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4

Philo Kalia - 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Philo Kalia - *62회 신학독서회 후기 & 이동영 교수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새물결플러스, 2017)... | Facebook


이동영 교수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새물결플러스, 2017)

1.“우리가 하나님의 내적 위상을 살펴본다고 할 때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경험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넘어가 문제를 고찰해보자”(몰트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 105f.)

①“하나님의 내적 위상” - 하나님 자체(Gott an sich), 하나님의 존재자체(Being in itself)를 선험적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계시중심의 신앙심 높은 정통주의자들의 입장이 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전자의 존재론적 우선성(수위성)을 주장한다.

②“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 계시자체는 결국 계시경험을 통해서 인간세계에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주체의 경험중심적 근대신학의 특징이며 대표주자는 슐라이어마허일 것이다.

③“그러면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경험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넘어가 문제를 고찰해보자” - 몰트만의 입장이다. 몰트만은 근대적 사유방식을 수용하면서도 정통주의자들처럼 하나님 자체에 대한 사변을 끌어들이지 않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역사, 이 역사는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역사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다. 삼위일체론을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시작하는 것이 몰트만 삼위일체론의 고유한 특징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본성상의 삼위일체, 즉 정통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묻는다. 그의 답변은 “송영으로 맛보는 종말론적 선취”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태초로부터 지금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아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시, 음악, 미술, 춤, 마임, 서예...)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2. 한국 신학계에선 1990년도 후반부터 삼위일체론이 소개, 논의되면서 번역과 저술이 한 달에 한 권씩 출간(좀 과장)되면서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상승세를 탔고, 마침내 삼위일체론의 꽃이라고 생각했던 ‘송영’, 곧 삼위일체 미학이 이동영 교수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정말 놀랍고 기쁜 일이다. 

이 책을 발견하고 난 환희와 희열감에 한참 젖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내심 선물받고 싶었는데... 기다리다가 구입해 마냥 옆에 놓고 보고만 있다 어제 읽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저자는 강의한 것을 책으로 냈다고 밝혔다. 어려운 내용이 쉽게 읽혀지는 비결이 여기에 숨어 있는가 보다.
총 18가지 주제로 서술했으니 매 주제당 평균 17쪽 분량이고 책의 편집도 그렇게 촘촘하지 않아 전철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

3. 이 책에서 이동영 교수의 문체는 단문이다. 단문에 확신에 찬 내용들이 단언적으로 표현된다. 의심이나 회의, 이것일까 저것일까, 망설이는 주저함 없이 정면에서 꼴대(골대)를 향해 거세게 거침없이 들어오는 축구공의 위력이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부터
“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 즉 우리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9)
“신학은 신론이며, 이러한 신론은 삼위일체론이다.”(21)
“왜 신학은 송영인가?”
“우리의 경험은 말씀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한다”(48)
“이성중심적 신학이야말로 계몽주의 이래 서방 신학의 가장 심대한 오류다.”(67)
... “이것은 비성경적인 신학적 사유다.”(252)

4. 삼위일체론적 교의학 구성을 위해 도표로 제언한 구상은 대단히 창의적이다.(131-132)

5. 한국교회 안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무관심에 대한 저자의 苦言은 새겨 들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상황을 살펴보면 삼위일체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및 삶과는 무관한 하나의 ‘장식 교리’로서 단지 예배 말미에 목회자의 ‘축도’ 속에서 그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119)
그리고 한국에서 그동안 정통주의 신약학자 이상근이 ‘불가지론’이라고 언급한 것뿐 아니라, 민중신학자 안병무 또한 성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한다고 했었구나.
저자가 즐겨 언급하는 벤자민 워필드와 헤르만 바빙크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공헌은 나에게 매우 새롭다.

