에서도, 주광차경을 사용하고 있다[9 ] .

상인으로서는 사카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미요시씨 [10] 의 어용상인이 되어, 재물을 이룬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1] . 에이로쿠 4년(1561년)까지, 주광 찻잔을 미요시 실휴 에 천관으로 팔고 있다(『야마가미 무네지기』) [12] .

사카이의 남 종사 에 참선하여 그 혼산인 교토 교외 시노의 대덕 사와도 친하게 만났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이후의 사카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직할지 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카이의 호상 다인이었던 이마이 무네히사, 쓰다 무네히로와 함께, 노부나가 에게 다도 로서 부름받는다. 텐쇼 2년(1574년) 3월에 노부나가가 교토 소고쿠지에서 열린 다회에, 다른 사카이의 유력 상인 9명과 함께 초대되었다는 기록이 남는다(쓰다 종급 「노부나가 차 회기」). 이때까지 사카이의 자치조직인 회합중의 일원 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13] . 텐쇼 3년(1575년), 에치젠의 일향 일소소 토전을 실시하는 노부나가를 위해서 철포구슬을 조달해 보내, 사장을 받고 있다(수상한 안장 『리큐 앞 노부나가 흑인장』)[14 ] .

텐쇼 10년(1582년) 6월의 혼노지의 변 및 야마자키의 싸움 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같은 해 8 월에 히데요시를 방문한 리큐는 다실을 만들라고 명령 받았고, 약 반년을 들여 다음 해 3 월에 현존하는 리큐작의 유일한 다실인 대암을 완성시켰다(「스에요시 감효 에 리휴서장』텐쇼 11년 3월 8일자). 이 때, 야마나이 사토시에게 향한 서장(텐쇼 10년 11월 14일자)에 「폐를 끼치는 것」을 히데요시로부터 부탁받았다고 하고 있다[15 ] .

텐쇼 11년(1583년) 5월에는, 히데요시가 오미사카모토성에서 열린 다회에서 처음으로 다당을 근무하고 있다 [16] .

텐쇼 12년(1584년)에는,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성내의 정원 공간인 야마사토에, 2 다다미의 다실을 만들고 있다 [17] . 그 주위에는 울타리와 뛰어오르는 키도가 만들어져(『종류일기』), 차정으로서의 노지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 이후 낙차 경이나 대나무 꽃입 등의 차 도구를 창작하게 된다.

텐쇼 13년( 1585년 ) 10월의 히데요시의 쇼친쵸 천황 에의 금중 헌차에 봉사해, 이 때 미야나카 참내하기 위해 거사호 「리큐」를 칙사된다. 같은 해 황금 다실을 설계. 텐쇼 15년( 1587년 )에는, 기타노 오차탕을 주관. 같은 해 완성된 류라쿠 제내에 저택을 짓고, 츠키마에에도 관여해, 록도 3,000 석을 받는 등, 차인으로서 명성과 권위를 자랑했다. 히데요시의 정사에도 크게 관여하고 있어, 오토모 소린 은 오사카성을 방문했을 때 도요토미 히데나가 로부터 「공의의 것은 나에게, 내일은 종이(리큐)에」라고 충고되었다.

텐쇼 19년( 1591년 ), 리큐는 갑자기 히데요시의 역린에 접해 사카이에 대거를 명령받는다. 대덕사의 산문은 오인의 난에 의해 대파되어 오랫동안 그대로 되어 있었다. 리큐는 만년에 이 산문 수축 사업을 이어받아 문 위에 각을 거듭하여 누문을 만들어 금모각을 기진했다. 그 낙성에 있어서 산문 공양을 위해 리큐가 하루야 가즈오에게 의뢰해, 그 요구에 따라 쓰여진 것이 이 일정이다. 센몬 만기 일시개 이 문장은 이휴의 영향력이 자신의 영향력을 넘고 있다고 생각해 히데요시를 화나게 했다. 마에다 토시야나 리큐 나나 테츠 중에서 후루타 오리베 ,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 다이묘인 제자들이 분주했지만 조명은 적합하지 않고, 교토에 다시 불린 리큐는 쇼라쿠 저택 내에서 절복을 명령 받는다 . 향년 70 [주석 ​​1] . 절복에 즈음해서는, 제자의 다이묘들이 리휴탈 환환을 도모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우에스기 경승의 군세가 저택을 둘러싼 것으로 전해진다 . 죽은 후, 리큐의 목은 이치조 복교 에서 목수 되었다. 목은 은사의 일인이라고도 하는 대덕사 삼문상의 목상에 밟는 형태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리큐가 죽음 전날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유이가 남아 있다.

인생 칠십(진세이시치쥬)
吾這寶剣 (우리 호우 켄) 조후 공살
제(히사구)루 가득구 다리의 타이타도(하나들)
지금 이쯤 때(지금 이 때)
— 쿠스미 소안 '차화 지월집'( 원록 14년( 1701년 ))

이휴기기 는 현재 3월 27일 및 3월 28일 에 대덕사에서 행해지고 있다.

죽음의 원인 편집 ]

리큐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던 원인을 “다이토쿠지 삼문(금모각) 개수에 있어서 증상 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스노다 신의 목상을 누문의 2층에 설치해, 그 아래를 히데요시에 통과 시켰다 ” [19] [20] 이라고 하는 설이 알려져 있지만, 그 밖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 저렴한 다기류 를 고액으로 팔아 배가 고프다(매승의 행위) 의심을 받았다는 설[21 ] .
  • 니조 천황릉 의 돌을 마음대로 꺼내 손수발 이나 정석 등에 사용한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는 설 [22] .
  • 히데요시와 다도에 대한 생각으로 대립했다는 설 [23] .
  • 리큐의 마음의 그릇의 크기에, 히데요시는 다회가 있을 때마다 부끄러워 하고 화가 났던 설.
  • 히데요시는 「와비 차」를 음란한 것으로 싫어하고 있어, 황금의 차실에서 화려하고 뻗은 차를 얹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리큐가 시가라키야키의 찻잔 을 작성해 , 이것을 알았다 히데요시로부터 그 찻잔을 처분하라는 명령도 거부했다는 설 [24] .
  • 히데요시가 리큐의 딸을 맘으로 바랐지만, 「딸 덕분에 출세하고 있다고 생각되고 싶지 않다」라고 거부해, 히데요시에게 그를 원망했다는 설[25][ 26 ] .
  • 도요토미 히데나가 사후의 도요토미 정권 내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정치 투쟁에 휘말렸다는 설 [27] .
  •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비판했다는 설 [28] [주석 2] .
  • 권력자인 히데요시와 예술가인 리큐의 자부심의 대결의 결과라는 설 [30] [31] [32] .
  • 교역을 독점하려 했던 히데요시에 대해 사카이의 권익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설[ 33] .
  • 리큐가 수행하고 있던 난쇼지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연결되어 이에야스의 사이자 로서 다탕 속에 독을 넣고 다실에서 히데요시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설 [34] [35]

사후 편집 ]

千利休의 자해 후, 류라쿠성 내에 있던 利休聚楽屋敷[주석 3] 은 히데요시의 손에 의해 철거되었다. 리큐 칠철의 1명인 호소카와 타다오키 창건의 대덕사 다카기리원 에는 이 리큐 저택 의 일부라고 전해지는 서원이 남는다. 십수년 후 이 저택 터지는 충흥의 장남· 나가오카 휴무 의 다실·노부 저택으로 활용되었다.

차의 탕의 후계자로서는 선처· 보심 묘수 의 아이인 嫡男·千道安과, 후처 ·종은의 동반자로 딸랑이기도 한千少庵이 유명하지만, 이 밖에 娘婿의 만대 야종안 , 센소지 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다만, 도안과 소암은 이휴사죄와 함께 허거했고, 센가는 일시적 붕괴 상태였다. 도요토미가의 다두로서의 후계는 후루다 오리베였지만, 그 밖에도 오다 유라쿠사이,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 많은 다이묘 차인이 와비차의 도통을 이어 갔다 .

리큐의 사후 수년을 거쳐(분록 4년( 1595년 )경),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마에다 토시야의 잡지 없이, 도안과 소암은 사면되었다. 도안이 사카이의 본가 사카이 센가 의 가독을 이어갔지만, 일찍 단절했다. 이 때문에, 소암이 이은 교천가의 계통( 삼천가 )만이 현재에 전해진다. 薮内流家元의 藪内家와 千家에도 이 시기에 인사관계가 생긴다.

삼천가는 치소안의 계보이며, 대덕사의 갈식 이었던 그 아들  종남이 환속하고, 현재의 표천가·리센가의 지방인 교토의 혼호지 앞에 저택을 세웠다. 이때 소단은, 히데요시로부터 리큐 유품의 수기도구 장추 3동을 받았다고 한다(지월집). 그 차남 종수·삼남종 왼쪽·사남 종실이 각각 독립해 유파가 나뉘어, 무자 코지 센가관 휴암·오모테센가 수상한 안·뒤천가 오늘 안이 되고 있다 . 건의 목상은 오늘 안에 현존한다.

