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8

Philo Kalia | 위르겐 몰트만 독서회 . 『살아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

(9) Philo Kalia | Facebook:
Philo Kalia
16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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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 독서회 일정을 알립니다.
교재: 『살아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대한기독교서회)

지난 20여 년 동안 여러 분이 아주 다양하게 “생명의 신학”을 내놓았다.
나는 여기서 억압당하지도 소외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에서 해방하여 생기를 되찾아 주고 또 우리를 생명의 환희로 채워 줄 초월성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제1부에서는 성서가 말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살피고,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헬라 철학과 종교 계몽주의로 기울어진 형이상학적 개념의 감옥으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제2부에서는 신적인 삶 속에서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모습을 그려볼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넓은 공간에서 또 미래의 시간대에서 활짝 꽃피어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감성의 영성 속에서, 하나님의 자유가 펼치는 넓은 영역 속에서, 경계를 뛰어넘는 사고와 생산적 상상력 속에서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모습을 그릴 것이다.(머리말에서)

5월 19일(60회), 제1부 제1장 “살아계신 하나님”(49-63)
5월 26일(61회), 제2장 “하나님의 본성”(64-95)
6월 2일(62회), 제3장 “그리스도의 역사에 나타난 살아 계신 하나님”(96-114)
6월 9일(63회), 제2부 제1장 “현세의 영원한 생명”(117-134)
6월 16일 – 휴강
6월 23일(64회), 제2장 “하나님의 기쁨이 부여하는 넓은 공간의 삶”(135-156)
6월 30일(65회), 제3장 “연대하는 삶에서 누리는 자유”(15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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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있는 자 누구든지 환영: ZOOM(ID: 380-389-5679), 오전 10.00-12.00시
*독서 범위가 비교적 적고 내용도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모든 분을 대화와 독서 나눔에 초대합니다.
Philo Kalia
26 May at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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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권좌”(Gnadenstuhl) 앞에서 묵상하기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희생을 감수하신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대로 아버지의 고통, 아들의 고난, 성령의 열정적 임재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교통하심의 비밀이다.
중세이후 교회의 “은총의 권좌”(Gnadenstuhl)는 이를 잘 드러낸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죽은 아들이 매달린 십자가의 가름대를 손에 쥐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을 띠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얼굴로 향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아들이 죽은 이후의 성토요일, 곧 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날에 벌어진 상황으로 숨죽이며 봐야 한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신비스런 침묵의 현장이다.
(몰트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 74-75)


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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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회] 신학 독서회(위르겐 몰트만 시작) - 어린이 심장을 가지고
5월 5일, 금!!, 10.00-12.00 
ZOOM(ID: 380-389-5679)
범위: 교재 <살아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의 머리말과 서론(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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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분:
(1)19-31: 강00님 / 홍00 님
(2)31-48: 차00님
*다른 분은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야고보서 4:5) - 성경에 이런 멋진 말씀이 있구나!
“오 나의 주 하나님,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제게 말씀해주십시오”(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기도문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물음만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곧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물음이다. 그는 이 물음을 통해 자신과 인간에 대해, 역사와 세계에 대해, 창조와 우주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곧 생명에 대해, 전체 생명에 대해, 생명의 그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나는 생명을 원한다. 그것도 ‘풍성한 생명’(abundant life)을 원한다. 나는 다른 생명체들도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소비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들,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모르는 긴 어둠, 빛이 왔으되 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꺼질 것만 같은 아주 작은 호롱불(촛불), 지구의 온 생명체들이 고통 받으며 죽지 않고 함께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생명(삶),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할까? 
신학이 인간 밖에 오랫동안 엄연하게 존재해온 생명체들과 더불어 사는 과제를 의식적으로 취한 적이 별로 없다. 생명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면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생명의 과제는 신학의 긴급한 과제이다.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0:10). ‘그들’은 지구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시대 분위기이지만 오늘 아침 다시 오물거리는 생명의 꿈틀거림, 생명의 환희를 공감하고 감화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