6. 길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을 간명하면서도 명쾌하게 서술한 부분은 제12장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 그 이해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종속론에 대하여, 아프로프리아치오 개념을 양태론에 대하여 적용되었다는 설명은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하여 저자는 칼 라너의 테제를 이렇게 수정 제안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으며, 더욱더 부요하다”(265) 이 명제는 저자의 다음의 시선과도 부합한다. “계시가 하나님의 본질로 완전히 소급(환원)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님의 계시로 완전히 소급(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118) 그렇지만 칼뱅이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 관계하여 어떠한 분이 되시고자 하는가에 있다.”(<강요>, III,2,6)라고 했다면, 저자의 주장은 존재론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송영론적 찬양의 성격의 주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7.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필립 멜랑히톤)
“중요한 것은 증명이 아니라 찬양이다.”(볼프강 필립)

이동영 교수는 삼위일체가 교리 지식으로만 가르쳐서는 안 되고 우리 예배의 중심에 들어와야 한다고 거듭거듭 강조하지만, 이 책이 논의와 주장만이 아니라 송영을 통해 재구성된 삼위일체론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남는다. 칼뱅도 인용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시적 표현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할 때,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찬란한 영광 속으로 나를 휘감고 들어가셨다. 또한 내가 삼위의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찬란한 영광으로 다시 나를 사로잡는다.”(177)
 
8. 끝으로 제18장의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의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에서 이동영 교수가 사자후처럼 토하는 음성을 경청하면서 저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구원의 역사 속에서 거룩한 세 위격들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사귐을 인간의 이상적 공동체의 전형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착취와
인종차별과 같은 억압적인 지배체제에 대항하여
‘사귐’과 ‘자유’와 ‘평등’과 ‘연대’와 ‘환대’를 지향하는
‘사회 체제’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283)



35 comments
Most relevant

  • Taechang Kim 솔직히 저 자신의 체감을 말씀
    드리면 이교수님과 심목사님 두분께서 공유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는 부분이 아직 헤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서양전통 형이상학적 사유의 흔적이 뿌리박힘되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아쉬움입니다. 신앙은 대상화에서 벗어나 상통상화화(저 자신은 굳이 perichoresis를 .상화상통으로 번역해 써 왔고 공공한다의 뜻뿌리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는 서로 주체됨으로의 위상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인식처럼 주체의 대상파악한다는 위상역학의 굴레를 벗어나 서로가 함께 주체로 상화상통하는 위상융합의 차원개신-지평개신이라고 체감 체험 체득해 왔습니다.
    잘못 생각하는 거라면 가르쳐 주십시오.
    5
    • Philo Kalia
      Taechang Kim (1)Credo 와 Cogito를 같은 문법으로 읽으면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하나의 object)롤 여길 위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할 때마나 그분은 비대상적인 대상, 대상화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역설로 말하는데, '대상'이 들어가는 한 그말가지고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학의 주제(suject matter), 신학의 사태Sache)란 말도 써봅니다.; (2)기초신학에서 Credo를 흔히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Credere Deum (신앙의 내용으로서의 하나님); Credere Deo(하나님 자신이 신앙의 근거라는 뜻); Credere in Deum(신앙의 목표로서의 신) 신앙은 인격적(실존적) 관계를 늘 전제하고 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객관적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신앙은 상호 주체적이고, 상관적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상화상통', 위상융합이라는 말, 참으로 좋습니다.
    • Philo Kalia
      Taechang Kim 송영과 찬양은 주객도식을 완전 넘어선 미적 위상융합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
    • 이정만
      Taechang Kim 카톡 줌에서 교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례이지만 한 말씀드립니다.
      신에게 하는 예배만이 인간의 오만한 이성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아타나시우스의 가르침인데 저는 이길을 따릅니다.
    • Taechang Kim
      저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렸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시면 언제든 어데서나 가르치심을 받아 반성할 자세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객도식을 완전히 넘어선 미적위상융합을 저도 다른 어떤 경지보다 중시하기 때문에 심광섭목사님의
      강독모임에 열심히 참석해 왔으며, 신에게 드리는 진성진의의 예배만이 인간의 오만한 이성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씀글에 담겨진 이정만선생님의 깊으신 뜻을 잘 새기겠습니다.
      두분의 진정한 말씀글에서 생명개신의 새로운 지평열기의
      깨우침을 얻게 되어 더욱 아름다운 대화를 이어 나갈 힘을 얻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