리큐의 차탕 편집 ]

  • 「와비차」의 완성자로서의 리휴상은, 「남방록」을 비롯한 후세의 자료에 의해 크게 연출되어 온 것이다. 가짜인 「남방록」에서는, 신고 금집 ( 600번 가합에 출영)의 후지와라가 다카시 의 노래, 「꽃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야마사토의 눈 사이의 풀의 봄을 보면 야」를 이휴 의 차의 심수로서 있어, 표면적인 화려함을 부정한 질실한 아름다움으로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에서는 정신론이 너무 강조되어 오히려 리큐의 차탕을 불명확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
  • 동시대의 차의 탕을 알기 위해서는, 리큐의 고제인 야마가미 소지 에 의한 「야마가미 무네지기」가 제1급의 자료로 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리큐는 60세까지는 선인의 차를 답습해, 61세부터(즉 혼노지의 이상한 해로부터) 드디어 독자적인 차의 탕을 시작했다고 한다. 즉, 죽기까지의 10년간이 와비차의 완성기였다는 것이다.
  • 다도구를 미리 꾸미지 않고, 모두 다실에 운반하는 곳으로부터 점전을 시작하는 「운반점 앞」을 넓힌 것이, 이휴의 차의 탕에의 최대의 공헌으로 된다(『호린』)[36 ] . 운반점 앞에서는 차를 켜는 것이 "주"이고 차 도구는 그를 위한 수단으로 "종"으로 된다. 덧붙여 리큐의 최초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북향도 첸이 , 다도구 중 물 손가락 만은 최초로 다다미 위에 놓아 두는 「치수 손가락의 평점 앞」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37 ] .
  • 「남방록」에는, 당나라의 명물 도구를 선반에 장식해 두는 「대자점 앞」이 차의 탕의 「근본」이라고 리큐가 말했다고 되어 있지만, 리휴의 대자점 앞에 대해서 기술해 ' 차노유 차제서' 에는 리큐가 타이코점 앞을 '수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싫어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38] .
  • 리큐의 차의 탕의 중요한 점은, 명물을 존중하는 기성의 가치관을 부정한 곳에 있어, 일면에서는 금욕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대신으로 창작된 것이 낙차경이나 만대 가마솥 으로 대표되는 이휴 도구이며, 조형적으로는 장식성의 부정을 특징으로 한다. 명물을 포함한 당나귀 등에 비해 이러한 이휴 도구는 결코 비싼 것이 아니었던 점은 중요하다.
  • 리큐는 다실 보청에서도 획기적인 변혁을 하고 있다. 쿠사안 다실의 창출이다. 그때까지는 4 다다미 반을 최소로 하고 있던 다실에 서민들 사이에서만 행해졌던 3 다다미, 2 다다미 다실을 채택해, 망설임(잠수)이나 기초창, 토벽, 5 ( 4 ) ) 척상 등을 고안했다. 그 중에서도 특필되어야 할 것은 「창」의 채용이다. 사의 사와타까지 다실의 채광은 가장자리 측에 설치된 2매 당김 혹은 4매 당김의 장자에 의한 「일방 광선」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지만, 리큐는 다실을 일단 토벽으로 둘러싸고, 거기에 필요에 따라 하고 창문을 여는 기법을 취했다(「둘레」의 탄생). 이것에 의해, 다실내의 빛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필요가 있는 장소를 필요한 만큼 비추고, 반대로 어둡게 하고 싶은 장소는 어두운 채로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채광창 이나 목욕탕창 등도 궁리되어 더욱 자유자재한 채광이 가능해졌다. 설계의 자유도는 비약적으로 늘어나, 부스의 공간은 무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리에이션을 획득하게 되었다. 리큐의 다실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성과 자유는 단순히 수기야 건축에 그치지 않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노지 '도 이휴 실적으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는 단순한 통로에 불과했던 공간을 적극적인 차 공간, 대접의 공간으로 했다. 이에 따라 차의 탕은 처음으로 손님으로 찾아와 함께 차를 들이마시고 퇴출할 때까지 모든 것을 '1기 1회'의 충실한 시간으로 하는 '종합예술'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 ‘리큐젓가락’, ‘리큐젓’, ‘리큐야키’, ‘리큐 선반’ 등 많은 것에 리큐의 이름이 남아 있어 다도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통에 큰 발자국을 새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일화 편집 ]

千利休像( 마사키 미술관 창고) 텐쇼 11년(1583년) 고계종 진찬
  • 현존하고 있는 리큐의 갑옷(수상한 스가쿠라 「전천리 휴소용 감사 위봉연 2매 동체 다리」)로부터 추정 [요출전] 하면 신장이 180 센티 정도 였다고 한다 . 리휴몰 후 100년경에 성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 남방록 ' 멸후에도 리휴가 대남이었다는 기술이 있다 [25] .
  • 어느 아침, 히데요시가 리큐에 다과회에 초대되면 정원의 나팔꽃이 모두 잘려져 있었다.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 히데요시가 다실에 들어서자 마루 사이에 1륜만 나팔꽃이 낳고 있어, 1륜 때문에 두드러진 나팔꽃의 아름다움에 히데요시는 깊게 감동했다(『차화 지월집』).
  • 제자의 후루다 오리베의 다석에서, 바구니의 꽃가루 아래에 얇은 판을 깔지 않은 것을 보고 느껴지고, 「이 일에 관해서는 제가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까지 말했다(「차화 지월집 』).
  • 어느 겨울 날, 오사카에서 교토로 향하고 있던 리큐는, 친한 차인의 집에 들르고, 주인은 내방에 놀라면서 맞이했다. 리큐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손질되고 있는 저택이나, 정원에서 유자의 열매를 취해 요리에 유자 된장을 내는 주인 의 순수한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취향에 기뻐했지만, 요리에 당시는 고급품으로 휴가도 하지 않는 가마쉴 이 나온 곳에서 안색을 바꿨다. 사실 주인은 이휴가 이날 자택 곁을 지나가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 준비를 마친 뒤 낯선 태도로 갑작스러운 손님이라도 충분히 대접할 수 있도록 보여주었을 것이다. 가마호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찰아낸 이휴는 일부러 놀란 듯 보인 주인의 견영에 실망해, 그 자리에서 퇴석했다(『차화 지월집』).
  • 후쿠시마 마사노리 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차인의 이휴를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의문으로 생각하고, 그 후 다다히로에게 초대되어 리큐의 다회에 참가했다. 다회가 끝나자 정칙은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강적을 향해도 겁먹은 적은 없었지만, 리큐와 맞서고 있으면 아무래도 겁먹은 것처럼 기억했다"고 완전히 리큐에 감복하고 있었다[39 ] .
  • 절복을 명령하러 온 히데요시의 사자에 대해서도 움직이지 않고 「다실의 열쇠를 없앴습니다」라고 말했다 [40] .

발자국 편집 ]

千利休屋敷跡
사카이시 사카이 구 슈쿠인초 니시1쵸)
리큐 거사 400년 기념비
규슈 대학 마출 지구내 )
  •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  슈쿠인쵸 니시1초의 나카하마스지에 따라 리큐의 저택터로 전해지는 장소가 있어, 시의 사적으로서 보호 되고 있다. 센가 다도의 발상과 발전에 따라, 호두 ​​떡, 케시 떡, 육계 떡, 다이지 떡 등 사카이 명과를 취급하는 화과자점이 주위에 다수 존재하고, 그 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명한 것도 있다.
  • 교토시 가미쿄 구의 하루메이 신사 내에 리큐야시키 유적의 비석이 세워진 것 외에 사카이의 백설 토리노 (현재의 대선릉 고분 주변인가)에 「모즈노야시키」, 교토 고조 호리카와 근처에 「코가이 저택」, 마찬가지로 히가시야마 대불 앞에 '대불 저택', 다이토쿠지몬 앞에 '대덕사 저택', 오사카부 시마혼마치 야마자키에 '야마자키 저택'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져 교토부 을 훈군 오 야마자키 에는 다실 ' 대암 ' ( 국보 ) 현존한다.
  • 현창·전시 시설로서는 사카이 시영의 「천리 휴차의 유관」이 있다(「사카이 이정의 삼림」으로서 요사노 아키코 기념관과 병설 ) [ 41] .
  • 현재에도 「리큐 만두 (동종의 과자에 리쿠 만두의 별명도 있다)」라고 하는 차받는 과자가 각지에 있다.
  • 텐쇼 15년( 1587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 에 동행해, 츠카사키궁 에 20일 별로 체재했다고 한다. 이 때 히데요시는 쿠로다 휴몽 ( 쿠로다 다카타카 (칸베에)의 삼촌) 등과 하마(현재의 규슈대학 마출 캠퍼스 내)에서 다과회를 열었다. 리큐는 히데요시의 생명에 의해, 소나무 에 사슬을 내리고, 운룡 의 가마솥을 걸어, 백사 위의 소나무를 긁어 모아 물을 끓였다고 한다.

작품 편집 ]

전 千利休 竹花入「音曲」 

리큐는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다도에 반입했다. 가루가 초대·나가지 로를 비롯한 장인을 지도해 마음에 드는 도구를 만들게 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도 다실의 설계, 화입·찻잔의 제작 등 도구의 제작 에도 열심 이었다 . 사오구의 시대에 있어도 아직 번잡했던 다회의 형식을 한층 더 간략화함과 동시에, 수비 도구를 제작·프로듀스하고, 많은 지지자·후계자에게 축복받은 것이, 이휴를 부비 차의 완성 자라고 말하는 유연이다.

  • 다실다이안교토 부 오야마자키초 소재. 이휴작이라고 한다. 국보 .
  • 황금의 다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명에 의해 제작.
  • 서장 「무사시 아부미의 책(오리베 아테)」 「스에요시 감베에 송장」 「마츠이 사도모리 송장」 등
  • 서장 「기진장」
  • "달을 싣고 가는 외로운 배" 책
  • 다케하나이리 “소노죠지” “시하치” “야장”
  • 茶杓「나미다」「모습」

출자·계보 편집 ]

리큐의 할아버지는, 「센가계보[42] 에 의하면,

사토미 타로 요시토시 니오, 다나카 고로 스에손, 생국 성주, 히가시야마 자조원 요시마사 공동 토모 상근

라고 설명되어 있어 닛타 사토미 씨 의 일족 다나카 씨 의 출신으로 여겨진다. 또 「치리 휴유서[43] 에는,

利休先祖之儀ハ、代々足利公方家ニ而御同朋ニ而御座候。선조보다 다나카 씨에게 이어 좌후. 취중, 리큐 할아버지 하다 나카 치아미[첫 메전 아미토호스, 태조 하리미 타로 요시토시 니오, 다나카 요시요시와 신말 손야와 유,]와 신후이소, 히가시야마 공방 자조원 요시마사 공 의 오토모니 니이오 좌후, (중략) 센아미 발심해 센슈 사카이 강한거 마무리, 케이코 요베에 하타 나카노이자를 개메 아버지나 노치를 잡고 성자 니치, 요베에와 신후 이사이 이마이치쵸 니이 상가 니파성후, 게이코 치요시로와 신후이이마이마이치 니이오 장사 마사지 다도 오호 키후.

라고 쓰여져 있어, 리큐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처음에는 전아미, 나중에 센아미라고 하고,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방중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 다나카 요베에(리큐의 아버지 가  아미 호의 천자 를 쳐서 천성을 칭했다고 한다.

다만 '아미'호는 당시 종문 도 등에게는 매우 흔한 것이며, 반드시 동중에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설의 초출인 '천리휴유서'는 이휴의 曾孫인 江岑宗左에 의한 것이고, 이휴의 동시대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용을 의문시하는 방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요시가 유키시로는, 「 치리 휴유서」의 전승은 「응인기」권 제2 「무로마치 테이유키 유키사」에 이름이 보이는 「동모전 아야」를 참고로 한 것이 아닐까 지적한다 [44 ] . 또 무라이 야스히코는, 「리큐의 조상이 요시마사의 동방중이었다고 한다면(중략) 치아미는 리큐의 할아버지라기보다 증조부」가 아니면 시대가 맞지 않는다고 의의를 나타내고 있다[45 ] . 나카무라 슈야는 “리큐의 할아버지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방중이었다는 확실한 사료는 없고 오히려 창작된 가전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설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의미로는, 치야가 원래는 타나카 성이었던 것은 의심스럽다”[46]라고 하고 있다 .

게다가 야마가미 소지의 『야마가미 소지기』(텐쇼 16년(1588년))는, 리큐를 다나카 무네, 리큐의 장남을 타나카 소안(후의 도안)이라고 기록하고 있어[47] , 리큐 의 만년에 이르더라도 성으로서는 다나카 쪽이 다니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리큐의 아버지의 대에 타나카 성을 천성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방향도 있다. 예를 들어, 카즈 츠 아사오는 "리큐의 아버지가 다나카 성을 천성으로 바꿨다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알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해, “천”은 리큐 이전부터 계속되는 다나카가의 옥호라고 하고 있다. 카미즈는 이에 이어 “한국에서는 센가는 조선계의 집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지만, 다나카가 성이었던 것은 그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일본 “귀화” 성이 다나카였다면, 히데요시 조선 침략 중에 소암이 천가로 되돌아가게 되어 너무 부자연스러울 것”이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48] .

가족 편집 ]

  • 보심묘수(호신묘류, 생년불상 - 텐쇼 5년 7월 16일 ( 1577년 8월 10일 ))
    전처.
  • 종은(소온, 생년불상 - 경장 5년 3월 6일 ( 1600년 4월 19일 ))
    후부.
  • 첸다오안
    장남. 어머니는 보심묘수.
  • 宗林 (소림 림, 생몰 연)
    차남. 어머니는 종은. 해절하고 부모를 슬프게 했다고 한다.
  • 宗幻 (그릇 징, 생몰 연)
    세 남자. 어머니는 종은. 철절했다.
  • 다나카 무네요시
    일설에 서장자.
  • 鄭蔵主 (세이 조, 생몰 연)
    서코. 메이지 절을 호.
  • 센쇼안
    양각자. 종은의 아들.
  • 불명(생몰년 미상)
    장녀. 어머니는 보심묘수. 에이로쿠 원년( 1558년 )쯤, 차인 치사 오지 에게 아내다.
  • 불명(생몰년 미상)
    차녀. 어머니는 보심묘수. 텐쇼 4년( 1576년 )경, 리큐의 제자인 만요야 무네야스 에게 아내다. 텐쇼 17년( 1589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마음에 들어 봉공하라는 청문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나중에 이휴의 자해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남편이 몰리자 친가로 돌아갔다.
  • 삼(생몰년 미상)
    삼녀. 어머니는 보심묘수. 종제에 해당하는 이시바시 료코 에게 아내다. 세의 일화는 일설에는 그녀라고도 한다.
  • 음 (생몰년 미상)
    네 여자. 어머니는 보심묘수. 텐쇼 12년( 1584년 ), 혼노지 의 승려 엔 승보종엔 ( 후루시 종엔 ·옥당)에 시집다.
  • 불명(생몰년 미상)
    오녀? 우오야 요베 에에 아내다.
  • 거북 (카메, 생년 미상 - 게이쵸 11년 10월 29일 ( 1606년 11월 29일 ))
    후미, 육녀? 이름은 긴(ちょう)도. 텐쇼 4년(1576년)경, 나중에 리큐의 양자가 되는 소암을 사위로 했다. 소암과의 사이에는 소단을 벌고 있다. 리큐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사카이에 정착할 때, 노래를 거북이에 남기고 있다. 또 부부 사이는 양호하지 않은 것 같고 소암과는 별거하고 있었지만, 아들·소단이 리큐에 연좌하려고 했을 때에는 별거처로부터 달려들고 있다.

또 위서 '남방록'에 따르면 삼·거북을 제외한 여자 중 하나가 텐쇼 19년 1월 18일(1591년 2월 11일)  자해 했다고 한다 .

千利休의 전시회 편집 ]

千利休을 소재로 한 작품 편집 ]

소설
영화
TV드라마
TV 드라마(겨드랑이 역으로 등장)
만화
음악

리큐가 등장한 작품 편집 ]

영화
TV드라마
  • 친구 (2009년 Season8 제10화) 천리휴의 죽음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환상의 다기」의 존재가 있었다고 하는 내용.
만화
TV 애니메이션
게임
  • Fate/Grand Order』(목소리: 소노자키 미에 ) - 기간 한정 이벤트 『부치기리 차노유 배틀 구다구다 신사마 대국 ~지옥에서 돌아온 남자~』에 등장.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최근, 일본 다도사 연구가의 나카무라 슈야 ( 분교대학 교수)는 『시경기』의 기술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발 대정  앞서장의 내용 등을 논거로, 리큐는 이때 죽지 않고 실종해, 소식 불명이 되었다는 설을 주창하고 있다 [18] .
  2. 쿠와타 타다 부모 는, 「한 장편의 역사 소설에서 시도된 작가의 픽션이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있다[29 ] . 덧붙여 그 역사 소설이란, 노가미 야요이코「히데요시와 리큐」를 가리킨다.
  3.  沘沙門町 및 葭屋마치 통원 서원사 시모루마치의 하루묘 신사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또 '소라쿠 고성도'(국립국회도서관·히로시마현립도서관 등 창고)에 따르면, 류라쿠 제북어문 옆의 원서원사 통 내리는 오미야 도리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출처 편집 ]

  1. 미야모토 요시미「리큐의 등장」, 요네하라 정의편 「천리휴의 모든」, 신인물 왕래사, 1995년, 38페이지.
  2.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13
  3.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14
  4.  사쿠라이 에이지 “일본의 역사 12 무로마치인의 정신”(고단샤, 2001년)
  5.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61, 80-81
  6.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61-63
  7.  간쓰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66-82
  8.  「마츠야 회기」에 천문 6년(1537년) 9월 13일의 「교토 요시로」에 의한 다회의 기술에 「종이사야」라고 가필되고 있다. 종이는 리큐의 별명이므로, 이것으로 리큐가 16세 때에 다회를 열었다고 여겨졌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에 의한 다회라고 생각되고 있다 서점, 2015), 125쪽
  9.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119, 128, 142, 233
  10.  이마야 아키라 「전국 미요시 일족」(신인물 왕래사, 1985년)
  11.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114-115
  12.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28
  13. ^ 아사오 나오히로 외 “사카이의 역사 도시 자치의 원류”(카도카와 서점, 1999년)
  14. ^ 오모테이가 기타야마 회관 “오다 노부나가 흑인장 센리 휴방지”
  15.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84
  16.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95
  17.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195-198
  18. ^ 『닛케이 어른의 OFF』2013년 12월호, 리큐 절복』(양천사・2015년) 한 설 『아사히 신문』 조간 2018년 5월 14일(문화의 문면) .
  19. ↑ 모쿠슈지 하루요시 『하루토요 공기』 제7권, 텐쇼 19년 2월 26일조(1591년 4월 19일)
  20. 요시다 카네미 “가네미 경기”권 16, 텐쇼 19년 2월 26일조(1591년 4월 19일)
  21.  다문원 일기』권 37, 텐쇼 19년 2월 28일조(1591년 4월 21일)
  22. ↑ 평직방「나츠야마 잡담」권지오, 관보 원년(1741년)
  23. ^ 요시다 손 시로 유사 구술, 치요메 등고기 『선조 등 무공 야화 픽유』 권칠, 관영 15년(1638년)
  24. ^ 카사와라 카즈오 편집 『학습 만화 인물 일본의 역사〈12〉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센리 휴-아즈치・모모야마 시대』슈에이샤
  25. ↑ b 『남방록』 제7권·멸후
  26. ^ 『히데요리 공교 고성 코루타 구로 팔직담, 토이치 봉전 조 이야기』승응 2년(1653년)
  27. ^ 요시다 손 시로 유쇼 편 「무공 밤 이야기」권 17, 히로나가 15년(1638년)
  28. ^ 스기모토 케이오 『천리휴와 그 주변』 담교사, 1970년
  29. ^ 쿠와타 타다모 『천리휴-그 생애와 예술적 실적』 중앙공론사, 1981년
  30. ^ 요시가 코시로 『천리휴』(요시카와 히로후미칸, 1963년)
  31.  요네하라 마사요시 “천하 일인 센리 휴”(담교사, 1993년)
  32. ^ 고지마 타카시 「수기의 혁명―리큐와 오리베의 죽음―」(사문각 출판, 2006년)
  33. ↑ 아이타 유우지 ·야마자키 마사카즈 대담 “리큐가 목표로 좌절한 것”(『프레지던트』27(9)
  34. ↑ 오카쿠라 텐신薯「차의 책국립 국회 도서관
  35.  千利休薯『利休百会記』岡山大学付属図書館
  36.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p. 135-138
  37.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35
  38. ^ 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15년), p. 175
  39.  『호소카와 가기』(도쿄대학 사료 편찬소 소장)
  40. ^^
    • 江岑宗左『千利休由緒書』承応2年(1653년)
    • 쿠니에키 청채 『무변인문서』 연보 8년(1680년)
    • 야마다 소노 『다도 요록』부록 겐로쿠 4년(1691년)
    • 나리시마 사직 「천리 휴죄과 부격언의 일」(『개정 미카와 고풍 토기』권 제29) 텐포 4년
    등.
  41.  千利休茶の湯館(2018년 6월 26일에 확인함)
  42. ^ 마침 사이종 왼쪽 『천가계보』문화 원년(1804년)
  43. ^ 강 岑宗左『千利休由緒書』承応2年(1653년). 「묵해산필」권 22소수수의 「리큐덴」(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장)은 「센리휴유서」의 사본으로 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44. ^ 요시가 사시로 『천리휴』 요시카와 히로후미칸, 1963년.
  45.  무라이 야스히코 『천리휴』 코단샤, 2004년.
  46. ^ 나카무라 슈야 「『원류차화』 주석(2)」문교대학교육학부 기요38, 2004년.
  47.  야마가미 송지 "야마가미 송지" 텐쇼 16년(1588년)
  48. ^ 가미즈 아사오 『천리휴의 「와비」란 무엇인가』(카도카와 서점, 2005년)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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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利休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千利休像
長谷川等伯画、春屋宗園賛)

千利休(せんのりきゅう、せんりきゅう、2年(1522年) - 天正19年2月28日1591年4月21日))は、戦国時代から安土桃山時代にかけての商人茶人

わび茶(草庵の茶)の完成者として知られ、茶聖とも称せられる。また、今井宗久津田宗及とともに茶湯の天下三宗匠と称せられ、「利休七哲」に代表される数多くの弟子を抱えた。また、末吉孫左衛門の親族である平野勘平衛利方と親しく交流があった。子孫は茶道三千家として続いている。千利休は天下人・豊臣秀吉の側近という一面もあり、豊臣秀吉が旧主・織田信長から継承した「御茶湯御政道」のなかで多くの大名にも影響力をもった。しかしやがて秀吉との関係に不和が生じ、最後は粛清されるようになった。切腹を命ぜらるに至った真相については諸説あり、定まっていない。

名・号[編集]

幼名は田中与四郎(與四郎)、のち法名千宗易(せんのそうえき、せんそうえき)、抛筌斎(ほうせんさい)とした。

広く知られた利休の名は、天正13年(1585年)の禁中茶会にあたって町人の身分では参内できないために正親町天皇から与えられた居士号である。考案者は、大林宗套笑嶺宗訢古渓宗陳など諸説がある。いずれも大徳寺の住持となった名僧で、宗套と宗訢は堺の南宗寺の住持でもあった。宗陳の兄弟弟子であった春屋宗園によれば、大林宗套が考案者だったという(『一黙稿』)。しかし宗套は禁中茶会の17年前に示寂しており、彼が関わったとすれば利休が宗套から与えられたのは「利休宗易」の名であり、若年時は(いみな)の「宗易」を使用し、少なくとも与四郎と称していた天文4年(1535年)4月28日から天文13年(1544年)2月27日以前に宗易と号したと考えられる[1]。のちに宮中参内に際して(あざな)の「利休」を居士号としたと考えられる。こう考えれば宮中参内の2年前、天正11年(1583年)に描かれた肖像画(正木美術館蔵)の古渓宗陳による讃に「利休宗易禅人」とあることも理解できる。

号の由来は「名利、既に休す」の意味とする場合が多いが、現在では「利心、休せよ」(才能におぼれずに「老古錐(使い古して先の丸くなった錐)」の境地を目指せ)と考えられている。「利休」の名は晩年での名乗りであり、茶人としての人生のほとんどは宗易を名乗る。

生涯[編集]

和泉国商家(屋号「魚屋(ととや)」)の生まれ。父は田中与兵衛(田中與兵衞)、母の法名は月岑(げっしん)妙珎、妹は宗円(茶道久田流へ続く)。

家業は、納屋衆[要出典](倉庫業)。塩魚を独占的に扱う商人()ないし、そういった商人たちに倉庫を貸す「問」だったとされる(利休が切腹時に書いた遺産分け状の冒頭に「問の事、泉国ある程の分。同佐野問、塩魚座賃銀百両也」とある)[2]

19歳で父を失い、それと前後して祖父も失う[3]。祖父の七回忌に無財のため法要ができず、涙を流しながら墓掃除をしたとの日記が残る(不審庵蔵『緑苔墨跡』)。当時、応仁の乱の影響で、特権的商人たちは独占に対する保護を失い、苦境に立たされていた[4]

17歳より茶の湯を習う。利休の最初の師は北向道陳(『堺数寄者の物語』)[5]。『南方録』によると、その後、武野紹鴎に師事し、師とともに茶の湯の改革に取り組んだとされているが、この記述は『堺数寄者の物語』や『南方録』のタネ本とされる『堺鏡』にはない[6]。他方、『山上宗二記』の記述から、利休の師は紹鷗ではなく辻玄哉だった可能性が指摘されている[7]

天文13年(1544年)2月27日、松屋久政らを招いて茶会を開く(『松屋会記』)。この茶会が信頼性のある記録の中で最初の利休の茶会である[8]。この茶会で利休は、珠光茶碗(技術的不備で青くなり損ねた青磁で、村田珠光が使っていた名物(『清玩名物記』))を用いており、以降、永禄2年(1559年)までの『松屋会記』および『天王寺屋会記』に記録されている4つの茶会でも、珠光茶碗を使っている[9]

商人としては、堺の実質的支配者であった三好氏[10]の御用商人となり、財を成したと推測されている[11]永禄4年(1561年)までに、珠光茶碗を三好実休に千貫で売っている(『山上宗二記』)[12]

堺の南宗寺に参禅し、その本山である京都郊外紫野の大徳寺とも親しく交わった。

永禄12年(1569年)以降の堺が織田信長直轄地となっていく過程で、堺の豪商茶人であった今井宗久津田宗及とともに、信長に茶堂として召し抱えられる。天正2年(1574年)3月に信長が京都相国寺で開いた茶会に、ほかの堺の有力商人9人とともに招かれたとの記録が残る(津田宗及『信長茶会記』)。このときまでに、堺の自治組織である会合衆の一員となっていたと考えられる[13]天正3年(1575年)、越前の一向一揆掃討戦を行う信長のために鉄砲玉を調達して送り、謝状を受け取っている(不審庵蔵『利休宛信長黒印状』)[14]

天正10年(1582年)6月の本能寺の変および山崎の戦いのあとは豊臣秀吉に仕えた。同年8月に秀吉を訪ねた利休は、茶室を作るように命じられ、約半年をかけて、翌年3月に現存する利休作の唯一の茶室である待庵を完成させた(『末吉勘兵衛宛利休書状』天正11年3月8日付)。このとき、薮内紹智に宛てた書状(天正10年11月14日付)に「迷惑なること」を秀吉から頼まれた、と記している[15]

天正11年(1583年)5月には、秀吉が近江坂本城で開いた茶会で初めて茶堂を勤めている[16]

天正12年(1584年)には、秀吉が築城した大坂城内の庭園空間である山里に、2畳の茶室を作っている[17]。その周りには垣と跳ね木戸が作られ(『宗湛日記』)、茶庭としての露地が生まれることとなった。これ以後、楽茶碗や竹花入などの茶道具を創作するようになる。

天正13年(1585年)10月の秀吉の正親町天皇への禁中献茶に奉仕し、このとき宮中参内するため居士号「利休」を勅賜される。同年、黄金の茶室を設計。天正15年(1587年)には、北野大茶湯を主管。同年完成した聚楽第内に屋敷を構え、築庭にも関わり、も3,000石を賜わるなど、茶人として名声と権威を誇った。秀吉の政事にも大きく関わっており、大友宗麟は大坂城を訪れた際に豊臣秀長から「公儀のことは私に、内々のことは宗易(利休)に」と忠告された。

天正19年(1591年)、利休は突然秀吉の逆鱗に触れ、堺に蟄居を命じられる。大徳寺の山門は応仁の乱によって大破し、長らくそのままになっていた。利休は晩年にこの山門修築の事業を引き継いで門の上に閣を重ねて楼門を造り金毛閣を寄進した。その落成にあたって山門供養のために利休が春屋和尚に依頼し、その求めに応じて書かれたのがこの一偈である。千門萬戶一時開この文は、利休の影響力が自分の影響力を超えていると考え、秀吉を怒らせた。前田利家や、利休七哲のうち古田織部細川忠興大名である弟子たちが奔走したが助命は適わず、京都に呼び戻された利休は聚楽屋敷内で切腹を命じられる。享年70[注釈 1] 。切腹に際しては、弟子の大名たちが利休奪還を図るおそれがあることから、秀吉の命令を受けた上杉景勝の軍勢が屋敷を取り囲んだと伝えられる。死後、利休の首は一条戻橋梟首された。首は賜死の一因ともされる大徳寺三門上の木像に踏ませる形でさらされたという。

利休が死の前日に作ったとされる遺偈(ゆいげ)が残っている。

人生七十(じんせいしちじゅう) 力囲希咄(りきいきとつ)
吾這寶剣(わがこのほうけん) 祖佛共殺(そぶつともにころす)
提(ひっさぐ)る 我得具足(わがえぐそく)の 一太刀(ひとつたち)
今此時(いまこのとき)ぞ 天に抛(なげうつ)
— 久須見疎安『茶話指月集』(元禄14年(1701年))

利休忌は現在、3月27日および3月28日に大徳寺で行われている。

死の原因[編集]

利休が秀吉の怒りを買った原因を「大徳寺三門(金毛閣)改修にあたって増上慢があったため、自身の雪駄履きの木像を楼門の2階に設置し、その下を秀吉に通らせた」[19][20]とする説が知られているが、その他にもさまざまな説があり、詳しくは分かっていない。

  • 安価の茶器類を高額で売り私腹を肥やした(売僧(まいす)の行い)疑いを持たれたという説[21]
  • 二条天皇陵の石を勝手に持ち出し手水鉢庭石などに使ったことが秀吉の怒りを買ったという説[22]
  • 秀吉と茶道に対する考え方で対立したという説[23]
  • 利休の心の器の大きさに、秀吉は茶会のあるたびに恥をかかされ、腹立たしく思っていた説。
  • 秀吉は「わび茶」を陰気なものとして嫌っており、黄金の茶室にて華やかで伸びやかな茶を点てさせた事に不満を持っていた利休が信楽焼茶碗を作成し、これを知った秀吉からその茶碗を処分するよう命じられるも、拒否したという説[24]
  • 秀吉が利休の娘を妾にと望んだが、「娘のおかげで出世していると思われたくない」と拒否し、秀吉にそのことを恨まれたという説[25][26]
  • 豊臣秀長死後の豊臣政権内の不安定さからくる政治闘争に巻き込まれたという説[27]
  • 秀吉の朝鮮出兵を批判したという説[28][注釈 2]
  • 権力者である秀吉と芸術家である利休の自負心の対決の結果という説 [30][31][32]
  • 交易を独占しようとした秀吉に対し、堺の権益を守ろうとしたために疎まれたという説[33]
  • 利休が修行していた南宗寺徳川家康とつながりがあり、家康の間者として茶湯の中にを入れ、茶室で秀吉を暗殺しようとしたという説[34][35]

死後[編集]

千利休の自害後、聚楽城内にあった利休聚楽屋敷[注釈 3]は、秀吉の手によって取り壊された。利休七哲の1人である細川忠興創建の大徳寺高桐院にはこの利休屋敷の一部と伝えられる書院が残る。十数年後、この屋敷跡地は、忠興の長男・長岡休無の茶室・能舞屋敷として活用された。

茶の湯の後継者としては先妻・宝心妙樹の子である嫡男・千道安と、後妻・宗恩の連れ子で娘婿でもある千少庵が有名であるが、このほかに娘婿の万代屋宗安千紹二の名前が挙げられる。ただし、道安と少庵は利休死罪とともに蟄居し、千家は一時取り潰しの状態であった。豊臣家の茶頭としての後継は古田織部であったが、そのほかにも織田有楽斎、細川忠興ら多くの大名茶人がわび茶の道統を継いだ。

利休の死後数年を経て(文禄4年(1595年)ごろ)、徳川家康や前田利家の取りなしにより、道安と少庵は赦免された。道安が堺の本家堺千家の家督を継いだが、早くに断絶した。このため、少庵の継いだ京千家の系統(三千家)のみが現在に伝わる。また薮内流家元の藪内家と千家にも、この時期に姻戚関係が生じる。

三千家は千少庵の系譜であり、大徳寺の喝食であったその息子・千宗旦が還俗して、現在の表千家・裏千家の地所である京都の本法寺前に屋敷を構えた。このとき宗旦は、秀吉から利休遺品の数寄道具長櫃3棹を賜ったという(指月集)。その次男宗守・三男宗左・四男宗室がそれぞれ独立して流派が分かれ、武者小路千家官休庵・表千家不審庵・裏千家今日庵となっている。件の木像は今日庵に現存する。

利休の茶の湯[編集]

  • 「わび茶」の完成者としての利休像は、『南方録』をはじめとする後世の資料によって大きく演出されてきたものである。偽書である『南方録』では、新古今集六百番歌合に出詠)の藤原家隆の歌、「花をのみ 待つらん人に 山里の 雪間の草の 春をみせばや 」を利休の茶の心髄としており、表面的な華やかさを否定した質実な美として描かれている。しかしこれらの資料では精神論が強調されすぎており、かえって利休の茶の湯を不明確なものとする結果を招いてきた。
  • 同時代の茶の湯を知るには、利休の高弟である山上宗二による『山上宗二記』が第1級の資料とされている。この書によると、利休は60歳までは先人の茶を踏襲し、61歳から(つまり本能寺の変の年から)ようやく独自の茶の湯を始めたという。つまり、死までの10年間がわび茶の完成期だったということになる。
  • 茶道具を前もって飾っておかず、すべて茶室に運び入れるところから点前を始める「運び点前」を広めたことが、利休の茶の湯への最大の貢献とされる(『僊林』)[36]。運び点前では、茶を点てることが「主」で、茶道具はそのための手段として「従」とされる。なお、利休の最初の師とされる北向道陳が、茶道具のうち水指だけは最初に畳の上に置いておく「置水指の平点前」をしていたとの記録がある[37]
  • 『南方録』には、唐物の名物道具を棚に飾っておく「台子点前」が茶の湯の「根本」であると利休が語ったとされているが、利休の台子点前について記述している『茶之湯次第書』には、利休が台子点前を「数寄に入らず」と嫌ってい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38]
  • 利休の茶の湯の重要な点は、名物を尊ぶ既成の価値観を否定したところにあり、一面では禁欲主義ともいえる。その代わりとして創作されたのが楽茶碗や万代屋釜に代表される利休道具であり、造形的には装飾性の否定を特徴としている。名物を含めた唐物などに比べ、このような利休道具は決して高価なものではなかった点は重要である。
  • 利休は茶室の普請においても画期的な変革を行っている。草庵茶室の創出である。それまでは4畳半を最小としていた茶室に、庶民の間でしか行われていなかった3畳、2畳の茶室を採りいれ、躙り口(潜り)や下地窓、土壁、五(四)尺床などを工夫した。その中でも特筆されるべきは「窓」の採用である。師の紹鷗まで茶室の採光は縁側に設けられた2枚引きあるいは4枚引きの障子による「一方光線」により行われていたが、利休は茶室をいったん土壁で囲い、そこに必要に応じて窓を開けるという手法を取った(「囲い」の誕生)。このことにより、茶室内の光を自在に操り必要な場所を必要なだけ照らし、逆に暗くしたい場所は暗いままにするということが可能になった。のちには天窓や風呂先窓なども工夫され、一層自在な採光が可能となった。設計の自由度は飛躍的に増し、小間の空間は無限ともいえるバリエーションを獲得することとなった。利休の茶室に見られる近代的とも言える合理性と自由さは、単に数奇屋建築にとどまらず、現代に至るまで日本の建築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てきた。
  • 露地」も利休の業績として忘れてはならない。それまでは単なる通路に過ぎなかった空間を、積極的な茶の空間、もてなしの空間とした。このことにより、茶の湯は初めて、客として訪れともに茶を喫して退出するまでのすべてを「一期一会」の充実した時間とする「総合芸術」として完成されたと言える。
  • 「利休箸」「利休鼠」「利休焼」「利休棚」など、多くのものに利休の名が残っており、茶道のみならず日本の伝統に大きな足跡を刻んでいるといえる。

人物・逸話[編集]

千利休像(正木美術館蔵)天正11年(1583年)古渓宗陳賛
  • 現存している利休の甲冑(不審菴蔵「伝千利休所用 紺糸威縫延二枚胴具足」)から推定[要出典]すると身長が180センチほどだったとされる。利休没後100年ごろに成立したと推定される『南方録』滅後にも、利休が大男であったという記述がある[25]
  • ある朝、秀吉が利休に茶会に招かれると庭の朝顔がすべて切り取られていた。不審に思いながら秀吉が茶室に入ると、床の間に1輪だけ朝顔が生けてあり、1輪ゆえに際立てられた朝顔の美しさに秀吉は深く感動した(『茶話指月集』)。
  • 弟子の古田織部の茶席で、籠の花入の下に薄板を敷いていないのを見て感じ入り、「このことに関しては私が弟子になりましょう」とまで述べた(『茶話指月集』)。
  • ある冬の日、大坂から京へ向かっていた利休は、親しい茶人の家へ立ち寄り、主人は来訪に驚きながら迎え入れた。利休は、突然の訪問にもかかわらず手入れされている邸内や、庭で柚子の実を取り料理に柚子味噌を出す主人のとっさの客をもてなせる趣向に喜んだが、料理に当時は高級品で日持ちもしない蒲鉾が出されたところで顔色を変えた。実は主人は利休がこの日に自邸のそばを通ることをあらかじめ知っており、準備を整えたうえで素知らぬ態で突然の客でも十分にもてなすことが出来るように見せかけていただけだったのである。蒲鉾が用意されていたことからそれを察した利休は、わざわざ驚いたように見せた主人の見栄に失望し、その場で退席した(『茶話指月集』)。
  • 福島正則細川忠興が茶人の利休を慕っていることを疑問に思い、その後忠興に誘われ利休の茶会に参加した。茶会が終わると正則は「わしは今までいかなる強敵に向かっても怯んだことはなかったが、利休と立ち向かっているとどうも臆したように覚えた」とすっかり利休に感服していた[39]
  • 切腹を命じにきた秀吉の使者に対しても動じず「茶室の鍵をなくしました」と述べた[40]

足跡[編集]

千利休屋敷跡
堺市堺区宿院町西1丁)
利休居士四百年記念碑
九州大学馬出地区内
  • 大阪府堺市堺区宿院町西1丁の中浜筋沿いに利休の屋敷跡と伝えられる場所があり、市の史跡として保護されている。千家茶道の発祥と発展にともない、くるみ餅、芥子(けし)餅、肉桂(にっき)餅、大寺餅といった堺銘菓を扱う和菓子店が周囲に多数存在し、中には豊臣秀吉が名付けたものもある。
  • 京都市上京区晴明神社内に利休屋敷跡の碑が建つほか、堺の百舌鳥野(現在の大仙陵古墳周辺か)に「もずの屋敷」、京都五条堀川辺りに「醒ヶ井屋敷」、同じく東山大仏前に「大仏屋敷」、大徳寺門前に「大徳寺屋敷」、大阪府島本町山崎に「山崎屋敷」を構えていたと伝えられ、京都府乙訓郡大山崎には茶室「待庵」(国宝)が現存する。
  • 顕彰・展示施設としては堺市営の「千利休茶の湯館」がある(「さかい利晶の杜」として与謝野晶子記念館と併設)[41]
  • 現在でも「利休饅頭(同種の菓子に利久饅頭の別名もあり)」というお茶受けのお菓子が各地にある。
  • 天正15年(1587年)、豊臣秀吉の九州遠征に同行し、筥崎宮に20日あまり滞在したとされる。このとき、秀吉は黒田休夢黒田孝高(官兵衛)の叔父)らと浜(現在の九州大学馬出キャンパス内)で茶会を催した。利休は秀吉の命により、に鎖を下ろし、雲龍の小釜をかけ、白砂の上の松葉をかき集めて湯を沸かしたとされる。

作品[編集]

伝 千利休 竹花入「音曲」 

利休はさまざまな新しい試みを茶道に持ち込んだ。樂家初代・長次郎をはじめとする職人を指導して好みの道具を作らせるとともに、自らも茶室の設計、花入茶杓の製作など道具の製作にも熱心であった。紹鴎の時代にあってもまだ煩雑であった茶会の形式をさらに簡略化するとともに、侘び道具を製作・プロデュースして、多くの支持者・後継者に恵まれたことが、利休を侘び茶の完成者と言わしめる由縁である。

  • 茶室待庵 : 京都府大山崎町所在。利休作といわれる。国宝
  • 黄金の茶室 : 豊臣秀吉の命により製作。
  • 書状「武蔵あぶみの書(織部あて)」「末吉勘兵衛宛書状」「松井佐渡守宛書状」など
  • 書状「寄進状」
  • 書「孤舟載月」
  • 竹花入「園城寺」「尺八」「夜長」
  • 茶杓「なみだ」「面影」

出自・系譜[編集]

利休の祖父は、『千家系譜[42]によれば、

里見太郎義俊二男、田中五郎末孫、生国城州、東山慈照院義政公同朋相勤

と説明されており、新田里見氏の一族田中氏の出身とされる。また『千利休由緒書[43]には、

利休先祖之儀ハ、代々足利公方家ニ而御同朋ニ而御座候。先祖より田中氏に而御座候。就中、利休祖父ハ田中千阿弥〔初メ専阿弥ト号ス、太祖ハ里見太郎義俊二男、田中義清と申末孫也と云、〕と申候而、東山公方慈照院義政公の御同朋ニ而御座候、(中略)千阿弥発心致し泉州堺江閑居仕候、其子与兵衛ハ田中之名字を改メ父之名ノ千を取り苗字ニ致し、与兵衛と申候而堺之今市町ニ而商家ニ罷成候、其子千与四郎と申候而今市町ニ而商売仕候所茶道ヲ好キ候。

と書かれており、利休の祖父の名は初めは専阿弥、のちに千阿弥といい、足利義政同朋衆であったため、その子、田中与兵衛(利休の父)がその阿弥号の千の字をとって千姓を称したとされる。

ただし、「阿弥」号は当時の時宗門徒などにはきわめてありふれたものであり、必ずしも同朋衆に結びつくものではない。この説の初出である「千利休由緒書」は、利休の曾孫である江岑宗左によるものであり、利休の同時代史料には見当たらないところから内容を疑問視する向きがある。たとえば芳賀幸四郎は、「千利休由緒書」の伝承は『応仁記』巻第二「室町亭行幸之事」に名の見える「同朋専阿弥」を参考にしたのではないかと指摘する[44]。また村井康彦は、「利休の祖先が義政の同朋衆であったとするなら(中略)千阿弥は利休の祖父というより曾祖父」でなければ時代が合わないと疑義を呈している[45]。中村修也は、「利休の祖父が足利義政の同朋衆であったという確たる史料はなく、むしろ創作された家伝と見るほうが無難である。ただし、この記事は田中姓から千姓に代わった経緯を説明する役割を担っており、その意味では、千家がもとは田中姓であったことは疑いあるまい」[46]としている。

さらに、山上宗二の『山上宗二記』(天正16年(1588年))は、利休のことを田中宗易、利休の長男を田中紹安(のちの道安)と記しており[47]、利休の晩年に至っても姓としては田中の方が通っていたと考えられることから、利休の父の代に田中姓を千姓に代えたのではないとする向きもある。たとえば神津朝夫は、「利休の父が田中姓を千姓に改めたというのも正しくない。『山上宗二記』には「田中宗易」と明記されており、利休の本姓は依然として田中だったことがわかるからだ」と指摘し、「千」は利休以前から続く田中家の屋号であるとしている。神津はこれに続けて「韓国では千家は朝鮮系の家ではないかとする説もあるが、田中が姓だったのではそれも成り立たない。もしも日本「帰化」姓が田中だったのなら、秀吉の朝鮮侵略中に少庵が千家に戻したことになり、あまりに不自然だろう」とも指摘している[48]

家族[編集]

  • 宝心妙樹(ほうしんみょうじゅ、生年不詳 - 天正5年7月16日1577年8月10日))
    先妻。
  • 宗恩(そうおん、生年不詳 - 慶長5年3月6日1600年4月19日))
    後妻。
  • 千道安
    長男。母は宝心妙樹。
  • 宗林(そうりん、生没年不詳)
    次男。母は宗恩。夭折し、父母を悲しませたという。
  • 宗幻(そうげん、生没年不詳)
    三男。母は宗恩。夭折した。
  • 田中宗慶
    一説に庶長子。
  • 清蔵主(せいぞうしゅ、生没年不詳)
    庶子。明叔寺を号。
  • 千少庵
    養嗣子。宗恩の連れ子。
  • 不明(生没年不詳)
    長女。母は宝心妙樹。永禄元年(1558年)ごろ、茶人千紹二に嫁いだ。
  • 不明(生没年不詳)
    次女。母は宝心妙樹。天正4年(1576年)ごろ、利休の弟子である万代屋宗安に嫁いだ。天正17年(1589年)、豊臣秀吉に気に入られて、奉公するように請われたが断り、のちの利休の自害の遠因になったという説がある。夫が没すると、実家に戻った。
  • 三(生没年不詳)
    三女。母は宝心妙樹。従弟にあたる石橋良叱に嫁いだ。三の逸話は一説には彼女のこととも言われる。
  • 吟(生没年不詳)
    四女。母は宝心妙樹。天正12年(1584年)、本能寺の僧侶円乗坊宗円古市宗円・玉堂)に嫁ぐ。
  • 不明(生没年不詳)
    五女か。魚屋与兵衛に嫁いだ。
  • 亀(かめ、生年不詳 - 慶長11年10月29日1606年11月29日))
    末女、六女か。名は長(ちょう)とも。天正4年(1576年)ごろ、のちに利休の養子となる少庵を婿とした。少庵との間には宗旦をもうけている。利休が秀吉の怒りを買って堺に蟄居する際に、歌を亀に残している。また夫婦仲は良好ではなかったようで少庵とは別居していたが、息子・宗旦が利休に連座しようとした際には別居先から駆けつけている。

また、偽書『南方録』によれば、三・亀を除くいずれかの女子が、天正19年1月18日1591年2月11日)に自害したという。

千利休の展覧会[編集]

千利休を題材にした作品[編集]

小説
映画
テレビドラマ
テレビドラマ(脇役で登場)
漫画
音楽

利休が登場した作品[編集]

映画
テレビドラマ
  • 相棒 (2009年 Season8 第10話)千利休の死の謎について、「幻の茶器」の存在があったという内容。
漫画
テレビアニメ
  • 『ねこねこ日本史』(Eテレ、声:小林ゆう) - 上記の漫画をアニメ化。
ゲーム
  • Fate/Grand Order』(声:園崎未恵) - 期間限定イベント『ぶっちぎり茶の湯バトル ぐだぐだ新邪馬台国 〜地獄から帰ってきた男〜』に登場。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近年、日本茶道史研究家の中村修也文教大学教授)は『時慶記』の記述や豊臣秀吉発大政所宛書状の内容などを論拠として、利休はこの時死なずに失踪し、消息不明となったという説を唱えている[18]
  2. ^ 桑田忠親は、「ある長編の歴史小説で試みられた作家のフィクションであって、史実ではない」と否定している[29]。なお、その歴史小説とは、野上彌生子『秀吉と利休』を指す。
  3. ^ 毘沙門町および葭屋町通元誓願寺下ル町の晴明神社の近くにあったという。また『聚楽古城図』(国立国会図書館・広島県立図書館など蔵)によれば、聚楽第北御門横の元誓願寺通下る大宮通東付近にあったと推定される。

出典[編集]

  1. ^ 宮本義己「利休の登場」、米原正義編『千利休のすべて』、新人物往来社、1995年、38頁。
  2.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13
  3.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14
  4. ^ 桜井英治『日本の歴史十二 室町人の精神』(講談社、2001年)
  5.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61, 80-81
  6.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61-63
  7.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66-82
  8. ^ 『松屋会記』に天文6年(1537年)9月13日の「京都与四郎」による茶会の記述に「宗易事也」と加筆されている。宗易は利休の別名なので、これをもって利休が16歳の時に茶会を開いたとされたが、今では別人による茶会だと考えられている(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25
  9.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119, 128, 142, 233
  10. ^ 今谷明『戦国三好一族』(新人物往来社、1985年)
  11.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114-115
  12.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28
  13. ^ 朝尾直弘他『堺の歴史 都市自治の源流』(角川書店、1999年)
  14. ^ 表千家北山会館「織田信長黒印状 千利休宛」『家元に伝わる茶の湯の道具 表千家歴代ゆかりの掛物』2012年
  15.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84
  16.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95
  17.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195-198
  18. ^ 『日経大人のOFF』2013年12月号、『利休切腹』(洋泉社・2015年)【異説あり】千利休 切腹してない?「死後」に茶をたてた記述■九州へ逃れた説『朝日新聞』朝刊2018年5月14日(文化の扉面)
  19. ^ 勧修寺晴豊『晴豊公記』第七巻、天正19年2月26日条(1591年4月19日)
  20. ^ 吉田兼見『兼見卿記』巻十六、天正19年2月26日条(1591年4月19日)
  21. ^ 多聞院日記』巻三十七、天正19年2月28日条(1591年4月21日)
  22. ^ 平直方『夏山雑談』巻之五、寛保元年(1741年)
  23. ^ 吉田孫四郎雄翟 口述、千代女 書留『先祖等武功夜話拾遺』巻七、寛永15年(1638年)
  24. ^ 笠原一男編集『学習漫画 人物日本の歴史〈12〉織田信長・豊臣秀吉・千利休―安土・桃山時代』集英社
  25. a b 『南方録』第七巻・滅後
  26. ^ 『秀頼公御小姓古田九郎八直談、十市縫殿助物語』承応2年(1653年)
  27. ^ 吉田孫四郎雄翟 編『武功夜話』巻十七、寛永15年(1638年)
  28. ^ 杉本捷雄『千利休とその周辺』淡交社、1970年
  29. ^ 桑田忠親『千利休―その生涯と芸術的業績』中央公論社、1981年
  30. ^ 芳賀幸四郎『千利休』(吉川弘文館、1963年)
  31. ^ 米原正義『天下一名人千利休』(淡交社、1993年)
  32. ^ 児島孝『数寄の革命―利休と織部の死―』(思文閣出版、2006年)
  33. ^ 会田雄次・山崎正和対談「利休が目指し、挫折したもの」(『プレジデント』27(9) 《特集》千利休、1989年9月)
  34. ^ 岡倉天心薯『茶の本国立国会図書館
  35. ^ 千利休薯『利休百会記』岡山大学付属図書館
  36.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p. 135-138
  37.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35
  38.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15年), p. 175
  39. ^ 『細川家記』(東京大学史料編纂所所蔵)
  40. ^
    • 江岑宗左『千利休由緒書』承応2年(1653年)
    • 国枝清軒『武辺咄聞書』延宝8年(1680年)
    • 山田宗徧『茶道要録』付録 元禄4年(1691年)
    • 成島司直「千利休罪科付格言の事」(『改正三河後風土記』巻第二十九)天保4年(1833年)
    など。
  41. ^ 千利休茶の湯館(2018年6月26日閲覧)
  42. ^ 了々斎宗左『千家系譜』文化元年(1804年)
  43. ^ 江岑宗左『千利休由緒書』承応2年(1653年)。『墨海山筆』巻二十二所収の「利休伝」(東京大学史料編纂所架蔵)は『千利休由緒書』の写しとされ、若干の異同がある。
  44. ^ 芳賀幸四郎『千利休』吉川弘文館、1963年。
  45. ^ 村井康彦『千利休』講談社、2004年。
  46. ^ 中村修也「『源流茶話』注釈(二)」文教大学教育学部紀要38、2004年。
  47. ^ 山上宗二『山上宗二記』天正16年(1588年)
  48. ^ 神津朝夫『千利休の「わび」とはなにか』(角川書店、2005年)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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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 no Rikyū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Sen no Rikyū by Hasegawa Tōhaku

Sen no Rikyū (千利休, 1522 – April 21, 1591), also known simply as Rikyū, is considered the historical figure with the most profound influence on chanoyu, the Japanese "Way of Tea", particularly the tradition of wabi-cha. He was also the first to emphasize several key aspects of the ceremony, including rustic simplicity, directness of approach and honesty of self. Originating from the Sengoku period and the Azuchi–Momoyama period, these aspects of the tea ceremony persist.[1] Rikyū is known by many names; for consistency, he will be referred to as Rikyū in this article.

There are three iemoto (sōke), or 'head houses' of the Japanese Way of Tea, that are directly descended from Rikyū: the OmotesenkeUrasenke, and Mushakōjisenke, all three of which are dedicated to passing forward the teachings of their mutual family founder, Rikyū. They are collectively called san senke.[2]

Early life[edit]

Rikyū was born in Sakai in present-day Osaka Prefecture. His father was a warehouse owner named Tanaka Yohei (田中與兵衛), who later in life also used the family name Sen, and his mother was Gesshin Myōchin (月岑妙珎).[3] His childhood name was Yoshiro (與四郎).[4]

As a young man, Rikyū studied tea under the townsman of Sakai named Kitamuki Dōchin (1504–62),[5] and at nineteen, through Dōchin's introduction, he began to study tea under Takeno Jōō, who is also associated with the development of the wabi aesthetic in tea ceremony. He is believed to have received the Buddhist name Sōeki (宗易) from the Rinzai Zen priest Dairin Sōtō (1480–1568) of Nanshūji temple in Sakai.[6] He married a woman known as Hōshin Myōju (d. 1577) around when he was twenty-one.[7] Rikyū also underwent Zen training at Daitoku-ji temple in Kyoto. Not much is known about his middle years.

Later years[edit]

In 1579, at the age of 58, Rikyū became a tea master for Oda Nobunaga[8] and, following Nobunaga's death in 1582, he was a tea master for Toyotomi Hideyoshi.[9] His relationship with Hideyoshi quickly deepened, and he entered Hideyoshi's circle of confidants, effectively becoming the most influential figure in the world of chanoyu.[10] In 1585, because he needed extra credentials in order to enter the Imperial Palace so that he could help at a tea gathering that would be given by Hideyoshi for Emperor Ōgimachi and held at the Imperial Palace, the emperor bestowed upon him the Buddhist lay name and title "Rikyū Koji" (利休居士).[11] Another major chanoyu event of Hideyoshi's that Rikyū played a central role in was the Grand Kitano Tea Ceremony, held by Hideyoshi at the Kitano Tenman-gū in 1587.

His chashitsu Tai-an at the Myōki-an, Kyoto
Suigetsu (Intoxicated by the Moon) paper hanging scroll for a tea ceremony by Sen no Rikyū, c. 1575
Flower vase Onkyoku, by Sen no Rikyū, 16th century

It was during his later years that Rikyū began to use very tiny, rustic tea rooms referred as sō-an ('grass hermitage'), such as the two-tatami mat tea room named Tai-an, which can be seen today at Myōki-an temple in Yamazaki, a suburb of Kyoto, and which is credited to his design. This tea room has been designated as a National Treasure. He also developed many implements for tea ceremony, including flower containers, teascoops, and lid rests made of bamboo, and also used everyday objects for tea ceremony, often in novel ways.

Raku teabowls were originated through his collaboration with a tile-maker named Raku Chōjirō. Rikyū had a preference for simple, rustic items made in Japan, rather than the expensive Chinese-made items that were fashionable at the time. Though not the inventor of the philosophy of wabi-sabi, which finds beauty in the very simple, Rikyū is among those most responsible for popularizing it, developing it, and incorporating it into tea ceremony. He created a new form of tea ceremony using very simple instruments and surroundings. This and his other beliefs and teachings came to be known as sōan-cha (the grass-thatched hermitage style of chanoyu), or more generally, wabi-cha. This line of chanoyu that his descendants and followers carried on was recognized as the Senke-ryū (千家流, 'school of the house of Sen').

A writer and poet, the tea master referred to the ware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tea ceremony, saying, "Though you wipe your hands and brush off the dust and dirt from the vessels, what is the use of all this fuss if the heart is still impure?"[12]

Two of his primary disciples were Nanbō Sōkei (南坊宗啓; dates unknown), a somewhat legendary Zen priest; and Yamanoue Sōji (1544–90), a townsman of Sakai. Another was Furuta Oribe (1544-1615), who became a celebrated tea master after Rikyū's death. Nanbō is credited as the original author of the Nanpō roku, a record of Rikyū's teachings. There is, however, some debate as to whether Nanbō even existed, and some scholars theorize that his writings were actually by samurai litterateur Tachibana Jitsuzan (1655-1708), who claimed to have found and transcribed these texts.[13] Yamanoue's chronicle, the Yamanoue Sōji ki (山上宗二記), gives commentary about Rikyū's teachings and the state of chanoyu at the time of its writing.[14]

Rikyū had a number of children, including a son known in history as Sen Dōan, and daughter known as Okame. This daughter became the bride of Rikyū's second wife's son by a previous marriage, known in history as Sen Shōan. Due to many complex circumstances, Sen Shōan, rather than Rikyū's legitimate heir, Dōan, became the person counted as the 2nd generation in the Sen-family's tradition of chanoyu (see san-Senke at schools of Japanese tea ceremony).

Rikyū also wrote poetry, and practiced ikebana.

One of his favourite gardens was said to be at Chishaku-in in Kyoto.[15]

Death[edit]

Although Rikyū had been one of Hideyoshi's closest confidants, because of crucial differences of opinion and because he was too independent, Hideyoshi ordered him to commit ritual suicide.[16] One year earlier, after the Siege of Odawara (1590), his famous disciple Yamanoue Sōji was tortured and decapitated on Hideyoshi's orders. While Hideyoshi's reason may never be known for certain, it is known that Rikyū committed seppuku at his residence within Hideyoshi's Jurakudai palace in Kyoto in 1591 on the 28th day of the 2nd month (of the traditional Japanese lunar calendar; or April 21 when calculated according to the modern Gregorian calendar), at the age of seventy.[4][17]

金毛閣山門供養之偈.jpg

According to Okakura Kakuzō in The Book of Tea, Rikyū's last act was to hold an exquisite tea ceremony. After serving all his guests, he presented each piece of the tea-equipage for their inspection, along with an exquisite kakemono, which Okakura described as "a wonderful writing by an ancient monk dealing with the evanescence of all things". Rikyū presented each of his guests with a piece of the equipment as a souvenir, with the exception of the bowl, which he shattered, as he uttered the words: "Never again shall this cup, polluted by the lips of misfortune, be used by man." As the guests departed, one remained to serve as witness to Rikyū's death. Rikyū's last words, which he wrote down as a death poem, were in verse, addressed to the dagger with which he took his own life:

Welcome to thee,
O sword of eternity!
Through Buddha
And through Daruma alike
Thou hast cleft thy way.[18]

When Hideyoshi was building his lavish residence at Fushimi the following year, he remarked that he wished its construction and decoration to be pleasing to Rikyū. Hideyoshi was known for his temper, and is said to have expressed regret at his treatment of Rikyū.[19]

Rikyū's grave is located at Jukōin temple in the Daitoku-ji compound in Kyoto; his posthumous Buddhist name is Fushin'an Rikyū Sōeki Koji.

Memorials for Rikyū are observed annually by many schools of Japanese tea ceremony. The Omotesenke school's annual memorial takes place at the family's headquarters each year on March 27, and the Urasenke school's takes place at its own family's headquarters each year on March 28. The three Sen families (Omotesenke, Urasenke, Mushakōjisenke) take turns holding a memorial service on the 28th of every month, at their mutual family temple, the subsidiary temple Jukōin at Daitoku-ji temple.

Rikyū's Seven High-Status Disciples[edit]

The Rikyū Shichitetsu (利休七哲) ('Seven Foremost Disciples', 'Seven Luminaries') is a set of seven high-ranking daimyō or generals who were also direct disciples of Sen no Rikyū: Maeda ToshinagaGamō UjisatoHosokawa TadaokiFuruta Oribe, Makimura Toshisada, Dom Justo Takayama, and Shimayama Munetsuna. The seven-member set was first mentioned by Rikyū's grandson Sen no Sōtan. In a 1663 list given by Sōtan's son (and fourth-generation head of the Sen Sōsa lineage of tea masters), Maeda Toshinaga is replaced by Seta Masatada.

In popular culture[edit]

Rikyu (利休Rikyū, 1989) is Hiroshi Teshigahara's film about the master. The film focuses on the late stages of life of Rikyū, during the highly turbulent Sengoku period of feudal Japan. The film won a number of awards.

Death of a Tea Master (千利休 本覺坊遺文Sen no Rikyu: Honkakubô ibun, also known as Sen no Rikyū: Honkakubo's Student Writings) is a 1989 biographical drama film directed by Kei Kumai with Toshiro Mifune as the lead character. It is based on the events surrounding his ritual suicide. It was entered into the main competition at the 43rd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in which it won the Silver Lion.

Hyouge Mono (Hyōge Mono (へうげもの, 'Jocular Fellow')) is a manga written and illustrated by Yoshihiro Yamada. Hyōge Mono is a fictional retelling of the era in which Sen no Rikyū lived, and how close tea culture was to the world of politics. It won several comic awards and was adapted into an anime series in 2011.

Ask This of Rikyu (利休にたずねよRikyū ni tazuneyo) was made in 2013 by Mitsutoshi Tanaka, starring kabuki actor Ichikawa Ebizō XIRei DanAkira Emoto, and Seiji Fukushi. It is based on a novel by Kenichi Yamamoto.[20]

Sen no Rikyū is a character in the Sengoku Basara franchise, introduced in the 2015 game Sengoku Basara 4. Rikyū is portrayed with two split personalities - the peaceful and elegant Wabisuke, and the irreverent and aggressive Sabisuke – in reference to the philosophy of wabi-sabi that the actual Rikyū popularized. In the game, Rikyū is a former tea master to Toyotomi Hideyoshi, and he is on the run after Hideyoshi ordered him to commit ritual suicide.[21]

Sen no Rikyū is one of the main characters in Flower and Sword (Hana Ikusa (花戦さ, 'War of Flowers')), a 2017 tragicomical movie by Tetsuo Shinohara. The role of Rikyū is performed by Kōichi Satō.

Sen no Rikyū was added as a playable character to the game Fate/Grand Order in 2022 in the GUDAGUDA 7 event as a 5-star Berserker-class Servant. In Fate/Grand Order, he is illustrated as a female dressed in traditional Japanese clothing with white and grey hair. The Servant's Noble Phantasm animation shows him making tea and serving it to the enemy before dealing damage.

See also[edit]

Notes[edit]

  1. ^ Birmingham Museum of Art (2010). Birmingham Museum of Art : guide to the collection. [Birmingham, Ala]: Birmingham Museum of Art. p. 48. ISBN 978-1-904832-77-5.
  2. ^ "三千家分立 (The Breakup of the Three Houses)"茶の湯 (The Hot Water of Tea). Omotesenke Fushin'an Foundation. Retrieved 5 February 2023.
  3. ^ Rikyū Daijiten (Rikyū Encyclopedia). Tankosha, 1989. ISBN 4-473-01110-0.
  4. Jump up to:a b "The Urasenke Legacy: Family Lineage", in Urasenke website. Accessed May 16, 2006.
  5. ^ Anderson, Jennifer L. (1991). An introduction to the Japanese tea ritual. Albany,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 35. ISBN 0-7914-0749-7.
  6. ^ Nishibe Bunjo, "Zen priests and Their Concepts of Tea," p. 13, in Chanoyu Quarterly no. 13 (1976).
  7. ^ Rikyū Daijiten, entry for Hōshin Myōju
  8. ^ Anderson, p. 36.
  9. ^ Anderson, p. 37
  10. ^ Rikyū Daijiten entries for 当世の風体 (the trend of the age) and 豊臣秀吉の側近 (Toyotomi Hideyoshi's confidant).
  11. ^ "The Urasenke Legacy: Family Lineage", in Urasenke website. Accessed May 16, 2006.
  12. ^ Sadler, A. L. Cha-no-yu: The Japanese Tea Ceremony. Rutland, VT and Tokyo: Tuttle, 1962.
  13. ^ Rath, Eric C. "Reevaluating Rikyû: Kaiseki and the Origins of Japanese Cuisine" in The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 39, no. 1, winter 2013, pp. 67-96
  14. ^ Rikyū Daijiten
  15. ^ "Chishaku-in: A Kyoto garden of deep repose". 29 March 2014.
  16. ^ Ohki, Sadako; Yale University. Art Gallery (2009). Tea Culture of Japan. Yale University Art Gallery. ISBN 978-0-300-14692-9.
  17. ^ Okakura Kakuzo, The Illustrated Book of Tea (Okakura's classic with 17th-19th century ukiyo-e woodblock prints and a chapter on Sen no Rikyu). Chiang Mai: Cognoscenti Books. 2012. ASIN: B009033C6M
  18. ^ Okakura, Kakuzo, The Book of Tea pp 64-65. Toronto: Dover Publications. 1964.
  19. ^ Sansom, George (1961).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pp364,370.
  20. ^ IMDB
  21. ^ Sengoku Basara 4 official website

References[edit]

Further reading[edit]

External links[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